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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부산 7월 6일 강의 침멀리 08 구약신학 - 왕 p136강의[신학]

부산 7월 6일 강의 침멀리 08 구약신학 - 왕 p136

이름 : 관리자(IP:124.59.87.52)

100706 침멀리 구약신학 - 왕

관리자(IP:124.♡.87.52)

10-07-06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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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4.♡.87.52)

10-07-11 20:39

부산100706a침멀리08구약신학-왕a

20100706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8-왕
(강의:이근호 목사)

110페이지 [왕]에 대해서 계속 해봅시다. 지난 시간에 사사기에서 사사들을 뽑는 방법과 왕을 세우는 방식이 다르다 했지요. 사사에서는 하나님이 왕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왕 되는 흔적이 계속 이어져야 이스라엘 됩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위하여 적들이 배치돼있다는 이런 개념은 쉽게 말씀드리면, 오늘날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이단들을 교회 주변에 배치해야 된다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사사기에서 드러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왕 되기를 싫어한다는 요소가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내장돼있죠. 본인은 그걸 의식을 못하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 믿는다는 이 착함, 이 선함 이것이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왕 되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아마 우리가 그런 인간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려울 때는 ‘하나님이 우리 왕이시여.’라고 나오지만 편할 때 특별히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자기 자력으로 살 수 있다고 여길 경우에는 더 이상 하나님 자체가 필요치 않은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왕 됨의 하나님이 아니라 힘을 제공하는 하나님이 돼요. 이건 전능하심과 관련돼있는데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요청한 것은 우리에게는 없는데 우리 바깥에 하나님만이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그 무엇이 탐이 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왕이라고 섬기고 싶은 그런 생각이 없는 겁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힘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자기 자신을 포기할 마음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생각하는 힘, 힘을 주시는 하나님 말고 진짜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힘을 달라고 요청할 수 없을 정도로 너희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왕과 인간 사이에는 왕과 신하, 왕과 종 이런 관계가 상식적인 관계인데 이스라엘에서는 특별하게 왕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을 용서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왕으로서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는 것은 우리를 일단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그 죄가 어떻게 용서받고, 죄인이면서도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느냐? 그 점에 대해서 보여주는 전능하심인 반면에 인간들은 나 자신은 별로 하자가 없는데 아쉬울 때, 어려울 때, 생존이 힘들 때 힘을 줄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을 전능하심으로 보는 거예요. 이미 하나님 계획이 다르죠.

우리 인간들은 자기 자신은 건전한데 단지 아쉬운 게 뭐냐? 생존의 힘, 여러 가지 외적을 물리칠 힘이 없어서 힘을 어디서 찾고 싶다? 하나님 있잖아. 하나님은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힘을 원하는 하나님은 어디서 나온 하나님이냐 하면, 바로 애굽에서 믿던 이방인의 신이에요.

결국 하나님께서 사사기를 거치는 것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할 때 하나님 진짜 신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의 차이를 너희가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 모르면 진정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는 입장이에요.

지난 시간에 여기 부산에서 할 때 주제가 ‘동행’이었지요. 동행한다는 것은 다메섹 이야기했고, 여러 가지 이야기했습니다만 다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이미 주도권이 우리한테는 없고 여호와 하나님께 넘어간 상태죠.

이런 사사기를 거쳐서 하나님께 문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출애굽, 애굽에서 나올 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그 말씀의 취지를 도대체 못 알아먹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그걸로 됐지. 내가 여호와 믿고 사랑하면 됐지 뭐가 문제냐?’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랑, 믿는다는 것이 부실해요. 자기가 문제가 뭔지 모르는 거예요.

공관복음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는 천국이란 말 했죠. 천국이란 말할 때 사람들은 그걸 두 가지 요소로 잡아서 천국을 이해합니다. 하나는 시간적인 요소와 하나는 공간적인 요소에요. ‘천국이 어디 있습니까?’ 묻는 것과 ‘천국이 언제 옵니까?’ 그 두 가지 문제로 천국을 다루는 겁니다. 천국이 어디 있는지, 언제 오는지만 알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천국 갈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도 주님께서 이미 아셨죠.

그런데 그걸 비껴 가버립니다. ‘천국이 어디 있다고 해서 네가 들어갈 수 있다고 싶으냐?’ 이 말입니다. 천국이 언제 온다고 해서 네가 들어갈 수 싶으냐 말이죠. 세례요한이 도끼 이야기했는데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왜 했습니까? 장소문제가 아니고 시간문제가 아닙니다. 알아도 못가요. 천국에 들어갈 인간이 돼야 되는데 그게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네 육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육과 영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라는 취지에서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하늘나라가 계속 쏟아지죠.

‘천국이 저기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까? 저기 있습니까? 내가 저리고 가겠습니다. 내가 언제 오던지 맞이하겠습니다.’ 할 때 그렇게 생각하는 너한테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본인이 천국 갈 자격도 안 되고 권력도 없고 못 간단 말이죠. 그러니까 천국 못 가라고 다가오는 그 힘, ‘너 같은 인간은 천국에 안 넣어주거든.’라고 쏟아내는 힘 자체가 사건 벌어지는 현장이 천국이에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부모로부터 받은 귀 있잖아요. 이 귀 문제 있다는 겁니다. 귀만 문제 있겠습니까? 귀는 몸에 달려있는데. 네가 눈이 밝으면 모든 것이 보인다. 네 마음은 눈의 밝음에 있다. 눈을 밝아라. 하고 뒤에 나오는 말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한쪽을 좋아하면 한쪽을 미워하게 돼있고,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면 재물을 미워하게 돼있고, 돈을 사랑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미워하게 돼있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산상설교나 누가복음 다른 데서 하시는 이유가, 우리의 눈이 어둡다는 말은 우리 마음 전체가 어둡다는 이야기입니다. 눈이 밝으면 마음이 밝았다 했거든요.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이미 보물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전에 강의에서 이야기했는데 항상 예배드리면서 감사하다가 여기서 돈 10억 떨어지면 그것 주우러 갈 거다 이 말이죠.

누가 이야기했던가? 오용익 목사님인가? ‘돈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 오면서 목사님한테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받으니 본인들이 예배시간에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러니 끝나고 나면 후다닥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교회란 것은 바꾸기, 매개라 하는데 매개는 헤겔 철학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매개라 하는 것은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갈 때 중간에 달라지지 않고서는 갈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매개체를 통해서 그냥 못 가고, 쉽게 말해서 중보자, 매개를 우회해서 갈 수 없고 매개체를 거쳐서 가야 되는데 매개체를 거쳐서 갈 때는 이미 이쪽 가기 전의 생각은 모조리 전부다 거부당한다 이 말입니다.

매개를 통과하란 말은 매개체 만나기 이전의 생각했던 것은 애당초 포기하라 이 말입니다. 포기하려면 매개체를 만나서 뭘 포기할 걸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야 매개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자신이 매개체란 거예요.

헤겔이 이야기했는데 들어보세요. 나란 인간이 있으면 신을 상상하죠. 이 신을 내가 상상했죠. 왜냐하면 여기 B, C 아무리 있어도 신들이 다 다르니까. 각자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신이 있으니까 그 신은 자기가 상상한 거잖아요. 그럼 자기가 상상한 신에 가려면 여전히 매개체가 있는데 그 매개체를 자기가 만들어요.

‘내가 성경 하루에 석 장 읽으면 하나님이 복 줄 거야.’ 이게 뭔 뜻입니까? 성경 석 장 안 읽은 지금 나와 성경을 매일 석 장 읽었던 내가 나에 대한 나의 매개체가 돼버려요. 그래서 석 장을 뗐다 하면, ‘나는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간다.’라고 누가 지어내요? 본인이 지어낸 거예요.

그런데 옆에 있는 B라는 사람은 하루에 열 장 읽어버려요. 석 장 읽는 것은 이 사람한테는 지옥 갈 사람이에요. ‘세상에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 줬는데 석 장밖에 못 읽어. 이 나쁜 놈아. 열 장 읽어야지.’ 이 사람 매개체는 누가 만들었어요? 자기가 만들었어요. 그런데 여기 이초석이 있네. 이초석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초대교회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어떻게 천당 가?’ 이러거든. 이초석 알죠? 이상한 사람. 그 사람한테는 병 고침, 병 나음을 입어야 돼요.

이 매개 어디서 인용한 겁니까, 어디서 참고하겠어요? 이 두꺼운 성경책 참고하겠지요. 소위 개혁주의니까, 성경중심이니까. 성경중심으로 백날 이용해도 그 매개체 만드는 생산자는 누굽니까? 본인이 성경을 지키는 것만 골라서 해놓고 이게 매개체라는 거예요.

그런데 더 무서운 진짜 마귀의 일은 뭐냐? 이 매개체를 십자가로 잡는 거예요. 맞는 겁니까? 이 십자가 누가 생각한 십자가에요? 자기가 만든 십자가입니다. 시어머니한테 교회 갔다고 머리 쥐어뜯기는 것도 십자가고, 개척교회해서 핍박 받은 것 십자가고. 전부다 자기가 만든 십자가에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도마와 만난 십자가는 뭐냐 하면, 도마한테 뭘 요구한 게 아니고 도마한테 뭘 보여줬잖아요. 하나님의 매개체가 직접 도만한테 손의 못 자국 보여주고, 배의 창 자국 보여줬죠. 그때 도마가 험담했습니까? 전도했습니까? 그 앞에서 뭐라 했어요? ‘주는 나의 주시오 하나님이시오.’ 했지요. 주는 쪽에서 제시한 피와 살, 이것은 도마가 자기가 나섬으로 된 게 아닙니다. 자기가 칼 찔러서 피 낸 게 아니에요.

매개는 어디서 온다 말이에요? 자기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그냥 와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그걸 통과하란 거예요. 성령을 받아서 통과하라. 인간의 지혜로서는 그걸 통과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매개는 너무 어리석게 보이고, 너무 부끄럽게 보이기 때문에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그걸 믿는다는 게 아이큐 150이 십자가 믿는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거예요.

철학박사가 십자가 믿는다는 게 말이 안 되고, 신학박사가 십자가 믿는다는 게 말이 안 되고 오천 명, 육천 명 목회하는 자가 십자가만 외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왜? 너무 초라하고 부끄러운 일이니까. 자기 교회 자랑해야지 십자가를 왜 자랑합니까? 기도해서 이천 명 모았는데, 사오천 명 모았는데 그걸 자랑해야지. 옛날에 육이오 때 폭탄 맞아도 살아난 그것 자랑해야지 왜 십자가 자랑합니까?

십자가 기능이 뭐냐? 일체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는 모두 차단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구약에서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해서 신은 숨어있고 그 중간 매개가 율법이었습니다. 맞죠? 십계명. 그런데 십계명이 뭉쳐보니까 눈에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돼버린 거예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 강의했지만 눈에 보이는 주님인데 못 알아보는 거예요.

결국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본다고 하니까 못 보는 거예요. 하나님을 보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막상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니까 안 보이는 거예요. 이상한 일이죠. 그렇게 보고 싶다더니 보란 말이죠. ‘주여 하나님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봐라.’ ‘어디 계시는데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뭘 보여 달라는 거야. 신학 해석학이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믿으면 될 걸 해석하니까 문제 되는 거예요.

예수 믿기 전의 도마는 하나님을 보여 달라. 보여줬지요. 보여주니까 안 믿고 해석하는 거예요. 해석한다는 말은 결국 안 믿어진다는 겁니다. 안 믿어지니까 최대한도로 접근해보려고.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쪽에서 구성되어서 내 쪽의 선이해로, 칸트철학입니다. 인간의 모든 감각들, 내 속의 이성으로 정리해서 이 정리된 걸 다시 한번 세계와 신과 인간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해석하겠다. 선이해가 작용하는 거예요.

전에 이야기했죠. 들뢰즈란 철학자는 칸트를 보고 난 뒤에 네 해석이 잘못됐다면 어디서 옳은 걸 어떻게 찾겠느냐? 이건 개혁주의신학보다 더 낫지요. 해석하는 네가 틀렸다면 도대체 무엇이 옳다고 인정할 수 있는 안목이 어디서 작용하겠느냐는 문제를 들뢰즈가 거론한 거예요.

이건 모든 인간들의 동일성 철학을 주장하는 걸 깨부순 거예요. A는 A고, A는 B가 아니다. 이거는 무조건 맞다. 들뢰즈가 무조건 맞는 게 어디 있느냐? 뭐가 무조건 맞는데. 그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거든요. 동일성, 배중률 이런 게 있단 말이에요. 그건 무조건 맞다. 이걸 수학에서 공리라 해요. 이거는 따지지 말고 믿으라 하는 거예요. 인간에서 나온 게 옳은 게 뭐가 있는데.

매개 중요합니다. 인간이 매개를 통과하기 전의 그 자아는 통과하면서 매개체에 의해서 또는 중보자에 의해서 다른 인간으로 바뀌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매개를 무시하려 해요. 무시하면 무슨 문제가? 천국과 신은 뭐로 들어간다 했습니까? 천국이 어디에 오십니까, 언제 오십니까? 어느 장소에 계십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해도 예수님은 그냥 선지자 매개였어요. 빨리 비켜라 이 말이에요. 이미 익히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그대로 가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알아서 안 정보와 지식으로 천국에 골인하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네가 인간이 되어라.’ 무슨 인간? 나와 함께 있는 인간이 되어라. 어떻게? 너를 부인하고 네 십자가 지라. 네 십자가 지라는 말은 뭔 뜻입니까? 죽으란 말이죠. 죽은 시체가 되고 그 뒤에 나를 따라오라. 그러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베드로가 이 말을 오해해서 자기가 죽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도 안 돼요. 처소가 마련돼야 돼요. 왜 그렇게 복잡해요?

왜 복잡하냐 하면, 인간은 천국 갈 권리나 자격이 없는 채 천국과 구원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걸 다 뜯어고치려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구원될 수 없는 자가 구원된 거고, 천국 갈 수 없는 자가 천국 가는데 이 생각을 우리가 만들어내려면 우리가 자체적으로 어떤 논리적인 모순에 빠지거든요. ‘주여 내가 구원될 수 없는 자격자라고 생각하면 구원시켜주시겠습니까?’라고 또 수작이 나온다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뭔 소리냐 하면, 하여간 가만있어라. 내가 일을 일으키면 너희들 죄만 끄집어내면 된다는 거예요. 이방나라를 배치하게 되면, 이방나라가 왜 우리 이스라엘에 걸쳐있는지 이유를 몰랐지요. 그런데 사람이 배부르다보니까 이젠 하나님보다 이방나라 신이 더 좋아진다는 말이죠. 이방나라가 쳐들어올 때, 깨질 때, 아플 때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했구나. 그런데 ‘하나님을 멀리 했구나. 빌자.’ 하는 그것도 문제에요.

아까 뭐라 했습니까? 힘이 모자라서 힘만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비니까 주님께서는 힘을 주시되 이 힘이 이방나라 물리치는 힘이 아니라 너는 이제 네 속에 너도 모르는 죄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식으로 전능하심이 작용함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발생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매개가 발생되는 겁니다. 이 매개를 구약에서 언약이라 합니다.

건성으로 율법 지키는 것과 자기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 느끼면서 율법을 받는 것과 이쪽의 건성으로 율법을 받는 것은 내가 지켜서 의롭게 된다는 이 주장이고, 죄인인 것을 깨달은 상태에서 율법을 다시 보게 되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 없이는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죠. 천국 가는 게 껄끄러워요.

목사님 천국 가는 게 왜 그렇게 힘들고 껄끄럽습니까? 그럼 제가 이런 이야기하죠. 예수님도 천국 가는데 힘들었어요. 히브리서 2장 3절에. 예수님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갈 자격도 안 되는 인간들이 거저 넣어주는 거나 고맙게 여겨라. 천국 가실 분도 그렇게 힘들게 갔는데 그만큼 죄악이란 것이 저주가 얼마나 저주스런 환경이 악한 환경인지 가시덤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날마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께서 십자가의 피의 공로에 감사하는 크게 보이는 식으로.

이미 다 이룬 자에게 이뤘다는 것이 무슨 의미로 다가오느냐 하면, 내 목숨보다 더 좋은 것이 다 이뤘다는 소식이라는 것을 복음이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닫는 식으로 이끌어내십니다.

교재 한번 봅시다. 111페이지인데 [지도와 지시의 은사]의 [왕] 중간 부분에 있습니다. 여기 사울이 왕이 될 때 침멀리가 상당히 잘 지적하고 정리한 게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농부를 지도자로 세웠지요. 그러니까 성신에 의해서 지도자로 세웠기 때문에 사울이 왕이 될 때는 여전히 왕 시대가 아니고 사사시대의 연속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시 합니다. 사사시대의 핵심은 뭐라고요? 인간들이 자기도 알지 못하는 죄를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관여하십니다. 사사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자기도 몰랐던 죄를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이라는 사사가 등장해버리면 인간들 마음속에 ‘우리도 이방나라처럼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죄악 된 생각을 끄집어내는 동기로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억지로 왕 세우는 거예요. 심지어 숨어있는 걸 끄집어내 왕 세우거든요. 사울이 왕이 돼줘야 백성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게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 해석 잘못 해버리면, ‘하나님이 왕 줬잖아. 하나님이 싫어하면 왕 주지 말아야지 왕 줘놓고 닦달 내느냐?’ 더 잘못된 해석은 뭐냐 하면, ‘그렇게 애 먹이는 사울도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왕 됐는데 이번에 교회에서 하는 일이 성경적이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봐준다고. 일단 해놓고 나중에 터지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조치를 하시니까 해봅시다.’ 이런 쪽으로 나올 수가 있다니까. 사울을 인용해서.

큰 교회에 다닌 경험이 없어요? 업자에게 공무원에게 뇌물 줘서 교회 짓도록 합시다. 어떤 집사들이, ‘그거는 너무 성경적이 아닌데.’ ‘사울 보세요. 왕이 나쁘다고 해놓고 줬잖아요. 우리도 다 죄인인데 뭐. 건축인가 받아서 교회 짓고 난 뒤에 나중에 회개할 건 회개하면 됩니다.’ 얼마든지 사울 가지고 이용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성경해석 하나하나가 나중에 결과가 결국은 교회 가는 매개체로 갈 순 있어도 천국에 가려면 진짜 하나님이 주신 매개, 우리가 아는 십자가 말고, 우리를 죽이는 십자가 그걸 우리가 통과해야 되고 거기에 같이 합류해야 돼요. 그것을 성도한테는 그런 사건을 일으키게 만들어요.

그래서 그 교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나오려고 하니까 그동안 그 교회 십일조 갖다 부은 걸 생각하니까 돈 계산하니까 너무 아깝거든요. 하지만 그것조차 다 버리게 만들죠. 자기를 부인하라 했으니까. 헌금해놓고 그 교회에 투자해서 장로 되려 했는데 마음대로 안 되니까 낙담해서 밖에 나가 한국교회 비판하는 그 재미로 살고. 이러면 곤란하다니까. 자기 자신을 비판해야 되는데.

뭔가 기대한 게 있기 때문에 실망했을 것 아닙니까. 그럼 기대한 자체가 나빴단 말이죠. 죄인 입장에서 예수님 십자가 보고 감사해야 될 문제인데 자꾸 복수하겠다는 느낌을 가져버리면 평소에 본인이 뭔가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살았다는 그 소리밖에 안 되잖아요. 한국교회 비판하는 사람 내가 보기에 더 무서워요.

여기 젊은 농부 사울을 지도자로 세웠다는 말은 혈통과의 분리입니다. 두 번 다시 사울은 자기 부모와 가족을 만나지 않습니다. 혈통에서 분리시키는 그 작업이 뭐냐? 나귀 잃어버리고 그것 찾으러갔다가 성령 받잖아요. 그러니 이게 뭘 의미하느냐 하면, 성령을 받으려면 혈통과 끊어지지 않고선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년 다윗이 왕 될 때 다윗이 어디 가 있습니까? 양 치고 있었어요. 사무엘 앞에 곱게 차려입고 마중한 사람은 자기 빼놓고 형들 일곱 명이죠. 사무엘도 그 중에 하나 뽑으려고 했습니다. 누가 말렸습니까? 하나님이 말렸지요. ‘얘는요?’ ‘걔 아니다.’ ‘얘는요?’ ‘걔도 아니야.’ 일곱도 아니다. 없네. 이새의 아들 가운데 없어요. ‘다입니까?’ ‘하나 있는데 애도 어리고.’ ‘걔 데려오세요.’ 데려오니까 하나님께서 ‘걔 맞다.’ 무엇과의 분리입니까? 혈육과의 분리.

마치 이스마엘 낳고 난 뒤에 이삭 태어나야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안 태어난 상태에서 이삭 주는 게 아니고 이스마엘을 낳고 난 뒤에 이삭을 낳게 해서 분리시키는 그 작업. 인간 혈육 자체가 이 몸이 아담의 죄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본인이 열매 맺을 생각하지만 우리 자체가 죄악의 열매에요. 죄악의 열매가 죄악의 열매 맺으면 돼요. 딴 거 신경 안 써도 돼요. 다만 매개되시는 분이 창 자국, 못 자국에 피를 흘려줬다는 거예요.

진도 나가봅시다. 사울이 성신을 받으면 혈육과 끊어지지요. 그 다음에 세 가지의 침멀리가 잘 지적. 첫 번째는 사울이 왕 될 때는 혈육이 끊어지고 여호와의 성신이 임하죠. 이것은 사사기 형식의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하나님이 왕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뭡니까, 하나님의 왕 되심의 의미가 뭡니까? 신학교에서 가르치는데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개입이고 관여고. 그것이 우리들의 죄를 겨냥해서 하는 겁니다. 안 그러면 이 육신으로는 지옥 가니까.

두 번째 왕 되는 방법이 뭐냐? 다윗이죠. 세 번째가 솔로몬이다 이 말이죠. 다윗이 왕 될 때 솔로몬이 왕 되는 이 세 가지가 서로 다 다르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른지 우리가 봐야 되는데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죠. 이걸 알려면 북쪽과 남쪽의 왕이 세워지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야 돼요. 나중에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에 남쪽, 북쪽 나라로 갈라지잖아요.

북쪽과 남쪽 나라 공통적으로 왕이 세워지는 방식이 뭐냐 하면, 율법에 의한 심판에 의해서 세워져요. 그리고 왕이 있다는 게 우선이 아니고 우리 안에 율법이 있다는, 말씀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크게 부각시키는 겁니다. 왕 세우는 이유가, ‘왕 이전에 말씀이 있고, 율법이 있음을 너희가 잊어버렸지. 나는 왕을 세움으로써 크게 부각시키란다.’라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 교회에서 일곱 교회 있는 것보다 우선 되는 것이 뭐냐? 성령이 말씀 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이 교회보다 더 우선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가져오는 사람이 누구죠? 지상에서 선지자 아닙니까. 남쪽 나라 유다와 북쪽 나라 이스라엘 공히 하나님의 말씀이 왕보다 우선이다. 이거는 신명기에 왕은 항상 옆에 율법책을 두라는 그 원리가 계속 지속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전달하는 사람이 선지자에요. 결국은 싸움은 하나님을 대리해서 선지자가 등장했고 이쪽은 왕이 등장했고. 이스라엘 나라가 끝까지 싸우는 자가 누구냐? 선지자와 왕하고 싸우는 거예요.

선지자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싸운다는 말이에요. 선지자는 지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에요. 지식을 받아서 나팔수처럼 외치는 자에요. 괜히 우편배달부 보고 닦달내면 안 됩니다. ‘이제 자기하고 헤어져.’ 그런 편지를 어떤 여자가 남자한테 썼다고 해서 우편배달부에게 물러내라고 약혼 어떻게 할 거냐고 닦달내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선지자 중에 또 하나의 선지자가 있어요. 진짜 선지자는 천상회의에 참석해서 우편배달부처럼 알고 있는 것을 얻어맞던, 뺨 맞던 그냥 전하는 사람에 불과하고, 가짜 선지자는 받은 편지가 없어. 자기가 편지를 써. 자기가 우편배달부 큰 가방에다 자기가 소포 만들고, 편지 써서 이거는 오만 원어치, 이거는 이십만 원짜리, 이거는 백만 원짜리 해서 돈을 위해서 점치고, 돈을 위하여 재판하고, 돈을 위하여 선지자 노릇하고 있어요. 인간들이. 권력을 위하여.

그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왕과 대결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왕보다 먼저 말씀 우선이 아니라 왕한테 잘 보여도 왕 상에서 떨어지는 콩고물 주어먹고 사는 그런 선지자들. 그걸 삯꾼 선지자, 거짓 선지자라고 하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거짓 선지자들이 시찰회하고 노회할 때 거짓 선지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아무도 없는 거예요. 다 거~룩~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에 진짜 선지자 등장해버리면 집합적으로 이쪽 빼놓고 나머지, 한 사람만 진짜 선지자 있어도 나머지는 몽땅 다 거짓 선지자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노회, 시찰회할 때 진짜 선지자인지, 가짜 선지자인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 권력과 무권력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선지자는 누가 선지자 되게 했습니까? 권력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왕이잖아요. 따로 세상 권력이 필요치 않아요. 하나님께서 편지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 유리하게 편지 쓸 필요를 느끼질 않아요.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받은 게 없기 때문에 자기가 선지자 노릇하려면 힘을 합쳐야 된다니까. 노회, 총회, 시찰회 특징이 뭡니까, 왜 모이는 겁니까? 모이면 살고, 흩어지면 죽잖아요. 힘 아닙니까. 미셀 푸코는 그걸 집중화라 해요. 집중화 있는 그곳에 새롭게 주체가 발생되는 거예요. 나 어느 소속이야. 나 어느 노회야. 힘이 없을 때는 주체라는 게 의미 없어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거지 나사로나 창녀나 이런 경우에는 주체라는 게 없습니다.

그저 믿는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주님 십자가 즐거워하는데 있어서는 내 주체에 대해서 신경 쓸 겨를도 없고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거든요. 내가 나 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서 충분하기 때문에. 내가 나 됨을 십자가로 확정을 했는데 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나를 새롭게 조립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 말이죠.

케제만의 [예수는 자유다]라는 유명한 책이 있어요. 예수님은 권력에서 초월한 자유 입장에서 공관복음을 다시 본 책이에요. 하여튼 예수님은 잡으려는 팬들도 있어요. 당신을 왕으로. 팬들도 많고 반대하는 편도 있는데 팬들이나 반대하는 사람이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을 권력의 중심인물로 삼는다는 거예요. 저쪽도 ‘너는 내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는 놈이지?’라고 해서 예수를 핍박하고 특히 예수님이 성전 회복할 때.

그 성전이 구심점 노릇하는데 이데올로기를 깨니까 돌아버린 거예요. 이제는 도저히 참다참다 참지 못하고 죽인 거고. 가룟 유다 같은 경우도 예수님을 자기 주체를 대신할 수 있는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러한 자료로서 예수님을 사용했는데 결국 예수님 갈 길 가고 자기 원대로 안 되니까 가룟 유다가 자살하잖아요.

지난 오후에 설교 때 제가 이야기했습니다만 자살하지 말고 자기 몸을 주께 넘기면 되는데 인간은 자살할지언정 내 몸은 주님의 몸이라는 소리를 절대 안 하고 있죠. 예수님과 관계를 끊어버리는 게 마귀의 전략이죠. 마귀 들린 사람은 자살할지언정 주님을 항상 자기 바깥에 세워놓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제 대구공부에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없는데서 왜 찾느냐 이 말이죠. 교회 와서 교회 찾아야지 없는 예수 왜 찾노? 예수는 아무도 안 믿는데 예수는 없는데. 왜 목사님은 예수 이야기하느냐? 우리가 예수 찾아 온 게 아니고 교회 찾아 왔는데.

교회는 힘이 있어요. 사랑의 힘이 있어요. 사랑과 관심과 돌봐줌, 영적 치유 아닙니까. 어려울 때 도와주고, 아프다 하면 심방 가주고, 재정적으로 어렵다 하면 돈 빌려줄 수 있는 사람 만났을 수 있을 것이고, 가게 차리면 단골 할 수도 있고, 병원이 있으면 약값 싸게 해줄 수도 있고. 전부다 생존의 힘, 전능하신 힘을 모으기 위해서 왔는데 없는 이순신 장군을 왜 찾습니까?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없는 예수를 왜 찾습니까? 교회라 하는 것은 모이면 축구하고, 모이면 놀고, 노래방 기계까지 마련하고. 단결, 힘이 있을 때 간판 값을 한다 이 말이죠.

대한예수교 무슨 교회라고 할 때 문 열고 보세요. 썰렁하지. 그럼 목사님이, ‘어서 오세요. 여기 예수님 계십니다. 우리의 매개체인 예수님 계십니다.’ ‘난 예수 만나러 온 게 아닌데 사람 많은가 싶어 왔습니다.’라는 마음이 오늘날 교인들 솔직한 마음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김 집사 만나러 온 사람도 있고. 그 사람 만나서 할 이야기 있는데 교회에서 만나서 마무리 지으려고. 물 새는데 김 집사가 잘 고치기 때문에 수요일에 비니까 그때 오라고 교회 왔는데 김 집사 안 와 버리면. 교회 마치고 빨리 집에 가잖아요.

네가 뭘 보려고 광야로 나갔더냐? 힘은 왕궁에 있다고 했어요. 결국 민중들이 힘 찾는다는 걸 예수님이 아시고 힘없는 세례요한을 앞장세웠고. 세례요한이 존재한 이유가 자기 힘자랑하고 믿음 자랑하라고 세운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증거하라고, 왕이 왔다는 소리 외치라고 온 거예요.

그럼 그 소리를 외치려면 세례요한 눈에는 이 세상의 모든 백 층짜리 건물이라고 화려한 빌라, 아파트라도 광야로 보여요. 아주 무가치한. 부산 시내 전체가 하나의 광야가 이 광야가 될 때 비로소 자기 외치는 것이 어떤 의미냐 하면, 소리에 의미가 있는 거예요. 광야와 소리의 만남이 이사야의 예언이 되는 겁니다. 그 소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 제시한 매개체다. 통과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아버지 어림도 없다. 주님이 길이고 주님이 생명이고 주님이 생명이고 주님이 진리인데 어디서 네가 따로 우회해서 하나님을 믿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힘없다면 그 뒤에 계시는 주님도 여전히 힘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힘없는 주님을 누가 찾겠습니까? 바로 이 땅에서 힘을 잃은 사람이 찾겠지요. 이 땅의 힘은 이미 자기가 잘난 인간, 자기가 의롭고 거룩하다는 걸 근거로 해서 이만큼 의롭고, 거룩하니까 거룩한 하나님이 나를 좀 알아 달라. 나에게 이런 거룩이 있으니까 그 거룩 보고 밑천으로 해서 힘 달라.

만약에 죄인의 괴수라면 어디 감히 힘 달라는 소리를 하겠어요. 기껏 한다는 소리가, ‘혹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없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제가 한 것은 없지만 불쌍히는 여겨 주세요.’ 왜?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하고 연결된 단어는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이지 죄인이니까 힘 달라 소리 나오면 죄와 연결이 안 돼요. 이렇게 연결 지으면 안 됩니다. 그것 시험 문제 틀려요.

불쌍히 여겨 달라는 열매가 나오면 죄인이 되는 거예요. 독일에서 신학박사 따고 한국에 왔습니다. 교수 자리 땄습니다. 그래서 목사 될 신학교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합니다. 무슨 강의해야 되겠어요? ‘여러분 우리 불쌍히 여김 받아야 됩니다.’ 이런 소리 나와야지 뭐가 어떻고, 바르트가 어떠니, 이것 알아야 목회 성공하고. 그러면 그 제자들 가운데 나도 저렇게 목회 안 하고, 개척교회 안 하고, 박사 받아 저 사람처럼 교수 돼야지. 그런 인간들이 생길 것 아니냐 이 말이에요. 그런 인간들이 유학 갔다 와서 한국개혁주의신학회 만든 거예요. 계룡산 하산했다는 소리하고 앉아있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아마추어들이에요. 진짜 믿음 좋으면 개척교회 하지 유학 안 갑니다. 개척교회 할 믿음 없으니까 믿음 없는 걸 들키기 싫어서 유학으로 믿음 있다고 때우려고 하면서 학자의 입을 열어주시고, 이런 본문 걸러놓고 나는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불쌍히 여겨 달라 하는.

그래서 제 논문 마지막에 ‘당신들은 결국 쓰레기입니다.’ 당신이나 나나 다 쓰레기라고 결론부분에 넣을 수밖에 없었어요. 개혁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 중간에 보면, 개혁은 위선이고 쇄신은 거짓이라 했어요.

그러면 남쪽과 북쪽이 차이가 없지 않느냐? 율법으로 만약에 심판한다면 차이가 없지 않느냐? 남쪽의 차이점은 다윗에 의한 등불, 다윗에 의한 불쌍히 여김이 있을 뿐이에요. 둘 다 왕을 줬다는 말은, ‘인간들이 왕을 앞장세워서 얼마나 율법을 핍박하고 얼마나 말씀을 싫어하는지를 너희들 전체적으로 다 들고 일어나서 이 말씀을 미워하게 돼있다.’ 해서 연약한 선지자 보내서 선지자와 인간을 대표하는 왕과 싸우게 만들었어요.

그 싸우기 위해서 선지자들은 저주받은 왕에게 예언을 하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북쪽 왕은 다윗 이후에 나라 갈라지고 이후에 사사기 시대로 도로 내려간 거죠. 왜냐하면 구원자 왕 되는 사람은 누가 증인한다고? 선지자가 이야기해요.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까?

사사기 거쳐서 사울 거쳐서 다윗이 정점이 되잖아요. 밑에는 나라가 둘로 쪼개지면서 내리막길로 간다 이 말이에요. 이 사사시대는 뭐라 했습니까? 사사에 하나님의 성신이 임한 것은 너희들이 이방신을 섬겼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사사를 둔 거예요. 사사 준 것이 이방신이 물러가고, 안 물러가고는 아무 문제 아니고 문제의 핵심은 이방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제대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 못하고 있고, 자기가 죄인인 걸 모르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방민족들 이용했잖아요.

다윗 이후에 다윗 언약을 정점으로 해서 다윗 언약이 되는데 그때부터 다시 둘 다 꼴아 박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줄줄이 왕들이 있지요. 왕들을 예언을 해요. 누가? 진짜 참 선지자가 왕을 예언한다고. 이 예언은 다윗처럼 유지하라고 예언한 것이 아니고 이제는 옛날 사사 시대처럼 왜 망해야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왕들을 세우는 거예요.

너희들이 왕 세운 것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느냐 이 말입니다. 왕을 세우겠다, 왕이 있어야 되겠다는 말 자체가 이 나라를 이제는 옛날 사사 시대로 되돌아가는데 여기서 올라올 때는 자비가 주어지지만 되돌아갈 때는 올라왔던 그 사랑과 은혜를 반품을 하기 때문에 반품하면서 저주가 일어납니다. 이 말 참 어렵죠.

사사시대 때 하나님이 자비를 주셔서 다윗 왕을 주셨잖아요. 그냥 주신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쉽게 준 게 아니고 그 안에 죄가 깊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한 나라를 만드신 것은 자비와 사랑의 양들이 많이 투입된 거예요. 그 다윗의 취지를 모르고 다윗하고 우리와 무슨 상관있느냐? 다시 이방신으로 갔을 때는 투입된 사랑을 회수하면서 저주와 멸망이 터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손바닥 있지요. 여러분 하얀 손바닥 보이죠. 하얀 손바닥이 손이 아닙니다. 뒤에 거친 뒷면이 있잖아요. 사람들은 뒷면은 모르고 하얀 손바닥이 오면 이것만 오는 줄 알았어요. 이걸 빼낼 때는 뒷면에 와서 빼내버리니까 뒷면에 주어진 게 뭡니까? 저주가 임한 거예요. 저주가 임한 근거가 있어요. 이만큼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모독했다는 점에서 저주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안 믿으면 지옥 갈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자기 아들까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준 은혜와 사랑을 모독했기 때문에 주께서 사랑을 베풀 때 저주를 감안해서 피를 흘렸는데 그 피를 모독했으니까 그러면 네가 저주를 호되게 맞아보라고 지옥이라는 영원토록 저주받는데 뭘 근거로 하느냐 하면,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몰랐던 그 저주를 영원히 받는 거예요. 그게 이미 교회로부터 시작된 겁니다. 들어가고 빼는 거예요.

포도원 비유에서 악한 농부 비유에서 포도원 만들어놓고 하나님께서 종들을 보냈지요. 종들을 보낼 때도 아직 자기 죄를 몰라요. 인간의 죄는 자기가 구성한 죄는 죄가 아닙니다. 자기가 구성한 죄는 반드시 뭘 염두에 두느냐 하면, ‘내가 죄 짓지만 이게 나쁜 줄 압니다.’라는 죄가 나쁜 줄 아는 선을 한쪽에 비축해놓은 채 죄를 지어요. 그래서 반성하면 곧장 저쪽으로 갈 수 있도록. 하지만 종을 보낼 때는 몰랐어요. 그러나 막상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니까 아들마저 죽이잖아요.

이것은 그렇게 생각한 선악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쁜 짓 하지만 내 양심은 그런 양심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 자체가 저주스런 열매를 따먹은 선악과 따먹은 그 자체가 바로 생명나무 열매 영생은 아니란 걸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미 선악이란 저주 바탕 위에서 계속 주어지게 되면 인간은 선악적인 요소를 계속 발휘하게 돼있습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관리자(IP:124.♡.87.52)

10-07-11 20:40

부산100706b침멀리08구약신학-왕b

20100706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8-왕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북쪽 나라는 선지자 자체를 거부합니다. 남쪽 나라도 거부했잖아요. 그런데 남쪽 나라가 다윗의 등불이라는 말을 왜 두느냐 하면, 다윗 왕국으로 끝나버렸어요. 이런 게 어려운데. 북쪽 나라가 다윗 다음에 솔로몬, 솔로몬 다음에 여로보암 나오잖아요. 왕들이 줄줄이 나오니까 사람들은 왕이라는 것은, 인생은 영원토록 못 살기 때문에 늙어 죽으면 또 왕이 있고, 이걸 정상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유다나라는 왕이 있어봐야 허수아비가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왕이에요. 북쪽 왕은, ‘너 한번 멋대로 해봐라.’ ‘우리 왕이 있어야 됩니다.’ ‘왕 줄게.’ ‘우리 교회는 당회장 있어야 된다.’ ‘당회장 줄게. 멋대로 해봐라.’ 그런데 진짜 유다나라는 왕 줘봐야 ‘나는 왕이 아닙니다. 다윗이 왕입니다.’ 죽은 자잖아요. 다윗 죽고 난 뒤에 솔로몬 생겼잖아요. 솔로몬도 왕이 아니에요. 계속 다윗만 왕이에요. 죽었는데 죽은 왕이 통치하는 겁니다.

가야산 수련회 역대기 할 때 목사님들이, 교인들이 강의 내용을 못 알아봐요. 상식적으로 우리는 시간을 의식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기 때문에 한 때 왕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여로보암이 왕이고. 자꾸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왕이 있잖아요. 그걸 그대로 유지하고 ‘남쪽이나 북쪽이나 똑같은 나라지.’라고 일반 나라라고 생각하고 해석을 하더란 거예요. 그런데 그게 바로 인간의 죄에서 나왔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왕국은 줄줄이 열왕이죠. 왕이 있다는 자체가 이게 의미 없이 다윗 하나의 왕으로서 끝나버린 겁니다. 그러면 다윗이 죽었는데 어떻게 통치해. 그게 말이 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내가 통치하는데 옛날 통치는 말씀으로 통치했잖아요. 다윗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통치하느냐 하면, 다윗 가문 안에서 통치합니다. 다윗 가문 이걸 두 자로 ‘성전’이죠.

다윗 가문 안에서 통치한다는 말은 다윗에게 일어난 주어진 언약 있잖아요. 그 언약만으로 인간의 왕이 전혀 필요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다윗 언약에 보면 아들이 오게 돼있어요. 다윗의 아들이 누굽니까? 우리가 아는 선입감은 솔로몬. 놀랍게도 다윗의 아들이 주님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주가 되겠느냐?

그럼 솔로몬은 다윗의 혈통적인 아들이고, 다윗의 아들로 오신 주님은 다윗 혈통이 아니고 멜기세덱 혈통이에요. 이것이 시편 110편 1절에 나와요. 멜기세덱의 반차, 멜기세덱의 반열에서 와서 나타나는 겁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설교했구나. 호두 처음 먹는 사람에게 호두 먹으라 하면 딱딱한 걸 삼키는 이빨 깨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얼마나 딱딱하겠습니까? 호두를 먹으란 말은 망치로 깨서 속살을 먹으란 말 아닙니까.

다윗 언약은 깨어져야 진면목이 나와요. 언약은 깨는 겁니다. 이게 아브라함 언약 세울 때 제물을 쪼개죠. 쪼개야 거기서 언약의 속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건장한 신체 백날해도 언약 안 나옵니다. 봐도 몰라요. 예수님이 깨어져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깨어질 때 그 안에서 부활 나오는 거예요.

부활이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에 부활된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었다는, 실에서 실 나오듯이 죽지 아니하면 부활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이에요. 살아있는 주님이 살아있는 게 아니고 영원불멸이 아닙니다. 내 영혼 누가 죽여? 예수님마저 죽어야 부활이 돼요.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우리가 천국 가는데 중간에 매개체를 통과할 때 우리는 산 자가 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죽은 자가 돼야 돼요. 죽은 자가 되면 거기서 호두 안에 있는 언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잘 만났다 이놈아. 죽은 자 와. 너 죽는 이유를 알지?’ ‘압니다.’ ‘왜 죽는데 네가?’ ‘죄 값이죠.’ ‘아는구나. 죄 값이란 걸 어디서 알았지?’ ‘언약이 이야기해요.’ ‘그렇지.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다. 빨리 와.’ 오게 되면 죽은 채로 들어와서 주님과 더불어 산 채로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부활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죄로 죽은 자에요. 죄로 죽은 자가 중간에 속죄함을 입어서 산 자가 되는 거예요.

속죄함이라는 것은 이번에 레위기의 테마로 들어갑니다. 물어준다는 것. 룻기 한번 봅시다. 4장 5절, 6절 누가 읽어보세요.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여기서 ‘무른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이게 우리말인데 참 어려워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돈을 누구한테 빌렸는데 갚을 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멀쩡한 사람에게 ‘부탁한다. 내 대신 돈 좀 갚아줘라.’ 이게 무르는 거예요. 너무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께 기업으로 받은 땅덩어리를 하나하나 다 팔아 버렸어요. 먹고 살라고 하니까. 돈 없으면 땅이나 줘. 그래서 땅 가져가 버렸어요. 그때 ‘삼촌, 숙모 또는 숙부님 내 대신 내 땅 좀 돌려주이소.’ 이게 무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오미가 잃어버린 땅 내 대신 값 치루고 살 수 없는가? 해서 가까운 친척이 있었던 모양이라. 이름은 안 나오는데. ‘나는 내 재산 손해 보면서 그 짓 안 한다. 조카네 땅을 내가 왜 대신 사줘야 되는데. 내 것 되지도 않는데.’ 하니까 ‘그렇게 안 하면 내가 대신 할게.’라고 대신 나온 사람이 보아스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위하여 값을 치루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 값을 치루지 않으면 못 간다는 것을 하나의 가문으로 만든 게 다윗 가문이에요. 다윗 혈통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에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분은 뭐 하실 분입니까? 고엘, 대신 우리 죄를 무를 분이에요. 보아스 같은 분입니다. 이걸 ‘속죄’라 하죠. 대신 속죄하기 때문에 ‘대속’이라 하죠.

그런데 주님께서 돈 보따리를 들고 와서 ‘이 교회 교인들 마귀한테 얼마 졌어?’ 이천오백 억, 이천사백 억. 돈을 갚아주는 게 아니고 자기의 피와 살을 내줬다는 말은, 우리는 돈이 없어 만날 문제지만 주님 보시기에 돈이 문제가 아니고 살과 육체, 혈통이 문제인 거예요.

왜 혈통이 문제냐 하면, 우리는 아담의 몸 자체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이게 그저 악마의 힘만 요청하는 고치지 못할 죄가 발생되는, 담배 피는 사람들한테 담배 냄새나잖아요. 한 마디 하고 싶고 그래요. 정류장에 담배 피워서 온 몸에 담배 냄새나듯이 우리를 물려받을 때부터 힘밖에 모르는, 하나님과 재물 가운데 재물밖에 찾지 않는 그런 더러운 냄새가 계속 풍겨나는 거예요.

이건 손댈 수가 없습니다. 어디를 수선합니까? 오른 눈 뺀다고 왼 눈으로 죄 짓지요, 오른 손 잘라도 왼 손 남아있어서 죄 짓지요. 어떤 장애인 보니까 두 다리 없어도 담배는 못 끊데. 장애연금 받아서 담배 값 다 날아가요. 술값 날아가고. 어지간하면 생활 어려우면 담배부터 끊을 텐데 자포자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겁니다. 자포자기. 우리가 이 지경으로 내려가야 돼요. 목회자가 목회 실패해야 됩니다. 주님 은혜 아니면 살 길이 없는 자포자기의 지경까지 빠져버리는. 걱정하지 마세요. 대신 물어주는 분이 계십니다. 그래서 이번에 수련회 제목이 [종말의 종말]이에요. 인간이 생각하는 종말은 종말이 아니다 이 말이죠. 자기 챙기기 위한 인간이 기본으로 갖고 있던 주체에서 나온 시간의식에서 나온 거예요.

70이레 어려운 부분 하나 해볼까요? 시간 가더라도. 인간은 역사와 묵시를 생각하는데 이 위에서 나온 게 묵시문학이죠. 이 묵시문학을 성전 깨지고 난 뒤에 예수님 오시기 전에 누가 썼어요? 유대나라에서 했지요. 유대나라에서 성경을 참고해서 나왔지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인간이 자기 매개체가 되어서 묵시를 끄집어낼 때 역사로선 안 되는 걸 묵시로 오셔서 조져 달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들은 하늘나라를 기다렸다 말이죠. 이게 바로 문제다 이 말입니다.

이걸 리델보스가 모르는 거예요. ‘이미-아직’ 여전히 주체에서 나온 묵시적인 시간구조인 줄 모르고 자기는 성경대로 한다고 역사 있고 묵시 있다. 그러니까 ‘이미-아직’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 논문에 보면 리델보스는 자기의 주체의 시간적인 구조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이것이 옳은 줄 알고 이것으로 성경을 봐서 이런 문제 생겼다.

그러니 그 논문이 굉장히 어렵죠. 역사뿐만 아니고 묵시를 찾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유대인들이 얼마나 똑똑합니까? 얼마나 구원받으려고 온갖 인간 지혜를 다 끄집어냈겠어요. 이것조차도 뭔가 어리석게 보이는 게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십자가 세례에요. 이건 성령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거예요. 역사, 묵시 구조를 알았다고 해서 그래서 아주 고상하고 깊이 있는 신학을 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 피로 구원받죠.

묵시 역사는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묵시 역사와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우리 죄악 된 몸, 죄가 발생되는, 담배냄새 풍기는 이런 상태에서 역사 묵시는 어디로 들어옵니까? 누구 좋으라고 옵니까? 결국 우리 자신을 내가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다시 나를 살려내는 역사 묵시로 해석된단 말이죠. 이것이 바로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한 것이 그 논문의 핵심이었습니다. 70이레 그렇게 해석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스도 몸에서 나온 역사 묵시여야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 몸이 몇 가지 나와요? 예수님 몸 나오고 우리 몸 나오고. 예수님 몸이 등장함으로써 우리 몸이 예수님 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관계입니까? 모든 인간은 아담의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몸 미워하잖아요.

쉽게 말해서 이빨 아프면 주님 원망하잖아요. 내 이빨 아플 때 주님 이빨 아픕니까? 안 아프잖아요. 내 이빨 아프면 내 이빨 아픈 것부터 우선이지 주님 이빨 아프냐고 안 물어보잖아요. 그처럼 인간은 몸이 있으면 항상 어떤 경험을 하던 항상 누구 몸으로 되돌아온다? 내 몸 챙기는 것으로 되돌아오게 돼있어요. 심지어 구원이나 성경전체가.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우리 교회 잘 된다면 우리 교회 누구 믿습니까? 내 몸 있으니까 우리 교회 잘 되고, 저쪽은 망해라. 왜? 저쪽은 내 몸이 안 갔으니까. 그걸 다시 예수의 몸으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내 몸, 내 몸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가자 이 말이에요.

그럼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려면 이런 식으로 우리 몸 자체가 어떤 신학을 해도 우리 몸은 죄밖에 안 나온다는 걸 알게 하신 그 능력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다는 게 결론의 포인트입니다. 그러니까 그 결론부분에 역사상의 모든 신학은 죄라는 게 나오거든요. 그걸 보고 진짜 화가 안 날 수 있어요. 뭐 때문에 박사학위 받았는데. 내 옆에, 옆에 있는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그래도 우리는 역사적 해석을 유지하렵니다.’ 주장하더라.

그게 천주교 아닙니까. 천주교가 뭐라고요? 루터가 뭐 때문에 천주교에서 나왔습니까? 날마다 성경에서 나온다는 것이고, 이쪽은 전통과 역사를 고수하겠다는 게 천주교잖아요. 개신교가 천주교 돼버렸어요.

70이레 핵심을 출발점을 우리가 어떤 해석을 해도 그것이 나 좋으라는 해석이라는 그게 죄라는 고백이 나온다는 자체가 우리 능력이 아니고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미 역사, 묵시적 관점에서 성령으로서 주니까 비로소 그 해석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제 논문에 어떤 장점이 있느냐 하면, 22세기는 새로운 철학이 나올 거라고 기대를 할 필요조차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기존의 신학자들은 18세기 신학을 19세기 신학이 꺾었고, 19세기 신학을 20세기 칼 바르트가 꺾었고, 20세기 신학을 21세기 신학이 꺾었다. 이 말은 뭡니까? 역사란 무한히 진보하고 발전한다. 그 수준이잖아요. 그게 판넨베르그의 신학이거든요.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아직도 우리는 구원 못 받았어요. 왜? 22세기, 23세기에 무슨 기발한 신학이 나오면 우린 기다려야 돼요.

그 이야기를 내가 논문에서 이야기했어요. 다니엘의 70이레가 나왔잖아요. 다니엘 그 시대에 B.C. 400년경이거든요. 그러면 다니엘 죽고 난 뒤에 300년이잖아요. 다니엘 70이레 계시를 그 당시 사람들이 알았을 것 아닙니까. 다니엘이 외쳤으니까. 그리고 그 당시 B.C. 300년에 해석을 했을 것 아닙니까. 맞지요? 그렇잖아요. 그 해석을 B.C. 200년 사람들이 옳다고 봤겠느냐 이 말이죠. ‘아이고 시건 없는 사람들. 우리 시대 돼봐야 알지 당신 시대는 몰라. 우리 시대 돼봐야 70이레가 이런 거구나.’ 안다고 이렇게 주장할 것 아니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B.C. 100년경 유대인들은 B.C. 200년경 해석을 옹호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당신들은 몰라.’ 그래서 제 논문에 70이레 해석을 A.D. 100년경, 200년경 해석할 때는 자기 시대의 해석이 옳다고 여기면서 그 해석을 할 게 아니냐 말이죠. 그 해석 자체가 어떤 시간적 주체에서 나왔는가 그 주체를 분해해야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앞으로 23세기, 24세기 해석해도 그건 틀린 거예요.

그럼 뭐가 옳은가? 바로 그게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이 역사를 초월한 묵시적인 십자가에서 성령이, 십자가의 능력이 오게 되면 네가 해석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결론이 시대를 초월해서 유일한 해석밖에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 해석 받고 만약에 신학생이나 어떤 사람이 24세기 되서 이근호 신학 틀렸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묻지요. 내가 뭘 주장해야 틀린 게 있지. 십자가 때문에 깨졌다면 뭘 해야 합니까? 손가락 보지 말고 달을, 십자가를 보라 그거잖아요. 결국 그 사람은 내 논문을 반대하려면 십자가만 봐서 안 되고 십자가 해석을 바로 해야 된다. 이렇게 해야 되잖아요.

그럼 그 해석은 자기 주체성에서 나온 해석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몸이 다르니까. 나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모든 구원의 능력이 나온다고 주장한 거고, 그 사람은 십자가라는 것을 내 몸이 해석해야 나온다는데 그 몸이 만들어낸 주체적인 시간구조가 있을 것 아니냐. 그 구조를 미리 손댔다 이 말이죠. 그런 구조 해봐야 역사 묵시 구조밖에 더 나오느냐 이 말이죠.

70이레 논문을 이런 관점에서 다시 보세요. 그러면 굉장히 어려운데 세밀한 논리를 다 집어넣어야 되니까. 거기서 나오는 그 과정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할 때 사도 바울보고 뭐라 했습니까? ‘너만 옳으냐?’ 했거든요. 사도 바울이 자기 주체에서 만들어냈지만 사도 바울 지나고 난 뒤에 또 다른 해석이 사도 바울 틀렸다고 나올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예를 들면 샌더스 같은 사람들. 사도 바울은 자기 시대만 살았기 때문에 시건이 없어서 성경해석 못한다 했잖아요.

사도 바울이 뭘 이야기하던가요? 결국 나라도 복음에서 잘못하면 끊어질 수 있다 할 정도로 오직 복음 위주라 했지요.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심지어 나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말은 후대 학자들이 아무리 그 신학 네가 만들어냈지? 아무리 외쳐도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이미 집어넣은 것이 있어요.

뭐냐? 나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내가 받은 것은 사람에게 받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직접 받은 것이다. 사도 바울이 베드로에게 배운 게 아니에요. 배웠다면 베드로를 면박 못 주지요.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된다는 거예요. 십자가구나. 그리스도 몸이 살아있구나.

제가 하나교회에서 강의 전에 먼저 물은 게 있어요. 사도 바울이 실제 인물입니까? 실제 인물입니다. 그러면 밧모 섬 앞에 있는 일곱 교회는 실제 교회입니까? 실제 교회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 일곱 촛대도 실제입니까, 아닙니까? 실제라 해야죠. 내가 그렇게 묻는데. 그런데 왜 자꾸 눈에 보이는 교회와 사도 요한 눈에 보이는 일곱 교회의 활동은 안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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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7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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