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잠언속의 그리스도 (이근호 저 대장간출판사 2010년 7월 발간 예정)
[일반] 잠언속의 그리스도 (이근호 저 대장간출판사 2010년 7월 발간 예정)
이름 : 강구만(IP:118.41.241.201)
율법 아래에 놓인 인간들은 이미 저주 아래, 그리고 죄 아래 놓여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 사실도 모르고 인간들은 율법을 받고서는 선악을 아는 지식을 토대로 율법을 나름대로 실천하여 죄를 이길 수 있는 거룩과 의로움을 따내보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선과 악을 아는 지식 가운데 선이란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성립되는 속성입니다. 반대로 인간은 이미 악마의 품성에 지배를 받고 있기에 아무리 선을 행하고자 하여도 악이 우세합니다. 이것은 곧 강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강퍅함에 가두어 두신 지를 인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긍휼하심만으로 인간을 구원해 내겠다는 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원래 취지이기 때문입니다.
실은 율법 속에서도 이런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법입니다. 율법은 ‘제사법’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속죄, 대속이 포인트입니다. 계속 양을 잡고, 소를 잡는데 그 이유가 인간에게서 계속해서 죄가 분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사실도 모르고, 자신이 제사법대로 실행하는 그것이 곧 자신을 의인으로 만들어 줄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지혜라는 것은 바로 이 율법의 완성을 두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제사가 자신을 진정 죄인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을 떴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제사를 드리는 자신의 행위에 근거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하심으로 찾아주실 때만 그동안 자신이 드린 모든 제사가 다 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6-17)
자,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비로소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율법의 정신을 다 이루어내셔서 유일한 지혜자로서 지혜가 베푸는 그 긍휼의 혜택을 발휘하실 수가 있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지혜, 그리고 율법 완성과 대비되면서 우리 인간의 모든 행위는 율법과 늘 마주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속에 들어있는 율법적인 요인들이 죄의 이름으로 어떻게 실시되고 있는지 폭로되는 겁니다. 신약 히브리서에 보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질고와 고통을 다 아시고 함께 경험하신 분으로 나와 있습니다.(히4:15) 우리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무엇 때문에 한숨을 쉬는지 주께서는 다 아십니다. 바로 이것이 잠언의 내용들입니다. “너희가 지혜를 받으라 그러면 너희가 생명을 받으리라”와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래서 잠언서 첫 부분에 나와 있는 말씀,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 훈계를 들으라”는 말씀은 너는 지혜가 없고 너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그런 사정을 내가 안다는 거예요. 그리고 막상 본론 되는 지혜로 들어가게 되면 ‘가난’에 대해서 시작합니다. 잠언 11장 4절에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잠언서 11장 28절에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한다.”고 되어 있고 잠언 23장 4절에 보면, “부자 되기를 애쓰지 말고..” 부자 되기를 애쓰지 말래요. 그러면 사람이 사는 보람이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생물에게는 자기 보존 본성이 있습니다. 생존본성이죠. 그 생존본성이 유지되기 위해서 재물을 모아두어야 그만큼 든든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재물 모으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데 부자 되기를 애쓰지 말라면 그러면 일찍 죽으란 말입니까? 그것에 대한 답변으로서 지혜를 내어 놓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그는 창고도 없지만 주께서 기르시지 않느냐?”고 예수님은 지혜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듣고 있는 우리는 이렇게 대꾸하죠. “참새야 날개나 있지 우리에게는 날개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참새 이야기하신 것은 ‘친히 기르시나니’에 역점을 두기 위함입니다. ‘주께서 친히 기르시나니 너희일까 보냐’라는 식입니다. 이런 취지에서 예수님은 참새 이야기하고, 들풀 이야기해도 인간의 본성에서는 무슨 소리가 울려 나오는가 하면, “나는 내 힘으로 내가 살아야 내가 가치 있다”는 겁니다. 즉 ‘기르시나니’가 싫다는 겁니다. 못 믿겠다는 거예요.
왜 못 믿습니까? 믿을만해야 믿지 믿기지 않으니 못 믿는 겁니다. 시험적으로 몇 번 시도해 보기도 하지만 ‘혹시나’ 여겼다가 ‘역시나’로 끝납니다. 보통 교인들이 교회 처음 나올 때 십일조를 해봅니다. 주님을 시험해보는 겁니다. 진짜 십일조해서 창고에 돈으로 가득 차는지를 시험해보는 겁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세 번 정도하고 곧 안하게 되죠. 왜 중단합니까? 안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목사에게 속아 넘어가서 아까운 돈만 날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는 사람은 돈을 그만큼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선한 존재인 것을 과시하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모범 보이는 차원에서도 하지만 만약에 일반 평신도가 되는 날에는 안 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즉 십일조를 내나 안 내나 항상 그 마음 뿌리에는 ‘주께서 기르시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를 바라는 품성이 변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 친히 기르심이 안 믿어집니까? 본인이 가난하게 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나는 하나님만 있으면 만족해”라는 마음이 중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가난에서 벗어나서 부자만 된다면 십일조해서라도 이루고 말거야”라는 마음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겁니다. 그런 심보로 십일조를 하니 과연 그 십일조가 의와 신과 인을 겸비한 십일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박국 3:17-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혜가 찾아온 사람이요 긍휼과 자비를 아는 사람이요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아, 진짜 내가 사는 건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니구나.” 깨닫는 순간이 바로 가난과 부함도 실은 하나님 손에 달려있음을 아는 사람이요 모든 이를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난 참새가 되어도 좋아. 들풀이라도 고마워”라는 기쁨이 생겨납니다. 우리 가운데 지혜의 힘이 이미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인생에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지혜 되시는 분이 같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분의 혜택에 우리의 눈이 감겨있으면 남는 것은 애쓰고 떼쓰는, 율법적으로 요령부리는 우리의 철저한 생존투쟁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