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7월 2일 출12장 12절 율법 개입 이유
울산 7월 2일 출12장 12절 율법 개입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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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02 출12장 율법 개입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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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03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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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07 23:09
울산100702a출12장a
20100702a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12장 12절에 보면, “내가 그 밤에 애굽 당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서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돼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신이면 신하고만 상대하고 치는지 아니면 사람이 미우면 사람을 치든지 해야 되는데 다같이 치느냐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상당히 복잡한데요. 우선 무엇부터 알아야 하느냐 하면, 고대인들이 하나님과 신 사이에 중간에 뭐가 있다고 생각 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그럼 그 중간에 뭐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옛날 두레박이 오든지, 산신령이 오든지 뭔가 신과 우리 사이에 뭐가 있어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 헬라 시대에는 누가 오느냐 하면, 신은 안 보이잖아요. 신과 인간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으로서 최고의 경지를 보일 수 있는, 인간이라면 이 정도 돼야 최고 인간형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배치해서 신의 요소를 결합시켰습니다. 이게 바로 영웅들이에요. 이 영웅들이 곧 신이 되는 겁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영웅이 있어서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걸 잘 해내는 그런 영웅적인 인물이 있다 이 말이에요. 이것은 창세기 10장에도 나오는 이야기에요. 내피림, 당대의 영웅이라 하잖아요. 신은 안 보이고 영웅이 보이니까 멀리 계시는 신이 영웅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거예요.
그럼 영웅과 인간 사이에 또 뭐가 있겠습니까? 영웅은 대단한 사람이거든요. 헤라클레스라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란 말이죠. 우리가 대단한 사람 되고자 하는 것도 힘들잖아요. 너무 대단하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인간과 신 사이에 결혼해서 반 인간, 반 신. 인간과 신 사이 결혼해서 낳은 인간의 허접스러움도 있고, 신의 괜찮은 면도 있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미 영웅적인 신을 신봉하는, 옛날 사람들은 하여튼 영웅적인 신을 신봉해요. 이만한 것도 신께서는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고 이 정도 지점에서 왔으니까 가까운데 이 가까운 것도 더 가깝게 하려면 영웅과 인간 사이에 진짜 인간적인 면도 들어있고, 영웅적인 면도 들어있는 그런 사람을 배치한다면 그 신은 위쪽에서 점점 더 가까이 오겠지요.
이렇게 신이 손에 잡힐 정도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손에 잡힐 정도가 돼버리면 다같이 신을 믿어버리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권력, 권력이란 집중력이거든요. 집중화라 하는데 뭔가 중심으로 끌어 모으는 거예요. 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끌어 모을 수 있게 되겠지요. 박지성이라면 박지성 싫어하는 사람 봤습니까? 그 사람이 종교가 불교든 뭐든 관계없이 다 좋아하잖아요. 박지성 축구를 동네 애들이 할 수 있습니까? 못 하잖아요. 상당히 영웅적인 거죠.
영웅적인 거기 때문에 인간이 나는 못 하지만 축구라면 저 정도는 돼야지? 뭔가 되고 싶은 것. 별, 스타가 돼요. 누가 우리 가운데서 새순교회 인물 다 좋습니다만 만약에 뛰어난 인물이 다음주에 누구 하나 등록하는데 남자가 너무 잘 생겼어. 초콜릿 복근에다 키가 180이고 너무 잘 생긴 사람이 왔다면 사람들은 쳐다보게 되고, 거기서 어떻게 저 사람은 나보다 저렇게 예쁘고 잘 생겼나. 그걸 어려운 말로 잉여, 내가 못하는 여분의 것을 혜택을 더 받은 쪽을 잉여, 넘치는 거예요. 신으로부터 넘치는 요소의 혜택을 입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하나의 그쪽에 집중하게 되고 권력이 되고, 그 나라가 그 집단이 평정을 찾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물어봅시다. 세상 사람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 영웅을 집어넣어서 영웅을 통해서 하나님의 면면,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이 어떻게 행동하는 것, 영웅의 행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파악한다는 거죠.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 사이에 뭘 주십니까? 그만큼 성경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알아차려야 되는데. 자꾸 물으면 미안하니까 정답을 미리 이야기해서 모르는 것은 안 들키도록 해드릴게요.
12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 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이렇게 돼있어요. 뭘 집어넣느냐 하면, 무교병을 먹어라. 또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우리는 영웅이 보고 싶은데 진짜 하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 ‘아이고 부러워라.’ 우리가 기대하는 것,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중간에 집어넣고 싶은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네가 딱딱한 떡을 먹어라. 그리고 어린양을 잡되 피가 핵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잡아라. 못 먹는 피 버리지 말고. 피가 우리를 살렸다.’ 하는 피를 강조하는 식으로 잡아서 그 피를 너의 삶에 너의 인생의 전부를 대표하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마중 나가라. 너희를 찾아오는 무서운 하나님을 마중 나갈 때는 네 것 가지고 나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어떤 법칙으로 나가는데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라. 그렇게 나가더란 말이에요.
얼마나 이게 이상합니까? 이 일이 너무 이상하기 때문에 오늘날 복음을 믿는 기독교 신자들도 한국교회 자체한데 이단 소리 들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 와서 영웅을 원한다고요. 큰 바위 얼굴. ‘우리 교회 영웅 없나?’ 하는 순간에 자기가 교회에 중심이 돼있고, 영웅이 돼있고. 그런 식으로 우리 교회 기둥을 장려하고 버틸 수 있는 영웅적인 사람을 양성하는데 교회가 힘을 다 쏟는데
거기에 비해서 진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교병을 먹어라. 희한한 이야기죠. 양을 잡되 피를 앞장세우면서 피만 뽑아내면 다른 것 어떻게 되도 괜찮아. 피가 중요해. 피를 부각시키고 드러내는 식으로 양을 잡아라.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걸 집어넣어버렸단 말이에요.
그러니 이건 양 잡고 무교병 먹어도 그 의미를 모르게 되면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왜 양을 잡아야 되는지, 왜 무교병을 먹어야 되는지 의미 없단 말이죠. 그럼 그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여호와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희를 끄집어내고 첫 번째 계명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진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그걸 늘 인정하는 식으로 살아가야 내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걸 모호하면 구분 안 되면 내 백성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인간들의 신은 어떻습니까? 인간과 신 위에 영웅을 두는 거예요. 영웅이라는 것은 반쯤은 인간적인 요소가 있고, 반은 하나님의 요소가 있어서 그 특징은 내가 되고자 해도 안 되는데 유독 그 사람만 홀로 갖고 있는 것. 아까 박지성 이야기했지요. 박지성, 메시 이런 사람들. 축구선수들한테는 그 사람들이 영웅이에요. 탤런트나 이런 사람들한테는 박용하가 영웅이라니까.
언제 저렇게 사업하고 인기 있고. 지금도 이름 없는 연예인 안 많습니까? 무명 가수가 수천 명이 넘는데. 히트하고 장윤정이 돈 벌면 영웅이 되는 거예요. 부러운 거예요.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겹쳐서 보는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자기가 되고 싶은 영웅을 겹치는 겁니다. 이건 창세기 10장에 나온다 했지요. 당대의 영웅이라고 나온다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여호와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쪽 애굽에 있는 신을 죽이는데 신을 무엇과 더불어 죽입니까? 인간이든 짐승이든 첫 번째 태어난 자식이나 짐승과 더불어 애굽의 신을 겸해서 죽여 버리죠.
그렇다면 인간이 영웅이 되고자 한다는 것은 결국은 이 관계는 혈육적 관계에요. 혈육적 관계에서 제일 대표적인 사람은 맏아들이에요. 사람이 둘째 아들 잘 되고, 셋째 아들 잘 되는 건 별로에요. 맏이가 잘 돼야 제사도 잘 드려주고, 맏이가 잘 돼야 집안이 삽니다. 맏이는 아비의 기대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인간적인 자기 혈육, 맏이 중심인데 창세기 3장부터 누구 맏이에요? 가인이 맏이에요, 아벨이 맏이에요? 가인 자체가 인간성이 이상한 놈이 등장해서 멀쩡한 동생까지 죽였잖아요. 이미 맏이가 하나님의 뜻을 반영을 못해.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질 못해. 맏이 자체가 악 덩어리에요. 죄악 덩어리고. 악마도 마귀 덩어리에요. 이것은 혈육을 대표하는 자가 마귀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것은 바로 새롭게 나타날 하나님과 인간들이 알고 있는 섬기는 하나님하고 완전히 서로 적대적 관계, 대적 관계고 원수관계에 돌입돼있다는 겁니다.
가인이 제사 안 드렸으면 아무 일 없어요. 가정 화평했습니다. 가인이 제사를 안 드렸는데 아벨이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이 받았다? 뭐 아무 일 없어요. 그런데 가인이 제사 드리고 아벨은 제사 안 드렸으면 집안에 아무 문제없습니다. 가인이 제사 드렸는데 하나님이 받으시면 가정에 아무 문제없어요. 가인 드린 제사 받고, 아벨 드린 제사 받아도 가정에 아무 문제없습니다. 지금 아무 문제없는 경우가 열 가지가 더 돼요.
그런데 아다리, 딱 하나. 가인의 제사를 받고, 아벨의 제사 받았으면 아무 문제없는 것을 그리고 가인의 제사 안 받고 아벨 제사도 안 받아도 아무 문제없어요. 하나님께서 그 집안에 관여했다는 게 무서운 이야기에요. 그것도 진짜 하나님이. 가짜 하나님 같으면 아벨 제사 넙죽 받고, 가인 제사 넙죽 받고. 제사 지내는 이 혈육에 아무 문제없습니다. 오케이 정상입니다. 가짜 하나님은 항상 우리 가정이 정상이고, 이 세상이 정상이고, 인간들 세계는 지금 정상적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항상 위로 하고 격려하는 겁니다. 힘내라 힘. 아빠 우리가 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만 개입하면 문제에요. 우리는 영웅 되기를 원하는데 영웅과 신을 한꺼번에 다 작살내 버립니다.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인간의 자식과 신이 한꺼번에 작살나고 하나님의 심판 받는다는 말은 이스라엘 쪽에서 자기들이 의논해서 아이디어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신과 인간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저들의 자식이 죽고, 저들의 신이 죽는다면 우리가 진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없는 걸 어떻게 가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뭘 우리한테 요구하느냐 하면, 저 애굽 사람들이 왜 깨지는지 네가 수긍하나, 인정하나? 그것만 요구합니다. 쉽게 예를 들게요. 나도 회사 차리고 저쪽도 회사 차렸다. 회사 잘 되라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선 우리의 기도, 저쪽 기도 안 들어줘요. 기도는 안 들어줘도 관여는 하셔요. 이것 아주 중요한 말인데 그냥 무심코 나와 버렸는데.
우리가 기존교회는 철야하고 하지만 보통 철야는 안 하잖아요. 우리는 왜 하느냐 하면 관여하는 걸 믿기 때문에 안 하는 거예요. 기도를 하나, 안 하나 관여는 하시는 거예요. 아벨과 가인에 관여하듯이. 그런데 우리가 진짜 백성인 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저쪽 회사를 망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저쪽을 망하게 하고 우리한테 와서 묻습니다. 저쪽이 확실하게 망해도 마땅한 걸 인정하나? 벌벌 떨면서 인정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주의 백성이에요. 이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취미가 희한하지요. 남 망하는 것, 남 지옥 가는 이유만 알면 그게 곧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우리 나름대로 ‘하나님 저쪽이 망하게 한 걸 바랐습니다. 나는 이런 포부가 있고, 이런 기대가 있는데 남은 망해도 나는 이런 기도를 해야죠?’라고 뭔가 요구조건을 하게 되면 작살나는 저쪽이나 이쪽이나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저쪽은 그런 식으로 기도 안 하는 줄 압니까? 다 남은 못 돼도 나는 잘 되게 해달라고 했을 건데.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남이 망하는 걸 고소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들이 망하는 요소가 엄연히 나한테도 있는 거예요.
그럼 나한테도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다같이 망해도 되는데 왜 저쪽은 망하고, 안 망하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요소, 신과 인간 사이에 중간에 중보인으로 주신 그 약속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그 약속이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우리를 카바하고 있는 겁니다.
어제 하나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거든요. 밥이 이렇게 있어요. 밥을 뚜껑으로 덮지요. 두 번째는 이걸 보자기를 덮는 거예요. 밥이 뭐냐? 죄입니다. 죄는 육에서 나와요. 내 자식 최고 아닙니까. 항상 애굽을 생각해야 돼요. 여기서 내 자식 잘 되기 위한, 내 가문이 잘 되기 위한 영웅적인 신을 믿었고. 육이 있는 우리 몸이 있는 이상은 죄는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걸 명확하게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라고 죄 안 나오는 게 아니에요. 눈만 뜨면 죄가 나와요. 왜? 육은 원래 죄 냄새를 풍기게 돼있어요. 그리고 이 육은 마귀가 항상 유혹해서 육은 마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아래 있어요. 악마의 능력 아래 있습니다. 왜냐? 육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런 식으로 하면 애굽이 되는데 여기에 보자기가 덮여요. 하나님의 의, 한 사람의 의로움이, 예수님의 피가 보자기를 덮어버리면 이 모든 죄는 그대로 나오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계속 침투하게 돼있어요. 죄 없는 곳에 은혜가 필요치 않습니다. 은혜가 등장했다는 말은, ‘죄 갖고 나와.’ 이런 뜻이에요. 있는 죄 다 갖고 나와.
마치 엘리야가 과부한테 밥그릇, 냄비 다 가져와. 참기름 다 채워줄게. 하는 식으로 빈 그릇 가져오면 무조건 다 채워주는 거예요. 그때 가뭄 난 이유가 뭐냐? 이스라엘이 저주받아 가뭄 났거든요. 가뭄을 안 일으키고 그러니까 기근이 없이 은혜를 주는 게 아니고 기근은 기근대로 마귀로 하여금 저주받게 해놓고 거기에 찾아와서 그 많은 과부 있는데 사렙다 과부한테 찾아와서 보자기 은혜를 덮어주는 거예요. 그것도 계속이 아니고 삼년 육개월 동안만.
그래서 진짜 성도는 뭐냐 하면, 여기 애굽이잖아요. 애굽만 애굽이 아니고 우리도 애굽이에요. 이스라엘이 그냥 멍청하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죽어야 될 장자를 위해서 어린양의 피를, 같은 식구, 어린양이 장자를 대신하니까. 어린양이 장자를 대신하고 장자는 자신의 미래를 대신하고. 장자 죽어버리면 가문이 끊어지니까. 여자는 시집가면 그만이지만.
그래서 이 아들과 아버지와 혈육을 전부다 이게 애굽이거든요. 애굽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그대로 유지하면서 은혜로, 어린양의 피로써 이렇게 이것을 하는 이것이 신과 인간, 인간과 신 사이에 하나님 쪽에서만 들이민 겁니다. 이걸 나중에 언약화시켜요. 언약을 만들고 여기 제사 나오고 여러 가지 법이 들어가는 거예요. 이걸 중심으로 언약으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신을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앞장세워서 이해한다는 겁니다. 애굽을 통해서. 여기에 하나님께선 둘째아들, 셋째 아들 죽이는 게 아니고 애굽의 장자를 죽이잖아요. 짐승의 먼저 태어난 것, 신. 신과 인간들이 생각하는 장자와 연관이 돼있어요.
아들을 죽인다는 말은, 아들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아들 배후에는 반드시 무엇 때문에 아들이란 개념이 성립하느냐 하면, 앞에 아버지가 있을 때 아들이 있잖아요. ‘너 누고?’ 할 때 ‘누구 집 아들입니다.’ 할 때 누구 집은 아버지 쪽이고 아들이잖아요. 아들과 아버지에 대해서 누가 관여합니까? 하나님께서 관여했지요. 기도하지 않아도 관여합니다. 좋은 말 한다. 관여할 때 반드시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관여하는 거예요.
그래서 애굽의 장자를 죽인다는 것은 모든 육적인 인간은 다 죽인 겁니다. 거기에 이스라엘도 죽여 버립니다. 남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인데 이 아버지가 그전까지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였고, 애굽의 아들이었는데 이 아들을 이런 일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아들로 삼겠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누굴 통해서 나타난다? 아들을 통해서 등장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린양도 무엇과 연관돼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입장에서 어린양이 등장할 것이고, 무교절 지키라는 그것도 아버지를 증거하기 위한 아들의 임무, 장차오실 예수님이 해야 될 기능과 관련된 무교절이 되는 겁니다. 장차오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참여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장차 예수님 기능을 지금부터 유월절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제가 아까 목사님들 하고 식사하는데 박용하 장례식하는 게 나왔었어요. 제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은 아직까지 본 게임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면 마귀 자식이냐 하는 것은 본 게임이 있는데 그건 죽고 난 뒤에 본 게임 되는 겁니다. 천국 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지옥 가는 사람은 마귀 자식이 되고. 본 게임이 남아있는데 박용하란 사람은 아직까지 몸 풀다 갔어요.
월드컵 하는데 하기 전에 먼저 연습하잖아요. 휘슬 불고 본 게임 들어가는데 공차고 연습하는데 공 자기한테 안 온다고 자살한 거예요. 우리가 지금 보이는 것은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울산이든 대구도 마찬가지고. 왜 현대인들이 본 게임 하지도 않았는데 지금 예고 게임에 벌써 좌절하고 나빠지고 하나님 원망하고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아직 본 게임 시작도 않았어요. 내 신분이 누구 아들이냐 드러나는 것은 죽고 난 뒤거든요. 물론 예수 믿는 사람은 미리 알지만.
짧은 안개 같은 순간에 불과한 인생에서 이런 일, 저런 일 생기는 것 봐야 다 연습 게임입니다. 이런 일도 생기고, 저런 일도 생기네. 하지만 구원 받은 천국 가면 신분이 고정되고 모든 환경이 고정되면 더 이상 아픈 것도 없고, 우는 것도 없고, 사기꾼도 없고, 부동산 등 처먹는 것도 없고, 이단 목사도 없을 것이고. 하지만 그전에 눈물 흘릴 날도 있거든요.
하지만 이거는 어디까지나 본 게임에 들어갈 연습 게임, 예비 게임에 불과한 겁니다. 그곳에다 자기를 투자하고 거기다가 자기의 모든 걸 걸고 이거는 정말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간 어리석은 짓입니다. 길어봐야 백년 아닙니까. 링거 맞아봐야 구십년 가고, 백년 가잖아요. 그것 빼버리면 그냥 팔십 되면 가잖아요. 그건 사소한 일이에요. 그것 가지고 인생을 잘 사니, 못 사니 따지만 안 됩니다.
하여튼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유월절 통해서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은 영웅이 아니고 자기 아들 앞장세워서 우리를 하늘나라에 데려간다는 사실을 저쪽의 아들을 침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전쟁은 신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면 인간들이 내세우는 너희들이 말하는 신과 인간 사이의 영웅들이냐 아니면 내가 제시하는 아들이냐의 싸움이거든요.
그 아들과 아들의 싸움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뭐라 합니까?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다. 그것도 어떤 때는 내 장자라 하죠. 이스라엘과 싸우려거든 너희 장자 내놔라. 이쪽 여호와 장자야. 여호와 장자들이여 힘내라. 저쪽의 장자 내놔라. 어느 장자가 세다는 것은 어느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냐 결판내자, 결정내자는 거예요.
정말 신기합니다. 하여튼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줄 어떻게 알겠어요. 나중에 이 아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아들이죠. 여호와의 이름이 아들에게 임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이니까 아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아들은 예수님이지만 그전까지는 누구라 했습니까?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감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움직여요. 반면에 애굽이나 이방사람, 주변 사람들은 자기들 이름으로 하죠. 인간 대 하나님과 싸우면 하나님이 이기죠.
그걸 갈렙은 믿었고 여호수아는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저 가나안 땅에 장대 같은 사람이 있더라도 어디까지나 그들은 신이 아니고 그냥 인간에 불과하고. 우리 이스라엘은 인간으로 보이지만 실은 누구 이름으로 움직인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남들 불교에서 인간의 이름으로 기도하지만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잖아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잖아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못 살지만, 그런 애로사항이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축복입니까? 내 마음대로 살면 넓은 길로 가고 지옥 가는데요.
세상 사람은 신과 인간 사이에 자기들의 행함으로 새삼스럽게 믿어야 될 것이 오지만 이러한 아이디어는 이스라엘이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무교병 먹으면 구원받지요.’라는 생각을 이스라엘 사람이 끄집어낸 적이 없어요. ‘어린양을 말라볼까, 염소를 말라볼까, 소 피를 받아볼까?’ 이런 걸 의논한 적 없습니다. 이 말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 되기로 작정된 겁니다.
그래서 하나교회에서 했던 그 부분을 조금만 해보겠습니다. 시작이요 끝이요, 알파요 오메가란 말이 요한계시록에 나오죠. 만약에 시작이 없다면 끝도 없는 거예요. 끝이 있다는 말은 반드시 짝이 되어 시작이 있기 때문에 끝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만 알면 안 돼요. 시작과 끝이 있다 할 때에 시작한 이 요소가 시작만 하고 끝나 버립니까? 아니죠.
시작할 때 그 안에 정보가 들어있어요. 끝으로 지향할 수밖에 없는 끝으로 밀어붙이는 그러한 원리가 있지요. 이 원리는 중간에 인간들이 손대면 달라집니까? 인간이 행함으로 아무리 달려들어도 마귀가 달려들어도 이건 안 달라지요. 이것은 창세전에 이미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돼있고, 에서는 미움받기로 작정된 원리가 그대로 에서나 야곱의 어떤 행위에도 방해받지 않고 그대로 쭉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종말이란 말은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이다. 여러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기분 좋습니까, 기분 나쁩니까? 기분 좋아야 돼요. 왜냐하면 그 돌이킬 수 없다는 내용이 무엇입니까에 우리는 궁금해야 돼요. 돌이킬 수 없는 내용이 너는 이미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돼있고, 에서는 지옥 가기로 돼있다는 점을 에서가 안다 할지라도 돌이킬 수 없는 거예요. 왜? 우리는 끝을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에.
못 생긴 사람이 거울 보니까 자기가 못 생겼거든요. 그러면 거울 깨면 잘 생겼습니까? 인간의 선택은 거울 깨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모든 선택은 실제보다도 환상을 좋아해서 인간의 선택은 환상이다. 그런 걸 하나교회에서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선택은 거울을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리는 것을 도화지에 그리는 그게 인간의 선택입니다.
자기 자식이 공부 잘하기를 여러 가지 선택하죠. ‘우리 애는 공부 잘해야 돼.’ 그래서 선택을 하죠. 뭐도 가르치고, 뭐도 가르치고. 그런데 애의 타고난 역량이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요. 그대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역할을 해야 되려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창세전의 정보가 고스란히 담겨있으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이거든요. 육은 모든 걸 환상이라 하죠. 인간의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기 때문에 욕심이 가득해서 못한 걸 쥐어박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하면서 그 변동사항, 공부 못한다는 것을 공부 잘하는 쪽으로 바꿔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창세전에 예정된 대로 서울법대는 못 들어가고 서울대 경영대밖에 못 들어가고 서울대 의대밖에 못 들어가는.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은 무저갱에서 나오기 때문에 무저갱에서 권력이 나옵니다.
70이레 논문에 대해서 오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자기가 죽으려고 했는데 70이레 논문 나오고 난 뒤에 이것 알고 죽어야지 못 죽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죠. 평생 해봐야 아는가?
70이레 논문이 진짜 무지무지 어렵습니다. 왜 어려우냐 하면,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가? 권력이 짐승에서 나오거든요. 권력이 짐승에서 나오는 그 경위, 그 절차도 알아야 되고, 권력이 하나의 국가가 되는 절차도 알아야 되고, 국가가 하나의 개인이 되는 절차도 알아야 되고, 이 짐승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도전하는 그 절차를 알아야 되고. 전부다 그 안에 다 들어있어요.
이런 복잡한 것 다 제거하면 권력만 남아요. 지상에서는 짐승은 보이지 않으니까 바다 밑에 숨어있으니까 나타나는 것은 뭐밖에 없느냐? 권력이에요. 그러면 모든 가정 치고 돈 힘, 세상 힘, 그 권력 추구하지 않는 집안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그리고 어느 가정치고 울고불고 난리치는 이유가 무엇을 추구해서 그렇게 난리칩니까? 힘이에요. 돈, 자본의 힘 그리고 권력의 힘, 유명세, 인기 전부다 힘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게 뭐예요? 힘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힘 있는 나의 제사 안 받고 나한테 얻어맞는 저 인간 제사는 왜 받느냐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안 받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뭘 추구한다? 너 같은 힘을 추구하는데 그 힘이 가인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고 가인을 잡아먹기 위해서 노리는 짐승의 권력을 가인이 수용했고, 아벨은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제물에 담아서 그냥 보이는 거예요.
가인, 아벨부터 벌써 예수님하고 악마와의 싸움은 시작된 겁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벌써 개시됐어요. 왜? 시작이 있으면 끝을 향하여 돌이킬 수 없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거예요. 이거는 중간에 호남선, 전라선 열차노선 탈선 이것도 안 돼요. 그냥 가는 거예요.
무교병, 누룩 없는 떡을 먹어야 되는 내력을 아는 사람과,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 되는 그걸 아는 쪽과, 하나님 아들 쪽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는 쪽과 그렇지 않고 밥 있고, 뚜껑 이것만 달랑 있는 쪽과 밥 있고 뚜껑 있고 그걸 보자기로 덮는 쪽과 그 싸움은 계속해서 재현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출애굽기 12장 15절 봅시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시작이고 나중이기 때문에 끝까지 유지하면서 계속 가는 겁니다. 유지하면서 시작된 정보가 유지하면서 끝의 내용이 점점 더 다채로워지죠. 온갖 변화가 있지요.
출애굽기 12장 15절.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하나님께서 어린양 피 발라서 그냥 넘어가면 그만이지 여기 무교병, 떡 재료까지 떡의 성질까지 이런 것까지 다 의도적으로 왜 먹어야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왜 유교병을 먹어서는 안 되느냐 하는 겁니다. 만약에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그러면 이야기는 간단하게 풀렸습니다. 누룩이 있는 이스트가 있는 맛있는 빵, 유교병을 먹으라 이겁니다. 먹으면 이스라엘에는 안 넣어준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까 이스라엘은 누구 이름으로 행세한다? 하나님 아들의 이름으로 행세한다 했지요. 하나님의 아들로 행세하는 그 집단에 누룩이 있는 떡을 먹었다고 참여 못한다는 말은, 이제는 이스라엘의 확정된 성격 속에는 누룩이 없는 그러한 사람들의 집단이 되겠지요.
그런데 왜 누룩이 없어야 되느냐? 누룩이 뭐냐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도 모르고 아무도 몰랐는데 하나님 당사자가 알려주네요. 누룩이 죄에요. 그러면 누룩이 있는 떡을 먹지 말라는 것은 율법이죠. 그러면 율법이 추가적으로 나중에 주어지는 것은 장차오실 예수님께서 죄가 있는 사람은 나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이 율법이란 말이죠. 마태복음 5장에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리라 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면 간단해요. 모든 율법을 이루시면 되는 겁니다. 모든 율법을 그것도 늘, 잊지 않고, 빼먹지 않고, 항상 언제나 다 지켜주시면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아이디어, 계획은 누가 세웠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아들 되시는 이스라엘 속에 계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세운 거예요.
여러분 요새 열매철이 됐지요. 포도나무 끝에 뭐가 맺힙니까? 포도가 맺히지요. 이 포도가 어떻게 맺히느냐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이야기할 때 이겁니다. 가지가 없으면 열매도 없는 거예요. 그럼 열매가 핵심입니까, 가지가 핵심입니까? 가지가 열매보다 앞선 원인이 된다는 거예요. 가지 끝에 있어야 열매가 맺힌다는 겁니다. 그럼 가지는 또 어디에 붙어있습니까? 포도나무 둥치에 붙어있겠지요.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하고 이미 확정된 것에 뭔가 유리 세공할 때 유리 녹인 물을 공예사들이 불면 대롱 끝에 유리제품 있지요. 하나님 아버지와 의논해서 불어주면 포도나무 끝에 열매가 맺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포도나무 열매는 누구 솜씨여야 한다? 하나님과 아버지 솜씨지 결코 열매 자체적인 솜씨는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말하기를 네가 가지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열매가 맺지 못한다 이 말이죠. 열매되라가 아니라 제발 가지 붙어있어라. 너 혼자 놀지 말고 좀 가지에 붙어라. 가지에 붙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내가 말한 열매도 아니다.
이 원리가 무교병을 먹지 말라는 원리에 있습니다. 무교병을 먹지 말라는 것은 누룩이 없어야 된다. 누룩이 없어야 된다는 것은 그냥 딱딱한 빵이란 의미도 있지만 장차 함께 하실 하나님 아들이 죄가 없으신 분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를 건져내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반드시 뭐가 개입되어야 우리는 구원받느냐 하면, 죄가 없으신 분이 오셔야 된다. 그런데 애굽에서는 힘을 자랑하잖아요.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좋다 너희들이 자랑할 게 뭐고?’ ‘우리는 힘 있다.’ ‘그래 이쪽에는 죄 없다. 죄 없는 것과 힘 센 것 하고 누가 이기나 보자.’
그때부터 이스라엘이 군대가 되는 거예요. 무슨 군대? 힘과 의의 군대. 힘과 의의 싸움을 붙는 이쪽은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앞장세우고 저쪽은 인간의 육적인 힘을 앞장세우고 그 싸움이 벌어지잖아요. 신약 시대에서는 그 싸움이 어디서 벌어지느냐 하면, 우리 자체 내에서 우리 몸 성도 내에서 벌어져요. 이 안에서 3차 대전 막 퍼집니다. 어떤 사람은 3차대전 두렵다는데 3차대전보다 더 무서운 전쟁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어요. ‘주여 힘이 있어야 됩니다.’ 하면, ‘아닙니다. 의만 있으면 됐습니다.’
이 전쟁에서 생기는 것이 이번에 하나교회에서 했던 것, 교회는 ‘막’이다. 대치되는 힘, 두 세력이 마주치면 반드시 여기에 막이 형성됩니다. 여러분, 묵 같은 것 오래 놔두면 두꺼운 막이 생기죠. 교회가 뭐냐 하면, 이쪽은 권력을 추구하는 그런 악마들의 세력과 이쪽에선 하나님의 말씀, 창세전부터 있던 원리가 맞서다보면 자연적으로 막이 생기는데 막이 두꺼우면 안 돼요.
두꺼우면 막이 막 자랑한다고. 우리 교회는 완전한 교회고, 우리 교회는 복음적 교회고. 까불면 그게 권력이 돼요. 그러면 뻥뻥 구멍 뚫립니다. 구멍 뚫리면 여기서 주께서 용서로 땜질하기 바빠요. 용서해야 되고, 용서해야 되고. 용서 받은 그 순간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오죠. 사랑이 나오면 권력이 약간 물러갑니다. 물러갔다가 다시 우리는 역시 사랑 받은 거야. 또 교만하면 뻥하고 뚫죠. 이것이 무슨 교회냐? 이게 바로 일곱 교회. 까불다가 망한 거예요. 까불다가 얻어터진 거예요. 구멍 뻥뻥 난 거예요. 구멍투성이, 땜질 투성이. 그게 막이에요.
이 막을 부흥시킨다, 확장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막은 양쪽 세력이 있을 때 성립하지 막을 따로 뽑아내질 못해요. 막을 따로 뽑아내면 여기 힘이 있어야 되는데 뽑아난 그 자체가 이미 악마에 속한 교회가 됩니다. 그러면 뽑아낸 이것은 교회를 위한 교회가 되죠. 원래 이쪽 세력은, ‘말씀만으로 족합니다. 말씀만 있다면 죽어도 좋습니다.’ 이거거든요. 저쪽은 ‘교회 없으면 나 죽을랍니다.’ 이렇게 나온다고. 이게 하나의 권력이 돼버린 거예요.
이런 싸움이 벌써 이스라엘이 했어요. 에서의 싸움과 야곱의 마주침, 이스마엘 계통과 이삭 계통의 마주침, 유다와 이스라엘의 마주침. 모든 것은 얇은 막으로 해당됩니다. 압살론의 공격과 다윗의 마주침 이게 전부다 이 막이 생겨요.
이 막을 구약에서 형성하면 생긴 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이란 필름을 뽑아내면 반드시 거기는 언약이 생기게 된 이유가 이쪽 악마의 세력도 설명해야 되고, 이쪽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도 같이 설명해줘야 언약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새 언약은 뭐로 돼있어요? 피로 돼있고, 찢겨진 살점으로 돼있죠.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시달렸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언약 세우기 위해서 뺨 맞고 채찍 맞고 시달렸는데 그냥 언약한다고 두 시에 다방에서 만나자. 이런 것은 시달릴 필요 없어요. 두 시에 다방에 앉아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언약 하려면 악마의 세력도 경험해야 되고 그것을 이겨낸 우리 주님의 하나님 아버지의 도우심도 있어야 되고. 이것이 막을 형성해서 그 막을 끄집어내보니까 온통 피투성이고, 창 자국이고, 못 자국이고 자기 백성을 위해 대신 죽으신 그 고난의 길이 그대로 새 언약으로 나왔다 이 말이죠. 이것이 한 마디로 말해서 십자가라고. 이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것은 오늘날 이 시대도 똑같이 그러한 사정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관리자(IP:124.♡.87.52)
10-07-07 23:11
울산100702b출12장b
20100702b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강의:이근호 목사)
아까 누룩이야기를 다시 해보겠습니다. 무교병이란 누룩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없다’는 상태를 계속 유지해달라는 거예요. 네가 네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나? 없습니다. 네가 기도 좀 하던데? 아닙니다. 없습니다. 네가 착한 일, 전도 좀 하지? 아닙니다. 없습니다. 항상 없음을 유지해줘야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되는 거예요.
없음이 이걸 공집합, 공백. 없음에서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없음이 있음으로 변하는 걸 사건이라 합니다. 그냥 보통 평범한 산인데 여기에 화산이 터져버리면 사건이죠. 터져버리면 여기선 구멍이 생기죠. 이게 바로 사건의 현장이에요. 그러면 사건 때문에 흙들이 쌓이지 않습니까? 쌓이는 이 둔덕, 이걸 사건으로 생긴 주체, 쉬운 말로 자아라고 합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이 자아가 사건의 주인공입니까? 아니죠. 결과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포도가 포도나무를 심은 게 아니에요. 이미 열매가 있다는 말은 나무가 먼저 있고 열매 있는 법이잖아요. 사건이 먼저 터지고 사건 주변에 자아가 돌아가면서 배치돼있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자아는 뭘 증거하느냐 하면, 전에 없었는데 사건 터져서 내가 생긴 거예요. 나와 내 형제들 생겼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묻기를 이런 사건을 일으킨 주님은 어디 있느냐 하면, 주님은 사건만 일으킬 뿐이지 주님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는 경우가 불과 삼십 년만 보이고 그것도 대중적으로 보인 것은 삼 년밖에 없고 나머지는 갈릴리에 숨어 지내다시피하고 나타난 건 삼 년밖에 없죠. 삼 년만 계시다가 여전히 없으신 분이 돼요.
그래서 삼 년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서 성지순례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더듬어가는 내가 만든 사건은 사건 취급을 안 해줘요. 독일에 가면 유명한 성당들이 있는데 옛날 성당들이 오래지은 이유가 뭐냐 하면, 건물도 커서 오래지었지만 스테인드글라스 전부다 성경에 있는 그림으로 했어요. 그 당시 인쇄술이 발달 안 해서 성경을 알려면 그 그림으로 설명해야 돼요. 그걸 조각해서 올린 거예요.
그러면 그 그림 사건은 뭡니까? 왜 헨델의 메시아가 그렇게 웅장합니까? 인간들이 뭘 만들어낸다? 옛날 자기가 은혜 받은 사건을 ‘재현’하기 위해서 성당 지어놓고 천민들 무식한 인간들 은혜에 뿅 가게 만드는 거예요. 그럼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역사입니까, 아닙니까? 아니라니까. 왜? 이미 있는 유에서 유를 사건으로 만드니까 이건 사건이 아니고 그냥 재현이에요.
재현이 되면 주체가 사건 전체를 자기가 나가 설치게 돼. 설치게 되면 주교도 필요하고, 목사도 필요하고, 성만찬 이런 것도 필요하고. 눈에 보이는 교회니까. 그래서 교회는 재현이에요. 다시 인간의 손으로 다듬어서 만들어내는. 그러니까 우상이에요. 이 단어가 적당하네. 사람 손으로 만든 우상이라니까. 교회가 사람 손으로 만든 거예요.
그럼 사람 손으로 만들면 여기에 뭐가 있느냐? 교회를 재현하면 반드시 그 안에 권력, 힘이 작용해요. 힘이 작용한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나름대로 질서가 있어요. 질서를 다른 말로 법이 있어요. 율법은 사건입니까, 사건이 아닙니까? 항상 둘 중에 하나만. 하나님이 주어졌죠. 율법은 사건이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사건입니까, 사건 아닙니까? 그건 사건이 아니고 재현이죠. 그러니까 어설프잖아요.
부자청년이 와서 하는 말이, ‘내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나이다.’ 그건 사건입니까, 재현입니까? 재현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지킨 그 권력된 자아를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주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걸 다 팔고. 다 팔면 뭐가 돼버려요? 유가 아니고 무가 되고. 무가 돼서 날 따라오너라. 안 가잖아요. 권력을 다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죠. 이건 자기 질서를 다 날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건 터져서 구멍 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현시, 나타난 거죠. 그럼 나타나려면 어떻게 해서 나타나야 돼요? 없는데서 계속 나타나죠. 그럼 이삭의 출생이 나타남입니까, 재현입니까? 나타남이죠. 그걸 아브라함이 믿지요. 그럼 이삭은 하나님이 자식이에요, 자기 자식이에요? 하나님 자식이죠. 없으신 분의 무의 자식이죠. 무의 자식이 아니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내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내 자식은 내 앞에서 재현이 되는 거예요. 내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구원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내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구원 못 받아요. 육으로 태어난 건 육이고. 영으로 태어나야 되는데 그 성령이 세상에 눈에 안 보이네. 안 보일 수밖에 안 보여야 무가 되니까. 그냥 바람 같이 왔다가 사라지고 이렇게 돼요.
만약에 유가 돼버리면 그건 인간적인 육적인 힘이 거기다 새기게 됩니다. 그러면 새로운 법이 생겨요. 이 법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잖아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보고 자꾸 뭐라고 합니까? ‘좀 보여줘.’ 하니까 주님 하는 말이, ‘내가 사건이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봤어. 나는 아버지와 하나야.’ 하니까 이 사라들이 돌아버린 거예요. ‘하나님은 안 보이고 너는 보이는데 네가 어떻게 하나님이냐?’ 이렇게 된 거예요.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본다고 하니까 못 보는 거야. 네가 듣는다 하니까 안 들리는 거야.’
방금 이 논리를 펼친 사람이 알랭 바디유라는 철학자입니다. 이 세상에 신은 없고 다수성의 다수성만 있다. 집합의 집합만 있을 뿐이다. 다만 사건이 터지는데 사건이 터질 때 뒤늦게, 그걸 차후적이라 했는데 70이레의 논문에 나옵니다. 또 회고적이란 말 썼고. 회고적이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그냥 뒤 담화하는 거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했죠. 이스라엘이 망한 게 이스라엘에게 다행입니다. 망하게 하신 것이 누가 관여한 거예요? 하나님이 관여한 것이 바로 망하면서 하나님께서 유가 아니고 무라는 것을 알게 된 사건에서 구원받은 걸 알게 된 사람이 에스겔, 예레미야, 다니엘이에요. 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리나라 망해도 좋다는 거예요. 희한한 선지자들이에요. ‘우리 교회 망해서 너무 좋아. 미치겠다.’ 이거란 말이죠. 우리 교회 망했다는 것. 이 사람들이.
그래서 에스겔도 인자고 다니엘도 인자에요. 인자로 오신 분이 이렇게 돼요. 무는 안 보인다는 걸 아는 시절이 어떤 시절이냐 하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있을 때는 무라 하는 것은 안 보인다. 누가 안 보입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은 사건만 일으키고 그냥 계시는데 이 땅엔 안 보이죠. 하나님은 안 보인다는 그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해버리고 난 뒤에 하나님은 무 되시는 분이 보인다고 나오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이거 미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존의 상식과 선입관으로선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소리에요. 보이는 하나님 보신 적 있습니까? 안 보이는 하나님도 못 보이지만 더더구나 보이는 하나님도 안 보이게 돼있어요. 아무리 봐도 키가 176이고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 아니야. 아무리 봐도 모르는 거예요. 이게 더 미치는 거예요. 이걸 걸림돌이라 하는 거예요.
아까 유교병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져요. 차이는 뭐냐? 있음과 없음이에요. 만약에 누룩을 먹어버리면 그 사람은 있음은 반드시 권력이 되거든요. 왜 권력이냐 하면, 알랭 바디유에 의하면, 주체가 등장함이 있음이라. 주체는 가만있질 못해요. 뭐냐 하면, 셈하기. 1, 2, 3, 4, 5, 6, 7 이렇게 셈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셈을 하게 되면, 셈을 무한대로 셈하죠. 2756 그 다음에 2757 이걸 누가 셉니까? 본인이 세죠. 그럼 본인은 2758보다 더 셉니까, 안 셉니까? 더 세죠. 무한대가 있잖아요. 이걸 누가 셉니까? 내가 세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리 신이 있고 해도 신은 내 손 안에 있소이다. 이게 오늘날 현대 천문학이에요. 모든 우주가 무한대라도 그 우주가 무한대라고 그걸 알아챘고 그걸 발표하고 알아주는 우리 인간이 위대하다는 거예요. 얼마나 인간이 위대한지 인간은 우주에서 별 것 아니라는 걸 알아챌 정도로 위대한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우주보다 더 위대한 거예요.
주체가 생겨버리면 주체는 그 다음부터는 셈하기에 들어가요. 셈하게 되면 그건 주체가 갖고 있는 안목과 지식이 점점 더 펑퍼짐하게 늘어납니다. 심지어 신의 능력까지 무한의 능력까지 포함이 되죠. 똥배가 터지려고 해요. 이게 바로 짐승의 모습이에요. 모든 힘은 바다에서 올라와요. 바다에서 온 짐승이 계속해서 이걸 권력을 낳는데 권력을 어떻게 낳느냐 하면, 주체가 셈을 하게 되면, ‘네가 꽃이다’ 하면, 나에게 와서 꽃은 네 마음대로 못해요. 꽃이 그냥 죽어도 전에는 몰랐는데 ‘꽃이 죽었구나.’ 하고 한 소리하게 돼있습니다.
여러분 네비게이션 있잖아요. 좋으나 싫으나 잔소리 들어야 돼요. ‘속도를 줄이세요. 속도를 줄이세요.’ 일단 내 영역에 와버리면 나의 셈하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같이 엉키게 돼있어요. 그러면 이 세상이 좋은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내가 좋아요. 이걸 석가모니가 안 거에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우주가 있더라도 그 우주를 바라보는 내가 있음은 내가 우주보다 좋고 더 위대하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이여 온 신보다 여러분들이 위대합니다. 그걸 깨친 그게 해탈의 경지에요. 모든 삼라만상의 모든 변화도 여러분 속에 지금 여러분 되기 위해서 있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힌두교한테 쫓겨났어요. 힌두교는 신이 있는데 불교는 신이 없어요. 오늘날 한국교회 같아요. 한국교회가 오직 천상천하유아독존, 자존심밖에 없어요. 자기 욕망밖에 없어요.
그래서 주체가 확장 될 때 그냥 확장되는 게 아니고 분열되고 분산된다는 거예요. 가지치기 계속 갈라지는 거예요. 이 갈라짐의 계열화된 모든 체계가 바로 유에서 유,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계시잖아요. 분명히 계시는데도 하나님이라 했으니까 무슨 하나님이 구름 타고 오지 않고 이렇게 왔느냐 말이죠. 행세가 평범하고 왜 구름 타고 안 왔느냐고 나오는 거예요. ‘구름은 조금 있다 타고 올게.’
왜 주님께서는 보이는 모습으로 오셨느냐 하면, 여기에 유교병, 유교병은 있음이죠. 있음의 자리에 전부다 없음으로 들이대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보인다 하는 사람은 전부다 소경으로 만들어버리고 들린다 하는 사람은 귀머거리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어떤 방식으로? 놀라운 것은, 귀머거리는 귀가 있어도 없는 것이죠. 이 귀머리거리를 주께서 듣게 하셨고, 난치병 중풍병자를 낫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고.
한 쪽을 이쪽과 반대방향으로 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뭘 노린다? ‘너는 망했어.’ 그걸 말하기 위해서 이쪽의 엉뚱한 인간을 뽑아내면서 예상치도 못한 가만있는데 은혜 주시는 것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천당 가는 방법을 생각한 적도 없고 그냥 있는데 찾아온 것은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한 거예요. 우리 혼자 구원받았다고 무에서 유로 까불지 말고 거기에 머물지 말고. 바로 저 사람도 나처럼 지금도 복음 모르면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자기 힘만 추구하고 세상만 성공하면
아까 했지요. 본 게임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자살해버리고. 인생 뭐 있어 한 방인데. 짧은 인생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그런데 우리가 우습게 봐도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은혜를 안 받았으면 진짜 예수님이 하나님인 줄 몰랐으면 우리는 나만 신봉하는, 왜 나만 신봉합니까? 사람이 아무리 환상이라 해도 정말 의심할 수 없는 것은 이걸 환상이라고 이야기하는 나는 손에 잡히잖아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 있습니다만 꿈속에 이런 게 있어요. 이게 꿈일까, 진짜일까? 때려봐야지. 꿈속에 때려본다고. ‘그래 맞구나.’ 하고 깨보면 꿈이야. 꿈에선 아무리 때려도 소용없어요. 그 자체가 꿈이란 말이죠. 내가 한 마리 나비가 된 것이 진짜 나비여서 나비된 건지 아니면 꿈속에 잠시 나비된 건지 그걸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없다? 없다고 한 사람이 중국의 철학가 장자였어요.
그래서 불교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는데 아는 것은 모르겠다고 외치는 우리는 분명히 있다는 거예요. 이게 꿈인지 내가 나비인지 아니면 내가 인간인지를 고민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아무리 해도 의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게 데카르트고 장자라니까.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시작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시작은 모르겠고 끝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그냥 사업 안 되고 매니저 돈 떼어먹으면 자살하는 박용하밖에 없는 거예요.
앞뒤 다 잘라내 버리고 모르겠고, 모르겠고. 이것밖에 없고 알고 있는 것은 현재 내가 배고프다는 사실. 어디서 왔는지, 왜 사는지 모르겠고 그냥 힘. 이 힘은 바로 주체가 분열되고 분산되는 겁니다. 이걸 70이레에서 발꿈치의 각질. 이걸 설명하는데 이만큼 깁니다. 각질은 뜯어내도 운동하면 또 생기죠. 벗겨도 또 생기죠. 손톱도 머리카락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꾸 자라나고 자라나요. 이 짐승에서.
‘그저 눈에 보이는 게 전부야 딴 생각하지 마. 교회는 다니되 신경 쓰지 말고 네 몸이 최고야.’ 좀더 나가면, ‘네 자식이 최고야.’ 아닙니까. 그런데 그 자식을 출애굽할 때 하나님이 죽였다고. 장자를 죽였다고. 보라고.
너는 유에서 나올 인물이 아니야. 너는 무에서 아들 될 하나님의 자녀야. 왜요? 창세전부터 시작할 때 이미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도록 돼있는데 너만은 특별히 사랑해줄게. 은혜 내려줄게. 해서 발생된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알았죠. 눈에 보이는 것은 이게 아니구나.
저는 어려운 게 뭐가 어려우냐 하면, 지금 없음을 사람이 유를 무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철야해도 소용없고, 재산 교회 바쳐도 소용없고 아무리 해도 유는 아무리 잘게 잘라내도, 이걸 미분이라 하죠. 아무리 헌신하고 직업 다 때려치우고 교회에서 스물네 시간 기도해도 기도하는 나는 의식되니까 이게 없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공부했으니까 물어봅시다. 유에서 없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없어집니까? 사건이죠. 근데 유에서 사건 터지면 나는 이 사건을 내가 셈하는 알아채는 사건으로 바꾸죠. 그러면 이 사건은 사건 터지고 난 뒤에 뭐로 바뀝니까? 사건 근처 변두리에 뭐가 있다? 그 사건으로 새롭게 달라진 눈에 보이는 있는 주체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은혜 받고 난 뒤에 자기 은혜 받은 걸 또 자랑해요. 사건 또 터져야 됩니다.
사건 터지기 위해서는 유가 할 게 아니고 무가 한다. 그럼 목사님 성령께서 주님께서 지금도 역사합니까? 역사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어떻게 보입니까? 하나님 언제 나타납니까? 이게 구약 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은 채로 왔는데 신약 때는 예수님 방식입니다. 예수님 방식은 보이는 방식으로 무를 이야기했잖아요. 신약 때는 내 잘난 것 때문에 핍박 받고 내 자랑 때문에 서러움 받는 힘없는 사람을 통해서 주님께선 사건을 일으킨다니까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다? 바로 예수님한테 한 것이다. 주님은 소자를 풀어놨어요. 그럼 우리는 부자라고 좀 가졌다고 무시하고 막 대하고, 우습게보고, 교인 적다고 ‘죽어라. 나 같으면 죽었다. 우리는 교인 많거든.’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할 때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 대한 밀침, 나에 대한 저주, 소위 있음의 자리에서 또다시 없음의 주님을 공격하게 된 거예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요. 촉수, 빨판. 주님은 머리는 보이지 않고 보이는 촉수를 깔아놔버려요. 지뢰밭을 만들어요. 조금만 까불면 상처받는 집사님이 생기게 만들어요. 나의 깝죽으로 인하여 희생되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자 이 말입니다.
그게 공부 못한다고 팼던 내 자식이란 말이죠. ‘다른 애 공부하는데 너는 왜 공부 못해’ 하고 팼는데 그 애는 원래 성적이 일등할 애가 못 돼. 기껏 이등밖에 못 돼. 그리고 백만 원짜리 옷 안 사주고 오십만 원짜리 사줬다고 남편한테 잔소리할 때 남편은 된 통으로 당하는 거죠. 남편은 아내한테 당해서 ‘주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습니다.’ 그럼 주께서는, ‘너는 핍박 받도록 돼있는 사람이야.’ 그럼 구원받았다고 까불면 남편이 또 하나의 유가 돼서 ‘나 봐라. 구원받았어. 너는 마귀야.’ 까불다가 또
모든 구조가 주님께서는 바로 나약한 형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띤 그런 예수님의 공생애 같은 낮은 모습의 형제들을 깔아서 여기 폭탄, 지뢰밭을 아예 터지게 만들어요. 그런 관계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계속 낮출 수밖에 없죠. 그게 말씀 구조라 합니다. 사람 대 사람들의 관계가 아니고 말씀과 말씀의 관계에요.
그게 한 마디로 말해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겁니다. 처음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 주고 가면 될 텐데 꼭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을 끌어당겨서 먼저 열 시에 온 사람들로 하여금 지뢰에 터지도록 만들어요. 삐지게 만들어요. 처음엔 안 삐졌는데 나중에 삐지게 만들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우리가 안고 있는 육의 죄를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관여할 때 뭘 하느냐? 그것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분의 성령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육이 영을 만나는 거예요. 끊임없이 끄집어낼 때 우리는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을 전에도 했지만 더 심도 있게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전에 있었던 모든 주변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되는 겁니다. 세상이 달라 보이고 우리가 무의 증인 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출애굽 사건을 일으켰죠. 첫 번째 유월절 사건을 일으켰잖아요. 그 사건이 터지고 하나님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여전히 안 보였어요. 나타난 것은 어린양 피하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주체, 주체는 누굽니까?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은 살아났잖아요. 여기는 뻥하고 뚫려버리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먹지 말라 했죠. 그러면 이 말씀을 율법을 지키려고 이 주체가 지키면 무가 아니고 유가 되죠. 또 엉터리 되죠. 그러면 율법을 지키려면 율법을 그냥 지키지 말고 어떤 율법이냐? 사건화 된 율법을 지켜야 되겠죠. 율법을 지키기 위한 사건이 되겠죠. 그 사건은 우리가 예상 못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요단강 건너갈 때 홍해 건너간 사람이 달랑 두 사람밖에 없었지만 만약에 처음에 홍해 건너간 사람이 다 요단강 건너간다고 한다면 요단강 가에서 가만히 기다렸을 거예요. 안 그러면 작대기 대본다든지. 왜냐? 이미 알았거든. 물 나오면 무조건 대면 죽죽 갈라지는 줄 알았거든. 자기가 주체가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은 사건이 아닙니다.
수요일 예배 때 그런 설교했지만 모든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신기한 일이 그대로 나한테 재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거든요. 여러분 기도라 하는 건 기도하게 해줘야 하는 겁니다. 주께서 관여해서 한 기도는 내 기도가 아니고 안에 주님이 한 기도가 되고, 성령이 하시는 기도,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