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20: 1- 4 (거짓선지자의 행패)
렘 20: 1- 4 (거짓선지자의 행패)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203)
본문 : 예레미야 20장 1- 4절
제목 : 거짓선지자의 행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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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0-06-30 21:01
거짓 선지자의 행패
2010년 6월3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0:1-4
(렘 20:1, 개정)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렘 20:2, 개정)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렘 20:3, 개정)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렘 20:4, 개정)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성경은 지켜야 그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지키던 아니지키던 반드시 이대로 되어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인간의 행함이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을 나타내보이기 위해서 인간의 행함의 가치는 사정없이 제거되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은 구원받을 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받아야 될 자에 대한 관리도 어디까지나 하나님 소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스훌이라는 사람에 대한 관리에 대해서 하나님은 두 가지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그의 이름이 딴 이름으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과 그는 나중에 바벨론에 잡혀가서 그 이방나라에 가서 죽어야 한다는 그의 미래상에 관한 겁니다.
바로 이러한 예언을 알려주는 임무는 예레미야에게 맡겨졌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가 사적인 감정이 “욱!”라고 올라와서 바스훌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천국으로 제대로 가고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은 곧 필히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지옥을 가고 있다는 사실과 짝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람이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경우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어이 지옥 갈 사람들을 지옥 보내시는 업무를 하신 여파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가야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바스훌은 왜 예레미야는 구원된 자인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바스훌이라는 이름은 ‘세력을 확장시키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김확장’, ‘최 번창’, ‘이 대성’ 정도가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이 거짓 예언자에게 주목하시는 이유는 현재 그가 예레미야에게 대하는 태도가 그의 이름을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반 선지자들 수준이 아니라 선지자 중에서도 고위층입니다.
예레미야를 가볍게 때리고 가두울 정도 같으면 그는 지상에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력자의 모습은 그의 이름에 합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기대하고 원했던 바가 그가 대변해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의 하나님 믿기나 성경 보기는 과거에 있었던 신기하고 멋있는 기적이 지금 자신들에게 되풀이 되기를 소원하면서 보게됩니다.
현실적으로 그것을 달성한 사람의 모델처럼 그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힘이 도리어 자신의 구원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구원’에 관한 겁니다. 하지만 그는 힘에 죽고 힘에 삽니다. 힘이 있는 한 그는 두려울 일은 없다고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그 앞에 예레미야가 나타나서 그가 탐내는 세상 힘을 조롱하는듯한 예언을 하니 바스훌을 본때를 보이는 차원에서 보란 듯이 권세를 유감없이 행세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 힘을 다 잃는 것이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구원작업이라는 겁니다. 이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실시하신다는 겁니다.
그 실시하는 작업 중의 하나가 바로 바스훌이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기피 인물이 되게 하시는 작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 새로 받은 이름은 바로 ‘사방으로 두려운 대상이 된다’는 이름입니다. 즉 사람들마다 “우리는 저 사람처럼 되면 안되는거야 큰일 나는 거야”를 인상을 심어줄 대표인물이 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처럼 유대나라 사람들은 지도층의 사람이나 밑의 백성들이 모두 지상에서 자신의 생존의 터전을 돈독히 하는데 필요한 힘 끌어모으는데 급급했지 결코 진정 이 세상으로부터 ‘구원 받아야 돼’라는 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성경,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취지를 누락시키면서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나하만 장군의 병고침 경우를 봅시다. 후대 사람들을 이구동성을 말하기를,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니 문둥병이 나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아만 장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병고침 받은 나아만 장군은, 힘을 원하고 기적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원리에 의해서 구원받았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에게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려서 나아만 장군이 가진 문둥병이 그에게 덧입혀지는 것과 연관시켜 볼 때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아만 장군의 문동병을 가져가신 겁니다. 바로 이 사실을 나아만 장군이 알게 된 것입니다.
왜 이런 해석을 해야만 하는가 하며는,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해주는 사람에 한해서만 구원이 되는 것이 구원의 변함없는 철칙이라면, 필히 인간의 자신의 행위가 의미를 둘 수 있는 듯이 보이는 경우를 통해서 인간들의 잘못된 오해와 해석을 지적해 낼 경우로 쓰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가 자기에게 행한 행위를 사랑하게 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알게 된 자입니다.
즉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이 구원받는 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경우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님께서 난데없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사건입니다. 아직 열매 맺을 때가 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애꿎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셔서 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평소에 제자들이 여기기를, 평소에 자신들이 세상 보기와 예수님의 세상 보기가 일치되리라 여긴 그 선입견을 송두리째 엎어버리는 사건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왜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셔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인간의 표본입니다. 인간이 나름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대로 선하게 행위하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새삼 구원이 되거나 지옥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사건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나아만 장군의 병고침이나 무화과 나무의 저주는 모두 예수님에게 그만한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을 너무너무 당연하게 여기면서 사랑할 용의가 있느냐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필히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든지 자신의 행함에 가치와 의미를 두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과실 맺을 때도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것이 예수님 입장에서 합당한 조치인 것처럼 인간도 같은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형편을 조성하는 그 예수님을 너무너무 좋아하고 사랑하고 계십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에서 힘을 부여받는 요령을 찾지 말게 하옵소서. 진적 저주받을 자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0-07-01 18:37
069강-렘20장1-6(거짓선지자의 행패)-jer100630
2010-07-01 17:56:51 녹취 : 오용익
069강-렘20장1-6(거짓선지자의 행패)-jer1006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0장 1절부터 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2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0:1-6
“제사장 임멜의 아들 바스훌은 여호와의 집 유사장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집 베냐민의 윗문에 있는 착고에 채웠더니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착고에서 놓아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 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 원수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내가 또 이 성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물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거하는 모든 자가 포로 되어 옮기우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네가 거짓 예언을 하여 들린 네 모든 친구도 일반이리라 하셨느니라.”
누가 천국을 가고 있다는 것은 누가 지옥을 가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어떤 식구중에 하나가 ‘엄마, 나 천국가게 되었어.’ 라고 하는 것은 그 집 식구중의 다른 누가 ‘엄마, 나 지옥가게 되었어.’ 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천국 간다는 것은 천국에 가는 그 원리가, 천국 보내는 똑같은 그 원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지옥가야 될 원리로 똑같이 적용이 되는 겁니다.
시험문제는 하나인데 그 시험문제 때문에 떨어진 사람이 있고 합격된 사람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천국은 이렇게 구원받는다, 라고 이야기 할 때 그 문제를 듣고 난 뒤에 갑자기 속에서 울컥 하면서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극구 반대하고 나설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지옥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본문에서 거짓선지자와 예레미야의 등장에서 유심히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보통 성경 볼 때에 거짓선지자는 안보이고 자꾸 예레미야만 보여서 ‘어떻게 하면 구원받지?’라고 하는데 구원받지 않아야 될 사람은 구원받지 않은 티를 내면 그것으로 말씀은 성취된 겁니다.
구원 안 받아야 되는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그것이 말씀성취가 아니라 구원받지 말아야 되는 사람은 ‘이래서 구원을 못 받는구나.’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날 때 우리는 환호성을 질러야 돼요. ‘아, 성경말씀이 틀림이 없구나.’ 하고 반겨야 됩니다. 아주 반가워야 되고 즐거워야 돼요. 이 성경말씀을 보고 저쪽에서 이 말씀을 보고 믿으려고 애를 쓸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믿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등장해야 된다는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잔뜩 기대를 해야 됩니다. 안 믿는 사람이 믿게 되기를 기대하면 안 되고, 그것은 자칫하면 저 사람이 내편 되기를 원하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저쪽에서 구원을 받지 않아야 우리 쪽이 구원받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는 겁니다. ‘이상하다. 같은 말씀인데 나는 믿어지던데 참 이상하다. 왜 저 사람은 그것이 안 믿어질까. 그러니까 믿는 것이 사람이 배웠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교회 오래 나간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저쪽을 밀치는 것과 동일한 능력으로 우리 쪽을 잡아당기는 능력으로 작용하는구나. 역시 말씀은 빈틈이 없어.’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갖고 있는 그 효과와 능력이 찬양받아야 되고 그것이 우리 구원받은 것보다 더 크게 느껴져야 되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보다도 주의 말씀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전율로 떨림으로 아주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분명하게 느껴져야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잘 안전하기 때문에 이런 소름끼치는 경험을 잘 못해 봐요.
복음을 전해보면 지옥 가는 사람들은 맹렬한 기세로 지옥으로 달려가는데 누가 지옥으로 잡아당기는 것 같아요. 본문에서 거짓선지자 바스훌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거짓선지자 중에서도 권력을 가진 사람에 속합니다. 예레미야 정도는 쉽게 때리고 가둘 수 있는 권한 같으면 레벨이 일반 목사 급이 아니고 주교 급 정도, 성전자체를 관리하는 최고위급 반열에 있는 사람이죠. 그만한 권한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언하기를 두 가지를 예언합니다. 하나는 바스훌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마골밋사빕’이라 하는데 이름이 참 어렵지요. 이 사람이 마 씨 집안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골밋사빕’이라는 이름을 예레미야가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적인 감정에 울컥해서 ‘네가 나한테 대들어? 내가 너에게 멋진 이름 지어줄까, 이 나쁜 놈아.’ 이런 식으로 사적인 감정 때문에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이름을 이미 예비한 거예요. 그리고 그 바스훌이라는 사람이 예레미야를 질타하고 때릴 것도 이미 아신 겁니다. 이것이 첫 번째 바스훌에 대한 예언입니다.
두 번째 예언은, 6절에 보면 나옵니다.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거하는 모든 자가 포로되어 옮기우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이 바스훌이라는 선지자가 이방나라에 가서 그것도 처참하게 망가진 모습으로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본인에게나 그 주변의 그 사람의 권력을 선망했던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되겠습니까?
‘나 저사람 편인데, 나 저쪽 편인데, 내가 저 사람처럼 되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했는데, 저 사람이 저렇게 망가지고 죽게 되면 저 사람을 옹호했던 우리도 같은 꼴이 난다는 뜻인데 이것은 겁나는 사항인데, 이것은 무서운 사항인데…….’ 이렇게 되는 거예요. 원래 이 바스훌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이 이름의 뜻은 ‘세력을 확장시키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이름 참 괜찮지 않습니까? 우리 말 이름으로 한다면 ‘김 확장’ 이나 ‘최 번창’ 이죠. ‘이 번성’ 얼마나 이름 좋습니까? ‘김 몰락’ 이런 것과는 비교가 안 되잖아요. ‘박 대승’ 크게 승한다는 뜻. 이 사람이 소위 신학교를 나와서 고위급 제사장이 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출세 가도에 대해서 선망의 눈으로 존경의 눈으로 바라봤겠습니까? ‘참 좋겠다. 선지자 하나쯤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권력을 가졌으니까.’
이름 자체를 하나님께서 미리 알아요. 끌어 모으는 뜻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힘을 끌어 모은다는 거지요. 힘을 끌어 모으니까 그 사람의 출세는 곧 무엇을 뜻하느냐, ‘여호와 잘 믿기 = 힘 끌어 모으기’ 같은 것으로 보는 겁니다. 여호와 잘 믿기, 그 결과가 힘 더 많이 생겨나기, 권력을 더 많이 쟁취했기, 그거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마골밋사빕’이라 지었는데 이 이름은 ‘네가 어디에 가도 사람들이 기피하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처럼 되면 안 돼. 저 사람 꼴 나면 큰 일 나는 거야. 절대로 저 사람 꼴 나면 안 돼.’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사람들로 하여금 선망의 대상에서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하게 하는 그 모든 작업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했다는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쁜 소식입니까? 하나님이 신자에게만 작용한다는 것이 우리 평소의 상식이거든요. 신자에게만 주께서 도와주시고 신자에게만 작용하시고 신자만 관리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선입관이고 상식이었는데 본문에 보니까 신자뿐만이 아니고 불신자 관리하는 것도 아주 철저하다는 사실입니다.
‘너는 절대로 저렇게 되어서는 안 돼.’라고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나와서 하나님께 빌면서 기도하면서 그것으로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한 노림수를 가지고 교회 출석하고 열심내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신학교 다니고 노회나 교단에서 활동하고 그러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 그렇게 부러워하고,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관리하신 거예요.
아주 멋들어지게 관리하신 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반대로 쉽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은 바벨론에 끌려가서 포로가 될 것이다.’ 이 말을 쉽게 한다는 말은 예레미야의 경우에 관심사가 뭐냐 하면 이 땅을 이미 포기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은 힘 되게 좋아하지? 이 땅에서 힘 끌어 모으는 것 애당초 나는 포기했다.’ 이 땅에서 힘 모으는 것을 애당초 포기한 거예요.
그걸 포기하니까 예레미야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왜 내가 이 땅에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거기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쉽게 합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레미야가 설교를 하든지 복음을 전할 때 항상 느긋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이 세상을 기꺼이 포기했거든.’ 하면서 즐거이 포기한 이유를 가지고 즐겁게 복음을 전파한 겁니다.
얼마나 자유 한 가운데서 설교하는 거예요.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나는 너희들이 그렇게 원하고 너희들이 그렇게도 귀하게 여기는 이 세상,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즐거움을 애당초 찾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 축구팀이 8강에 들어가는 것, 예레미야는 애당초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요. 어떤 교회는 그것을 위해서 기도회를 열었지만 예레미야는 애당초 그런 것과 아무 관계없는 겁니다.
왜 애당초 포기를 해야만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그 심판마저 즐겨 증거 하려고 하면 주님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 심정은 예레미야에서 찾지 말고 예수님에게서 찾읍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말씀을 완성하신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요.
누구를 너무 좋아해 버리니까, 하나님을 너무 좋아해 버리니까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달리 사랑할 것이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를 않아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아버지 장례 치르는 이야기를 하니까 ‘아버지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치르라 하고 너는 나를 따라와라.’ 합니다. 이것은 ‘내가 세상을 살아가듯이 너희도 그렇게 살아가야 돼.’ 그런 뜻이거든요.
이미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버렸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나머지 세상 것이 다 불타버리고 날아가도 그것을 흔쾌히 즐겨 증거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자유롭게. ‘돌이 떡 되게 하라.’고 해도 그것이 신경 안 쓰이고 ‘기적을 베풀어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라.’라고 해도 ‘인기? 그것 얻어 봐야 자살이나 할 것인데, 그게 뭐라고.’ 세상부귀영화? 입는 것 먹는 것으로 족하면 되지 하루 네 끼 다섯 끼 먹을 일 있습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서 말씀을 이루신 것은 자기 사랑하는 분이 이미 확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은 자기사랑에 끼일 틈이 없어요.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마 10:37)고 했어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씀을 좀 어렵게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기본을 말씀드릴게요. 기본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에 옛날에 하나님께 도움 받았던 그 힘이 지금 고스란히 반복해서 내게 주어지기를 고대하면서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을 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과거에 벌어졌던 것 중에서 멋있는 것 있잖아요. 놀라운 축복과 기적, 그것이 똑같이 반복된다는 기대 하에, 그런 소망하게 사람들은 말씀을 앞에 두고 기도하고 빌고 애타하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현재 있는 내 자리가 구멍이 나서 내 자리가 폭삭 꺼져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현재 그 사람이 자기가 자리 잡은 그 터가 좀 더 단단해지는데 있어서 뭐가 아쉬우냐 하면, 옛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었던 그 기적들, 그런 기적들만 더 보탠다면 지금의 내 자리가 정돈되고 안정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성경을 보는 거예요.
제가 이런 말씀을 왜 하느냐하면, 예레미야 당시에도 그렇고 다른 시대도 마찬가지인데 이스라엘백성들이 성경을 볼 때 다 그런 식으로 본 거예요. 그리고 오늘날 소위 교회 온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두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해 드릴게요.
첫 번째는 나아만 장군의 예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이 걸렸는데 낫기 위해서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나본적도 없어요. 그런데 엘리사의 말을 간접적으로 듣고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더니만 병이 나아서 엘리사도 안 만나고 본국으로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종 게하시가 이왕 가져온 것이니 저한테 넘겨 달라, 해서 보물 탐내다가 나아만의 문둥병이 자기한테 덮쳐서 졸지에 문둥병 되었는데 여기에서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하면, 그 나아만 장군이 어떻게 해서 병이 나았느냐, 그것에 집중해서 그것을 그대로 흉내 내면 자기가 걸린 난치병도 나을 수 있다고 이용하려고 덤벼드는 거예요.
그렇지요. 누구든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면 ‘야, 멋있다. 나한테도 그런 효과가 있다면 나도 문둥병 걸려도 나을 수가 있겠네. 어떻게 하면 그게 낫지? 아, 그렇게 순종하면 되겠구나.’ 하고 순종해서 자기 병을 낫고자 시도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놓친 게 뭐가 있나하면, 나아만 장군이 가졌던 그 문둥병이 게하시한테 그대로 넘어가서 게하시가 문둥병 걸렸다는 그 사실을 놓쳐버린 거예요.
나아만 장군은 ‘내가 어떻게 해서 병이 나았다.’고 절대로 주장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자기가 일곱 번 들어갔기에 병이 나았다고 누가 생각을 안하느냐하면 병이 나은 당사자 나아만입니다. 병 나은 당사자인 나아만장군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을 안 하다 이 말이지요. 남들 보기에는 나아만 장군이 강물에 일곱 번 들어가서 병이 나았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완전히 오산이고 오해인 거예요.
정작 병이 나은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내 저주스러운 문둥병을 그냥 벗겨줬다고 생각했지, 주님의 손이 와서 모자를 벗기듯이 나의 병을 벗겨준 것이지 내가 요단강 일곱 번 들어갔기 때문에, 내 행위 때문에 구원받았다고는 절대로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그런데 후세의 사람들은 나아만 장군이 일곱 번 물에 들어가서 나았기 때문에 우리도 순종하면 내 병이 낫는다는 겁니다.
나아만 장군이 그 소리를 들었다면 ‘너는 병 나아도 마땅한 인간이냐, 하는 그것부터 먼저 알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을 거예요. 다시 말해서 멀쩡한 게하시한테 문둥병이 들린 것은 병 낫게 하고 병들게 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 소관이라는 것을 게하시는 몰랐고 나아만은 그것을 알게 된 겁니다. 나아만 장군이 병 나으려고 왔다가 돌아가면서 알게 된 것은 병 낫고 안 낫고는 나아만 자기의 소망도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 소관이라는 것을 알고 돌아간 거예요.
또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신약에 무화과나무 저주이야기가 나와요. 무화과나무가 과실을 맺을 때가 안됐습니다. 과실을 맺을 때도 안 되었는데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보고 ‘무화과나무야! 내가 네 과실을 먹고 싶거든. 지금 당장 과실을 내놔라. 내가 두 시간 뒤에 오겠다.’ 하고 가셨어요. 주위에 제자들이 다 있었는데 ‘너희들 다 들었지?’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잠시 뒤에 ‘무화과나무야, 내가 좀 전에 과실 내놓으라고 했지?’ 하자 옆에 선 제자들이 의아해 합니다. ‘예수님이 돌았나.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과실을 맺을 때가 되었는데 과실을 안 맺으면 그것은 자기 할 일을 제대로 안한 것이니 나쁜 무화과, 못된 무화과, 그래서 저주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지금 때가 안 되어서 어느 무화과나무도 열매를 안 맺었어요.
무화과나무가 과실을 맺을 때가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생판으로 무화과나무를 보고 ‘무화과나무야, 내가 과실을 먹고 싶으니까 내놔라.’ 제철이 아닌데 열매를 내놓을 리가 있습니까? ‘네가 감히 과실을 내놓지 않다니. 저주받아라.’ 그래서 좀 있다 보니까 무화과나무를 보니까 말라죽었어요. 이걸 제자들에게 보란 듯이 했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움찔 했어요.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세상보기하고 자기들의 세상보기하고 일치될 때 비로소 제자 값을 한다고 여긴 거예요. 예수님이 하는 말을 자기들이 알아듣고 전부 다 이해된다고 여기고 예수님의 심정과 자기들의 심정이 일치된다고 장담을 한 겁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에 대한 예수님의 행위를 보니까 자기들이 아무리 해석을 하려 해도 해석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들 같으면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렇게 행패를 안 부릴 거라는 말이지요. ‘무화과나무야, 내가 실수다. 과실을 맺을 때가 되었는데 그때도 안 맺으면 그 때가서 저주하마. 지금은 과실을 맺을 때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라. 나중에 때가 되어서 과실 맺어라.’라는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이 그런 상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저주를 해버렸어요.
‘자, 제자들아, 해석해봐라. 너희들 관점에서 과연 내가 가진 관점과 일치되는지, 내가 내린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을 해석해 보라.’고 하는 겁니다. 할 수가 있습니까? 못합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것에 대한 정답은 이겁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권한은 항상 예수님에게 있음을 제자들이 알았더라면 자신들이 제자된 것과 자신들이 구원받는 것도 결코 자기의 애씀과 행함과 노력이 아니고 진작 저주받아도 마땅한 인간을 저주케 하는 능력과 똑같은 능력으로 그냥 공짜로 구원한 거예요.
그 해답을 무화과나무 저주에서 찾아야 돼요. 그렇게 되려면 제자들이 완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든 기대를 포기해야 돼요. 나아만 장군이 병이 나은 것은 남들 보기에 일곱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요단강에 들어가서 나은 것이 아니고 ‘이것은 일방적으로 내 병을 가져갔다. 나는 주님께서 그냥 실시하기 나름으로 구원되기도 하고 저주되기도 한다. 그 권한은 오로지 주님한테 있다.’는 것을 흔쾌히 아주 즐겁게 받아들인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그렇게 사랑하는 거예요. ‘당신이 나한테 해주면 내가 당신 사랑할게.’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거래고 흥정입니다. ‘그저 주님은 나를 사랑하셨고 나는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인간이 그저 받았기에 처분대로 하시옵소서. 어떤 처분을 내리더라도 저는 즐겁기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 우리의 사랑의 교제관계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무슨 말입니까? ‘네가 네 생각하면 나는 너를 죽일 거야.’ 그 말이에요. ‘네가 아직도 네 생각만 하고 있으면 나는 너를 지옥 보낼 거야.’ 그 소리를 하는 겁니다. 왜냐,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는 말은 아직도 주님 말고 다른 사랑할 대상이 은밀하게 있다는 거예요.
왜? 인간은 자기사랑 빼놓고는 사랑할 대상이 없으니까. 나는 나를 무조건 사랑해서 예수를 믿든지 하나님을 믿든지 교회를 나가든지 해서 나는 나를 무조건 살리는 방향으로 나가겠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지 절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원이나 교회에 가보세요.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성경에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고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으니까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그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그것은 사기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능력을 일체 저한테 없습니다.’라는 것을 믿는 것이 주님의 능력을 믿고 주를 믿는 겁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바스훌이라는 사람이 저주받고 예레미야는 흔쾌히 그 저주에 대해서 통보하는 것, 남들 보기에는 예레미야가 약을 올렸고 그래서 바스훌이 화를 낼만 하다고 해석하겠지만 예레미야는 압니다. ‘너는 내가 보기에 저주받기로 작정되었기에 이런 심판의 말씀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바스훌은 그 탓을 자꾸 예레미야에게 돌려서 예레미야를 때려요. 예레미야를 때리고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었어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예레미야가 욕을 얻어먹게 하시는 것은 예레미야가 결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예레미야가 자기를 사랑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하면 대번에 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시키는 대로 했는데 내 꼴이 이게 웬 꼴입니까?’ 이럴 것이란 말이지요. 그러나 예레미야는 지금 주님을 사랑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님 뜻대로 할 뿐이에요.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고 있으면 얼굴 색깔이 바뀝니다. 느긋해요. 희망적이고 행복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너무 행복해요.
그리고 그분을 너무 사랑하게 되면 세상의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그 사랑이 절대로 흔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흔들리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잖아요. 흔들리면 ‘사랑할 만하면 사랑하고 아니면 사랑 안하겠다.’ 그런 식 밖에는 안 되거든요. 주님께서 그것 때문에 계속 우리로 하여금 가짜 사랑을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흔들리게 만들어버려요.
게하시 같은 경우, 게하시는 자기를 사랑하니까. 설마 자기가 문둥병 걸릴 줄 몰랐지요.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자기는 자기 자리가 든든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레미야는 아예 자기 자리가 없습니다. 이번 여름수련회 할 때 레위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부터 할 거예요. ‘인간의 자기자리 잡음은 어떻게 해서 구축되고 형성 되는가?’
아예 우리 자리를 없애버렸습니다. 왜? 생기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붕 뜨게 만들었어요. 사랑은 위에서 하고 우리는 이 땅을 붕붕 뜨게 만들어서 이 세상 어떤 것도 사랑 안 해도 충분하게 살만하도록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랑, 그 풍성한 사랑, 그것으로만 살아가라고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리가 없는 상태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예수님 심정에서 이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예레미야가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성경을 볼 때 자기 힘으로 구원받으려고 성경보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기껏해야 자기사랑 할 수밖에 없는 저주받아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주께서 웬 은혜인지, 웬 사랑인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다 걷어 치워주시는 그런 축복을 주셨습니다. 내가 믿을 만하고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깔끔하게 다 치워주시고 오직 당겨주시는 그 사랑만 쳐다보게 하시는 그 축복이 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