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0. 6. 25) 1강 녹취록
광주 강의(2010. 6. 25) 1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24)
광주 강의(2010. 6. 25) 8-1
에스겔 6장을 공부하겠습니다.
에스겔이 선지자라는 것은 아시죠? 보통 사람과 선지자의 차이점이 뭔가 하면, 선지자가 머리가 명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먼저 입수해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남보다 먼저 알아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그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선지자의 외치는 소리가 변동이 가능할까요? 변동이 안 되지요. 그러면 선지자가 자신이 전하는 그 말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다면 선지자가 이 세상 사람들 때문에 주저하거나 낙망하거나 이러지를 않겠지요? 주저하거나 낙망한다는 말은 ‘내가 전하는 대로 되어야 할 건데. 혹시 그대로 안 되면 내가 조롱거리가 될 텐데.’ 이런 걱정은 안 하겠지요. 왜냐하면 자신이 지어낸 계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기에 “선지자를 본받자.”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고, 선지자가 전하는 변동 없는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는 같이 참여하면 될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선지자가 하는 일에 참여하면 된다. 그러면 선지자의 구조를 알아야 되는데, 무대가 있고 여기에 선지자가 있고 사람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뒤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잡아당겨서 뭔가를 시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선지자는 차두리고 뒤에는 차범근이 있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잡아당기는 분이 없어요. 왜? 자기 인생 자기 몸뚱이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나 진짜 선지자는 외치면서 뒤(자기를 당겨서 말씀하시는 그분)를 돌아보겠지요. 만약 하나님이 선지자를 놓아주면 그냥 좋다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붙잡고(차두리에게 차범근이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자꾸 계시를 주니까, 남들은 “너 미쳤어? 왜 그런 엉뚱한 소리 해!” 라고 비웃지만 선지자 본인은 알잖아요.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는 것을 알지요.
선지자는 내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그러면 이렇게 전할 때 사람들은 선지자만 보면 됩니까? 만약 A, B, C가 있다면 그 중 A라는 사람이 선지자 배후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까지 알아챈다면 이 사람은 또 하나의 그 시대에 남은 7,000명이 되겠지요. 엘리야 시대의 남은 7,000명이 된단 말입니다.
제가 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이 방식 외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다른 방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말만 듣고 그 말을 인간이 해석하는 방식은 신학교에서 하는 짓이고, ‘이 사람 말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같이 볼 수 있을 때, 선지자의 말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듣는 그런 안목을 갖는데, 이것은 주님의 손이 그 사람을 같이 묶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사로잡힌 자가 되지 아니하면 선지자는 될 수 없을뿐더러 성도도 아닙니다.
주님의 계시를 모르는 사람을 ‘이 세상사람’이라고 하고, 주님의 택함 받은 사람을 ‘저 세상 사람’이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이 세상 사람과 저 세상 사람이 섞이게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말씀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자꾸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속한 사람이냐? 땅에 속한 사람이고, 선지자나 사도처럼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인데, 이 땅에서는 이들이 같이 섞여서 살게 됩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선지자나 사도처럼 주께서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새로운 현실을 아는 사람만이 성도가 되는 겁니다. 에스겔과 선지서가 이 그림 하나로 다 설명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서론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 그림을 확대해 보겠습니다. 여기 선지자가 입을 벌려서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이 들을 때 “저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야. 저 사람 배후에 하나님이 계셔.”라고 느끼는 사람(성도)과 그것을 못 느끼는 B라는 사람(불신자)과의 충돌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삶입니다.
상당히 고생합니다. 이 반대하는 사람이 동네 목사면 괜찮아요.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이 남편이고 아내고 자식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마태복음 10장 34절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했어요.
왜 하나님께서 원수를 저 멀리 두지 않고 가장 가까운 혈육으로 두느냐 하면, 혈육은 떼고 싶어도 안 떨어집니다. 호적에서 지워도 될 문제가 아니고, 갈라서자고 해도 해결되지 않아요. 인간의 힘으로는 떼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서 뭘 보는가 하면, 선지자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다는 자체가 내 지혜로 안 것인가, 아니면 진짜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아는가 하는 것을 성령과 혈육을 대비시켜요. 그렇게 해놓고 이 자체를 성경책에 기록해 놓은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식 중에 이스마엘이 있지요. 또 한 자식 이삭이 있어요. 보세요. 이게 대결 구도잖아요. 이삭의 아들 에서가 있고 야곱이 있어요. 역시 대결 구도지요. 혈육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정(情)’입니다.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인 경우에는 자식을 낳게 되면 모든 것을 자식에게 쏟아 붓습니다. 자식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만약 A라는 사람이 성령을 받았고 B라는 자식은 성령을 안 받았어요. 그러면 이것은 안 떨어집니다. 왜? 혈육은 떨어질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하나님의 손이 “빨리 와! 세상 대충 살고 빨리 와!” 하고 잡아당기면 이 당기는 손길이 어디까지 미치는가 하면, 떨어질 수 없다고 여긴 혈육 사이를 자르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잘린 혈육은 의아해 하지요. “우리아버지 미쳤나?” 이렇게 되지요. 그런데 당사자 A 성도도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주 냉철하게 이야기합니다. “그게 계시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어.” 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성경 전체가 해석이 돼요.
출애굽 할 때 장소는 애굽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출애굽 할 때 어린양의 피에 보쌈 당해서 나왔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죽지 아니하면 애굽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혈육의 관점으로 보면 내 자식도 살아 있고, 나도 살아 있어서 산 사람끼리 평생 붙들고 사랑하면서 살려는 생각이 철석같은데 주님의 말씀이 임하게 되면 혈육 사이를 끊어버리면 졸지에 A라는 사람은 “하나님, 저를 죽여주셔야 제가 살 수 있습니다.” 라는 출애굽 고백을 하게 돼요.
내가 구원 받는 것은 안 믿는 아내와 이혼하고 기도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혼하지 말고 그냥 사시고, 평소대로 그냥 직장에 다니세요.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직장에 다니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어떻게 한다? 그 인간은 산 인간으로 보지 않고 어린양에 의해서 죽여버리는 거예요.
어린양 자체가 세상에서 볼 때 피가 나오겠지요. 그러면 어린양은 산채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죽은 거예요. 지금 하나님의 사자는 칼을 들고 집집마다 장자를 죽이려고 다닌단 말이지요.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산 자가 등장하면 다 죽어요.
SBS 아침 드라마에 [당돌한 아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요. “나를 살지도 못하게 하고 죽지도 못하게 하면 나는 어쩌란 말이야?” 라고.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습니까?
주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가지고 왔을 때는 살아있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산채로 있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죽어야 되는데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자살한다고 구원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죽는 방법이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 방법으로 죽어야 됩니다.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 돼요.
온 몸에 예수님의 피를 발라서 “나는 산 자 아닙니다. 나는 죽은 자입니다. 어린양의 피와 함께 죽었습니다.” 라고 그 안에 있어야 이 애굽같은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회에서 제가 논문 발표 할 때 바로 옆에 앉아있던 교수가 뭐라고 평가를 했는가 하면, “당신처럼 그렇게 주장을 하면 구약에서의 땅이 연속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되는데, 다니엘이 본토로 안 돌아오면 땅의 약속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어요.
제 답변은 듣지도 않았는데, 혼자 이야기했어요. 구약의 땅 문제가 신약에 오면서 구약은 애굽이라는 기업의 개념을 확장시킵니다. 이런 것은 성경을 보면서도 참 어려워요. 그 땅 그대로를 사용하면 될 텐데, 흙이 있는 땅을 개념을 바꿔버려요. 의미를 확장해서 애굽이란 의미가 예전에 있었던 나라 애굽이 아니고, 이 애굽을 세상 전부로 확대를 시켜요. 온 천지를 애굽으로 만들었어요.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그리고 십자가란 것도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님이 죽은 그 십자가 하나로 말하면 얼마나 해석이 쉽겠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가 고난당하는 장소가 전부 십자가가 됩니다. 십자가의 다수성, 또는 반복성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고난 받는 곳이 전부 십자가에요. 십자가가 예루살렘 갈보리 언덕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광주 이 땅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가 되게 하신다니까요.
우리가 해석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 자체가 그렇게 확장해서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확장시킨 해석을 따라가야 합니다. 에스겔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겔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 서론을 이야기해야 돼요.
선지서에서 옛날 개념들이 어떻게 확장되어(엿가락 늘어지듯이 늘어져서) 그 때의 개념으로는 설명이 안 되고, 어떤 확장된 새로운 개념으로 나왔는가를 지금 설명하는 겁니다. 애굽에 있을 때 분명히 어린양의 피로 나왔다고 하니까, 그 이후 유월절 절기에 사람들이 뭘 생각하겠습니까? ‘어린양의 피 때문에 애굽에서 나왔으니까 그러면 양 잡아서 제사 지내면 되겠네.’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제사 지내면 구원 받습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선지자(모세)가 외친 것을 우리가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모세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기에 인간끼리는 언어가 소통되니까 당신이 말한 것을 문법적으로 잘 맥락을 파악해서 수용하게 되면 모세가 간 천국에 나도 갈 수 있다.’ 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문법적, 역사적 해석은 틀린 것입니다. 모세가 말을 할 때는 뒤에(내면에) 있는 것이 붙들어 줘서 한 거예요. 그러면 듣는 사람들도 모세처럼 모세가 느낀 것을 같이 받아줄 때 모세의 개념을 문자적이 아니고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성경 해석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성경을 볼 때 문자로 보니까 그 문자가 너희를 죽인다.’고 했어요. 그처럼 모세를 문자적으로 보면 모든 사람을 다 죽이는 말씀입니다. 영으로 들으면 모세의 말씀은 우리가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너희는 죽은 자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말을 들을 때는 듣는 사람들은 현재 다 살아있고, ‘죽어서 좋은 곳에 가려고 나는 이 말씀을 듣는다.’ 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모세의 말을 듣고 뭘 느끼는가 하면 ‘아하, 나는 율법을 지켜도 죽은 자고, 안 지켜도 죽은 자구나.’를 깨닫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말씀을 지키지도 못하지만.
그러면 이 A라는 사람 뒤에 뭐가 있다? 모세와 동일하게 ‘이미 너는 죽은 자야.’ 라는 어린양의 능력이 함께 임한 사람입니다. 에스겔을 해석할 때도 똑같이 이 원리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금까지 이렇게 긴 서론을 한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다.’ 좀 더 나가면 ‘바로 여기가 지옥이다.’
간음한 여인을 주님은 못 본 척하지 않고 불러내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어요. 왜 그런 절차를 밟습니까? ‘진작 너는 지옥 가야할 여인이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사실은 여인만이 아니지요. 전부 지옥에 있고 ‘예수님 외에는 다 죽은 자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알려주는데 ‘진작 죽은 자다.’라는 것을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산 자를 죽은 자로 만들어내는 그 힘을 가진 분에 의해서 용서해 줄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지옥에 있는 자가 지옥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무엇이 비정상적인 일인가 하면, 지옥에 있는 자가 하나님께 용서 받는 이 사실이 횡재를 한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했는데, 여기에서 자유라는 개념은, 우리는 그냥 지옥에서 살다가 지옥 가면 돼요.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이런 대화 자체가 전부 어디에서 나온 대화냐? 다 예수님께서 살려주기 위한 대화거든요.
그러면 모세가 말한 것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주기 위함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해를 해서 ‘나 살았어요.’라고 나오니까, 그 말이 와 닿습니까, 안 와 닿습니까?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나는 살았어요. 내가 말씀 지킬게요.’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살려줄게.’ 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너는 지금 죽어 있어. 내가 살려주지 않으면 너는 희망 없어.’ 라는 의미지요. 그래서 ‘살려줄게’라는 말로 들으면, 그 말은 ‘아하, 나 같은 것은 진작 죽은 자인데 살려 주시는 구나.’ 여기고, 율법을 보면서 ‘죄 아닌 것이 없네.’ 하고 용서를 구할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정죄함이 없다는 자유를 선포하는 그것이 새롭게, 새롭게 이어지는 출애굽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항상 출애굽 할 때는 어떻게 나온다고 했습니까? 그냥 애굽 땅에서 벗어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피에 보쌈을 당하기 때문에, 이 안에 있는 우리는 진작 죽은 자가 되고 바깥의 피가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려고 애썼는데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죽은 자로서 구원 받은 거예요.
어제 대전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교회는 인간이 못 세운다.’ 그 이유가 뭡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것이기 때문에, 이 피는 내 피가 아니고 하나님의 피로 교회가 되기 때문에 부흥사 불러서 헌금 거두고 그 돈으로 건물 세운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이 못 세워요. 못 세우기 때문에 가짜 교회냐, 진짜 교회냐를 분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피를 가지고 교회를 흔들어 봐요. 그 때 ‘우리가 돈 내서 세운 교회를 왜 흔드느냐?’고 나오면 그것은 무너질 가짜 교회고, ‘주의 피로 세운 교회가 무너질 리가 있습니까? 우리는 주의 피만 바라봅니다.’ 하면 그것은 진짜 교회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흔들어요. 교회를 깨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깨어지면 그것은 가짜 교회고, 온 교인이 목이 날아가는 순교를 해도 계속 십자가 피만 높이면 진짜 교회이고 그렇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이 못 세웁니다. 인간의 노력과 땀은 하나님의 피가 아닙니다. 십자가 피로 교회가 세워지지 사람의 노동으로 건물을 세우고 정성을 아무리 기울여도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에스겔을 공부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워봅시다. 1) 진작 우리는 죽은 자다. 2) 살려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3) 혈육과의 끊어짐. 왜 혈육과 끊어집니까? 혈육이 끊어질 때 인간은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가장 생생하게 알 수 있어요. 친구가 끊어지는 것은 괜찮아요. 그러나 혈육이 끊어지면 자신의 근본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이 임해야 되지만.
일반적으로 목사와 목사 사모의 관계를 보면, 사모는 남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어요. 그냥 일반 부인들처럼 목사일 잘해서 유명세를 타고 돈을 많이 벌어서 남들처럼 자식들 잘 교육시키고 그런 수단으로 목사를 생각하지요. 이걸 속에 감춰놓고 겉으로는 복음을 사랑하는 척하면서 살지요. 이 사람은 남편을 볼 때 혈육으로 보는 거예요. 영으로 보지 않고 혈육으로 보는 겁니다.
항상 이런 원리에 따라 주님은 일하시기 때문에 이것을 거부하면 안 됩니다. 혈육이 끊어지면 죽은 자가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죽어도 괜찮으냐?” 라고 늘 물으십니다. 이런 사건들이 늘 성도에게 발생합니다. 이런 관점 아니면 우리가 에스겔을 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제 6장을 보겠습니다. 2-4절에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을 향하여 그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작은 산과 시내와 골짜기를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로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너희 제단이 황무하고 태양상이 훼파될 것이며 내가 또 너희 중에서 살육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서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고 했어요.
지금 무대에서 에스겔이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각자 자기 뒤에(차두리처럼 뒤에서 차범근에 조종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이 에스겔이 하는 말을 듣고 반박하거나 반항하지 않고 ‘우리는 진작 죽은 자입니다.’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하면, 선지자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지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 아까워 죽겠습니다. 좀 봐주세요.” 이런 것이 있으면 자기가 초조하고 전하면서도 주저하겠지만 그런 것이 없어요. 선지자는 자기가 전하는 내용을 자신이 수정하거나 바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변동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그냥 “예, 알겠습니다.”하고 외치는 겁니다. 외칠 때 선지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진작 죽은 자인데, 잘 하셨습니다.’ 그렇게 죽은 자가 될 때, 또 하나의 출애굽이 에스겔 시대에 시작되는 겁니다.
한 시대가 있다면 각 시대마다 사람이 있고, 어떤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그 말씀을 가지고 자기 생존을 위해 자기 역사를 만듭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외치는 말씀은 현재 인간이 생존하려고 애쓰는 역사, 시간, 공간을 깨버립니다. 그러면 ‘맞습니다. 나는 진작 죽어야 마땅한 자입니다.’ 이런 소리가 나오도록 발가벗깁니다. 그런데 어느새 또 울타리가 생겨서 “하나님, 이정도 믿음 같으면 이제는 고생 좀 적게 해도 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또 선지자가 말씀으로 공격합니다. 그러면 또 자기 울타리가 깨져요. 이것이 반복됩니다.
목사가 금방 안수 받고 개척교회 해서 6개월 정도는 신나게 복음전하고 합니다. 새벽기도 없는 운 좋은 교회에 가면 좀 더 오래가요. 일주일에 세 번 만 설교하면 되니까 밑천이 조금 더 오래 가는데, 매일 새벽기도를 하는 교회면 일주일에 열 번 설교해야 되기 때문에 금방 밑천이 바닥납니다. 그렇게 되면 간증거리를 주워 모아 설교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이 동행해서 잡아당기고 끌려가고 해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내가 신학교에서 많이 배웠으니까 이 배운 것으로 나의 생존과 나의 역사를 지속하기 위해서 마음껏 실력을 펼치려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미사일을 쏘아서 다 깨버립니다.
그러면 ‘나는 신학교 나와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진작 죽은 자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지요. 이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으로 사로잡았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너의 것을 전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주신 것만 전하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대전 강의에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차두리가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데 차범근이 뒤에서 조종합니다. 이렇게 뒤에서 조종하는 방법도 있고, 주께서 동행하시면 같이 나란히 서게 되는데 내가 입을 열어서 말하려고 하니까 주께서 입을 막아버리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보다 앞장서서 했기 때문에 지금 내가 확보하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못 전하게 만들고, 지금 내가 확보하고 있는 생각은 엉터리고 잘못 되었다고 꾸짖는, 두 발짝 앞서서 이야기해 버리니까 내가 전하려고 생각했던 것이 깨어지는데, 그러면 자기는 발가벗은 자가 되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이렇게 될 때 앞장서서 주님의 말씀만 전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교회 교인들은 목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교인들을 주님 계신 곳으로 날마다 새롭게 더 깊이 있게 이끄시는 그러한 행운을 잡은 성도가 되는 겁니다. 출애굽이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과거-현재-미래’로 가는 틀이 있는데, 이것을 미사일을 쏘면 과거가 폭파됩니다. 이 틀이 폭파되니까 미래에 일어날 일이 우리에게 덮치면 우리는 [미래소년 코난]이 되는 겁니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미래의 일을 바라봅니다.
에스겔 6장에서 쉬운 것은, 주께서 전부 다 부순다는 거예요. 왜 부숩니까? 진작 우리는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채는 사람은 몇 명 안 됩니다. 유구한 예루살렘의 역사, ‘주께서 은혜를 주셔서 세운 이 성전을 왜 부숩니까?’ 라고 과거의 역사를 또 붙들겠지요. 그것이 자기의 울타리가 될 것이고, 하나의 권력이 될 것이고, ‘이것 쌓는데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것을 부수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제대로 아는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 온 것도 우리 힘이 아니고, 모든 것을 다 부숴서 내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당겨주시면 우리의 관심사는 ‘오늘은 또 어디로 이끌어 주실까?’ 하고 말씀에 이끌려 사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3절 끝에 보면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라고 했는데, 산당 앞에 ‘너희’라는 말이 있어요. 산당을 하나님이 만들라고 했습니까? 아니지요.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만들었지요. 산당을 지은 취지는 산당을 지은 사람 좋으라고 세운 거예요.
그러면 산당과 예루살렘 성전의 차이는 뭡니까? 성전에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피가 있고, 산당은 인간의 땀과 노력이 있는 거예요. 교회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산당 같은 교회가 있고, 진짜 교회가 있어요. 진짜 교회의 특징은 인간의 노동이 눈곱만큼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만약 이 교회를 내가 애쓰고 기도 많이 해서 이루었다고 한다면 그 교회가 몇 년의 역사가 되었든지 관계없이 그것은 산당입니다. 산당 같은 교회가 안 되려면 날마다 산당 같은 교회를 부숴버리면 ‘나는 진작 죽어야 돼.’ 라는 사람이 남겠지요. 그것이 바로 예언하신 주의 말씀에 보쌈 당한 새로운 교회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내 자식은 서울대학 가야 됩니다.’ 라고 기도할 때,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산당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까 ‘세상 심판하신다고 하시는데 서울대학 나왔다고 불에 안타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 알아서 해주세요.’ 이렇게 하면 그 자식은 하나님 자식이 되고,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말씀이 오게 되면 진짜 교회고, 말씀이 없이 내 것을 내 노력으로 지키면 그것은 곧장 산당이 되는 겁니다. 그 산당을 하나님께서 부수는데, 그 산당을 부수다가 심지어는 예루살렘 성전까지 다 부숴버립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이 이미 산당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산당을 부술 때 원칙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지요. 근대 이후에는 자기밖에 모르지만 옛날 사람들은 항상 ‘신’ 다른 말로 하면 ‘대자연’의 변화에 맞춰서 살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할 필요도 없이 대자연에 비는 겁니다. 지금도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들의 부모님들이 많이 빌어요.
그런데 신을 바꾸라는 겁니다. 이 말은 신은 이미 있다는 거지요. 신은 나를 지배하는 모든 환경이 신이 되는 겁니다. 뭔가 주고받는 대화의 상대가 돼요. 환경이. 이것을 ‘일월성신’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 보통 뜨는 달과 보름에 뜨는 달이 다르고, 보통 나무와 천년 된 비쩍 마른 고목이 다릅니다. 목사도 그렇습니다. 깨끗한 양복에 키 크고, 멋지게 잘 생기고, 목소리도 무게가 있고 하면 카리스마가 있는 것 같고, 잠바 입고 비쩍 말라 못생기고, 목소리도 개미소리 내면 목사로 인정도 안 하지요.
구약 성경에서의 죄는 딱 한 곳에서 나옵니다. 현재 너는 환경에 적응하려고 한다. 환경에 적응하는 그것을 바꿔야 됩니다. 현재 네가 환경에 적응해서 살려고 하는 것을 바꾸라는 겁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광주에 있는 양동시장에 지금 늦은 밤이지만 시금치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에스겔 이 말씀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없지요.
밤늦도록 시금치 파는 이유는, 집에 아이들 공부시키고 밥 먹고 살려고 늦도록 시장에 죽치고 앉아 있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의 신은 뭡니까? 현재 주위에 있는 환경, 자식이죠. 이게 바로 신이에요. 16세기 근대 주체사상에서는 내가 누구냐를 묻는데, 그 이전에는 왕이 있었어요. 성경 전체가 왕이 있던 시절에 쓴 것입니다. 그 시절에는 왕의 말을 잘 들으면 자기 생존에 유리합니다.
양동시장 난전에서 시금치 파는 순박한 아주머니도 만약 대한민국에 왕이 있다면 ‘오늘도 임금님 은덕으로 시금치 팔았습니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조선시대 사람들 그랬어요. 그래서 한성(서울)에서는 선배 왕들을 모시는 제단 ‘종묘’가 있었어요. 지금도 ‘종묘’가 있어요. 종묘가 뭐냐 하면, 전 백성들의 사고방식을 한 종교로 모으기 위한 이데올로기, 사상 체계입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요구해요. 그게 신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왕을 요구하는 것은 여호와 나의 왕 됨을 거부하고 이방 사람들이 신이라고 여기는 것과 바꿔치기 했다. 오냐, 왕 줄게. 왕 때문에 망해봐라.’
왕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주 받게 하는 거예요. ‘내가 왕인데 어떻게 나 외에 다른 왕을 섬기느냐?’ 그래서 산당에 벌 내리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종교가 없어. 교회도 절에도 안가. 그렇지만 어렵고 힘들 때는 빌고 싶어.’ 라는 환경 자체가 현실이 아니고,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 그것이 현실이라는 겁니다. 산당이 폭파되고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예루살렘 성전을 부수는 그 현실이, 네가 그저 ‘천지신명이여, 내 자식 좋은 대학가게 해 주세요.’라고 비는 그 신을 대체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안 나오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어서 지금도 의사로 일하고 있는 그 의사의 문제점이 뭡니까? 자기를 의사로 만든 그 환경이 신이 되기 때문에 그 신을 에스겔의 예언으로 바꿔야 됩니다. 이것을 칼빈이 몰랐어요. 칼빈은 교회 와서는 여호와 섬기고 세상에 나가면 자기 소명(직장 일) 잘 감당하면 된다고 했어요. 아닙니다. 그게 다 바뀌어야 돼요.
예를 들어서, 치과 의사라고 한다면 ‘내가 치과를 해도 주께서 오늘 부르시면 다 그만두고 가는 거야.’ 왜? 하나님의 예언이니까. ‘내가 치과 병원 세웠지만 하나님이 불로 심판하면 다 탈 것이야. 왜? 그것이 에스겔의 예언이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말씀을 유일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 그 사람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을 실제와 매치를 시켜야 됩니다. 어떤 교회가 예배당 지어놓고 그것이 뭐냐? ‘나 외에 다른 신’이 되는 거예요. 목사에게 예배당 건물과 교인들이 자기를 지켜주는 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는 자기가 장만한 산당이 더 크게 되기를 위해서 여호와께 기도하지요.
그래서 에스겔은 처음에는 산당을 치고, 나중에는 사람을 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혈육을 쳐요. 산당을 치면서(외부의 건물을 치면서) 직접 가정을 파탄시킵니다. 사람을 쳐버려요. 건물이야 불타면 그만이지만, 유다 나라가 망할 때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잖아요. 그게 하이라이트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왜? 진작 죽어야 될 사람이거든요.
끌려가면서 끌려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그냥 남은 사람은 저주 받고.
10분 쉽시다.
(2010. 6. 30. 11. 24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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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이집사(IP:110.♡.197.100)
10-06-30 19:32
계속 수고해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던 내용입니다. 녹취록이라니.......그 수고로움이 더욱 값지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