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13: 1- 9 (예수님의 비유)
Re..마 13: 1- 9 (예수님의 비유)
이름 : 이근호(IP:)
예수님의 비유
2004년 1월 4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1-9
13: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13: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13:4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13: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13: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나는 내가 지킨다"라는 방식은 오기에 불과합니다. 어느 인간치고 오기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심지어 노숙자들에게 오기로 똘똘 뭉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일을 이런 오기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실시 하십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인간들의 생각하는 바가 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각자 마음 속에 새로운 각오와 오기로 말씀을 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 말씀만 하옵소서. 제가 그 말씀대로 잘 지켜서 반드시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는 결심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엄청 오해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그 뒤에 긴긴 말씀의 내력과 배경이 깔려 있는 상태에서 하십니다.
즉 마태복음 13장에 이를 때까지 그 전에 예레미야가 있었고, 이사야도 있었고. 다윗과 모세 시절도 있었고 그리고 창세기 시절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지금 이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때부터 줄기차게 내려오는 그 일관성에 준해서 비유의 말씀을 하시기에, 이런 예수님 앞에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반드시 내가 지켜내어서 구원에 이르게 해야지"라고 마음 먹는 것은 너무나도 예수님의 마음과 다른 태도입니다.
마태복음 13:11에 보면,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오기와 각오를 충족시키는 말씀이라면 결코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정답은 이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과 오기를 부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전혀 그 장단에 맞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하실까요? 여러분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빛과 빗물이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내리십니다. 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관계없이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은혜성이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와의 맺은 약속으로 인해서 주어집니다. 바로 이 일방적 은혜성과 동일하게 마지막 최후의 심판을 통과하는 것도 오직 은혜를 입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오기와 신념으로 뭉쳐져서 산다고해서 심판에서 통과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예수님은 이런 은혜성 노선 밖으로 이탈하여 일하시지 않습니다. 즉 누구나 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를 준 자에게만 은혜를 알게 하시는 방식으로만 인간들을 구원하십니다.
물론 이러한 취지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리둥절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기본 선입견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자기 잘못을 분명히 알았습니까 아니면 몰랐습니까? 분명히 아담과 하와는 자기 잘못을 시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안쫓겨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추방되었습니다. 우리네 상식같으면, 하나님은 자기 잘못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뭐든지 원상회복시켜 주는 자비로운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가차없이 아담과 하와를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위주로 움직이지 결코 인간 위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 위주로, 인간을 절대시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의의와 가치를 절대시하기 위한 조치로서 인간들 만드신 겁니다.
에덴동산은 결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혼수품이 아니었습니다. 생명나무의 취지를 위하여 만든 동산이었기에 그 안에 죽음의 선악과도 함께 있었고 아예 동산 한가운데를 자리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란 은혜없이는 존재할 가치가 아예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앞으로 천국에 들어가야 될 자에게도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순수하게 은혜로만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라는 의식은 도저히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의 책임감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인간이란 애초부터 '자기 것'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분이 저에게 이런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개척교회하는데 힘드시지요?"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소리를 듣고 너무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란,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그것으로 전부를 다 얻은 것이고 그 즐거움과 행복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개척교회 때문에 힘든다고 느끼는 것은 곧, '자기 것'이 따로 있다는 말이 되고 이것은, '내 것의 인생은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하지 않느냐"라는 식의 사고방식에 불과합니다.
이런 자는 구원되지 못할 자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만 구원시키십니다. 마치 비와 햇빛이 우리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쏟아지듯이 말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예상치도 않는 사고와 병으로 고생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병실에서 저쪽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있노라면 은근히 화가 치밀게 마련입니다. 자기보다 더 나쁘고 악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은 저토록 건강하며 활기차게 살아가는데,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보려고 애쓰는 자기 자신은 왜 이처럼 악한 상황 속에서 헤매는지를 생각해 볼 때 부화가 치밀어오를 것입니다.
구약 욥기에 보면 욥이 이런 경우를 당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줄기차게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 광야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요. 텃밭도 없는 곳입니다. 짐승도 없는 곳입니다. 우리 인간들 눈으로 볼 때에 하나님은 정말 쓸데없는 곳에 비를 내리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허비하는 듯한 은혜, 즉 광야같이 아무 짝도 소용없는 우리 자신들에게 비내리는 심정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은혜를 입은 자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광야보다 더 무가치한 것이 우리 자신인 것을 아는 자만이 천국 백성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직 천국을 허락 받은 은혜받은 자를 골라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귀있는 자 들을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러분 만약 들을 귀없다고 여겨봅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일반적인 농사짓는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비유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일어나는 경우를 하나 그냥 채택한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다시 보게 되면,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입니다.
자... 여러분들은 어떤 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까? 네 가지의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온 농사에 대해서 상식선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복잡하게 됩니다. 우선 우리들이나 그 당시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농사철에 어떤 결과들이 여러 가지로 나올 것인가에 대해서 먼저 예수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면, "예수님, 어떻게 하면 농사 잘지을 수 있어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느냐 말입니다. 분명코 없습니다. 이처럼 아무도 예수님에 대해서 농사에 관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불쑥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언급을 하셨다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반응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란 말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이미 인간들이 천국에 대해서 먼저 물어볼 그 어떤 권한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45:15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구원자'라고 하나님을 소개하면서도 그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숨어시는 형태로 구원을 하신다는 겁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뿐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구원에 환장해서 구원자나 하나님을 찾아다닌다 할지라고 구원은 어림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들을 귀도 없는데 무슨 수로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따라서 비유 자체를 분해하면서 해석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결실이 맺혀야 될 자에게만 이해가 되는 식으로 예수님의 비유는 전개되는 겁니다.
어떠한 인간의 노력도 가미되지 않는 겁니다. 단순히 이미 옥토로 지정받았기에 그냥 예수님에 은혜에 의해서 열매가 맺힐 뿐인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쉽고 편하게 들리는 사람은 자기 오기를 포기한 사람이요 곧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은혜받은 자격이 애초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이런 본인에게 광야에 비내려주듯이 영생을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