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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6월 21일 피27강 강요된 선택(언어)과 권력인 자아 깨기강의아가서

대구 6월 21일 피27강 강요된 선택(언어)과 권력인 자아 깨기

이름 : 관리자(IP:124.59.87.52)

100621 피27강 강요된 선택(언어)과 권력인 자아 깨기

관리자(IP:124.♡.87.52)

10-06-21 15:37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구/대구100621피p102강요된선택과자아깨기.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구/대구100621피p102강요된선택과자아깨기.pdf

관리자(IP:220.♡.41.203)

10-06-23 17:16

동영상 없습니다. 못 찍었습니다.

서영준(IP:211.♡.133.126)

10-09-07 09:59

비오는 언덕에 앉아 말씀의 바다에 빠지려하나 글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게 해 주세요.

관리자(IP:124.♡.87.52)

10-09-13 22:57

대구100621피p102강요된선택과자아깨기

[10 대구강의 9] - [피 27] - 강요된 선택과 자아 깨기

10,06,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언어규칙’에 대해서 !!

2010년도 6월 21일 강의를 시작하겠는데, 먼저 교재 102페이지를 살펴보자.

** 언어는 규칙과 구조에 의존하는데, 자기만의 언어규칙을 따로 실행하고 있는 게 된다. 과연 자기만의 의미규칙이 일반적인 언어규칙에 종속될 수 있을까?

이 문장을 읽어보면, 문장이 약간 길기도 하지만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감이 잘 오지 않지 싶은데, 그렇지요? 함축된 의미를 한번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은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의미규칙과 언어규칙이라는 것이 말이다.

먼저 이 ‘언어규칙’ 이란 것은, 한국사람이라면 한국말을 사용해야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즉 통한다는 것은 서로 규칙이 맞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이것을 ‘선풍기’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을 ‘팬’ 이라고 하면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풍기’ 라는 소리와 ‘팬’ 이라는 소리가 다르니,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 근호야, 밥과 김치를 먹어야지 !!

그런데 이 ‘언어규칙’ 이란 것은, 자기가 만든 게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부모가 강요한 것인데, 그래서 아이가 나이가 5살이 되어도 밥을 먹지 않고 김치를 먹지 않으면 엄마에게 얻어맞는다는 것이다. 즉 엄마가 밥을 먹고 엄마가 김치를 먹으니, 그것을 자식에게 강요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언어규칙은 강요를 하게 되는데, 그것을 수용하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순종’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라” 라는 의미는, 후발자는 선발자에게 복종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 선발자가 가지고 있는 언어규칙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쉽게 쉽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무튼 이렇게 엄마가 “김치를 먹어라!” 라고 했을 때, 그런데 만약에 한국 엄마가 미국 아이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했다면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먹어라’ 라는 말은 분명히 영어로 ‘eat’ 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먹어라’ 라고 했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규칙’ 이라는 것은, 이미 부모가 가지고 있는 질서에 후발자가 되는 자식을 강요하는 것인데, 즉 부모의 세계에다 자식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너는 나의 경험상, 죽이 아닌 밥과 김치를 먹어야만 건강하게 살 수 있어!” 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강요를 한다는 말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말이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동시에 언어규칙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모는 자기 아이가 자기 언어규칙 속에 들어왔다고 생긋생긋(?) 웃는데, “아이쿠, 우리 아니는 말도 참 들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이라는 것이다.

◈ 소시지와 계란 후라이의 추억 !!

40대 중반을 넘은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 어떠했는가? 가난한 학생들은 도시락에 반찬으로 김치만 들어있는데, 그래서 만원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다가보면 김칫국물이 다 흘러서 엉망이 되고 말이다. 교과서에도 김칫국물이 빼어있고 말이다. 물론 대부분이 다 그러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부잣집 아이들은 어떠한가? 반찬에 소시지와 계란 후라이를 밥에 깔아서 온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될 때 그 아이는 어떠하겠는가? 자기는 “김치를 먹으면 순종한다” 라고 여겨서, 그래서 반찬으로 김치를 넣어서 학교를 갔는데, 그런데 옆에 있는 자기 짝쿵은 소시지를 가지고 오더라는 것이다. 또한 계란 후라이를 밥에 덮어서 오고 말이다.

그럴 때 그 아이는 어떤 좌절감을 느끼는고 하니까, “나도 저것을 한번 먹어봤으면!” 라는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아이는 언어규칙 속에서 그 언어를 사용해서 엄마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엄마, 나도 소시지!” 라고 하다가 그만 된통 혼 줄이 난다는 것이다. 즉 “이 놈아, 우리 형편에 무슨 소시지란 말인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 아이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물론 계속 순종은 하는데, 하지만 그 언어규칙에서 나온 엄마의 세계가 아닌 소시지를 먹을 수 있는 자기의 세계가 그리워진다는 말이다. 즉 “왜 우리 부모는 가난해서 내가 소시지를 먹을 수 없는가?” 라고 하는, 거기에 대한 자기만의 새로운 의미규칙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수종은 잘 하면서도, “예, 예, 예”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의연 중에 무엇인고 하니, “나도 빨리 독립을 해서 소시지만 마음껏 먹을 수 있다면, 그 이상 내 인생의 행복은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소시지를 쳐다보지도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 시절에는 도시락 반찬에 소시지가 들어가고 계란 후라이가 들어가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만의 의미규칙을 !!

그것이 의미규칙이 되는데,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부모의 일방적인 세계에서 따로 자기만의 살림을 차리면서 나오는 것이, 그것이 부모에게는 수종을 하면서도 그 안에는 자기 꿍꿍이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만의 의미규칙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서로 말을 주고받고 주고받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따로 따로 각자의 꿍꿍이속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남북전쟁이 일어났다고 했을 때, 그래서 이제 북으로 진격을 하는데, 거기에 대학에서 식물학을 가르치다가 온 교수도 있고, 고고학을 공부한 사람도 있고, 부동산 투기를 하다가 온 사람도 있고, 또한 북에 친척이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각자가 다 생각이 다른데, 식물학자는 북한의 식물을 궁금해 할 것이고, 또한 고고학을 공부한 사람은 주몽의 유적지를 보고 싶을 것이고, 부동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땅을 두리번거린다는 말이다. 그리고 북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 사람은 자기 혈육이 그리울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북으로 진격을 하면서도, 자기만의 꿍꿍이 속마음은 다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과연 우리 인간이 포기할 수 있을까? 물론 묻혀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결코 포기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요?

◈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 !!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살펴볼 것은, 이렇게 같은 형과 동생이 있다고 하면, 성경에 보면 에서와 야곱이 나오고 말이다. 그들에게는 같은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갔던 길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같은 길이 아닌,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삭과 리브가가 외치는 그 하나님의 언약을, 그것을 ‘이삭언약’ 이라고 하는데, 그 언약에 매달릴 때 무엇을 놓치게 되는가? ‘이삭언약’ 이란 언어를 해석하면 자기도 이삭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여기지만, 하지만 여기서 야곱언약으로 인해서 야곱의 갈 길과 에서의 갈 길이 그만 갈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즉 이삭언약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야곱언약으로 그만 갈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둘로 말이다.

(이때 울산 팀이 늦게 도착한 듯) 어서 오세요. 더운데 오신다고 고생했습니다. 아무튼 이 이삭언약이 야곱언약으로 그렇게 갈라지게 되는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해석을 할 때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는데, 첫째로, 이삭이 받은 언약을 이삭의 그 레벨에서 해석을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삭언약은 언어이니 말이다. 그러면 이것이 맞는가?

이삭의 수준에서 이삭과 같이 해석을 했다면 말이다. 물론 틀렸는데, 그러면 이삭언약이 무엇으로 갈라졌는가?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이, 같은 자식이라면 부모에게 순종하면 되겠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야곱에게서 야곱과 에서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야곱언약인데, 그러면 이삭언약을 언어적으로 해석한 그것이 과연 옳으냐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 구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옳은가?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면, 구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히 틀렸는데, 그런데 목사들은 자꾸만 구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자고 하는데, 즉 ‘순종해라’ 라고 했으니, 그냥 순종을 하면 되는데, 십계명을 지키라고 했으면 지키면 되고 말이다. 그러니 그게 무엇이 잘못이냐는 것이다. 문자를 문자로, 즉 언어체계를 언어체계로 해석하는데 말이다. 그들이 매일 주장하는 게 그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삭이 알고 있던 이삭의 문자적 해석은 어떻게 되는가? 나중에 야곱과 에서에게 가게 되면 그것이 틀린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틀린 것으로 말이다. 즉 “이삭언약은 틀렸습니다” 라고 하면서 야곱언약으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 이삭언약은 틀렸습니다 !!

그렇다면 한다면, 굳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 야곱 언약이라고, 그렇게 하지를 말고 처음부터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되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언약을 자꾸만 주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을 주어서 그만 헛갈리게 하는데, 그 헛갈린 대표적인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란 말이다. 즉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어디로 간다고 했는가? “뭐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웃기지 마라. 너희들은 지옥이 간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들은 뭐라고 하는가? “성경을 보고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데, 하라고 하면 하면 되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되지 않는가?” 라고 주장한다는 말이다. 자기 속에 꿍꿍이는 다 따로 있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남들이 보기에는, 자기는 문자적으로 해석을 했으니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성경대로 했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런 자들에게는 저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설교를 하지 말고, 아예 성경을 그냥 읽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어서, 듣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도록 말이다. 차라리 그것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 인간이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

그러니 여기 이삭언약에서 야곱언약으로 내려올 때 여기는 무엇이 끼어드는고 하니, 그만 ‘죄’ 문제가 끼어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 문제가 끼어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은 이삭언약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냥 맹탕으로(?) 해석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어떤 해석을 하게 되면, 미처 본인도 몰랐던 죄가 가미되어서 이삭언약을 해석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석하면서 “어어, 그것이 아닌데”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니 야곱언약이 내려오면서, 여기서 무엇을 느끼게 되는고 하니, “아하, 나의 해석이 죄악되고 잘못된 해석이로구나” 라고 하면서, 그렇게 그런 해석한 사람을 들통을 내고 고발하면서, 이삭과 더불어 야곱언약으로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식이 부모를 살려주는데, 즉 야곱이 아버지를 살린다는 말이다.

◈ 다윗언약 - 다윗의 자손이 다윗을 살려 !!

다시 말해서, 다윗의 자손이 다윗을 살리는데, 그게 바로 다윗언약의 핵심이란 것이다. 그러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주님인데, 즉 주님께서 거꾸로 자기 조상 다윗을, 즉 다윗언약을 해석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다음과 같은데, 즉 우리 인간은 과거 자기들이 일던 가락으로 현재를 해석하고, 그렇게 해서 뭉쳐진 그 해석이 미래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과거를 거쳐서 현재로 해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들이 하는 해석방법인데 말이다.

◈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를 해석 !!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그것이 인간의 죄임을 아시고는 반대로 해석하신다는 것이다. 즉 미래에서 거꾸로 해석이 날아와서 현재를 해석하고, 또한 과거를 해석하신다는 말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왜 내가 9살 때 우리 부모님은 이혼을 했을까? 그때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내가 공부를 잘했을 텐데!”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과거에서 해석해서 현재와 미래로 잡아당기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현재에서 과거로 되돌아가게 되면, “아하, 그때 우리 부모가 이혼한 것은 지금 나를 있게 하기 위함이구나” 라고 하면서, 반갑고 감사한 마음으로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지금 현재의 ‘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있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은혜로 생각하게 되면,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로 해석하는 것이 되지만, 그러나 은혜가 없이 불퉁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항상 과거 탓을 하게 되는데, 즉 “그때 내가 이랬었는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성도의 미래는 천국으로 확정 !!

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천국인데, 즉 이미 확정된 해석이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천국에서 누구를 섬기는가? 어린양을 섬긴다는 말이다. 이것을 설명하면 또한 굉장히 복잡한데, 왜냐하면 어린양의 보좌를 둘러싸서 섬기는 흉내를 누가 내는고 하니, 바로 악마가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악마는 자기 종인 귀신들을 보내서 보좌를 둘러싸게 되고, 그런 귀신의 영이 임한 인간들이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이다. 즉 악마의 어린양의 보좌의 구조를 알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흉내내어서 지상에 그대로 심어버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주변에는 ‘권력’ 이라는 것이 둘러싸고 있는데, 우리 인간은 항상 이 권력이 깨어져야만 본인의 진면목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 권력에 둘러싸이면, 그 권력을 믿고 자기가 잘났다고 한다는 말이다.

◈ 이근호 - 인간의 모든 선택은 강요된 선택이다 !!

그러니 이삭언약에서 야곱언약으로 내려갈 때, 이삭이 가지고 있던 죄악된 권력이 깨어지면서 “아하, 내 선택이 잘못되었구나”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이삭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저는 무엇이라고 표현하는고 하니, “인간의 모든 선택은 강요된 선택이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우리 인간에게 선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언제나 선택을 하는데, 하지만 그것을 자기가 자유롭게 하는 선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강요된 선택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기존의 권력에서, 그 권력이 곧 악마의 구조인데, 즉 죽기를 무서워하는, 즉 자기가 불멸되지 못할까, 그것을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그러한 것을 과거부터 계속해서 해오고 있는데, 그런데 미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천국에 가서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면류관을 반납하고 그 어린양을 섬기는 것인데, 즉 이미 확정된 의미체계라는 말이다.

◈ 권력이 사라지면 주체가 없어 !!

하지만 우리 인간은 자기 권력을 포기하게 되면 자기 주체가 없어지는데, 어려운 이야기라서 생략하고 싶은데 말이다. 즉 권력이 사라지게 되면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양파껍질을 다 벗기고 나면 양파가 없듯이 말이다. 왜냐하면, 양파 자체가 껍질로만 되어있으니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 주체는 권력으로만 되어있는데, 계속해서 권력으로만 되어있다는 말이다. 발꿈치에 보면 각질이 있는데, 그런데 그 각질을 계속해서 벗겨내면 어떻게 되는가? 나중에는 발꿈치 자체가 날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발꿈치와 같은 모든 근육은 층으로만 되어있는데, 그 층을 자꾸 벗겨내면 사라지고 만다는 말이다.

◈ ‘피’ 인가? ‘권력’ 인가?

하지만 천국에서 어린양을 섬기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거기에 대한 것은 누구의 안목인가? 곧 예수님의 안목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피를 흘려주셨는데, 그러면 여기에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말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의 피가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가?

분명히 피를 증거하라고 성도가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권력을 끌어다 모으는 더러운 버릇이 있어서, 좋다고 하는 것은 다 끌어 모은다는 것이다. 복분자도 끌어 모르고, 또 산수유도 끌어 모으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좋다고 하는 것은 다 모으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피도 끌어 모은다는 말이다.

권력이 깨어지고 벗겨져야, 주께서 피로 만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즉 권력이 아닌 피로 만들어진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하는가? “나는 십자가도 알고 복음도 안다” 라고 해놓고는, 그런데 나중에 보면 “나는 힘이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나보다 힘이 센 놈은 나와봐 !!

그렇게 피를 내놓아야 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피가 아닌 자기 힘을 내놓는다는 말이다. 교회에서도 뭐라고 하는가? “나보다 힘이 센 놈은 나와봐” 라고 하는데, 그러니 교회자체가 그만 권력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 교회에는 힘을 줘봐야 똥밖에 안 되는데 말이다.

아무튼 미래는 이미 결정이 난 것인데, 그런데 문제는 권력에 둘러 쌓여져 있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둘러 쌓인 인간으로 바뀔 것인지, 그것이 관건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겠는가? 안 되는데, 그러니 깨어지면 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권력이라는 체계를 깨어버린다는 말이다.

◈ 인간들의 기도 레퍼토리 !!

여기에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요약해보면 간단한데, 우리 인간이 언어규칙을 핑계삼아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교회에 순종하고, 또한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뿐이라는 것이다. 즉 “주여, 믿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 인간들의 기도는 그 레퍼토리가 항상 정해져있는데, 즉 인간들마다 하는 기도의 내용이 다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기도의 레퍼토리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이 권력에서 다 나온다는 것이다. 권력에서 말이다.

◈ 엄마는 왜 숙주나물을 선택했는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딸이 무작정 상경을 해서 힘들게 구로공단에 취직을 했는데, 그러면 시골에 있는 부모는 어떻게 하는가? 딸에게 가려고 자기 딸이 좋아하는 숙주나물을 비롯해서 음식을 장만해서 보따리에 바리바리 싼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부모는 왜 콩나물이 아닌 숙주나물을 선택했는가? 그것은 자기의 선택이 아니라 딸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인데, 그러니 그것은 강요된 선택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남의 딸이라면 관심도 없겠지만, 그것은 자기 딸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상황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 때, 그 상황이 요구하는, 그런 강요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 딸이 취직을 해서 그만 사고로 죽었다고 하면, 그러면 바리바리 음식을 준비할 필요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기숙사에서 연탄가스 사고로 그만 죽었다면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선택을 하고 의지를 발휘하면서, 그렇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주어지게 될지,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모르고 말이다. 즉 우리 인간은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모르는데, 그래서 반성이라는 것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도 뭔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성립되는 것이지, 그런데 그냥 앉아서 “나는 부족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당신은 왜 부족하지요?” 라고 하면 그 사람은 뭐라고 하겠는가? “나도 몰라. 내가 미쳤어” 라고 하겠는가?

◈ 반성된 주체는 없다 !!

그렇게 사람은 주어진 상황 속에 적응하고 맞추어 나가려고, 그 상황에 맞는 주체가 새롭게 정립되고 조작되어서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평생을 살아도 모르는데, 그것을 어려운 말로 “반성된 주체는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러 이러한 인간이니, 그래서 나는 반성합니다” 라고 해야 되는데, 그런데 정작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도 모르면서 무슨 반성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모든 모든 것이 과거에 아는 것이란 말이다. 즉 “나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무작정 상경을 해서 취직을 했는데, 그만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과거에서 출발해서, 의미를 끄집어내어서, 현재에서 출발해서, 그래서 딸을 위해서 바리바리 싸주는 것, 바로 그런 행동을 우리 인간은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또한 현재에서 미래로 가버리게 되면, 그러면 딸이 죽는다든지, 자기 몸이 아프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인간은 딸이고 뭐고 간에, 그만 자기 몸 하나도 간수하기가 힘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성경은 확정된 미래에 대해서 !!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어린양을 섬기는데 있어서 피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으로 섬긴다는 것이 확정된 이상, 과거에서 차고 올라오는 것과 미래에서 주어지는 것과 충돌되는 그 현장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즉 “아하, 이것이 바로 주제파악도 되지 않는 죄인의 모습이고, 또한 저것이 바로 주께서 마련하신 의인의 모습이구나”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악마의 권력과 주님의 피의 은혜의 권력이 마주치는 그 현장에서, 주님께서는 “왜 너는 피의 증인인가?” 라는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의 도움이 없이는 주님은 일을 할 수 없는데, 즉 권력의 힘이 없이 주님은 일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 첫째부활과 둘째부활 !!

이 권력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주님은 죽기가 무서워 귀신의 종이 된 우리는 건져내려고 오셨는데, 우리는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그런데 성도의 미래상에는 죽음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천국에서 어린양을 섬기는 것을 두고 ‘둘째 부활’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죽여도 또 살아나고, 죽여도 또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자기의 피로서 그런 인간을 만들려고 하신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목사님, 피에게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물론 피에는 그런 능력이 있는데, 물론 우리는 인정하기 싫지만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피에 그러한 능력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과거 경험상, 우리의 피로는 그런 일이 되지 않으니, 우리가 안 되면 주님도 안 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거기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라는 것이다.모세와 엘리야는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과거에 모두 다 죽었던 자들인데, 그런데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첫째 부활인데 말이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마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 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 여보, 설교가 왜 그래요?

제가 어제 오전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 제 아내가 저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는데, 설교에 어려운 것이 있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설교를 마치면서 왜 갑자기 음부와 천국이 나오느냐는 것이다. 본문과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어려운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것이다. 아마도 어제 설교를 문제점을 지적한다고 한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설교 마지막에는 고바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왜냐하면 교인들이 그냥 다 알았다고 하면서 집으로 가버리면 안 되니 말이다. 그러니 뭔가 “아, 이것은 알겠는데, 그것은 모르겠다” 라는 식으로, 그런 숙제를 하나씩 가지고 가야 된다고 말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는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그리고 음부와 같은 것은,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은, 즉 모세와 엘리야는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고 하니, 하나의 스크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일을 하실 때, 바로 이런 이런 식으로 일을 해서 끝난다” 라고 하는 정보가 담기는 하나의 그릇, 혹은 바구니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 파리 바게트 !!

왜 프랑스 빵을 ‘바게트’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빵이 길기 때문에 홈을 내는데, 그래서 여기는 다진 고기를 넣고, 또 채소를 넣고, 또한 크림을 넣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것을 성도라고 한다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정보가 여기에 다 입력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자기의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시고 무엇을 하시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일들이 있는데, 그것을 마치 파리 바게트에 고기를 다져서 넣듯이, 또한 채소를 넣고 크림을 발라서 넣듯이, 그렇게 일일이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무슨 일을 하는가? “주여, 언제 별세를 하십니까?” 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별세’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니 “나는 구원을 받았다. 앞으로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든지 나는 몰라!” 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 성령을 받은 성도는 교회에 와서 뭐라고 하겠는가? “주여, 그 다음 차례는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그러면 “주께서 다시 오신단다” 라고 되는 것이지, 그게 아니라 “나는 이제 구원을 받았다. 앞으로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든지 나는 몰라!” 라고 한다면, 그것은 파리 바게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빵은 예수님이 만든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언제나 우리 인생의 모든 과정이 바로 주께서 그렇게 조성하시고 만드신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는 무엇인고 하니, 미래에 우리가 천국에 가서 어린양을 섬길 수밖에 없는, 그렇게 이미 확정된 미래가 우리에게 앞당겨서, 그렇게 해서 우리의 속을 채운다는 것이다. 마치 빵에 고기도 다지고, 채소도 넣고, 크림도 넣듯이 말이다.

◈ 어린양만 섬기게 하옵소서 !!

그러면 거기에서 나온 기도의 레퍼토리는 무엇이겠는가? “하나님 아버지, 제 딸이 서울에 돈을 벌려고 갔는데, 하지만 서울에 가나 촌에 있으나 어린양만 섬기게 하옵소서. 그런 어린양을 섬기는 능력이, 그 아이가 있는 구로공단에도 임하게 하옵소서”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가 진행이 되는데, 물론 기도뿐만이 아니라 평소에 자식들을 그런 언어체계로서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딸이 그런 언어체계를 이해하겠는가?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데, 자기 꿍꿍이속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제 엄마 품에서 해방이다. 고생을 하더라도 이 지긋지긋한 촌에서 벗어난 것도 해도 너무 좋아. 만세,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탈출을 해서 좋다고 서울로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까 말한 의미체계가 다르니 말이다.

◈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자기 죄만 가려 !!

이제는 의미체계와 언어체계의 의미를 알겠지요? 성경을 제 아무리 천독만독을 하고 해석을 한다고 해도,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그것은 누구 좋아라고 하는 것인가? 자기 죄를 가리는 역할밖에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자기 의미체계를 옹호하는 것에 불과한데, 그렇게 옹호하는 것이 악마의 권력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왕창 다 벗겨져야 하는데, 그래서 모든 것이 죄이고 죄인임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런데 오히려 자기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신학으로 포장을 하고, 또한 목사라는 직책으로 교회에서 그것을 힘으로, 권력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 권력을 부러워하는 백성들 !!

그것이 미가서나 예레미야서에 보면 나오는데, 즉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이 주는 것을 가지고 권력으로 삼는다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것을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부러우니 말이다. 자기들도 평소에 권력을 좋아하는데, 그래서 그런 지도자가 있으니 엄청 좋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 나와있는 왕이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일군인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복음이 살아있고 주님이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워진 일종의 공직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그만 우상시하게 되면, 그건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짐승의 하수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거짓 선지자, 짐승, 그리고 왕들 !!

요한계시록에 보면 짐승의 하수인이 3명이 등장하는데, 먼저 순한 양처럼 등장하는, 사실은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짐승이 나오고, 그리고 정치꾼들, 즉 왕이라는 것이다. 지금 좀 헛갈리는데, 요한계시록 19장 19절을 한번 살펴보자.

(계 19: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계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 그들은 권력을 가지고 !!

여기에 보면, 10절에 짐승과 땅의 임금들이 나오고, 그리고 20절에 거짓 선지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순한 양처럼 굴던 말이다. 그런데 이 3가지 부류들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권력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 권력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땅의 임금들에게 권력을 나누어주는데, 그 권력을 가지고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력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힘으로서 권력이 작용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권력을 가지고 힘으로 삼는 것이 곧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여기 이 근처에는 가기는 가는데, 그런데 확실하게 “바로 이것이다!” 라고 주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린양의 피를 믿지 않기 때문에, 즉 십자가를 모르니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세상은 바로 이렇다!” 라고 꼭 집어서 말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왕들은 경제권을 쥐고 있기에 !!

여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땅의 임금들이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들이 정치만 하는 게 아니라, 경제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힘이 의해서 이 경제가 돌아가는데, 그게 곧 자본주의사회인데 말이다. 그렇게 경제권을 쥐고 있으니 어떻게 되는가? “앞으로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물건을 사고 팔지 못해!” 라고 되니, 그러니 그야말로 “꼼짝마!”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전체가 어느 쪽으로 힘이 쏠리는지, 이번에는 어느 쪽에서 힘을 가지는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아무리 정권이 바꿔도, 그런 것은 인물이 바뀌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이 어느 쪽으로 쏠리는지, 그런 쪽으로 전환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어린양이 배치되면 죄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 성도인가? 아닌가?

다시 말해서, 자기가 살아가면서 평소에 예수님을 섬기고 싶은 사람은 성령이 임한 사람이고, 그것이 아니라 평소에 예수님보다 힘을 더 섬기고 싶은 사람은 어떠한가? 성령이 임한 사람이 아니라, 힘이 임한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정보, 즉 하나님의 일하심이 담긴 그 정보를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성도이지만, 반면에 자기가 끌어 모은 힘을 자랑하면 성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굉장히 쉬운데, 그러니 넘어가도록 하자는 말이다(ㅋㅋ).

이제 교재 102페이지 중간을 보자.

** 사람들의 주관적 경험은 신체가 느끼는 감각운동과 관련이 있다.

◈ 나는 살아야만 돼 !!

사람들의 주관이든 객관이든 간에 사람들이 노리는 것은 불멸(不滅)인데, 그것을 주관적 불멸, 또한 객관적 불멸이라고 하는데, 즉 영원히 멸망을 당하지 않는 말이다. 그것을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원래 미래의 모습을 보게 되면 인간은 죽지 않게 되어있는데, 즉 죽어도 또 살고 죽어도 또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목숨을 끊는 것을 사망이라고 보지 않고, ‘둘째 사망’ 이라고 하는 것은 저주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차피 우리의 몸은 기계가 되어서 평생을 살다보면 진흙으로 만든 것이기에, 그냥 진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에 신경을 쓰면 안 된다는 말이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고 했는데, 그러니 그런 것에 신경을 써서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는 것이다.

옛날에는 목사들이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할 것인지 매장을 할 것인지, 거기에 고민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장을 하게 되면 주님께서 재림할 때 부활이 안 된다고 여겼기에 말이다. 반면에 매장을 하게 되면 무덤의 문이 열리기 때문에 부활이 되고 말이다. 단 매장을 할 때 시신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팔다리가 떨어진 채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그것이 고민이 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목사에게 그런 것을 따지고 물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 죽는 것이 관심사이고 말이다. 그렇게 교인들도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에 관심이 있지, 어린양을 섬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교인들이 자꾸만 묻는데, 즉 “목사님, 부활을 하는데 만약에 팔 다리가 하나라도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목사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는데, 즉 “팔다리가 없으면 안 되고, 의족이라고 해야 합니다” 라고 말이다(ㅋㅋ).

◈ 나는 지금 저주? 아니면 축복?

하지만 음부가 열린다고 하는 것은, 여기서 둘째 부활에 있어서 사망이라는 것이 어떤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이 저주에 대해서는 입을 꼭 다물고서, 자꾸만 “니 몸이 죽는다. 그렇게 죽으면 흙이 된다” 라고 협박을 가하는데, 하지만 인간은 원래 흙이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중요한 것은, “흙이 되는가? 안 되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저주를 받고 있는가? 축복을 받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오래 살고 말고 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겨우 33년을 살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얼마나 잘 살고 계시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이 전혀 축복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들은 언어체계에 있어서 추상적으로 자꾸만 생각하는데, 그렇게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여기 교재에 보면 “언어를 통해서 영상이 떠오르고, 그 영상을 다시 언어로 이야기한다” 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어와 자기 생각이 일치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즉 똑같은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은 각자가 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影像)도식(圖式)은 인간의 신체적 활동을 통해서 직접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인식이란, 이 영상도식이 은유적 투사를 통해 점차 추상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어간 것이다. 예를 들면, ‘수직성’ 이라는 도식은 사람이 평소에 경험이 있는 구조를 선택할 때, ‘위-아래’ 지향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이 ‘수직성’은 하나의 추상이고 은유이지, 실제로 그런 수직성을 내어놓아 보라고 하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 이라는 개념도, 즉 “아이쿠, 내 새끼. 참 예뻐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사랑이란 개념은 부모가 있어서 자기를 예쁘다고 해줄 때, 그것을 사랑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 십자가가 과연 사랑인가?

하지만 여기에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그것이 사랑인가? 예수님께서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을 왜 하셨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평소에 우리 인간들이 항상 누구 위주로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것인가? 언제나 자기 위주로 하니, 그래서 예수님은 그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바꾸어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렇게 예수님은 어둠의 세계에서 통하는 언어를 사용하셨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그 반대로 생각하면 다 맞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가 바로 예수님의 생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을 받아라!” 라고 하시면, 그것은 “아하, 고난을 받으라는 의미이구나!”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참 우스운 일이 있다!” 라고 하면, 우리는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웃는 자여, 너에게 화가 임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눅 6:25)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 예수님은 청개구리 ??

그렇게 예수님은 반대로 자꾸만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반대로 하시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는데, 즉 “너, 자꾸만 그렇게 하면 죽는다” 라고 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죽음을 반대로 이야기하면 또한 무엇인가? 즉 그 죽음에 합세한 강도가 어디로 가는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기존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방향으로 가야한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 라고 하신 것은, 대부분의 이 세상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간다는 것은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제 교재 103페이지를 보자.

** 남자가 넥타이를 매고 여자가 치마를 입는 것은,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던 없던 간에, 그 관심이나 실행, 또는 규칙을 구현하는 행위가 된다.

◈ 남자는 넥타이를 매어야 !!

여기에 법에 관한 것이 나오는데, 이게 참 중요하다는 것이다. 칸 영화제를 가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는데, 감독들이 평소에는 자유롭게 청바지에 티 셔츠를 입고, 또한 개량한복을 입고 돌아다녀도, 그런데 그 시상식에 오면 아무리 답답해도 턱시도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취재하는 기자들도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이 바로 칸 영화제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닫힌 사회’ 라는 것이다. 즉 그렇게 해서 하나의 폐쇄된 사회를 이룬다는 말이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흩어져 있는 것을 하나로 모을 때 힘이 되는데, 그게 곧 폐쇄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폐쇄된 사회에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작용해서, 자기가 소속된 사회는 무조건 이유도 없이 존재해야 되고, 또한 번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사회법’ 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김길태’ 라는 인간이 성폭행을 했는데, 제가 만약에 판사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사형집행을 시키지 싶은데 말이다.

◈ 왜 안식일에 나무를 하면 죽이는가?

우리가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을 해보아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란 사회에 왜 사형제도가 있느냐는 것이다. 왜 안식일에 나무를 하면 죽이는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는 땅에 피를 흘리지 말라고 했는데,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창세기 9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 모릅니까?

(창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까, 노아홍수 이후에 하나님의 새로운 법이 주어지는데, 즉 지금 이 땅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땅이기 때문에, 사람의 피를 흘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에 나무를 하면 돌로 쳐죽이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말하는 은혜는 누구에게 좋아라는 은혜인고 하니, 하나님에게 좋아라는 은혜이지 결코 사람에게 좋아라는 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깨어져야 !!

오늘 여기서 중요한 것을 해보겠는데,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의 출생자체가 레위지파라고 하면, 그러면 당연히 이스라엘에 속하는데, 그러니 이렇게 여기 이스라엘의 언어체계에 속하게 되고, 그 언어체계가 발전하면 사회체계가 되는데, 즉 사회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회법 안에 누가 있는가? ‘나’ 라는 것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누구의 나라인가? ‘나’의 나라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을 하면 어떻게 한다고 하셨는가? 남의 나라 백성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죽인다는 것이다. 즉 ‘나’를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존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이냐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깨어야 진짜 이스라엘의 본색이 제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깨어져야 교회가 보인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의 특징이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은 자기가 소속되어버리면 자기 중심의 사회가 되고 마는데, 즉 ‘나’만의 사회가 되고, 그러니 ‘나’는 무조건 죽지 않아야 하고, ‘나’는 무조건 번성하고 번창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여, 왕을 주소서 !!

당연히 힘은 하나님을 위한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누구에게 놓아라고 있는 힘이 되는고 하니까, 현재 있는 이스라엘의 구성원들을 위한 이스라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에게 무엇을 구하는가? 왕을 구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에게는 왕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삼상 8: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삼상 8: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삼상 8: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삼상 8: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그러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아니, 왕이 있는데 왜 왕을 달라고 하는가?” 라는 것인데, 즉 그렇게 왕을 달라고 하는 사고방식 자체를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다른 이방 나라들은 일종의 폐쇄사회인데, 즉 왕을 중심으로 한 권력으로 구성되어있다는 말이다. 자기들도 그런 이방나라가 되고 말이다.

◈ 하나님은, 일단 왕을 주면서 깨부수고 !!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잘했다고 하시는가? 그러한 사고방식은 바로 진짜 이스라엘을 버린 것인데, 그렇게 기존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방나라와 똑같은 레벨로서, 그렇게 이스라엘은 그만 뚝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런 이스라엘을 깨부수는 방식이 무엇인가?

그들이 좋아하도록 왕을 주시는데, 그렇게 일단 왕을 주시고 난 다음에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고 하니, 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나라들이 침략을 한다는 것이다. 왕이 없을 때는 그들이 침략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왕을 주고 난 다음에, 이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의 왕들에게 박살이 날 때, 비로소 그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 아하, 우리가 구상한 이스라엘은 아니었구나 !!

그들에게 “아하, 우리가 구상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데, 그러니 그들은 처음부터 자기들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구상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었다. 그러니 너희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살펴보아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아하, 내가 태어났다고 해서 내가 소속된 단체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단체가 아니구나. 오히려 나를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구성된 단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자기들 중심의 법과, 즉 하나님 중심의 진짜 법 정신인 율법의 완성과 마주칠 때에, 바로 그렇게 될 때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짜 이스라엘의 모습인데,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주변에 이방나라라고 하는 적들을 주어서, 그러한 적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시는가? 가짜 이스라엘에서 진짜 이스라엘을 뽑아내는 작업을 벌리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하신 일이라는 말이다.

◈ 누가 왕이신 예수님을 반대했는가?

그리고 결국은 보이지 않는 하늘의 왕이 보이는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누구인가? ‘그리스도’ 라는 분이 오셨는데, 왕은 그리스도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오셨는데, 누가 반대하고 누가 옹호했는가? 반대는 기존의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고, 그리고 옹호는 성령을 받은 자들만 했다는 것이다. 즉 오직 성령이 임한 자들만이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감히 이방인인 주제에 말이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어느 로마군인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하는가? “당신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이스라엘에 너와 같은 믿음이 있는 자를 보지 못했다. 니가 최고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방인 가운데 그런 놀라운 믿음이 있느냐는 말이다.

◈ 백부장, 니가 최고다 !!

(마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지금도 항상 자기가 소속된 그것이 깨어지도록 작용하시는 그분이 바로 진짜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에 있으면서 그것을 느끼게 되는데,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사회법을 언급했고 말이다. 괜히 어려운 내용을 유식한 척을 하려고 집어넣은 것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즉 성경에 나오는 이런 내용들이 현재 사회에서 말하는 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여준다는 것이다.

관리자(IP:124.♡.87.52)

10-09-13 22:58

그게 교재 103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 이미 기존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를 보았고,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소통되는 법 체제가 있기 때문이다.

◈ ‘법 안’에서 서로 소통이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즉 기존의 법 체제는 무엇인고 하니, 아까 말하기를, 언어 체제에서 각자의 의미 체제가 되었다고 했는데, 그 의미 체제는 사회에 나가면 법 체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법 안에서 서로가 소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한민국에서 성폭행을 하면 사형이다!” 라고 했을 때, 거기에 동의하면 남고 그렇지 않으면 이민을 가던지 하라는 것이다. 제가 판사라면 그런 놈은 당연히 사형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가 그만 나라의 분위기가 바뀌어서, “성폭행에 대해서 사형을 구형한 판사는 이리 나와봐!” 라고 하면, 그러면 이번에는 그 판사가 이민을 가던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알튀세르 - 그때그때 달라요 !!

이런 이야기를 아주 정교하게 주장한 사람이 바로 ‘알튀세르’ 라는 양반인데, 이전에도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다시 한번 해보자는 말이다. 이렇게 군데군데 개마고원처럼 고원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주 어려운 용어로 ‘신급(?)’ 이라고 하는데, 저는 가능한 한 이런 어려운 용어는 피하려고 하는데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소를 키우면 그것이 어디에 속하는가? 축산업 협회에 속하는데, 그런데 그 사람이 또 교회에 다니면 어떻게 되는가? 만약에 그 교회에 장로하고 하면 장로 협의회에 속하는데, 그러니 축산업 협회에도 속하고, 또한 장로 협의회에도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또 어느 초등학교를 나왔으면 그 학교 동창회에도 속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알튀세르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인간은 이렇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축산업에 대해서 세금을 매기는 곳과는 서로 원수인데, 소 값이 떨어져도 마구 세금을 독촉하니 말이다. 그것도 과하게 매겨서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세무서 직원과는 또 이질관계가 되어서, 서로 또 좋게 지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알튀세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인간의 주체는 그 어떤 사회와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때 그때마다 처신과 행동이 다르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바꾸어 말하면, “주체는 없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체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예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항상 임시적이고 순간적이라는 것이다. 즉 “그때그때 달라요!” 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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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1918,10,16~1990,10,23)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다. 알제리 출신으로,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그 곳에서 철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을 선도하는 이론가였으며 그의 주된 논쟁들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근거에 대한 여러 위협들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 위협에는 맑스주의 사회학과 경제학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경험주의와 유럽의 공산당들을 분열시키기 시작한 휴머니즘 사회주의 및 민주-사회주의가 포함된다. 그는 반인간주의, 반경제주의, 반경험주의와 반주체주의를 주장했다. 프랑스 구조주의의 다른 부류와 결코 간단히 얽히는 우호적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알뛰쎄르는 흔히 구조적 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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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8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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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