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9: 7-11 (역사 밑에서)
렘 19: 7-11 (역사 밑에서)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203)
본문 : 예레미야 19장 7-11절
제목 : 역사 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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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0-06-16 21:02
역사 밑에서
2010년 6월 1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9:7-11
(렘 19:7, 개정) 『내가 이 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너뜨려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렘 19:8, 개정) 『이 성읍으로 놀람과 조롱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조롱할 것이며』
(렘 19:9, 개정) 『그들이 그들의 원수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빠질 때에 내가 그들이 그들의 아들의 살, 딸의 살을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살을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렘 19:10, 개정)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렘 19:11, 개정)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기독교가 아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성경을 보지 않고 발언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성경을 봐도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것들만 뽑아내어 ‘이것이 성경이다’고 내세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끝을 보세요. 옹기가 깨어진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옹기가 깨어진다’는 이 대목에다 우리 자신을 세워둘 수가 있습니까? 즉 “나는 옹기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뿌지직 깨어져야 마땅함”라고 자신을 자부할 수 있습니까? 성경 안에 들어서게 되면 비로소 세상은 악하며 우리 인간들은 죄인이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이 사실을 수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지는 무서운 진노와 분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됩니다.
사람이 어릴적부터 주위로부터 많은 도움과 혜택을 입고 왔다면 인간적으로 그 사람들에게 냉대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보게 되면 ‘세상은 악하고 인간은 죄인이다’는 사실이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할려고 하게 되면 그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은혜를 잊을 수 없기에 심한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로서 교회 다니는 사람은, 교회 다니지 않는 친척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딜레마를 느끼게 됩니다. 성경의 내용을 전하자니 상대방의 인격과 그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매정하게 무시하는 것이 되어서 인간으로서 도저히 못할 짓을 하는 셈이 되고, 그렇다고 해서 성경 내용이 불신자 친척들 주장들과 일치되지 않으니 참으로 입장 난처해집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 말씀을 오늘날 성도들이 어떻게 전해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과 마주친다는 것은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다가 차가 차끼리 정면충돌하는 그 이상의 충격을 제공합니다. “그쪽으로 가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가면 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이해한다고 해서 해석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어져야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 세 친구의 말씀 생활은 성경공부로서 충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타는 용광로 속에 하나님께서 집어넣으므로서 실감나게 하신 것입니다. 즉 왜 이 세상이 말씀대로 악한 세상이며 왜 우리들 자신이 죄인인가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찾아온 죽음의 현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체험케 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모조리 다 가짜입니다. 그것은 연극이며 조작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살 이유도 없고 살 필요도 없음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종교 생활을 하면서 시도하는 방식이 바로 ‘진리의 영역’에 대한 진입입니다.
즉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이란 진리의 신이라서, 그 신의 진리와 내막과 비밀을 우리도 같이 알고 그 알게 된 진리를 실천에 옮기게 되면 영원힌 진리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합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소위 진, 선, 미를 달성하여 그 달성한 업적따라 자신이 소지하고 있으면 그 소유된 진, 선, 미가 참된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운 천국에 넣어준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에 대해서 인간은 애시당초 알지 못할 존재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바로 이 점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달릴 때에 해가 어두워지고 무덤에 있던 시신들도 되살아나 거리를 활보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직접 상대한 자들은 바로 ‘진리의 영역’을 추구하던 자들, 곧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대자연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준비된 재료들이지만 그 핵심은 진리에 대해서 인간들이 죄를 발생시키고 있는 점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겨냥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간음해도 이미 간음죄가 성립하고, 형제를 보고 미워해도 이미 살인죄가 성립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려 오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진리의 영역에서 인간을 배제하시는 조치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만들어진 것이고 왜 만드신 인간을 멸하려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의미의 영역’에서 다루기 위함입니다. ‘의미의 영역’의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터에서 참새 두 마리에 동전 한 닢에 팔립니다.
이 광경을 동영상으로 보든지, 현장에서 직접 보든지, 누구로부터 들었든지 상관없이 거기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의 소행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참새가 장터에서 돈받고 팔리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의 ‘진리의 영역’에서 진리 추구로서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이라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도출해 낼 수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의미의 영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내일 장터에서 팔리는 참새라 할지라도 오늘은 마음껏 창공을 난다. 이는 각자 주어진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참새가 독자적으로 자신이 꺼내는 의미는 아니고 하나님께서 배치하신 배치물로서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도 이 원칙에 따릅니다. 이스라엘의 의미는 이방민족과는 달리 그들이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아놓고서는 철저하게 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말씀이 있고, 언약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안 망한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위하여 이스라엘은 이방인들 보다 먼저 하나님과 마주치게 된 민족입니다. 이로서 알게 된 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원칙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아는 자가 참된 이스라엘이요 유다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 성도에게 이 이스라엘의 멸망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체험되어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대자연까지 동원하시면서 우리 인간을 어떤 식으로 압박을 가해도 우리는 그저 마땅한 조치임으로 받아들여야 정말 말씀의 체험을 받고 있는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는 것은 바로 우리가 내민 ‘믿음’까지 박살나야 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피의 효과로 구원됨을 받아들이는 그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해 낼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오로지 우리는 ‘의미의 영역’에 속해서 바로 성도가 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랑만 알게 하옵소서. 그 사랑으로 인하여 못할 게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10-06-20 10:02
067강-렘19장7-11(역사 밑에서)-jer100616
2010-06-17 14:06:53 녹취 : 오용익
067강-렘19장7-11(역사 밑에서)-jer1006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9장 7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1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9:7-11
“내가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계를 무효케 하여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이 성으로 놀람과 모욕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모든 재앙을 인하여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모욕할 것이며 그들이 그 대적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핍을 당할 때에 내가 그들로 그 아들의 고기, 딸의 고기를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고기를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오지병을 깨뜨리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을 파하리니 그들을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하리라.”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깨어져야 한다. 나는 파삭 깨어질 그릇에 불과하다. 나는 깨어져도 마땅하다.’라는 생각을 가질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줘도 자기 자신을 깨뜨리는 말은 다 얼굴을 돌려버려요. 돌려버린 채 자기 잘되는 것, 성공하는 것, 자기가 평소에 알고 있는 윤리 도덕 같은 것, 그런 것들을 골라잡아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안다.’라고 막무가내로 우기면서 하나님 앞에 다가섭니다.
그런데 말씀을 연구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다가서는 내 자신이 너무 하나님의 말씀을 내 멋대로 골라잡은 것이 아닌가, 내 위주로 그렇게 성경 보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하면, 성경 말씀 가운데 그릇을 파삭 깨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맹렬하게 노를 퍼붓는 그런 대목 앞에 우리가 서는 거예요.
하나님은 노를 퍼부으시고 나는 그 앞에 서 있고, 그럴 때 이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가 왜 이렇게 주어지는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시는가, 그것을 그 자리에 설 때 비로소 하나님의 주시는 축복이라는 것,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축복과 전혀 다른 하나님 입장에서의 축복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어떤 분이 사이트에 이런 글을 올렸어요. 그 사람은 교회 안다니는 분인데, 나이도 지긋하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인데 기독교에 대해서 쓴 소리 좀 해 본다고 글을 썼는데 이렇게 써 놓았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거부하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서로 사랑해야 된다.’
이것이 자신은 교회도 안다니면서 평소 자기의 선한 양심가지고 버티는 일반 사람들의 말을 대변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이 성경을 안본 거예요. 성경을 펼치게 되면 이 세상은 더러운 세상이고, 진노 받아야 될 세상이고, 망해야 될 세상이고, 인간은 뭐냐, 인간은 죄인으로부터 출발을 해요.
성경을 안보고 자꾸 들은 풍월, 교회 바깥에서 들은풍월, 교회 가 봐도 듣기 좋은 소리만 해대면서 고객이나 확보하려 드니까 정말 성경 자체가 뭐라고 이야기하는지를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알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아 놓았어요. ‘세상이 더럽다. 세상이 악하다.’ 이거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세상이 악하고 또 악하고 우리는 죄인이고 죄인이라면 거기서 나온 해답은 간단해요. 예수님의 피 한 방울이 돈 천억을 줘도 바꾸지 못할 귀한 피가 되는 겁니다. 왜?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왜? 우리는 더러운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피가 귀한 줄 알고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그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귀한 줄 아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악하지 않고 세상이 악하지 않고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면 자꾸 악한 세상을 두둔하게 만들고 자꾸 악한 세상을 옹호하는 식으로 나갑니다. “집안에 사촌이 하나 있는데 교회는 안 나가도 어릴 때부터 나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공부하라고 용돈도 대주고 공납금도 대줬다. 내가 그 애 생각하면 참 부끄럽고 참 고맙다.” “그 사촌이 교회를 안다닌다면서요?” “교회는 안다니는데 그 사촌이 너무 사람이 좋아요.” “세상이 악한데요.”
갑자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어릴 때부터 나에게 공부하라고 공납금 대줬던 착한 사촌형을 옹호하는 쪽으로 따를 것인가, 갑자기 갈등이 생겨버려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 주변에 착하디착한 친척들과 부모님, ‘교회는 안다녀도 우리 부모님 같은 부모님은 없어.’ 할 만한 그런 분들을 배치를 해줘요.
하나님을 안 믿는 일가친척들, 그 분들이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던 고마운 분들, 그런 분들이지만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을 주변에 배치해서 ‘과연 성경 말씀대로 네가 믿느냐.’를 보는 겁니다. ‘세상은 죄인이고 인간은 악하고’라는 것이 성경말씀인데 이 말씀 자체가 과연 실감으로 체험되느냐를 묻는 겁니다.
성경말씀이 체험되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말씀을 골라잡으려고 해요. 자기 입맛에 맞는, 자기가 현재 생각하는 것에 부합되는 것만 따로 골라잡으려고 해요. 꽃다발 전체를 잡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맘에 드는 장미 몇 송이, 안개꽃 몇 송이를 골라잡아 묶은 꽃다발을 쥐고 있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주님을 바라보려고 시도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지만 어질고 착하고 훌륭하고 모든 일에 빈틈이 없고 믿는 사람보다 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우리가 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뭘 이야기 합니까?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주저하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 혜택을 입고 은덕을 입었으니까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거예요.
‘세상은 악하고 이 세상은 멸망당하게 되어 있는데 예레미야 19장에 있는 대로 처참하게 망가집니다. 세상에, 자식의 고기를 먹고 딸의 고기를 먹고 공중의 새들이 시체를 쪼아대면서 완전히 작살납니다.’라는 이야기를 차마 입으로 할 수가 없지요. 그 말을 내뱉기가 상당히 난처한 지경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한테 들어오지를 않고 말씀은 저쪽 동네에 놔두고 나는 이쪽동네에서 그냥 관람하고 관찰하듯이 성경 말씀을 그냥 남의 이야기로 스쳐 지나가는 겁니다.
그 성경세계 속에 끼어들지를 못하고, 그 성경 안에 살지를 못하고 성경세계 따로 있고 내 세계 따로 있었던 겁니다. 다니엘 세친구가 성경 좀 알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세친구가 성경 좀 아는 것에 머물도록 하지 않습니다. 감사하게도 고맙게도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복을 주셔서 성경 말씀이 갖고 있는 그 안의 세계에 들어가게 했지요.
들어갈 때 여름수련회에 참석한 것이 아니고 용광로 속에, 불속에 집어넣습니다. 맘 같아서는 여름수련회를 가야산호텔에서 할 것이 아니고 포항제철 용광로 속에서 하면 최고일 것 같아요. 그게 너무 뜨겁다 싶으면 주변에 뱀을 깔아서 뱀 속에 있든지, 안 그러면 해산하는 여인을 옆에 두고 이마에 땀이 줄줄 흐르도록 땅 파는 일을 한다든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성경은 우리가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와야 체험되어지지 내가 체험하는 체험 그것은 가짜입니다. 성경 속에서 망한다, 할 때에 ‘에이, 차라리 망해버려라.’라는 심정이 드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만 살자. 그만 살아버리자. 북한이고 천안 함이고 뭐고 월드컵이고 자식결혼이고 뭐고 그만 끝장내고 공중으로 올라가버리자.’라는 마음이 불쑥 드신다면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체험케 해주시는 겁니다.
그 때 마음의 여유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체험하게 할 때 어떤 식으로 오느냐하면,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는 차가 마주 와서 충돌했을 때 그 때의 충격은 눈앞이 캄캄하겠지요. 아무리 안전벨트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역주행하는 차가 정면으로 부딪힐 때 죽었다고 복창해야지요.
주님께서 말씀으로 올 때는 그렇게 역주행 하는 차가 정면충돌하듯이 오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우리가 가는 방향이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성도의 가는 길을 가로막기 위해서 역주행해서 부딪혀 버립니다. 부딪히는 그 사건 속에서 십자가 사건이 터집니다.
십자가사건 이야기할 때 평소에 사람들이 놓치는 것이 하나 있어요. 주님이 십자가 달릴 때 하늘이 캄캄해졌다는 사실을 놓치는 경우가 있고, 죽은 시체가 무덤에서 일어나서 산채로 성전에 들어갔고 예루살렘 거리에 활보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놓치고 있어요. 그것이 십자가의 부대효과가 그러한데,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계(계획)를 무효케 하여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7절 끝에 보면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 성경말씀을 우리한테 체험케 하는데 있어서 또는 십자가 사건을 우리에게 체험케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과학탐구의 대상인 북두칠성부터 달과 해, 동식물 이 모든 것을 총동원시킵니다.
살아있든 죽어있든 모든 생물과 무생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다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서 다 준비된 것들, 준비된 재료들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요리가 나오는데 요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저 작은 종지에 담긴 저 재료는 언제쯤 쓰이지?’ 하고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능숙한 요리사가 그 종지에 있는 재료를 다 사용해서 나중에 요리가 끝나면 ‘아, 필요 없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다 필요했구나.’ 하는 것을 알지요.
저는 예수 믿고 난 뒤에 제일 놀랜 것 중의 한 가지가 뭐냐 하면, 요리를 하는데 소주가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 소리를 듣고는 얼마나 마음이 시험이 되었던 지요. 만약에 요리에 소주가 들어간 요리를 내가 먹을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마치 인도사람들이 요리를 먹으면서 소고기가 들어갔느냐를 확인하고 이슬람교 사람들이 돼지고기가 들어갔는지를 확인하고 그것을 안 먹는 것처럼, 술이 들어간 음식을 먹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그런데 성경을 좀 보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위로를 받았어요. 위로를 받은 구절이 뭐냐, 사도행전에 보면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베드로는 먹지 못하겠다고 한 그것을 다 먹으라고 했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게다가 고린도전서에 보면 ‘못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심지어 개고기도 포함해서 감사함으로 먹으면 뭐든지 먹어도 된다.’(23-31)고 합니다.
‘절에서 내놓는 비빔밥이라도 감사함으로 먹으면 다 먹을 수 있다.’ 그 때까지는 뭘 하고 안하고의 수준이었는데 나중에 성령이 임해서 십자가를 알고 보니까 도대체 하고 안하고에 신경 쓰는 자체가 그게 죄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살아도 아무렇게 살아도 상관없는 이야기를 자꾸 내 행함에 신경 쓴다는 자체가, 그 만큼 신경을 어디에 안 쓰느냐 하면 나를 향하여 충돌하려고 다가오는 십자가사건에는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는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
뭔가 십자가 차가 다가와서 내 면상을 들이박는 여기에 신경을 써야지 내가 꼼지락꼼지락 하면서 뭘 하고 뭘 안하고, 소주가 요리에 들어갔느니 마느니, 이것 자체가 세상을 너무 낮게 보았다 하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삼라만상을 어디에 동원시키느냐? 이제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 하거든요.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를 물었는데 진리의 영역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의미의 영역이 필요해서 이런 것이 동원된 겁니다. 설명을 안 하면 나만 아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진리의 영역이 뭐냐 하면 옳고 그름의 영역입니다.
쉽게 풀이하면 사람들의 상식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따라서 나도 선해야 아귀가 맞아서 하나님과 선한 일을 하다가 선한 하나님과 합류해서 죽어서 천국 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부자청년도 그런 소리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래서 진리를 내가 알고 교회 와서 진리대로 행하면 나는 진리의 세계에 들어간다.’라는 생각을 인간들이 갖고 있는 거예요.
바로 그 일에 가장 발달했고 그 일에 전념했던 자들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만들었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올 때 ‘어이, 너 밥 먹었어? 네가 하루에 몇 시간 잤어?’ 이걸 묻는 것이 아닙니다. ‘어이, 창녀야, 너 손님 몇 명 모았나?’ 이걸 묻는 것이 아니에요.
제일 먼저 멱살 쥐고 시비 걸고 흔들어댄 자들이 누구냐 하면, 율법사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네가 진리를 알기는 알아? 네가 뭘 알아.’ 인간은 진리를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진리를 모르게 되어 있다.’ 열 네 글자네요. ‘인간은 진리를 모르게 되어 있다.’ 열네 글자를 네 자로 줄이면 ‘산상설교’입니다.
‘네가 간음안하면 간음죄에 안 걸렸다고 생각하지? 네가 사람을 안 죽이면 살인자 아니라고 여기지? 아니거든! 네가 형제를 보고 미워하면 그 자체가 이미 살인죄야.’ 그 뒤에 나오는 것이 ‘네가 진리를 알기는 알아?’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권능을 행하고 말씀을 전했나이다. 기적을 베풀었나이다.’ 할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썩 꺼져라. 난 너희들을 도무지 모른다.’라고 마태복음 7장의 산상설교를 하시면서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쫒아내고 권능을 행해도……’, 귀신 쫒아내는 것은 주의 권능으로 행하잖아요, ‘……그런데 그래도 그것이 주의 일이 아닌 것을 너희들이 모르지?’ 그 뒤에 나오는 것이 ‘너희들이 진리를 알기는 알아?’
인간은 진리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진리를 모르면서 기껏 선악체계 아는 것으로 진리를 다 아는 줄 알았습니다. 생명나무를 안 따먹어서 생명나무가 품고 있는 뜻, 의미를 몰랐던 거예요. 생명나무의 의미는 모르고 자기는 진리만 쥐면, ‘진리를 쥐고 실천으로 행하면 나는 진리의 사람이 되고 진리의 하나님과 합류해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인정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진리를 추구하고 진, 선, 미, 바르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 진선미 나오면 경북여고 생각나지요. 경북여고 교훈이 진선미입니다만 그 진선미를 가지고 세상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할 때에 그 진선미, 선을 행하고 진리를 원하고 아름다움을 원하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생명나무 되시는 분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역주행으로 와서 고속도로에서 정면충돌할 때 그 때 아는 거예요. ‘어, 내가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했는데 그것을 추구하는 내 앞에 누가 피 흘리고 엎어졌지? 죽으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나의 진리추구, 나의 선함추구, 나의 아름다움 추구, 이것 때문에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가로 막다가 터져버린 사건, 마주쳐서 발생한 사건이 십자가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쥐고 소유하고 추구하고 간직하는 그 창고의 중심에는 내가 있어요. 그게 진리의 영역이에요. 그런데 의미의 영역은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왜 태어났으며 언제 태어나야 했으며 언제 죽어야만 했는지’ 거기에 대한 의미는 우리 외부에서 주어지는 거예요. 그게 의미의 영역입니다.
우리 외부에서 주어져서 내가 알아서 이 자리에 태어나고 내가 알아서 몇 년도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야 했고 그리고 어느 날에는 죽어야만 했던 겁니다. 그 의미의 영역을 예수님 말씀대로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시장에서 두 데나리온에 팔리는 참새가 그냥 팔리는 줄 아느냐? 상인들이 흥정해서 팔리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나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면 그 참새도 팔리지 않는다.’(마 10:29)고 했습니다.
그 말을 제가 한 번 풀이해 보겠습니다. 이 성경말씀이 없다고 치고 시장에 나가봅시다. 닭을 산다고 합시다. 월드컵 경기 있는 날 또 닭 불티나게 팔리겠지요. KBS, MBC, SBS 카메라 들이대면서 찍어도, 이것은 누가 봐도 닭을 파는 상인과 사는 구매자, 가정주부 사이의 돈거래에 불과합니다. 문자로 봐도 그렇고 동영상으로 봐도 그렇고 뉴스에 나오는 것을 아무리 봐도 거기에 하나님이 안보입니다.
누가 봐도 돈 주고 닭 산거예요. 거기에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면’이라는 것을 찾아내는 눈이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장터에 가도 하나님이 허락 하에 갔다는 것을 발견 못한다면 평소에 우리가 행동하는 순간순간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살아왔습니까? 예배시간에는 천하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예배시간 싹 물리고 제직회하면 그 다음부터 하나님이 날아가고 없어요. 제직회 하면 싸우고 난리 나요.
‘목사 세미나 가는데 차비 내란 말이야.’ 하면서 언성 올라가지요. 집사들은 ‘목사님이 차비를 너무 많이 가져갑니다.’ 장로님은 중립에 서서 좋은 게 좋다 싶어서 눈치 슬슬 보고. 하나님은 다 버려버렸어요.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이 허락하셨구나.’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허락하신다.’에서 무엇을 도출하라고 하는 말이냐 하면, ‘아침에 팔려서 구이가 될 참새를 왜 지금까지 창공을 날게 만들었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그게 의미의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 배치를 그렇게 하신 겁니다. 자리입니다. 참새라는 자리는 자기가 만들어가고 다듬어가고 채워가는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그렇게 참새로 살다가 참새로 어느 시장에서 팔려야 되는 겁니다.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라고 되어 있지요.
‘참새도 그러한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토를 달아놓았습니다. 그래서 ‘몸과 영혼이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할 그런 의미로서 사람들은 태어나야 했지만 너희는 손모가지를 자르고 눈을 빼서라도 나머지 몸으로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아야 될 영혼의 의미를 너에게 담고자 나 예수가 너희에게 찾아왔다.’ 하는 겁니다.
고속도로에 마중 나온 겁니다. ‘우리는 진리밖에 몰라요. 하나님, 이거 알면 똑똑하고 이거 알면 천당 갑니까?’ 내 힘으로 내 자리를 다듬으려고 했는데 우리 자리는 깨어져야 될 자리, 그 깨어지는 이야기가 오늘 예레미야의 이야기예요. 이스라엘은 특이했어요. 어떤 점에서 이스라엘이 특이 하냐, 이방나라와 다른 점이 뭐냐, 이방나라는 고속도로에서 마주쳐 날아오는 차가 없어요.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시내 산에 올라가서 모세가 독대해서 법궤를 받은 것처럼 하늘나라의 차가 이스라엘 속에 들어옵니다. 들어오면 ‘우리 상식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까 안 망하겠지.’라는 거겠지요. 그런데 이스라엘과 이방나라의 차이점이 뭐냐? 여기는 진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씀을 알고 실천해서 진리를 쥔 게 아니에요.
의미의 영역인데 이스라엘은 말씀 알았는데 망했더라는 의미, 그래서 ‘의인은 하나도 없었더라.’는 그 역할, 의미 그것을 이스라엘이 담당해서 본문의 말씀대로 혹독하게 멸망당합니다. 완벽하게 멸망해야 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은 뭐라고 하느냐하면 ‘아이고, 이스라엘아, 꼴좋다.’ 하고 놀리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본문에 보면 ‘아이고, 꼴좋다. 여호와 믿더니 여호와한테 당하네.’ 그들은 여호와한테 당한다는 사실이 이스라엘에 오히려 복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우리의 믿음이 깨어지는 것이 진짜 믿음을 받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이 어떻게 구원받느냐? 믿음 없이 어떻게 구원 받느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효과로 구원받지요.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내 믿음으로 예수의 피를 쥐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영역에서는 뭐든지 쥐어야 되고 진리의 영역에서는 뭐든지 간직해야 되지만 하나님의 선물로 믿음이 와서 기존에 내가 진리의 영역에서 쥐려고 하는 믿음을 역주행해서 부딪혀서 깨부수어버리고 예수님이 갖고 있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제가 아까 기도할 때 ‘사랑을 알면 못할 것이 없다.’고 했지요. 진짜 사랑을 알면 싱글벙글, 싱글벙글, 싱글벙글, 안할 것도 없고 못할 것도 없고 반항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반발이 있을 수 없어요. 사랑을 받았는데요. 사랑을 안 받은 채로 사랑하려 하니 그것처럼 힘든 일이 어디 있습니까? 믿는 척을 하는 그 척을 또 척척 해야 되니까.
슬로베니아의 지젝이라는 철학자가 이런 식으로 불신자를 놀렸어요. ‘신이 없다는 사실을 인간들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신이 알고 있다.’는 거예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현대인들은 신이 없어요. 아까 살핀 것 같은 시장 통에서 참새 두 마리가 팔리는 것은 돈 때문에 팔리는 것일 뿐입니다. 니체는 말하기를 신이 없다는 거예요.
신이 없다는 것을 누가 벌써 알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먼저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인간이 진리를 알아? 알기는 뭘 알아?’ 이 말은 뭐냐,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 안 믿는다고 꾸중하고 나무라는 그 순간이 진짜 하나님이 찾아온 거예요. 이스라엘의 멸망에 우리 이방인들을 체험을 시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말씀을 알아도 망했잖아. 일단 너희들도 같이 망해줘야 망하게 만든 그 현장에서 진리의 영역이 사라지고 의미의 영역이 새롭게 부활된다.’는 겁니다. 그리되면 하늘의 공중의 새, 솔개, 독수리, 들에 있는 모든 들풀, 하나하나 전부 다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의미 있는 배치물들이 되는 겁니다.
안 믿는 사촌, 안 믿는 우리 엄마, 교회도 안다니는 우리 아빠, 이 모든 것이 의미 있는 배치물로서 다가오는 겁니다. ‘아, 저들과 나의 차이점은 저들은 인간이 망한다는 것을 모르고, 본인이 인간은 악하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나도 몰라야 마땅한데 이 세상은 악하고 나는 죄인인 것을 주님께서 십자가 앞에서 알게 하신 그 은혜’, 그 은혜로 말미암아 불신자속에 있으면서도 혼자 싱글벙글, 싱글벙글, 그들에게 도와줄 것은 도와주면서 복음을 사랑으로, 천사의 말을 사랑으로 곱게 전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교회 다니시고 예수 믿으세요. 아버님, 교회 다니세요.’ 웃으면서 전할 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뭔가 믿고 쥐고 소유한다고 그것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정작 이스라엘의 멸망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자신이 당해야 될 이야기로 체험하고 보니 이런 멸망 받아야만 될 우리 자신에게 생명나무가 주어지고 영생이 주어졌으니 이런 주님의 사랑을 받고서 못할 것이 없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