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6월 11일 요일 3:13 너가 사랑을 가졌는가?(어둠) vs 사랑이 너를 가졌는가?(빛)
안산 6월 11일 요일 3:13 너가 사랑을 가졌는가?(어둠) vs 사랑이 너를 가졌는가?(빛)
이름 : 관리자(IP:124.59.87.52)
100611 요일3:13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림이 마땅함
관리자(IP:124.♡.87.52)
10-06-1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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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01 23:02
안산100611요일3장13절a
안산100611요한일서3장13절a / 이근호 목사님
요한일서 3장13절
미리 오셨으니까 미리 요한일서 요약을 해 드리지요. 참석을 안했으니까. 요한일서는 엄청 어렵습니다. 요한일서가 왜 어려운가 하면, 여긴 어떤 사건도 없고 일거리도 없고, 역사도 없잖아요 요한일서 쭉 읽어보면. 역사적인 사태도 일어나지 않고, 누가 와서 설치는 것도 없고, 또 이야기도 없고, 요한일서 전체가 뭔가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예수님이란 분은 이미 우리곁에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고, 우리들끼리, 인간들끼리인 것 같기도 하고, 요한일서가 이렇습니다.
요한일서에 사람들만 웅성웅성 거리는데, 요한일서 하면 사도요한은 보이지 않은 분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 누구겠어요. 감싸고 있는 분이 누구겠어요. 예수님이겠지요? 예수님이 감싸고 있는데, 점선으로 했잖아요, 점선으로... 보통 성경을 보면 같은 인간들끼리 이야긴데,
사도요한은 눈에 보이지 않은 이분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분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사도요한이 여기 있고, 여기 우리가 있고. 직접 이야기해도 되는데 꼭 에둘러서, 한군데 거쳐서 이야기한다고요. 예수그리스도를 같이 이렇게 바라보지 않으면 사도요한의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내가(우리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물어보면, 사도요한은 말하기를 지금 주님 안에서 주님이 너에게 이러이러한 일을 하라했다, 라고 묻지 말고, 주님 안에서 어떤 모습이냐를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과 사람의 대화 가지고는, 요한일서가 성립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무척 어려워요.
이렇게 하다보니까 여기에 나오는 용어가 뭐냐, 여기서 빛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성령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사랑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이런식으로 이야기가 쭉쭉 되어 있죠?
요한일서 전체가 그래요. 그래서 진리라고도 이야기하죠. 성령, 사랑, 손에 잡히겠어요 안 잡히겠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하죠. 성령? 성령은 손에 잡히는 게 아니죠. 그러다보니 막막하고, 이것을 또 하나님 아들이라 하고,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죠.
빛 진리 사랑 성령, 아들, 허망한 용어, 아무 실속도 없고 손에 잡히지도 않고, 소유대상이 안 되죠? 소유대상이 안 되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 거예요.
소유대상이 될 수 없는 것 가지고 한다 말입니다. 근데, 사람들은 이런 것을 대할 적에 예수님의 빛이나 진리 아들 성령 사랑을 우리가 이해 할 때는요, 뭔가 우리가 이해 한다는 것은, 여기 빨간 매직이 있다면, 이게 빨간 매직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이것을 내 소유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하에 내가 빨간 매직이라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파란 매직이 집사님이 갖고 있다면, 집사님의 소유라면 다른 사람이 “이목사 이거 뭐요?” 하면 “이거? 나 몰라, 나 관심 없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것이 아니면 사람이 관심 없게 마련이에요. 반듯이 그래요. 내 것이 될 수 없으면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빛 진리 아들 성령 사랑은 내 것이 될 수가 없어요. 내 것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것 삼을 수 있는 것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요한일서는 설명하기 굉장히 힘든 겁니다. 내 것 될 수 없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내 것 될 수 있는 것만 관심이 있는데.
그러면 빛과 진리 사랑 이런 게 있으면, 방금 소유 대상이 안 된다 했지요? 그러면 사람들 속에 뭐가 있냐면, 진리를 소유하고 빛을 소유하고 성령을 소유하고 사랑을 소유한 내가 이런 것을 가져서, “이것이 바로 나다,”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요한일서는 현재 너희가 갖고 있는 것은 빛은 빛이 아니요 진리는 진리가 아니요 아들은 아들이 아니요, 성령은 성령이 아니요 사랑은 사랑이 아니요, 이렇게 한다면 어느 누가 요한일서를 볼 마음이 나겠습니까. 왜냐면 사람들은 이런 걸 갖고 있어야 이런 거 갖고 있다고 나중에 내밀면서 마지막 심판 때 나 이런 거 갖고 있습니다. 천국문아 열려라, 천국 넣어주세요,
이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이것을 내밀고 싶어 하는데, 요한일서에서 말한 빛과 진리 사랑 성령은 우리 소유대상이 아니다 말이죠. 소유대상이 아니니까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에 우리는 관심을 뚝, 끊게 마련이에요. 소유대상이 아니니까 요한일서를 보면서 내거 안 되는데 내가 요한일서를 왜 봐야 되지? 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방금, 어떻게 이야기하다 보니 어렵게 이야기 했는데요.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천국이 구원이나 빛이나 진리를 알 때 그것이 남이 갖고 있는 사랑, 남이 갖고 있는 진리, 남이 갖고 있는 예수님 남이 갖고 있는 빛, 성령은 영 기분 나빠, 내꺼 아니니까 기분 나빠 본성이 그래요, 남이 갖고 있으면 영, 기분 나쁘고 내가 갖고 있으면 기분 좋고 그래요. 이 하찮은 안경도 남이 갖고 있으면, 그 안경 별로다 해도 “줄까? 하면 고맙다 하지요. 내 것이 될 때.
인간들이 방금 이런 걸 가지고도 요한일서에서 뭐라고 하냐면 이걸 가지고 어둠이라고 합니다. 어둠. 그러니까 자기가 한껏 어둠에서 벗어나서 빛이 되려고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막상 요한일서를 보기 싫어하고 성경 이걸 안 보려고 하는 이유는 내 것이 된다고 하면 보고 내 것이 안 되면 볼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소유가 되면 예수를 믿을 것이고 예수님이 내 소유가 안 되면 예수를 안 믿을 겁니다,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왜 빛과 진리 아들 성령 요한일서의 이것은 왜 우리 소유가 안 되는 걸까요. 빛이 우리를 소유하고 아들이 우리를 소유하고 성령님이 우리를 소유하고 사랑이 우리를 소유할 때 우리가 구원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그 내막을 아시겠지요.
우리는 소유 당하기 싫어요. 때려죽어도 싫어요, 자존심이 세기 때문에. 내가 누구한테 끌려가는 건 아주 기분 나빠 예수님도 내 손으로 주물럭거리고 성령도 내 손으로 주물럭거리고 내가 시킨 대로 움직일 때 그때 우리는 성령 받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이 와서 나를 나꿔채고 그야말로 성령이 나를 성폭행 했다고 할 때 그때 우리는 기분 대게 나쁜 거예요. 왜! 나의 가치가 날아가 버리니까. 바로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한 것이 뭐냐면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의 싸움이에요. 네가 예수님을 가져서 천국 갈 거냐 아니면 예수님이 너를 주님이 삼킴으로 말미암아, 주님한테 삼킨바 되어서, 이제부터는 자기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주인은 저분입니다, 라고 자기주장 않고 예수님 증거 하면서 나는 빛이 결코 아니요 주님이 빛이고 나는 진리가 아니고 주님이 진리며 나는 성령이 아니고 주님이 성령이고 나는 사랑도 모르고 주님이 사랑 아십니다. 라는 쪽으로, 나는 아니고 나는 아니고,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빛 속에 속하고 진리 안에 속한 사람이라고 요한일서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가 정말 어려워요.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게 요한일서가 왜 어려우냐면 네가 사랑에 삼키운바 된다면, 사랑에 속한다면 너는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다, 이래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면 오늘 해야 될 3장 16절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3:16) 되어 있지요.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것은 뭐냐면 네가 사랑을 가졌느냐 아니면 사랑이 너를 가졌느냐를 묻고 만약에 사랑이 너를 가졌다면 너를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도 너는 나를 삼킨 사랑이 하신 일이라고 여긴다면그것도 감사히, 기꺼이 수용할 수 있다 이 말이지요.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할 때에 우리가 “아이고, 안 마땅합니다” 이러면 수상하다 이 말입니다. 성경에 마땅하니라, 이렇게 돼있으면 “제 생각과 똑같습니다, 마땅하고 말고요” 이렇게 나와 줘야 한다 이 말이지요.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지?” “그지?” 하나님이 물으면 “그렇지요, 마땅한 일이지요” 라고 순하게 순응을 하게 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사랑이 나를 쥐었을 때는 “마땅하지요”라고 동의가 되는데 만약에 내가 사랑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견제하는 거예요. 저 사람한테 내 귀한 사랑을 나눠주었는데 저 사람이 날 무시하면, “내가 미쳤지, 내가 왜 사랑을 줘, 귀한 사랑을, 얼마나 어려운 사랑인데 안줘,” “저 사람이 날 예뻐하고 사랑해주면 그때는 줘야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내가 선택해서 판단해서 내 영광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보상이 나에게 주어질 때에만 사랑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과 이게 맞지를 않아요. 맞지를 않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때는 우리를 뭐로 간주했냐면 우리를 원수로 간주했어요. 원수로 간주 되어야 비로소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한테, 사랑 받게 되는 겁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지킬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지키시지요. 우리는 못 지키지요. 만약에 우리가 원수를 사랑했더라면 우리는 행위로 인해 구원 받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한 이유는 율법의 어느 조항도 우리가 못 지킨다는 뜻입니다. 제가 강의 할 때마다 이 성경말씀을 못 지킵니다, 라고 하니까 어떤 목사들은 얼굴 우락부락 하면서 왜, 나도 지키고 있는데 당신은 못 지킨다고 하느냐, 우리가 성도라면 마땅히 지켜야 되고 지킬 수 있는데 왜 못 지킨다 하느냐, 라고 자꾸 우기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준 것은 예수님이 말씀 지키느냐 우리가 지키느냐, 대조하기 위해서 말씀을 준 거예요.
우리는 내가 못 지키면, 내가 말씀을 못 지키면 구원 못 받는다고 지레짐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은 대리죠, 대신하는 거. 우리가 혼자 있을 것 같으면 아무리 용을 써도 구원 못 받아요. 그런데 우리 곁에 누가 있다면, 우리 곁에 누가 계시고 누구든지 말씀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그분 앞에서 말씀 하나라도 못 지키는 사람이 돼야 되요. 만약에 내가 열 개를 지키고 구십 개를 못 지켰는데 그러면 내 곁에 계신 분이 내가 지킬 수 있는 거 빼놓고 나머지 90개만 지키게 위해서 구원시켜 줍니까? 그렇지 않지요.
내가 모자란 부분만 보충하는 식으로 그분이 우리 대신 피를 흘리신 거예요? 아니지요,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다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되이 하는 사람이라고 사도바울이 이야기 했잖아요. 그렇게 말한 사도바울은, 자기는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라도, 율법이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그 사고방식으로 그동안 율법을 지켜온 겁니다. 그게 문제였어요. 그게 문제... “나는 율법을 지킬 수 있다.”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다 보니까 그 자체가 율법을 하나도 못 지킨 사람이 되고 그 율법으로 인해 죄인 된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은 알게 되었어요.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여러분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라는 뜻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아 당신 거기 계시는구나’ 이게 예수님 만난 게 아니예요.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은 내 대신 죄를 죽으신 분으로서의 만남인 거예요. 내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분.
그래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건 키는 몇cm고 이걸 묻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만났다 하면, 우선 손과 배를 봐야 돼요. 허리를 봐야 돼요. 예수님 손에 뭐가 있었죠? 못 자국. 그러면 허리에 뭐가 있었지요? 창 자국. 그거 왜 생겼습니까. 우리가 율법 지키면 생길 수 있어요 없어요? 우리가 율법 지킨다고 하면 안 생겨야 되죠, 결국 창 자국 못 자국 박혀 있다는 말은 내가 평소에 율법을 뭔지도 모르고 아는 체 하면서 나름대로 율법을 지켜 왔다고 우기는 그것 때문에! 그것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우리를 위해서, 그런 인간을 대신해서 율법을 완성하고자, 창 자국, 못 자국 박힌 거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을 믿는다, 주님을 영접한다, 하는 말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못 자국과 창 자국을 영접한 게 되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죄인으로서의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과, 이것이 떨어지지 않아야 되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가까워오면 가까울수록 그분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이 크게 보이면 보일수록 우리의 죄는, 우리의 의는 남아있을 구석이 없다는 것을 점점 더 명확해지는 겁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 이 이야기를 해줘야 되요. 이 이야기를 해줘서 덩달아 이렇게 이야기가 나와야 됩니다. “여러분이 교회 나왔다면 교회 나온 것 가지고 구원 못 받습니다.” 라는 이야기가 목사 당회장 설교 시간에 나와야 되요. 11시 예배시간에 나와야 된다고요 그게. 교회 키웁시다, 선교회비 냅시다, 이런 소리 나오면 안돼요. 선교회비 내서 구원 받은 게 아니잖아요. 옆에 계신 분이 어떤 상처를 받았는가 그걸 보고 구원 받는 거예요. 내 옆에 계신 분. 예수님 밖으로 밀쳐놓고 자기 혼자 살려고. 그렇게 되면 나는 예수님께 사랑 받은 게 되요. 사랑 받은 게 되면 갑자기 그 순간부터 뭐가 됩니까? 사랑은 그 사람의 소유가 되지요?
그 사람의 소유가 된 이상은 그 사람은 사랑을 제대로 발휘 못해요, 왜 그러냐면, 원수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귀하게 받은 사랑을 그래, 원수를 위해 사용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내가 얼마에 얻은 사랑인데...기도원 가서 철야할 때 주의해야할 점이 뭐냐면, 응답을 받기 위해서 철야를 하고 기도원에서 목 다 쉬도록 기도하는데, 주의할 것은 뭐냐 하면, 그 받은 응답을 버리고 내려와야 한다는 사실을.
그런데 사람은 소유하려고 기도원 가요, 소유하려고. 사랑이 소유가 되어버리면 자기가 그것을 소유했다는 것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까워서 버릴 수가 없어요.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되요. 자기가 포기 안 된다는 이 말은, 자기 선택권이 포기가 안 된다는 말이고, 자기 선택권이 포기 안 된다는 말은, 내가 저 사람을 원수로 볼거냐 아니면 내 치부로 볼 거냐, 판단 기준도 포기를 못해요. 그걸 포기를 않게 되면 원수한테 사랑을 베풀 일은 그 사람한테는 없습니다. 자기 친구한테만 사랑을 베풀 거예요. 자기 친구한테 사랑을 베푸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원수를 사랑 않는 게 되요.
그런데 원수라 하는 것은 사랑을 베풀어도 원수가 원수로서 계속 남아있을 때 그게 사랑 값을 한 거예요. 방금 이 이야기는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 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었으면 악인에게도 베풀었어요. 악인에게 햇빛과 비를 내리시지요? 악인에게도 비를 내려줬지요? 악인에게도 심장이 뛰게 하고 악인에게도 이땅에 살게 했지요? 그건 분명한 사실이지요? 그러면 그 악인이 예수님을 믿습니까? 안 믿죠.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재판하고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게 했을 때 그 혀의 놀림과 힘, 판단하는 힘, 아침에 재판관이 먹었던 음식 그거 다 누가 준거예요? 예수님이 주신 거예요. 예수님이 주신 공기와 예수님이 주신 비와, 예수님이 주신 심장 뛰게 하신 은총과 양식을 먹고 그들은 누굴 죽였습니까. 그렇게 은혜를 주신 분을 죽인 겁니다. 그 사람 천당 갑니까? 못 가죠. 깨달아야죠. 성령이 와서 깨달아줘야 아, 내가 죽였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아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옥 가도 핑계치 못한다죠. 핑계치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택한 백성을 위해서만 흘렸어요. 그것은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피를 흘렸어요. 왜 그러냐고 저에게 물으시면 다른 민족은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이 아니고 혈통으로 난 민족이지만, 이스라엘은 약속에 따라서, 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민족이기 때문에 진짜 언약의 핵심 되는 피가 그들에게만 주어지는 겁니다. 신명기 쪽에서는 말하기를 피는 모든 사람에게 다 흘렸지만, 구원 받는 사람은 본인이 믿는 사람에게만 구원 받는다 이렇게 해서 피가 증언되는 범위와 구원받는 범위를 분리해 놨어요.
그것은 잘못인데, 왜 잘못이냐면, 창세전에 선택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선택된 자에게 에베소서1장7절에 보면,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흠이 없게 하기 위해서 창세전에 선택했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창세기 그다음에 출애굽기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잖아요.
흘러가는데 에베소서1장은 뭐냐하면, 예수님의 피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피라는 사건의 이유가 누구누구만을 흠이 없게 하기 위해서 그렇고 그 누구누구는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사람들이다, 해서 논리를 거꾸로, 십자가에서부터 거꾸로 창세전까지 가게 되어 있어요. 이런 말씀 좀 어렵죠? 무슨 이야기냐면, 내가 7살 때 초등학교 갔고 13살 때 중학교 들어갔고, 그래서 16살에 고등학교 1학년인데 안산고등학교 다닌다. 내가 안산고등학교 다닌 것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안산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우리가 이해가 되지요?
내가 안산고등학교 다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안산에 태어나게 했다, 라는 말도 맞지요? 둘 다 맞잖아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둘 다 맞는 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가 우선이기 때문에 모세가 변화산에서 이야기 할 때도 누구와 이야기합니까? 예수님과 이야기 하죠? 모세와 엘리야가 태어난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태어났습니다, 라고 누가 얘기해요? 모세와 엘리야가 고백하잖아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하늘나라가 예수님 위하는 나라입니까? 예수님의 피흘림을 위해서 우리는 창세전에 태어나야 했습니다, 라고 이야기해야 되는 거예요.
연속으로 계속 어려운 얘기 하고 있지요? 가만히 들어보니 말은 되지요? 제가 아까 어려운 이야기 한 것은 뭐냐면, 우리가 사랑을 소유하게 되면 사랑할거냐, 판단을 누가 한다고? 내가 판단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준다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내 판단이 아니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그분이 나를 사랑해서 원수를 사랑하게 만들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한 것에서 누구의 판단의 판단이 빠져야 합니까. 나의 판단이 빠져야 된다고요.
그런데 나의 판단이 빠지려면 우리는 내가 날 소유하면 안 되고 주님이 나를 소유해야 주께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데 만약에 내가 주님을 소유하고 사랑을 소유한다면 내가 사랑을 줄까 말까, 줄까 말까를 누가 결정합니까. 자기가 결정하니까 이것은 누구한테 자기가 주인이 되고 예수님이 똘마니처럼 종처럼 되잖아요. 아까는 그 이야기 했어요. 소유와 소유 당함과 차이가 그만큼 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십자가를 아는 걸 내가 소유한다? 안돼요. 십자가가 날 소유해야지. 내가 십자가 소유해버리면, 이건, 내가 2시에 생각했다가 9시에 생각하고, 2시 그 중간에 예수님 재림하면 지옥가죠. 그렇잖아요. 2시에 한번 생각했다가 9시에 생각하면 7시간 동안 십자가 생각 못하면 지옥 갈 수 있잖아요. 큰일 나잖아요.
오후 두시에 치매 걸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9시 되어서 치매가 낫게 된다면 그 두시부터 아홉시 사이에 만약에 네 시쯤 예수님 재림하면 그 사람은 치매 걸린 채 지옥가고 말잖아요. 모든 것이 내가 소유하면 안돼요. 내가 소유하게 되면 이것은 큰 문제가 되는 겁니다.
어려운 거 한번 정리해 봅시다. 지금까지 한 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요한일서가 어렵다고 얘기 했지요? 어려운데 왜 어렵냐 하면, 이미 우리 속에 빛과 진리, 아들 성령 사랑, 문자를 들었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다 이 말이지요. 어둠의 세계에서는 안다는 자체를 뭘로 보냐면 “내가 안다” 내가 아는 진리, 내 것이 된 거예요. 사람이 자기 것이 되면 남 줄 마음 듭니까? 안 듭니까? 안 들지요. 제가 아까 기도원 이야기 했지요? 기도원에 가서 은혜 많이 받은 거, 그거 어떻게 하라고요? 버리고 오라했지요. 그거 안 버리면 누구 소유됩니까? 내 소유가 되거든요, 내 소유가. 그걸 안 버리면 나의 소유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나의 소유가 되어버리면 원래 요한일서에서 말한 예수님 진리 성령 빛 사랑 이게 어떻게 되요? 충돌 되겠지요 충돌. 그래서 나의 소유가 된 이 모든 것을 뭐라 했습니까? 이게 바로 어둠이겠지요. 어둠.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예수님께서 이 어둠에 속한 이런 것을 내 소유로 만들어서 내가 가진 빛과 진리, 아들, 성령, 사랑 이런 것 가지고 천국에 가고자 하는 이 죄악 된 어둠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주님 소유로 바꿀 것이냐 그 작업이라 했지요?
그 작업이라 할 때 뭐라 했습니까? 우리 곁에 누가 있다? 예수님 계시다했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올 때에 예수님이 그냥 옵니까? 어떤 식으로 온다했어요? 뭘 보이면서 오지요, 뭘 보이면서 옵니까?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보이면서 오지요. 오실 때 창 자국 못 자국 보이면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점점 나는 저 창 자국을 내게 만들었고 저 못 자국을 내게 만든 죄인 중에 괴수임이 점점 가까이 갈수록 더 강렬하겠지요. 반대로 예수님을 멀리하면 못 자국을 멀리되고 예수님을 멀리하면 창 자국이 멀리되니까 자연적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 ‘나는 괜찮다’ 괜찮은 사람이 되지요? 이제는 자기 힘으로 말씀 지킬 것 같고, 자기 힘으로 이웃 사랑할 것 같고, 만약에 예수님이 창 자국 못 자국으로 가까이 오니까 나는 예수님을 죽인, 죄의 유발자가 되면서, 그러면서 우리 앞에 가까이 왔다는 것은 뭣 땜에 왔다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신 것은 죄를 지적하려고 오신 게 아니고, 이 창 자국 못 자국 때문에 대신 죽으므로 말미암아 살았다는 것을 통보해주고 확인해 주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갈라디아서2장 얘기 했지요? 갈라디아서2장에 뭐라 했습니까? 율법쪽에서 우리가 10개는 지킬 수 있는데 90개는 못 지킨다면 90개만 예수님이 대신 지키는 겁니까 아니면, 몽땅 다 지켜야 되는 거예요? 몽땅 다 지켜야지요. 몽땅 지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몽땅 지킨다고 해도 우리가 절대로 지킨 것이 아닌 이유가, 죄가 되는 이유가 율법은 내가 지킬 수 있다는 의식 자체가 율법에 의해서 죄라고 규정을 받는 거예요. 내가 왜 이것을 강조 하냐면,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가 성경말씀을 못 지켰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우리가 지킬 수 있다, 라는 사람들 의식해서 이런 소리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못 자국 창 자국이 멀어지면 옛날 자기가 했던 행세 있잖아요, 더러운 행세, 내 힘으로 말씀 지킨다는 그것이 그대로 노출 되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까이 오면, ‘아, 아무것도 하지마라 했는데...하고, 성령이 소멸되고 조금 멀어졌다 싶으면 ’주여, 내가 뭘 지켜야 될까요?‘ 하고 슬슬 또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생각하게 마련이에요. 그 부분을 한번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까이 오는 것은 창 자국과 못 자국을 가지고 온 거예요. 이것은 부활하기 전이 아니고 부활 이후의 이야깁니다. 부활된 뒤에 도마에게 창 자국 못 자국을 보였잖아요. 부활이란 말은 창 자국 못 자국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지 그것을 취소하는 게 아닙니다. 그걸 지워버리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십자가 이후 부활하니까, 십자가를 지워버리는 걸로 알고 있어요.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십자가를 지우는 것이 아니고 뚜렷하게 드러내는 겁니다. 드러내면서 우리의 행세, 우리의 사고방식을 더욱더 구체화 시키고 분명히 하는 겁니다. 네가 기껏 까불어봐야 이런 범인 밖에 안 된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 힘으로 법을 지켜서, 지킨 것이 누구 소유 된다? 내가 지켰기 때문에 누구 소유 된다? 내 소유 된다, 내 소유가 된 걸 가지고 추려서 하나님 앞에 나가 ‘문 열어주세요, 하는 식의 행세, 더러운 행세, 그것 때문에 창 자국 못 자국이 박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고 나면 그 행세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죄인 줄 알아야 되는데, 그걸 마치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제부터 나 혼자 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그때부터 소유권이 바뀝니다. 내가 주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빛과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빛이 나를 소유하고 빛의 자녀가 되지요? 예수님께서 나를 소유하고 나는 예수님의 종이 되고, 사랑이 나를 소유하면 사랑의 종이 되고, 성령이 소유하면 성령의 종이 되고, 진리의 소유가 되면 진리의 종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종이 된다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때에 진짜 종이 되는 사람은 뭐라하죠? ‘마땅합니다’ 이렇게 되는데 ‘글쎄요, 제가 좀 하기 힘드네요’ 이렇게 나온다면 옛날 행세 또 나온 거예요. 누가 자기보고 하라했어요? 자기가 사랑을 소유하면 할까 말까,사랑 줄까 말까, 자기가 사랑을 선택하지요. 이제는 사랑이 자기를 소유해버리면 이제는 할까 말까가 아니고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그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우리가 동원되는 겁니다. 우리는 무심코 하다보니까 남들 보기엔 형제도 사랑한 게 되요.
그때 엠비시에서 쫓아 와서 ‘이런 귀한 사랑을 베풀었는데, 어떻게 이런 귀한 사랑을 베풀게 되었느냐’ 물으면 ‘제가 안했는데요, 저는 소유된 백성에 불과한데요, 주께서 하셨는데요,’ 이렇게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땅하니라’ 여기 3장16절 봅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되어 있지요? 마땅하니라, 라는 생각이 드는 것조차도 주께서 사랑을 주신 사람에게만 ‘아이고, 당연하지요, 그야 말할 것도 없지요’‘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절차에 불과하지요’ 라고 아무 거리낌 없이 ‘예 그렇지요’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근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 힘들지 싶은데요, 생각 좀 해봐야 싶은데요’ 이렇게 나온다면 아직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의 해석이 어려운 겁니다.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있으려고. 주도권을...
다음을 봅시다. 여기 14절 봅시다.“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돼 있지요?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다. 제가 한번 질문을 해볼게요.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는 게 어렵습니까, ‘나로호‘가 우주궤도에 안착하는 게 어려워요? 그게 어려워요,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게 어렵습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게 어려워요. 사람들은 진짜 어려운 거 생각 않고 서너 번 실패하면 될 수 있는 ’나로호’에 관심이 많던데요. 그거 관심 갖지 말고 어떤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는가 그 사람에게 망원경 들고 봐야 돼요. ‘더러워요’ 또 묻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처럼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어렵습니까? 동창회 가서 친구와 이야기하는 게 어렵습니까. 동창회 가는 건 두 다리 있으면 가고, 시간 있으면 만나자, 해서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같이 대화한다는 것, 그곳은 천국이거든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 어떤 사람은 ‘이건 안되는 일이다’ 라고 하거든요. 안될일 같으면 모세와 엘리야는 왜 그 동네, 거기 가 있느냐 말입니다. 이상하잖아요.
사람이 로켓 타고 올라간 경우가 있어요. 그게 열왕기상에 나옵니다. 엘리야가 죽을 때 뭐 타고 올라갔습니까. 불수레 타고 올라갔잖아요. 로켓 타고 올라갔어요. 뒤에 불 뿜으면서.
밑에서 시체 찾는다고 시체를 백날 찾아도 없어요. 엘리야는 시체가 없습니다. 아직도 없어요. 에녹도 마찬가지고. 부럽지 않습니까? 제발 교회에 나왔으면 인간적으로, 적어도 이정도는 되야지요. 적어도 사망에서 생명으로는 옮겨줘야 하지 않습니까. 생명에 옮겨가면 사망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들과는 상관없는 조치가 일어납니다. 우리한테. 사망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하고는 무관합니다.
사망이 뭣 때문에 주어집니까. 죄죠. 죄의 삯은 사망이잖아요. 그러니까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그 죄와 전혀 무관한 거예요. 마치, 군대 내무반에서 군대생활 할 때, 밤마다 맞았어요. 기압 정도가 아닙니다. 맞았어요, 구타를 당했어요.
그것도 밤마다. 옛날 군대는 다 그랬어요. 술 먹고 와서 때리고 그랬거든요. 거의 한 달에 20일 30일 그랬을 거예요. 너무나 힘들어요. 보초서는 것이 힘든 게 아니에요. 술 먹고 개판치는 인간들 때문에 힘든 거예요. 군복만 입으면 다 짐승 돼버려요. 만약 거기에 신참이 왔다,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한번도 부모에게 꿀밤도 안 맞은 인간이 그것도 짐승들한테 매일 같이 맞아야 되고, 탈출할 수도 없고 탈출하면 인생 조지니까. 만약에 거기에 시체가(얼마나 무섭겠어요?) 그런데 내무반에 유령이 잠자고 있다면,(무섭습니까) 유령 있는지도 모르지요 유령이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뭐냐 하면, 죄가 지배하는 곳에서 우리는 유령 같은 존재라니까요.
이미 빠져나온 채로 죄악 된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네가 왜 죄가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지 규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유령의 모습으로 이땅에 보낸 겁니다. 그걸 유령이라고 표현했는데 성경에는 뭐라고 했냐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되어 있고, 골로새서3장에 보면 “우리는 이미 죽었고” (유령 아닙니까?)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다고요? 하늘에 있느니라, 이게 유령이라. 이런 유령이 어디 있어요.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현재 우리가 만져지는 이것은 뭐냐, 이것은 껍데기죠. 우리는 죽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이런 껍데기를 활용하는 겁니다.
크레파스 많이 있으면 노란색과 검정색을 많이 쓰잖아요. 노란색 크레파스가 많이 달리잖아요. 그걸 훌쩍 버리면 안돼요. 계속 쓰는 것처럼 이미 떠나버린 우리 몸이지만 우리 안의 그리스도가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껍데기라도 부리면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고린도후서5장15절에 보면 ‘이제 산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려함이라, 돼있죠. 제가 오늘 십자가마을에 글 하나 올려놨는데 ’나로호‘ 떨어졌다는 글 올려놨어요. (읽어보시면 참고가 될 겁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나라 가게 하지 안가냐,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 목적이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 ’나‘라는 것이 목적은 아니에요. (또 어려운 말 한다)
다시 할게요.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릇이거든요. 그릇이란 자랑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고 뭘 담겼느냐가 중요하지 그릇 자체가 중요하지 않거든요. 우리가 하나님이 생명을 받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나는 구원 받았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너 같은 인간이 어떻게 구원 받았어’ 라는 내용물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땅을 활용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 바로 나거든? ‘하나님 나 빨리 보내주세요’ 가 목적이 아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 사람을 이 땅에서 어디로 보내냐면 사망의 자리로 보내버려요. 사망의 자리로.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어디까지 승진했습니까? 몇 급 공무원까지 승진했어요? 승진은커녕, 만약에 예수님이 법원에 취직했다면 9급 7급 6.5.4.3.2.1 법원 행정처장까지 하든지 해야 될 텐데 법원에 취직 해가지고 뭐했습니까. 나중에 돌아가실 때 뭐가 됐습니까. 공무원은커녕 뭐 됐어요? 죄수 되요 죄수. 몰랐어요? 주님이 죄수지요. 강등 됐어요 강등. 승진이 아니라 강등됐어요. 빌립보서2장에 보면 어디까지 강등됐습니까. 십자가에 죽기까지 강등됐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수용했지요, 왜! 이렇게 하는 것이 누구 뜻이다? 아버지 뜻이기 때문에 수용한 거예요. 그리고 그 죄수의 자리가 택한 백성이 가야할 자리예요.
예수님께서 어두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자신이 구원 받으려고 왔어요? 예수님 구원 받을 필요가 없지요 하늘나라에 사시면 되니까. 예수님이 오셨다 가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하늘에 진짜 숨어있던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경과하면서 이 땅에 완전히 폭로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뒤집어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울이란 사람은 자기가 천하에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도통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은 모른 게 없다고 자부했다가 스데반집사님 죽이는 것이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한 것이라고 여겼다가, 하나님께서 예수님 찾아오니까 도리어 그것이 하나님 여호와 믿던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 바뀌죠. 바로 그것이 주변의 인간들에게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예수님으로 바꿔서 예수님 있는 이 땅의 자리가 하나님자린데, 너희들이 원하는 높은 구름 위가 하나님자리가 아니라 어디가 하나님 자리다? 죽은 십자가, 그 자리가 우리가 유일하게 살 수 있는 자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찌하든지 십자가에 가서 부활에 이르게 함이니라‘ 이미 그 자리를 확보해 놓았는지 묻는 거예요 우리한테. ’네가 살 수 있는 자리를 확보 했는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자리를 확보했는가‘ 이 말입니다. 소유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 자리를 알고 있느냐,는 겁니다. 사망, 생명 그 중간에 이 자리의 경계선이 뭡니까를 이 땅의 예수님께 물어야 되요. 예수님께 물으면 사망과 생명 사이의 이 자리를 예수님께서 뭐라합니까. 십자가라 하겠지요. 십자가가 뭐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할 때 유일한 자리가 되지요.
그럼 자리를 펴 봅시다. 오늘날 여러분의 자리는 어떻게 해서 마련 된 겁니까. 이건 아까 제가 물었던 질문인데, 두 가지 질문이 된다했지요? 안산고등학교 학생의 자리를 위해서
안산에서 태어났기에 1학년이 됐지요. 그러면 안산고등학교 1학년 학생의 자리는 뭡니까.
안산에서 태어난 것부터 안산에서 초등하교 다니고 중학교 다니고,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안산고등학교 1학년의 자리가 되었지요? 그러면 구원 받습니까? 그러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갑니까? 제 질문의 의도가 뭐냐하면, 현재 우리가 ‘나는 가정주부’다 합시다. 가정주부가 되기까지 어떤 남자를 만나서 사귀고 결혼했고 몇 년도에 아이 낳은 이 자리가 생명에 이르게 한 자립니까? 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생명의 이 자리는 십자가 자리죠? 내가 내 노력으로
힘들게 했던 이 자리가 십자가 자리로 와야 되겠지요. 옮겼죠. 십자가 자리가 옮기려면 어떻게 옮기면 됩니까. 만약에 이 땅에서 사장님 같으면 하늘나라 사장님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안 되면 그러면 도중에 버리면 됩니까? 버려도 안 돼죠. 제가 오늘 십자가마을에 올린 글에, 닭과 새의 다른점은, 닭은 새의 폼은 갖고 있는데 날다가 다시 땅에 떨어지는 거예요. 달다가 땅으로 툭, 떨어져버려요. 교회 교인들이 천국 간다고 쇼는 부리고 폼은 잡는데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교회 때려치워버리고 집으로 들어가요. 다시 땅으로 돌아오잖아요. 그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그것을 모이는 것을 닭장이라해요 닭장.
그래서 제가 글을 쓰면서 그 닭장을 어떻게 새되게 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그러면 닭장에 불 지르면 어떻게 되요. 불 지르면 놀래 닭장 안에서 피해 다니죠? 하지만 얼마 안가서 날개 힘 잃고 다시 땅에 떨어진다고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지금 나의 자리라고 하는 것이, 이미 내 소유 자리라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 애쓰고 노동하고 양보하고 타협하고 아부하고 거짓말하고 죄지으면서 그래서 구축한 나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사람마다 다 있어요. 오늘 뉴스에 보니까 15개월된 애, 15개월 된 그 애의 자리는 지딴에 세상 산다고 고생한 자리 아닙니까. 15개월된 어린아이가 티비를 건드리나가 티비가 넘어져서 깔려 죽어버렸어요. 90넘어 죽는다고 누가 얘기했어요? 90되야 죽는 게 아닙니다. 15개월 돼서 죽을 수도 있어요. 15개월도 티브이에, 그러면 티브이를 혼낼까요? 티브이가 죕니까? “마땅하니라”고 했잖아요. 그 부모는 우리애가 15개월에 죽으면 ‘하나님 그건 마땅한 조치입니다’ 할 수 있는 부모 있음 나와 보라 하세요. 없다 이 말입니다.
왜! 부모의 자리에는 애가15개월만에 죽는 자리가 아니고 애는 나중에 커서 우리나라에서 세계 노벨평화상, 물리학상 받을 것을 기대하고 키웠던 애예요. 티브이도 나중에 훌륭한 인물 될 것을 기대하고 갖다 놓은 거예요. (넘어져서 죽었지만...)
그 부모가, 이 애를 어떻게 낳고, (애가 만약에 6대 독자 같으면 부모 미쳐버릴 걸)
(6대 독자 죽었다고 시가집에서는 환장하겠죠.) 너 같은 여자 들어와 재수 없다고 나가라 할겁니다. (나가라면 우쒸, 나가지뭐,) (위자료만 많이 주면 나가지뭐, 재벌집이면)
(드라마에도 나오잖아요.)
자기 자리에 다른 애는 15개월 만에 죽어도 괜찮아, 남의 애는 죽어도 괜찮은데 내 애는
무럭무럭 잘 자라서 세계 유엔총장 하던지 번듯해서, ‘햐, 저 아이 누가 키웠는지 아이 엄마
훌륭하다,하는 소리를 듣기를 바랐던 거예요.‘ 그게 누구자리라? 나의 자리, 그 엄마의 자리예요. 제가 쓴 ’결코 정죄함은 없나니‘ 책에 보면 예를 들어, 자기 형님이 결혼했는데, 형수가 등장하더라 말입니다. 자기는 형님이 결혼한 것밖에 모르는데 형수가 왜 등장하느냐 말이지요. ’아줌마 누구세요?‘ ’형수잖아‘’형수가 무슨 뜻이에요?‘ ’형수란 관계는 자기가 원했던 관계가 아니고 형이 결혼하니까 자동발생 적으로 생기는 관계지요. 이처럼 내 자리는 내가 애써서 만든 자리이기도 하지만, 내게 얼키고 설켰던 어떤 관계들이, 여러 관계들이 뭉쳐져서 만들어진 그런 자리가 나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그걸 내가 애써서 만든 자리라고 보는 거예요. 설사, 괜찮은 형수도 자기가 기도해서 왔다고 우기는 인간입니다.(ㅋ ㅋ )
뭐든 좋은 건 다 자기 탓이고 나쁜 건 모두 남탓이고, 그런데 그런 자리를 어떻게 생명의 자리로 옮기느냐 이 말입니다.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죄밖에 모른 인간인데.
승진,승진 해가지고 대통령 자리에 올랐는데, 그놈의 자리가 생명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무슨 짓을 했습니까. 사망의 짓을 한 거예요 사망의 짓을. 그러면 이게 뭐냐면 그동안 내가 있던 이 모든 내 자리, 양탄자 같은 내 자리가 생명이라는 안목에서 볼 때
생명되신 우리 주님의 십자가 자리에서 봤을 때, 사망의 자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미 생명으로 옮긴 사람입니다. 십자가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죠.
앞으로도 내가 승진할 거고, 앞으로도 내가 애 쓸 건데, 앞으로 내 자식 키울거고, 앞으로 내자식도 결혼 보낼 건데, 어쨌든 그것이 나의 자리가 될 텐데, 그런 자리라 할지라도 주님 보시기에는 사망위에 펼쳐진 돗자리에 불과하다. 라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만 알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러냐하면, 십자가가 통풍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무슨 바람이 불어 오냐 하면, 생명나무의 바람이 사망의 세계 속에 있는 지옥 갈 우리들에게 생명으로 호흡 수 있는 유일한 통풍구가 십자를 통해서만 솔솔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이 갑갑하고 답답한 새장에 30도 넘는 더위의 숨이 턱턱 막히는 자리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불어오는, 그것이 생명의 바람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바람이 내가 구축한, 내가 평생 동안 애썼던 그 자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네 죄 때문에 고생했던 그 고생의 자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거든요. 그래서 생명의 콧바람이 부는 사람은 누구자랑을 합니까.
내가 애써서 잘되는 것 자랑하지 않고 누구 자랑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내 대신 고생하고 피 흘리고 기도하셨고 눈물 흘리고 십자가에 내 대신 죽어 가셨던 주님의 공로를,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입니다.
ㅡ 십분 쉬겠습니다.ㅡ
관리자(IP:124.♡.87.52)
10-09-01 23:05
안산100611요일3장13절b
안산100611요일3장13절b. /이근호 목사님
요한일서 3장13절
둘째시간은 중요한 것 합니다.
하나님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믿는데서 뭘로바꾸냐, 예수님으로 바뀌어져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그대로 두고 추가적으로 예수님을 보태 하나님을 그 하나님으로 우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하나님이 안 깨지는 이상 예수님과 하나님이 결합이 안 되는 하나님을 그들은 믿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 믿던 시절의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있던 하나님이 확연하게 다를뿐더러 정 반대가 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믿던 시절에는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말씀 주시면 복 받고 구원 받는 시절의 하나님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 믿는 시절은 뭐냐면, 아무리 말씀을 지켜도 죄로 변해버리는 그 시대가 예수님 믿는 시대예요.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그렇게 하지 마세요. 왜냐면 우리는 비로소 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즐거움에 참여하는 겁니다. 이 덕분이 다 예수님 덕분이에요. 그때부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하나님을 안 믿는 거예요. 왜냐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기존의 하나님은 나와 관련된 하나님이었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등장한 것이 아니라 반듯이 나와 관련되어 같이 한 덩어리 되어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제가 설명에 들어가겠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 할 때 항상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숨어 계세요.보이지 않아요. 만약에 하나님 얼굴을 봤다 하면 죽습니다. 죽어요. 하나님은 모세한테도 자기 얼굴을 보여줬어요? 안 보여줬어요? 안 보여줬어요. 가렸어요.
하나님은 숨어있는 하나님이고 숨어계시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런데 이방민족들이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할 때는, 이방민족에게 이스라엘을 보여줄 것은 언약을 이야기해요. 왜? 언약은 보입니다. 돌판이니까, 십계명은 돌판이잖아요. 보이는 말씀이 언약이에요. 나중에 말씀이 걸어 다니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면 걸어 다닐 수가 있어요. 자, 여기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를 대봐라 하면 돌판, 하나님의 모세 율법, 모세 율법이 증거가 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거는 뭐냐, 하나의 개인 가정의 문제기 때문에 가정의 문제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름을 여호와라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여호와라 하는 것은 가정을 떠나서 국가 단위로 집단, 집합이 될 때 그때 나는 ‘여호와의 하나님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그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여호와 이름이라 하지 않았으나 모세에게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로라’고 이야기 합니다. 자 그렇다면 모세 율법을 가지고 모세 율법이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은, 그렇다면 이방나라 신은 뭐가 있습니까. 형상이 있죠 형상. 형상이 있는 반면에 이스라엘은 형상을 만들면 되요? 안돼요? 형상을 만들면 안 됩니다. 왜냐면 형상 대신에 뭐가 있느냐면, 율법이 있고 언약이 있어요. 그렇다면 무엇과의 싸움이냐면 신의 형상이냐 언약이냐의 싸움을 보여주는데, 누가 이기게 되었습니까. 언약이 이기게 되어 있어요.신을, 인간이 만든 신을 언약이 이기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언약이 이기면 언약은 이스라엘이 이방나라를 이기는 것이 되죠?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이 언약이 없는 이방신을 이긴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를 이긴 게 되죠? 그러면 구약성경에, 늘 이겼습니까 아니면 질 때도 있어요? 사실은 졌을 때가 더 많이요. 남한테 지배 받을 때가 더 길어요. 언약이 이방신에게 질리는 없을 거고, 그러면 누가 졌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언약한테 이스라엘 자체가 진거예요. 이게 균열이에요 균열, 이스라엘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고 이방신을 믿은 거예요. 이방신을 믿으니까 언약이 이스라엘자체를 이겨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민족에게 억압과 압제를 받는 거예요.
그게 사사기에 보면 나오죠.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율례를 지키지 않으니까 주위에 포진해 있던, 블레셋이라든가 미디안 이방나라가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다. 너무 괴로워서 이스라엘이 언약대로 살려주세요, 언약을 부르짖으니깐 하나님께서 잠시 구원자를 세워서 잠시 물러가게 했다, 또 마음이 편하니까 다시 헤헤~ 거리면서 그들은 이방신을 또 섬긴 거예요. 북쪽 이스라엘 아합 같은 경우에는 바알과 아세라를 수입해가지고 또 섬기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인간들, 인간들이 순수하게 언약과 하나가 되었다 안 되었다? 하나가 된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인간들은 언약보다도 항상 어느쪽으로? 조금만 마음이 편하면 어느쪽으로? 이방신을 섬기는쪽으로 나아간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숨어있는 하나님은 안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방신의 특징은 나타나는 하나님이에요. 항상 형상을 섬기니까. 결국 나타나는 하나님, 보이는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언약에 의해 나타나는 하나님이 붕괴 되요 붕괴. 붕괴 되야 돼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내부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아 하나님 보고싶다.’ 이것이 계속 붕괴 되야 돼요. 하나님 보고싶다,하지 말고 ‘하나님 언약이 내 속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야 돼요. ’말씀대로 하옵소서‘’말씀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해야되요.
처녀가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니까 뭐가 됐습니까? 예수님을 임신했지요.정말 신기하잖아요. 예상했습니까 못했습니까. 전혀 예상 못했죠. 그냥 천사가 와서 알려주지요. 여러분들이 처녀 마리아가 돼야 됩니다. 제가 천사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말씀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주여 말씀대로 하옵소서’ 하면 똥배 안에 뭐가 들어있겠습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가 가득 들어있는 거예요.
이거는 우리가 예상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숨어있고 말씀을 앞장 세워서 뭐든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게 된 겁니다. 믿게 된 겁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예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경우에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러면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대를 하잖아요. ’아들을 낳을만 하니까 아들을 낳았다‘ 이럴텐데 말씀이 언제 오느냐 하면, 완전히 우리의 가능성이, 나에게서 나올 가능성이 완전히 죽었을 때, 자기 아내의 태가 죽었을 때 그때, ’네가 이맘때쯤에 아기가 있을 것이다, 할 때 ‘말씀대로 하옵소서, 말씀 뜻대로 하옵소서’ 뜻대로 되라하니까 자기 아내가 임신했잖아요. 하나님의 방법은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예상을 항상 붕괴시켜 버려요.
이 언약이 뭘로 바뀌었냐 하면, 새 언약으로 바뀌죠. 새 언약. 새 언약으로 바뀐다는 게 무슨 의미냐 하면요, 언약일 때는 누구와 상대하느냐, 라헬과 상대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됩니까, 언약의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르죠. 모르는데 이스라엘이 뭐했냐, 멸망했죠. 멸망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멸망했지요.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멸망했잖아요. 그렇잖아요. 이 언약의 말씀대로 못 지키면 누구나 뭐한다? 멸망하지요. 언약이 율법이니까, 모세율법이니까. 율법 안 지키면 누구든지 멸망한다,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새 언약이란 게 뭐냐, 새로운 언약이에요. 율법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 멸망했다는 말은 언약이 없는 인간은 자동적으로 다 멸망한다는 거예요. 언약 있어도 멸망한다면 언약 없으면 말할 것도 없이 가짜 신을 섬기니 멸망하죠. 그런데 새 언약이 뭐냐 하면, 새 언약을 하게 되면 이게 말씀이잖아요. 하라, 하지 마라 이렇게 되는데 새 언약은 뭐라고 되어 있냐면, 피, 이 피를 마셔라, 이 떡을 먹어라, 피와 살이죠. 그런데 살과 피를 먹기 위해서는 산사람의 살과 피를 먹기 위해서는 죽어야 돼요. 피를 먹는다는 것도 그분이 죽어야된다 그 말이지요.
새 언약은 뭐냐 하면은, 새 언약은 죽음의 약속이에요. 이게 말은 참 쉽게 합니다만, 이 언약은 살아있는 인간을, 언약을 지키면 계속 살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새 언약은 이미 여기서 죽음을 이야기했다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새 언약 앞에서 다 죽은 것이에요. 고린도후서 5장에 나와요. 그리스도가 죽었으면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거예요. 그러면 새 언약은 뭐냐, 일단 다 죽여 놓고, ‘너, 너, 너 살아나!’ 라고, 일방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너, 너, 너 살아나!’ 뽑아줄 때, 그때만 살아나는 것이 새 언약의 원리입니다.
옛 언약은 이 말씀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은 것이 옛 언약이라면, 새 언약은 우리보고 새삼스럽게, 지키라 안 지키라 물을 사항도 아니에요, 이미 죽었으니까. ‘너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 에베소서 5장에 나옵니다. “잠자는 자여, 죽은 자여 살아나라!” 지시와 명령이 새 언약에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예수님의 새 언약은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게 한다,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이 영이, (십자가와 부활을 새 언약이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고스란히 죽은 자에게 말씀을 주어지게 되면, 이 죽은 자 안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고스란히 개입이 되요. 스며들어요. 에스겔37장에 보면, 바짝 마른 뼈 이야기하고 있지요? “인자야, 저 뼈들이 살겠느냐?” ‘뼈는 바짝 마른 뼈지요뭐, 이렇게 이야기 할 텐데 (축축하면 살겠죠, 축축하면 바이러스 생겨 살건데) 바짝 마른 뼈에게 ’살겠느냐‘ “주의 말씀이 임하면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합니다.
주의 말씀이 임할 때는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일방적이에요. 일방적으로 우리를 그냥,( 해부할 때 시체로 간주해놓고 뭘 집어 넣든지 꺼내든지, 째든지 짜든지 그거는 의사 맘대로예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뭘 집어넣느냐 하는 것은 주님 맘대로입니다.
잔치할 때 음식가운데 하나 가운데 고추를 반으로 갈라 매운 거 다 꺼내고 그 안에 고기 다진거, 잡채랑 넣어 튀기죠. 주님께서 우리가 이루지 못할 언약의 완성, 믿음 소망 사랑의 완성을 예수님이 다져서 집어넣습니다. 우리는 껍데기만 남죠. 껍데기도 나중에는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처럼 갈아입어요.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너무 허황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곧이듣지를 않는데, ‘목사님 그 말이 진짜면 좋겠는데 진짜인 증거가 뭡니까’ 묻는다면 “십자가”에요 십자가. 진짜로 십자가에서 부활했으면 세월이 2천년 3천년이 되어도 이거는 변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보였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나” 십자가로 인하여, 앞으로 실제 주어질 일이고 실제 사건이다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그랬죠, “찌른 자도 볼 터이요 통곡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제 사건이라면 예수님 재림도 하나의 세트로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새 언약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시체가 일어나는 것은 누구의 힘이냐 하면, 예수님의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 힘이거든요. 여기 부활의 힘만 오는 게 아니에요. 죽었다가 부활, 양쪽 다 들어간 겁니다. 이게 중요해요. 누워있는 우리 안에 예수님도 죽으심도 들어있고 부활도 들어있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누가 죽였습니까, 우리가 지키지 못할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우리가 평소에 이 껍데기 때문에, 육으로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 죽었잖아요. 새 언약을 받은 사람은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이 껍데기만 남아있는 평생 동안 이 고백을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나를 살릴 수 없는 죄에 불과합니다. 아까 돗자리 얘기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