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04b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20100604b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100604b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헌금한다 할 때 2번이죠. 뭐라도 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마라를 만나면서 주님의 사건이 헌금을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마라 함으로서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헌금을 해도 죄가 되는 이유가 헌금을 나쁜 의미로 하는 것이 아니고 뭐라도 하는 것, 이걸 죄라고 지적하는 그것이 그렇게 믿어주는 행위가 의가 있기 때문에 죄라고 지적할 수 있는 겁니다.
의가 있기 때문에 그것 보고 죄라고 아주 즐겁게, 행복하게, 감사할 정도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해서 구원받는 것 아니거든요. 뭐라도 하면 이것이 아무것도 하지마라 하는 것에 의해서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 두 개가 합쳐서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 되는 거죠. 그래서 헌금은 주께서 하라 하셨는데 그것은 헌금하는 것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헌금하는 그것이 죄로 드러나게 하시는 그 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때는 헌금하게도 하시고, 설교하게 하기도 하고, 강의하게 하기도 하고 죽을 때까지 계속 써먹는 거예요.
이걸 그대로 유월절 해봅시다.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만있었습니까? 뭘 했지요. 양을 잡았잖아요. 무교병 먹고, 띠 띠고, 나갈 준비하고 식구들 모아 양고기 먹고 하는 걸 했다 이 말이에요. 이런 걸 하는 그것이 주님이 만든 사건을 발견시켜서 네가 피를 바른 것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홍해를 건너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런 사건을 유발시킨 것은 주님의 시간에 속한 문제 아닙니까.
주님의 시간이니까 그것도 주님의 시간 안에서는 주님이 하실 모든 일이 포함되는 거예요. 그 안에서 그들은 십자가를 내다보겠죠. 우리는 이미 십자가를 알고. 그런데 우리가 뭘 할 때 내 시간 안에 그대로 있는 겁니다. 내 시간과 누구 시간과의 만남? 주님의 시간과의 만남을 이게 십자가 사건이라 합니다. 피의 사건. 시간과 시간이 만나면 거기서 바로 특이한 사건, 예상치도 못한 사건.
애굽인들은 자기가 예상한 대로 살아요. 그러나 성도는 평소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하지만 그 가운데 마주쳐서 예상치도 못한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사태가 진짜 악령의 사태인지, 진짜 성령이 주신 사태인지를 그 결과를 보면 알아요. 결과를 보고 ‘주님이 누구시죠? 주님이 이렇게 하셨구나.’라는 결과로 열매가 나오면 성령이 와서 정면으로 부딪친 거고, ‘역시 나는 잘 났어?’라고 나오면 악령이 부딪친 사건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늘 성도한테는 그런 부딪침이 있으니까 뭐라도 하세요.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사건이기 때문에. 놀면 뭐 합니까? 뭐라도 하면서 그 안에서 주께서 이미 다 이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유월절 사건을 정리해봅시다. 어린양이 있어서 어린양을 환풍기, 통풍기라 하죠. 어린양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항상 인간은 나만 쳐다보다가 사건이 일어나니까 갑자기 어린양이 우리를 살려냈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이게 첫 번째 유월절에 그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어야 될 믿음이었습니다. 어린양 때문에 산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어린양 때문에 우리가 살았구나.
그렇다면 어린양을 통과하고 난 뒤에 전에는 어린양이 왔다는 것은 바로 죽음이죠. 어린양이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면 결국 우리는 이미 죽은 자가 돼요. 여기에 죽은 자가 되게 하는 늘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드는 우리 속에 유일하게 산 자가 있는 거예요. 이 산 자를 유월절 끝나고 난 뒤에 장자, 맏이. 이 맏이는 죽은 자 속한 맏이가 아니고 누구 것이냐 하면, 여호와의 것이죠.
하나님의 것이 내 안에 개입이 되어서 나는 하나님의 개입된 것으로 인하여 죽을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그것을 보여주는 관계가 장자와 장자의 덕을 보는 식구들의 관계입니다. 이 장자가 로마서 8장에 나오잖아요. 예수님은 우리의 맏아들, 장자죠.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모든 중심은 장자 중심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터지는 사건들은 이 장자와 더불어서 벌이는 사건들이죠. 이 사건에서 유월절이 되풀이 되고, 이 사건에서 제사가 되풀이 되고, 하나님의 시간이 안식일이 장자 중심으로 이뤄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장자의 특징이 한 마디로 말해서 대리, 대속 또는 책임자가 되겠지요. 이 장자를 어느 지파에서 담당하느냐? 민수기에 보면 레위지파에서 담당합니다. 나중에 장자가 레위지파에서 유다지파로 바뀌어요. 어떻게 한 번 레위지파로 갔으면 쭉 가야지 유다지파로 바뀌는 이유는 뭐냐? 그리고 바뀌는 와중에서 요셉지파는 왜 껄떡거리다가 빠지게 되느냐? 그 내력을 설명을 하려면 몇 시간 걸려요. 하지만 성경에서는 시편에 보면 아주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유다를 선택했다!!
선택할 때 초반부터 선택을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앞에 몇 가지 선택한 것을 통해서 선택해놓고 버려버리고, 선택해놓고 버려서 최종 선택한 것이 딱 나오죠. 화투, 노름판을 통해서 설명해야 되는데. 전부다 패를 쥐고 있단 말이죠. 정낙원 목사님이 하나교회에서 장땡 이야기했는데.
전부다 시끌벅적 이라. 이쪽 A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노름판에 떼돈 벌라고 오늘 선택한 모양이라.’ ‘왜?’ ‘안 가르쳐줘.’ 장땡이 웃고 있는 거예요. 본인은 오땡이 되는 모양이라. 난초 두 개. 그 다음에 시끌벅적. ‘하나님께서 난 선택한 것 같아. 미치겠어, 정말 미치겠어.’ 표정관리가 안 되서 좋아서. 보니 국화 두 개 들고 있어. 구땡인 것 같아. ‘너부터 까라.’ ‘자 하나님 은혜다. 오늘 판 다 싹 쓴다.’ ‘손떼라.’ ‘뭔데? 난 오땡!’ ‘죽어라.’ ‘넌 뭐고? 너 까봐라.’ ‘국화 두 개, 구땡! 다 쓴다.’ ‘손떼라.’ ‘뭔데?’ ‘나? 장땡이다.’
결국 장땡의 위력은 오땡이나 구땡이 먼저 나와줘야 돼요. 그렇다면 오땡을 쥐고 있고 구땡을 쥐고 있는 사람은 뭐냐 하면, 오땡을 쥐었을 때 인간의 죄, 구땡을 쥐었을 때 인간의 죄를 함유하고 포함하고 있는 겁니다. 왜 오땡이나 구땡이 있어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는 인간의 죄가 무르익지 않았어요. 인간의 죄는 간음죄, 살인죄 이 정도는 오땡 정도 죄밖에 안 됩니다. 살인한 건 한 구땡 되겠다.
진짜 죄는 사람이 짓고 싶어도 못 져요. 메시아가 와서 메시아를 죽여 버릴 때 진짜 장땡의 죄입니다. 장땡의 죄에 장땡의 구원이 주어지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잔소리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잖아요. 오른 눈을 빼버려라. 오른 눈 빼고 구원받는 사람 많이 있어요. 독한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오른 눈 빼도 구원 못 받아요. 앞에 오땡, 구땡 이야기해요. 그러면 바리새인들 구원받으려고 까부는 게 백날 해도 안 돼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원수 된 자요, 경건치 않은 자요, 죄인이에요. 왜 그런 주변에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일방적인 선택된 자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된 자에게만 하나님의 의가 제공이 됩니다. 그러니까 선택된 사람은 오땡, 구땡을 구경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율법적인 행위를 자랑할 수가 없어서 심지어 내 자신이 주님을 죽였던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걸 마지막 장땡을 잡은 사람이 사도 바울인데 그 사람 뭐하는 사람입니까? 율법에 흠 없는데 그것으로 예수 믿는 사람 다 잡아 죽였잖아요. 스데반 죽일 때 거기 증인으로 섰고. ‘걱정하지 마라. 날 믿고 스데반 집사 죽여도 내가 있잖아요. 경찰서서장 다 아니까 마음대로 돌 던져. 내가 증인이잖아.’ 해서 증인 노릇한 사람이에요. 남보다 율법으로 더 열심이었던 사람입니다. 장땡의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을 장땡의 구원으로 구원해버렸으니까 주님 피 앞에서 죄 용서받지 못할 죄는 더 이상 없는 거죠. 어떤 죄도 다 용서받죠.
그걸 사도 바울은 십자가 사건이 과거에 있는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다고 해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 십자가 사건이 한물 간 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만이 계속해서 이뤄질 때 그 피의 사건이 하나님의 새로운 분류, 진짜 이스라엘과 애굽 같은 사람과 분류하는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 중심은 어린양이 계시죠. 그래서 성경의 진짜 중심은 예수님 중심이고 십자가 피 중심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복습해봅시다. 생명은 뭐라고요? 피. 피는 생명과 죽음과 만나야 생김. 그래서 모든 인간의 역할은 죽는 역할이냐, 생명의 역할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중심의 역사를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안식일을 줬지요. 안식일 이미 시작과 종말이 끝났습니다. 인간은 끝을 싫어해요. 한번 만들어줬으면 계속 살게 하지 왜 이러냐고 나오죠. 하지만 하나님은 끝이에요.
이 끝은 예수님의 시간을 위한 피조물이지, 피조물을 위한 피조물은 아니에요. 우리가 복음을 위한 피조물이지 날 위한 복음이란 없습니다. 애당초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복음을 위한 내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위한 내가 되기 때문에 이 안에서 제사지내죠. 제사가 우리한테 주어지게 되면 죽음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만남이죠.
이걸 정리하면 하나님은 죽음 속에서 만난다. 어떤 죽음? 흠 없는 분의 죽음. 그래서 부처나 공자는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훌륭하고 똑똑하고 아는 게 많아도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고. 왜 안 되느냐? 흠 없는 양이 아니기 때문에. 우표가 달라요. 흠 없는 양 우표를 지금 12장에서 보고 있습니다. 흠 없는 양 우표를 붙임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새 달’ 새로운 시간이 돼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이 새로운 시간이 주어진다는 말이 남아있는 앞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무슨 의미냐 하는 거예요. 새로운 시간이 주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어디서 분류됐습니까? 애굽에서 나왔죠. 그러면 이렇게 그렸습니다만 수직적으로 그리면 이렇게 입체적이 되겠죠. 볼록 튀어나왔다고. 1층은 애굽이고 2층은 이스라엘이고. 이해하시겠습니까? 불록 튀어나온 거예요. 볼록 튀어나올 때 하나님의 시간이 개입되었지요.
그러면 앞으로 유월절 이게 천사백 몇 년 경이라 하는데 확실한 게 아니니까 그냥 B.C. 1400년경, B.C. 1000년경, B.C. 500년경 할 때 하나님의 시간이 개입되려면 이게 원판, 모델이 되어서 항상 애굽에서 세상에서 볼록 튀어나오는 방법이 되풀이 되겠지요. 튀어나온다는 말은 이스라엘과 애굽이 계속해서 차이가 나겠지요. 차이가 나려면 이스라엘은 뭐고 애굽은 뭔지 둘 다를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시간의 개입해야 된다는 게 무슨 의미냐 하면, 앞으로 이스라엘의 볼록한 걸 들고 B.C. 1400년, 1000년경 계속 가면서 볼록, 볼록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건이 차이가 나면서 튀어나오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튀어나오게 되면 애굽은 이방인이 되겠죠. 이스라엘 이방인 되겠죠. 나중에 보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게 튀어나오죠. 참 이스라엘 또는 가짜 이스라엘. 그런데 참 이스라엘 쪽에서 또 튀어나오겠죠. 계속 남은 자를 향하여. 계속 또 튀어나오겠죠. 이렇게 되풀이 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렇게 되풀이하게 되면 이스라엘 여기서 뭐가 떨어져나가느냐 하면, 애굽이 떨어져나가겠죠. 여기선 가짜 이스라엘 떨어져나가겠죠. 여기선 가짜 선지자. 떨어져나간 이것들이 바로 마지막 최후의 죄를 향하여 달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 죽일 때 주동자가 누구였습니까? 베트남 사람이었어요? 라오스 사람이었어요? 누구였습니까? 유대인이었잖아요.
유대인에서 누가 볼록 튀어나왔습니까? 예수님이 튀어나왔죠. 마지막 최후에 볼록 튀어나온 게 예수님이라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바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이죠. 죽은 자는 누구한테 해당됩니까?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는 드디어 박수치면서 발각되는 거예요.
이근호라는 내 속에서 나는 죄인 되고 볼록 예수님이 튀어나오면 그러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주께서 나한테 피를 흘리시고 죽었잖아요. 그러면 내가 믿어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받죠. 나는 믿기는커녕 주님을 ‘저리가’ 하고 밀어내니까. 그렇다면 구원받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일방적으로 찾아오심으로 구원받죠.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마라 이 말이죠. 네가 뭘 해도 그 한 것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그게 신약 시대에 밝혀져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다. 그래서 살아난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죽였다가 살리신 이를 위해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걸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죠.
구약은 이처럼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마지막 최후의 죄 덩어리로 달려가게 만드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게 뭐냐 하면, 결국 여기선 모르지만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의 대변자죠. 그래서 이스라엘을 선택했다는 말은 모든 인류를 이스라엘을 대변자로 삼아서 선택한 게 돼버려요.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선택했다는 말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질 사항을 이스라엘에게 대표적으로 전부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말은 결국 나머지 모든 국가도 다 멸망한다는 거예요.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유대인에 의해서 메시아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어떻게 보면 한 민족의 사건, 에피소드, 아주 작은 일이거든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이스라엘 손에 죽었던 메시아라고 우기는 어떤 미치광이의 죽음으로 보지 않고 이게 어디까지 파급되느냐 하면, 전 세계의 운명을 다 파급한다는. 그 말은 이스라엘은 전 인류를 대변하는 자로서 메시아를 죽인 것이 되는 거예요.
저는 하나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이제 그 기능을 바로 교회가 하자. 교회는 우리를 대표해서 예수님을 죽이는 장소로 들통 날 때 비로소 진짜 교회가 숨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교회를 심하게 모독함으로써 교회를 사수하자. 이 말은 머리 되시는 분이 살아있으면 몸은 아무리 변동돼도 머리만 이상 없으면 교회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교회에서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성전에서 일곱 촛대를 관리하시는 분이 관리를 하다가 엎어져서 촛대 한 개를 부러뜨려서 여섯 개 남아서 ‘내가 일곱 교회 지키려 했는데 내가 실수해서 하나 부러졌구나. 할 수 없지.’ 이런 주님이 아니죠.
성전에서 계속해서 일곱 교회를 지킨다는 말은, 사일로, 사료 부어놓고 나오게 하는. 성전에서 일곱 촛대를 거느리고 있잖아요. 이것이 밑에 내려올 때는 피를 묶음, 여기서 사건이 돼요. 사건이 일어난 곳이 교회가 되죠. 그러면 이 일곱 교회는 죄인이 돼야 되고, 이 죄인과 피의 바다에서 진짜 교회는 이렇게 있단 말이죠. 그래서 일곱 교회라 하는 것은 피 사건을 재현하기 위한 현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야기했죠. 에베소 교회를 뭐라고 나무라는데
인간이 죄 짓고 싶어서 짓습니까? 어쩔 수 없이 짓습니까? 어쩔 수 없이 짓습니다. 죄 안 질 수 없어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부 싸움할 때 안 해야지 해서 안 하게 됩니까? 에이 하잖아요. 한 번 시작하자. ‘나도 안 하려 하는데 성질 돋우니 하잖아.’라고 하죠.
사람이라 하는 것은 환경이 지배하지 자기가 환경을 지배하지 않아요. 자기 마음대로 환경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환경이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인간입니다.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미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죄 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것을 주께서 이미 완성하셔서 교회되게 하시는 거예요. 따라서 교회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한테 죄를 지적하잖아요. 지적하는 귀한 자리가 일곱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껏 지적 받아야 돼요. 그것이 그 뒤에 생명 주시려고 마음껏 지적하시는 겁니다. ‘내가 하지 말라 했잖아’ 이런 식으로.
정리하면 유월절 사건은 애굽과 도드라지게 이스라엘이 튀어나와서 계속 그 식들이 그 다음에 계속 이뤄지는 반복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12절에 나옵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이렇게 해서 피를 보고 넘어가는 이게 표적이 되고 도드라지는 거예요.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과 애굽이 있죠. 여러분, 애굽이 떨어져나가는 게 아닙니다. 살아있어야 돼요. 애굽은 이스라엘에 유월절 사건이 터지니까 이 사람들 애굽의 장자가 죽은 걸로 보잖아요. ‘아이고 왕궁에 있는 내 아들 죽었구나. 집에 있는 내 아들 죽었구나.’ 이걸 해석을 애굽의 모든 신들이 죽은 거죠.
그렇다면 이것이 계속해서 다음 세대에 반복된다면, 어린양의 피와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모든 신들의 싸움이죠. 애굽 신이 여기서 끝납니까? 또 나오죠. 계속해서 역사가 끝나는 한 나올 거예요. 마르둑, 바벨론 신들이 계속 나오죠. 심지어 마지막에 누구냐 하면, 여호와 신이죠. 여호와 신과 여호와 신이 대결해서 여호와 신을 죽여 버리잖아요.
인간이 생각하는 여호와와 예수님이 생각하는 여호와는 아버지고 인간은 여호와 믿고, 예수님은 아버지 믿고. 그래서 여호와 믿는 사람이 ‘아버지 같은 소리하고 있네.’ 하고 죽이잖아요. 아버지하고 나하고 하나라 하니까 죽이잖아요.
여호와라고 해서 그게 참 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본 자가 아버지를 본 자라 하면 끝난 문제에요. 예수님을 보이는 사건이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안 계십니다. 반드시 예수님을 앞장세우는 사건만이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이고,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고 우회해서 하신 하나님, 신, 절대자, 여호와 언약의 신 그거는 말짱 애굽 신이에요. 그걸 도드라지게 분류시키는 작업을 성령께서 지금도 계속 하고 계신다 말이죠. 쉽게 말해서 유월절 사건은 여전히 계속해서 이어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피 안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가만있으면 됩니까? 이스라엘을 어디로 끌고 가요? 이스라엘 속에 어린양의 피 있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 내부에 어린양의 피와 애굽적인 이스라엘 사이에 일이 벌어지죠. 그건 앞으로 계속 해야 된다 이 말이죠. 어린양의 피를 담기 위해서 제사법이 있고, 성막이 있고, 성소도 있고, 법궤도 있고 이제는 어린양의 피와 애굽적인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탈락될 자는 탈락시키고 도드라질 것은 새로운 노선이 등장하는 겁니다.
어째서 레위인이냐? 레위인인 하나의 오땡, 난초 두 개. 어째서 요셉이냐? 그거는 국화 두 개, 구땡. 시편에 보면, 나는 에브라임을 선택하지 않았고 나는 유다를 선택했다. 처음부터 그러지. 처음부터 그럴 수 없죠. 처음부터 세밀해지려면 역사라는 게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가야 되죠. 아흔다섯 살 먹고 마지막에 ‘십자가다.’ ‘엄마 처음부터 그러지.’ ‘처음에 내가 한두 번 그랬나? 네가 몰라. 네가 세상 살아봐야 알지. 십자가 한 이유를 알지.’ 지금 압니다, 압니다. 알기는 개코나.
살아봐야 진짜 십자가 피로 다 이뤘구나. 아까 이야기한 양푼으로 피를 뿌리는 거예요.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어떻게 행동하고 관계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눈동자가 피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열심히 뭔가 열중하고 있다는 여기에 집중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사건을 일으켜서 그 피를 도드라지게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13절에 나오죠.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피를 보면서 넘어간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은 너희를 보는 것이 아니고 너희 위에 덮인 것을 보죠. 우표. 피를 보고 넘어가죠. 지금 어린양 잡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지금은 안 돼요. 지금은 양 잡아도 소용없다니까요. 왜? 죄가 그만큼 깊어졌어요. 양 잡아 하나님께 드리면 구원받겠다는 그것도 죄였다.
이미 실체가 드러났는데 아직도 양 잡고 소 잡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아직도 십일조 하고 뭐 하고. 십분의 일 내는 것은 고맙죠. 누가 고마운지 모르지만 하여튼 감사한데 10% 낸다고 생각하면 되지 그걸 구약 때 십일조 관념으로 생각하시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이미 그런 것은 율법 보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율법의 완성인 피 보고 넘어가지 내가 율법을 이만큼 행해서 넘어가지 않아요.
개혁주의자들, 성화론자들은 하는 말이 예수 믿고 난 뒤에 이제 율법을 이루려 함이라. 이제부터 자기가 율법을, 피는 저리로 치워버리고 자기가 주님이여 드디어 제가 율법으로 행합니다. 성령의 법을 따라서 행합니다. 주께서는 ‘이게 어디서 놀던 뼈다귀야.’ 항상 넘어가는 것은 피를 내놔야 되는데 이제는 피도 믿고 다 믿고 복음을 알건 알고 성령 따라 사는 새로운 인간 등장, 저를 보라고. 그것 발로~
항상 피를 보고 넘어갑니다. 피 속에서 이미 인간의 주체는 죽은 자 되고, 우리는 죽은 자 내세우지 말고 내 대신 살아나신 자를 내세우세요. 예수님과 해결지어야지 잘난 나로 해결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을 모독하는 겁니다.
그 다음 13절 끝에 보면,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걸 제가 피곤하시지만 설명해줘야겠어요. 적어볼게요. 여기 ‘너희’가 이스라엘이죠. 재앙은 뭐냐? 아까 열 가지 재앙이죠. 그렇다면 어린양 이야기를 나중에 배치하고 앞에 있는 열 가지 재앙을 먼저 때렸지요.
처음에는 이스라엘은 어리둥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한다고 해놓고 벌만 때리는데 왜 이런 조치를 하지? 나중에 보니까 그 재앙 하나가 점점 더 너희(이스라엘)과 애굽과 분류시키기 위해서 재앙들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 재앙 받을 때 이스라엘도 처음에는 같이 받았어요. 나중엔 안 받았지만.
그렇다면 이 열 가지 재앙이 이스라엘의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 이게 그대로 적용이 돼요. 이런 재앙에 예수 믿는 사람도 함께 당합니다. 1, 2, 3, 4, 5, 6, 7 할 때 7 인이 1 나팔로 올라가죠. 일곱 나팔 다음에 한 대접이 되죠. 결국은 모든 시간이라 하는 것은, 시작과 종말이 있으면 시간을 느끼게 되는데, 시간의 주인공이 누구냐를 찾아가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끝에 보면 어린양의 보좌에서 이것이 쏟아지게 돼있죠.
결국은 남은 시간의 주인공은 점차 어떤 사태가 일어나든지 간에 그것이 누구를 지향한다? 어린양의 보좌, 어린양이 심판하신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여러 가지 사태가 일어난다 이 말입니다. 그 재앙에 성도도 다 함께 맞게 돼있어요. 하지만 성도는 이 모든 것도 어린양에서 온 것이란 걸 알고 나를 바라보게 돼요. 불신자들은 당하면 당할수록 이를 더 갈면서 반항하게 돼있죠.
70이레에 있어서 7-62-1 이렇게 층으로 돼있는데 7이레가 성전을 지어라 해서 지을 때까지 예루살렘 완성까지 7이레죠. 62이레는 그것이 짓밟히고, 1이레는 다시 세우는. 이 성전이 이렇게 와서 이렇게 가는 게 아니고 1이레의 주인공이 어린양이죠. 어린양에서 전부다 조종하는 거예요. 소급해서 봐버리면 1이레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 다 봐야 된다는 거예요. 여기 7이레도 전체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 이야기하게 되면 어떤 점에서 유리한 해석이 되느냐 하면, 이 성전 지어라 한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다, 안 계시다? 안 계시거든요. 안 계시다는 성전을 이스라엘이 만들었죠.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은 개인 나라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 인류의 죄가 이스라엘이 대표해서 했던 짓이 성전을 만든 짓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성전을 만들고 깨어졌다고 울고불고 하니까 또 성전 지어라 하니까 좋다고 성전 짓고. 이러한 짓거리 속에서 인간이 담아야 될 모든 죄가 여기 다 담기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1, 2, 3, 4, 5, 6, 7 / 1, 2, 3, 4, 5, 6, 7 / 1, 2, 3, 4, 5, 6, 7 나가는 것처럼 세상이라 하는 것은 어린양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 전체가 이스라엘이 했던 행세를 되풀이해서 한 나라이고 따라서 이스라엘에 내렸던 재앙을 이방나라에게도 재앙을 받아야 마땅한데 그 재앙 속에는 그냥 재앙이 아니라 어린양이 바로 주가 되신다는 걸 알려주는 식으로 재앙의 강도가 더욱더 심하게 강하게 재앙이 주어집니다. 강도가 세면 인간의 반응도 더욱더 세지고.
이게 유월절의 어린양이 요한계시록에서도 어린양으로 계속해서 부각되는 거예요. 홍해에서 건너올 때 유리바다 건너오는 전부다 해당이 되죠. 항상 이스라엘이 하는 모든 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전 인류를 대표했다고 본다면, 70이레 속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이 전부다 포함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학자들은 뭐라고 하느냐? 역사적 해석을 먼저하고 영적 해석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A라는 지점에서 하는 것하고 B라는 지점에서 할 때, C라는 지점에서 할 때는 전부다 자기 입장, 자기 시간을 고수하면서 역사적 해석을 하기 때문에 역사적-문법적 해석을 계속 유지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A 지절의 70이레 해석 다르고, B란 지절 다르고, C 지절의 해석 또 다르다 이 말이죠.
아까 했잖아요. 하지마라 해도 뭐든지 하잖아요. 뭐든지 하는 것처럼 이 지점에도 70이레 보고, 지금 2010년도 70이레 이래 본단 말이에요. 그런 모든 해석을 아무리 해도 어린양은 그 해석에 포착이 안 되는 거예요. 1이레, 십자가에서는 이미 이런 모든 해석을 정죄했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적 방법으로선 포착이 되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주체문제를 다루는 거예요. 언젠가 70이레 논문을 시간이 있으면 설명을 찬찬히 하고 싶은데 시간은 한 열 시간 정도 걸리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이 드는데.
성전을 지었던 주인공은 이스라엘이지만 이스라엘 역사는 사적인 역사는 아니고 온 인류를 대표해서 이래서 많은 걸 보여주는 그런 역사로서 이스라엘 역사가 미리 당겨서 다니엘이 70이레의 계시를 받은 거예요. 나중에 1이레까지 와버리니까.
그러니까 70이레 성전 지으니까 여기 옆에 있던 이방인들이 개입을 하게 되죠. 그래서 남쪽 왕, 북쪽 왕들이 좋다고 성전 박살내고 있죠. 62이레 동안. 그런데 마지막에 1이레가 등장하니까 두 놈 다 나쁜 놈이라 해서 다. 모든 인류는 70이레 속에 갇혀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유월절할 때는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애굽의 신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계속 돌출하고 끄집어내는 겁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레위기 22장 26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칠 일 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제 팔 일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열납되리라” 7과 8을 구분하는 분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구분했죠. 이런 말씀이 없으면 구분할 필요가 없죠.
왜? 1, 2, 3, 4, 5, 6, 7, 8. 5와 6이 차이 안 나죠. 4와 5 차이 안 나죠. 그럼 7과 8 차이 납니까, 안 납니까? 차이 안 나죠. 우리 역사에서. 차이를 내게 하시는 것은 새로운 사건이 주어질 때 차이 나겠죠. 그럼 7과 8의 균열, 그 갈라짐을 통해서 1부터 7까지의 의미와 새로운 의미의 8 사이에 그 차이점을 익히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뭘 수용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레위기에 나오는 이 제물을 바칠 때 ‘이것 집에서 내가 키우던 건데.’라는 안일한 마음에서 못 키우고 ‘이것은 하나님의 사건에 의해서 제가 바치는 겁니다.’ 하고 하나님의 사건과 결부시키겠지요.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지금 여기 12장부터 드디어 유월절 나오거든요.
여기 15절에 보면,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 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계속 과정을 7로 끊을 때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라 하는데 하지 뭐.’라고 말하면서도 그 끊어진 단위에 자기 몸을 끼어서 자기 몸이 절단되어야 됩니다.
그걸 하나님이 끊은 균열된 시간, 시간의 균열 속에 제사 지내는 우리 자신을 집어넣으면 우리는 또다시 죽어야 돼. 사건에 의해서. 죽고 균열되고 새로 시작하는 새로운 사건에다 자기 몸을 맡겨야 되죠. 그러면 7일 동안 키운 새끼를 8일째는 바치라 했잖아요. 그냥 바치면 안 되고 7일 동안 같이 살고 8일째 바치는 본인이 양과 더불어 합세해줘야 양이 가는 코스, 새로운 시간의 세계에 그 바치는 사람이 합류될 수 있습니다. 말로 하니까 굉장히 힘들지요.
이걸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면, 다윗이 하나님이 번제나 제사도 원치 않으시고 상한 심령이라 할 때 이미 다윗 자체가 다윗 본인이 8일째 양이 된 거예요. 죽어야 될 놈은 죽어야 되는 겁니다. 하지만 나를 죽어야 될 놈이라고 알려준 그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뻔뻔스럽게도 ‘나를 살려주옵소서.’라는 말이 성립이 되죠. 가만있는데 뒤에서 ‘너 죽을래.’ 할 때 돌아서서 ‘살려주세요.’ 이 말입니다. ‘내가 왜 죽어.’ 이러면 안 되고, ‘맞습니다. 나에게 죽어 마땅하다고 알려준 하나님 약속대로 저를 살려주세요.’
그게 바로 율법은 모든 제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제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과 결부되어서 이뤄지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구경하려 오신 분이 아니고 그냥 어린양이 아니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기 때문에 진짜 십자가를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의 어린양과 결부된 세상 죄에 바로 자신이 해당됨에 대해서 다행스럽게 여기고 감사히 여겨야 되죠. ‘주님 아니면 누가 저보도 죄라 하겠습니까?’라고 감사히 여긴다면 그 속에 포함이 되어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율법의 완성적인 기능이 성령을 통해서 매일같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죠. 그렇게 되면 아까 이야기한 역사적 해석을 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마라. 그 다음에 뭔가 하게 돼있다. 우리는 만날 성경 해석하는데 그 해석이 내 중심.
B.C. 5세기 경에 다니엘의 70이레를 누가 해석하죠? 다니엘을 만났던 그 당시 백성이 하겠죠. B.C. 4세기 경에 70이레를 누구 중심으로 해석한다? 내 중심으로 하겠죠. B.C. 3세기 경에 70이레를 누가 해석한다? 내가 모든 걸 해석하겠죠. 이 모든 해석을 안 해야 되는데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구원인 줄 알고 할 수밖에 없는 이 모든 해석들이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철저히 내다본 조명 앞에서는 이 해석은 다 아니다.
그래서 제 논문이 뭐냐 하면, 주체와 관련된, [70이레와 비역사적 해석]이라 하는 것은 그 어떤 역사적 해석도 1이레에서는 그것은 허용될 수 없다. 그러면 하지마라. 하지마라가 아니고 하란 말이죠. 오늘 2010년도의 70이레의 해석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해석하던, 안 하던 상관없이 이미 해석을 해주신 해석의 결과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된 거죠.
그렇다면 그 해석에 의해서 70이레를 바라보게 되면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가 나와야지 ‘70이레는 이렇게 해석하면 옳습니다.’란 해석이 나오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걸 제가 그 논문에서 이야기하니까 그 교수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이근호 목사는 자꾸 70이레 해석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성경을 해석이 되는 것이 아니고 믿어야 되는 거죠.
누굴 믿어? 이 해석을 주님께서 하셨다. 성경은 믿는 책이지 해석하는 책이 아니란 말이죠. 그러나 그 사람은 해석 해버리면 그 해석은 누구 좋으라는 해석입니까? 그 해석은 내가 납득한 내가 받아들인 내 해석이 돼버려요. 그럼 그 해석으로 내가 구원받은 셈이 되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하시니 공로를 또다시 가로막는 셈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주체 문제를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그 논문이 어려운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음을 통해서 저희들에게 참된 백성과 거짓 백성을 구분하시는 이 방식에 저희들이 눈 돌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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