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0. 5. 28) 2강 녹취록
광주 강의(2010. 5. 28) 2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24)
광주 강의(2010. 5. 28) 7-2
지난 시간 한 것들을 복습해 봅시다.
5장에 있는, ‘너희들이 이방인의 능욕거리가 되고, 기근을 당하고’ 이것은 어떤 차원입니까? 악의 차원이 아니고 죄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쁜 짓해서 벌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들은 ‘성진을 짓자!’ 이렇게 나와요.
성전은 지으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성전은 그 내용이 인간은 죄인으로 들어가 있고, 피를 받았으면 그 자체가 성전의 요구조건이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다만 있는 성전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머리카락으로 묶여서 종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는 우리가 여전히 죄를 모르고,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여기에 무엇이 등장하는가 하면 그들이 말씀을 참고로 해서 성전을 지은 거예요.
그러면 묻겠지요? ‘왜 성전을 짓게 하십니까? 처음부터 짓지 말고 바로 보여주지.’ 그러면 피가 성립이 안 돼요.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이미 창세전부터 주님의 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확정되었습니다. 피가 있기 위해서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죄를 씻을 수 없는 그런 구조가 마련되어야 그 속에서 피가 피답게 효력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제 글에 이런 것이 있지요.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안다고 하지 말고 그냥 피만 바라보면 된다.’ 왜? 그 피를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성전을 짓고 난 뒤에 성전이 멸망하는데, 성전을 부수면 또 지으면 되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성전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거예요. 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내밀면서 여기에서 뭐가 생기는가 하면, 바로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파와 오메가(시작과 끝). 이 시간 안에 우리가 갇혀 있는 겁니다.
기존의 시간 개념은 때라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적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가두어 두는 것이 시간입니다. 로마서 11장 32절에 나오지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불순종에 가두어 두셔서 오직 긍휼로 구원하려 하셨습니다. 그 계획이 창세전에 이미 다 되어 있었어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고.
성전 이야기를 계속해 봅시다. 성전이 멸망하는데,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것이 시간이 있다는 말은 반드시 심판과 멸망이 있을 때만 시간이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심판이 없으면 시간이 의미가 있습니까? 그냥 현재, 현재, 현재. 내일도 내일이 되면 또 현재, 모래가 되면 또 현재. 그냥 현재만 있지 끝은 없잖아요. 끝이 있으니까 그것은 미래가 되고, 도착 못한 지금은 현재가 되고, 지나간 것은 과거가 되는 겁니다.
언약적 시간이란 하나님이 이미 다 이루신 것을 드러내기 위한, 피조세계를 가두어 두기 위한 구조이며 장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시간을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그냥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불순종 안에 존재하는 겁니다.
우리를 이렇게 시간 안에 가두어 두심은, 이미 다 이룬 것을 쳐다보도록 하시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미 다 이루어진 성전은 어떤 모습일까? 성전은 일단 사람 손으로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지요. 그렇다면 진짜 성전은 어떤 성전인가? 이것을 이번 시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짜 성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흔적을 찾지 마세요. 흔적을 찾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그 흔적은 쥐고 구원 받은 것을 확정하려고 하는데 주님은 매정하게도 이런 흔적을 지워버려요.
쉬운 예로, 제가 만약 기아타이거즈의 팬이라면, 기아가 연속 4연패 할 때 “주여, 이번에는 이기게 하옵소서.” 기도했더니 기아가 LG에게 15대 1로 이겼다. 이것을 하나의 흔적처럼 갖고 있는 거예요. 내가 성전임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증거물을 하나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도 한화하고 경기를 합니다. 주여 기아가 이기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는데 기아가 졌어요. 이게 사랑이에요. 왜냐? 우리가 흔적을 갖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내가 손으로 지은 성전을 갖고 있을 때의 그 사고방식을 그대로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내 흔적이 있음으로 그 안에서 나는 멸망에서 빠져나오게 돼요. 멸망에서 빠져나오면 나는 시간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옛 사람은 멸망 안 당해야 되고, 죽는다는 것이 억울하고 아까워 죽겠지요. 그렇게 되면 안 돼요. 우리 자신도 탁류에 휩쓸려서 멸망할 때는 멸망을 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멸망이지만 우리에게는 주께서 오시는 날입니다.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죠? 빨리 주와 함께 거하는 것. 나그네 생활 청산하고 하늘나라 정착하는 그 순간이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 약속만 있으면 되지 구태여 내가 흔적을 쥘 이유가 없단 말이지요. 괜히 믿음이 없으니까 괜찮은 기적 몇 개 가지고 싶은 거예요.
처음에 기도해서 우리 팀이 이겼다고 할 때는 기분이 좋지요. 그런데 두 번째 기도했는데 안 됐어요. 하나님이 그 흔적을 치운 것입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자꾸 흔적을 쥐려고 하는데, 속마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제발 나는 멸망 속에 있지 말고 남 멸망당하는 것 구경이나 하게 하옵소서.” 이런 것입니다.
이런 실수를 요나 선지자가 했어요.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할 때 멀리서 구경하지 말고 그들이 멸망당할 때 그 현장에서 요나도 같이 멸망당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는 빠져나오니까 빠져나온 자신은 죽을 판이고, 멸망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편안하고 행복하게 있고. 심판의 시간이 니느웨로 간 것이 아니고 요나를 찾아온 거예요. 죽음의 벌떼가 저(니느웨)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이것이 요나에게 격입니다.
요나가 너무 힘들어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요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네가 박 넝쿨을 아꼈는데, 내가 니느웨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은 귀중히 여기는 것이 뭐가 그렇게 못마땅하냐?(욘4:10-11)’ 이렇게 하셨지요. 이것을 통해서 요나는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내 구원을 위한 흔적은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흔적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약속을 믿으면 돼요. “잘 하셨습니다. 멸망시키는 것. 주께서 오신다고요? 아이고 기쁜 소식이네요.”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만 남기는데 그 약속 속에는 나의 어떤 흔적도 삽입되면 안 됩니다. 삽입되면 마치 내가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내가 그것을 알아서 내가 관리하는 사람이 돼요.
따라서 이 보이지 않는 성전과 대비시키기 위해서 보이는 성전은 깨어져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보이지 않는 성전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이지 않는 성전이니까 건물이 있을 수 없고, 자본금도 있을 리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 말씀을 사수함으로써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성전이 되고, 이것을 만약 눈에 보이는 식으로 만들려 한다면 멸망당해야 될 보이는 성전이 되고. 이렇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 적용시켜 봅시다. 에스겔 5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방인들을 마주치게 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데 이방인들을 동원시키죠. 이방인들의 특징은 성전도 없고, 하나님의 언약도 없고 아무 것도 없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멸망당한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이 이방화 되는 것이지요.
이방나라에는 하나님의 언약도 없고, 성전도 없고 아무 것도 없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평소 버릇이, 하나님의 성전이 있으면 우리는 은혜 받는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 더러운 버릇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통해서 없애니까 그들에게 아무 흔적이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란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믿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어요. 바로 그 기분. “진짜 가셨네.” 이것을 유지시켜 주시는 것이 지금 하나님께서 성도를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나는 알지.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을.” 이렇게 되면 그것이 흔적이 되는데, 매일같이 “주의 약속 아니면 우리가 쥘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수요일 설교할 때 선지자 이야기를 했어요. 가짜 선지자들은 눈에 보이는 선지자 있고, 예레미야 있으니까 비교하면서 “저 인간 처리해 버릴까?” 이렇게 선택의 가능성이 있는데, 진짜 선지자는 어떻게 도망칠 수가 없어요. 믿을 만한 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말씀밖에 없으니까 남들 보기에는 혼자 중얼거리고 혼자 지어낸 것 같은데 본인은 미치는 거예요. 그 예를 들면서 제가 세례요한을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광야에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고 했지요.
일반인들이 선지자를 볼 때는 보이는 선지자가 있잖아요. 그런데 선지자 당사자는 뭘 보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죠. 왜? 진짜 말씀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 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경우에는 이미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눈에 뭐가 보이는가 하면, 자기 목을 벨 칼과 목을 담을 쟁반이 보이는 거예요.
처음에 세례요한이 태어날 때는 대단했어요. 엄마 뱃속에서 뛰놀았고, 아버지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었지요. 이쯤 되면 아버지가 기대했겠지요. “태어날 녀석은 큰 인물이 될 거야!” 라고. 그런데 그의 삶은 초라했고, 그의 죽음은 누구나 기피하는 처참한 죽음, 어린 소녀 하나가 장난삼아 한 말(아이들이 장난으로 개구리에게 던진 돌)로 인해 죽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태어나실 때에 별이 움직였고, 동방박사는 그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어요. 뭔가 대단한 줄 알았지요. 그런 분이 이 땅에서 죽을 때 옆에 누가 있습니까? 알아주는 사람 없었어요. 딱 한 사람 있었네요. 그것도 지극히 못난 십자가에 달린 강도.
바로 그 상황이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진짜 시시해요.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때 멋지게 죽는 모습을 상상해요. 하늘이 갑자기 캄캄해진다든지, 온 세상이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든지 등등. 그런데 차를 타고 가다가 낭떠러지에서 굴러 죽는다든지, 저수지 주변을 산책하다가 발이 미끄러져 물에 빠져 죽었는데 두 달이 지나서야 겨우 시체가 발견될 줄은 누가 예측했겠습니까?
우리 어머니가 늘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얘야, 전화 좀 자주 해라. 내가 죽었는데 아무도 모르면 안 된다.” 죽고 난 뒤에 남들이 알고, 모르고 그런 것을 왜 신경 씁니까? 죽음이 한 달 뒤에 찾아올지, 두 달 뒤에 찾아올지 그것은 어머니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고, 주와 함께 거할 소망만 가지면 되지, ‘내 시체 누가 가져갈까?’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습니다.
왜 이런 걱정을 합니까? 자기는 개죽음 당하듯 그렇게 죽기 싫어서 그래요. 이게 뭡니까? 자신이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밖에서 자신을 내다보고 있는 거예요. 시간마저 정복하고, 내가 알아서 천당, 지옥을 결정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왜? 선악과를 따 먹어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기 때문에.
주님은 이런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를 다 치워버려요. 나중에 너무 치우니까 자식이 “아버지는 교회 다니면서 무슨 재미로 삽니까?”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기도한 것대로 된 것도 없고, 나도 아버지처럼 믿다가 늙으면 “괜히 믿었어!” 이렇게 되면 누가 책임 지냔 말이죠.
천사가 와서 “너는 천국에 넣어 줄 거야!” 뭐 이런 것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것도 없고. 내가 믿는 것은 주님께서 다 부숴버렸어요. 왜? 사람 손으로 지은 것을 자꾸 의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꾸 멋진 영화를 만들어요.
제가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아무리 그것이 현실과 유사해도 영화는 다 조작된 것이거든요. 그 조작을 누가 해요? 시간은 하나님이 다루시는 것인데, 우리가 마음대로 조작해서 ‘나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으로’ 만듭니다. 이순신이 죽으면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런 것처럼.
우리의 죽음은 주님의 때가 되어 끝을 내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상상하지 마세요. 폐건전지 회수하듯이 합니다. 새로운 장막을 덧입게 하기 위해서. 남는 것은 고린도후서 5장 1절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이 말씀이 전부예요. 이 말씀만 믿으세요.
그런데 이 말씀을 내가 손으로 붙잡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지는 마세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내가 만든, 안 부서지려고 버티는 허접스런 나만의 성전이 되는 거예요. 이것들이 모여서 오늘날 교회가 된 겁니다. 그래서 이런 교회를 모독해야 되지요. 왜? 진짜 교회가 있기 때문에.
기존 교회는 인간들의 자존심과 명예심이 뭉쳐서 멋진 자아상을 그리는 제 2의 자아가 되거든요. 하나의 우상이지요.
과정을 봅시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이방인이 알고 있는 시간에 들어가요. 이방인들의 시간관은 어떤 것일까요? 이방의 제국은 영원하다. ‘여왕님은 영원하다.’ 어느 나라 국가입니까? 영국 국가지요. 이방인은 ‘우리나라는 영원하다.’고 해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것이 바로 이방인의 시간관이에요.
이방인의 시간관은 그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다른 민족 다 망해도 괜찮아요. ‘내가 태어난 이 민족만은 영원하다.’ 이것이 이방인의 시간관입니다. 그 시간관에 누가 들어갔습니까? 이스라엘이 포획되고 말았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쫄딱 망한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 여기에 다니엘이 침투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실은 다니엘 이전에 에스겔도 이것을 알았어요. 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은 이방인 되기 전에 이미 이방나라가 되었지요. 이방나라의 시간관은 뭐라고 했습니까? ‘다른 나라는 망해도 우리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지키시기 때문에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 그 당시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이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시간관이 너희를 치러온 바벨론과 앗수르의 시간관과 일치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이방인들을 통해서 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너희들이 이방인에게 조롱거리가 된다.’고 했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 5000명 모이는 교회가 있는데, 그 옆에 30명 모이는 교회가 있어요. 이 30명 모이는 교회가 먼저 세워졌는데, 나중에 세운 교회가 부흥을 해서 5000명 모이고, 예배당을 크게 지어서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저 30명 모이는 교회도 교회인가? 내가 장담하는데 한 달 뒤에는 저 교인들이 전부 우리 교회로 올 거야.”
그 계획을 위해서 “우리교회 오시면 차비 드립니다.” 하면서 봉투에 2만원 넣어서 주고, 버스 마련해서 동네마다 운행하고, “우리교회 주일학교 시설은 최첨단 설비로 갖춰놓았습니다. 자녀교육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우리교회 와서 체계적으로 배우면 큰 일군이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선전을 하지요.
그러면 진짜 그 목사 말대로 한 달 뒤에 다 큰 교회로 오지요. 그러면 30명 교회에서 큰 교회로 가면서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역시 교회는 큰 곳으로 가야 배울 것이 있고, 얻을 것이 있고 신앙에 유익해!” 라고 하지요. 그러면 개척교회 목사는 뭘 느끼겠습니까? 큰 것에 의해서 작은 것이 삼켰으니까, ‘큰 교회가 큰 교회 될 수밖에 없는 그 사상이 나보다 훨씬 더 낫다.’ 이렇게 되겠지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을 때 이런 정신이잖아요. ‘만약 예수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을 안 잡히게 할 건데, 잡힌 것 보니까 예수님을 잡은 바리새인들이 옳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나는 헛수고 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이 가룟 유다를 배반했잖아요. 왜 하나님이 배반케 하십니까? 바리새인이 더 낫다가 아니라 바리새인에게 팔아먹은 내(가룟 유다)가 더 낫다고 여긴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자살할 정도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값 은 30을 받았는데 영 찝찝하니까 그 돈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갖다 주었는데, 그들이 그 돈을 거절하죠. 그래서 그 돈을 성전에 던져 넣고 돌아가서 자살하고, 대제사장들은 그 돈을 성전고에 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면서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어요.
결국 모든 인간들의 행동은 자기만 살리는 시간관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것을 처음 알게 된 겁니다. 이것을 제가 개혁주의 신학회 발표에서 주장했습니다. 인간의 주체는 나만 살겠다는 시간관을 갖고 있는데, 그런 시간관으로 어떻게 성경 해석이 가능한가? 그런 생각으로 성경을 해석하니까 그 해석은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아들었겠습니까만 그래도 외쳐야지요.
이스라엘이 이방화 되었습니다. 에스겔에도 그렇지만 다니엘을 여기에다 집어넣었습니다. 문제 나갑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왕의 말을 들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순종했어요. 먹고 살아야 되니까. 느부갓네살이 꿈을 꿀 때 다니엘이 자기 지혜로 해석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해석 못했지요. 다니엘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안했다?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70년만 참자.’ 하지요. 그런데 결국은 안 돌아갔지요.
결국은 뭡니까? 다니엘을 집어넣고, 다니엘을 통해서 다니엘도 예상 못한 새로운 시간이 오는데 그 시간은 그냥 온 것이 아니고 바벨론이라는 제국이 우상을 만들게 하시고, 우상이 넘어지면서 그 발밑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그 돌멩이 하나가 인자의 나라가 되지요.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밥 먹고 사는 것은 쉬워요. 그냥 세상 시키는 대로 사세요. 그냥 사시고 괜히 객기 부리지 마세요. 왜냐?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를 왜 내 역사를 만들어서 나의 신앙 티를 냅니까? “너희들 나한테 달려들면 벌 받아.” 벌 안 받거든요. 왜냐? 벌 내리고, 안 내리고의 시간은 주님이 결정했지 내가 결정하는 것 아닙니다. 괜히 남한테 꿀리니까, 힘이 없으니까 객기를 부리는 거예요. 우리가 망해버린 이스라엘을 흉내 내고 있어요. 괜한 자존심 때문에.
다니엘 뒤에 머리카락이 있어요. 그 머리카락은 누굽니까? 주님께서 이미 완성한 보이지 않는 성전에서 나오는 머리카락 끝에 다니엘이 있어요. 다니엘 본인도 모르는데 난데없이 꿈을 꾸고, 난데없이 다니엘에게 꿈 해석을 묻고 이렇습니다. 대전에 있는 이종분 집사님이 지금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자기는 친구를 다 끊고 자꾸 안 만나려고 하는데 지금도 계속 전화가 온데요. “남편이 병들어 죽었는데 나는 외로워서 못 살겠다. 지금 수면제 먹고 죽으려고 한다. 어쩌면 좋겠니. 네 결정에 맡길 게.” 그러면 이 집사님은 “남편 죽은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믿음이 좋니?” “믿음은 좋은 게 아니고 하나님 선물이야.” “전화 끊자!”
끊고는 또 전화 오고, 전화 오면 또 복음 이야기하고. 복음을 전파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쪽에서 복음 들려달라고 사정을 하는 것 같아요. 김을수 집사님은 복음 전하려고 하면 다 도망을 간다는데, 이종분 집사님은 그냥 가만히 있는데 자꾸 전화오고 찾아오고 한답니다. 누가 훌륭합니까? 훌륭한 사람 없어요. 주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인간인지라 두려워해요. 그런데 꿈을 풀이하니까 자기가 원치도 않는 높은 지위로 올리잖아요. 자기가 출세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준 거예요. 그런데 계속 잘나가면 좋은데, 창문 열고 기도하니까 간신배들이 기도했다고 고발해서 사자 굴에 들어가고.
다니엘 세 친구는 어떻게 됩니까? 불속에 던져지고. 이 모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사는 대로 삽시다. 그러면 뒤에 머리카락 달린 사람은 주께서 사로잡아서 사용하십니다. 제발 사용당할 때 ‘내가 전도했다’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정말 짜증납니다. 우리는 그냥 편한 대로 살고, 돈 좋아하고, 내 가정 최고고 그래요.
이렇게 내 욕심대로 살 뿐인데 주께서 다른 역사, 다른 복음의 세계를 우리에게 만나게 합니다. 마지막이란 것을 느끼도록. 마지막을 아는 사람은 마지막 끝에 서기 때문에 모든 것이 느긋하고 세상이 시시해 보여요. 그런데 자기 역사, 자기 시간을 고수하는 사람은 혹시나 실수할까봐 안절부절못하고 마귀에게 매여 삽니다.
제가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시험과 정답]이라는 글을 올렸어요. 투표를 하는데 어떤 후보를 찍어야 우리가 잘 선택했다고 할 수 있는가? 이게 마귀의 시험입니다. 우리는 선택 당한 사람이지 내가 선택할 자격이 없어요. 우리의 정답은 이미 예수님이고,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의 삶이 둘러싸여 있는 겁니다.
주님이 이미 우리를 선택했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그런 착각은 버리세요. 선택 당한채로 이대로 가는 거예요. “그 때 그런 일을 안 했으면 내 꼴이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건데.” 이것은 마귀가 우리를 꾀는 소리입니다. 과거는 잊어버리고 지금 주께서 무슨 일을 시키시는지 따라가면 돼요.
다니엘은 어떤 시간관을 갖고 있습니까? 기존 바벨론의 시간관은 70년이죠. “70년 후면 우리는 돌아간다.” 하고 바벨론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잖아요. 그런데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면 세상 끝납니까? 아니죠. 금나라 다음에 은나라. 은나라 다음에는 놋나라 이렇게 나오지요.
그처럼 이 세상 역사는 당장 안 끝나요. 하지만 이미 끝난 사건으로 믿지요. 그게 뭐냐? 70이레입니다. 70이레니까, 70 곱하기 이레지요. 이레가 뭔가 하면, 이미 확정된, 끝장내기 위한 것이 이레입니다. 7이레라는 것은 주님의 시간 하에 있는 나머지 역사. 기껏해야 70년밖에 안 됩니다.
이레라는 것은 시작과 끝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 시간은 누구 손에 있다? 주님 손에 있다. 이것이 이레입니다. 천지창조의 그 이레. 그 이레에서 봤을 때 나머지 시간은 70년인데, 그 70년이 어떻게 구분되는가 하면, 70년이 마지막 이란 것을 알 수 있는 흔적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빠져나오고, 그들이 어떻게 성전 짓고, 지은 성전이 어떻게 깨지고, 깨진 성전 대신 누가 오시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첫 번째 70이라는 것은 시작이 뭐냐? 7이거든요. 7부터 시작하니까 7이레 동안에 뭘 하는가 하면, 성전을 짓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잡혀 가는 것이 성전 개념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죠. 그들이 성전을 오해했어요. 그 오해한 것을 재생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망했습니다.’ 라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는 그 때 성전 짓기를 원했습니다. 성전만 있으면 이스라엘은 영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62이레 동안 뭡니까? 지은 성전이 완전히 박살나는 기간이 62이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박살날 성전을 성전이라고 우겼습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왜? 1이레. ‘진짜 성전은 이렇게 등장한다.’ 라고 예수님이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3일이 어디에서 어디까지입니까? 예수님 죽고 난 뒤에 부활까지가 3일이죠. 그러면 3일 안에 뭐가 들어 있어요? 이 인간 중심의 세상은 주님 앞에서 다 없는 것이고, 주께서 새롭게, 3일 만에 주님의 영원한 새로운 시간, 새로운 창조의 시간을 주는 날이 3일이죠.
3일 만에 성전 새로 짓겠다는 말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완성된 숨어있는 성전이 멸망이란 사건을 통해서 다가온다는 말이죠.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성전이 깨지고 합니다. ‘성전 지었다. 성진 깨졌다. 그 다음에 새로 지었다.’ 이것이 7이레입니다. 이 7이레를 누가 시키는가? 1이레의 주인공이 시킵니다. 그러면 1이레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성전 있다. 성전 깨졌다. 성전 새로 지었다.’ 이게 1이레 되시는 예수님이 다 하는 겁니다. 이 1이레가 7일입니다.
7일을 반으로 나누면 3일 반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역사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찔렸던 그 기간과 찔린 것에 대해 복수하는 3일 반. 이것이 세상 끝이라고 요한계시록에 한 때, 두 때, 반 때가 나오는 겁니다. 다 풀렸잖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레라는 말은 7일입니다. 이레라는 말은 ‘시간은 누구 손에 있다?’ 주님 손에 있지요. 제가 묻고 답변하는 식으로 할게요. ‘원래부터 시간은 누구 손에 있다.’ 인간은 시간을 그릴 수 없잖아요. 인간이 그럴 수 없는, 인간이 형상을 만들 수 없는 시간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인간 쪽에서 뭔가 형상을 만들어서 하나님께 나가는 길은 있다, 없다? 없고, 하나님 쪽에서 7일, 안식일을 줌으로 말미암아 ‘너는 무슨 소리를 해도 네가 하나님께로 오는 수는 없고 하나님이 관리하는 거야.’ 라고 하는 거예요.
그 시간의 완성에 준해서 인간이 죄를 지을 때는 그 시간에 의해서 시작과 끝이 멸망, 심판(노아 홍수 같은 것)이 주어지는 거예요. 심판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비로소 뭘 느끼는가? 시간이 끝났다. 끝이 있음으로 그 앞을 시간이라고 하는 거예요. 노아같은 경우에는 ‘일주일 되면 비가 오는 거야.’ 그 다음부터는 뭐가 중요해요? 끝나는 시간이 중요한 거예요.
율법의 제 4계명이 뭡니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해서, 계속해서 우리의 모든 운명과 끝나는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겁니다. 그 이레를 개시한다는 것은 바벨론 제국 밑에 있는 다니엘을 통해서 인자의 나라를 위해서 개시할 때, 그 때 이스라엘이 빠져나오면서 이들이 무슨 역할을 하는가 하면, ‘왜 성전이 불타고 우리는 쫓겨날 수밖에 없는가?’ 이러이러한 잘못을 했습니다를 되풀이 하는 그러한 임무를 띠고 나오자마자 이 땅에서 7이레 동안 성전을 짓습니다.
성전을 지었으면 영원히 가야 될 건데 62이레 동안 이방나라에 의해 완전히 다 깨지지요. 62이레는 성전이 깨어지는 기간입니다. 그러면 성전 없으니까 하나님은 떠났잖아. 아니다. 1이레가 오면 주께서 새롭게 성전을 새우신다. 그래서 1이레를 조사해보니까 주님이 성전으로 오셨잖아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었잖아요. 이것은 뭐냐? 이스라엘이 지은 죄를 주께서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죄를 주님 몸으로 다시 각인시키는 거예요.
성전 지었다. 깨졌다. 3일 만에 다시 지었다. 이것이 1이레 속에 포함되겠지요. 이 포함된 예수님의 사건을 엿가락처럼 길게 늘이면 이것이 주께서 마지막 재림 때까지 너희들은 주님께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런 짓들을 심판한다는 자체가 이미 새로운 성전이 마련되어 있다는 증거로서, 유일한 흔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중심은 하나님의 임재, 성전 중심이지요.
이제 정리해 봅시다.
이야기의 시작을 하나님의 시내산에서 출발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동행하지요. 동행하니까 이것을 임재라고 합니다. 임재할 때 임재한 장소가 이 바깥이 아닙니다. 특수한 자리에 상자를 만들고, 상자에 깨어진 돌판을 대신해서 들어가는 돌판. 이 돌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미 이 백성은 하나님 언약을 어긴 용서 받을 수 없는 자들이다. 여기에 피가 묻음으로 ‘그래 동행 할게.’ 용서 없는 자들을 용서하면서 내가 동행 할게. 라고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뭐가 달리는가?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람이 달렸는데, 이 사람들조차도 이미 옛날 아담의 속성이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느 선에서 오해하는가 하면, ‘나는 잘 할 수 있어. 말씀 지킬 수 있어.’ 지키는 식으로 오해 했다고 했지요. 거기에 등장하는 예로 다윗이 종의 양을 빼앗아 잡아서 친구를 대접하는 이야기를 했지요. 율법에 의하면 4배를 갚아야 합니다. 민수기에 의하면 맞습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는 ‘당신이 바로 그런 짓을 한 자입니다.’ 라고 해서 ‘당신은 이미 죄인이야.’ 라는 거지요.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 받은 거예요. 죄인이라고 알려준 자체가 본인이 안 것이 아니고 나단 선지자가 왔잖아요. ‘너의 출처는 네가 아니고 네 배후에는 누가 있다?’ 하나님이 이미 너를 구원했다는 거예요. 이미 죄인으로 만들어서 구원했다. 상한 심령이 되게 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다윗은 ‘주께서 꺾으신 뼈로 저를 용서해 주세요.’ 라고 나온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이방인들 앞에서 자신들이 잘한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것이 솔로몬 시대에 성전을 지었잖아요. 그런데 성전 짓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요.
하나님이 성전 짓도록 허락하시고, 보이지 않는 성전 때문에 이 성전은 깨어지지요. 깨지면서 이스라엘을 이방 나라의 시간에 속하게 하시지요. 이방나라의 시간은 ‘다른 나라는 망해도 바벨론은 영원하다.’ 하나님께서 영원케 해 줘요. 바벨론 밑에 새끼 바벨론, 그 다음에 또 나오고 계속 연결되잖아요.
그 시간관이 지금도 모든 세계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병신같이 ‘주님께서 오시는데!’ 이러고 있어요. 직장에서 그런 소리 하다가는 쫓겨납니다. “어떻게 오시는데?” “구름 타고 오십니다.” “그러면 구름 한 번 보자.” 안 보이지요.
우리는 예수 믿으면 직장생활 잘 해서 승진 잘 되고 이런 흔적을 잡고 싶은데 주님은 그 흔적을 다 치우고 ‘주께서 다시 오신다.’ 성경 말씀만 주는 거예요. 성경 말씀을 주니까 이것은 ‘남은 죽고 나만 사는 시간관’을 절대로 허용 안 해요.
그래서 성전이 오면서, 우리는 그 때부터 매 시간 ‘내 중심의 시간관은 죄악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 자체가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거예요. 제가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주님의 사명을 위해 뭔가 쓰임 받고 있는 거예요. 쪼다같이 다른 사람은 보지도 않는 말씀을 보면서.
교생 실습 나가서 쉬는 시간에 다른 사람은 담배 피우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나누고 하는데 혼자 성경 보고 있으면 그 세계에서 쫓겨납니다. 그 사람은 앞으로 교사 생활 끝났어요. “주님 다시 오십니다.” 그 이야기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알아주고 하는 것도 없어요. 괜히 헛된 시나리오 만들지 마세요. 쓰고 안 쓰고는 누구 손에 달려 있다? 주님 손에 달려 있지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선교에 앞장서겠다. 그런 오바 하지마세요.
우리는 그냥 살게 되면, 난데없이 주께서 예상 외로 우리를 들어서 다른 사람들이 구원 받게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연탄재보다 더 새까맣다는 것을 깨달은 그 존재의 가벼움과 즐거움이 우리에게 늘 있게 하옵소서. 새삼스럽게 나쁜 짓한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죄인이며, 이미 우리 예수님의 피의 사명자 되었기에, 우리가 이미 의인 되었기에 예수님 공로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 6. 9. 16:1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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