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01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7-지도와 지시의 은사
20100601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7-지도와 지시의 은사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100601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7-지도와 지시의 은사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은 사사와 나실인. 침멀리 이 저자의 의하면 여기서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건 침멀리가 공부 많이 했다는 게 나오는데 사사의 특징을 뭐라고 보느냐? 불연속성으로 봐요. 불연속성이란 말을 더 깊이 있게 논리적으로 따져나가면, 사사가 불연속성이란 말은 인간이 신을 찾는 것도 불연속적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아쉬울 때 찾는 거예요. 아쉽다는 건 늘 아쉬운 건 아니잖아요.
목사님들 설교할 때 똑같은 본문을 했는데 어떤 사람은 ‘목사님 설교 오늘 너무 은혜 받았다’고 하는데 이쪽은 ‘지난주와 똑같아.’ 이런 사람 있다고요. 그 다음주에 가면 저쪽은 그렇게 하는데 이쪽은 은혜 받았다고 하거든요. 목사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난처할 때가 많아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신을 찾는데도 불연속적이에요. 이 점을 더 약간 깊이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인간은 연속적인 따로 존재하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연속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니라면 정신적인 측면이라면 인간에서는 인간 몸이 어제 몸이나 오늘 몸이나 내 몸이 남의 몸이 아니잖아요. 브랜드 같이 계속 내 몸 아닙니까. 그러니 계속해서 인간은 연속적이죠. 결국 연속적인데 신은 불연속적이죠. 그러면 연속적에서 신을 찾는 경우는 연속적인 이 몸을 연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결핍이 생긴다든지, 뭔가 빠진 부분이라든지, 아쉬운 부분은 그때그때마다 신을 찾아서 보충하려는 겁니다.
[인간 속의 악마]에 보면 대립절차란 주제에 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을 한 마디로 해서 보상기대.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오게 돼요. 그걸 보상기대해서 기쁨으로 메우려는 식으로 기쁨을 찾는. ‘충분하게 슬퍼했잖아요. 이만하면 내가 받을 벌보다 더 심한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롤러코스터 탑시다. 너무 내리막길로 갔으니 이쯤엔 올려줘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보상기대. 그때 신을 찾는 거예요.
기도를 갑자기 열중한다면 뭔가 보상기대를 바라는 거예요. 그만큼 난관에 빠져있다는 뜻입니다. 기도를 안 한다는 것은 목사 입장에서는 불쾌하지만 어떤 입장에서는 ‘하나님 복을 받고 살만하구나. 얼굴이 피었구나.’ 이래 되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다시 들어올 때 자기 연속성을 고수하는 거예요. 결국 인간에게 신이라는 것을 불연속이지만 인간이 신에게 기도한다는 말은 더 쉽게 요약하면, 나로 하여금 불안을 조성하지 말고 연속적인 이 삶은 계속해서 보장해주시기 바란다는 그런 요구죠. 내가 신을 믿을 테니까 신의 역할은 뭐냐? 나로 하여금 자꾸 단절되지 말고 미흡함, 아쉬운 것 없게 하고 늘 풍성하게 일관되게 내 몸의 연속성을 지속적으로 이어주시기를 바란다는 마음이 있었던 거죠.
이러한 인간의 신을 이방신이라 하죠. 이방민족들이 갖고 있는 겁니다. 아까 어두움, 빛 이야기했죠. 이방민족들이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 같이 사는 겁니다. 투표할 때 성경공부하고. 하루에 칠만 원 받는다는데. 칠십만 원 한 백만 원 받잖아요. 그런데 목사 되서 해보세요. 얼마나
그들이 어릴 때부터 배운 모든 교육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이 연속적으로. 인간이 불안하면 안 되고, 천안함 빠지면 안 되고. 제발 고요하게 손대지 말고 조용하게 세상이 돌아가기를. 뒤죽박죽하면 곤란하다는 거죠. 요한계시록 정경이 완전히 뒤죽박죽이죠. 환장할 지경입니다. 일부러 주께서 전부다 헤쳐 버린 겁니다. 1/4 잘라내고 그 다음에 ⅓ 잘라내고 그 다음에 모조리 다 잘라버리고. 그런 식으로 완전히 뒤집어 버렸어요. 자꾸 혼란스럽게 하는 거죠.
이방인의 신이 있기 때문에 이방신을 두는 이유가, 성경 찾아봅시다. 전에 한 것 같은데. 사사기 3장 1절.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열국” 주님께서 이스라엘 배경에 뭔가 남겨두는 이유가 전쟁을 모르는 자에게 전쟁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들의 전쟁이 자기 연속성에 있어버리면 전쟁이 누가 좋은 전쟁입니까? 자기 연속성을 메우려는 전쟁인 반면에 하나님의 전쟁은 이 땅의 주인공이 따로 있고 너희들은 품꾼에 지나지 않는다. 임대차 계약한, 종에 불과한 이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걸 알려주는 전쟁.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한 전쟁은 할 이유도 없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를 위한 전쟁은 하면 안 돼요.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해 전쟁을 하라고 불린 사람이 아니고 여호와 전쟁하라고 군사로 온 거예요. 출애굽 할 때 이미 이스라엘을 뭐로 봅니까? 나의 군대 아닙니까.
이걸 성경적으로 거룩과 비거룩 전쟁하겠죠. 그건 높은 차원이니까 낮게 본다면, 이스라엘은 자기가 알아서 전쟁해서 자기 밥벌어먹는 게 아니고 그냥 얻어먹는 입장이거든요. 하나님이 전쟁해서 그 전쟁에 얻어먹는 입장이에요. 주인의 부스러기를 먹으면 되는 거예요. 주인 상에서 같이 있다는 것. 물론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하나님의 거룩이란 부스러기죠. 하나님의 거룩, 의 그것을 우리가 감히 먹을 수 있다는 것, 우리 안에 내장돼있다는 게 보통 혜택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것을 모르니까 뭘 모르느냐 하면, 그냥 자기가 얻어먹는 주제에서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자기가 애써서, 하나님 잘 믿어줘서, 기도 많이 해서 내 몫은 내가 챙기는 식으로 이렇게 복 받는다고 오해하는 겁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날마다 하나님께 내가 빌었기 때문에 이런 은혜를 받는다고 오해하는 거예요. 그럼 공로가 자기 공로죠.
그것은 바로 이방인의 사고방식과 동일한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전쟁을 붙이는 척 하지만 사실은 여기 본문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을 위한 이방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자기 백성과의 싸움이죠. 사사기 해석은 그렇게 나와야 돼요. 실제로 또 그렇게 하고. 기드온이 승리하고 오니까 누구 시비 걸어요? 에브라임 족속이 시비 걸잖아요. 왜 우리 안 불렀노? 그래서 결국 내란, 내부전쟁이 벌어져요.
내부전쟁, 사사기의 마지막이 하이라이트인데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느냐 하면,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법을 어겼다는 말은 열두 토막 살인사건 있지요. 레위인이 강간당한 자기 처의 몸을 열두 토막 내서 택배로 붙이잖아요. 그걸 보고 격노해서 한 지파의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조치를 취했지만 그 지파가 조치를 안 취하잖아요. 그렇게 할 때 정의의 이름으로 한 지파를 치게 됩니다.
치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이 분명히 애굽 나올 때 열두 지파가 하나님 약속이 유지된다 했잖아요. 재미있는 것은 열두 지파가 열한 지파로 베냐민 지파가 완전히 삭제될 판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룩한 전쟁을 했는데 그 전쟁의 결과가 하나님 약속과 안 맞는 거예요. 뭐가 문제냐? 어디서 문제가 생겼느냐 하는 겁니다.
정의 자체가 하나님 뜻이다. 뜻대로 전쟁을 했다. 전쟁할 때도 그냥 한 게 아니라 물어서 했다. 하나님 칠까요, 말까요? 쳐서 완전히 작살나버렸다. 그런데 보니까 베냐민 지파가 사라져서 이빨 빠지면 이스라엘이 아니거든요. 결국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려다가 이스라엘 아닌 꼴로 전락했죠. 그러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된다는 것은 결국 인간적인 수준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나올 수 없다. 실패자로 끝나요.
교회에서 장로가 간음한 사건이 일어나서 성경대로, 어떻게 그런 자를 내쫓지 않을 수 있는가 해서 고린도전서 말씀대로 치리했다. 치리하고 난 뒤에 이 교회 되는가 보라며 나갔다. 그 장로가 나가서 15미터 앞에 교회당 차렸는데 거기에 오천 명 모이고 이쪽에 그쪽으로 다 빠져버리고 특히 주일학교 아이들 3D로 영화 나오고, 이쪽은 그림판 해서 하니까 다 뺏겨버렸을 때, 큰 교회 다 갔을 때 그게 정의가 살아있는 모습이죠.
어디가 문제 있느냐? 누가 누구를 치리한단 말입니까? 치리를 해서 나머지 교회가 깨끗하냐 이 말이죠. 지방교회 문제점이 거기 있잖아요. 우리는 다 거듭난 사람들끼리만 모였다. 참 갖잖아요. 그들이 뭘 모르느냐 하면 여호와 전쟁을 몰라요. 여호와 전쟁은 주님이 소위 정의롭다는 우리 보고 한 전쟁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괜찮은 교회 되려고 하잖아요. 괜찮은 교회가 연속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래요. 연속성을 가진다는 자체가 이방 신적이에요. 이게 불신앙입니다. 왜 우리가 연속적인 것을 목격해야 됩니다. 교회는 발생해야 되는데. 사사가 불연속이라면 교회도 불연속적이에요.
사사기 흉내 내서 또는 신약성경에서 늘 드는 질문이 뭐냐 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늘 충만합니까?’ 하는 그 질문. 성령은 전쟁하려 오신 분이에요. 누구하고? 성령이 임한 우리하고 전쟁하려 오신 분입니다. 전쟁은 무슨 전쟁이냐? 우리는 우리 자신이 괜찮은 연속적인 걸 주장하고 성령은 불연속성을 주장해서 우리로 하여금 너희는 그냥 쓰일 도구에 불과하지 따로 너 나름대로 울타리를 쳐서 나는 늘 괜찮은 존재라고 붙잡을 수 있는 자아나 주체를 만드는 것인 성령의 일이 아닙니다.
내일 일을 우리가 모르잖아요. 내일 살지 모르잖아요. 내일 되면 누가 또 옵니까? 주께서 또 살게 했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연속은 우리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만 연속되면 되는 거예요. 아까 묶음. 참새를 기르지만 내일까지 산다는 보장은 없고, 들풀이 있지만 내일 되면 그 들풀 어느 아궁이에 들어갈지 모르잖아요.
이걸 철학적으로 주체문제를 다루는 게 나옵니다. 주체란 항상 시간관을 동원해서 어제의 자아를 해마에다 기억해버리면 어제 자아를 기초로 해서 덧붙이는 식으로 오늘의 자아가 돼버리니까 절대로 그 인간들은 위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안 돼요. 항상 어제 내가 노동해서 축적된 양식을 내 힘으로 빼먹는 거예요. 어리석은 부자처럼 창고에 가서 오늘치 양식을 빼오는 식이지, 주여 어젯밤에 죽을 놈을 살려주셨다는 이런 생각을 갖는 인간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가 다 어리석은 부자 같아요.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16강 어떻게 되나? 이번 목요일에 스페인 전 하는 그것만 생각하지. 특히 부산은 롯데. 은행도 롯데 이기면 이율이 높을 정도로. 그 시합에 청년들 목을 매죠. 비닐 봉다리 하나씩 쓰고 부산갈매기~ 평생에 야구장에 거의 가지 않는데 가보니까 묶음이에요. 완전히 남녀노소도 없고 하나가 돼버려요. 아마 자아를 잊는 방법 때문에 마약하듯이 가는 모양이라. 그리고 끝나고 졌다고 한 잔, 이겼다고 또 한 잔 하고. 아마 그 동네는 술집이 잘 되지 싶어.
전쟁을 몰라요. 야구 전쟁은 전쟁도 아닙니다. 그러한 나의 연속성을 주님께서 네가 주인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사용한다는 거예요. 사용할 때 사사가 전쟁 이겼습니다. 사사는 자기 전쟁하면 자기 연속성 되니까 자기를 비워야 되겠죠. 누구 연속성으로? 우리는 살다 죽지만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히 열두 지파를 지켜주시는 살아계신 분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연속성을 나타내기 위한 전쟁을 소위 자기가 연속성이라고 우기는 자기 백성을 데리고 이방민족 혹은 내부적인 내란을 통해서 제걸 될 사람은 여호와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제거돼야 되죠.
사사기에 삼손 같은 경우에는 힘을 주니까 그 힘을 자기 연속성에다 써먹어버리죠. 그래서 삼손이 벌였던 당나귀 뼈다귀 들고 설쳤던 그 이유가 뭡니까? 왜 내가 지난날 사랑했던 여인을 지금 빼앗아 가느냐 그거죠. 이거는 하나님 연속성이 아니고 누구 연속성? ‘내가 되고 싶은 나에 대해서 블레셋 네가 방해하느냐?’라고 뼈다귀로 죽이잖아요.
그러면 블레셋에 억압받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어쨌든 한 순간은 기분 좋죠. 기분 좋지만 그 출처를 따져보면 여호와의 은총을 받지만 여호와의 은총을 받는 그 중심부분에 있는 삼손은 여호와와 아무 상관없이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자기감정, 기쁨과 즐거움 그것 때문에 움직이죠. 그러면 백성들은 혜택은 받으면서도 정작 구원이라 하는 것은 혜택 받는 것이 구원이 아니거든요. 누구에 대해서 명확한 정보를 믿게 되는 그게 구원이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병 나았다, 사업 잘 됐다 이게 왜 구원이 아니고 은혜가 아닌 이유가 뭐냐 하면, 계속 그런 걸로 해버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신 것을 자꾸 멀리해버리고 내가 혜택 본 것, 내 연속성에 미흡한 게 채워진 것 이렇게 되면 누가 누굴 믿는 겁니까? 결국은 자기의 기도 실력, 봉사 실력, 헌금한 실력이 되니까 교회가 천국을 가로막는 교회도 구원 못 받고 목사 자기도 구원 못 받고 성도까지 구원의 길을 틀어막는 마귀 집단이 아닙니까.
여러분 다 알다시피 바다를 배 타고 건너올 때 제자들이 자기 연속성만 생각해서 죽겠다고 고함지르다 나중에 주께서 잔잔하게 하시니까 질문이 바뀌잖아요. ‘누구시기에?’ 바로 그게 구원이에요. 하나님 아들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미흡한 것만 채우기 위해서 자꾸 예수를 사용한다는 거죠.
십계명 중 제2계명이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 오늘날 교회가 전부다 망령되이 일컬어요. 자기 좋으라고 이름 부르는 거예요. 완전히 우상, 다른 예수에요. 기가 찰 노릇입니다. 사사기나 지금이나 성령의 역사는 마찬가지 똑같아요.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 전쟁은 바로 우리를 상대하는 전쟁이에요. 만날 하나님 은혜 줘도 그걸 자기 것으로 삼아버리는. 이 사람 말대로 두뇌 속에 마귀 있는 것 같아요. 자기 위주라서.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여기 나오죠. [사사와 나실인]이라 돼있죠. 나실인 되게 할 때 이것은 삼손이 나실인 돼야만 했던 이유 때문에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놓은 것 아닙니까.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에베소서 1장 4절에 우리가 창세전에 예수님이 택했다는 말은, 우리는 구원이 이미 끝났다는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간음해도 관계없어요. 다만 자기만 괴롭지.
삼손이 나실인이 돼야만 하는 거예요. 나실인의 특징이 나실인은 카리스마가 있고, 그 카리스마가 거룩을 품은 카리스마라는 겁니다. 율법서에 보면 거룩은 무엇과 격리될 때 점점 거룩해져요? 죽음과 관련된 것과 멀어질 때 아닙니까. 시체 같은 걸 만지면 안 돼요.
이 거룩은 결국 생명이 있다. 그렇다면 나실인이 중간에 들어섬으로 말미암아 이 죽음에 있는 그야말로 여호와를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 죽음에 처해 있는 인간들을 나실인의 반듯한 행위로 말미암아 어디로 인도한다? 지도와 지시, 이끄는 건 지도고 가리키는 것은 지시고. 지도와 지시의 성령에 의해서 생명에 있는 쪽으로 끄집어내야 될 건데 나실인 되는 삼손은 노는 가락이 생명 쪽과는 거리가 멀죠. 완전히 죽음 쪽이죠. 왜 그러냐 말이죠.
그게 사사의 특징은 처음에는 가볍게, 가볍게 구원해줘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그들이 사사를 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 깊이 죄에 빠지는 것, 그러니까 아까 첫 번째 회수용, 두 번째 묶음, 세 번째가 죽은 시신을 죽고 난 뒤에도 폐기처분하는 것이 아니고 다음 세대에 넘어갈 때 증거물로 사용하죠. 그러니까 앞에 있던 불신앙으로 저주 받은 이스라엘 선배들이 그냥 폐기처분하는 게 아니고 그들이 죄가 더욱더 깊어지게 해서 깊은 그 죄의 깊이까지 나실인이 되는 삼손이 보여주게 하시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그냥 십자가 지셔도 될 문제를 세례요한한테 가서 의인이 받을 필요 없는 회개의 세례까지 받게 하셔서 그 회개 세례 때문에 정말 죄인이 겪어야 될 모든 수모를 다 겪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대신 또는 함께 죽으심을 효과를 보게 하십니다. 혼자 잘나서 혼자 구원받으면 우리는 아무 상관없잖아요.
그러나 대리죽음이 되기 때문에 혼자 부활이 아니고 첫 부활이 되겠지요. 두 번째, 세 번째 주께서 당겨준 사람이 당기게 하는데 이런 모든 작업까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묶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는 너 혼자 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있는 거야. 태어났어야 했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만드는 그 전쟁, 그게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매일같이 전쟁이죠.
만약에 성령이 시큰둥하면 우리는 매일 자기 선에서 자기 가치를 자기가 따로 챙기려 하죠.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지.’ 십자가마을 목사님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죠. 안 나오고 계시는 심재성 목사님 생각할 때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 입장이라면 마찬가지에요.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빼버리면 차라리 죽은 게 낫단 말이죠. 사실 약 먹고 자살하는 게 나아요. 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것 때문에 이건 완전히 삼손이에요. 삼손은 죄의 깊이가 5미터밖에 안 되죠. 우리 죄는 신약 시대 되서 25킬로. 삼손 정도야 죄 진 게 얼마 안 되지만 우리는 신약 시대기 때문에 이건 개 같아도, 떨어진 양식 먹어도 고마울 정도로 이방인이기 때문에 무저갱에 빠진 무저갱의 모든 죄는 다 기어 올라옵니다.
바리새인 욕 할 것 없어요. 우린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에요. 사도 바울처럼. 바리새인도 구원 받는 것 보세요. 희한하죠. 바리새인은 노골적으로 사람 잡아 죽이진 않았는데 사울이란 사람은 아예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였다니까. 동조했고. 그런데 디모데후서 1장에 창세전에 나를 택하여서 나 같은 죄인 중의 괴수도 은혜로 구원받는 이런 이야기, 복음의 위력, 십자가 피의 위력이라고 이 비밀을 맡은 자가 시시한데 고개 숙이고 하겠습니까? 선거운동 이런 것 하겠습니까? 세상적인 그런 것은 버릴 거죠.
나실인답게 하기 위해서 삼손은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본받게 만들어버려요. 진짜 나실인답게 행동한 게 언제냐 하면, 삼손이 눈 두 알 다 날아가고 눈 뺐다는 것은 예쁜 여자가 더 이상 의미 없습니다. 이제 더듬어서 잘 빠졌다 할 거예요. 아마 삼손이 그렇게 나오면 주께서 손가락 잘라버릴 거예요.
다 삭제하고 남은 것은 사명감만 달랑 남아요. 마지막 죽는 순간에 도대체 내가 왜 태어났으며 어떤 계시를 받아 태어났으며, 아빠 엄마한테 이야기 다 들었겠지요. 태어나기 전에 사자가 와서 올라갔다고 들었겠지요. 그것 남아서 그것에 올인 해버린 거예요. 이제 남아있는 [007카지노로얄]처럼 다 밀고, 자기 받은 목사 자격 다 내리고 십자가에 올인 해버리는 거예요. 다 바치고. 삼손 천당 갔습니다. 여자 밝혔고 천당 갔어요. 그게 바로 창세전에 선택한 사람의 효과 아닙니까. 그 효과 아직 안 죽은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같이 공부한 사람들 보다가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결국 돌아옵니다. 결국 복음 쪽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그 다음부터 삼손 되서 눈 다 빠지고 자기 연속성은 완전히 우발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걸 107페이지에서 ‘돌연히’했어요. 침멀리가 항상 글 쓸 때 그냥 아무렇게 쓴 사람이 아니에요. ‘돌연히’ 어떤 직위도 갖지 않은 채 야웨의 보냄을 받은 자로서 불연속성을 통하여 표현된다. 그것이 바로 율법성취는 인간의 연속성의 선에서 이뤄지지 않는다는 거죠. 율법성취의 주인공은 하나님밖에 없고 하나님은 연속성을 주장하는 우리의 연속성과 마주치면서, 전쟁을 해야 되니까.
불연속적인 면으로 우리를 폭파시키는 불쑥불쑥 돌연히 우리의 단단하게 있던 구조가 깨지면서 오늘밤 네 영혼 데려가면 창고에 있는 곡식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부자가 자기 나름대로 연속성이 갖춰있죠. 그걸 그날 밤에 영혼을 데려감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에 대한 어리석음을 보여주듯이 주님께서는 항상 불쑥불쑥 다가와요. 만약에 연속적으로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이미 짐작하게 됩니다.
‘돌연히’의 반대말이 뭐예요? 짐작했어. 내가 눈치 챘지롱.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이 ‘돌연히’를 짐작하는 예상 응답으로 바꾸려고 시도하는 게 기도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는 기도대로 하게 하시고, 답답하니까. 응답은 엉뚱하게 응답하시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고3이 되서 또 떨어졌어요. 그래서 철야하는데 고3 또 떨어지면서 돌아서서 가만히 손가락 보니까 십년 동안 안 떨어지던 사마귀가 떨어진 거예요. 전에 기도해도 안 떨어지던 것. 진짜 엉뚱한 손의 사마귀가 떨어지고 애는 또 떨어지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미리 예상문제 열 개를 잡아놔도 열한 번째 응답이 돼요. 절대로 예상문제를 어긋맞게 해서 창세전에 그리스도의 선택이란 걸 고수합니다.
너는 네가 주인이 아니고 네 곁에 나 있다. 너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네 곁에 내가 있어. 너의 주인이 네가 아니야. 깨닫게 만드시고. 주인은 다른데 뜻이 있으니까 율법성취는, 십자가의 성취는, 복음 성취는 반드시 홀연히 불연속적으로 되는 겁니다. 설교 한 번 잘했습니까? 그 다음 교인 여러 명 떨어졌다고 생각하세요. 설교 배렸어요? 그러면 난데없는 교인들. 모든 것이 바로 불연속적으로 이뤄져요.
그 다음에 왕. 공부는 진도 나가는 재미로 해야지. 여기 침멀리가 109페이지에 보면, 나실인이라 해서 무엇과 연결시키느냐 하면 레위기의 안식년, 희년과 결부시켜놨어요. 상당히 깊이 있는데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구별된 자라.
나실인은 구별시켰다 돼있어요. 구별이 거룩인데 거룩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이번에 레위기하면서 자세히 할 건데 거룩의 개념이 둘로 나눠져요. 하나는 분리된다는 개념이고, 두 번째는 정화된다는 개념이 있어요. 깨끗하게 씻긴다. 분리해놓고 깨끗이 씻기는지, 아니면 분리 자체가 깨끗한지 이것은 현재 학자들은 분리해놓고 깨끗하다고 보고 있어요. 맞는지, 안 맞는지 조사해봐야 되는데
이것이 분리해놓고 정화돼버리면 이해하기는 쉬운데 약점이 뭐냐 하면, 시간요소를 집어넣어야 돼요. 시간요소를 집어넣으면 어떤 오류가 보이느냐 하면, 분리된 자체로 구원이 안 되는 쪽이 돼요. 이거는 말이 안 되거든요. 분리해놓고 행색을 보니까 안 되겠다. 이것은 보통 잘못된 게 아닌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거룩을 구원론으로 가져가면 안 되고 예수님이 누구시냐, 여호와가 누구시냐 이런 쪽으로 흐름을 잡으면 나실인은 반대로 할 수 있어요. 분리해서 한 것이 아니고, 정화된 모습으로 등장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너희는 분리된 민족이라는 걸 알려주는 그런 대표자가 되는 겁니다.
시간이 논리적 순서가 분리에서 정화로 가는 게 정화에서 분리로 가도 아무 탈이 없다는 걸 나실인이 보여준다면 거룩이라는 것은 시간요소가 빠져버려야죠. 정화된 사람을 발생시키는 자체가 그 안에 뭐가 포함돼있다? 우리 민족은 보통 민족이 아니고 세속과는 분리된 민족이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물로 정화된 사람을 보내주는 거예요.
나실인의 특징은 죽음과 또 하나 있어요. 포도와 관련된 것은 전부다 못하게 했어요. 포도라 하는 것은 약속의 땅에서 생산물 아닙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와서 하나님 쳐다보지 않고 ‘야 포도다.’ 해서 아까 이야기했죠. 얻어먹는 입장이 아니고 애써서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나실인은 원초적, 원형을 보여주는 카리스마다.
카리스마란 의미가 뭐냐 하면, 연속적이 아니고 불연속적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카리스마 영이 임해야 일을 할 수 있는데 그게 원형이라고 알죠. 출애굽에서 나올 때 완전히 거지 아니었습니까? 제가 이번에 이능우 집사님 따님 주례할 때 핵심을 원형이라 정했어요. 첫사랑, 처음. 항상 처음을 잊으면 안 돼요.
그것은 나실인을 자꾸 발생시키는 겁니다. 나중에 나실인이 뭐가 되냐 하면, 지파처럼 어떤 지파가 카리스마적인 일을 해야 될 지파가 나오죠. 예레미야에 나오죠. 레갑 족속.
그 다음에 왕 봅시다. 왕은 엄청 어려워요. 여기 10페이지 가까이 되는데. 이걸 쭉 읽어보면 지금 침멀리도 헷갈려서 어쩔 줄 몰라요. 그래서 이 내용이 굉장히 어렵습니다만 침멀리가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는 노선을 따라가 봅시다.
침멀리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기존의 소위 자유주의 신학에서 왕 제도, 왕 제정의식에서 이방민족들의 왕을 어떻게 봤느냐부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죠. 애굽에서 왕을 어떻게 보느냐? 신의 아들로 봅니단.애굽에서 신의 아들로 봤던 것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가나안 종교에 물들어가면서 왕을 신의 아들로 간주했다는 이론을 침멀리는 그냥 수용해버립니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볼 때 그렇게 봐요. 그래야 학위 받는 모양이라.
그런데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 보고요. 과연 맞는지, 안 맞는지 이 사람이 그걸 수용했어요. 왜 수용할까요? 그것은 기존의 성경으로는 왜 왕을 신의 아들로 했는지 증거가 박하니까, 풍부하지 않으니까 학자로서 이방종교에서 왔다고 학자의 양심에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침멀리가 첫 번째 왕을 이야기할 때 출입구를 제대로 잡았습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성신 받는 카리스마를 사사의 연속이라고 잘 봤습니다. 사사의 연속이라 하는 것은, 아까 사사는 불연속적이라는 말은 성취성이 아니고 점점이 돼있으니까 이 점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에요. 그러면 사사를 점으로 됐으니까 사사가 회수용이니까 왕은 여호와가 왕이죠. 그러면 사사의 기능은 결국 여호와만이 왕이다. 그것도 연속적인 왕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사사가 있잖아요. 그런데 사사기 끝에 백성들이 왕을 달라는 말은 여호와의 왕 됨을 버린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거예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사람들은 위에 왕 계시고 눈에 보이는 왕 계시면 우리가 하늘의 왕 섬기는데 보탬이 되겠다는 거예요.
자, 이것을 규명을 해야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오바스러운 약간의 억지스러운 해석을 내리시느냐 하면, ‘너희들이 왕 구하면 나를 버림이라.’ 백성들이 뭐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다니요.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십니다. 다만 우리 인간들끼리의 묶음, 인간들의 마음을 향할 수 있는 그런 왕을 원합니다.’
그렇다면 사사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사사는 자기가 죄 지었을 때 나타나는 게 사사 아닙니까. 그리고 사사를 구원자로 하려면 자신이 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죄 짓고 난 뒤에 조용하면 사사가 안 와요. 죄 짓고 난 뒤에 홀연 듯이 이방민족을 통해서 압제를 당할 때 그들은 구원자를 보내달라고 기도할 때 사사가 오잖아요.
이런 절차가 어떻게 돼요? 싫은 거죠. 왜냐하면 자기가 고생해야 되고 죄인 돼야 되니까. 그러지 말고 안 보이는 왕이 그냥 보이는 것으로 그러니까 사사는 사사인데 뭐가 하나 추가되죠. 세습제. 그러니까 당회장 목사가 왔다갔다하지 말고 십년, 이십년 계속 눌러앉아버리면 사사 때문에 우리한테 고생이 들어왔으니까 사사가 계속 유지되면 우리가 죄져도 고생은 안 해도 된다 말이에요. 누가 대신 전쟁해주고? 사사가 전쟁 이겼으니까 카리스마가 있으니까.
그 카리스마 있는 사사가 와서 우리 대신 전쟁을 막아주면 ‘우리는 죄져도 편안하게 죄 짓고, 죄도 마음대로 짓고 우리는 벌 안 받고.’라는 속셈이죠. 그 속셈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 되게 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내가 왕이고, 너희들이 왕 달라는 자체가 죄라고 지적하면서도 왕을 주신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팔 걷어붙이고 이제는 연속적으로 벌 받아봐라. 이것은 외부에서 벌 내리는 것이 아니고 진짜 내부에 있는 너희들이 원한 사울 때문에 고생해봐라. 그리고 피해자가 등장해요. 다윗이 피해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등장이죠. 그 주모자는 왕을 달라는 백성들입니다.
다윗이 받은 피해는 사울에게만 피해 받는 게 아니에요. 다윗은 기적적으로 왕 되고 난 뒤에 계속 압살롬한테 피해 봐요. 그러면서도 다윗이 끝까지 하나 고수한 게 있어요. 기름부음 받은 자는 하나님 뜻이 아니면 인간적으로 죽이지 말라. 왜냐하면 결국은 다윗은 기름부은 자 안에서 사울과 다윗 자신을 하나로 묶는 겁니다. 기름부은 자를 죽인다는 것은 곧 다윗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사울 개인과 다윗 개인의 대조에서 다윗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사울의 기름부음이 나에게도 찾아왔다는 것은 내 안에 사울 죽인 것의 연속성이 있음을 그냥 인정하는데 단 사울과의 차이점은 그런 죄도 주께서 은혜로 용서한다는 이런 점에서 다윗은 하나님과 통하는 환풍기가 됩니다. 공기가 통하는 유일한 장소가 되죠.
그렇다면 로마서 1장 3절에서 예수님께서 누구 혈통으로 온다? 다윗 혈통으로 온다는 것은 바로 사울의 죄까지 다 끌고 오신 다윗 안에서 사울의 죄까지. 기름부은 자 안에서 다 끌고 오는 거예요. 지금 그 내막을 이 시간에 다 할 수 없지만 되는 데까지 해보십시다.
다시 이야기해서 사울을 왕 되게 하신, 사람들이 왕을 달라했지만 사울 왕 되는 절차는 누가 개입했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죠. 이게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너희들이 알아서 해봐.’ 하지만 하나님께서 뭘 하느냐 하면, 선택을 해버려요. 어떤 선택을 할 때 모아놓고 제거하는 식으로, 마치 아간이 도적질한 걸 들추어내는 식으로 선택을 통해서 이뤄지는 겁니다.
그걸 침멀리는 뭐로 이해했느냐 하면, 사울이 사사의 연속으로 보는 겁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 모아놓고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사사가 하는 일이 너희들과 관계있는 일이고, 사사에 대해서 단독으로 하는 일이 아니고 사실은 너희들은 죄밖에 안 졌기 때문에 벌 받고 있을 거고, 벌 받는 너희들을 대신해서 사사가 이런 고생을 한다는 것을 연관성 지켜주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을 선택할 때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을 모아놓고 사울을 선택했죠. 이거는 하나님께서 충분히 관여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 뜻을 들어줬다고 오해하죠. 사실은 그게 아니고 그들의 숨어있는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준 거예요.
그런데 다윗 뽑을 때 어떻게 했죠? 전체 다 모아놓고 줬습니까? 오히려 숨기죠. ‘휫. 사무엘아. 다윗 선택한다고 하지 말라.’ 다윗이 누군지 모르니까. 네가 사울한테 걸리면 사무엘 당신 죽어. 몰래 해요. 몰래 해서 이새의 집안 모아놓죠. 그래놓고 하나님이 또 개입하죠. 사무엘의 견해마저 젖혀버립니다. 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기 때문에 사무엘하고 관계없어요. 양치고 오는 다윗을 선택하죠.
이것은 뭐냐 하면, 이새가 다윗은 왕 감이 못 된다고 빼돌렸죠. 빼돌린 자를 하나님이 다윗을 택함으로 말미암아 빼돌려버린 사고방식, 기존의 인간의 연속성, 하나님도 내 안의 하나님이고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이라는 그것 자체를 부정해버리고 우리가 예상 못한 하나님의 돌연히, 우발적인 그런 것으로 창세전의 선택의 의미를 우리한테 부여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 어때요? ‘내가 선택받았으니까 나는 스스로 내가 선택받은 짓을 해야지.’라고하신다면 그것은 오산이라 이 말이죠. 우리가 선택받은 자가 오는 것은 항상 예수님의 공로로 오는 그 선택받은 말을 하려면 뭐가 삭제돼야 됩니까? 내가 알아서 선택받은 자답게 행동한다는 것이 항상 삭제되고 빠져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행동을 스스로 무의미하게 빠지질 않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누적시키는 방향으로 항상 잠을 자도 꿈에 자기가 주인공으로 설치잖아요. 꿈에 언제 예수님이 주인공이에요. 자기가 주인공이죠. 항상 자기가 주인공이고 조연이고 다해요.
그런 꿈은 환상입니다. 이 책에 보면 꿈은 인간의 생존을 돕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교육시키는 방법이 꿈이라 했어요. 생존의 유리에 적응하기 위해서 했던 것 다시 기억하기 위한 밤에 과외 받는 것이 꿈이라 하는 겁니다. 그 말이 맞아요. 그래서 꿈에서 다시 한번 재확인해보면 다음날 아침 자기가 하는 것이 확신이 있고, 맞는다고 옳다고 우길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꿈에 누구 나타나면 재주 없다 하는데 딸이 있는데 전화 해볼까? 너 무슨 일 있나? 왜요? 꿈에 너 나타났다. 그 말은 그만큼 딸을 포용한 자기 인생, 딸을 배척한 인생이란 없고 항상 딸이 개입된 그러한 배치로서 자기 인생을 다지고 또 다지고 싶은 엄마 심정이에요. 꿈에 누가 나타나거든 아직도 그 사람을 깊이 내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 본성이라는 그 말이 맞아요. 그걸 실험할 땐 쥐로 시험해요. 쥐는 꿈을 꾸거든요. 쥐나 토끼 같은 것. 토끼는 99% 꿈꾼다니까. 사자한테 한 물리려고. 항상 살아야 돼. 자면서도 살아야 돼. 그래서 토끼는 눈 뜨고 잔다는.
창세전에 선택이라 하는 것은 항상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들어요. 이래서 선택받았구나. 이런 죄인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받았구나. 깜짝깜짝 놀라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퍼지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관이 허물어지고 나의 것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그 구조를 하나님께서 놓치지 않는 겁니다.
한 마디하고 마칩시다. 여기 110페이지에 보면, 왕이라 하는 것은 순조롭지 않다. 단어가 참 멋있다. 딴 나라에서는 왕을 선택하면 돼요. 인간이 스스로 투표하면 된다고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해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순조롭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이 개입했다고 해서 우리의 뜻을 반영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큰 교회에서 당회장 얻기 위해서 기도한다. 기도해서 당회장 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 교회 이제 집단적으로 지옥 간다는. 그래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순조롭게 일이 돼도 문제고, 순조롭지 않아도 문제고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는 것이지 인간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꿈이고 환상에 불과해요. 자기 확신, 자기 단도리 하는 그것만 되풀이할 뿐이에요. 그것을 왕제도로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서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 때 우리 입장이라면 마찬가지로 왕 달라 했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모세를 원망했을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죄인일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십자가 피를 보면서 그 비밀을 간직한 사람으로서 맡은 복음의 사명을 감당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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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구만(IP:121.♡.1.63)
10-06-08 16:00
쓰레기가 본질적으로 쓰레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데서 연속적이고, 그 쓰레기를 하나님의 뜻대로 우발적으로 사용하신다는 면에서 불연속적입니다. 쓰레기의 기대와 그 결과는 상관없이. 역시 쓰레기는 쓰레기 다워야하고 악취와 국물을 질질 흘리게 하시는 것도, 유독 그것을 드러내 보이게 하시는 것도 성도에게만 해당하는 주님의 솜씨입니다. 쓰레기 본인이 자신은 재활용 쓰레기라고 착각을 하든 다른 쓰레기와 구별된 청정 쓰레기라고 하든 나는 잘 포장된 쓰레기라고 하든 상관없이 주님만 의로우시고 모든 공로는 주님께만 회수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허무로, 시답잖게 소각될 쓰레기되게 하신 십자가에서 벗어난 쓰레기는 없지요. 그래서 불연속적인 교회, 발생적인 교회는 보지 못하고, 내 역사만 돌아보고, 어제의 나를 질질 끌고 가려는 나는 언제나 가짜고 주님이 주시는 현실만 진짜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도 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이 흘린 국물에 대해 자신이 흔적을 깨끗이 지우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해 주께 감사하는 자입니다. 평생동안 우리야의 아내와 함께하면서 주께서 꺽으신 뼈로 인해 즐거워할 수 있는 복된 죄인입니다. 이 고백이 피뿌림을 입은 모든 죄인에게서 회수해가시는 주님의 완벽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