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01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7-지도와 지시의 은사
20100601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7-지도와 지시의 은사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100601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7-지도와 지시의 은사
(강의:이근호 목사)
여기 제목이 [지도와 지시의 은사]라 돼있는데 ‘지도’라는 말은 평소에 신학책에 보면 많이 나오죠. ‘지시’란 말은 잘 안 나오죠. 지시란 가리키는 건데 이게 은사, 성신에 의해서 은사를 받아야 가리킬 수 있다는 겁니다. 상당히 짧으면서도 의미 있는 게 왜냐 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밑을 보지만 정답은 위에서 찾는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주위에서 파도처럼 부딪쳐오는 매 사건 가운데서 선거도 있고, 월드컵도 있고, 교회에 아픈 사람도 있고, 파도처럼 밀려와도 해답은 ‘여기서 찾지 마세요’란 뜻이에요. 스스로 우리끼리 찾지 마시고 지시, 방향을 저분께서 해답을 주십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그분이 원인이 되기 때문에.
사실 10절 다 하려고 하면 엄청나다. 무려 몇 페이지입니까? 32페이지인데 다 할 순 없겠지요. 하여튼 하는 데까지 해봅시다.
은사라 하는 것은 회수용이죠. 은사가 내려오면 마치 고래 잡는 작살처럼 잡아당기는. 은사라 해놓고 자기한테 스톱되고 정지되는 세상에 그런 은사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병 고치는 것, 봉사하는 것, 여러 가지 방언 하지만 그 은사들은 지상에 나타날 때 현상에 불과하고 진짜 은사냐, 아니냐 하는 것은 회수하는 과정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모습이 발현될 때 그게 전에 있었던 방언하네, 병 고치네, 통역하네 하는 그 은사가 진짜배기 은사라면 티가 나는 거예요.
만약에 아무리 남들 보기에 남 속이고 나만 잘 믿는 것처럼 과시했지만 실제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없이는 전혀 그거는 하나님이 주신 회수용이 아니기 때문에 은사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고린도전서의 은사 같은 경우에는 사도행전과 결부시켜 보게 되면, 사도행전에서는 믿음과 소망, 사랑이 강조가 안 돼있거든요. 왜냐하면 역사에 치중하다보니까. 그래서 거기 나오는 병고치고, 수건으로 어떻게 했다, 앉은뱅이가 나았다. 그런데 치중하니까 사람들 눈은 지시하는 은사가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들 속에는 회수할 때는 어디로 회수하겠습니까? 이 지시는 하늘로 시작해서 하늘로 회수가 되는데 인간의 모든 행동은 뭘 봐도 교회라는 집단에서 병 고치는 게 나타나면 ‘나도 그게 되고 싶다’해서 자기에게 회수하죠. 자기에게로 회수되는 이 현상이 바로 믿음 아닌 거고, 소망 아닌 거고, 사랑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믿음 아니고, 소망 아닌 건 이해되는데 그 다음에 마지막에 자기 유리한 쪽으로 보면 사랑 아닌 거란 말에 화를 냅니다. 사람이 복음 앞에서 단단히 화가 난다는 말을 제가 썼잖아요. 복음을 이야기했는데 단단히 화가 나는 이유가 뭐냐? 그들이 원하는 복음은 자기에게 회수되는 복음, 날 살리는 복음인데 막상 진짜 복음을 이야기해버리면 자기 자신을 주님을 위해서 이걸 잊어야 되고, 포기해야 되고, 바쳐야 되고, 희생하고 헌신해야 되는 그쪽으로 이야기하니까 단단히 화가 날 수밖에 없죠. 사실 화가 나야 정상이고 그래야 주님 가신 그 고난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도행전만 이야기해버리면 사건이 주기 때문에 인간이 사도행전에 눈을 두게 되면, ‘나도 저처럼 놀라운 기적 가져야 내가 구원받습니까?’ 하는 믿는 척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행전 속에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결부시켜 보면 그들의 기적은 단순히 내가 신앙인 척하는 도구가 아니고 주님 앞에 회수 당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진짜 사랑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적어볼게요. 이런 이야기 때문에 교인들이 화가 나는 것 같아요.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제가 옛날에 봤던 책인데 요약을 했는지, 안 했는지 요약을 안 한 것 같은데 [인간 속의 악마]라 해서 아주 오랜 된 책인데 그걸 다시 봐요. 이 책의 주제가 뭐냐? 신경분석, 생물학적으로 악마를 규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책의 99.9%가 악마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의 세포 이야기와 두뇌구조 이야기, 인간의 신경 이야기, 세포가 어떻게 자라나, 그 이야기하고 있어요. 전공이 생물학자 출신이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이 사람이 밝혀낸 게 인간이 대립돼있다는 겁니다. 기존의 학설을 반대하는 이유가, 대부분 생물학 이야기하면서 악마를 집어넣는 이유가 기존의 모든 생물책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 생존에 유리하도록 살아가는 그것을 옳다고 여기는 거예요. 이 책의 가치가 거기 있어요. 기존의 생물책과 의학책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 몸의 모든 세포가 활동하는 것이 나에게 유리하게 한 것이 옳고, 진리라고 본 거예요.
진리 이야기할 때 성경에서 그 대목 나오죠. 전부다 기초적인 생물학과 연관 돼있는데. 본디오 빌라도 마누라가 지난밤 꿈자리가 이상하다 해서 예수님 재판할 때 손을 씻죠. 손을 씻는 것은 로마의 풍습만 아니고 전 세계의 보편적인 풍습이에요. 손을 씻으면서 이런 선택에 대한 모든 자기의 과오를 같이 씻게 내려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예수님 재판하면서 본디오 빌라도의 손가락은 가만있지 못합니까? 이걸 따져보자. 자기 마누라가 잠자리에 꿈이 이상했다는 그 이야기하면 왜 못 들은 걸로 그냥 넘기지 못하느냐 말이죠. 이상하죠. 그걸 규정하는 거예요. 누가 날 욕하면 그냥 안 들었다 하면 그만인데. 소리라 하는 것은 바람에 날아가면 소리가 없어지잖아요. 시간 따라 흘러가면. 그런데 왜 그 욕을 한 사람을 만나면 복수하려는 마음이 드느냐? 왜 생겼느냐?
해마란 데서 기억작용이 생기거든요. 해마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욕설이라든지 칭찬을 어떻게 자극하느냐? 대립. 무엇이 내 몸에 즐겁고, 무엇이 나를 기분 나쁘게 하더라. 대립적인 장치를 기억에다가 분류를 시킨다는 거예요. 이 사람은 신학자가 아니에요. 선악 그런 문제 몰라요. 생물학적으로 주장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뭐든지 내 유리한 쪽으로, 나 편한 쪽으로 자리 잡고 불쾌한 쪽은 거부하고 싶은 본성, 그것을 이 사람은 우리 속에 악마 있음의 증거로 보는 거예요.
이 사람의 주장은 간단해요. 이성보다도 감정이 앞선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이성을 만들었는데 이성적보다 더 위에 있는 감정의 요소가 우리를 지배해서 이성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그것이 악마가 들어왔던 생물학적 증거가 된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 이 책이에요.
본디오 빌라도가 왜 손을 씻었느냐 말이죠. 평소에 마누라 소리 잘 안 듣는데 그 소리 듣고 왜 손을 씻었을까? 손가락을 왜 자기가 움직이느냐 말이죠. 이것은 바로 모든 인간은 숨길 수 없는 것이, 이걸 이 사람은 악마라 했잖아요. 성경에선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에요. 육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생물학적으로 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지만.
사도 바울은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요한복음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이 영의 나라에 못 간다는 거예요. 못 간다는데 기어이 가고자 시도한다는 자체가 또 육이 되는 거예요. 그게 자기 회수용이 되는 겁니다.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사람의 책에 보면, 인간이 갖고 있는 사회적인 도덕과 윤리 모든 것의 밑바닥에 달랑 이것밖에 없다는 겁니다. 내 몸에 유리하면 선이고, 불쾌하면 악이 되고. 그것이 쌓여서 자기 몸이 좋아하는 쪽의 어떤 정치구조로 이민을 간다든지 그것을 보장해줄 수 있는 어떤 나라로 이사를 간다든지, 아니면 데모를 한다든지, 아니면 독재국가에 빌붙어서 같이 합세가 되어서 자기감정, 인간 속에 있는 악마가 요구하는 데로 그냥 살아가는 것이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사회적 질서, 구조가 된다는 겁니다.
그중에서도 이 사람은 뭘 이야기하느냐 이 사람은 성당 다니는 사람이니까 신부들, 종교인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신부, 목사들 특히 신부들 특징이 무시하는 게 특징인데 그것은 자기가 연구한 생물학적 기초도 모르고 사람들이 이런 걸 원하는 걸 모르고 사람들 좋게 하면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착각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책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이 사람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감정을 될 수 있는 데로 억제하고 이성적으로 나와야 악마가 나간다는 거예요. 될 수 있는 데로 이성적으로. 악마가 두뇌란 뜻은 아니고 두뇌 속에 악마가 들어왔으니까 잘 정신 차려서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하게 되면 악마의 정체를 밝혀내고 악마를 추방해서 하나님이 주신 그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다고 나오는 거예요. 이 책의 한계가 그거에요.
지금 요약하는 게 주저되는데 왜냐하면 너무 전문적인 용어가 많아서 요약한 게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주장 가운데 참 중요한 주장이 옳다, 그르다를, 기분 좋다, 기분 나쁘다를 진리라고 우기는 것이 우리 속에 있는 악마의 특징인데 그 목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생존이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노출된 게 하나님 말씀이 우선이 아니고 생존이 우선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도와 지시의 은사를 줄 때 그들이 아주 기쁘게 하나님을 섬기는 상황 속에서 준 게 아니고 그들로 하여금 광야 생활하는 가운데서 지도와 지시의 은사를 준 거예요. 특히 제일 먼저 나오는 게 모세와 여호수아 나오죠.
하나님께서 인간이 육이라는 걸 익히 아시고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는 인간이 단순히 죄를 짓는 정도가 아니고 자기 생존을 건드리면 누구든 달려드는 악마적인 품성을 갖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난 뒤에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붙여준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이 왔다는 것은 우리가 곧 악마라는 소리입니다. 마귀다 이 말이죠. 율법을 그것을 들추어내야 되겠죠.
아주 순하게 이야기하면 인간은 무슨 행동을 해도 그것을 자기 쪽으로 해석하고, 성령 받은 모세나 여호수아는 무엇을 일어난 사건이 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회수용으로 하는 건데 그들이 떨어지는 것은 생존을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그 지옥 같은 그 속에서의 회수용이라는 점에서 모세와 여호수아는 고난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냥 좋게, 좋게, 좋은 사람, 이성적으로 이런 상황 속에 준 게 아니에요.
방금 이야기한 걸 한 문장으로 요약해봅시다. 신약까지 연결해서 보면, ‘복음은 우리의 죽음 속에서만 만난다.’ 그래서 죽음, 다른 말로 절망, ‘드디어 나는 끝장났구나. 살 마음 없다.’라고 할 때 그 안에서 복음이 보이고, ‘이 정도면 됐다. 배부르다. 살만하다.’ 할 때는 절대로 복음은 만나지지 않는다.
그게 구약의 지도와 지시의 은사의 같은 성격 안에 들어 있어요. 복음은 오직 죽음 속에서만 만나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보게 할 때 그 성도로 하여금 초죽음이 되게 만들죠. 자기가 생각했던 건 다 안 되게 하고, 꽈서 예상치도 못한 낭패를 당하게 해서 힘이 쪽 빠지도록. 돼지고기 바비큐하면 기름이 쪽 빠지죠. 모든 살 여력이 쪽 빠지도록 하는 겁니다.
살 여력이 없다는 그건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나오죠. 살 소망이 끊어지게 하는 거예요. 살 소망이 끊어지게 할 때 주께서 우리를 이 땅에 살고자 복음 준 게 아니고, ‘빨리 와. 임마.’ 회수용으로 줬다는 것이 다시 그 선을 보게 하는 거예요.
다른 식으로 쉬운 예를 들면, 배가 있는데 배에 예수님이 타시고 자기 사람을 건지는 거예요. 건져놓고는 어디로 가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천국에 가셨던 그 코스 있잖아요. 코스가 무슨 길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가면서 배에 승선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배에 같이 탄 사람들은 뭘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십자가 빼놓고 전부다 모든 짐을 버려야 될 판이에요. 마치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갈 때 그 경로와 비슷하잖아요.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함께 하겠다 해서 사람을 착각하게 만들어요. 여유만만한 배부른 상태에서 함께 하겠다가 아니라 갑자가 폭풍이 일어나서 살 열망이 있게 만들고.
그야말로 구원이란 개념이, 만날 교회에서 목사가 복음 설교하면 교인들이 장로들이 불평하는 게 그것 아닙니까. ‘왜 목사님은 실제적인, 현실적인 이야기는 안 하고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관념적인 이야기만 하느냐’고 하지만 사도 바울에게 구원의 개념은 절대로 비실제가 아닙니다. 진짜로 파도가 치고, 진짜로 손가락에 독사에 물리고, 난데없이 추장을 만나고. 다른 사람은 사도 바울이고 뭐고 끝났다고 자포자기할 때 그때 ‘걱정하지 말라. 주께서 너와 함께 있다.’ 하면서 있는 짐을 다 부리게 만들고, 파선하게 만들고. 그래서 남아있는 것은 너는 어떻게 하든지 로마에 가서 전한다는 그 약속은 아직 유효하고.
결국 로마에 가서 전도하는 그 실력은 사도 바울 손에서 못 나오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어떻게 손을 쓸 수 없게 만들어요.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을 덜렁 들어서 로마에 가게 하니까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죠. 내가 파선하고,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굶기도 하고, 얼마나 굶었겠어요. 내가 약한데서 내가 강하리라. 이것이 바로 사도가 보고 싶냐? 이것이 주의 종이다. 이것이 사도다. 그리고 교인들 꼬여서 자기 사람 만드는 이것은 바로 마귀의 일꾼이다 하지요. 그들은 반드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복음은 실제적이죠. 배에 승선했는데 배가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돼있어요. 회수하게 돼있는데 천국 가는 거예요. 천국 가는 건 좋은데 가는 길이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자기가 재산 바치고 기도원에서 기도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가 재산을 내놨다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재산 내놓고 자기가 노동을 포기하고.
수녀원이 나쁜 점이 그거에요. 수녀원이 없었으면 그 아주머니들 지금 교사하고 간호사할 사람들이에요. 그 가운데서도 주께서는 천국 인도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수녀원을 만들어놓으니까 전부다 공동체가 돼버렸으니까 그들은 다른 건 버려도 자기 자존심은 버릴 기회를 마귀가 와서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 [인간 속의 악마]가 얼마나 이 사람이 치밀한지 어떤 수녀들, 어떤 신부가 종교적인 것을 반복하면 처음에는 고난처럼 느껴지지만 그게 하나의 쾌락이 됐어요. 숙달되니까 이제는 수녀원에 있는 게 즐거워. 그것을 자기의 쾌락을 옳다고 여기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 사람은 악마의 술책이라는 거예요. 스스로 자기를 때리고. 그걸 전부다 신경생리학적 실험에서 나온 거예요. 마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처럼 치고, 치고 평범한 사람은 못 하거든요.
그러나 수십 년간 숙달한 사람 같으면 남이 하지 못한 것을 자기가 했다는 포만감, 자긍심. 시장에서 폼 내고 남들 부르고 하는 대조되는 그 모습이 자기한테는 행복이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은 마약이다. 종교가 마약인데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 자기의 생존을 즐긴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 속의 악마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을 다 쳐버려요.
이런 관점에서 이걸 전제로 하고 난 뒤에 우리가 모세와 여호수아를 다시 보면 그야말로 모세가 이 길을 안 하겠다는 말이 이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솔직합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생존의 법칙이니까. 내가 이 짓 안 해도 꼭 제가 가야 되겠습니까? 지금도 목회를 십년 하던, 이십년 하던, 삼십년 하던 계속해야 돼요. ‘주여 이것 말로 달리 방법 없습니까?’
그럼 주께서 ‘너 편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배에 승선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가는 길이 이 길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내가 널 사용한다’는 거예요. 회수용인데 우리는 회수용을 가위로 잘라버리고 주님 따로 존재하고, 나 따로 존재해서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자고 예수 잘 믿을게 하면서 자기 영역을 따로 그걸 말뚝을 박아서 자기만의 영역을 울타리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강의를 늘 하잖아요. 그게 바로 자아고, 에고고, 주체라고. 이 주체 문제를 집어넣지 않으면 은사라는 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미 모세와 여호수아마저 그야말로 하나님의 지도와 지시의 은사에 의해서 강제로 이끌림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기도 죽을 맛이고 아무도 그 점을 이해를 못해 주니까.
목사님들 복음 전할 때 제일 난처한 게 뭡니까? 도대체 이해를 못해주죠. 그것은 그들이 올 때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쪽으로 모든 즐거운 것들을 끄집어오기 위해서. 특히 지난주에 우리교회에 어떤 사람, 그 사람은 고신 측 할머니 쯤 되는데 설교시간 45분 내내 인상 쓰고. 그 사람 주장이 뭐냐 하면, 십계명은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설교 초반에 그랬지요. 감추고, 감추고 인간의 더러운 죄를 E.T. 손가락처럼 잡아서 예수 피로 연결시킨다고. 그래서 구원하는데 자꾸 감추지 말라. 죄인 돼버렸는데 죄인 아닌 척하는 게 더 어색하고 이상하지 않습니까? 죄인인 걸 그냥 받아들이면 뒤에 의인이라는 게 그냥 기쁨으로 오는데. 점심 먹으라고 해도 휙 가버리고.
성신이 이제는 모세뿐만 아니고 70인 장로에게도 있고(민11:25, 105페이지),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기를 바란다고 돼있습니다. 그게 지도와 지시의 은사가 개인으로 왔지만 개인에서 전체로 확산되는 겁니다. 제가 오후예배 때 설교했는데 이걸 ‘묶음’이라고 한다.
은사의 특징은 첫 번째가 회수용. 줬으면 다시 하나님께 가는데. 두 번째가 그냥 회수하는 게 아니고 여자들 머리를 노랑 고무줄로 묶잖아요. 한 개로 묶는 게 아니고 백 개, 천 개로 묶잖아요. 천 개 넘는다. 만 개 이상 묶잖아요. 묶어버리면 만 개의 가닥들이 한쪽으로 묶어졌지요. 묶음 이후에는 만 개의 머리카락이란 의미가 상실하죠. 이 상실하는 상황을 교인들은 괘심해하는 거예요. 이 노란고무줄이 신약에선 머리라고 한다고. 교회의 머리요.
진짜 구약에서 탈락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묶이는 게 싫다는 겁니다. 왜냐?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 개개인마다 생존의 열정은 다 다르고. 악마가 있어서 남은 죽든 말든 나만 나만 살아야 되겠다. 아간이 외투를 왜 훔쳤습니까? 그 사람은 절대로 이스라엘 공동체 생각한 게 아니죠. 자기만 배부르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아간뿐만 아니고 우리 모두가 제2의 아간, 제3의 아간 아닙니까.
이웃 사랑하지만 우리한테 이웃 사랑이 안 나옵니다. 율법에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돼있죠. 상당히 식상하고 상투적이고 들으면 그렇고 그런데 말을 바꾸면 새롭게 들립니다. ‘내가 네 몸을 예쁘게 치장하는 것 같이 네 이웃을 예쁘게 치장하라.’ 이게 가능합니까? 여자들이 아침마다 거울 보는 게 누구 예쁘라고 합니까? 다른 사람 예쁘게 치장하는 게 아니잖아요. 인간이 자기를 예쁘게 한다는 것은 결국은 다른 사람보다 자기 얼굴을 돋보이게 하잖아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불가능한 말씀을 주셔요. 이웃을 예쁘게 하는 것처럼 네가 이웃을 예쁘게 단장할 수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예쁨이란 경쟁구조 속에서 나와요. 남이 나보다 예쁘면 내가 아무리 예뻐도 빛을 잃잖아요. 안 예쁘잖아요.
주님께서 우리가 빛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한없이 저쪽을 어둠으로 만들어주시는 거예요. 왜? 우리는 세상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에. 어둠이고 빛이고 나는 세상이 좋아. 같이 합세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주님께서 세상을 계속 어둡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그 어둠에 참여하지 말라고 너는 빛의 자녀다. 너는 어둠에 있었는데 이제는 빛의 자녀다. 일어나라. 에베소서 5장의 말씀처럼 저쪽을 어둡게 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구분됐다는 것을 양쪽 다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주님께서 어둠을 어둠 되게 하지 않고 우리한테 일을 맡겨버리면, 우리는 자기의 착함을 이웃을 통해서 증명하려고 합니다. 또 하나의 회수가 돼요. 내가 빛의 자녀인데 얼마나 위대한지 잘 모르겠거든요. 착한 일을 시도해서 ‘빛의 자녀 맞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자기한테 회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보다 더 착한 사람이 등장하게 되면 갑자기 악한 자가 되잖아요. 그러니 자기를 위하여 빛의 자녀가 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이에요.
십자가마을에 개혁주의 교회에 있는 질문을 제가 올렸습니다만 그 사람이 하는 게 ‘내가 착하게 살겠다는데 이근호 목사, 정낙원 목사, 정판옥 목사는 반대하느냐?’ 이런 식으로 하는데 그 사람은 묶음을 모르는 거예요. 자기 머리카락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샴푸해서 더 윤기 나는 머리카락으로.
묶음에선 뭐가 사라집니까? 자기가 죽음으로 끌려들어가서 자기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묶어서 그 다음에 다발 속에 들어가야 돼요. 이쪽 다발은 예수님의 의인 된 덕분에 몽땅 의인 되었다는 그런 입장에서 이쪽 다발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 다발 될 때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구약성경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하나니의 언약적인 특징이죠. 언약은 묶어버립니다. 묶어서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도록 몸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그러니까 네 자신을 위해서 너에게 회수되는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은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광야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백성들의 만남이죠. 더 이상 너 자신을 위한 삶은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이 70 장로에게도, 전 백성에게도 오는 거예요. 모세가 받았던 지도와 지시의 은사가 그 다음에 70명, 그 다음에 전 백성들에게 이렇게 내려졌다면 전 백성에게 일어났던 모든 재판거리, 소송거리는 어디서 해결해야 되겠지요? 방백들에게. 방백이 안 될 때는 모세한데 해결해야 되겠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신이 이쪽으로 임하기를 원한다는 말은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가 결국 모세한데서 해결 받는다 이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개개인이 하나의 머리카락으로서 자기 문제를 자기의 유리와 이익 이런 점에서 재판이나 소송하게 되면 그건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가 알아서 할 것 같으면 지도와 지시의 은사의 존재 의미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 하나 찾아봅시다. 고린도전서 3장 19절. 이런 피라미드를 염두에 두면 이 말씀이 너무나 명확하게 이해됩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이 저자, 장 디디에 뱅상 이 소리 들으면 기분 되게 나쁠 거예요. 한 마디로 조져버리죠. 이 세상 지혜는 미련한 것이다. 20절 봅시다. 주께서 세상에 있는 건 헛된 것이다. 이유가 뭐냐? 우리가 피마리드 생각 안 하면 이유를 몰라요.
그 다음에 21절, 유명한 말씀. “만물이 다 너희 것이고” 그러니까 백성 밑에 어둠에 속한 사람들이 또 있지요. 만물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 성도를 위해 있는 것이고, 그 다음에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22) 그 다음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23) 이것도 하나의 피라미드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세상의 지혜가 다 헛된 것이다. 왜 헛되느냐? 시험문제 내면, 정답은 이거겠죠. 인간은 자기 유리한 쪽으로 회수하게 돼있어요. 위를 잘라버리고.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배 타고 가시는 그 경로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려요. 누가 왔다고? 왜 왔는데? 심심했던 모양이라. 이렇게 무의미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주께서 오셨다고? 아이고 이제 살았구나. 또 오신다고? 기다려야지. 자꾸 세상과 결별하죠. 사실은 자기 자존심과 결별합니다. 자기의 생존문제와 결별하죠. 떨어져나갑니다. 자꾸만.
고린도전서 4장 1절 봅시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이 한 마디가 사도 바울로 하여금 ‘나 죽어도 좋아’를 낳게 만든 겁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마치 왕의 옥쇄를 맡은 자가 창칼도 무서워하지 않고 그걸 품어야 되는 것처럼. 제사장이 다른 걸 해도 법궤를 지켜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비밀을 지켜야 되는 거예요.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어디 홀 정해서 교회가 아니고 이 비밀이 있다면 자기 집의 다락방이라도 내놓는 그게 교회 아닙니까. 교회란 말은 사람들의 모임을 뜻하죠. 부동산이 아니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비밀에 뿅 간 거예요. 인간의 지혜가 아니고 주님 주신 지혜에 매료되어서 이미 해답을 받은 사람이에요. 뭐가 해답이냐 하면, 주께서 십자가 지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그 경로, 지금도 그 경로대로 세상만사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믹서 섞는 것, 믹서에 세 칼날이 갈라져 있잖아요. 믹서에 사람이 들어가면 갈리잖아요. 믹서 중심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아닙니까. 이게 심판의 기준이거든요. 이방인들한테는 옛날에는 묵인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기회는 끝나버렸다. 이제는 믿을만한 분,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한 분을 이미 제시한 거예요.
그러면 세상은 지금 선거철 아닙니까. 선거, 월드컵 벌이고 있단 말이죠. 천안함도. 그럼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가면 전부다 예수 그리스도로 분쇄되잖아요. 그럼 여기 의사되고, 판사 임명됐다고 자랑해도 의미가 없다니까. 세상사는 게. 이게 비밀이라니까. 이 비밀을 맡은 자가 세상의 협박, 공갈? 넘어갈 걸 넘어가요. 비밀이 있는데 비밀 때문에 사는데. 도마가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 자국을 보고 난 뒤에 벌벌 떨었습니까? 이미 끝난 관계인데.
그래서 자꾸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에 관심 없는 성도를 복음에만 관심 돌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좋아하는 세상 것이 무너지게 만들어버려요. 난처하게 만들고, 일이 꼬이게 만들고, 기대를 걸다가 실망하게 만들어버리고. 그 실망으로 ‘나 죽을 란다.’라는 소리 나올 때 비로소 ‘내가 비밀을 맡은 사명이 있지. 내가 엉뚱한데 신경을 썼구나. 우리로 하여금 ‘복음 전하면 돼.’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것들에 우리가 마음 빼앗기지 않도록 주께서 고맙게도 마귀를 통해서 그 일이 안 되게 하는 거예요. 마귀가 얼마나 고마워요.
하여튼 주변에 마귀가 들끓어서 시체 썩을 때 고마운 게 박테리아 아닙니까. 다 섞게 하니까. 고맙지요. 마귀가 그런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마귀로 하여금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다 갈아먹어서 낭패, 십자가에 털썩 내려앉게 만들어요. ‘끝났어. 난 이제 자살밖에 없어.’라고 하게 해서 다시 한번 잊어버렸던 복음의 사명을 지시와 지도의 은사를 일구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모세와 마귀 같은 백성들의 만남이 그런 현상이 지속적으로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첫 번째는 회수용이라 했죠. 두 번째는 묶음이에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우리가 복음 전하다가 죽었잖아요. 우리의 시신을 증거물로 활용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활용을 잘 해요. 쓰레기 활용을 너무 잘해요. 요한계시록에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까불다가 복음 전하다가 죽어버렸죠. 처음엔 잘 나갔지. 병고치고, 귀신 쫓고 해서 사람들 놀라게 했는데 바다에서 짐승이 ‘이게 어디서 까불어’ 하고 죽여 버리니까 그 죽은 장소가 애굽이고 고모라요 십자가에 달이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짐승들이 좋다고 잔치 벌이고 선물 나누고 하죠. 그걸 기준으로 해서 세상이 지진이 일어나고 작살나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버리는 게 없어. 완벽한 100% 재활용해요. 스데반 집사가 죽었잖아요. 그것이 무의미한 게 아니고 거기에 누굴 불러냈습니까? 사울로 하여금 옷 맡은 자로 해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내가 죄인 중에 괴수고 하는 그걸 계속해서 말하게 하는 거예요.
이걸 간단하게 말해서 퇴비로 사용해요. 성경은 만물의 쓰레기, 찌끼. 음식 쓰레기. 고린도전서 4장 13절에 나오죠. 그래서 나는 죽고 너희는 살고라는 말이 고린도후서에 나오죠. 나는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걸 가진 자인데 나는 죽고 너희는 살고. 바로 이런 일이 주님과 함께 동승한 돛단배에서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먼저 가셨던 그 길이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오셨고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그 성령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또 다시 주님이 원본이 되어서 판박이처럼 똑같은 현상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 어려운 사도행전의 흐름입니다. 절대로 이론이나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죠.
사람들이 자꾸 성경 자체의 이야기를 관념, 추상이고 이론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몸 위주의 실제를 따로 꿍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이대로 하면 진짜로 하나님 살아계신 걸 믿겠습니다. 자기 증거, 자기가 살 수 있는 증거물로 확보하는 거예요. 이 미친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자기 죽어야 증거물 되는데 산 채로 증거물 되려고 하니 자기가 자꾸 살아있으니까 예수님은 자꾸 나가리 되는 거예요.
지난 주일오전에 제가 이야기했어요. 예수가 죽어야 우리가 살고, 우리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하여튼 은사는 이래요. 우리가 이대로 산다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살려지게 된다 이 말이에요. 특히 이런 것이 우리 힘으로 안 되잖아요. 육이기 때문에. 마귀가 도와줘서 우리가 육으로 믿을만한 것들이 다 작살나게 만들고 다시 한 번 우리의 위쪽으로 눈 돌리게 만들고.
그래서 이 일을 하게 되면 즐거운 탄식이 나와요. ‘나 죽을래.’ 나 죽을래보다 ‘그만 살래.’ 이게 사도 바울의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 살만큼 살았습니다. 구경할 것 구경했고 알 것 아니까 나 그만 살래. 지금 주와 함께 거하고 싶습니다.’라는 마음이 들 때 그게 바로 성령의 열매가 되는 겁니다. 내가 죽어야 이웃 사랑이 돼요.
화장하다가 날 예쁘게 하다가 이것도 때려치우고 그만 살래. 할 때 남을 예쁘게 해주고 싶어요. ‘고생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예쁘게 해주고 자기는 화장이고 뭐고 그만 두고 싶죠. 자기가 자기를 예쁘게 하는 일을 그만 둘 때 이게 온유입니다. 온유고 화평이고, 자비고, 형제 우애입니다. 최고에요.
그래서 주께서 도와주면, 갑자기 나는 지금 죽으면 안 돼. 일단 16강 보고 죽을 랍니다. 박지성 한 골 넣는 것 보고 죽는다고 나오죠. 자식들 시집가는 것 보고. 이능우 집사님은 지금 죽으라 하면 아까워 못 죽죠. 다음주 딸 결혼하는데 지금 못 죽죠.
그 다음에 사사와 나실인 봅시다. 그런데 앞에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하는 중에서 침멀리가 하나 중요한 걸 지적했어요. 여호수아는 모세 똘마니란 겁니다. 그것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에요. 이 사람이 치밀하게 하나님이 모세와 작용하고, 여호수아와 작용하고 이거는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죠.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이 책을 보면서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란 책에서 저는 이렇게 이야기했죠. 여호수아는 모세 언약의 종속되는 거예요. 이 말의 근거가 뭐냐 하면, 여호수아가 들어갈 때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막아서죠. 이것은 마치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신발 벗는 것과 똑같죠. 거기도 신발 벗어야 되니까. 이 말은 이런 겁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에서 위에서 연결되어야지 밑에서 모세와 여호수아와 개인적으로 연결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모세도 그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에.
모세에게 주어진 지도와 지시의 은사가 그대로 여호수아에게 오게 되면 모세가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까 세 번째가 뭐라 했습니까? 모세의 시신은 증거물이 돼요. 언약은 인간인 너를 죽여서라도 언약을 성취시키고 말리라는 하나님의 단호한 일관성 있는 언약적 결정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죠.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볼 것은 여호수아의 언약은 없고 모세 언약이 여호수아에게 뒤집어쓰면 여호수아는 참관인, 목격자, 증인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것을 가지고 내가 새삼 십자가 져서 ‘십자가 졌다. 날 봐라’ 할 필요가 없어요. 주님 십자가 지신 영이 우리에게 뒤집어쓰면 나에게 주어지는 내 십자가가 아니고 전부다 그때 그 당시에 예수님 졌던 십자가가 우리에게 뒤집어쓰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다시 말해서 내 십자가가 살아나선 안 되고 주님의 십자가만 내 안에 살아나야 한다는 그 이야기가 구약에서 똑같은 맥락으로 되는 거예요.
그처럼 하나님의 일은 일관성이 있어서 전혀 빈틈을 보이질 않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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