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6월 4일 출12장 죽음이 구별(거룩:하나님의개입)기준
울산 6월 4일 출12장 죽음이 구별(거룩:하나님의개입)기준
이름 : 관리자(IP:124.59.87.52)
100604 출12장 죽음이 구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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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05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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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21 18:12
울산100604a출12장a
20100604a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12장, 첫 번째 유월절 그때 유월절이 생겨나게 된 경유, 유월절이 이스라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 첫 번째 하나님께서 애굽에 찾아왔을 때 일어났던 일을 우리가 살펴볼 차례입니다.
11장 7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지난 시간에 우리가 했습니다. 한 달 넘었으니까 여러분 기억력이 감퇴했으니까 모르죠?
하나님께서 구분하는 일을 하는데 무엇과 무엇을 구분하느냐?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분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겁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세상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거든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줄 아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옆 사람을 모방하려고 애를 쓰거든요. 달라지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든지 그들과 친해서 더불어 함께 살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인데 그 본성하곤 정반대로 ‘내가 너희들과는 달라’ 그런 마음이 어느새 들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 마음이 든다면 지금 우리 가는 길이 완전히 나눠졌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달라지게 되면 다른 이유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어떤 근거에 의해서 세상 사람과 우리 자신과 무슨 근거가 있어서 달라지잖아요. 그 근거는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개입하셨기 때문에 내 백성과 하나님 백성 아닌 사람들은 하나님 쪽에서 작업을 하는 겁니다. 이것까지는 여러분 아시겠지요.
근데 그 작업을 하는데 여기서 첫 번째 우리가 어려운 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구분하시는 작업을 할 때 우리가 예상한 방법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우리가 예상한 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기 이스라엘과 애굽과 구분하시는 기준이 뭐냐 하면,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구분을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포켓에 노란스카프를 목에 하라는 그런 기준 또는 머리를 기르라는 그런 기준, 오른손에 장미꽃을 들라는 그런 기준. 이런 기준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일단 사람이 살아야 장미를 들고, 살아야 가리마를 하고, 살아야 왼쪽 포켓에 노란손수건을 걸칠 수 있잖아요. 그런 기준, 우리가 일단 살아서 어떤 행동, 제스처를 취해서 그 제스처를 취한 그걸로 너는 그런 제스처를 취했으니까 내 백성, 저런 제스처를 안 취했으니까 지옥 갈 백성 이렇게 구분하는 기준이 아니고 뭐가 기준이라 했습니까? 죽음이 기준이라 했죠.
죽음이 기준이니까 결국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의 기준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왜? 죽음이니까.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해도 소용없고, 안 해도 소용없고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라는 기준이 오게 되면, 우리는 반가워서 ‘아이고 이런 놀라운 기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반가워하는 쪽은 이스라엘 쪽이 되고, ‘아무것도 안 하는데 어떻게 구원받지?’라고 의심하는 자는 애굽 쪽이 되는 거예요.
다시 한다면,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하지마라’에요. 그 뒤에 나온 말은 ‘내가 다 할게.’ 이 말도 되고, ‘내가 창세전에 이미 다 하도록 하늘나라에서 이야기가 끝났어.’란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하지마라’는 이 여덟 자를 두 자로 줄이면, ‘죽음’이에요. 하나님께서 가르는 기준이 그냥 죽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하면 이스라엘 사람이 되고, ‘누가 감히 날 죽여. 내가 하나님 섬기기 위해서 이렇게 계획한 게 많은데 왜 내가 죽었어. 내가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 나 같은 인간을 누가 죽었다고 해.’라고 나대면 그것은 애굽이 되는 거예요.
이 죽었다는 사실이 창세전의 기준이 내려올 때 여기서 반드시 하늘나라의 일이 지상에 내려올 때는 사건으로서 와요. 그 사건의 내용이 채워져야 되거든요. 사건의 내용이 피, 피를 만드는, 피를 짜내는, 피를 내놓아야 되는 사건이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이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다가가는 사람은 이스라엘이고, 이 피 사건을 기피해서 외면해서 우회로 또는 다른 쪽으로 하나님 쪽으로 가보겠다는 것은 바로 애굽 나라가 되는 겁니다. 굉장히 쉽죠.
다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애굽을 가르는 기준은 하나님 쪽에서 죽음을 가지고 기준을 삼아서 가릅니다. 왜 죽음이냐 하면, 인간 너희들은 둘 다 가만있어. 가만있으면 구분이 안 되지 않습니까? 둘 다 죽은 자로서 가만있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조치해서 창세전에 예정한 대로 내가 갈라낼 거야.
하나님의 기준이 우리를 죽음으로 간주한다는 이 기준이 어떤 하나님 뜻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사건이 발생돼야 돼요. 그 사건이 피를 만들어내는, 죽음을 만들어내는 사건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죽음을 만들어내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애굽의 족속들은 죽음이란 사건을 안 만들어내요.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의 죽음이란 나중에 늙어 죽을 때나 죽음이지, 펄펄 살아있는 입장에서 구태여 나의 죽음을 거기다 끄집어낼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다음주에 딸 치우는데 왜 죽어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잖아요. 딸 시집보내고 죽어야지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쪽에서는 내가 살아 있잖아요. 살아있는 식으로 해서 사건을 만들어나가면 주님의 기준의 어긋나게 돼있어요. 비껴가게 돼있습니다. 자기 딴에 영광과 찬송과 하나님께 봉사와 다 해도 하나님이 제시한 죽음이란 기준과 만나지 않고 비껴가버려요. 비껴가버리면 d이 애굽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들은 죽어야 되는데 안 죽고 계속 살아있는 겁니다.
지난주 주일날 오후설교에 단발머리에 머리카락이 굉장히 많습니다. 머리카락이 많으니까 a라는 머리카락, b라는 머리카락 c라는 머리카락이 서로서로 네가 낫니, 내가 낫니 하고 있는데 이걸 노란고무줄로 묶어버리니까 어떻게 돼요? 여기는 머리카락이 되지만 이거는 뭉치, 다발이 되겠지요. 여기서는 묶을 때 그냥 통과 못하고 개성 있잖아요. 개인적인 특징 이것은 죽은 걸로 간주해서 새로운 다발에서는 이 기준에 의해서 죽은 자로서 이 다발에, 묶음에 참여하게 돼있습니다.
이것이 수평으로 돼있지만 이걸 수직으로 세워버리면 하늘의 뜻이 애굽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죽음이라는 기준을 통해서 구분하는데 그 기준에 합당할 때는 이 죽음을 묘사하는 피가 만들어내는 사건이 이뤄지고 이거는 피가 없는 식으로 애굽 사람들이 나오게 돼있어요. 그래서 구분하는 겁니다.
근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멀쩡한데 평소에 자기 집의 대문짝 험해서 부인이 페인트 칠 하라 해도 귀찮아서 안 하던 인간이 이 날 자기가 양 잡고 붓 들고 우슬초로 피로서 페인트 칠 한다면 미친 인간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 믿는 게 십자가 믿는 게 미친 짓입니다. 점잖게 믿고 있으니까 미친 짓 아닌 것 같죠? 오늘 아파트 가서 양 피 발라보세요. 미친 짓 아닙니까. 반상회 때 문제 될 사항이에요. 저 집은 벌거니 양의 피를 바르고. 그들은 왜 그런 행동을 한다고 안 합니다. 왜 그런 지랄을 하느냐 하지. 동네 부끄럽게 왜 그런 짓을 하느냐? 무당집도 아니고.
피라는 것은 기피되는 사태입니다. 죽을 때나 억지로 울어주지 평소에 죽었다고 우는 인간 누가 있습니까? 평소엔 웃어야지. 웃음 치료~ 심지어 어떤 고집 센 시어머니는 아파서 자식들이나 며느리가 울면, ‘네가 미쳤다고 우냐. 운다고 지랄하느냐?’ 쌍욕을 하죠. 상갓집에 가면 울지 말라고 그렇게 쌍욕을 하는 연세 많은 맛 간 할머니들 더러 있어요. 멀쩡한 집에 죽음의 표시를 왜 하느냐? 이 말이죠.
이창섭 목사님 오신 것 생각도 못하고 먼저 해서 미안합니다. 좀 기다릴 걸. 생각도 못했어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인간의 생각에 포착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이스라엘 하는 짓은 미친 짓입니다. 인간이 멀쩡한 정신으로 이런 짓을 할 수가 없어요. 성경을 쉽게, 쉽게 보시면 안 됩니다. 그들은 못할 짓을 한 겁니다. 정상인이라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야말로 정상인으로 살다가 ‘오늘부로 정상이고 뭐고 죽을란다.’라는 사람에게만 나올 짓을 자기 집에 양 피를 바르는 짓입니다. ‘나 그만 살래.’ 예수 믿는 것, 십자가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난 그만 살래. 더 살 마음도 의향도 없어.’라고 그런 마음으로 믿어야 그게 십자가 제대로 믿는 거예요. 그 사람 속에서 피 사건, 죽음 사건, 하나님의 기준이 퍽퍽 발생되어서 나오는 겁니다.
어쨌든 이 땅에서 복 받고 더 살아보려고 그런 식으로 십자가 믿는 것은 피로 묻힌 게 아니고 십자가란 환상에 묻힌 건데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시장에 가서 십자가 목걸이나 하나 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아무 의미 없어요. 드라큐라 왔을 때 그때나 필요할까 아무 소용없습니다.
십자가를 믿게 될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어요. ‘자식이고 남편이고 다 귀찮아. 난 그만 살래. 주여 날 데려가세요.’라고 할 때 세상이 잊혀질 때 그때 살 길은 주님이 제시한 길밖에 없음을 이 길이 크게 보일 때 비로소 그 사람 속에서 그 사람의 행위와 발언 속에서 언어 속에서 십자가가 펄펄펄 나오게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무척 어렵게 이야기합니다. 엄청나게 어렵게 이야기해볼게요. 왜냐하면 어렵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게 출애굽기 12장 2절 말씀 때문에.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그 대목 때문에 제가 어렵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부산서 강의를 했었는데 다시 한번 풀이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죠. 창조했다는 증거를 인간에서는 찾을 길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몸이 구성돼있으면 그때부터 인간 나름대로의 시간의식이 시작돼요. 이 중심은 내 몸 중심이에요. 내 몸 중심은 자기의 출생부터 해서 죽을 때까지 기억이 되는 거예요.
출생이지만 출생할 때 기억 안 나죠. 그러니까 사실은 세 살 내지 네 살부터 기억될 때부터 서른 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든지 기억 될 거고. 이때부터 해서 자기가 오십 살았으면 오십까지는 기억하지요. 이걸 자기의 기억이라 하는데 그 기억이 바로 시간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놨지만 인간은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는 걸 못 느끼고 현재 창조된 내가 내 위주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냐는 자기 출생부터 사는 삶을 통해서 기억을 통해서 거기서 새로운 시간의식이 전개되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하려고 이런 이야기하는가? 잘 들어보세요.
그렇다면 창조는 어디서 찾는가? 인간들이 일방적인 자기중심의 시간을 갖고 있는 거예요. 여기 만약에 A라는 남자가 있고 B라는 여자가 있다면, 이 B라는 여자는 나름대로의 출생이 있을 것이고 인생계획이 있고, 미래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자기가 생각하는 시간이라 하는 것은 항상 자기중심의 시간이 되겠지요. 특히 딸이니까 여성이니까 주로 엄마한테 여자의 일생에 대해서 이야기할 거고,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남자의 일생을 들었을 거라 이 말이죠.
그렇다면 여자의 미래상과 남자의 미래상이 다르겠지요. 여자 같으면 나이 한 스물다섯 됐으면 좋은 남자 만나서 애 낳고 살림 잘 살고 시부모한테 칭찬 받고 귀염 받고 살아야 된다는 것이 그 사람의 미래의 항목에 채워져 있겠죠. 그 다음에 남자 같으면 남자가 칼을 뺐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무슨 사업을 벌여서 우리 가문의 영웅이 되라든지 출세해서 다른 식구들 걱정 안 하고 살게 해야지. 남자라면 비전을 가지라는 식의 미래상을 갖겠죠.
여자애들은 소꿉놀이 인형 가지고 놀고, 남자애들은 칼싸움하고 비행기 갖고 놀잖아요. 왜 다르냐 하면, 세상을 볼 때 자기 위주의 시간관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A나 B는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기억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없으니까 우리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설득으로 도저히 그 사람들을 구원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했다는 기억이 없어요. 그들의 기억은 내가 언제 태어났으며, 어느 집안사람이며, 지금까지 내가 애써서 공부해서 이만큼 살아왔다는 자기 기억밖에 없습니다.
이건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와서 하나님 기억은 없어요. 무슨 기억만 있느냐 하면, 내가 처음 개척 교회할 때 의자 내가 놨다. 교회 구석구석 보면서 피아노는 누가 기증한 거고, 나무는 누가 가져온 거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그것이 하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으로 되서 그 교회의 미래는 그래서 한 오백 명 모이는 교회 되겠다로 채워지는 겁니다. 그 교회 누가 다니기 때문에? 본인이 다니거든요. 본인 중심의 시간관이 여전히 자기 다니는 교회에 꽉 차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데 이게 뭐냐 하면, 1, 2, 3, 4, 5, 6, 7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이걸 인간이 해석을 한다면, 제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으로서 포착이 안 되고 해석이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시간관과 공간관이 달라서 그래요. 인간의 시간, 공간관은 자기중심이지만 정답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은 장차오실 예수님 중심입니다.
이게 예수님 몸 따로 있고 우리 몸 따로 있기 때문에 사고가 안 맞아요. 도저히 납득이 안 되게 돼있습니다. 1, 2, 3, 4, 5, 6, 7 하면 인간들은 뭐라고 합니까? 자기 해온 대로 8, 9, 10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1, 2, 3, 4, 5, 6, 7 그 다음에 8 나옵니까? 아닙니다. 7 위에 올라가서 또 1부터 시작해요.
이걸 창세기 2장 1절에 안식일이죠. 안식을 줌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자기 시간을 하든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내가 창조했고 하나님의 시간으로 창조성을 여기다 뿜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성과 인간의 자기중심이 생각하는 것과 핀트가 맞겠습니까, 안 맞겠습니까? 안 맞게 돼있어요.
인간이 생각하는 신이라는 것은 1, 2, 3, 4 이걸 거치지 않고 그냥 자기가 담고 있는 공간, 자기의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신에게 나아가니까 그것은 바로 우회해서 안식일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 믿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의 투시, 자기가 되고 싶은 투사, 자기가 되고 싶은 이상형을 걸쳐놓고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을 신봉하는 자기가 자기에게 신도가 되고 종교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갖고 있던 자기의 시간관을 그대로 적용시켰기 때문에 하나님, 일년 후에는 뭐 되게 하옵소서. 삼년 뒤에는 뭐 되게 하옵소서. 옆에 박 집사, 김 집사, 정 집사, 송 집사 있으면 기도 이렇게 하는 거야. ‘하나님이여 오년 뒤에 이렇게 하옵소서. 봤지. 내 따라 해.’ 그러면 송 집사, 박 집사가 가만있습니까? ‘너는 너 대로 해라. 나는 나대로 한다. 하나님 오년 뒤에 뭐 되게 하옵소서.’
이것은 사람마다 각자 자기중심의 시간, 공간관이 있기 때문에 전혀 안 맞지요. 그런데 안식일을 만약에 A나 B란 사람들이 전부다 들어가 버리면 안식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안식일에서는 누구 시간이라 했습니까? 예수님 시간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장차 메시아로서 하실 일을, 십자가와 부활, 승천인 거죠. 예수님의 십자가 일을 어디서 만납니까? 안식일을 준수함으로서 거기서 만나게 되겠죠.
그러면 인간이 안식일에 들어갈 때 그냥 못 들어가고 장차오실 예수님이 해야 될 일과 만남을 통해서 들어가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안식일에 뭐 합니까? 제사하죠. 제사가 뭡니까? 흠 없는 제물을 죽이는 거잖아요. 죽음과 만나죠. 그런데 이 죽음은 지금 보기는 양의 죽음이지만 장차오실 메시아에 입혀버리면 예수님의 죽으심이죠.
우표 그림 봐서 편지 내용이 나옵니까? 새 그림 우표를 편지에 붙이면 새가 사라지고 그 안에 감추어진 어떤 사람이 쓴 편지내용이 뜹니까? 아니죠. 아무 상관없죠. 우표는 그림으로 우표의 기능을 말해주는 건 압니다. 다만 우표를 붙였다는 것은 이 우표는 내용물을 전달하는 표시로 한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 안식일에 율법 우표를 줬지만 그 율법은 지금 일반우표와 달라서 약간은 그 안의 내용물과 유사한 모습으로 우표가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게 바로 제사에요. 이 사람들의 죽음이 아닙니다. 흠 없는 양의 죽음이죠. 그러면 장차오실 하나님의 사건 안에는 뭐가 됩니까? 흠 없는 어떤 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증거해야 될 그러한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감을 잡게 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 이해하시겠죠. 1, 2, 3, 4, 5, 6, 7 그러면 진도를 나가봅시다. 여러분 실력을 믿고. 1부터 7 그 다음에 뭐가 돼요? 8이 돼야 되는데 8은 없고 1 되죠. 이 말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1과 7을 끊어놨죠. 그런데 인간의 몸은 한 번 태어났으면 계속 살고 싶죠. 언제까지? 영원히. 지상에서 1, 2, 3, 4, 5, 6, 7 그 다음에 8, 9, 10 해서 무한대로 계속 살고 싶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무한대로 계속 사는 것이 항상 보장이 안 되게 돼있어요. 만약에 인간이 계속 사는 것은 어떤 하나님의 창조조건에 합당할 때 계속 살아요. 하지만 인간의 속성으로 계속 사는 것 말고 하나님의 생명나무를 가지고 있어야 계속 살아요. 선악과를 아는 상태에서 계속 살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뜻에 위반되는 거예요. 선악과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살아야 돼요.
그렇다면 이들에게 뭘 했느냐 하면, 죽음과 결부된 생명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결국 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이 존재하게 된 겁니다. ‘선악과+생명나무’ 이것이 장차오실 예수님의 기능이에요. 예수님은 죽이는 자를 죽이고, 살리는 자를 살리는, 그 살리는 자는 죽이는 자에게는 없는 새로운 성격으로 합류해서 영생을 살리는 겁니다. 그 새로운 성격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나왔던 예수님의 형상, 맏아들의 형상을 입어야 그런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거예요.
그 두 가지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 만들고 중앙에 두 종류의 특별한 나무가 있었죠. 선악과는 죽음과 관련돼있고, 생명나무는 생명과 관련돼있죠. 하지만 죽음을 모르고서는 생명의 근처도 못 가죠. 죽음을 모르고 다시 말해서 선악과 따먹어도 생명을 가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들이 마귀한테 속아 넘어가서 하는 오류가 되는 겁니다. 마귀는 그걸 노리고 항상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라는 거예요.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면 선악과도 따먹고 생명나무도 따먹고. 내가 따먹겠다는데 누가 말려? 이런 식으로 하고 싶죠. 그런데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게 아니라 했죠. 누구를 위해서?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골로새서 1장 16절. 모든 것이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잖아요. 주님을 위하여 인간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도 알아야 되고 생명나무도 알아야 될 그러한 입장에 이미 창세전부터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창세전에 이야기가 끝난 사람들이에요.
쉽게 말해서 인간에게는 해야 될 일이 있다는 말이에요. 제가 한 이야기가. 인간은 그냥 인간이 아니고 각자 해야 될 일이 있는데 하나는 지옥 갈 이유를 보여주는 일을 해야 되고 진노의 그릇이죠. 한쪽은 천국 가는구나를 보여줄 기능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창세전부터 결정 났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강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봅시다. 하나님께서 개입할 때는 그냥 개입하는 것이 아니고 둘 사이를 구분시키면서 한다 했죠. 이게 제 말입니까? 아까 출애굽기 11장 7절에 나와 있죠.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분하죠. 그 구분의 기준이 죽음이라 했죠.
그래서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해 보면, 중요한 거니까 적어볼게요. [생명은 날 죽이는 것이다.] 이걸 한 자로 줄이면, 생명은 ‘피’다. 생명은 피에 있다. 피를 통하지 않고는 나를 만날 생각을 하지 말라 이 말이죠. 레위기에 나오죠. 생명은 피에 있나니. 기꺼이 죽고자 하는 사람은 뭘 아는 사람이냐 하면, 지금 나보고 죽으라고 하시는 그분이 바로 나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피의 사건은 우표에요. 우리는 하나의 우표가 되고 우표를 뜯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그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우리가 십자가라는 우표를 바르는 거예요. 아직까지 어려운 건 나오지도 않았어요.
진짜 본격적으로 합니다. 천천히 할게요. 인간은 창조에 대한 기억이 없고 내가 어떻게 창조되었다는 과거의 출생과 살아온 기억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제가 하나교회에서 강의하면 그랬어요. 현실이 무엇이냐? 어쨌든 내 것 있다. 이게 현실이라 했어요. 교회에서 성경 공부하다가 전화 오면, ‘그래 이제 왔나. 밥 있고 감자 튀긴 것 있다.’ 이게 현실이죠. 그것 남의 자식한테 전화했습니까? 누구 자식한데? 내 새끼 아닙니까. 그러니까 현실은 어쨌든 내 것 있다.
여기는 다 교회 열한 시 30분 전에 오시죠. 우리교회는 열한 시 15분, 설교할 때나 오죠. 이런 이야기하면 곤란한데. 이건 취소. 주의해야 되는데. 약해지면 안 돼.
교회 일찍 와서 우다닥 집으로 가는 이유가 뭡니까? 그 집 남의 집이 아니고 내 집이죠. 교회는 내 것 아니지만, 이 말은 교회는 현실과 거리가 멀고 가장 현실과 가까운 것은 내 것 있다. 내 남편, 내 자식, 내 아내, 내 것 있다는 이게 현실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현실은 뭐냐 하면, ‘내 것 있다’부터 시간이 시작해요. 내 것 키우는 시간이 넘쳐나는 겁니다. 여기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심판이라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치워버려야 돼요. 나중에 죽을지라도.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간을 주실 때 피를, 생명은 동전의 뒷면에 있거든요. 앞면은 죽음이고, 죽음 바로 붙어서 생명이 오거든요. 나를 죽이는 그분이 나에게 곧 생명을 준다. 나를 죽이는 분이 아니라면 생명을 주실 분이 아니에요. 부처는 생명을 못 줍니다. 왜? 나를 죽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공자도 마찬가지고. 천상천하 유아독존하고 있는 이게 무슨 생명이 됩니까? 너는 죽어 마땅하다고 나에게 지적하는 분이 생명을 줘요. 교체하려고 그렇게 심한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피 속에는 죽음이 온다. 종말이죠. 창조 때부터 마지막 종말이 온다. 나는 죽기 싫은데 주님의 말씀은 새로운 시간관으로 오는 거예요. 오면서 앞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이 너희의 새 달이다. 그 당시에 4월 달이거든요. 4월이 아니고 첫 번째 달. ‘새 달’이란 말은 무엇이 졸지에 헌 달 돼버렸습니까? 내 중심의 시간관은 헌 달, 헌 시간 됐어요. 헌 부대가 됐어요.
결국 새 달, new, 새로움이라는 것은 ‘너는 죽어.’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이후에 새 달 되었다면 그때부터 시간은 이스라엘 역사는 자기 역사는 만날 추궁당하고 짓밟히고 밉상당하고 하나님이 앞으로 이끄시는 역사만 계속 자기 안에 박히겠지요. 그러면 그 이스라엘은 누구 증인되겠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사건화 된 창세전부터 사건이 두드러기 난 것처럼 온 피부가 벌게요. 여호와께서 때려버린 여호와께서 찾아온 흔적들로 온통 뒤집어쓴 그런 새로운 나라가 되는데 그 나라를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걸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게 바로 분류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매끈한 얼굴로 분류될 수가 없어요.
내 집이 여기 있고, 마트가 있고, 저쪽에 친구 집이 있다면, 친구가 집들이 한다고 해서 마트에 들려서 ‘잘 풀리는 집’ 화장지 들고 나갔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매끈했던 이 사람이 화장지 사고 난 뒤에 피부가 두드러기 납니까? 아니죠. 역시 매끈하게 가겠죠.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가 그저 매끈한 내가 교회 다니고 구원받고 그냥 매끈하게 가는 식으로 세상 같이 어울려 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여전히 자기 시간을 포기 못한 거예요. ‘죽기는 내가 왜 죽어. 멀쩡한데.’ 물론 죽어서 천당 가서 더 오래 살아야지. 이 계산만 했지, ‘살아있을 동안은 하나님도 나한테 너무 힘들게 마세요. 눈 감아 주세요.’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눈감아주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여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눈감아주세요.’라고 한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지옥 가고 천당 가는 것은 이 땅에서 어떤 짓을 하던 그것과 상관없는 겁니다.
까불어도 죽은 놈이고, 점잖은 체 해도 죽은 놈이고, 창세전에 확정된 것을 주께서 일방적으로 뒤집어씌워서 그 인간에서 하늘나라의 새로운 정보를 허락도 안 받고 안겨주는 식으로 이끄시기 때문에 자기가 알아서 골라잡아서 천당 가야지 이렇게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그걸 선택하는 양심마저 내가 살아있어야 돼요.
여러분 아시는 거지만 십자가 믿는 믿음이 여러분 믿음입니까, 주님 주신 선물입니까? 선물이죠. 선물 같으면 새로운 선물이죠. 새로운 믿음이죠. 그러면 내 쪽에서 성경 해석하는 건 다 내가 무시해야 돼요. ‘이근호, 네가 뭐 안다고 성경 해석하노?’ 내 쪽에서 무시해야 돼요. ‘네가 성경해석해서 구원받나?’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죠.’ 이게 성경해석하면서 늘 터져 나와야 돼요. 성경해석 잘 해서 구원받는 이런 건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움에 의해서 옛것은 늘 구박받아야 돼요. 구박정도가 아니고 죽어 마땅하는 것을 느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이 너는 피 안에서 하나님과 만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옛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폭발하듯이 일어나야 됩니다. 이거는 우리 몸이 죽지 않는 한 이 성질은 우리를 벗어나지 않고 절대로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일어나줘야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 것이 증명이 되기 때문에.
다시 어려운 걸 하면, 첫 달이 되게 했다는 말은 뭘 의식하느냐 하면, 이미 인간들이 자기중심의 시간관과 세상관과 개성을 갖고 있다는 걸 충분하게 전제로 하고 첫 달이 되게 한 거예요. 그렇다면 거기서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분하는 그 구분이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계속 찾아온다면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자체적으로 하나님이 새롭게 주신 것과 내가 하나님을 해석하는 것과의 차이가 계속 일어나겠지요.
그 해석이란 어려운 말을 했는데 사실은 어려운 건 아니고 이렇습니다. 제가 서울 하나교회에서 했는데 세 가지 핵심을 해볼게요. 요한계시록 1장 7절 하면서 예수의 피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해방시켰다고 5절인가 말씀을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의 피로서 구원을 했다면 첫 번째, 아무것도 하지마라.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뭐가 보입니까? 일방적인 피가 보일 것 아닙니까. 피는 왔는데 자기가 꼼지락, 꼼지락거리면 자꾸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무대에서 모션을 취했어요. 우리가 뭘 하고 있으면 주님께서 양푼에다 피를 담아 뿌립니다. 귀신아 오지마라. 마귀야 오지마라. 우리는 꼼지락하는데 주변에 피가 와서 그 안에서 해방되고 구원받았어요.
우리 주변에 피가 있다는 걸 언제 압니까? 꼼지락하다가 ‘에이씨 안 해.’ 하고 앉아보니까 앞에 피가 보이는 거예요. 주님께서 다 하시는데 왜 우리가 뭔가 하려고 하느냐 말이죠. 그 자체가 불신앙이란 말이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자기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줄 때 내 나라는 이제는 더 이상 내 나라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내 나라로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새로움을 받아들일 때 그 새로움이 구성된 근거에는 내 행함이 첨부 안 되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는 손길을 놔야죠.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죠. 하지 말아야 일방적으로 완제품으로 주신 것이 3D, 입체적으로 눈 튀어나오고 공 튀어나오고. 안 봤지요? 저는 대리점에서 1분간 봤습니다. 내가 하는 것을 이게 무슨 짓이야. 손을 놔버릴 때 비로소 다 써먹어주시는 분의 공로가 크게 다가오는 겁니다.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이게 믿음입니다.
두 번째가 그러나 뭐든지 하게 돼있다. 하나교회는 적고 난리 났는데 여기는 전부다 아무것도 하지마라 하니까. 사람들은 늘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고 내 중심이니까 뭔가 내가 날 위해서 하고, 안 하면 뭔가 찝찝해. 뭐든지 내 중심으로 하고 싶어. 그래서 뭐든지 하게 돼있어. 아무것도 하지마라. 두 번째, 해라.
세 번째 마지막에 바로 이 ‘해라’가 무시당하는 사건이 네 주변에 터질 것이다. 하나님의 피는 그냥 멈춰진 피가 아니고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옛것과 새것을 바꿔치는 예수님 중심의 시간관과 내 중심의 시간관을 바꿔치기 하는 사건들이 툭툭 벌어지는 거예요.
딸 결혼식하기 전까지는 저 딸 어떻게 치우냐고 고민 많이 하는데 딸 결혼식 끝나고 난 뒤에는 딸 키워도 아무 소용없고, 저렇게 훌쩍 떠나는 걸. 상처만 남겨놓고 떠나가느냐~ 이 얄미운 딸아~ 저렇게 가면 다음에 친정에서 뭐 가져 갈 것 없는가 하고 다 들고 가고. 키워준 것은 다 잊어버리고 어버이날 오만 원 주고 그걸로 때워버리고. 뻔할 뻔 자 아닙니까. 그 허탈. 자식 키워도 소용없고, 시집보내도 소용없고. 나중에 애 낳으면 애 맡기려고 오고.
내가 열심히 했는데 구원받는데 아무 기여도 보탬도 안 된다는 것을 누누이 느끼게 만드는. 하나님 구원은 주께서 피로서 이미 내가 죽어 마땅한 존재로 깨닫게 하는 데서 동전 뒷면에, ‘그래서 내가 생명 주려고 그때 죽으라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 거야.’라고 주님의 생명을 크게 내비치는 거예요. 이게 유월절 사건에 다 포함돼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자꾸 유월절 사건을 페인트칠해서 구원받았다는 이것만 이야기해요. 페인트칠 잘 했다. 이제 구원받았다. 내 식대로. 자신이 뭔가 빼앗기는 것도, 달라진 것도 없어요. 그냥 문설주에 피 바랐다는 어떤 주술적인 것, 기능적인 문제, 어떤 미신적인 것 부적 붙이듯이 그걸로 끝나요. 부적 붙여놓고 나는 변화 없이 맨송맨송하니 있고. 그게 유월절입니까? 그건 주술이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십자가를 망령되이 부르는 것밖에 더 돼요.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가를 때 선악과를 통해서 생명나무로 가는 것을 그대로 재현한 겁니다. 선악과가 죽음을 알려주고 생명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다는 걸 보여주는 생명, 그래서 이 생명은 인간 쪽에서 따먹을 수 있다, 없다? 인간 쪽에선 선악과 유혹을 피할 수 없고 기어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인데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생명 되시는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받은 생명은 하나님이 생명 주셨다는 생명의 증거물, 그렇지 않은 쪽은 죽어 마땅하다는 하나님께서 말씀의 엄격함을 보여주는 공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진노 받아야 될 피조물로 이렇게 분류하는 작업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나쁜 공기, 좋은 공기 그런 작업을 일으키는 그 동기를 마태복음 13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으니라” 돼있죠. 하나님의 나라는 행동이란 말이죠.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뭔가 사건이 터져 나올 때, 뭔가 움직일 때, 세상 사람과 내가 점점 더 관계가 멀어질 때, 지진 나게 만들고 관계를 강제로 멀게 만드는 액션, 그 행위의 주동자가 하나님 나라고 예수님이란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하나님 나라를 가지려고 해요. 가지면 안 돼요. 가지지 말고 하늘나라한테 내가 거기에 포착이 돼야 되지 내가 하늘나라 가지면 안 됩니다. 하늘나라가 나를 덮쳐야 돼요.
이쯤하고 난 뒤에 유월절을 본격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첫 번째 유월절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인간은 여기 변두리고 주인공은 하나님의 사건이죠. 다시 할게요. 하나님께서 분류하는데 피로 분류한다. 장차오실 우주를 만드시고 우주의 주인공 되시고 모든 우주가 지향해야 될 그 주인공이 나중에 십자가에 피 흘리기 때문에 그 피를 앞당겨서 우표로서 어린양의 그것도 그냥 어린양이 아니고 흠 없는 어린양이 피를 흘리면서 오는 사건인데 오지요.
그렇다면 유월절 사건이 사건화 되게 되면 피의 사건이 만들어지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어린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평소에 누굴 주목해야 합니까? 자기를 주목하죠. 아까 인간은 자기밖에 모른다. 자기를 주목하다가 갑자기 말씀이 사건화 되어서 오게 되면 갑자기 유월절 날 어린양에 가야 되죠.
바다에 풍랑이 일었다. 관심이 어디 있죠? ‘우리가 죽게 되었네.’ 자기만 관심 있다가 주께서 잠에서 깨어나서 ‘바다야 조용히 해. 왜 까불어 오늘.’ 하고 하시니까 그때 제자들의 관심사가 어떻게 살까가 아니라 ‘저분이 누구시기에?’라고 관심사가 예수님으로 바뀌죠.
하나님이 우리한테 손수 실제로 현실로 어떤 사태를 일으켰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그 사태가 일어난 뒤에 갑자기 우리의 관심사가 ‘예수님이 누구신가?’ 다시 한번 관심을 돌리게 될 때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손 댄 겁니다.
헌금을 할 때 하나님 어려운 가운데 평소에 만 원 하는데 교회 형편 안 좋고 해서 특별히 오만 원 합니다. 헌금을 내면 옆 사람 돈 내는 게 아니고 내 돈 내는 거예요. 설교 듣다 은혜를 받았어요.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주께서 사건을 일으키죠.
그렇다면 관심사가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이렇게 큰 은혜를 주셨구나. 양푼에 피를 뿌려서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구원받겠구나.’ 하고 감격하게 될 때 처음에 교회 올 때 내가 만 원 하는데 오늘 오만 원 합니다. 하는 그런 자기 행동이 생각납니까, 안 납니까? 안 나는 거예요. ‘아이고 아까워라.’ 이런 생각 안 나죠. 그게 바로 헌금이라는 거예요. 헌금은 내가 내는 게 헌금이 아니에요. 주께서 시켜서 주님의 돈 낸다고 여길 때만 헌금이 되는 거예요. 헌금은 돈이 아니고 액션, 어떤 주님의 행위가 담길 때 헌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헌금은 인간이 못해요. 인간은 성경해석 못합니다. 인간은 헌금을 못하고 전도 못해요. 항상 주님이 주신 힘으로 헌금케 하고, 전도케 하고, 예배 참석케 하고, 성경해석케 하는 겁니다. 왜? 우리는 기껏 죽은 자에게 불과하기 때문에. 이 죽은 자에게 사건을 일으키시는 분은 생명 주시려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10분 쉽시다.
2010-06-11 녹취 : 한윤범
관리자(IP:124.♡.87.52)
10-06-21 18:12
울산100604b출12장b
20100604b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헌금한다 할 때 2번이죠. 뭐라도 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마라를 만나면서 주님의 사건이 헌금을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마라 함으로서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헌금을 해도 죄가 되는 이유가 헌금을 나쁜 의미로 하는 것이 아니고 뭐라도 하는 것, 이걸 죄라고 지적하는 그것이 그렇게 믿어주는 행위가 의가 있기 때문에 죄라고 지적할 수 있는 겁니다.
의가 있기 때문에 그것 보고 죄라고 아주 즐겁게, 행복하게, 감사할 정도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해서 구원받는 것 아니거든요. 뭐라도 하면 이것이 아무것도 하지마라 하는 것에 의해서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 두 개가 합쳐서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 되는 거죠. 그래서 헌금은 주께서 하라 하셨는데 그것은 헌금하는 것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헌금하는 그것이 죄로 드러나게 하시는 그 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때는 헌금하게도 하시고, 설교하게 하기도 하고, 강의하게 하기도 하고 죽을 때까지 계속 써먹는 거예요.
이걸 그대로 유월절 해봅시다.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만있었습니까? 뭘 했지요. 양을 잡았잖아요. 무교병 먹고, 띠 띠고, 나갈 준비하고 식구들 모아 양고기 먹고 하는 걸 했다 이 말이에요. 이런 걸 하는 그것이 주님이 만든 사건을 발견시켜서 네가 피를 바른 것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홍해를 건너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런 사건을 유발시킨 것은 주님의 시간에 속한 문제 아닙니까.
주님의 시간이니까 그것도 주님의 시간 안에서는 주님이 하실 모든 일이 포함되는 거예요. 그 안에서 그들은 십자가를 내다보겠죠. 우리는 이미 십자가를 알고. 그런데 우리가 뭘 할 때 내 시간 안에 그대로 있는 겁니다. 내 시간과 누구 시간과의 만남? 주님의 시간과의 만남을 이게 십자가 사건이라 합니다. 피의 사건. 시간과 시간이 만나면 거기서 바로 특이한 사건, 예상치도 못한 사건.
애굽인들은 자기가 예상한 대로 살아요. 그러나 성도는 평소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하지만 그 가운데 마주쳐서 예상치도 못한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사태가 진짜 악령의 사태인지, 진짜 성령이 주신 사태인지를 그 결과를 보면 알아요. 결과를 보고 ‘주님이 누구시죠? 주님이 이렇게 하셨구나.’라는 결과로 열매가 나오면 성령이 와서 정면으로 부딪친 거고, ‘역시 나는 잘 났어?’라고 나오면 악령이 부딪친 사건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늘 성도한테는 그런 부딪침이 있으니까 뭐라도 하세요.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사건이기 때문에. 놀면 뭐 합니까? 뭐라도 하면서 그 안에서 주께서 이미 다 이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유월절 사건을 정리해봅시다. 어린양이 있어서 어린양을 환풍기, 통풍기라 하죠. 어린양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항상 인간은 나만 쳐다보다가 사건이 일어나니까 갑자기 어린양이 우리를 살려냈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이게 첫 번째 유월절에 그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어야 될 믿음이었습니다. 어린양 때문에 산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어린양 때문에 우리가 살았구나.
그렇다면 어린양을 통과하고 난 뒤에 전에는 어린양이 왔다는 것은 바로 죽음이죠. 어린양이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면 결국 우리는 이미 죽은 자가 돼요. 여기에 죽은 자가 되게 하는 늘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드는 우리 속에 유일하게 산 자가 있는 거예요. 이 산 자를 유월절 끝나고 난 뒤에 장자, 맏이. 이 맏이는 죽은 자 속한 맏이가 아니고 누구 것이냐 하면, 여호와의 것이죠.
하나님의 것이 내 안에 개입이 되어서 나는 하나님의 개입된 것으로 인하여 죽을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그것을 보여주는 관계가 장자와 장자의 덕을 보는 식구들의 관계입니다. 이 장자가 로마서 8장에 나오잖아요. 예수님은 우리의 맏아들, 장자죠.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모든 중심은 장자 중심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터지는 사건들은 이 장자와 더불어서 벌이는 사건들이죠. 이 사건에서 유월절이 되풀이 되고, 이 사건에서 제사가 되풀이 되고, 하나님의 시간이 안식일이 장자 중심으로 이뤄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장자의 특징이 한 마디로 말해서 대리, 대속 또는 책임자가 되겠지요. 이 장자를 어느 지파에서 담당하느냐? 민수기에 보면 레위지파에서 담당합니다. 나중에 장자가 레위지파에서 유다지파로 바뀌어요. 어떻게 한 번 레위지파로 갔으면 쭉 가야지 유다지파로 바뀌는 이유는 뭐냐? 그리고 바뀌는 와중에서 요셉지파는 왜 껄떡거리다가 빠지게 되느냐? 그 내력을 설명을 하려면 몇 시간 걸려요. 하지만 성경에서는 시편에 보면 아주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유다를 선택했다!!
선택할 때 초반부터 선택을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앞에 몇 가지 선택한 것을 통해서 선택해놓고 버려버리고, 선택해놓고 버려서 최종 선택한 것이 딱 나오죠. 화투, 노름판을 통해서 설명해야 되는데. 전부다 패를 쥐고 있단 말이죠. 정낙원 목사님이 하나교회에서 장땡 이야기했는데.
전부다 시끌벅적 이라. 이쪽 A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노름판에 떼돈 벌라고 오늘 선택한 모양이라.’ ‘왜?’ ‘안 가르쳐줘.’ 장땡이 웃고 있는 거예요. 본인은 오땡이 되는 모양이라. 난초 두 개. 그 다음에 시끌벅적. ‘하나님께서 난 선택한 것 같아. 미치겠어, 정말 미치겠어.’ 표정관리가 안 되서 좋아서. 보니 국화 두 개 들고 있어. 구땡인 것 같아. ‘너부터 까라.’ ‘자 하나님 은혜다. 오늘 판 다 싹 쓴다.’ ‘손떼라.’ ‘뭔데? 난 오땡!’ ‘죽어라.’ ‘넌 뭐고? 너 까봐라.’ ‘국화 두 개, 구땡! 다 쓴다.’ ‘손떼라.’ ‘뭔데?’ ‘나? 장땡이다.’
결국 장땡의 위력은 오땡이나 구땡이 먼저 나와줘야 돼요. 그렇다면 오땡을 쥐고 있고 구땡을 쥐고 있는 사람은 뭐냐 하면, 오땡을 쥐었을 때 인간의 죄, 구땡을 쥐었을 때 인간의 죄를 함유하고 포함하고 있는 겁니다. 왜 오땡이나 구땡이 있어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는 인간의 죄가 무르익지 않았어요. 인간의 죄는 간음죄, 살인죄 이 정도는 오땡 정도 죄밖에 안 됩니다. 살인한 건 한 구땡 되겠다.
진짜 죄는 사람이 짓고 싶어도 못 져요. 메시아가 와서 메시아를 죽여 버릴 때 진짜 장땡의 죄입니다. 장땡의 죄에 장땡의 구원이 주어지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잔소리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잖아요. 오른 눈을 빼버려라. 오른 눈 빼고 구원받는 사람 많이 있어요. 독한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오른 눈 빼도 구원 못 받아요. 앞에 오땡, 구땡 이야기해요. 그러면 바리새인들 구원받으려고 까부는 게 백날 해도 안 돼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원수 된 자요, 경건치 않은 자요, 죄인이에요. 왜 그런 주변에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일방적인 선택된 자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된 자에게만 하나님의 의가 제공이 됩니다. 그러니까 선택된 사람은 오땡, 구땡을 구경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율법적인 행위를 자랑할 수가 없어서 심지어 내 자신이 주님을 죽였던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걸 마지막 장땡을 잡은 사람이 사도 바울인데 그 사람 뭐하는 사람입니까? 율법에 흠 없는데 그것으로 예수 믿는 사람 다 잡아 죽였잖아요. 스데반 죽일 때 거기 증인으로 섰고. ‘걱정하지 마라. 날 믿고 스데반 집사 죽여도 내가 있잖아요. 경찰서서장 다 아니까 마음대로 돌 던져. 내가 증인이잖아.’ 해서 증인 노릇한 사람이에요. 남보다 율법으로 더 열심이었던 사람입니다. 장땡의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을 장땡의 구원으로 구원해버렸으니까 주님 피 앞에서 죄 용서받지 못할 죄는 더 이상 없는 거죠. 어떤 죄도 다 용서받죠.
그걸 사도 바울은 십자가 사건이 과거에 있는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다고 해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 십자가 사건이 한물 간 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만이 계속해서 이뤄질 때 그 피의 사건이 하나님의 새로운 분류, 진짜 이스라엘과 애굽 같은 사람과 분류하는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 중심은 어린양이 계시죠. 그래서 성경의 진짜 중심은 예수님 중심이고 십자가 피 중심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복습해봅시다. 생명은 뭐라고요? 피. 피는 생명과 죽음과 만나야 생김. 그래서 모든 인간의 역할은 죽는 역할이냐, 생명의 역할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중심의 역사를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안식일을 줬지요. 안식일 이미 시작과 종말이 끝났습니다. 인간은 끝을 싫어해요. 한번 만들어줬으면 계속 살게 하지 왜 이러냐고 나오죠. 하지만 하나님은 끝이에요.
이 끝은 예수님의 시간을 위한 피조물이지, 피조물을 위한 피조물은 아니에요. 우리가 복음을 위한 피조물이지 날 위한 복음이란 없습니다. 애당초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복음을 위한 내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위한 내가 되기 때문에 이 안에서 제사지내죠. 제사가 우리한테 주어지게 되면 죽음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만남이죠.
이걸 정리하면 하나님은 죽음 속에서 만난다. 어떤 죽음? 흠 없는 분의 죽음. 그래서 부처나 공자는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훌륭하고 똑똑하고 아는 게 많아도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고. 왜 안 되느냐? 흠 없는 양이 아니기 때문에. 우표가 달라요. 흠 없는 양 우표를 지금 12장에서 보고 있습니다. 흠 없는 양 우표를 붙임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새 달’ 새로운 시간이 돼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이 새로운 시간이 주어진다는 말이 남아있는 앞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무슨 의미냐 하는 거예요. 새로운 시간이 주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어디서 분류됐습니까? 애굽에서 나왔죠. 그러면 이렇게 그렸습니다만 수직적으로 그리면 이렇게 입체적이 되겠죠. 볼록 튀어나왔다고. 1층은 애굽이고 2층은 이스라엘이고. 이해하시겠습니까? 불록 튀어나온 거예요. 볼록 튀어나올 때 하나님의 시간이 개입되었지요.
그러면 앞으로 유월절 이게 천사백 몇 년 경이라 하는데 확실한 게 아니니까 그냥 B.C. 1400년경, B.C. 1000년경, B.C. 500년경 할 때 하나님의 시간이 개입되려면 이게 원판, 모델이 되어서 항상 애굽에서 세상에서 볼록 튀어나오는 방법이 되풀이 되겠지요. 튀어나온다는 말은 이스라엘과 애굽이 계속해서 차이가 나겠지요. 차이가 나려면 이스라엘은 뭐고 애굽은 뭔지 둘 다를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시간의 개입해야 된다는 게 무슨 의미냐 하면, 앞으로 이스라엘의 볼록한 걸 들고 B.C. 1400년, 1000년경 계속 가면서 볼록, 볼록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건이 차이가 나면서 튀어나오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튀어나오게 되면 애굽은 이방인이 되겠죠. 이스라엘 이방인 되겠죠. 나중에 보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게 튀어나오죠. 참 이스라엘 또는 가짜 이스라엘. 그런데 참 이스라엘 쪽에서 또 튀어나오겠죠. 계속 남은 자를 향하여. 계속 또 튀어나오겠죠. 이렇게 되풀이 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렇게 되풀이하게 되면 이스라엘 여기서 뭐가 떨어져나가느냐 하면, 애굽이 떨어져나가겠죠. 여기선 가짜 이스라엘 떨어져나가겠죠. 여기선 가짜 선지자. 떨어져나간 이것들이 바로 마지막 최후의 죄를 향하여 달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 죽일 때 주동자가 누구였습니까? 베트남 사람이었어요? 라오스 사람이었어요? 누구였습니까? 유대인이었잖아요.
유대인에서 누가 볼록 튀어나왔습니까? 예수님이 튀어나왔죠. 마지막 최후에 볼록 튀어나온 게 예수님이라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바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이죠. 죽은 자는 누구한테 해당됩니까?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는 드디어 박수치면서 발각되는 거예요.
이근호라는 내 속에서 나는 죄인 되고 볼록 예수님이 튀어나오면 그러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주께서 나한테 피를 흘리시고 죽었잖아요. 그러면 내가 믿어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받죠. 나는 믿기는커녕 주님을 ‘저리가’ 하고 밀어내니까. 그렇다면 구원받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일방적으로 찾아오심으로 구원받죠.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마라 이 말이죠. 네가 뭘 해도 그 한 것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그게 신약 시대에 밝혀져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다. 그래서 살아난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죽였다가 살리신 이를 위해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걸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죠.
구약은 이처럼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마지막 최후의 죄 덩어리로 달려가게 만드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게 뭐냐 하면, 결국 여기선 모르지만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의 대변자죠. 그래서 이스라엘을 선택했다는 말은 모든 인류를 이스라엘을 대변자로 삼아서 선택한 게 돼버려요.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선택했다는 말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질 사항을 이스라엘에게 대표적으로 전부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말은 결국 나머지 모든 국가도 다 멸망한다는 거예요.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유대인에 의해서 메시아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어떻게 보면 한 민족의 사건, 에피소드, 아주 작은 일이거든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이스라엘 손에 죽었던 메시아라고 우기는 어떤 미치광이의 죽음으로 보지 않고 이게 어디까지 파급되느냐 하면, 전 세계의 운명을 다 파급한다는. 그 말은 이스라엘은 전 인류를 대변하는 자로서 메시아를 죽인 것이 되는 거예요.
저는 하나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이제 그 기능을 바로 교회가 하자. 교회는 우리를 대표해서 예수님을 죽이는 장소로 들통 날 때 비로소 진짜 교회가 숨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교회를 심하게 모독함으로써 교회를 사수하자. 이 말은 머리 되시는 분이 살아있으면 몸은 아무리 변동돼도 머리만 이상 없으면 교회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교회에서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성전에서 일곱 촛대를 관리하시는 분이 관리를 하다가 엎어져서 촛대 한 개를 부러뜨려서 여섯 개 남아서 ‘내가 일곱 교회 지키려 했는데 내가 실수해서 하나 부러졌구나. 할 수 없지.’ 이런 주님이 아니죠.
성전에서 계속해서 일곱 교회를 지킨다는 말은, 사일로, 사료 부어놓고 나오게 하는. 성전에서 일곱 촛대를 거느리고 있잖아요. 이것이 밑에 내려올 때는 피를 묶음, 여기서 사건이 돼요. 사건이 일어난 곳이 교회가 되죠. 그러면 이 일곱 교회는 죄인이 돼야 되고, 이 죄인과 피의 바다에서 진짜 교회는 이렇게 있단 말이죠. 그래서 일곱 교회라 하는 것은 피 사건을 재현하기 위한 현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야기했죠. 에베소 교회를 뭐라고 나무라는데
인간이 죄 짓고 싶어서 짓습니까? 어쩔 수 없이 짓습니까? 어쩔 수 없이 짓습니다. 죄 안 질 수 없어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부 싸움할 때 안 해야지 해서 안 하게 됩니까? 에이 하잖아요. 한 번 시작하자. ‘나도 안 하려 하는데 성질 돋우니 하잖아.’라고 하죠.
사람이라 하는 것은 환경이 지배하지 자기가 환경을 지배하지 않아요. 자기 마음대로 환경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환경이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인간입니다.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미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죄 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것을 주께서 이미 완성하셔서 교회되게 하시는 거예요. 따라서 교회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한테 죄를 지적하잖아요. 지적하는 귀한 자리가 일곱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껏 지적 받아야 돼요. 그것이 그 뒤에 생명 주시려고 마음껏 지적하시는 겁니다. ‘내가 하지 말라 했잖아’ 이런 식으로.
정리하면 유월절 사건은 애굽과 도드라지게 이스라엘이 튀어나와서 계속 그 식들이 그 다음에 계속 이뤄지는 반복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12절에 나옵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이렇게 해서 피를 보고 넘어가는 이게 표적이 되고 도드라지는 거예요.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과 애굽이 있죠. 여러분, 애굽이 떨어져나가는 게 아닙니다. 살아있어야 돼요. 애굽은 이스라엘에 유월절 사건이 터지니까 이 사람들 애굽의 장자가 죽은 걸로 보잖아요. ‘아이고 왕궁에 있는 내 아들 죽었구나. 집에 있는 내 아들 죽었구나.’ 이걸 해석을 애굽의 모든 신들이 죽은 거죠.
그렇다면 이것이 계속해서 다음 세대에 반복된다면, 어린양의 피와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모든 신들의 싸움이죠. 애굽 신이 여기서 끝납니까? 또 나오죠. 계속해서 역사가 끝나는 한 나올 거예요. 마르둑, 바벨론 신들이 계속 나오죠. 심지어 마지막에 누구냐 하면, 여호와 신이죠. 여호와 신과 여호와 신이 대결해서 여호와 신을 죽여 버리잖아요.
인간이 생각하는 여호와와 예수님이 생각하는 여호와는 아버지고 인간은 여호와 믿고, 예수님은 아버지 믿고. 그래서 여호와 믿는 사람이 ‘아버지 같은 소리하고 있네.’ 하고 죽이잖아요. 아버지하고 나하고 하나라 하니까 죽이잖아요.
여호와라고 해서 그게 참 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본 자가 아버지를 본 자라 하면 끝난 문제에요. 예수님을 보이는 사건이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안 계십니다. 반드시 예수님을 앞장세우는 사건만이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이고,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고 우회해서 하신 하나님, 신, 절대자, 여호와 언약의 신 그거는 말짱 애굽 신이에요. 그걸 도드라지게 분류시키는 작업을 성령께서 지금도 계속 하고 계신다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