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0. 5. 28) 1강 녹취록자유게시판히브리서

광주 강의(2010. 5. 28) 1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24)

광주 강의(2010. 5. 28) 7-1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선지서를 읽는 방법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찍 오신 분을 위해서 보너스로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읽어보세요.” 라고 하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라고 얘기했습니다. 두 가지가 있어요. 에스겔 당시의 사람이 에스겔을 볼 때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과 신약 성도가 에스겔을 볼 때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서로 의미가 다릅니다. 신약 성경에는 죄가 드러난 상태에서 모든 것을 다 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악을 다뤄요. 이 두 개를 합치면 죄악인데, 구분하게 되면 악이란 것은 법이 있던 시절에 악이 나와요. 만약에 ‘화평교회 모일 때마다 회비 만원 냅시다.’ 라고 법이 정해지면, 회비 안 내는 사람은 졸지에 나쁜 사람이 됩니다. 회비 내는 것이 법으로 정해지기 전에는 회비 안 내도 악이 등장하지 않는데, 법이 만들어지니까 법을 어긴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됩니다.

악이 등장하기 이전 무엇이 먼저 등장합니까? 법이 먼저 등장해서 법에서 벗어날 때 악이 발생되지요. 그런데 신약 성경에는 이 법이 없어지지요. 그러면 위법도 없어지고 악이 없던지 악이 죄에 붙던지 그렇게 됩니다. 제가 이런 말 하면 ‘야, 진짜 신약은 멋지다. 참 신약은 좋은 시절이다. 법이 없으니까 신난다.’ 이렇게 되겠지요.

그러나 뭐가 남아 있어요? 법은 없어도 죄는 남아 있어요. 정확히 말해서 구약 때 감추어진 죄가 구약 때는 법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너는 악한 자야. 너는 위법했어.’ 이런 차원에서 다루다가, 신약에 오게 되면 ‘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너는 죄인이야!’ 오히려 더 강렬해져요.

그동안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위반하면 악이 되고, 그 악이 어떤 의미에서 진짜 죄를 감추고 있었는데, 신약에 와서 법이 없다고 하니까 우리는 ‘야, 이제는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되네.’ 라고 하는데, 그 때 바로 ‘너 이제 들켰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학생들이 시험을 치는데 감독 선생님이 있으면 컨닝이 생기죠. 그러면 감독 선생님이 없는데 컨닝이 성립 됩니까? 컨닝이 적발 됩니까? 안 되는데, 양심 불량이 생기겠죠. 컨닝은 안 들키면 넘어가요. 그런데 양심불량은 아무에게도 안 들켜도 죄가 됩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 율법이 제거됨으로 말미암아, 히브리서에서는 패한다고 했으니까 제거라고도 할 수 있죠. 신약 시대에 율법이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우리가 법 지켜서 ‘나는 나쁜 사람 아닙니다. 시험 칠 때 컨닝 안 했어요.’ 하는 그 학생도 결국은 신약 시대에는 죄인으로 등장합니다. ‘너는 너의 죄 값으로 죽어야 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저는 컨닝 한 번도 안 했어요. 왜 하나님이 저를 죽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여전히 법적으로 악의 입장에 있겠지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오실 분들이 다 오셨으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평소에 ‘나는 법대로 살았으니까, 양심대로 살았으니까 악한 자가 아니다.’라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율법이 온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지요. (롬5:20)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풀이하면, ‘나는 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법을 어길 경우에만 악한 자고, 법을 지킬 경우에는 악한 자가 아니야.’ 라는 이 자체가 죄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들었던 것은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를 더욱 더 많이 짓게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 이야기를 유대인들이나 양심적인 사람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이것이 무슨 말인지 모를뿐더러, 뭐라고 핑계를 대는가 하면 ‘내 양심에 비추어서 한 점 부끄럼이 없다.’

‘양심대로 사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되는가?’ 라고 그들이 반문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양심이란 것을 주었다는 그 자체가 인간은 평소에 양심으로 죄를 가려왔다.’

인간은 모든 행동을 할 때 자기도 모르는 진짜 주인공 되는 죄는 가린 채 ‘바르게 사는 것이 내 일생의 염원이다. 나에게 시비 걸지 마라. 나는 성경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 많아요. ‘예수 믿고 착한 일만 하는 나보고 교만하다고 하지 마라. 나는 착한 일하는 것이 취미니까 날 건드리지 마라.’ 이런 사람이 의외로 많고, 교회 안 다니는 사람 중에도 ‘내 양심이 어느 정도 착한지 측정해 보겠다. 내가 어디까지 착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 나는 불쌍한 이웃을 위해 간도 떼서 줬다(간 이식). 이런 나에게 나쁜 놈이라고 하면 그놈은 정말 나쁜 놈이다.’

이런 것까지 주님이 이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할 때 현재 인간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래. 어떤 마음가짐이지? 그러면 내가 네 마음가짐 그대로 해 줄게.” 라고 법을 주신 겁니다. 이 말은 이미 인간 속에는 율법 주기 전부터 양심과 나름대로의 선악이 있어서 그것으로 자기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는 모든 일을 다 알지 못하는 거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매를 맞고 있으면서도 매 맞는 이유를 몰라요.

에스겔 5장 13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히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가 다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다’는 것을, 막상 징벌을 받은 이스라엘은 동의합니까, 동의 안 합니까? 동의 안 하지요. 사람이 매를 맞아도 이유를 알고 맞아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는 율법을 안 지켰다고 때리니까, 지금 그들은 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율법대로 산다고 하는데 때리니까, 그것도 자기가 잘못한 것 이상으로 징벌이 오니까 그들은 때리면 때릴수록 항변을 하겠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매를 맞아도 싸요.

지금까지 길게 이야기한 것을 간추리면, 주님께서 잘 노는 자들을 때려요. 그들이 맞으면서 “왜 때립니까?” 하니까, “그러니까 너는 맞아야 돼!” 하면서 또 때리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때리는 이유를 모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죄’라고 합니다. 유대인들도 모르는데 우리가 알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역시 몰라요. 지금 강의의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짓더라도 우리의 죄는 우리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모르니까 회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회개도 안 되고, 죄도 모르고. 남는 것은 계속 얻어맞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 보면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살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지요. 우리가 땀을 흘리면 나중에 좀 편하게 지낼 수 있습니까? 아니죠. 종신토록 수고해야 되지요. 그러니까 사람은 끝까지 죽어가면서 고생해야 될 이유도 모르고,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평생을 멍청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방법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이 말씀은 우리한테 시비를 거는 거예요. “주님이여 저는 소경이거든요.”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 말 듣고 칭찬합니까? “이게 어디서 신앙 있는 척 해?” 라고 꾸중하실 겁니다.

하여튼 주님은 우리 쪽에서 나오는 어떤 것, 아양을 떨고 비위를 맞추고 해도 용납 안합니다. 이 모든 것을 죄에서 나온 것으로 봐요. 이것은 뭐냐? 우리가 요령을 부려서 내 쪽에서 나온 것으로 나를 구원하고, 내가 징벌 안 받고, 고생 덜하고 편하게 살려고 수작 부리는 것으로 봅니다.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래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인으로 보십니다. 주님이 죄인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그냥 죄인으로 받으면 돼요. 문제는 우리가 왜 죄인인가를 찾아가는 것이 문제가 돼요. 찾아서 뭣 할 건데요? 찾는다고 죄인이 덜 죄인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에스겔을 보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 죄인이야!” 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방비한다든지, 관리한다든지, 조치한다든지 해서 매를 안 맞는 쪽으로 가려고 해요.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을 주님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미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 앞에서 인간은 죄인입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의논한 것을 우리가 마음대로 개입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그냥 두 분의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너는 죄인이야!” 하면, 이유도 영문도 따지지 말고 그냥 죄인으로 살면 그 사람이 의입니다.

내가 내 운명에 손대지 마세요. 조치하지 말라니까요. 이게 신약에서 십자가를 아는 입장에서 선지서를 보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선지서를 율법으로 봐요. 율법으로 보니까 죄는 전혀 모르고 무엇이 자꾸 의식됩니까? 악. 악이 의식 되니까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어떻게 오해를 했는가 하면,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벌을 받았기에 여기서 우리가 회개하고 이 법대로 순종하면 더 이상 징벌이나 악은 없을 것이라고 나섭니다.

이것을 바로 하나님이 노린 것예요. ‘그것이 바로 너를 너 자신이 관리하는 죄다.’라는 거예요. 이게 왜 죄가 됩니까?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서 피를 흘려 자기 백성의 죄를 씻으려고 작정을 했어요. 이것은 이미 창세전에 결정한 사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자꾸 율법으로 바꿔서 이해해요. 복음 안에서 우리는 그냥 죄인 되면 됩니다. 그러면 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의논하신 대로 하면 돼요. 참 쉽죠? 이번 지방선거에서 8장 찍으면 돼요. 많다 적다 따질 것 없어요. 이것은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고 저 위에서 정했어요.

죄인 되게 하는 것은 누가 결정했습니까? 주님이 결정했어요. 죄인을 자신의 피로써 의인 되게 하는 것을 누가 결정했어요? 주님이 결정했어요. 여러분은 죄인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세요. 이 죄는 오직 예수님 피로만 용서되는 것도 그냥 받으시고.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그냥 안 받아들이고 죄인 됨을 율법 식으로 이해를 하는 거예요. “아, 이래서 죄인이구나! 그렇다면 예수 믿고 이런 짓은 안 해야지.” 그러면 이것은 뭐가 됩니까?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피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죄인을 의롭게 하는 데는 예수님의 피만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인간의 고운 양심, 절제된 행동, 겸양의 말 이런 것을 막 집어넣는 거예요.

설교나 강의를 하면서 느끼는 것인데, 듣는 분들이 복음을 율법 식으로 이해한다는 징후가 참 많이 드러나요. 주님을 믿으면서 주님에 대해서 생각한 자기 결정을 자기가 믿고 있어요. 주님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자꾸 “미안합니다. 앞으로 조심할게요.” 이렇게 나와요. 조심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앞으로 잘 하겠다는 그것이 더 미운 거예요.

죄인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보인데, 그 통보를 내가 내 행위를 가미해서 처리해야 될 그런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약의 유대인들이 이런 짓을 했어요.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시니까 하는 말이 “우리는 금식하고 구제하고 기도하는데 당신은 죄인들과 어울려 술이나 마시고 돌아다니느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 나는 너희들과는 안 놀아.” 이렇게 했어요. 너희들이 최선을 다해 반듯하게 살고자 하는 그런 노력과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선지서를 보게 되면 율법으로 해석하게 되고, 신약에서 해석하면 이것은 하나의 복음이 되는 겁니다. 복음이 된다는 말은, 내가 죄인 된 것을 기뻐하며 춤을 춰야 됩니다. “나는 죄인이다.” 하면서 춤을 춰야 돼요. 내가 죄인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애썼는데, 성령을 받으니까 비로소 내가 더 이상 나에게 손 댈 필요 없이 완벽한 연탄, 처음부터 끝가지 전부 새까맣게 된 거예요.

새까맣게 되었다는 것이 비로소 제대로 하나 건진 겁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본 거예요. 여러분이 사진관에서 사진 찍어서 새까맣게 나오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보지요? 사진사가 잘못 찍었던지. 그런데 그게 정상입니다. 사진 제대로 잘 나온 거예요. 사진에 미소가 나오고 이러면 안 돼요. 빨강, 노랑, 파랑 이런 게 없어요. 무채색으로 나와야 돼요. 그냥 새까만 거예요.

새까만데 새까맣게 나왔던 그것을 누가 가져갑니까? 내가 가져갑니까? 예수님의 피 묻은 손으로 우리를 데려가니까, 앞에는 피 흘린 분이 가고 우리는 그분에게 붙잡혀서 새까맣게 되어서 따라가는 이 즐거움이 복음을 아는 즐거움입니다.

여러분이 새까만데 더 새까맣게 칠해도 표시 안 납니다. 그래서 죄 짖지 말아야 돼요. 왜? 표가 안 나니까. 이미 완전한 죄인인데 거기다가 죄를 두 개, 새 개 더해봐야 표도 안 납니다. 사람이 무슨 표시가 나야 죄 지을 만한데 표시도 안 나는데 왜 죄 지어요?

오늘 이곳에 오다가 프로야구 한화와 기아의 시합을 TV로 보는데, 광주 경기장에서 하는 경기라서 전부 기아를 응원하는데 혼자 “한화 잘한다.” 하면서 한화를 응원하면 사람들이 째려보지요. 이렇게 되면 ‘아, 내가 졸지에 죄인 되었구나!’ 아는데, 한화 선수가 안타를 치니까 전부 다 일어나서, 심지어 기아 코치까지 일어나서 “한화 최고다.” 이렇게 나올 때는 자기가 한화를 응원해도 그것은 표도 안 나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죄를 짓고, 모든 목사가 죄를 짓고, 모든 집사가 죄를 짓고 새까맣게 된 입장에서 구태여 우리가 죄 짓지 맙시다. 표도 안 나요. 표가 나야 죄 지을 맛이 나는데 다 짓고 있는데. 만약 자기는 안 짓고 남이 지으면 정죄하게 되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불쌍해요. 왜 불쌍한가 하면 허장강이라. 젊은 사람들은 허준호 아버지 모르지요? 나왔다하면 나쁜 짓만 하는 그런 영화배우 있었어요. 허장강은 인류를 대표해서, 유대인은 인류를 대표해서 ‘왜 그들이 멸망당해야 하는가?’를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유대인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하면, 성전이 있습니다. 에스겔의 초점은 성전이 멸망하는 거예요. 제가 적어 볼게요. 하나님이 임재하신다. 어디에 임재하는가 하면 이스라엘 안에 임재해요. 원래는 이스라엘 안에 임재하지 않고 어디 있었습니까? 시내산 위에 있었어요.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을 모세가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면서 그 율법 위에 하나님이 임재하겠다는 거예요.

그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 안에 있는 이 돌판은 깨진 거예요, 안 깨진 거예요? 처음 돌판입니까, 아닙니까? 깨진 후의 돌판이죠. 깨진 후의 돌판이니까 하나님의 임재는 이것을 이미 확정지었어요. ‘너희들은 이미 언약을 어긴 자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이죠. 율법은 이미 깨어졌는데 대 속죄일에 피를 바르면 살 수 있는 거죠.

이 율법 정신이 외부로 방출됩니다. 레위기는 오는 여름수련회에 강의할 내용인데 미리 당겨서 잠시 말씀드리는 겁니다. 방출되는데 방출된 이것이, 율법이 깨어진 것이고, 깨진 것이 어떻게 용서 받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한 가닥 한 가닥의 사람들이 모아진 거예요. 이 사람들이 모아진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는 일은 뭡니까? 이미 하나님이 임재해 있는 중앙 성소, 깨진 율법을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이 과정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실재 생활은 누가 해야 됩니까? 인간이 해야지요. 인간들이 이 내용물을 보여주면서 한 가닥씩 나오는 거예요. 이 중 어떤 사람은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맞아 죽고, 등등 여러 사람들이 있겠지요.

이 전체가 이스라엘이죠. 그러면 이 한 사람, 한 사람은 결국 율법에 의하면 죄인이 되겠지요. 죄인이 되는데 이 사람들은 율법을 보고 뭐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죄인으로 보지 않고 악인으로 보는 거예요. 죄와 악을 구분하는 방법은, 죄는 감춰져 있습니다. 왜? 십자가 오기 전까지는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사람들이 죄라고 하는 그것은 죄 아니에요. 그건 죄가 아니고 악입니다. 사람이 악이 있을 때는 이방인들은 양심에 비추어서, 유대인들은 율법에 비춰서.

그런데 이 율법 해석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 해석이 아니고, 양쪽 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 본성에 의해서 이방인은 “아이고, 하나님 내가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했습니다.” 유대인은 “아이고, 하나님 내가 율법에 어긋나는 짓을 했습니다.” 이래요. 인간들이 죄는 모르고 악만 생각하죠.

악만 생각해놓고 ‘내가 벌 받는 것은 나쁜 짓해서 그렇다. 벌 안 받으려면 율법을 지켜서 착한 일하면 이런 징벌은 안 올 것이다.’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그 자체가 진짜 죄는 모르고 선악과 따먹은 그 허접스런 사고방식입니다. “다시는 내가 죄 안 지어야지. 전에 내가 십일조 한 번 안 냈더니만 세 배로 돈을 손해 봤어. 이제는 꼭 십일조 해야지.” 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내 몸에 불리하냐, 유리하냐? 내 앞길이 잘 풀리는가, 안 풀리는가? 라는 쪽으로 생각하고, ‘법만 주시면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이게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목사가 하는 일이 뭡니까? “여러분들이 말씀 안 지쳐서 벌 받았습니다. 정신 차리고 회개하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이런 짓을 누가 했는가 하면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어요. 했는데 그렇게 하면 내 안에 있는 성소가 꿈쩍합니까? 감동 받습니까? ‘참 훌륭하다.’고 합니까? 아니죠. 아니지만 여기는 죄가 있고 여기는 악이 있어요. 아직 죄는 몰라요. 인간이 기껏 아는 것은 악뿐입니다. 선악과 따 먹은 후에는.

그런데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만나요. 이방민족은 양심은 있어요. 이것이 그들의 율법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신을 두려워하지요. 그런데 뭐가 없어요? 죄를 알고 있는 진짜 임재는 하지를 않았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똑같은 놈들이 만난 거예요.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전쟁할 때는 사실은 똑같은 놈들이 만난 거예요. 만나서 서로 신(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데 전쟁의 승리는 이들의 행위와 관계없이 하나님이 붙여주심에 이방인들은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물러가지요.

언약 때문에 물러갔는데 이스라엘은 오해하기를 마치 자신들이 바르게 살아서 물러간 것으로 생각하지요. 그러면 다시 하나님은 이방민족을 쳐들어오게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켜요.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 나라에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많은 양이 있는데 그것은 그냥 두고 자기 머슴의 한 마리뿐인 양이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다윗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나라에 그런 나쁜 놈이 있다니? 손해를 끼친 자에게 4배로 갚고, 악을 행한 자를 죽여라.’고 합니다. 이게 뭡니까? 이것이 바로 법을 어기면 악이 되고, 안 어긴 다윗은 아주 착한 사람이지요.

그럴 때 나단 선지자가 뭐라고 합니까? ‘그런 짓을 한 자가 바로 당신이다.’ 라고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다윗은 선과 악(죄가 아닙니다) 입장에서 자기 딴에는 공정한 재판을 한다고 했는데 막상 본인은 뭘 몰랐습니까? 선, 악 이 자체가 죄라는 것. 내가 처음부터 새까만데 마치 선악을 분별하면서 양심대로 삶으로 말미암아 조금은 하얗다고 여긴 그것이 바로 죄인 줄 알고 뒤늦게 깨닫고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으며, 주께서 원하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상한 심령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지요.

비로소 다윗은 죄를 안 겁니다. 그 죄를 알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하면 특징이 뭐냐 하면, 새까만 인화지에 내 모습이 등장하면서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립니다. ‘착해도 죄인인 것을 왜 몰랐을까? 내가 신장 떼 줘도 죄인 것을 왜 몰랐을까? 설교해도 그것이 죄인 것을 왜 몰랐을까? 전도하면서 굶고 전도해도 그것이 죄인 줄 왜 몰랐을까?’ 여기에서 오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

강의 다시 합니다.

우리가 죄인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드러내기 위해서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이미 결정한 사항입니다. 인간을 죄인 되게 하기로. 그 결정한 사항을 처음으로 하나님이 임재하니까 ‘우리는 언약을 깨드린 죄인이구나.’를 알았단 말이지요. 그것을 알면 그 다음부터는, 내 힘으로 죄인인 것을 안 게 아니지요? 그러면 그 치료가 되는 의도 내 힘으로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이미 죄인 되게 하신 그분이 죄인 되게 하실 때는 무엇을 이미 전제로 한 것입니까? 이미 피로 의인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죄인 되게 했다는 사실까지 완제품으로 수입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죄를 보고,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죄인 여기 있나이다.’ 하고 나왔을 때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 뭡니까? 이 피로 말미암아 네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의인 되었을 때, 다윗이 고백한 ‘주의 은혜로 이 예루살렘을 세우셨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여러분, 이 복음 듣고 마음이 안 편합니까? 평화, 평화로다. 죄인 되는 것도 내가 손댈 수 없고, 의인 되는 것도 손댈 수 없고, 그냥 선물로 주시고, 그것을 눈을 떠서 알게 된다는 이것이 언약에 내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그것을 실천해 봅시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의 성전이 있지요. 그러면 이 머리까락 안에 달린 게 누굽니까? 오 목사님 여기 있고, 김 집사님도 있고, 우 집사님도 있고, 저도 있고 이렇게 쭉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만 안 두지요. 이방인들을 만나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100% 깨지게 만들지요. 그러면 성질이 나고 화가 나지요. “주여,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뭐가 잘못 되었는데 --’ 라고 묻는 이것이 악이잖아요. 이미 선악의 차원이 아니라니까요. 그저 주시는 생명나무 차원입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선악 차원에서 모든 성경을 보는 거예요. “아이고, 주님도 쩨쩨하게 성경 며칠 안 읽었다고 이런 벌주시나? 더러워서. 그러면 읽으면 될 것 아닙니까?” 하면서 ‘빨리 이 재난을 모면해야지.’ 이렇게 나오는 것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율법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성질부리다가 갑자기 적이 물러가더란 말이죠. 물러가는데 그것은 내가 착해서 물러간 게 아니고, 내가 누구냐를 다시 한 번 확인하도록 주님께서 일부러 이방인들을 우리에게 붙여준 거예요. 우리가 잊어버렸던 그 복음을 회생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방인들이.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놓고 마치 내가 착해야 복 받고 나쁜 짓하면 벌 받는 것처럼, 또 내가 나를 관리하는 것. 이런 짓을 또 범한 거예요. 애가 아픈 것도 내가 기도 안 해서 그렇고, 남편 사업 안 되는 것도 내가 헌금 빼먹어서 그렇고 ---. 혼자 소설을 써요.

그런데 이런 모습을 주님이 빙긋이 웃으면서 보시는 겁니다. 연탄에다 재 뿌린다고 더 검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미 구원 받았는데 뭘 한다고 힘들게 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복음이 믿어지면 우리는 단독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 머리카락 뒤에 주님이 있거든요. 주님의 의가 되어서 주님의 의의 종으로써 ‘주님이 이런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자랑하라고 살게 하신 것을 다시 한 번 짧은 순간이지만 느끼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방인들과의 차이점입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어려운 부분에 들어가 봅시다. 먼저 질문부터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개입시켰습니까? 창세기 1장에서 율법도 없을 때, 아직 선악과 이야기가 안 나왔을 때 무엇이 개입되었습니까? 시간입니다. 제가 강의 들어가기 전에 어렵다는 말을 했는데 왜 어려운 것인지 질문을 해볼게요.

여러분들에게 [비타 500]을 그리라고 하면 그릴 수 있지요. [액자] 그리라고 하면 그릴 수 있지요. 그러면 [시간]은 그릴 수 있습니까? 못 그리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시간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7일을 집어넣었어요. 시간을. 이것을 집어넣으니까 이것은 형상을 그릴 수가 없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시간을 통과해서는 접근하지 못해요. 그리고 시간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개나 소가 지나갈 때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창세기 2장에서. 모든 피조물을 지나가게 하고 뭘 말씀하셨습니까? 이름을 짓게 했지요. 이름을 짓는데 시간은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까?

시간은 하나님의 손에 있지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시간으로 개입했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가는 경우는 없고, 하나님께서 시간을 통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 세계는 어디에 운명이 달려 있는가 하면, 이 시간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은 어떻게 표현하는가? 이것이 오늘 본문 에스겔 5장 13장의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인간은 시간을 그릴 수 없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그릴 수 있어요. 하나님이 시간을 그리게 되면 하나님은 안식을 얻고, 마음이 시원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시간을 어떻게 그리는가? 그리고 이것이 우리한테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바로 시작과 끝, 곧 심판입니다. 사건이에요. 하나님이 언약을 할 때 반드시 시간요소를 집어넣어서 언약을 합니다. ‘만약 네가 이것을 안 지키면 너는 멸망한다.’ 신명기 31장에 나옵니다. ‘너희들은 결국은 멸망할 것이다.’

히브리서 1장 10-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멸망이라는 것은 피조물들이 모여서 반상회에게 결정한 겁니까? 아니죠. 누가 결정한 거예요? 주께서 결정했어요. 피조물은 다 멸망함으로써 주님은 영원하지요.

시간을 우리에게 표현할 때는 그 시작과 끝을 가지고 ‘너희들은 시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간을 우리가 지킬 수 있습니까? 없어요. 우리가 말씀(율법)은 지키려고 애쓰지만 시간은 느냥 되어질 뿐이죠. 우리가 해를 붙잡을 수 없잖아요. 여호수아 같은 경우에는 해도 머물게 했지만.

아침, 저녁을 우리가 조종 못하잖아요. 그처럼 우리는 끝나면 아무 소리하지 말고 멸망당해야 합니다. 멸망당하고 건지는 게 하나 있어야 돼요. 뭐냐 하면,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라고 ‘우리는 주님께 소속되었습니다.’ 그것 하나 건지는 거예요.

신약에서는 시간의 자리에다 주님을 집어넣어 버려요. 그 때부터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뭐가 중요하냐 하면, 7이 중요해요. 언젠가 너희들이 멸망할 것이다. 소멸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물 심판, 불 심판 할 때 반드시 언약을 줘서 ‘이 언약대로 안 하면 전부 다 없애버린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뭐가 개입했다? 시간을 개입시키므로 인간은 피조물의 이름 개, 소, 닭을 지을 수 있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이름을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장악하면서 시간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멸망을 이야기하고, 개인적으로는 ‘네가 그것을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해서 “따 먹고 난 뒤 몇 시간 후에 죽습니까?” 라고 물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시간을 장악하지 못해요. “1년 뒤에 합시다.” 이런 게 없어요. “정녕 죽으리라.” 하시면, ‘언제 죽는가’ 하는 것은 누구 소관입니까? 시간은 하나님 소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필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때에 죽이는 거예요. 그러면 그냥 인간은 그 때에 죽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아담은 시간을 느끼는데 ‘네가 종신토록 이마에 땀을 흘리다가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실 때, 인간은 뭘 느끼는가 하면 ‘지금은 살아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 사이를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 ‘시간’을 느낌으로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달랐다는 것을 시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오실 주님도 뭐로 오시는가 하면, 시간을 가지고 우리를 지배하겠지요. ‘주께서 구름타고 올라가신 그대로 오시리라.’ 우리는 이렇게 물으면 안 돼요. “1년 뒤에 오십니까? 언제 오십니까?” 물으면 안 돼요.

제가 오늘 광주에 12시에 왔어요. (광주 성경공부는 7시 30분에 시작함) 김을수 집사님과는 5시 10분에 만났어요. 그 사이에 뭘 했는가? 어떤 분을 만났어요. ‘드디어 성경을 다 뗐다’는 분을 만났습니다. 만나서 저에게 그 성경이 맞는지 검정하라고 해서 무려 5시간 동안 같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광주천 변에 앉아서.

그분이 성경을 다 뗐다는 것은 뭐냐 하면, 다니엘의 네 짐승을 풀어서 연구해보니까 현재 중국과 미국, 러시아, 또 다른 나라. 이렇게 해서 그것이 요한계시록과 맞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그러면 그 마지막 때가 언제입니까?” 라고. 그분 대답이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기 5만년 쯤 됩니까? 지금 2010년인데 지금 멸망하면 너무 짧으니까 그쯤 지나서 멸망합니까?” 하니까, 그렇게 멀지는 않다는 거예요. 그 대답하면서 제게 말려들었어요. “그러면 언제입니까?” 하고 재차 물으니까, 결국 실토하기를 2020년에 멸망한다는 거예요. 자기의 계산에 의하면. 그 대답 받아내는데 몇 시간 걸렸어요. 계속 감추고 있으니까.

누가 누구를 관리해요? 자기가 시간을 관리하지요. 자기가 시간을 관리해버리면 그것은 누가 주가 되는가 하면 자기가 주가 돼요. 그러면 자기 운명이 자기 손에 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종신토록 고생하세요.”

개인적인 시간은 죽음이 와요. 죽음이 옴으로 비로소 우리의 모든 운명은 주님의 손에 달려있지 우리 손에 안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요. 그러면 그 죽음과 그 사이에 우리의 뭐가 들어오는가 하면, 처음부터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정해준 이 시간이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죽어야 하는 겁니다. 죄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죄 짓게 해서, 죽게 해서, 죽는 것이 피조물 자기 뜻에 의한 것이 아님을, 다른 분의 뜻임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우리는 피조물의 소임을 다해야 하는 겁니다.

성경 전체를 보세요. “주께서 재림 하시리라.” ‘언제 옵니까?’ 라고 물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그것을 묻는 게 수상해요. 그걸 물으면 안 돼요. 그러면 마지막 주님 오실 때 징후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징후가 딴 게 아니에요. 바로 하나님의 시간을 안 우리 자신이 징후가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목 베일 때 그것이 하나의 증거가 되는 거예요.

이 그림 다시 안 그려도 되지요? 이스라엘에 언약궤가 있었다. 언약궤 안에 깨진 언약이 있었고, 여기에 시내산에 있던 하나님이 임재하지요. 그리고 묶인 머리까락에 문어발처럼 사람이 하나씩 달려 있죠. 바로 이 형국입니다. 여러분들이 전부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 달려있단 말이지요.

달려 있으면서 우리는 철이 없어서 내 인생 내가 관리하고 있어요. 어디에 근거해서? 율법적 안목으로 복음을 이해하면서. “주여, 저는 복음 압니다. 복 주세요.” 만날 이런 식이란 말이죠. 복음 아는 것을 마치 선(善)인 것처럼 여기면서. 복음을 알면 악인이 안 되는 줄 알고.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복음 알아도 선인 안 돼요. 우리는 의인은 되어도 선인은 안 돼요. 선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악인 되고 죄인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마주치게 해서 그 짧은 순간순간 뭘 깨닫게 하는가? 우리 몸은 날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결정하신 사항을 바깥으로 발현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죽음도 알게 만들고, 세상 멸망도 알게 하시고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을 지난 수요일에 ‘촉수’라는 용어로 설명했어요. 문어가 머리가 있고 그 밑에 촉수가 있잖아요. 그 촉수에 해당되는 것이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지뢰를 탐지하듯이 마지막 지뢰와 맞닿는, 그 검사하는 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를 보내셔서 지지지 탐지하는 거예요.

아까 임재를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길어졌네요. 임재에 대해서 다윗이 어떻게 오해를 합니까? 다윗과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지요. 성전 지을 때 누구 손에 들어왔습니까? 인간 손에 들어왔지요. 하나님이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안 계시잖아요. 이게 어떻게 돼요? 멸망해야 되죠.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성전에는 안 계시잖아요. 그러면서도 성전을 짓게 하지요.

성전을 짓게 한 이유가 뭡니까? 멸망당하는 성전을 지어야 하나님이 임재하는 법궤 안에 이미 깨어진 언약(돌판)위에 피가 묻힌 의미를 아는 거예요. 이미 언약이 깨어졌지요. 깨어진 것이 바깥에 표를 내니까 기껏 하는 짓이 ‘성전 짓겠습니다.’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은 그것을 허용해야 되지요. 왜? 허용해야 성전에 있는 언약궤 안의 돌판이 깨졌다는 것이 티가 나니까.

성전을 짓도록 허용해 줘야 돼요. 사람들은 그 의미를 몰라요. ‘부서질 성전을 왜 짓게 합니까? 왕을 세우지 말라고 하시고는 왜 왕을 세우도록 허락합니까?’ 만날 이런 질문을 해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지 말고 아예 선악과를 심지 말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 이야기는 끝났어요. 성부와 성자의 이야기는 이미 깨어진 죄에다가 예수님의 피를 바를 때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고, 이 주 때문에 시간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을 보여주기 위한 시작과 끝인 거예요. 아까 히브리서 1장 11절에서 봤잖아요. 만물을 만들어놓고 만물이 멸망해야 되지요. 그 멸망 자리에 누가 등장합니까? 주는 영존할 것이다.

만들어 놓고 멸망시키고, 주님 등극하시고. 이게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깨달은 바입니다. ‘아 이것이구나. 우리 구원 중심이 아니고 주님을 증거하는 중심이구나.’ 라는 것을 안 거예요.

성전을 지으라고 할 때, 자 목사님 물어봅시다. 그러면 성전을 깨면 되겠네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성전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성전이 와서 성전을 없애야 돼요. 진짜 성전이 와서 ‘이것은 가짜거든’ 라는 식으로 해야 된다니까요. 그래야 성전 처음에 짓게 한 취지가 드러나요. 멸망하도록 하는 이유는 이 깨어진 돌판과 피의 만남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전을 짓게 하신 겁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가짜 성전을 만들어서 원래 성전이 가짜 성전을 멸망시킬 때 사람들은 멸망당하면서 뭘 쳐다봅니까? 진짜 성전을 바라보죠. 이것을 공식으로 만들면, 교회를 사수해야 할 정도로 교회를 사모해야 됩니다. 교회를 우습게 보는 것은 참을 수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교회를 위해서 우리는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아요.

방법이 뭐냐 하면, 교회를 사수하자. 어떻게? 교회를 모독하므로. 교회를 지독하게 모독하므로 교회를 사수합시다. 10분 쉬면서 이 말을 잘 생각해 보세요.

10분 쉽시다.

(2010. 6. 4. 10:32 녹취 마침)

첨부파일 : 07-1.hwp (80.0K), Down:16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82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9,117 우리교회 [일반] 십자가 마을 여름수련회 안내 잠언 최고관리자 10-06-07
9,116 자유게시판 2010 년 십자가 마을 여름수련회 안내 잠언 최고관리자 10-06-07
9,115 강의 대구 6월 7일 피26강 성화론(언어술=속임수=집중력)을 초월한 성령 [피] 최고관리자 10-06-07
9,114 묻고답하기 사랑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6-07
9,113 우리교회 [일반] 사랑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6-07
9,112 자유게시판 030강-눅6장23-26(마지막 웃는자)-luk100606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6-06
9,111 자유게시판 20100601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7-지도와 지시의 은사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10-06-06
9,110 자유게시판 20100601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7-지도와 지시의 은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0-06-06
9,109 우리교회 주일학교 6월 6일 설교 - 최고관리자 10-06-06
9,108 우리교회 삼하 15:30-31 (백성들의 슬픔) 사무엘하 최고관리자 10-06-06
9,107 설교 본문 : 누가복음 6장23-26절 제목 :마지막 웃는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6-06
9,106 우리교회 눅 6:23-26 (마지막 웃는자)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6-06
9,105 자유게시판 주말의 명화 - 최고관리자 10-06-05
9,104 강의 울산 6월 4일 출12장 죽음이 구별(거룩:하나님의개입)기준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10-06-05
9,103 자유게시판 10대구강의(피)25--방향성으로서의거룩 미가 최고관리자 10-06-04
9,102 자유게시판 제대로 웃기는 사랑 - 최고관리자 10-06-04
열람 ➜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0. 5. 28) 1강 녹취록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0-06-04
9,100 자유게시판 서울강의-요한계시록001강-100506b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10-06-03
9,099 우리교회 [일반] [인간 속의 악마 ]-철학의 신학의 허상 시리즈 [철학] 최고관리자 10-06-03
9,098 강의 [인간 속의 악마] - 최고관리자 10-06-03
9,097 자유게시판 065강-렘18장21-23(용서할 수 없는 자)-jer100602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10-06-03
9,096 우리교회 렘 18:21-23 (용서할수 없는자)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10-06-02
9,095 강의 부산 6월 1일 강의 침멀리 07 구약신학 - 지도와 지시의 은사 p129 이사야 최고관리자 10-06-02
9,094 자유게시판 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역대기)(강의정리)10-재정리 열왕기상 최고관리자 10-06-02
9,093 자유게시판 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역대기)(강의정리)09-재정리 [수련회] 최고관리자 10-06-02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