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역대기)(강의정리)10-재정리
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역대기)(강의정리)10-재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1)
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역대기 제10강(셋째 날 오전)(끝)
2009,01,15 강의 이근호, 정리 이장우
◈ 솔로몬은 독자적인가?
이제 마지막 시간으로 역대하 1장 1절부터 살펴보겠는데, 과연 "솔로몬이 독자적인가?" 라는 겁니다. 즉 솔로몬의 신앙이 과연 독자적이냐는 문제인데, 그런데 지난 시간에 '유훈(遺訓)통치' 라는 말을 했다는 겁니다. 마치 죽은 귀신이 통치하는, 즉 북한의 김일성처럼 말입니다.
(대하 1:1)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 가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사 심히 창대케 하시니라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이미 다윗은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이 죽고 이제 솔로몬의 시대가 되었으면 어떻게 됩니까?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죽은 사람에 대해서 아픔은 조금 있겠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죽은 사람은 그만 잊혀진다는 겁니다. 여기서 '잊혀진다' 라는 것은, "그 사람의 신앙은 그 사람의 신앙이고, 또 내 신앙은 내 신앙이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의 신앙을 따라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 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나'는 여기에 있고 그 사람은 죽은 존재라고 하면, 이미 죽은 자의 신앙을 본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사람 위에 하나님이 계셨으니, 각자의 하나님을 믿으면 그뿐이지, 굳이 산 자가 죽은 자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은 개별적 존재로서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솔로몬이 독자적인가?" 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보지 않으면, 솔로몬을 우리와 똑같이 취급해서 "아하, 솔로몬은 다윗에게서 많이 배웠습니다. 참 훌륭합니다. 배울 것이 많군요!" 라고 하고서는 결별이란 겁니다. 즉 유훈통치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죽은 귀신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참 고맙습니다. 아버지에게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나도 아버지를 본받아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말입니다.
◈ 우리는 전혀 독자적이지 않아 !!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의 편견인데, 즉 우리가 성경을 덮어버릴 때 흔히 발생하는 오류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혀 독자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말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결코 독자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기도할 때, 엘리야의 하나님은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갈멜산에서는 엘리야의 하나님이 아니라, 무슨 하나님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또한 야곱,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다는 겁니다. 바로 그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다는 말입니다. (지금 목사님의 목소리가 맛이 갔습니다. ㅋㅋ)
(왕상 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흔히 말하는 '종교성'은 무엇인고 하니, 각자의 종교성이 따로따로 구분되어 있기에, 그 사람을 존중은 해주되 종속은 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과 교수들이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이 각자에게 내려오는 것으로 보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내려오셔서 땅을 뚫어서, 마치 지하수처럼 꽐꽐 흐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의 언약은, 마치 지하수와 같아서 !!
그러니 그들은 독자적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보지, 이렇게 지하수처럼 흘러서, 즉 이런 큰 흐름 속에서 다윗이 튀어나오고, 또한 솔로몬이 튀어나오고, 물론 모세도 튀어나오고 말입니다. 그렇게 지하수처럼, 또한 원유처럼 흐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하수처럼 흐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 인데, 물론 그들은 언약에 대해서 들은 기억은 난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 하나님의 언약과 자기 신앙의 독자적인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따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방인의 하나님과의 차이점인데, 즉 일반적인 종교성과의 차이점이란 말입니다.
◈ 이름을 부르세요 !!
약간 이야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조금 쉽게 하면 다음과 같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고시원에 들어올 사람이 사무장과 만나서 묻는데, 그들의 대화를 한번 경청해보겠습니다.
* 고시생 : 여기, 방이 있어요?
* 사무장 : 예, 있습니다.
* 고시생 : 얼마입니까?
* 사무장 : 한 달에 50만원입니다.
* 고시생 : 조금 비싼데, 조조할인은 없습니까?
* 사무장 : 이 양반이, 그런 거 없습니다.
* 고시생 : 돈, 여기에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는데)
* 사무장 : 이봐요. 이리 와봐요.
* 고시생 : 아니, 왜 그러세요?
* 사무장 : 이름을 써세요,
* 고시생 : 내가 직접 돈을 내었는데, 왜 그러세요?
* 사무장 : 그래도 이름은 써세요.
* 고시생 : 이름을 말입니까?
* 사무장 : 예, 여기 기록부에 이름을 써야 됩니다.
* 고시생 : 알았어요. 참 깐깐하네.
그렇게 가벼운 실랑이를 벌리면서 자기 이름을 '김영철' 이라고 쓰고는 방안으로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그 고시원에 들어와서는, 방금 새로 들어온 그 김영철이라는 사람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 방문객 : 혹시 김영철이라는 사람이 왔습니까?
* 사무장 : 예, 오늘 들어왔습니다
* 방문객 : 그러면 방에 좀 들어가겠습니다.
* 사무장 : 아니, 들어가지 말고 이름을 부르세요.
* 방문객 : 이름을 부르라고요?
* 사무장 : 예, 이름을 부르세요.
* 방문객 : 그냥 들어가면 안 됩니까?
* 사무장 : 안 됩니다. 이름을 부르세요.
그러니 이렇게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 이름의 실체가 있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이 신은 만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만나면 죽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직접 만나자는 게 아니라, 자기가 실존하신다는 것을 이름을 통하여 알리신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야, 김영철!" 이라고 부르면, 문을 열고 나와서 만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에 해당되는 어떤 살아있는 인격적 존재가 있으니, 그래서 이름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죽은 사람의 이름은, 그것은 껍데기만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 신의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 !!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신' 이라는 것을 불러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하나님이 제공한 '주의 이름'을 불러서, 하나님과 교류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과 로마서 10장에 보면 유명한 내용이 있는데, 즉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데 사람들과 신학자들은 이 주의 이름을 무엇으로 바꾸는가 하면, 그만 신의 이름으로 바꿔버린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사이비이고 말입니다. 성경말씀은 분명히 주의 이름을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그만 신의 이름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 신의 이름은, '신과 나' !!
사실은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신의 이름의 부른다는 것은, 신의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과 나', 그렇게 신과 당사자, 그 둘의 이름이 합쳐져서 신의 이름이 형성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민족마다 신의 이름의 다 다른데, 즉 '엘'이고 '바알'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나' 라는 민족, '나' 라는 동족, '나' 라는 추종파벌이 다 있다는 말입니다.
◈ 주의 이름에는, 인간이 없어 !!
그러나 '주의 이름'에는 무엇이 빠지는고 하면, 우리 인간이 그만 빠진다는 겁니다. 이게 정말로 어려운데 말입니다. 그러니 신학적으로 말해서, 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그것이 곧 중세신학, 즉 스콜라 신학인데 말입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고 하니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만든 내가 있으매 신이 존재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나는 어디서 나왔겠는가? 누군가가 만들었겠지! 그러면 나를 만든 그를 무엇이라고 부를까? 아, 신이구나"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신을 찾고 부른다는 말입니다. 즉 "내가 있으매 신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 포이에르바하 - 신이란, 자아의 투사 !!
이러한 실체를 밝힌 사람이 바로 '가독교의 본질' 이란 책으로 유명한 '포이에르바하' 라는 신학자인데, 즉 "신이란, 자아의 투사이다" 라고 보았다는 겁니다. 자아를 마치 영사기에 투사시키듯이, 그렇게 한 것이 곧 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신이 모두 다른데, 즉 자기가 어려울 때의 신과 건강할 때의 신이 다 다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투영되고 확대된 것이 신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 베트맨, 살려줘요 !!
'베트맨' 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그 영화를 보면, 누군가가 위기에 처하면 밤하늘에 박쥐 문양의 불빛이 떠오르는데, 자기를 구해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문양은 옥상의 조명등에 작은 박쥐 문양을 하늘에 비취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늘에 비춰진 것이 곧 신이고, 그 신을 추적해보면, 그 안에 '나' 라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있으므로 신도 있다" 라는 겁니다. 혹은 "나는 생각한다. 그 생각 속에 신도 존재한다" 라는,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내가 없으면, 내가 믿는 신도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젊어서 교회에 좀 다니다가, 나이가 많아지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신도 찾아보고 했는데,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더라"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 !!
이것이 바로 안셀무스의 '신 존재론적 증명' 이라고 하는 것인데, 즉 "내가 합리적이니 신도 합리적일 것이고, 내가 도덕적이니 신도 도덕적일 것이고, 내가 원인과 결과를 따질 수 있는 과학적인 능력이 있으니, 신도 이 우주도 원인과 결과가 있을 것이고, 그리고 내가 어떤 목적이 있으니 신도 이 우주를 만든 목적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논리를 일단 전개해놓고는, 그 다음에 성경을 들고 와서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 정당성을 부여하는 식으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합니까? 그렇게 해서 종교장사를 해먹는데, 그것이 바로 포이에르바하가 지적한 것처럼 자아가 확장된 것이란 말입니다.
◈ 시편 110편 - 주께서 내 주에게 !!
하지만 이 '주의 이름'은 어디서 나오는고 하면,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시편 110편에 나오는데, 즉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말입니다. 갑자기 주가 둘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말한 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신이지만, 그러나 이쪽은 사람들이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긴 팔을 먼저 내밀었다는 것입니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그것이 출애굽기 6장에 나오는데, 이렇게 중요한 것을 마지막 시간에 강의해서 먼저 간 사람들에게 조금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데 말입니다. 일단 출애굽기 6장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출 6: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출 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
여기에 보면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인고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포착한다고 해도 포착될 수가 없는 이름인데, 그러니 하나님의 이름을 포착하고 말고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다루시는가?" 라는 문제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것은 누구의 뜻입니까? 아브람 본인의 의사였습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또한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도 야곱 본인의 의견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삭이 태어나는 것도 아브라함의 뜻이 아니었는데,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로 족한 줄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이삭이 태어난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둘 다 웃었는데, 즉 "아니, 이 나이에 어떻게 아기를, 어머 주책이야!"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만약에 전계향 권사님이 임신했다면 놀라서 자빠질 일이 아닙니까?(ㅋㅋ) 하지만 권사님이 임신하는 것과 마리아가 잉태하는 것이 같은 레벨이라는 겁니다. 처녀인 마리아가 잉태하고 얼마나 부끄럽고 황당했겠습니까? 동네방네 소문이 나고, 변명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말입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동네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나이가 90이 넘어서 임신한 사라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입니다.
* 이웃집 : 애 아버지가 누구인데?
* 마리아 : 말씀이 그렇게 했어.
* 이웃집 : 마리아 니가 신앙이 좋은 것은 아는데, 그것 말고 애 아버지가 누군데?
* 마리아 : 그게 아니고 성령께서 하셨어.
* 이웃집 : 믿음이 좋은 것은 내가 다 알잖아. 알아. 그런데 누구하고 잤는데?
* 마리아 : 으앙 !!
◈ 전능하신 하나님 ??
물론 아브라함도 처음에 신을 믿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믿던 그런 '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기존의 '하나님'에다가, 전능하신 분이 나타났다고 하니, 합쳐서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고 불렀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원래는 그 '전능하신' 이란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섭리대로 자기 일을 완벽하게 하셨다는 것인데, 약속대로 말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너와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그것은 바로 이름이 주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김영철' 이라는 이름은 다른 사람이 부르지 못하는데, 그 이름은 반드시 김영철이라는 사람이 방안에 있는 것을 아는 친구만이 부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즉 "야, 김영철 나와라! 누군데? 니 친구 박영철이다. 아이쿠, 반갑다. 친구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 예수의 이름으로 !!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합니까? 원래 우리는 신을 부를 자격이 없는데, 왜냐하면 주의 이름 자체가 인간을 빼고 지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마지막에 누구 이름으로 기도하는 겁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신의 이름으로 기도해버리면, 그 기도의 내용에 무엇이 들어가게 됩니까? 자아의 요구사항이, 즉 꿈과 희망이 담긴 기도를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대구에 있는 팔공산의 갓 바위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려면, 이 주의 이름이 하시는 그 일과 내용에 '종속'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종속되려면 무엇을 포기해야 됩니까? 자기 희망과 꿈을 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방신, 즉 우리 인간들이 만들고 창안해낼 수 있는 신에게 기도하는 어리석은 짓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 오직 주님과 주님의 합의로 만들어낸, 바로 그 내용을 두고 '언약'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언약의 출입구가 무엇인고 하면, 곧 '주의 이름' 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 자기 약속에 전능하신 하나님 !!
그러면 '여호와' 라는 이름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먼저 약속을 던져놓고, 그 약속을 이루어내는 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의 희망과 포부와 기대가 가득히 들어있는, 즉 새해가 되면 많이 하는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것은, 일체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에 포함되지 않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고 하면,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적어도 하나님이 만드신 교회라고 하면 어느 정도인고 하니, 죽음의 권세를 이겨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죄의 권세와 율법의 권세를 모두 이길 정도가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라캉 - 타인의 욕망으로 !!
하지만 우리 인간은 아무리 자기의 소원과 목표를 달성해도, 결국에는 죽음을 느낄 수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과 나이가 많은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면, 그것은 곧 '욕망'의 문제라는 겁니다. 인간의 욕망 말입니다.
다음은 '라캉' 이라는 사람이 말한 것인데, 즉 사람의 욕망이라는 것은 자기의 욕망은 전혀 없고 전부 다 타인의 욕망이라는 겁니다. 그러게 타인의 욕망이기에 비교를 느끼고, 그렇게 비교한 데서 상대를 꺾음으로 말미암아서, 상대방보다도 더욱 더 우위에 섰다는 것으로 자아의 존재가치를, 그것을 타인을 통해서 발견하는데, 그것이 바로 젊은이들의 특징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늙은 분들은 인생을 좀 살아봤기에 타인의 욕망이 아니라 배려를 한다는 겁니다. "아이고 인간아, 그런 것이 아니라"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머리가 흰 사람을 존경하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젊은애들은 아무리 좋은 관계라고 해도 다 계산을 하는데, 즉 "저 사람하고 사귀면 나중에 얼마나 수입이 생길까?"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귀더라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가능한 한 피하고, 공부를 잘하는 친구를 사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모순이 되는 것입니까?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도대체 누구와 사귀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 젊은이 - 지금은 삐에로처럼 웃고 있지만 !!
그러니 지금 젊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함께 웃고 떠들고 술 먹고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부가 하나 하나가 다 엄청나게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 말입니다. 즉 "비록 지금 내가 삐에로처럼 웃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가 너를 앞서고 말거야!"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젊은이들은 그런 경쟁과 게임을 통해서, 자기가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레벨을 점유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그런 철저한 자의식에 사로잡혀있다는 겁니다.
◈ 늙은이 - 그래, 해라. 해 !!
하지만 그런 젊은이들에 비해서 나이가 많은 사람은 어떠합니까? 사람이 나이가 들게 되면 그야말로 양보와 배려인데, 즉 "그래, 해라. 해"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과 남을 용납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이 늙게 되면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 동의를 못하겠다는 표정들인데 말입니다(ㅋㅋ).
◈ 타인을 의식하기 때문에 !!
그것을 다음과 같이 보면 되는데, 아까 라캉은 타인의 욕망이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즉 젊은 사람들은 타인의 존재 때문에, 즉 "다른 사람, 즉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항상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겁니다. 남을 의식하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대구시 한 복판에서, 육교도 아니고 횡단보도도 아닌 곳으로 마음대로 건너는 사람들이 주로 누구인고 하면, 주로 연세가 많은 분들이라는 겁니다. 교통신호고 뭐고 의식하기가 싫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순경을 만나게 되면, "젊은 양반, 한번만 봐줘!" 라고 하면 끝나고 말입니다. 즉 경쟁을 하지 않으니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경쟁을 하려면 스트레스에 휩싸이고 말입니다.
◈ 아니, 소설가들이 왜 뻥을?
그런 의미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소설이나 글을 쓰면서 자꾸 거짓말을 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그들이 글을 통해서 무슨 주장을 하는고 하면, 인간의 자유를, 즉 인간의 해방을 외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자유를 외치는 것은, 사실은 그만큼 자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이 "나는 이제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로부터 자유로워지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아버지로부터의 자유, 또한 어머니로부터의 자유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 앞에 이미 무엇이 붙어있습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존재를 의식하는, 거기에서 파생된 개념이 바로 자유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무슨 자유냐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버지, 두고 보세요. 제가 아버지에게서 독립해서 살아보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막상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아버지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소주 한 병에 오징어 한 마리를 구워서 아버지 무덤에 가서는 "아버지, 제가 이렇게 일류기업에 이사가 되었는데, 그것도 못 보시고 돌아가시다니" 라고 하면서 운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옆에서 "그건 남의 무덤인데요" 라고 시비를 건다는 말입니다(ㅋㅋ). (??)
◈ 프로이드 - 인간은 평생 자유를 부르짖지만 !!
그래서 프로이드에 의하면, 평생 인간은 자유를 부르짖지만, 그러나 그 자유는 누구를 의식한 자유라는 겁니까? 즉 "나를 보라" 라는 겁니다. "아버지, 나를 보세요. 내가 이렇게 가치가 있잖아요"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그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자기 인생, 그러니 그게 무슨 자유라는 말입니까? 스트레스나 실컷 받을 일이지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가 나이가 80이 되고 90이 되어보라는 겁니다. 횡단보도고 뭐고 보지 않고 그냥 마구 건너다닌다는 겁니다. 또한 새벽 4시에 일어나서는 "육수깐, 문 열었습니까?" 라고 하면서, 그렇게 치매에 걸린 노인이 조깅을 하는 사람들에게 묻듯이 하는데, 그러니 그야말로 인생 자체가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직장에 신입사원으로 20대 후반에 취직을 하면, 30대 중반의 대리가 굉장히 구박을 하는데, 업무처리를 잘못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70대 회장은 뭐라고 합니까? 아직 일을 잘 몰라서 그럴 수 있다고 하면서 그냥 넘어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배려는 무슨 의미입니까? 그 신입사원은 자기와는 경쟁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30대 초반의 대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 자유인 - 뭔가를 의지하고 있어야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이처럼 경쟁대상에 종속되지 않는 사람이 그야말로 '자유인' 이라는 겁니다. 경쟁대상에 종속되지 않는 사람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고 하면, 그것은 바로 뭔가를 의지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경우에, 그는 아버지인 다윗에게서 참으로 많이 배웠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는 아버지의 신앙이고, 이제부터 나는 나의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독자적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신 그 다윗언약을 통해서, 그 출입구가 '주의 이름' 이라는 것으로 자기에게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 주의 이름을 불러야 !!
그러니 진짜 하나님의 뜻은, 자기가 원하는 그런 솔로몬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창조물로 다시 재창조가 되기 위해서는, '주의 이름' 이라는 그 출입구를 뚫고서 "주여!" 라고 부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현재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을 부르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내' 이름 속에, 주의 이름이 담고 있는 언약이이 자기를 덮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노아가 방주를 만든 장면이 나오는데, 노아가 그것을 왜 만들었습니까? 사실 자기에게는 별로 쓸모가 없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자기에게는 쓸모가 없을지 모르지만,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반드시 필요하고 쓸모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어라. 다른 복음은 저주받은 것이고, 오직 십자가 외에는 너를 의롭게 할 수가 없다. 오직 십자가만이 너를 구원한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즉 주의 이름으로 그런 복음이 주어진 것은, 그것은 바로 물론 지금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즉 약속을 이루는데 꼭 필요하고, 천국과 지옥에 가는데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것이 곧 주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 유일한 현실은? 타인이 없는 자기 문제, 곧 '죽음' !!
제가 강의를 하면서도, 저 스스로 강의내용에 대해서 약간 충격을 받을 때가 가끔 있는데, 이번에는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 죽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타인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처음에는 조금이나마 안타까워하다가, 나중에는 모두 다 잊혀지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죽으면 유일한 현실, 즉 타인이 없는 자기 문제로 되돌아온다는 겁니다. 죽는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죽고 난 뒤에 "나는 지금 지옥 불꽃 속에 있을 뿐이고!"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즉 아무도 도와주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 인간의 유일한 현실이고 말입니다. 죽음, 바로 그것이 유일한 현실이란 말입니다.
◈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
전도서 7장에 보면, "잔치 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 라고 하는데, 왜 그런가요? "초상집에 가야 따문따문(가끔?) 느껴지는 너의 본질이 바로 거기에 있다" 라는 겁니다. 또한 전도서 끝에 "청년들아 때가 늦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 라고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심판하시기에 말입니다.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
(전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 경쟁대상이 아닌, '피'에 종속이 되어야 !!
그러므로 '종속'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심판의 기준은 자기가 정하는 것이 아닌데, 즉 "제가 나쁜 짓을 했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심판의 기준은 오직 언약인데, 그러니 언약은, 한 마디로 말해서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어린양의 피를 발랐더니만,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를 들어서, 저기 출입구에 피를 발랐더니 여기 안에 있는 우리의 직업과 귀천과 나이를 불문하고, 저기 출입구에 피를 발랐다는 것 때문에 죽음의 사자가 이곳을 그냥 넘어가 버린 것이 바로 유월절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곧 주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곧 언약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핵심은 바로 '피'에 있다는 것입니다.
◈ 피는, 주의 이름으로 그 내용물이 쏟아져 !!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라고 했는데, 즉 예수님의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지금 당장에는 자기 욕망에는 십자가 말고 다른 것들이 도움이 될까 싶겠지만, 그러나 전체를, 즉 모든 것을 다 보시는 주님 앞에는 어떠합니까?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유일한 언약이고, 이 피는 남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러니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 '피' 라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그 안의 내용물이 쏟아지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일천번제 - 아버지가 한 그대로 하겠습니다 !!
그러니 솔로몬은 절대로 독자적인 신앙이 아닌데, "나는 아버지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처럼, 나는 아버지의 그 언약이 내 신앙이 되기를 원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하 1장 6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린다는 말입니다. 그 유명한 일천번제를 말입니다.
(대하 1:6)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어제 화이투벤을 먹고 자서 그런지 몰라도 오늘 아침은 아주 컨디션이 좋은데, 목은 원래 이 시간이 되면 맛이 가지만 말입니다. 물론 그건 화이투벤 덕분이 아니고, 또한 화이투벤을 주신 김을수 집사님 덕분도 아니고, 바로 김을수 집사님을 주신 하나님 덕분이라는 겁니다. 조금 복잡한데, 그게 다 언약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ㅋㅋ).
◈ 다윗이 먼저 일천번제를 !!
그건 그렇고, 이 일천번제가 솔로몬의 자기 아이디어입니까? 그게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버지인 다윗이 이미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겁니다. 한 장만 거꾸로 보면 역대상 29장 21절이 나오는데, 거기에 다윗이 드린 일천번제가 나온다는 겁니다. 21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
(대상 29:21) 이튿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번제를 드리니 수송아지가 일천이요 수양이 일천이요 어린 양이 일천이요 또 그 전제라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
그러니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이렇게 한 것을 알고는, 그대로 따라했다는 겁니다. 즉 "나는 아버지 신앙을 벗어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일천번제'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이 일천번제에서, 제물의 일천이 아니라, 횟수로 일천 번을 강조해서, 교회에 올 때마다 돈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올 때마다 천 원씩 한다고 해도, 천 원 곱하기 천 원이면 얼마입니까? 또한 이자를 한번 계산해보면, 새마을금고에 넣으면 연 6%인데, 그야말로 엄청나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사기를 치는지 모르겠는데, 하긴 이것만 사기가 아니고 모두가 다 사기지만 말입니다.
◈ 교회는, 종속된 주의 이름만 불러야 !!
교회가 정말이지 언약적인 교회라면, 주의 이름을 건성으로 말하는 주의 이름이 아니고, 자기 욕망이 발산되는 주의 이름이 아니고, 그런 것은 이방신이니 말입니다. 정말로 솔로몬처럼 독자적이지 않고 종속된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교회인데, 그런 교회가 진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피로 된 교회라는 말입니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 용서가 되는 근거는, 곧 '피' !!
그러면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뒤에 어떻게 하는고 하니, 여기에서 역대하 6장 26절을 보겠습니다. 목이 쉰 제가 다 읽도록 하겠습니다.
(대하 6:26)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
(대하 6:27)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고, 용서가 되는 근거는 피에 있다는 겁니다. 즉 제사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이 36절인데, 여기 36절에 보면 아주 기분 좋은 이야기가 나온다는 겁니다. 강의를 시작하고 오랜만에 기분 좋은 말이 나오는데, 그게 마지막 시간에 나온다는 겁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대하 6:3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하므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땅의 원근을 물론하고 끌어간 후에
◈ 복음 -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
여기에 보면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라고 하는데, 그러할지라도 어디를 향해서 기도를 합니까? 38절을 보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니냐는 겁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인생이 없다고 하는데, 범죄하지 않는 놈이 있으면 나와보라는 말입니다.
(대하 6:38)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과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 죄 - 딴 동네에서 놀고 있는 것 !!
그러면 무엇이 범죄입니까? 이방신을 찾는 것, 바로 그것이란 겁니다. 자기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그것을 극복해야만 자아의 정체성이 확립이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나' 라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 즉 타인의 욕망과 타인의 기대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나' 라는 것인데, 그러니 너무나도 허구적인 '나' 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나'에게서 나오는 희망, 포부, 기대사항 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런 허구적인 것을 위해서 떠오르는 달과 해를 바라보고 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딴 동네에서 놀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그 죄에 대해서 솔로몬이 뭐라고 기도합니까? "주여, 주의 이름 안으로 들어오게 하옵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어떠합니까?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모르고, 마귀가 원하는 인간을 따라서 산다는 말입니다.
◈ 사탄아 물러가라 !!
그래서 우리 인간들이 원하는 기도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는데, 첫째로 "주여, 돌이 떡이 되게 하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여, 인기가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라고 하고, 그 다음의 세 번째 기도는 "주여, 제가 주의 성도로서 이 땅에서 권력을 가지고 출세하게 하옵소서. 내 남편, 내 아들이 출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를 드리옵니다. 아멘"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기도는 누가 가르쳐준 것입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기도가 아닙니까? 그것은 바로 마귀가 예수님께 이야기한 것인데 말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는데,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지요?" 라고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 즉 주께서 시키시는 대로 사는 것, 내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 뜻대로 되는 것, 그것이 본래 인간을 만든 목적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 가까운 산당으로 !!
요즘 같으면 만약에 교인이 새벽에 나와서 기도를 하는데, 목사가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면, 아마 교인이 정말 물러가 버리지 싶은데(ㅋㅋ), 교인들이 교회에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절에 가는 대신으로 오는데, 절은 산에 있어서 너무나 멀리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일요일만 등산을 겸해서 갈 수 있는데, 하지만 교회는 골목마다 있으니, 그러니 멀리 있는 산당보다 가까운데 있는 산당에 온다는 것입니다. 그게 곧 오늘날 교회가 아닙니까?
제가 이런 강의를 하면 꼭 끝에 교인들의 질문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목사님, 그러면 기도할 게 없잖아요!"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불만은 두 가지의 유형이 있는데, 먼저 하나는 너무나 기뻐서 "그러면 기도할 것이 없네요!" 라고 하는 부류가 있고(ㅋㅋ), 다른 하나는 화를 내면서 "그러면 기도할 것이 없네요!"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둘은 서로 너무나 다르다는 말입니다. 물론 가는 곳도 다르고 말입니다.
◈ 우리는, 우리의 욕망대로 기도할 뿐 !!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우리 욕망대로 나오는 것을 그대로 두시는데,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의 그런 기도에 대해서 하나 하나 지적을 하시면서, "그런 것이 바로 죄이며, 악한 것이다" 라고 하면서 죄를 지적하는 말씀의 기능이 들어올 때, 우리는 그 하나 하나에 대해서 "제가 이런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언약에 종속된 기도 덕분에, 그래서 우리의 탐욕스러운 기도가 솔로몬이 성전을 향해서 하는, 그런 기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란 무엇입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듯이, "내가 십자가 앞에서 따로 나의 자아를 상상하면서 챙겼습니다" 라고 하는 회개가 나오는데, 그것이 3초를 유지한다는 겁니다. 왜 3초인고 하면, 어렵게 기도를 하고 돌아서면,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사회입니까? 결코 만만치 않은데, 즉 타인의 욕망으로 인한 그물망이라는 말입니다.
◈ 이 사회는, 타인의 욕망으로 인한 그물망 !!
옛날 철학자들은 주체의식 때문에 모두가 독자적이었는데, 즉 자기가 사랑하면 사랑이 되고, 그렇지 않고 사랑을 끊어버리면 없는 것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게 크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A' 라는 사람이 'B' 라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C' 라는 사람이 무언가 떠밀어주었기 때문이란 겁니다. 그러니 전부가 같이 울렁울렁하는 '그물망' 이란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만원인 지하철에서 자기는 가만히 서있고 싶어도 뒤에서 떠밀면, 우발적으로 앞에 있는 아가씨의 등을 떠밀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뒤에서 떠밀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가씨라면, "이게 어딜 만져?" 라고 하면서 소리를 친다는 겁니다. 물론 아니라고 부인을 하기는 하겠지만, 얼마나 민망스럽겠습니까? 만지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ㅋㅋ).
그리고 부도가 나는 것도, 성경에 보면 열심히 하면 부도가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러나 현대사회는 부도가 나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에 부도가 나서 온 분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회사가 문을 닫아서 말입니다. 게으름을 피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회사 돈을 다른데 유용한 것도 아닌데, 착실하게 필요한 곳에 재투자하고, 열심히 욕심도 없이 아주 소박하게 살았는데, 그런데 그만 부도를 맞았다는 것입니다.
◈ 국민소득 2만불이 넘어가면 !!
요즘 교회마다 교인 수가 준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은 국민소득 2만불이 넘어가면 나타나는 전세계적으로 동일한 현상이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모든 국가가 2만불이 넘어가면 교회에 나올 시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맞벌이해야 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쉬는 날이면 집에서 청소도 해야 되고, 또한 그냥 직원이면 일요일에는 놀지만 간부급이 되면 노는 날도 없다는 겁니다. 일요일에 회사 문을 닫아놓아도 회사걱정을 늘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같이 힘들게 살다보니 일요일은 쉬어야 하는데, 그래서 아침 늦게까지 자다가 일어나서 아침이나 먹고 교회에 가려고 하면 벌써 12시 반, 그러니 예배가 벌써 끝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후예배에 가려고 하다가, 다음에 가자고 하면서 그만 빼먹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소득 2만불은 그냥 가만히 있어서 오는 것이 아니고, 부부가 밤낮으로 벌어야 가능한데, 그것도 기회가 있을 때 말입니다.
옛날 농경시대에는 365일 중에서 일하는 날이 150일 뿐이었는데, 그 나머지 200일은 놀았다는 겁니다. 노는데 그냥 놀려고 하니 심심해서 윷놀이, 사물놀이, 짚불놀이를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마구 놀려고 하니 미안해서 별자리를 보면서 견우직녀가 어떻고 하면서 축제일을 만들어서 놀고 말입니다. 그리고 무슨 구실이든지 만들어서 단합대회도 하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어떠합니까? 시골에 사시는 부모님에게서 전화가 와서 "야야, 오늘이 동짓날인데 안 내려오나. 팥죽을 먹으러 와야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지금은 회사에 잔업을 해야하니 갈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끔 TV에서는 "애야, 나는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 그냥 TV에서 조금 찌직거리며 소리가 날뿐이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ㅋㅋ).
◈ 처나 자식을 돈보다 더 사랑하면?
아무튼 2만불 사회에서는, 아버지도 가족도 돈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자본주의 사회에 합당하지 않다는 겁니다. 즉 처나 자식을 돈보다 더 사랑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처나 자식도 돈 앞에서는 모두 필요가 없는 겁니다. 자식이란 키우면서 귀여울 때 말이지, 나중에 다 커서 아버지에게 사업을 하는데 보증이라도 서 달라고 하면, 그런 놈은 이미 자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동업자이지 말입니다.
특히 아버지가 죽고 나서 유산다툼이 일어날 때는, 그때는 형제고 뭐고 없다는 겁니다. 같이 자라면서 코를 흘릴 때나 형제이지, 유산 앞에서 형제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형제들은 그나마 점잖을지 몰라도, 그러나 동서들이 난리가 나는데, "아버지가 양로원에 계실 때 돈 얼마를 냈느냐? 그건 장남이 당연히 하는 것이 아니냐? 웃기고 있네! 그것도 철저하게 계산을 해야지! 회계사를 불러야겠네!"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 UP, UP, UP !!
왜 그러한고 하면, 이 세상은 우리를 '업(UP)' 시켜놓은 겁니다. 어떤 업을 시켜놓았습니까? 남들처럼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있다는 겁니다. 즉 남들처럼 2만불이 안 되면 사람 취급을 못 받아서, 그렇게 되면 소속의 안정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좋든 싫든 간에 그들의 구미에 맞추어서 따라가 주어야만, 그래야 도태되지 않고 콩고물이라도 생긴다는 밀입니다.
그런데 일요일이라고 자기는 믿음이 좋다고 교회에 덜렁 가버리면 돈 누가 줍니까? 먹지 않는 술도 먹고 취한 척 비틀거려야 하고, 또 노래도 못 하지만 그래도 노래방에서 개똥벌레라도 불러야만 되고, 그래야 어떻게든 교제가 되어서 "야, 저 사람은 우리편이다. 중요한 정보가 있으면 그 사람에게 알려주어서 함께 살도록 하자" 라고 해서, 그렇게 한 통속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 그냥 한 통속으로 사세요 !!
그러니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냥 한 통속으로 사세요!"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이 우리의 주특기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즉 자기 밖에 모르는 것, 그것을 우리는 제일 잘 한다는 겁니다. 굳이 목사가 시키지 않아도 말입니다.
이런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그 전체가 바로 죄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주여, 이런 죄인이 오늘도 십자가 앞에 왔습니다. 묵고 살려고 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그렇게 회개하고 돌아서도 또 마찬가지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적인데, 물론 아닌 척 하는 것은 아예 신앙도 없는 인간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사회라는 곳이 그럴 수밖에 없는데, 남이 떠미는데 엎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남이 우리를 떠밀리면 원수지간이 아닌데도, 우리도 남을 떠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떠밀릴 때는 "주여, 보시옵소서. 제가 천사입니다" 라고 하다가, 그런데 자기가 떠밀어야 될 때는 너무 미안하다는 것입니다.
◈ 떠밀리면 떠밀어야 !!
왜 그렇습니까? 자기는 전혀 떠밀 의도가 없는데도, 하지만 떠밀리면 떠밀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사회이고 이 세상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어차피 한 쪽은 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열심히만 하면 산다고 했는데, 그런데 열심히만 하면 산다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고, 지금은 서로 얽혀서 살아가기에, 남을 밀치는 자리가 곧 자기 자리가 되고, 그렇게 해서 자기 자리가 되었지만 그 자리는 또 오래가지를 못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인기가 떨어지면, 또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 우리는, 에브리바디 욕망의 유목민들 !!
그래서 노래방을 하다가 털어먹고, 치킨 집을 하다가 털어먹고, 또 베이커리를 하다가 털어먹고, 계속 옮겨 다녀야 한다는 겁니다. 바다 이야기인지 하늘 이야기인지를 하다가 단속에 걸려서 다 털어먹고, 또 경륜에 빠져서 그만 털어먹고, 그렇게 계속해서 돌고 돌아다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하여 "욕망의 유목민들!" 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이번에 승진을 해야 하는데 자리는 하나뿐이라고 한다면, 그런데 "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자기의 라이벌에 대하여 물으면, 서슴없이 인간말종이라고 대답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자기가 그 자리에 들어가니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자고 불신자고 간에, 이 사회자체가 남을 떠밀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고 있고, 그리고 거기에 저항할 능력이 또한 우리에게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 자기만 챙기기 때문에 말입니다. 즉 그것이 하나의 관성이고 우리 마음의 타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다윗이 죽고 난 다음에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의 조치를 취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역대하 8장 11절을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여러분은 아마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지 싶은데 말입니다.
(대하 8:11)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 성에서부터 저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르러 가로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궁에 거하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하였더라
◈ 덩치가 커지면 !!
지금 솔로몬의 나라가 엄청 커졌는데, 그렇게 덩치가 커지면 뭔가 하는 것도 그 레벨이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200명을 목회하는 목사가, 자신이 200명을 목회하는 목사라는 생각이 그만 굳어지게 되면, 그때부터 무엇이 괴로운고 하면, 교인이 150명이 되면 미친다는 겁니다. 100명 짜리 목회자라고 생각할 때는 150명이 되면 감사할 텐데, 그런데 200명 짜리 목회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만 150명이 되면 사람이 완전히 돌아버린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봉사하는 교회를 버렸다고 생각하기에 말입니다. 150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200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밤잠을 설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덩치가 커지면, 그 덩치를 관리하기 위해서 다른 쪽에 있는 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게 국가든, 회사든, 교회든 간에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줄 것은 주고, 또한 받을 것은 받겠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솔로몬은 그러한 것들을 너무나 잘 아는데, 즉 이 세상은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에,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만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즉 남에게 대접하는 대로 자기가 대접받는 원리를 안다는 것입니다.
◈ 이방여인은, 내 마누라라도 다윗궁에는 안 돼 !!
그러니 솔로몬은 많은 이방 여자들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카사노바처럼 여자를 밝혀서 그런 게 아니고 말입니다. 물론 카사노바도 나름대로 당시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러했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솔로몬의 경우에, 그 당시 나라 상황이 그러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하지만 아직도 신앙이 있다는 티를 내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무리 이방인의 여자를 자기 아내로 맞이해도, 그런 여자가 이스라엘의 다윗 왕궁에는 거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기껏 이것 밖에 없는데, 그러나 그게 점점 자기의 힘으로 밀리기 시작하는데, 즉 자꾸만 자꾸만 밀린다는 것입니다.
◈ 지혜 - 다윗언약 덕분에 !!
물론 솔로몬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이렇게 부자가 되고, 수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영토가 넓은 것은, 그것은 다 야베스의 기도덕분이고, 또한 다윗의 기도의 응답 때문에 주어졌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로 그것을 알고 통치하는 것을 '지혜' 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역대하 9장에 보면, 남방의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것이 정말인지 와보는데, 와서 보니 자기의 예상보다 훨씬 더 뛰어난 지혜를 보고는 놀라서 자진해서 공물을 바치고, 즉 그 지혜에 종속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솔로몬은 아는데, 그 모든 것이 자기가 잘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오직 다윗언약대로 진행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대하 9:1)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솔로몬을 시험코자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니 수원이 심히 많고 향품과 많은 금과 보석을 약대에 실었더라 저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대하 9:2) 솔로몬이 그 묻는 말을 다 대답하였으니 솔로몬이 은미하여 대답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그러면 솔로몬의 잘못이 무엇인고 하면, "이 큰 덩치를 어떻게 유지할까?" 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재산을 2천억이나 물려주었다면 그 재벌2세는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아버지가 2천억을 물려주었으니, 나도 2천억 정도는 되어야 해!" 라고 여긴다는 말입니다.
물론 말로는 아버지가 2천억 전부를 다 주셨다고 하지만, 그렇게 아버지가 주신 것을 자기가 잘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여기는 순간부터, 그 2천억은 그야말로 자기에게 짐이 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짐으로 말입니다.
◈ 외형적인 덩치가 아닌 '원리' !!
그러니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이 나라를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어떻게 그렇게 큰 나라로 만들었는지, 그 원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데, 즉 "솔로몬아, 네가 아버지 다윗처럼 온 율법을 다 지키면, 너도 다윗처럼 해주겠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분명한 원리가 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 원리를 생각하지 않고, 외형적인 덩치를 생각한다는 겁니다. 즉 "그 덩치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라는 것을 생각하다 보니, 그 다음부터 무리수를 두게 되고, 그래서 인간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그렇게 그것을 유지하려다 보니 자기의 신앙이 허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경우에, 나중에 보면 정복해 놓은 나라들이 그만 모두 자기를 피해서 도망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 진짜 지혜는?
그래서 마지막에 솔로몬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즉 진짜 원리가 무엇인고 하니, 이 나라를 다윗이 물려주었든 누가 물려주었든 간에, 이 나라를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반납하는 것, 그것이 곧 지혜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 지혜가 바로 전도서에 나오는데, 그래서 전도서, 잠언서, 아가서 등에서 이야기하는 게 과연 무엇입니까? "내 몸은 더 이상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입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뽑아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성도의 가야만 할 한 평생이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돈을 갖다 바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짓이란 겁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100억이든 20억이든, 이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 맞습니다. 나의 손가락 발가락 다 주님이 주신 것이 맞습니다" 라고 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이 살아온 일대기와 똑같은 맥락이라는 말입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
마지막으로 말씀을 그리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는데, 그것은 바로 다윗이 한 일을 예수님이 인계인수하였다고 할 수도 있고, 또한 다윗이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었다고 할 수도 있는데, 모두가 같은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험한 일생을 살면서 느낀 것은,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대로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함부로 기적을 행하지 않았고, 함부로 으스대지 않았고, 십자가에 죽을 때도 오로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자기 몸을 아낌없이 바쳤다는 겁니다. 즉 대속물로 내놓는 것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에 말입니다. 바로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기에 도로 반납하는 모습이란 말입니다.
◈ 바람 바람 바람 ♬
그러한 것을 솔로몬이 마지막에 아는데, 그래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살아가는 것이 자기 뜻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마치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 이라는 노래도 있듯이, 자기 것이라고 여긴다면 바람처럼 잡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바람을 잡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지만 그렇게 인생이 바람을 잡는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바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우리 자신 속에 많이 들어있어야만 했다는 겁니다. 자식도 들어있고, 아내도 들어있고, 교인들도 들어있고, 물론 목사님도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을 보고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한다면, 저는 교인들을 보면서도 김 바람, 최 바람, 그렇게 모두가 하나님께서 붙여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남편을 원망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적합해서 붙여준 것이니 말입니다. 어디에 적합해서 말입니까? 즉 "남편이 바람이 아니라, 너 자신이 바로 바람임을 알게 하기 위하여 바람과도 같은 남편을 붙여주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에서 '아멘' 소리가 나와야 되는데 말입니다. 제가 마지막에 바른말을 제대로 한번 하는데 말입니다(ㅋㅋ).
◈ 진리에 예속되는 것이 곧 '자유' !!
그러니 실망과 같은 것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즉 절대로 자기를 관리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주님께 종속된 것을 기뻐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두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즉 진리에 예속되는 것, 그것을 두고 예수님은 '자유' 라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니 마음대로 사세요 !!
그러니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만 의식하면, 그것이 바로 나이가 많은 노인네처럼, 그야말로 이제는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을 것도 없고, 즉 "니 마음대로 사세요!"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살다보면, 그것이 예수님 안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비로소 "아하, 내가 헛되며 모든 것이 바람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천국의 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들어와 있기를 소원한다는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것이라고 하는 순간부터 스트레스가 찾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