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8
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8
이름 : 구득영(IP:203.223.97.138)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8 (둘날 저녁2) 십자가 냄새
2007,01,09 강의 이근호, 녹취 서경수
◈ 이제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십자가 사건을 !!
먼저 로마서 8장 9절과 10절 말씀을 살펴보겠는데, 제가 읽겠습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주님께서는 우리 몸을 마치 제2의 예수님의 몸으로 간주해서, 그렇게 성령께서 다루신다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를 든 것처럼, 엄마가 큰아들의 옷을 입힌다는 핑계로 둘째아들에게 옷을 입힐 때, 그렇게 엄마가 둘째아들에게 옷을 입힐 때는, 마치 큰아들에게 옷을 입힐 때와 똑같은 감정으로 입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고 하면, 우리를 제2의 예수로 사용해서, 즉 예수님께 일어난 십자가 사건을 우리에게 되풀이하고 반복해서 적용하려는, 그런 의도로 성령께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모르면서 성령을 논할 때, 즉 자기가 구원받은 것만 자꾸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즉 "내가 구원을 받고자 성령을 믿어야겠다" 라고 한다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성령께서는 성도를 마치 성령께서 예수님을 다루었듯이 하시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성령이 오셨는데, 그때 성령께서 예수님을 다루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보면,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병도 낫는데, 즉 예수님 자신의 힘으로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성령께서 예수님을 다루었듯이, 이제는 지금 우리를 다루고 있다는 말입니다.
◈ 성령 - 이제 내가 너희를 살리겠다 !!
그러면 성령께서는 궁극적으로 우리 속에서 무엇을 다루고 계십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이 우리에게도 해당되고 효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죽이시고, 또한 다시 살리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곧 11절에 있는 말씀인데, 즉 우리의 몸도, 성령이 우리 안에 있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살리신 분이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자꾸만 실습을 하시는데, 우리를 데리고서 말입니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온 집안에 카스텔라 냄새가 !!
예를 들어서, 제가 어릴 때 저희 집에 고모들이 많았는데, 그 고모들이 학교에서 카스텔라를 만드는 가정실습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온 집안에 카스텔라 냄새가 진동한다는 겁니다. 실습을 한다고 집에서 계란을 몇 개나 깨어버리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집안에 카스텔라가 넘쳐나는데, 그렇게 실습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나, 구원을 받았다" 라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라 "아, 성령께서 나를 가지고 노시는구먼" 이라고, 그렇게 보면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핵심이 무엇인고 하면, 즉 우리 안에 들어오는 핵심 칩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 해당되는 모든 천국과 영생과 복락을, 그것을 이제 우리에게 집어넣는 실습을 감행하시는데, 그 주동자가 바로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는 전혀 들어주지 않고 주의 뜻대로만 기도를 하시는데, 그렇게 예수님의 기도를 거기에 포함시켜서, 즉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코스가 바로 예수님이 먼저 하신 코스가 인데, 즉 예수님이 이 땅에서 걸으신 바로 그 코스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코스를 그대로 가져다가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그 재미가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재미라는 말입니다.
◈ 성도는, 성령님의 쫄따구 !!
아무튼 우리는 이러나 저러나 쫄따구(졸병?)인데, 즉 성령님의 쫄따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인생을 우리 마음대로 못한다는 겁니다. 물론 커피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설탕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 넣고 말입니다. 하지만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못한다" 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다루셨듯이, 이제 우리를 다루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디까지 실험하고 실습을 하는고 하니까, 우리를 죽여놓고 또한 살리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매일 실습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죽음의 힘은 우리에게 역사하고, 예수님은 또한 우리에게 생명으로 역사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 안에 카스텔라 냄새가 진동을 한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 11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 성도를 죽이시고, 또한 살리시고 !!
여기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살아있는 사람을 성령께서는 매일같이 넘긴다는 겁니다. 그것을 성령이 하셨다는 증거가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그게 8장의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즉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면 멀쩡하게 살아있는 우리를 죽음에 넘기는데, 그러니 우리는 뭐냐하면, 우리는 매일 청룡열차를 타고, 또 바이킹을 탄다는 것입니다. (롯데월드의 자이드롭이 좋은데, ㅋㅋ)
◈ 재밌지? 재밌지?
마치 언니가 어린 동생을 그네에 태울 때와도 같은데, 그러면 동생은 그만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데, 그래서 "언니, 그만 내라도. 내라도" 라고 해도 내려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동생아, 재밌지? 재밌지?" 라고 하면서, 더욱 더 세게 밀고 당긴다는 말입니다. 동생은 계속 "엄마! 엄마!"를 부르면서 우는데, 그래도 언니는 계속해서 "재밌지? 재밌지?"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어느 정도 자기가 재미있게 놀았다 싶으면 동생을 그네에서 내려놓게 되는데, 그러면 동생은 내려서 그만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린다는 말입니다. 그래놓고 언니는 아주 흐뭇해하면서 집에 가서는 뭐라고 합니까? "엄마, 나 오늘 동생하고 재미있게 잘 놀았어. 참 잘했지?"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제 이야기가 너무 생생합니까? (ㅋㅋ)
◈ 죽어라 !! 죽어라 !!
지금 성령께서 그렇게 하고 계시는데(?), 즉 "죽어라! 죽어라! 사는 것이 재미있지?" 라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도 재미없고, 그냥 아슬아슬하고 무섭기만 한데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실컷 그네를 밀고 당기면서, 즉 우리 몸을 죽음에 넘기고, 그리고는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다시 살리고,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그네를 태우면서 성령께서는 "야, 재미있지? 참 재미있지?" 라고 하는데, 즉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돈이 있어야 감사한데, 그런데 성령께서는 정작 돈은 주지도 않고, 그냥 밀고 당기면서 감사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 8장부터는, 성령께서 주도권을 쥐고 !!
이러한 관점으로 로마서를 보면, 그 다음 8장부터 나오는 성령의 주도권이 이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주도권을 쥐고, 이제 8장부터 시작되는데, 그러면 그렇게 주도권을 쥐는 그 밑바탕, 즉 신학적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육신을 누가 다루었는가?" 라는 겁니다. 물론 성령께서 다루었는데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는 육신으로 되어있는데, 그런 우리 성도의 육신을 누가 다루십니까? 성령께서 다루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안에 어떤 내용을 집어넣는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 모든 것을, 그것을 "고난과 승귀" 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출생하심과, 인도하심과, 죽으심과, 그리고 승귀, 즉 승천하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모든 치욕과 영광을, 이제는 성령께서 육신이 된 우리에게 집어넣는 일을, 그러한 작업을 시작하신다는 말입니다.
◈ 구약의 성도들도 역시 마찬가지 !!
그리고 베드로전서 1장 10절과 11절의 말씀을 봐도, 성령께서는 이미 구약의 성도들에게도 이와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왔음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그것에 이끌리는 삶을 살았다는 겁니다. 즉 성령께서 그들도 역시 그렇게 인도하셨다는 말입니다.
(벧전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벧전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그리고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요단강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는데, 그때 들렸던 그 음성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고 했는데, 여기에 바로 '아들' 개념이 나온다는 겁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아들의 영, 양자의 영 !!
그런데 로마서 8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만 아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을 받은 우리도 역시 아들이 된다는 겁니다. 그 '아들의 영'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양자의 영'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예수님은 맏아들이고 우리는 아들이 되는데, 혹은 양자로서 예수님을 본받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즉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청룡열차를 태우면서, "재밌지? 재밌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이끄신다는 말입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따라서 그 아들이 받고 있는, 즉 아들이기 때문에 받는 보너스는 무엇과도 다른가 하면, 율법의 종이었을 때의 보너스와는 전혀 딴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바 아버지" 라고 부름으로 말미암아서, 비록 지금은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그 코스를 따라간다고 해서 그야말로 정신이 없지만, 그러나 18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예수님의 따라간다고 고난의 연속이지만, 그러나 앞으로 다가올 영광은 지금의 그런 고난과는 전혀 비교할 수조차도 없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미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는데, 즉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것 이외에 다른 근거는 없다는 말입니다.
◈ 제2의 예수님, 제3의 예수님으로 !!
그러니 성령이 오시게 되면, 큰 교회의 당회장이 되어서 잘 사는 것을 모델로 삼는 것이 아니고, 고난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아서, 그렇게 제2의 예수님, 제3의 예수님으로 계속해서 새끼를 치는, 그런 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13절과 14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기뻐하라고 말입니다.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이 돌아가실 때도 어떠했습니까? 그야말로 성령이 충만하셨는데, 그렇게 성령에 충만하니까 자기 죽음도 전혀 큰 문제가 아니었고, 오로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를 즐거워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두고서 로마서 8장 23절에 보면, 다른 육신,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롬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 누가 능히 송사하리요 !!
로마서 8장의 나머지 부분은 이전 시간에 강의를 하면서 군데군데에 다했기에 넘어가고, 그리고 여기에서 특별히 주의할 것은 33절과 34절인데, 즉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송사하리요' 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인데 말입니다.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다시 말해서, "송사할 수 있는 여건 속에 너희들이 놓여있다. 하지만 아무리 송사를 당해도, 이미 택한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보가 그 속에 입력되었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너희에게 죄가 있어서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집어넣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너희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끊어진다" 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떤 것도 끊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또한 여기 34절을 보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라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은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겁니다. 진도를 빨리 나간다고 해서 능사가 아닌데, 제가 왜 감히 성경말씀의 앞 뒤 문장이 서로 맞지 않다고 하는지, 그것을 다시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여기서 만약에 다음과 같은 논술시험이 있다고 하면, 즉 "'누가 정죄하리요' 라는 것 뒤에다 다음 문장을 완성시키시오" 라고 말입니다. "누가 당신을 정죄하리요" 라는 그 뒷부분을 괄호로 둔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거기에 뭐라고 쓰겠습니까? "나는 이미 예수님 때문에 의인이다" 라고, 그렇게 쓴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누가 너희를 정죄하겠느냐? 너희는 이미 예수님 때문에 의인이 되었는데!" 라고, 그렇게 되어야 문장이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렇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쓰면 틀렸다는 말인데, 즉 그것은 성령께서 의도했던 바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 다시 살아나신 이는 !!
그러니 성령께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고 하니, "누가 성도를 정죄하겠느냐? 너희들이 구원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희 안에서 너희를 향한 목적을 가진 분이 따로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보면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라고, 그렇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라고 해놓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너희 자신을 변명하거나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너희들을 정죄할 수 없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정죄를 당하지 않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그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가 없이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그런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말을 하고 보니 조금 이상한데 말입니다(ㅋㅋ).
◈ 피조물은, 피조물로서 !!
아무튼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피조물인데, 그런데 이 피조물은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피조물 자체를 좋게 하려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바꾸겠다고 해서, 즉 금지한 법을 넘어서 잘난 체를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원상복구를 해서 우리 피조물로 하여금 철저하게 창조주를 보여주는, 그러한 증거물로서만 삼는다는 말입니다.
◈ 토기는, 전적으로 토기장이에 의해서 !!
이것이 로마서 9장에 나오는데, 여기 있는 21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 싶은데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우리를 무엇으로 보는고 하면, 토기장이에 의해서 지음을 받은 하나의 그릇으로 본다는 겁니다. 물론 그릇 자체는 별 영광스러운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다만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는, 토기를 고려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즉 토기를 위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만 토기장이의 원하는 바만 담기게 되면, 그 토기그릇은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도 어쩔 수 없이, 그냥 그릇은 토기장이가 원한 것을 담아내는, 그러한 그릇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말입니다.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 뿐 !!
그러니 그릇은 두 종류밖에 없는데, 제3의 그릇은 없다는 말입니다. 반은 담기고 반은 담기지 않는, 그런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한 그릇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랑을 담는 자비의 그릇이고, 그래서 그 그릇은 쏟으면 자비가 마구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그릇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진노가 마구 튀어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두 종류 외에 다른 그릇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그냥 지워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제3의 그릇은 없는데, 즉 텅텅 비어있는데 자기가 알아서 넣는, 그런 그릇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미 채워진 대로 있는 진노와 자비의 그릇, 그것뿐이라는 것입니다.
◈ 진노의 그릇은, 선택에 관심이 없어 !!
여기에 대해서 "그런데 만약에 한 쪽에서 항의가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항의가 들어오지 않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저쪽에 있는 진노의 그릇이, 이쪽에 있는 자비의 그릇에 대해서 눈치를 채면 항의가 들어올지도 모르겠는데, 즉 "토기장이님, 왜 저로 하여금 저 자비의 그릇처럼 안 되고, 이런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고맙게도 이 진노의 그릇은 거기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 신은 자기가 선택했고, 즉 자기 메시야는 자기가 골라 선택했기에, 또한 예수도 자기가 다듬어놓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말입니다. 즉 "뭐 선택론? 그건 불합리해" 라고 하면서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만다는 겁니다. "나는 그런 불공평한 하나님은 믿지 않아" 라고, 그렇게 끝나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는데, 관심이 없어서 말입니다. 만약에 관심이 있어서 길길이 뛰는 사람이라고 하면, "야, 저런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가?" 라고 의심이 갈 정도라는 겁니다. 물론 의심을 해서는 안 되지만 말입니다.
◈ 그러면, 저는 지옥에 가는 겁니까?
일명 '소나무' 라고 해서 김대식 씨를 밤새도록 애먹인 양반이 있는데, "그러면 저는 지옥에 갑니까? 어쩌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보라는 겁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라고 하면, "기독교, 그것은 인간이 만든 거잖아. 예수, 그 사람은 죽었잖아.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아, 지옥이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지 않아서, 내가 지옥에 가면 말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혹시라도 자기가 믿는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껏 아무리 선택론을 이야기해도 그러한 자들에게는 욕을 먹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예 이런 선택론과 같은 것은 너무나 불합리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그냥 자기가 착한 짓을 하면 복을 주고, 나쁜 짓을 하면 벌주는 하나님이지, 어떻게 미리 선택하셔서, 아무리 착해도 지옥으로 보내고, 아무리 나빠도 천국으로 보내는, 그런 의로운 하나님의 속성과 모순되는 불합리한 하나님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 로마서 9장 - 다시 아브라함이 등장 !!
이제 로마서 9장을 보겠는데, 여기에서 또 다시 아브라함 이야기를 끄집어내는데, 하여튼 지독한 양반인데, 사도바울이 말입니다. 계속해서 아브라함 이야기인데, 갈라디아서에서도 역시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을 이야기했고, 또한 아브라함이 나오면 덩달아 사라와 하갈도 세트로서 나오고 겁니다. 그렇지요? 여기 7절을 보겠습니다.
(롬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 잠시, 신비로운 한 편의 '약속' 드라마를 !!
그런데 이와 같은 원리가 어디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고 하면, 놀랍게도 이삭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그 언약의 신비로움을 한번 들어보자는 말입니다. 조금만 더 긴장을 하시고 말입니다.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불임여성인데,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기를 못 낳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삭의 인간적인 의도와 같은, 즉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의도로 이스마엘을 낳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아예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적인, 즉 육적으로 낳을 수 있는 기회마저도 이삭에게는 박탈해버렸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그런 실수는 이미 아버지가 모두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재방송을 다시 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부터는 또 다른 새로운 드라마가 이삭을 통해서 펼쳐지는데,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인데, 즉 그들은 잉태할 때 보니까 둘이 나올 때부터 싸웠다는 겁니다. 그러니 엄마의 태 중에서부터 얼마나 싸웠는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머리카락을 다 뽑혔는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물론 저의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말입니다(ㅋㅋ).
그렇게 서로 붙들고 싸우면서, 아직 3라운드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2분 15초나 남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나와서 밖에서 남은 시간을 또 싸운다는 겁니다. 아마 산부인과에도 그런 아기는 없지 싶은데, 갓 태어난 아기는 울기에 바쁘지 상대방과 서로 싸우면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아기는 부모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로 오는데,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과 구원이 어떤 비밀로 이뤄진다는 것을, 그것을 미리 야곱의 태를 통해서 미리 앞서서 예언으로, 즉 맛보기로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 야곱 - 하나님, 제가 해보겠습니다 !!
그런데 여기에서 뭐가 문제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기를 원하는 리브가에게 퀴즈를 던진다는 겁니다. 즉 "이 둘 중에 누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복의 상속자가 되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아무도 맞추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이루시는 것이지, 인간은 전혀 맞추고 말고 하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한번 맞추었다고 우기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곧 야곱이란 말입니다. 물론 그런 인간은 당연히 죽어야 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의 뜻이 '약탈자' 인데, 그래서 야곱은 자기 힘으로 상속권을 뺏겠다고 하면서, 자기 처지를 비관하면서 팥죽으로 형을 꼬시고,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야곱의 특징이 바로 나쁜 놈 중에서도 나쁜 놈인데, 다른 말로 하면,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즉 죄인의 대변자로서 야곱의 육적인 모습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해서 사랑을 받는, 그런 인간은 결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9장에 보니, "왜 하나님은 에서를 버렸는가?" 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미 에서나 야곱이 태어나기 이전에 하늘나라의 어떤 정보가 있었다는 겁니다. 즉 에서와 야곱이 태어날 때부터 둘이서 붙들고 싸우며 태어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둘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늘에서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된 운명을 따라서, 그들이 어떤 결말로 이어지는지 똑똑히 보라는 말입니다.
◈ 무조건 한 쪽은 사랑을, 다른 쪽은 미움을 !!
다시 말해서, "무조건 한 쪽은 사랑을 받도록 되어있고, 그리고 무조건 다른 한 쪽은 미움을 받도록 되어있다" 라고 하는데, 이게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류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확정된 원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나님을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안 믿는다는 겁니다. 아니, 믿고 싶어도 못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서 사랑을 받는 게 아니고, 이미 하나님께서 사랑을 했기 때문에 줄기차게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를 않고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즉 사랑하되 끝까지 말입니다. 이게 조금 전에 말한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인데, 그렇게 이미 확정이 나버렸다는 겁니다. 즉 이미 하나님이 의사봉을 두드렸다는 말입니다. - 땅!땅!땅!
◈ 성부와, 성자와, 성령끼리 !!
결국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앞서서 했던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인간은 가만히 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끼리 설치고 나대고 해서, 너무 표현이 과격한가요?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 드라마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몇 월 몇 일에 태어나게 하옵소서" 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냥 창세 전에 정보가 입력된 대로 태어나서, 한쪽은 지옥에 가는 코스로 가야하고, 또 다른 쪽은 천국에 가는 코스로 가야만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 둘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지고, 그 전쟁의 여파로 야곱은 고난을 받게 되어있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을 로마서 9장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그러니 누군가가 태어나야 착하든지 악하든지 하는데, 아직도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러니까 "이것이 선이다. 악이다" 라는 것을 인간 차원에서 뽑아낼 건더기도 없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본인이 알아서 성취하는 것인데, 다만 적용되는 대목만이 우리에게 적용될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로마서 9장 15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고 하면, 인간이 최초로 하나님을 독대했던 바로 그 대목을 인용한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긍휼히 여길 자에게만 긍휼이 가고, 은혜를 줄자에게만 은혜를 준다" 라고 하는, 그러니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피조물 - 창조주의 본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사랑하기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또한 은혜를 주려고 만든 것도 아니라, 그 중에서 은혜를 줄 자가 따로 있고, 또한 미워할 자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즉 창조주의 이 본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은혜다움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래서 피조물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취지로 하나님의 본성을 알려주시고, 그 본성이 인간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가 되지 않는데, 그래서 다음 1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원하는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성도 속에, 예수님의 생애를 통째로 !!
그러니 "하나님은 은혜롭다" 라는 것을, 그것을 우리 안에, 즉 택한 자에게 그대로 집어넣어 버린다는 겁니다. 성령께서 말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바이킹도 태우고, 또한 그네도 태우고, 그렇게 경기가 들 정도로 깜짝 놀라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았던 그 생애를 우리 속에, 즉 그것을 우리 생애로 만들어서 집어넣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죽음 속을 느끼게 해서, "하지만 이런 죽음도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우리가 거뜬히 이기고 영생을 얻는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쪽으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스데반 집사이고, 사도바울이고, 그리고 우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매일같이 "이것을 믿느냐? 믿느냐?"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17절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롬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 하나님께서 바로 왕을 강퍅케 !!
성경에서 그야말로 바보와 같이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애굽의 바로 왕인데, 천하의 바로 왕이 말입니다. 사실상 이 바로 왕은 자기는 조금도 강퍅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깔짝깔짝 약을 올려서 그만 강퍅케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 사울 - 다윗아, 미안하다 !!
그 예가 바로 사울 왕인데, 그 사울은 사실 다윗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런데 무슨 병이 들었는지, "다윗아, 이리 오느라. 수금을 켜다오. '상하이 투위스트'가 듣고 싶구나. 아이고 잘한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한다고 하더니만, 창을 쥐고 갑자기 다윗을 향해서 던져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소년 다윗은 "저 양반이 미쳤구나" 라고 생각하고 날아오는 창을 피해서 도망가는데, 창은 벽에 꽂히고 말입니다. 그러자 사울이 하는 말이 "다윗아, 미안하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참으로 희한한 일인데, 우리 '갈무리' 라도 같이 부를까요?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몰라 ♬"
그러니 사울이 아무리 다윗을 보고 "다윗아, 너는 나보다 의롭고 선하구나. 너는 나를 얼마든지 죽일 수가 있는데도, 나를 죽이지 않고 내 옷만 조금 베었구나" 라고 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울에게는 다윗과 같은 철천지원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 사울이 곧 우리의 모습 !!
그런데 그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는 이유도 없이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싫어하고, 또한 우리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쪽으로, 자꾸만 그런 식으로 성경해석을 하고, 그렇게 몰아간다는 겁니다. 하루 중에서 23시간 59분 58초를 그렇게 하다가, 그런데 갑자기 주의 은혜가 임하면,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사울의 이야기가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속에도 사울이 계속해서 퍼지고 있고, 또한 다윗의 요소도 하나님께서 주시면 계속해서 퍼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의 활동성이 있다고 하는 깨닫는 것, 그것이 곧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들어오면, 십자가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왜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원수인지, 우리는 왜 경건치 못한 죄인인지를 깨우치면서, 그렇게 해서 그 옆에 있는 십자가와 동행을 하게 해서, 오직 십자가의 피만으로 구원받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깨닫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자기의 창조주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9장 27절에 나오는데,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지금 진도를 참 잘나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 남은 자만 구원을 !!
여기에 보면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라고 하는데, 즉 이렇게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자칭 자기들이 제 아무리 이스라엘이고 택한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것에 결코 속아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 잠시 복습을 겸해서 !!
여가서 첫 번째 했던 강의를 지금 다시 해보면, 인간은 자연을 보고, 또한 혼돈을 보고, 나름대로의 것을 굳히기 위해서 형식을 동원하는데, 바로 여기에는 합리적 '이성'이 동원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굳히기를 하는데, 여기서 새로운 변화가 오면, 이것을 수정해서 플러스 알파, 즉 메타 형식으로 더 나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렇게 해서 굳혀진 것이 우상이고, 또한 이스라엘 역사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전체의 모든 왕들이 그 이스라엘 자체를 우상시한다는 겁니다. 즉 "이것은 내 나라이다. 나는 왕이다"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인데, 즉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라고 하면서, 그래서 우리아가 죽는다는 겁니다. 다윗은 이것을 통해서 "아하, 하나님이 왕이시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데, 그래서 다윗은 자기 스스로 형식을 만들었음을 자인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어떤 것을 자꾸 소유하려고 하고, 그것을 모아서 자기가 구원을 받았음을 확정을 지으려고, 그렇게 자꾸 자기 중심으로 형식화를 시키려고 애를 쓰는데,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가 생생히 살아있는 것을 떼어내어 버리고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일평생을 집어넣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가 갈등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고 하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남은 자' 라는 말입니다.
그 구체적인 것이 로마서 11장에 나오는데, 3절에서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롬 11: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롬 11: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롬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 엘리야 - 주여, 저만 혼자 남았습니다 !!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그 이전에 엘리야가 먼저 말하는데, 즉 "주여, 저 놈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모두 다 죽이고, 주의 제단도 다 헐어버렸고, 이제는 저만 혼자 남았는데, 그런데 저의 목숨도 찾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두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의 그 사건을 가지고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이와 같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남은 자 - 예수님의 당함이 그대로 그 속에 !!
사도바울이 왜 이 대목에서 구약의 그 이야기를 집어넣습니까? 지금 로마서 9장에서 "왜 하나님께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들이 의인이 되게 했는가?" 라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남은 자, 즉 참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통해서만 되는 것이지, 인간들이 자기 중심으로 해서 이스라엘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은 피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이 누구에게 당했습니까? 이방 민족에게 당한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당했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당함을 그대로 자기 속에 집어넣는 자가 곧 남은 자인데, 그러니 마지막 최후의 남은 자들에게는 그 사건이 그대로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그 중에서 한 사람인 엘리야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엘리야는 "나만 남았습니다" 라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아니다.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구나.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7,000명은 남기는 위력이 있다" 라고 하신다는 말입니다.
◈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쓰는 인간들 !!
그것은 바로 그동안 유대인들이 자기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는지 모르는데, 그러나 그런 것도 자기를 구원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소용도 없는 헛된 짓이었음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10장에 나오는데, 여기서 2절과 3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구원받았다고 여기고, 즉 이왕 구원받은 자기 존재를 더욱 더 굳히기 위해서 열심히 애를 썼는데, 그런데 그것이 진짜 하나님께서 원했던 이스라엘의 모습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네가 어떻게 하는가?" 라는 것에 신경을 쓰지 말고, 오직 "주님께서, 너에게 어떤 주님으로 다가왔는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 사도바울이 로마에 간 것도 !!
사도바울은 로마에 가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런데 난데없이 누명을 쓰고 로마에 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즉 사도바울이 로마로 갈 때는 주께서 억지로 데리고 가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바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로마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을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다가 전도까지 하게 되는데,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 높은 자리가 아니라, 자기는 완전히 얻어먹는 자리에서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다. 즉 자기가 독사에게 물렸을 때, 그래도 몸이 상하지 않는 것을 보고, 원주민들이 자기들끼리 감동을 받아서 "오, 신이시여, 하늘에서 내려오셨군요" 라고 하면서 감동을 하니까, 그때 바울이 "지금 컨디션이 안 좋은데, 그래도 또 복음을 전해야 되나?" 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니까, 또 믿는 자가 발생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사도바울은 느긋한데, 그래서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니, 유대인이 왔을 때도 복음을 전하니까 갈 사람은 그냥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하는 말이 "성경 말씀대로 되는구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구나. 이 화평교회 사람들아!" 라고 말입니다(ㅋㅋ).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것도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고, 그렇게 자기의 갈 길을 주께서 인도하셨기 때문에, 자기는 평생 달려갈 길을 모두 달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가 달린 것이 아니고, 주께서 몰아세우는 것이기에, 그러니 자기도 어쩔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남은 자' 라는 것입니다.
◈ 남은 자는, 방귀도 마음대로 뀔 수 없어 ??
그러니 계속해서 은혜이고 또한 은혜인데, 물론 자기의 열심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이, 즉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겁니다. 즉 은혜가 자기에게 일을 시키니,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방종은 전혀 있을 수가 없는데, 방종은커녕 방귀도 자기 마음대로 끼지 못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그렇게 간섭하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따로 신비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는 것 자체가 신비인데, 그런 것 이상의 또 다른 신비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보통 로마서 10장 6절 이하가 상당히 어려운 말씀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어려울 것이 없다는 겁니다. 6절부터 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롬 10:7)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롬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우리 코앞에 말씀이 !!
이 본문을 100번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를 수도 있는데, 마치 횡설수설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하니, 자기도 하늘에 올라가게 해달라고 하고, 또한 예수님이 지옥에 갔다왔다고 하니까, 자기도 지옥으로 가게 해달라고 하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러니 뭐라고 합니까? "천국에 간 것도 주님이고, 또한 죽음의 세계인 음부의 세계에 간 것도 주님이라고 하면, 주님께서 너의 코앞에 말씀을 주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가지 않고 눈으로 보지 않아도, 또한 지옥에 가지 않고 보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양쪽에 엘리베이터가 연결되어서 모두 통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믿으면, 그것이 곧 주님과 교류하는 매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10장에 보면 나오는데, C.C.C나 네비게이토와 같은 선교단체에서 좋아하는 구절인데 말입니다. 제가 읽어보겠는데, 10장 9절 말씀입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 주님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믿으면, 그것으로 '끝' !!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나는 주님을 만나서 주님의 변화된 것을 볼래. 변화산에서" 라고 하든지, 혹은 "나는 지옥에 가서 주님께서 전파한 것을 볼래. 나도 동참해서" 라고, 그렇게 하지 말고,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있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는 식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다른 증거는 필요가 없는데,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믿으면, 이미 그것으로서 최종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그것을 통해서, 즉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이며, 그런데 주께서 살아서 나에게 믿게 했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모두 알 수 있는데, 왜 다른 신비적인 체험과 같은 것을 찾고자 애를 쓰는가?"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있는 말씀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러니 여기서 '주(主)' 라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 즉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경 한 군데를 찾아보겠는데, 로마서 17장 30절을 말입니다. 제가 이 대목을 매우 좋아하는데, 그런데 제가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로마서는 17장이 없는데(ㅋㅋ), 사도행전 17장 30절과 31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 주님이 부활한 이후에는, 봐주는 게 없어 !!
제가 이 말씀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현대인들이 너무나도 바빠서 갈수록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나오던 사람들도 농땡이를 치고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기 때문에, 그러니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천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갑니까?
미처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허물치 않고 그래도 봐주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는 심판을 하겠다는 것인데, 그 증거, 즉 그렇게 심판하는 기준이 무엇인고 하면,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비적인 체험도 못하고, 꿈에 예수님을 만나지 않아도,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기로 작정된, 그런 시대 속에 우리가 지금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건방지게 현대인들은 십자가를 코앞에 들이대도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옛날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 옛날 이야기를 왜 내게 하는가? 나는 지금 바쁘단 말이야" 라고 하면서 외면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 너, 십자가를 믿을래? 안 믿을래?
하나님께서 그런 것에 대해서 옛날에는 허물치 아니했다는 겁니다. 즉 세종대왕은 허물치 아니했는데, 강감찬과 주몽도 다 봐줬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몽과 같은 경우에는, 그냥 삼족오(三足烏)가 그려진 깃발만 흔들고, 소서노와 연예만 하면 되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다 허물이 되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들보다 선배가 아닌가요? ㅋㅋ)
그러므로 십자가를 모르면 교회의 당회장이 아니라 총회장이 되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이번에 울산 목양교회의 정낙원 목사님이 우리교단의 총회장이 되셨는데, 일단 이 자리를 빌어서 전임자로서 축하를 드리고 말입니다(ㅋㅋ).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십자가를 모른다면 그러한 자리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정한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는 심판 날을 작정하시고 매듭을 이미 지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봐주는 것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최후로 내민 카드가 무엇인 하면, "너, 십자가를 믿을래? 안 믿을래?" 라는 것, 그것뿐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너도 그것을 믿어버리면 산다는 말이야. 왜 그것을 믿지 않는가? 그러니 믿어!" 라고 하는 식으로, 이 마지막 시대에는 들이댄다는 말입니다. 마구 들이대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들이댈 수가 있느냐는 것인데, 그것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못한다는 겁니다. 즉 사람으로는 그런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 주께서 보내신 자가 따로 있어 !!
그래서 로마서 10장 10절에 보면, 주님께서 보내신 자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목사가 아니고, 성도 전체를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께서 보내지 아니하면 누가 전하리요" 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는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롬 10: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가 "내가 전도를 할까? 말까?" 라고 망설이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주님께서 보낸 사람은 전하고 싶어서 환장을 한다는 겁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즉 마지막 심판 때를 앞두고서 전도하는 내용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교회부흥입니까? 복 받는 비결입니까? 오직 무엇밖에 없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오로지 그것만을 전한다는 말입니다. 앞선 1장에서 "복음에 빚진 자" 라는 말이, 바로 이것인데, 즉 말씀 성취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 모든 은사는, 반드시 십자가와 관련되어야 !!
그렇다면 10장에서 16장까지의 말씀은 간단하게 한 마디로 끝내버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은사들, 즉 서로 섬기고, 어떻게 하고 하지만, 그 모든 은사가 무엇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십자가의 정신과 연관된 은사만이 진짜 은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보여주지 못하는 은사는, 그런 것은 일종의 교회단합대회, 즉 교회를 키우기 위한 수작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은사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또한 전혀 복음도 아니고 말입니다.
이제 로마서 10장 13절에서 15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과연 누가 보내셨는가?
여기 14절에서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사람들이 핑계할 내용들을 사도바울이 먼저 다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너희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하고 싶지?" 라고 하면서 대신해서 먼저 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전파하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듣지 못했다고 하는, 그 따위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15의 말씀이 중요한데, 즉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짜 전도하는 사람은, "내가 전하고 싶다" 라는 것이 아니라, 즉 "주께서 보내셨기에, 내가 우편배달부로서 당신에게 봉사하는 차원에서, 즉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는 차원에서 당신과 나는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인연인지, 우리는 그렇게 만났습니다" 라는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로마서 11장, 12장, 13장에서는 교회에 주어진 은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밥을 퍼주는 봉사를 하든지, 청소를 하든지, 점심 식사당번을 하든지, 또한 교회의 형광등을 갈든지 간에, 언제나 그 정신은 무엇인고 하면, "나는 형광등을 갈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보내신 분이 나로 하여금 형광등을 갈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보내시는 분을 증거하는 입장에서만 하는데, 그 분이 바로 이미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신 분입니다" 라는 쪽으로, 그렇게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은사인데, 그러니 그런 사람이 하는 일이 조금 어설프더라도, 설령 청소를 하다가 그만 화분이나 화병을 깨트리고, 또한 형광들을 갈다가 깨는 일이 있더라도 너무 나무라지 말라는 겁니다. 즉 "믿음이 약하다고 형제를 너무 야단치지 말라. 주께서 그를 위해서 죽었단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 '십자가'로서 한 형제임을 확인 !!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람 대 사람'의 만남으로 보지 말고, 그런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당신을 보냈습니까? 나는 그분이 보내셨는데"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보낸 분이 일치될 때, 그것이 곧 형제가 되는 것인데, 그러면 일치된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허물치 아니했지만, 지금은 허물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안 되려면, 십자가를 증거하는 식으로 만나야 되는데, 이것은 우리 힘으로는 못하고, 오직 주께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의 그네를 마구 태우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는데, 그런데 주께서는 "재미있지" 재미있지?"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뒷부분에 나오는 모든 은사들은, 우리가 "합시다! 합시다!" 라고 하면서 단합대회를 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이 마지막 시대에는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이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런 십자가의 정신을 품고, 청소를 하든지, 혹은 권면을 하든지, 그 모든 것들이 다 십자가로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교회의 도박화 ??
다시 말해서, "당신의 카드를 보여라. 뭐고? 광땡인지 장땡인지 한번 까봐라. 무엇을 잡았기에 그렇게 봉사를 하면서 설치노? 그러면 나도 까겠다" 라고 해서, 그렇게 서로 펴보니까, 서로가 다같이 들고 있는 것이 십자가라는 겁니다. 이것이 일명 '교회의 도박화' 인데, 다들 경험하고 계시지요? (ㅋㅋ).
그렇게 되니 "야, 십자가가 있으니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렇게 봉사를 하셨구나. 이번에는 권사님께서 식사당번인데, 손에 십자가를 쥐고 있기 때문에 오뎅국을 해오셨구나" 라고 하면서, 맛이 있든 없든 간에 십자가를 떠먹는 심정으로 오뎅국을 먹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다음에는 좀 더 맛있게 하면 좋지만 말입니다(ㅋㅋ).
이렇게 될 때, 그런 교회에서 문제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먹는 사람도 십자가 대하듯이 대하고, 또한 준비하는 사람도 십자가로 하는데, 여기에서 어떻게 사람을 자랑하고 자기 입맛을 따지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무슨 경쟁이 필요합니까? 이 마지막 시대에, 십자가 때문에 피차 심판에서 피했는데 말입니다.
◈ 그러니 이제, 사랑으로 하나가 !!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눈이 귀에게 너는 쓸데없다고 못하고, 또한 손이 귀에게 쓸데없다는 소리를 못하고,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13장, 즉 '사랑장'으로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모든 것이 바로 십자가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란 것입니다.
(고전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고전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