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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7자유게시판로마서

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7

이름 : 구득영(IP:203.223.97.138)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7 (둘날 저녁1) 죽는 하나님

2007,01,09 강의 이근호, 녹취 이장우

◈ 오잉, 하나님이 죽어요 ??

아직 4분이 남았지만, 먼저 시작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죽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데, 즉 "사람은 죽어도 신은 죽지 않아야 한다" 라는 겁니다. 신이 신다워지려고 하면, 죽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죽음을 경험하지 않아야만 신답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신은 죽음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 곧 우리네 상식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만 우리에게 죽는 하나님을 보내셨는데,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거부하였다는 겁니다. 즉 죽는 하나님은 싫고, 그런 나약한 하나님은 싫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손에 맞아죽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에게 너무나 낯설고 예상치도 못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방 종교를 보면 죽는 하나님은 없는데, 왜 죽는 하나님이 성립 자체가 안 되는고 하니, 인간이 신을 섬긴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의로운 행동이기 때문에, 그래서 신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그저 계시고, 우리가 열심히 순종하고 믿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죽는 하나님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란 분은 나대지도 설치지 않고, 안방에 그냥 턱하니 앉아만 계시면서, 우리가 알아서 드리고 바치는 정성과 찬양과 예배와 경배를 그냥 받으시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쉽게 납득이 되고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인데, 이런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하나님 관(觀)에 딱 적합한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 성경은, 너무나 낯선 하나님 !!

그런데 성경은 낯선 하나님, 즉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무엇인가 겁을 잔뜩 주시면서 "봐라. 안 믿었잖아. 모두가 다 거부하였잖아"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심지어 신을 믿을 능력까지 없다고 쏘아붙이는 하나님,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예 없다고 단정하고 접근하시는 하나님인데, 정말 그런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신을 섬긴다는 이 거룩한 종교적인 행위가 아무런 쓸모 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 민족의 심성에 종교성이 없었으면 몰라도 엄연히 종교성이 있었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널씬하고 예쁜 시녀들이 있었고, 옥저나 동예 시대의 부족들은 제천의식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국사의 기초만 배운 사람들도 모두가 다 아는데, 가야지방과 같은 곳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을 보면 신을 섬기는 제천의식이 모두 다 있었다는 겁니다. 이런 제천의식의 경우에는, 국가의 큰 행사가 있기 이전에 선행되는 행사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물론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그것은 실제로 신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서 백성들의 의지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집결시키기 위한 일종의 이벤트의 성격이 짙다" 라고 말입니다. 아무튼 후대에서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만, 그러나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신 앞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뭉친다는 겁니다. 즉 "신이시여, 우리는 나약합니다. 도와주소서!" 라고 말입니다.

◈ 가정에서 드리는 제사의 목적은?

그리고 동네에서도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대동제' 라고 해서, 정기적으로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조상님이 돌아가신 날을 기념해서, 대제사장 격인 가장이 식솔들과 함께 동참하게 되는데, 물론 부인은 시녀가 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장의 권위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특히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는 장남이 힘을 쓰게 되는데, 즉 장남이 제사를 드리고 동생들에게는 돈을 내라고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제는 그런 제사를 지낼 때만 장남이 아니라, 집안에서 큰 일들이 있을 때도 장남이 주도하는데, 특히 유산문제가 생기면 말입니다. 물론 그런 때는 형수가 주도하지만 말입니다(ㅋㅋ).

◈ 성경에서는, 왜 죽는 하나님인가?

아무튼 죽는 하나님이란 참으로 낯선 하나님인데, 그런데 성경은 왜 죽는 하나님입니까? 그것은 바로 죽지 않고서는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엮을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자기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죽은 것으로 보는데, 그런데 자꾸만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쏘아대는 그 죽음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가 그렇게 숨을 쉬면서 살아있다고 여기니까, 그렇게 살아있는 채로 어떻게 신과 한번 엮어보겠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들은 마치 창세기의 가인처럼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자기의 제사를 받아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아벨은 자기가 죽어야만 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제사를 드리고는, 결국 그 제사에 의하여 죽게 되는데 말입니다.

소위 죽은 자의 폭력에 의하여 정말이지 살아있는 자가 죽임을 당하는, 즉 죽은 자로부터 살아있는 분이 죽음을 당하는 상황이 그만 연출되고 마는데, 이것이 마치 진짜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진짜 죽은 놈들인 인간들에 의하여 맞아죽는, 그런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 너도 죽고 나도 죽고, 그 죽음 안에서 만나자 !!

그래서 하나님은 자꾸만 죽음의 장을 확장시켜서, 죽음의 장에서, 즉 죽음에서 연합하자고 한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채로 신과 인간이 결합하지 말고 죽은 자리에서 말입니다. 그렇게 "죽음의 자리에서 너와 내가 만나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너도 죽고 나도 죽고, 그 죽음 안에서 만나자" 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결코 저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각인데, 그것이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보면 나와있다는 말입니다. 이 요한복음 10장에는 그 유명한 '목자와 양'의 관계가 나오는데, 특히 14절과 15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요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목자 !!

여기서는 예수님과 하나님만이 아는 그 관계가 다른 사람에겐 감추어지고, 오직 예수님의 양, 즉 참된 양에게만 그 정보가 전달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정보가 어떻게 전달되는고 하니까, "내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납득되는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 목자답다" 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양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건 양의 입장에서 보면, "아하, 목자가 나를 위하여 죽어야만 하니, 나는 죽은 양이구나" 라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즉 양은 이미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 '죽음'을 공통분모로 해서 !!

그러니 목자는 죽으려고 오고, 또한 양은 이미 자기는 죽은 양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렇게 서로 '죽음' 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서, 그렇게 해서 예수님과 하나님만이 아는 그 정보가, 그렇게 '죽음'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교통하고 통한다는 말입니다.

◈ 세례란, 죽음 안에서의 연합 !!

이것이 바로 로마서 6장의 이야기와도 동일한 것인데, 즉 로마서 6장 3절을 보면, 그런 죽음 안에서의 연합을 두고서 '세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곧 세례라는 것입니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리고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이 세례를 집단죽음으로 표시하는데, 그것을 두고 일명 '홍해 건너기' 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홍해 위에 다리가 마치 한강다리처럼 있어서, 그렇게 그런 다리 위를 건넜다고 하면, 그들은 아무리 홍해가 있다고 해도 홍해를 건넌 게 아니라 다리를 건넜다는 말입니다. 제 말이 맞지요? 그들은 홍해가 아닌 홍해다리를 건넜다는 것입니다.

(고전 10: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 홍해를 건너는 방법 !!

그런데 지금 우리가 성경을 한번도 읽어보지도 못했다고 여기고, 여기에 이렇게 '홍해' 라는 검푸른 바다가 있다고 하면, 그러면 여기 이렇게 다리가 없는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다고 하면, 그들은 반드시 무엇을 생각하는고 하면, 죽음이 없이 살아서 건너는 방법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1)헤엄치기, 2)배를 구하기, 3) 계절상 땅이 말랐을 때 건너기" 라고, 그렇게 당연히 생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홍해를 건널 때는 계절적 요인으로 다 말라서 물이 바짝 말랐을 때 건넌 것이 아니고, 홍해 바닷물이 좌우에 절벽처럼 갈라졌다는 겁니다. 그것은 전혀 바닷물이 마르지 않고 풍부한 상태에서, 즉 죽음의 바닷물의 중간이 그만 갈라지게 해서 건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죽음 속을 통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그것을 두고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세례' 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요단강도 마찬가지인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습니다만(ㅋㅋ),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재의 표지를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그런데 윗통을 벗고 반쯤 잠긴 모습이라는 겁니다. 사실은 물에 완전히 잠겨버려야만 하는데, 즉 죽음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곧 홍해를 건너는 모습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는 죽음을 의미하며, 또한 단독 세례가 아니라 집단 세례를 의미한다는 겁니다. 집단 세례가 왜 가능한고 하면, 예수님이 상대하는 것은 어떤 특정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 전부를 모두 다 차별 없이 상대하기 때문에, 그래서 집단적으로 홍해를 통과하는 것이며, 그것은 죽음을 통과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 신약의 십자가는, '통과함'이 없어 !!

이처럼 구약의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죽음을 통과하지만, 그러나 신약에서는 구약과 같이 통과함이 없이 그냥 "함께 계속해서 간다" 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과 같은 경우에는 홍해를 건너고 나서 헤헤거리다가 그만 광야에서 다 죽었는데, 그러니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십자가란, 구약처럼 "십자가를 통과해서" 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은 구약 때 "홍해를 건넌 이후에" 라는 말은 성립이 되지만, 그러나 신약에서는 십자가에 의하여 모든 것이 다 삼킴이 되기 때문에, 즉 "이젠 십자가가 이동하는 곳에는 자기 백성이 항상 함께 간다" 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그게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입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이제는 "십자가 안인가? 십자가 바깥인가?" 라는 것으로 이제 모든 것이 확증되는데, 이것은 또한 "나는 죽음과 함께 한다" 라는 것이고 말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면, 신에 대해서는 무엇인가 전혀 엉터리 신 개념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과 함께 함으로서, "나는 죽어야 마땅하고,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라는 것이 눈에 뜨인다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까? 즉 예수님께서 지옥의 죽음에 함께 동참해서 살려내시는데, 바로 그러한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능력을 느끼도록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 열 번째 재앙인 '죽음'의 경우에 !!

구약의 출애굽기 7장에서 12장에 보면 10가지의 재앙이 나오는데, 그런데 5번째 재앙부터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입장에선 그 재앙을 느긋하게 맞이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재앙이 애굽인들이 사는 땅은 작살을 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고센 땅은 아주 잠잠하여 여유 만만하게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즐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모두 다 죽음의 재앙이 찾아오는데, 단지 살아남는 것은 어린양의 피에 동참해야만, 그래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된다는 겁니다. 심지어 이방인이라고 해도 유월절의 의미를 아는 자들은 살아남았는데, 그래서 그런 잡족들도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서 함께 나왔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동행한다는 것은, 항상 죽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출 12:38)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 새로운 혼인잔치 !!

로마서 7장 1절에서 4절을 보면, 새로운 혼인잔치가 나오는데, 즉 율법과 혼인을 한 어느 여자가 이제 율법과 헤어지고, 성령과 더불어서 사는, 즉 새로운 남편을 맞이하는 대목이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전에 그녀는 누구하고 살았습니까? 즉 이전에 살던 그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에서 벗어났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경우에,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성경을 눈이 빠지라고 살펴보아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의 남편을 만났을 때는, 이미 자기는 어떤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성령' 이라고 하는 자기를 살려내는 새로운 남편과 함께 새로운 부부관계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롬 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롬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롬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 다시 정리해도, '죽음'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

다시 정리를 겸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야말로 낯선 하나님을 한 분 소개했는데, 그런데 그분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입니까? 죽음의 모습을 하신, 즉 죽음의 세력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죽음의 모습을 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기기에, 그렇게 살아있는 자기 자신과 살아있는 하나님으로, 그렇게 서로 교류가 가능한 신을 원하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살아있다고 하는 이런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죽음의 모습을 하고서 찾아오셨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생뚱맞게도(?)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죽음의 모습으로 왔을 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신이 아니라고 해서 당연시하게 배척을 하였고, 그래서 그분은 그렇게 배척을 당하고 또한 죽임을 당했는데, 그런 죽음이 확대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밀쳤던 그 죽음을 가지고 다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요한복음과 출애굽기를 말씀드렸는데, 일단 그렇게 정리를 하고, 이제 로마서 4장 23절에서 25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롬 4: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 멍한 우리와, 너무나 분주하신 하나님 !!

그러니 여기서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죽은 채로 가만히 있는데, 그런데 주님은 우리 바깥에서 그야말로 혼자서 바쁘다는 겁니다. 이러한 경향이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로마서 끝까지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입장이 노출된 것으로 그냥 끝나고 가만히 있는데, 즉 우리는 우리가 어찌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우리 바깥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야말로 분주하기가 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님을 살리시는 것을 그냥 멍청하게 쳐다보는데, 물론 그렇게 쳐다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아, 우리를 살리려고 저렇게 백방으로 애를 쓰시는구나.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구나. 어,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살아나셨네" 라고 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그냥 쳐다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쪽에서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고, 또한 말릴 수도 없다는 겁니다. 그냥 분주하게 주님께서는 일을 자꾸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로마서 5장, 6장, 7장, 8장, 9장으로, 그렇게 계속해서, 특히 9장이 하이라이트인데, 11장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그렇게 계속해서 그런 쪽으로 끝까지 밀려간다는 말입니다.

◈ 우리를 '죽은 자'로 규정하셨기에 !!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전혀 손을 쓸 수가 없는데, 다만 주님과 하나님께서, 그렇게 두 분이 혼자서(?) 바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멍청히 그냥 서있는데도, 주님께서 모두 다 알아서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는 아예 죽은 자로 규정을 해놓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죽은 자로 말입니다.

◈ 로마서 5장 - 아, 두 아담 사이에 낑겼다 !!

이제 로마서 5장을 보겠는데, 우리는 가만히 있고, 주님이 알아서 우리를 처리하시는데, 저는 여기서 이 '처리하다' 라는 용어가 적당하다고 보는데 말입니다. 즉 우리를 처리하시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작업을 벌리는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가만히 있다고 하면, 그러면 어떤 식으로 가만히 있느냐는 말입니까? 물론 우리는 "나는 점잖다. 나는 살아있다" 라는 식인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처리하시는고 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그 앞에 아담을 내세우신다는 말입니다. 즉 먼저 첫째 아담을 내세우시고, 그리고는 둘째 아담인 예수님을 내세우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이에 그야말로 낑긴(끼인?)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즉 별 의미도 없이 존재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 세례, 연합 - 아, '멍' 때리네 !!

다시 말해서,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더 큰 어르신인 두 분께서 "아담은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우리의 조상 아담과 예수님이라는 두 큰 기둥 사이에서, 즉 우리는 아담을 인하여 죄인이 되었음을 알았고, 또한 예수님을 인하여 의인이 되었음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그것뿐인데, 그게 곧 믿음이란 말입니다. 전혀 행함이 없이 말입니다.

그러니 로마서 5장이 간단한데, 첫째 조상 때문에 우리에게는 죄가 생산되고 또한 폭발하는데, 그런데 둘째 아담이 되신 예수님 때문에, 그 죄에 대해서 은혜가 넘쳐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그 사이에 끼어서 멍청하게 바라보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을 가지고 연합, 또는 세례라고 한다는 겁니다.

◈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

이것이 출애굽기 14장의 내용과도 같은 것인데,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모세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어떻게 건널 것인지, 그런 것을 전혀 구상하지 않고, 그냥 바다가 갈라져서 홍해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다리 위를 건넌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그러니 분명히 애굽 군대가 뒤에서 보았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속으로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까이 와서 보니, 그 안에는 길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그 길을 따라갔는데, 하지만 홍해 바다가 그만 합쳐져서 모두가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굽 사람들의 입장에서 억울합니까? 억울하지 않습니까? 전혀 억울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이 물고기도 아니면서 물에는 왜 들어오느냐는 겁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육지 위를 걸어다녀야지, 바다 속을 꾸역꾸역 왜 들어오느냐는 말입니다. (그래도 억울할 것 같은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똑같은 인간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건너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애굽군대는 "우리가 남이가?" 라는 심정으로 따라왔지 싶은데(ㅋㅋ), 하지만 그들은 전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는 남이다" 라는 겁니다. 야속하게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의 피로서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죽음의 터널을 무사하게 통과했지만,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살았다고 자처하기 때문에, 전혀 유월절의 피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죽음이라는 장벽을 도저히 통과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즉 애굽 군대는 하나님의 군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 사사기 - 붙이시매 전쟁 !!

사사기의 경우에,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하나님의 무기는 단 한 가지뿐인데, 즉 이미 죽음을 가지고서 무기를 삼기 때문에, 이미 죽은 이스라엘에게는 전혀 해로움이 되지를 않지만, 그러나 자기들이 살았다고 여기는 이방 민족들에게는 하나님의 죽음의 방식으로 전부가 다 쓰러지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유황불이 떨어지고, 해가 멈추고 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그냥 멍하니 서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붙여주시니까, 즉 살았다고 하는 작자들이 이미 죽었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딪히니, 그들은 그냥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벌리시는 '붙이시매' 전쟁이란 말입니다.

◈ 아침저녁 제사 - 죽음에서 생명으로 !!

바로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 속에서 생명을 찾았고, 그들을 삶 속에서 죽음이 찾아와서 그냥 죽어버리고 하는, 이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곧 제사법이란 말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림으로서, 즉 "우리는 이미 죄로 '죽은 자'이고, 또한 하나님의 의로서는 '산 자'입니다" 라고 하는,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약속을 그대로 적용을 받고 있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야곱에게 주어졌는데, 그런데 야곱은 이미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죽은 자이기 때문에 야곱이라는 이름이 불려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은 살아났기에, 그러니 살아난 것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즉 '이스라엘' 이란 이름을 행사할 하나님께서 야곱 안에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야곱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야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다운 행동을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 야곱 - 아, 내 아들이 죽었구나 !!

그렇게 해서 야곱은 요셉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데, "아, 내 아들이 그만 죽었구나!" 라고 말입니다. 나중에 보니 요셉은 분명히 죽었다는 겁니다(?). 지난주에 주일학교 설교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혔는데, 그것도 비로도(?)를 말입니다. 요즘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옛날에는 비로도를 알아주었다는 겁니다. 즉 번득번득하는 채색 옷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형제들은 당연히 시기가 났는데, 그래서 그만 다른 형제들이 그 채색 옷에다가 짐승의 피를 묻혀서 "아버지, 당신이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습니다. 여기 피를 보세요" 라고 했는데, 그때부터 물론 다른 사람들의 역사 속에서는 요셉이 여전히 살아있을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야곱의 역사 속에서는 요셉은 이미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야곱은 요셉이 살아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야곱에게,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이 살아있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언약이 갖고 있는 고유한 능력, 즉 죽은 자를 살려내는 그 능력이 야곱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 성도가 십자가만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십자가는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죽은 우리를 살려내는,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심장마비로 죽어도, 또 살려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것을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일깨워 주기 위해서, 그래서 십자가의 의미로서, 즉 죽은 하나님이란 모습으로, 그것을 자꾸만 우리가 느끼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5장, 6장, 7장, 8장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즉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우리의 외부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나중에 8장에 성령까지 동원이 되니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자기들끼리, 물론 하나님을 자기들끼리라고 하면 안 되지만(ㅋㅋ), 아무튼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는 우리를 다 알아서 하신다는 말입니다.

◈ 율법 - 죄 때문에 죽어야만 해 !!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담으로 말미암아서 가만히 있어야 될 수밖에 존재임을, 그것을 첫째 아담을 통해서 우리에게 설명해 준다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5장의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즉 "내가 율법을 준 것은, 너희가 왜 죽어야만 하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즉 차후에 너희 죄 때문에 죽었다는 이유를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주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은 죽고 또 죽어도, 그들이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율법에 와 보니 "아하, 먼저 죽었던 조상들은 죄의 값이 사망이라는 것 때문에 죽었고, 우리도 또한 죽을 것이고, 앞으로 내 자식도 죽을 것이고, 그렇게 죽음이란 것은 우리에게는 전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구나" 라는 것을 율법이 확정지어 준다는 것입니다.

◈ 분주하신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기에 !!

그것으로 우리는 끝나는 것인데, 그 다음에는 우리 바깥에서 대단히 분주하신(?) 분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서, 즉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다시 부활시킬 수 있는 권세를 위임받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 때문에 죽었기에, 바로 그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은혜로 씻어주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즉 옛날 아담이란 조상 때문에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죄인이 된 것처럼,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의인이 된다는, 바로 그러한 혜택이 예수님으로부터 쏟아진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말입니다.

◈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참된 하나님을 !!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에 알게 된 비밀이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하나님을 나타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데, 즉 도대체 죽은 자에게 무슨 행함이 의미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 의(義)에 관심조차 없는 이방인들 !!

로마서 9장 30절에 보면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 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이 표현이 멋지다 싶은데 말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의롭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아예 그런 의에 대해서 관심조차도 없었다는 겁니다. "아, 나는 의로워야 하는데" 라고 하면서 애쓰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아니, 의? 그게 뭔데?" 라고 하면서, 그런 하나님의 의에 관심조차 없는 인간들이란 말입니다.

(롬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다시 말해서, 그런 의를 추구하지도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러한 '의(義)' 라는 것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몰랐던 그들이 바로 이방인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이방인들이 의를 받은 것은, 그것을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세례' 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나니, 그들이 놀랍게도 의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들이 사전에 무엇을 추구하였다든지, 아니면 의인되기 위해서 유대인의 메시야를 믿었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 전혀 없이, 그냥 성령이 임하니 그들이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방인들은 그야말로 졸지에 의인이 되고 말았는데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31절과 32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롬 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 유대인들 -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

여기 32절에 보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라고 하는데, 참 어려운 말인데 말입니다. 그들은 믿음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지한다' 라는 것이 행함에 속합니까? 속하지 않습니까? 역시 어려운데, 즉 "의지함이 과연 행함인가?" 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결코 의지함이 행함이 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믿음을 행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그것은 그냥 하나의 표현이라는 겁니다. 즉 믿음을 드러내지 않고 행함을 드러냈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인가 의지한다" 라는 것을 딱 떼어내게 되면, 그것을 "내가 의지해야지" 라고 마음에 굳게 결심하고, 그렇게 해서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에 옮겨야만, 거기에서 '의지함' 이라는 것이 나오는 줄 알고 있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 앞에 있는 믿음과 앞에 있는 행함에 의해서, 그런 '의지함' 이라는 것은 그냥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믿지 않고 행하였기에, 그래서 그들은 당연히 부딪히는 돌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죽음 안에서 행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라는 의미인데, 즉 이미 죽음 안에 있는 인간들이 행하고 말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 이방인들 - 그냥, 포기해 !!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이방인들이 언제 그러한 의에 관심이라도 있었느냐는 겁니다. 전혀 없었는데, 그러면 누가 행하였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그 주체가 곧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거기에 대해서 5장부터 나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아담이기 때문에, 즉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아담이기에,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님을 부른다든지 찾는다든지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죄에 갇혀있는 인간으로는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포기하라는 것인데,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그들에게 은혜가 임하니 어떻게 됩니까? 자신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 임마, 내 아들이 죽었어 !!

그렇게 되기 위하여 5장 초반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혹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 다음에 더 심하게 말한다는 겁니다. 10절에 보면, 즉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에" 라는 것을, 그것을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신을 이야기할 때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신의 자리에다 그만 집어넣어 버리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들이 죽었다" 라는 것인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신을 찾는 행위로서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즉 "아들의 죽음에 의해서 무엇인가 너에게 전달되는 것이 있어야 구원이 되는 것이지, 네가 살아있는 채로 신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렇게 신에게 나아가고 영접하는 방식으로는 구원되지 않는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주께서 다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하지 아니하면, 그건 신자도 아니고 성도도 전혀 아니라는 뜻인데, 바로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로마서 5장 7절에서 10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롬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

여기 9절을 보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만약에 죽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필연적으로 무엇이 주어진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 목숨이 끊어져서 죽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우리를 노리고 대기상태에 있었는데,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서, 그 피안에 있는 사람은 무엇에서 벗어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에게 죄가 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된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 피 때문에 이미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 '피'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어 !!

따라서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그건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분의 피를 믿지 않든지, 아니면 살아있다고 하는 자기 자신이 그 피를 믿어서 천당에 가보려는 수작을 벌린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짜이고 말입니다.

오직 그분의 피가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믿게 하였다는 의식이 있어야지, 그게 아니라 자기 쪽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즉 자기가 더 살아보려고 그리스도의 피를 믿어서 이용하려고 한다면, 그건 로마서 5장에서 "가만히 있어라" 라는 원칙에 어긋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우리는 이미 죽은 존재인데 말입니다.

5장을 넘어가기 전에, 17절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 '왕' 노릇하리로다 !!

여기서 '왕' 이라는 개념을 현대의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인데, 즉 '왕' 이라는 말은, 자기가 통치하는 영역에서 반발이 있을 수 없는 상태를 왕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가 우리의 왕이다" 라는 말은, 우리가 한번도 그 죄에 대하여 거역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했다고 하는, 바로 그런 의미라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주님의 의가 왕이 되었다" 라는 말은,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짓고 또 죄를 연구하고 지옥에 가려고 발버둥치더라도, 하지만 우리의 왕이 되신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그냥 두지 않고, "이 못된 것, 지금 천국에 안 가고 어디로 가?" 라고 하면서 기어이 천국으로 집어넣는, 그런 관계에 놓여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담의 범죄에서 벗어나려고 제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아담의 범죄가 우리에게 왕 노릇을 하기에 아담의 범죄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용을 써도, 즉 "나는 용서가 싫어. 용서를 받지 않을 거야. 나는 예수님의 말을 안 듣고 그냥 내 힘으로 살아갈 거야" 라고, 그렇게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그런 노력이 다 부질없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 연합 - 우리 전부를 몽땅 다 가져가셨기에 !!

우리가 이런 기쁜 팔자가 되었는데,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연구하고 죄를 지으려고 해도, 주님의 용서에서 빼도 박도 못할, 그러한 입장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전부를 몽땅 다 가져가셨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로마서 6장에서는 '연합' 이라고 하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연합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연합한 것인데,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연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나는 이제 주님과는 안 놀래" 라고 하면서 큰소리 쳐봐야 다 허풍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연합을 당했기에 말입니다.

◈ 나는 의(義)의 종이야. 딸랑 딸랑 !!

그래서 우리는 그때부터 그분의 종이 된 것인데, 그런데 종은 주인이 누구냐고 물을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즉 "너는 누구의 종이냐?" 라고 하면, "나는 의의 종입니다" 라고 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자랑한다고 해서 의의 종이 아니고, 의가 오셔서, 즉 주님이 오셔서 종으로 삼았다는 처량한 신세(?), 사실 이것은 처량한 신세가 아닌데, 아무튼 그런 신세가 그냥 철썩 받아졌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 A : 아. 나는 종이야. 딸랑 딸랑!
* B : 누구의 종인데?
* A : 주님의 의의 종이야.
* B : 그런 종도 다 있나?
* A : 그럼 있지? 너는 그것도 몰라?
* B : ? ? ?

◈ 성도란, 의(義)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팔자 !!

다시 말해서, "아, 어찌하여 내가 이런 신세가 다 되었지.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내 신세. 지옥에 가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서 그렇게 나쁜 짓만 골라 했는데도 안 되네. 벌써 끝났다고 하네. 이제는 그 어디를 가서 나쁜 일을 해도 의의 종이고, 좋은 일을 해도 의의 종이 되고 말았어. 아이쿠, 내 팔자야" 라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의(義)의 종' 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너희가 의로운 행동을 할 때만 의의 종으로서 삼아주겠다" 라고 하는 계약조건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그 무슨 짓거리를 하더라도 그것을 의의 종이 하는 짓으로서 삼아준다고 하는, 즉 그렇게 연합이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죽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은 우리 팔자도 어쩔 수가 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죽은 우리를 주님의 능력을 살려내었다는 것도, 그것도 역시 우리 쪽에서는 취소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 능력으로 덮쳤으니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은 자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 이게 어디서 까부노 !!

저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TV를 거의 보지 않는데(ㅋㅋ), 그런데 개그 콘서트 가운데서 제가 인상 깊게 보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거기에 의의 종이 나오는데, 의의 종으로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인고 하면 '안상권' 씨라는 개그맨이 '김대범' 이라는 사람에게 잡힌다는 겁니다. "이것이 어디서 까부노?"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소위 '고교천황' 이라는 코너인데, 안상권이 아니고 안일권 입니까?

아무튼 그 개그맨이 호크를 풀고는 좀 노는 것처럼 삐딱하게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개뿔도 싸움도 못하면서 반항을 한다는 겁니다. 그때 김대범이 나오면 "어디 한번 붙어볼까?" 라고 하면서 덤비지만, 하지만 바로 멱살을 잡혀서 꼼짝도 못하면서도 자존심은 있어서 마구 반항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의의 종이라는 것인데(?), 즉 빼도 박도 못한다는 말입니다. 모두들 자존심이 있어 가지고, 즉 자기는 주님이 그렇게 나오시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괜스레 으스대어 보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붙잡은 손을 놓지 않다는 겁니다. 그냥 꽉 붙잡고 끌고 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주님의 종이 된 것이, 우리의 희망사항이나 선택사항이 아니라, 오로지 전적으로 주님께서 선택하신 능력이기 때문인데, 그러한 주님의 멱살을 잡는 능력을 무슨 능력이라고 하는고 하면, 그것이 곧 '부활의 능력' 이라는 말입니다.

◈ 부활의 능력으로 !!

이 부활의 능력이 우리가 살펴본 대로 로마서 1장에서 3장까지 나와있는데, 그런데 그런 부활의 능력에서 나오게 되면, 그 관계가 무엇인고 하니, 즉 안일권과 김대범의 그 관계를 로마서 8장에서 '성령' 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안일권의 내부에서는 김대범의 영이 임한다는 겁니다. 방금 제가 든 예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개그 콘서트 재방송 꼭 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ㅋㅋ).

* 안일권 : 이게 어디서 까부노?
* 김대범 : 그러면 함 붙을까?
* 안일권 : 꼭 붙겠다는 것은 아니고.
* 김대범 : 그러면 뭔데?
* 안일권 : 그래도?
* 김대범 : 왜? 뭔데?

다시 말해서, 의의 종이 우리의 희망사항이 아니었는데, 그런 희망사항 이전에 연합됨을 통해서 이미 결정된 운명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슨 짓을 해도 의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즉 전혀 최소가 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부활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이기는 힘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것보다 더 센 힘이 있습니까? 우리는 아무리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도 결국 죽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죽음보다 더 센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의의 종으로 삼았다고 하면 이제는 꼼짝달싹도 못하게 되었는데, 비록 우리의 자존심을 챙기고 하더라도, 의의 종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그것을 로마서 6장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기어이 무엇을 배태합니까? 그것이 바로, 죄의 삯은 사망이인데, 그것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십자가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의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생명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증거가 됩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서, 우리를 붙잡고 있는 그분이, 이미 생명의 능력으로 붙잡고 있다는 것이 그 십자가를 통해서 확인된다는 말입니다.

◈ '고도'를 기다리며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목사님, 내가 의의 종이라는 것은, 내가 살고 나서 나중에 천당에 가보았을 때, 바로 그때 천국에 딱 도착하였을 때 확인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은 철학에서 말하는 소망이라는 겁니다. 성경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것은 곧 '무한한 지연(遲延)' 인데, 혹은 '무한한 연기(延期)' 라고 하는데, 이것을 세상에서는 소망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냥 기다림 자체를 기다려 보는 겁니다. 물론 뚜렷한 확증이나 증거는 없는데, 즉 "내가 기다린다는 그 자체를 증거로 삼는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소망이 나의 소망의 근거가 된다" 라고 우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인간의 실존에서 나온 것으로서, '고도(Godot)를 기다리며' 라는 유명한 연극이 있는데,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으로 196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말입니다. 전통적 사실주의극에 반기를 든 전후 부조리극의 고전인데 말입니다. 아무튼 무작정 기다리는 것인데, 즉 현대인들은 이러한 부조리함 속에서 무엇인가를 무작정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 소망의 철학 - 기다림이 당신에게 힘을 줄 것이다 !!

'블로흐'의 철학에 보면, 소망의 철학이 나오는데, 즉 현대인들의 희망이나 삶의 보람이 무엇이냐 하면, "무엇이든지 무작정 기다려라. 그 기다림이 당신에게 힘을 줄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목적이 없는 어떤 현재는 희망이 없기 때문에, 즉 비전이 없으면 힘을 잃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무엇이나 비전을 만들어야 하는데, 없는 비전도 자꾸만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회사나 어떤 공동체를 운영할 때 사용하는 무기가 되는데, 그래서 실제로 다단계 회사나 신입사원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회사에서는 이유도 없이 무조건 지금보다도 더 나은 실적을 그래프로 커다랗게 그려서, 그렇게 목표를 정해놓는다는 말입니다.

만약 은행의 지점장의 경우에는, 은행 예탁금이 2006년에 1000억이라면, 그 다음 2007년에는 1500억을 목표로 세운다는 겁니다. 무조건 더 높이는데, 왜냐하면 그런 비전이 없으면 직원들이 일을 하지 않으니까, 일을 시키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높여놓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도 같은고 하면, 당나귀를 계속 달리게 하기 위해서 당나귀의 눈앞에 당근을 달아놓은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아무튼 무조건 빨리 달리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즉 '당근' 이라는 소망을 향하여 무조건 달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 엄마, 이번에 90점을 먹었어 !!

물론 엄마도 그렇게 하는데, 즉 "엄마, 이번 중간고사에서 90점을 먹었어" 라고 하면, 엄마는 뭐라고 합니까? "안돼. 95점이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최종적으로 100점이 목표이고 말입니다. 물론 자기 집 아이가 너무 공부를 못해서 포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또 나름의 목표가 있고 말입니다(ㅋㅋ).

* 아이 : 엄마, 이번 시험에 90점을 먹었어.
* 엄마 : 안돼, 95점을 먹어야 돼.
* 아이 : 이번 시험에 95점을 먹었어.
* 엄마 : 안돼, 98점을 먹어야 돼.
* 아이 : 엄마, 내가 반에서 5등을 했어.
* 엄마 : 안돼, 3등은 해야 돼.
* 아이 : 내가 반에서 3등을 했어.
* 엄마 : 그러면 다음에 1등을 해봐.
* 아이 : 1등을 하라고?
* 엄마 : 그래. 그러면 이 엄마가 기찬 선물을 해주지.

그렇게 계속해서 족치는데, 물론 그것은 피아노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말입니다. 어떤 콩쿠르에 입상하면 다음에는 더 큰 콩쿠르에 나가고 말입니다. 그래서 쇼팽 콩쿠르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등에 나가기 위해서, 한국을 포함한 동양계에서 줄리아드 음대에 공납금을 내어가면서 마구 훌쳐댄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설치면서 훌치고 하면 그만한 성과가 주어지기는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은 우리 내부의 욕망이 만들어낸 자아의 화신이며, 자기 자아의 이상형으로 좇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뭡니까? 전혀 그러한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나'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나'의 소망은 없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수용한다는 겁니다. 즉 '내'가 소유하는 '내' 소망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약속이고 소망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란다고 하면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것은 이미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기쁨으로 영생의 시기를 고대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소망을 수용한 것으로 인정할 수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 소망이라는 것은, 이미 십자가 안에 다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즉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그 안에 소망도 들어있는 겁니다. 물론 환난도 들어있고 말입니다.

여기서 로마서 6장을 다시 보겠는데, 6장 4절 말씀인데 말입니다. 거기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라고 하는데,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서 세례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성령 -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

제가 이번 강의를 시작하면서부터 죽으심을, 즉 죽으심의 하나님이 찾아오셨다고 강조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은 죽음을 왜 그렇게도 강조하십니까?" 라고 한다면, 그 이유가 바로 8장에 나오는데, 즉 그것이 곧 '성령' 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7장에도 약간 나오는데, 그런데 이 성령을 이야기하면서, 죽으심과 상관없는 성령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거의 태반이라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 로마서 8장을 설교하면서, 십자가와는 상관없는 성령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 안에서 성령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래서 지금 6장에서 죽으심과 연합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성령이 나올 때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라고 하는, 그런 차원에서 이해를 해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이제 로마서 7장을 보겠는데, 오늘 저녁에 가셔야 하시는 분도 있고, 내일 아침에 일찍 가시는 분도 있고 해서, 오늘 중요한 테마를 마무리해야 되겠는데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곧 '봉사정신' 이라는 겁니다. 성령에 의해서 적용되는 십자가가 말입니다.

로마서 7장 이전까지는 "너는 죽어야만 돼! 죽어야만 돼!" 라고 하지만, 로마서 7장에서는 "우리가 왜 죽는가? 왜 죽어지내야 하는가?" 라고 하는, 여기에 대해서 '죄'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우리가 죽어지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속에서 죄가 활개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 율법은, 희망을 절망으로 !!

그래서 우리의 힘으로, 우리를 통치하고 있는 죄를 이긴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로서는 하나의 희망사항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신이시여, 제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언젠가는 저의 손으로 이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나가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것이 곧 희망사항인데, 그런 희망사항을 절망으로 바꾸는 것이 곧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율법은 선한 법임에는 분명하지만, 마치 죄와 동업을 한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악마와 동업을 말입니다. 그렇게 악마와 동업해서 율법이 들어오면, 그 악마가 율법과는 꼭 반대로 하도록 우리 내부에서 부추기는 짓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죄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림을 하나 그려보겠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십계명과 모세의 율법과도 같은 것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 이제 율법이 왔다. 이 율법을 내 힘으로 이루어서 의를 이루고, 내 소원을 이루자"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기 이전에 율법을 통하여 죄가 더욱더 활개 치며 들어와 버리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그 착한 의지, 즉 "의로워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올바로 살아야지" 라고 하는 그 모든 것을 완전히 꺾어버리고,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야, 절망이네. 절망이야" 라고 하면서, 다른 말로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을 위해서, 비록 율법과 죄가 서로 반대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마치 동업자처럼 우리의 정체를 폭로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옛 남편으로서의 '율법'과, 새 남편으로서의 '성령' !!

지금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면,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의 남편이 죽고 나서, 이제는 성령이 남편이 된다" 할 때, 그렇게 성령이 우리의 남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자세와 어떤 태도이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래서 먼저 이전의 남편인, 즉 율법이 남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떠한 입장이 되었는지, 그것을 먼저 이야기한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우리의 남편이 되어있을 때는, 율법이 더욱 더 우리로 하여금 억압을 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가 발생되고 죄가 생산되는, 그런 죄의 공장, 즉 죄를 마구 만들어내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게 되는데, "아하, 나는 곤고한 년이구나" 라고 말입니다. 여자이니 놈이 아니라는 겁니다(ㅋㅋ).

그렇게 율법은 저주이기 때문에, "이 저주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을까?" 라고 하면서 주위를 쳐다보는데, 그런데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남편이 아내를 선택하는 것이지, 아내는 남편을 선택할 권리가 전혀 없기에, 그래서 여자는 그야말로 절망적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은 프로포즈를 할 때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데, 그러나 아주 용감한 여자라고 하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꼭 저의 경우라고는 할 수 없는데(?), 그러나 보통은 남자가 주도권을 쥐고서, 즉 장미꽃을 천 원을 주고 한 송이를 사서 "나의 아내가 되어주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내민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는 못 이기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감사합니다" 라고 받아들이면, "짠 짜잔" 하면서 불이 들어오고, 스토리가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슨 TV프로이지?)

물론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말고 교회헌금이나 하면 좋은데 말입니다(ㅋㅋ). 그런데 여자는 그런 일에 감동을 받는다는 겁니다. 제가 여기 이 교재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인간은 자기 존재를 알아주면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감동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감동을 말입니다.

◈ 율법은, 마치 경상도 남편과도 같아서 ??

그러면 여기서 사도바울이 율법을 가지고 왜 남편이라는 표현을 쓰는고 하면, 그 당시에 여자는 남편에게는 종과 같은 입장이 된다는 겁니다. 즉 옛날에는 여자가 남편의 사람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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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8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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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