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6
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6
이름 : 구득영(IP:203.223.97.138)
07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6 (둘날 오후2) 반성의 허점
2007,01,09 강의 이근호, 녹취 이장우
◈ 그러므로 !!
이제 시작하겠는데, 먼저 3장 20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지금 이 말씀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러므로' 라는 말이 성립하려고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다 실험을 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다섯 명을 실험해서 안 된다고 해서, 그러면 여섯 명 째도 안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실험을 해보아한다는 것입니다. 아홉 번을 실패하였다고 해도 열 번째 율법을 지킬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마흔 명이 율법을 지키는데 실패하여도, 마흔 한 번째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또한 나올 수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백조는 하얗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데, 즉 모든 백조가 모두 하얗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까만 백조가 나올 수 있기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건 백조가 아닌 그만 흑조(?)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크립피' 라는 언어학자가 주장한 것인데, 즉 어떤 여지를 남겨두지를 않고서 앞서서 성급하게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인데, 즉 무엇인가 여지를 남겨 두어야지, 그 어떤 것이라도 미리 단정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 너무나 독단적인 사도바울 !!
그러니 성경의 경우에도, "그러므로 어떤 육체도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다" 라는 말은, 이 세상 쪽에서 보면 너무 건방진 주장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그러한 유대인들이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율법은 그 어떤 인간도 아예 지키지를 못한다" 라고 이렇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면, 그것은 사도바울의 일방적인 독단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아마 사도바울이 지금 학자로서 나오면 욕을 많이 얻어먹지 싶은데, "니만 잘났느냐?" 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건 종교적으로 보았으면 "참으로 교만한 자구나" 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십자가 마을 사람들과도 같은데(?), 십자가 외에는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하니 교만하기 짝이 없다는 겁니다. 기존의 한국교회를 다 엎어버리고 십자가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말입니다.
◈ 율법은 실험대상이 아니라 !!
그렇다고 하면, 사도바울은 왜 두 번, 세 번, 네 번, 그렇게 계속해서 실험을 전혀 해보지도 않고서 "그 어떤 육체라고 해도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라고,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단정해버리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은 결코 실험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 참으로 중요한 말인데, 즉 율법이 실험대상이 아니고, 즉 율법이 주어질 때는 우리를 보고 새삼스럽게 실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음주운전을 단속하는 경찰관이 "어서 부세요. 더더더더, 더 부세요!" 라고 하는, 그러한 실험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율법은, 인간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
그러면 무엇입니까? 율법이 주어질 때는, 그 율법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전혀 극복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러한 것을 율법으로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율법은 우리를 상대로 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고, 율법은 우리가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는 더욱 더 큰 세력을 겨냥해서 왔기 때문에, 그러니 새삼스럽게 타협하거나 우리와 정치적으로 흥정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사장님이 계십니까?" 라고 하는데, 밑에 있는 계장이 자기를 만나러 온 줄 알고 "제가 계장인데요"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니, 당신이 아닌데요" 라고 하니, 그러자 과장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니, 당신도 아니고, 사장님을 만나러 왔어요"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아하, 회사에서는 사장 말고는 만날 사람이 없구나" 라는 것을 단정짓게 한다는 말입니다.
◈ 율법으로는 의롭다고 할 인간이 없음을 !!
그와 같이 율법이 찾아온 것은, 즉 어떤 인간도 율법으로는 의롭다고 할 인간이 없음을 율법이 미리 알고, 그렇게 의도적으로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유대인들아, 나도 같은 유대인이지만, 너희들이 왜 이것을 모르는가? 나도 한 때는 율법으로 잘 나갔는데, 하지만 지금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나는 죄인 중에서 괴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온 목적안 바로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십일조는 어떻게 하고, 안식일에는 무엇을 지키고 하는, 그런 식으로 나오느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율법을 잘 지키라고 율법이 온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 율법은 죄를 깨달음이라 !!
여기서 "율법은 죄를 깨달음이라"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원래 신자에게만 해당되고, 불신자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데, 그러면 율법에서 죄를 깨닫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율법에서 죄를 깨닫는 것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즉 죄를 깨닫는 것이 율법 그 자체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난 뒤는 율법은 소용이 없다" 라고 했는데, 하지만 율법은 죄를 깨닫는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율법이 날아가면 무엇도 함께 날아간다는 말입니까? 죄를 깨닫는 것도 함께 날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죄를 깨닫는 것이 날아간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에게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 아니, 전혀 죄가 없는 사람이 ??
흔히들 "나는 십자가 믿고 난 뒤에 율법은 필요가 없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율법이 날아가 버리면 죄를 깨닫는 것도 같이 날아가 버리는데, 그렇게 되면 죄가 없는 상태인데, 그러면 십자가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전혀 죄가 없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죄를 알기는 아는데 죄를 짓지 않은 것과, 아예 그 죄를 전혀 모르는 사람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일서와도 연결이 되는데, 굉장히 복잡한 문제라는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 이제는 십자가가 왔기 때문에, 그래서 율법은 자기에게 더 이상 자기에게 관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그만 치워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무엇이 잘못되었지 살펴보겠는데, 다시 한번 강조를 하는데,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받아들이고 싶다고 받아들이고, 또한 율법의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가 치우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치울 권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럴 권한이 전혀 없는데도, 하지만 십자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받아들이고, 또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그런 권한이 자기에게 있는 줄 안다는 겁니다. 그런 권한이 우리에게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여기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제 율법과 상관없고, 십자가와만 상관이 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죄를 깨달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이 "나는 죄가 있다" 라고 했을 때, "그러면 당신에게 죄가 있다고 하는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라고, 즉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깨달았는가?" 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그것은 내 양심상 알지"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양심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율법인데, 즉 그것이 바로 율법적인 기능이란 말입니다.
* A : 나는 죄가 있다.
* B : 그것을 어떻게 깨달았는가?
* A : 내 양심상 알지.
* B : 그 양심이 뭔데?
* A : 양심이 양심이지 뭐.
* B : 그게 바로 율법적 기능이야.
* A : 그게 율법적 기능이라고?
* B : 아무튼 그런 게 있어.
* A : 잘 모르겠는데?
* B : 그러면 이 강의를 끝까지 잘 들어봐.
◈ 잠시 '양심'에 대해서 !!
지금 분위기가 좀 산만한데(ㅋㅋ), 잠시 양심이란 것에 대하여 설명하겠는데, 분위기 전환도 겸해서 말입니다. 이 양심을 분석하면, 그 안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반성하는 시도, 즉 반성하는 근거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반성한다' 라는 것은, 그러한 반성을 하기 전의 'A' 와 반성한 후의 'B',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반성하고 있는 '나', 그렇게 세 가지가 다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반성을 한다" 라는 말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반성하기 이전보다 반성한 이후를 더욱 더 훌륭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반성을 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점점 더 훌륭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아까 이야기했는데, 모든 의미는 어디에서 생긴다고 했습니까? 인간은 어떤 차이에 의하여 자기 존재의 가치를 느낀다는 말입니다.
◈ 사람이 반성을 하려면, 먼저 나쁜 게 있어야만 !!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기가 반성하기 이전보다도 반성한 이후에 더욱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어떤 모순점이 있는가 하면, 이것은 칸트가 이미 발견을 하였고, 다른 많은 윤리학자들도 발견을 한 것인데 말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너무나도 훌륭한 사람이 다음에 반성을 하려고 하면, 그 훌륭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해야하지 반성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이것은 머리 조금 써야 하는데 말입니다.
다시 하겠는데, 즉 사람이 반성하기 이전보다 반성한 이후에 자기가 조금이라도 더 훌륭하여 졌다고 한다면, 그 훌륭한 것이 다음에 더욱 더 훌륭한 것이 되려면 무슨 과정을 거쳐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반성하는 과정을 또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훌륭한 '나'를 더욱더 나쁜 놈으로 만들어야만, 그 다음에 반성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 그 앞의 반성을 취소해야 새로운 반성이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나' 라는 것이 그렇게 훌륭하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나쁜 놈을 만듭니까? 그렇게 훌륭한 '나'를 어떻게 나쁜 놈을 만드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훌륭한 '나'를 나쁜 놈을 만들려면 그 이전에 무엇을 취소시켜야만 하는 겁니까? 그 이전에 반성한 것이 헛된 짓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맞습니까? 아니면 틀렸습니까? 맞다는 겁니다. 사람이 반성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버리면, 그러면 전혀 빈틈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더욱 훌륭해지려고 하면, 즉 "나는 반성을 해도 '나쁘더라" 라는 것이 마련되어야, 그래야 다음에 더욱 더 훌륭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러한 나쁜 놈이 되려면, 그렇게 현재 나쁜 놈이 되기 이전의 상태를 취소해야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 어머님, 제가 앞으로 밑반찬 천 개를 !!
여기까지 생각하려고 하니까 여러분의 두뇌에 그만 부하가 걸리는 것 같은데(ㅋㅋ),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며느리가 "저는 죄인입니다. 회개하고 반성합니다. 이제 시어머니를 잘 섬기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하고 그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위해서 밑반찬을 천 가지를 준비해서 섬긴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교회에서도 "정말이지 훌륭합니다. 요즘에도 이렇게 시어머니 섬기는 착한 며느리가 있다니" 라고 칭찬을 자자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그 며느리는 "아닙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당연하게 해야할 것을 한 것뿐입니다" 라고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 달 뒤에 밑반찬을 무려 이천 가지를 하는 며느리가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그 사람은 무엇을 취소하여야 하는가 하면, 반성한 그 자체를, 즉 그 며느리는 잘못된 근거를 가지고 반성을 했기에 취소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반성을 해야 되는데, 즉 "주여, 저는 왜 이천 가지를 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천 가지 밖에 못합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며느리는 새 며느리가 오기 전까지는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가 시어머니께 소홀히 한 것에 대하여 반성을 하였다는 겁니다. 즉 "이제부터 밑반찬을 천 가지를 하겠습니다. 기껏 일년에 전화만 몇 번을 하고, 추석 때는 용돈을 조금 보낸 것으로 잘했다고 하였는데, 그래서 이제부터는 지사충성의 각오로 반찬을 천 가지를 하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밑반찬을 그만 이천 가지를 하는 며느리가 들어오고 나서는, 그 반성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주여, 저는 밑반찬을 이천 가지를 못하는 나쁜 여자입니다"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달에 그만 밑반찬을 삼천 가지를 하는 며느리가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또 바꾸어야 하는데, 즉 "바보같이, 왜 밑반찬을 삼천 가지를 못하는가?"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사람은 왜 반성을 하는 것입니까? 무엇을 노리고 반성을 하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기어이 나는 반성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 라고 하는, 그런 소망이 있기 때문에 계속하여 수정을 한다는 겁니다. 훌륭한 사람으로 일구어내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수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부질없는 짓들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이 곧 십자가가 없는 인간이 처해있는 현실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무한적으로 계속해서 반복하는 자기 반성, 훌륭한 사람되기, 다시 조져놓고 훌륭한 사람되기, 또 다시 나쁜 놈으로 만들어놓고 반성하기, 그리고 또 도약하고 비약하는 무한한 연쇄고리, 바로 그런 사슬을 끊는 것은 무엇입니까?
◈ 율법 외에 한 의(義) !!
그렇게 반성할 필요조차 없는 곳에서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와버리면, 즉 자기 쪽에서 무엇인가 꼬물 꼬물거리며 만들어내는 그 모든 수고를, 그게 반성을 하든 회개를 하든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그 무엇이, 즉 다른 노선이 우리에게 도착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무엇인고 하니, "율법 외에 한 의(義)"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 외에' 라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인간은 어디 갇혀있는고 하니, 율법에 갇혀있는데, 그런데 바로 그 율법 외에 다른 의가 또 다시 우리를 둘러치고 있다는 겁니다. 율법으로는 전혀 의가 나오지 않는데, 즉 반성하고 또 반성하여도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또 반성할 것이 자꾸만 나오고, 그래서 나쁜 놈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게 곧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율법이 아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다른 한 의가 우리를 덮친다는 겁니다. 즉 율법의 층이 아닌 다른 층, 즉 율법 외의 또 다른 층에 의해서,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 외의 층에 의해서 말입니다.
아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율법 외의 의(義)를 믿음으로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밀쳐놓고 그 자리에 서심으로서, 즉 주의 이름으로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연극으로 보여주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의 이름을 믿음으로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말입니다.
그것을 포도나무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포도나무이고 주님을 가지로 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포도나무는 주님이고, 우리는 가지로 붙임을 받아서 포도나무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굳이 포도나무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노력을 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 '율법 외의 의'와 '율법의 의'의 차이점은?
그러면 이 '율법 외의 의'와 '율법의 의'와는 어떤 차이가 납니까? 율법의 의는, 그 주체가 누구인가 하면, 그 율법을 행하는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서 의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니가 지켜봐" 라고, 사도바울의 그런 명령문을 우리에게 지켜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과 입은 것으로 한 줄 알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라고, 계속해서 그렇게 우리의 주체를 노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서 '율법 외의 의'는 주체가 우리가 아닌데, 우리가 아니고 누구인고 하면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께 복속됨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복속되는 것을 두고 '사랑' 이라고 하고 말입니다.
◈ 그러면 '사랑'과 '율법의 의'의 차이점은?
이제부터 '사랑'과 '율법의 의'에 대한 차이점을 말씀드리도록 하겠는데, 여러 번을 들으신 분도 계시겠지만, 다시 기억을 새롭게 하면서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면, 율법의 의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는데, 일곱 번을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즉 "나를 미워하는 자를 용서하는데 일곱 번을 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그 용서하는 주체를 '나'로 삼아서 일곱 번이라는 한계를 정했다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490번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의가 490번을 용서하면 되는 겁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 제가 490번을 용서하였습니다" 라고 하면 되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일곱 번 곱하기, 일흔 번 곱하기,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지 싶다는 겁니다. 그러면 34300번이 되는데, 이 숫자가 맞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34300번을 용서하면 됩니까? 예수님은 아마 또 다시 일흔 번이라고 하셨을 것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일곱은 완전수이기에 말입니다.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 사랑은, 단 한번으로 끝 !!
하지만 '사랑' 이라는 것은 한번 사랑으로 그냥 끝인데, 즉 한번 준 사랑은 우리 인간이 자유의지를 발휘하든 말든 상관없이, 그렇게 한번 주신 사랑으로 다 끝났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확증하였다' 라고 하는데, 그게 로마서 5장 8절에 나오는데 말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확증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천년 전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거기에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 사건이 있다는 겁니다. 그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자유의지를 어떻게 반성하면서 사용하든지, 아니면 회개하면서 사용하던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 율법 외의 사랑은 확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이미 사랑의 대상이라는 신분이 확증이 된 것입니다.
◈ 아가서 - 죽음보다 더 지독한 사랑 !!
구약의 아가서에 보면, 이 아가서의 주체자가 하나님인데, 즉 솔로몬이라는 말입니다. 술람미 여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거의 스토커 수준인데 말입니다. 계속해서 거부해도 끝까지 따라간다는 겁니다. 즉 "내 사랑을 받아 줘! 내 사랑을 받아 줘!"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곧 아가서라는 말입니다.
지금 장판옥 목사님이 링거를 맞고 있다고 하는데, 링거를 맞아도 사랑이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왜 정 목사님을 언급하는고 하니, 정판옥 목사님이 극동방송에서 아가서를 설교하셨다고 하는데, 제가 그것이 좀 궁금해서 말입니다.
이 아가서를 보면 그야말로 지독한 사랑인데, 얼마나 지독한지 죽음보다 더 지독하다는 겁니다. 죽음보다 더 지독한 사랑을, 그것을 신약 식으로 표현을 하면 저주를 이기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죽음은 저주이기에, 그 저주를 이기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 정도로 이 사랑은 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랑이 왔으면 모든 계명은 종결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마지막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랑은 주체가 다른데, 즉 "니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내놓아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사랑이란 계명을 또 추가해서 지키라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 주님 : 너는 무엇을 받았어?
* 성도 : 이것을 받았는데요.
* 주님 : 또 너는 무엇을 받았어?
* 성도 : 저도 이것을 받았는데요.
◈ 사랑 - 너는 무엇을 받았어?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것은 받은 것을 내놓는 것인데, 그렇다면 주님에게서 우리가 받은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피 밖에 다른 게 없다는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다른 것을 받은 분이 계십니까? 혹시 있습니까? 숨기지 말고 말입니다.
아까 간식을 먹을 때, 대식 씨가 오징어를 내놓고 또한 땅콩을 내놓고 했는데, 여기서 오징어 땅콩은 율법이라는 겁니다(ㅋㅋ). 왜냐하면 그것을 내놓고 더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간식도 있는데, 빵도 있고, 자유시간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대식 씨가 피를 내놓으면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즉 사랑이기에 끝이란 말입니다. (병원에 데리고 가야지요. ㅋㅋ)
그렇다면 "왜 우리 사랑으로는 안 되는가?" 라고 하면, 그것은 사랑의 주체가 우리가 되는 것이기에, 그래서 그런 우리의 사랑은 인정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하다" 라는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 주체가 주님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영원토록 간다는 말입니다.
그에 비해서 우리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언제나 그 주체가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몸이 아프다든지, 감기가 들었다면 우리는 찡그리게 된다는 겁니다. 육신은 자기 몸부터 먼저 챙기기 마련인데, 그래서 자기 배가 불러야 남을 도와주지, 자기 배를 움켜쥐고서 남을 도와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나' 라는 주체가 행동으로 나서게 되면, 그건 은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억지로 만들어내는 율법적인 믿음이고, 율법적인 소망이고, 또한 율법적인 사랑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랑은 당연히 거부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13장 - 사랑은, '~은 아니다' !!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인 '사랑장'에서, 주님은 거부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시는데, 즉 "무엇은 아니고, 무엇은 아니다"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즉 "사랑은 자기 몸을 불사는 것도 아니고, 사랑은 설교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은 그런 것과 대체할 수 없는 따로 주어진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몸으로 헌신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고, 아무튼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나오는 것과 사랑은 일체 섞이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다" 라고 하는데, 즉 사랑에서 나온 소망과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다시 말해서, 오직 사랑으로 나온 믿음과 소망만이 참된 믿음과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을 보면, 율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갈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 예,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입니다 !!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그렇다면 목사님은 믿음이 우선입니까? 행함이 우선입니까?" 라고 하는데, 그래서 제가 "예,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입니다" 라고 답변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양반은 그만 할 말이 없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 로마서를 보면, 그러한 사랑이 전혀 추상적인 사랑이 아닌데, 즉 사랑의 주체가 예수님이기에, 예수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정죄를 하려면 율법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주님의 화목제물로서 모든 율법을 이루었기에, 그것이 사랑으로 완성이 되었기에, 그 사랑 안에서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안에서 사랑을 하겠다고 하는데 무엇을 정죄한다는 말입니까?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겠다고 하는데, 왜 정죄를 하겠습니까? 사랑의 대상인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래서 너를 버린다" 라고 할 것 같으면 사랑하지 않는데, 그것이 아니라 "니가 그렇게 할지라도 내가 너를 사랑해서 구원하겠다" 라고 하는 것이 사랑이란 겁니다. 그렇게 주체자가 예수님이 되어서, 우리는 그냥 받는 입장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할 때, 우리하고 어떤 협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 적이 전혀 없는데, 그게 바로 '화목제물' 이란 말입니다.
◈ 율법 외에 한 의가 '화목제물'로서 마감 !!
그러므로 율법 외에 한 의가 화목제물로서 마감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화목제물로서 마감이 되는 이유는, 속죄제와 속건제가 이 화목제물에 다 포함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화목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이미 그 이전의 절차인 속죄제, 속건제, 번제를 모두 다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화목제물은 모든 제물의 대표격인데, 즉 화목제물은 마감처리를 하는 제물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화목제물 안에 무엇이 들었는고 하면, '죽음'이 들어있는데, 여기서 로마서 5장 8절을 다시 한번 더 살펴보도록 하겠는데, 피곤해도 조금만 더 참으시기 바랍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제가 달리 이야기를 할 것인데, 달리하는 부분에 대하여 거부하시기 바랍니다. 즉 "우리가 아직 죄인이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라고 한다면, 여기서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죽음이 없다는 겁니다.
◈ 사랑의 증거가 곧 예수님의 죽음 !!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말로서만 사랑하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 자신의 죽으심이란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서 자기 사랑을 확증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랑, 그 사랑을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죽으심으로 확증했다는 말입니다.
제가 지금 강조하는 이유를 모르는 것 같은데, 예를 들어서, 엄마가 아이에게 "내가 너를 예뻐한다" 라고 하면서, 그냥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쁜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엄마가 죽는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 말이 무엇인가 하면, "너는 죽어야 마땅한 내 자식이지만, 내가 대신 죽음으로 예쁨의 대상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거듭 태어난다" 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원래 전혀 없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인데, 즉 "너는 죽어서 마땅한 인간이지만, 내가 너를 사랑의 대상으로서 다시 부활을 시킨다" 라는 뜻에서, 그래서 죽으심으로 다가오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사랑을 아는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는고 하면, "나 인간이다. 나를 사랑해다오" 라고 하는, 그러한 건방떠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죽어도 마땅한 인간이 어디서 살려달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즉 지옥에 가야 마땅한 인간이 말입니다.
◈ 목사님, 율법이 오기 이전에는 죄가 없습니까?
아까 쉬는 시간에 어느 분이 질문하기를, "죄가 오고 난 뒤에 율법이 주어졌는데, 그러면 율법이 오기 이전에는 죄가 없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물론 "죄가 무엇이냐? 죽음이 무엇이냐?" 라는 것은, 여기 창세기 3장에서 문자적으로 죄는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그런데 아담은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았는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담이 몇 살까지 살았습니까? 930살까지인가 살았지 싶은데, 그러니 900살을 넘게 사는, 그렇게 오래 살다가 죽는 죽음이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 죽음의 의미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만 !!
우리 생각에는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당장 죽어야 하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아서 죽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빈말을(?) 하신 겁니까? 하지만 죽음의 의미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비로소 죽음의 의미가 최종적으로 밝혀진다는 말입니다. 죄의 의미나 죽음의 의미가 그렇게 되어야 밝혀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의 의미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든 자비이든,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조차 되지 않는 존재로 달라졌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사랑을 해주지 않더라도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어야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그런 관계가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 왜 저는 사랑을 해주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누구는 지옥에 보내기로 작정하고, 또 누구는 천당에 보내기로 작정해도, 우리 인간으로서는 따질 수가 있습니까?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없다는 것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의 죽으심으로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냥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면, 옆에 있던 사람이 "왜 나는 사랑을 해주지 않습니까?" 라고 따진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자기의 죽음으로 사랑해줌으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받을 자나, 그렇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는 자들도 역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단지 한쪽을 임의로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옥으로 가는 놈이라고 해도 입을 다물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관계가 끊어져서 저주받을 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지옥으로 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그것이 뭐가 억울하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다 지옥으로 가야하는데, 다만 한쪽의 사람을 구원하심으로서,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옳은 하나님이 아니며, 예수님도 옳은 예수님이 아니다" 라는 악마적인 반발을 일으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저주를 받은 자들은 더욱 더 저주를 받을 짓들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한쪽만을 사랑해서 건져냄으로 말미암아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가 많이 나오도록, 일부러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아무튼 확증을 하셨는데, 그것도 사랑으로 확증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 쪽에서는 주체가 되어서 무엇을 할 것이 없이, 이미 주체가 되신 주님께서 지독스럽게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13장 1절과 2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하지만 모두가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기 사람을 어느 정도 사랑하는고 하니, 자기를 버리고 고기잡이를 하러 간 제자들까지 찾아가셔서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이 로마서 8장에서 더욱 더 함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 8장 30절을 보면, 즉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또한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라고 말입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to 부정사 - 시간의 전후를 절단 !!
이것은 일종의 부정사 용법인데, 즉 쉽게 말해서 영어의 'to 부정사' 용법이라고 보면 되는데, 즉 동사에다가 'to' 라는 전치사를 붙임으로 말미암아서 명사, 혹은 대명사의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이것만 제대로 알면 영어의 70%는 다 아는 것인데(ㅋㅋ), 이런 부정사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면, 그만 시간의 전후(前後)를 절단해버린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서 이미 하셨다" 라는 말씀은, 앞으로 그렇게 된다는 말도 아니고, 미리 당겨서 하였다는 것도 아니고, 아예 시간에 대하여는 묻지를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시간에 대하여 묻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십자가에 담긴 내용은 묵시적 사건이기에, 그러한 십자가에는 전후(前後)라는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십자가의 안과 바깥일뿐이지 말입니다. 시간적인 의미의 십자가의 이전과 이후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노아홍수 때는 노아방주에 들어간 전과 후가 있는데, 그러나 일단 노아방주에 들어가고 나면, 노아방주의 이전과 이후라는 개념은 없어지고, 이제는 노아방주 안의 세계와 노아방주 바깥의 세계로, 그렇게 나뉘어 질뿐이라는 말입니다.
◈ 언약으로 인해서 카렌다도 바뀌고 !!
그렇게 언약이 바뀌면 시간과 공간이 모두 틀려지는데, 그래서 출애굽기 12장 2절을 보면 카렌다가 바뀐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 나온 그 달이 기존의 달력으로 4월인데, 그런데 그것이 그만 1월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스라엘인가? 이스라엘이 아닌가?" 라는 것으로, 그렇게 해서 축복과 저주가 나뉘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이 둘 사이에는 서로 전쟁이 벌어지는데, 그러한 전쟁의 역사가 바로 '이스라엘 전쟁사' 라는 말입니다.
(출 12: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출 12: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오후시간이 되어서 몸이 나른하지 싶은데, 조금만 참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건은 '나'의 소유화를 전혀 할 수 없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사건은, 사건을 받기 전과 후를 구분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to부정사'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즉 시간을 박살내는 문법이라면 문법이 들어가니 말입니다.
◈ 당신은 언제 구원을 받았습니까 ??
흔히 구원파들을 말하기를, "당신은 언제 구원을 받았어?" 라고 약을 올리는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즉 "당신은 며칟날 구원을 받았어?" 라는 질문이 들어오면, 그런데 우리는 to부정사가 생각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만 멈칫거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이 들어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하면 되는데, "저는 창세 이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다시 "에에, 그런 것 말고, 당신이 개인적으로 언제 구원을 받았는가?" 라고 하지 싶은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창세 이전에 구원을 받았기에, '늘'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해버리면 그쪽에서 신학자들이 천명이 우르르 달려들어도 아무런 할 말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창세 이전에 늘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전혀 시비를 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게 없으면, 더 이상 장사가 안 되어서 자기들의 교회 문을 자물쇠로 채워두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ㅋㅋ).
◈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그러한 로마서 8장의 말씀이 에베소서 2장에도 보면 역시 나오는데, 즉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에베소서 강해를 읽어보면, 그분이 그만 이러한 점에 대하여 놓치고 있다는 겁니다. 아쉽게도 말입니다.
그분의 에베소서 강해 중에서 2장을 설교한 '영적투쟁' 이란 책을 보면, 그 당시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런 시간개념이 절단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이미 성도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그런 성도의 신분으로 해석을 해버린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기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과 또 구분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것은 로마서뿐만이 아니라 성경전체가 다 그러한데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역사 속에 묵시가 침투하여 역사인식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아까 예를 든 '사랑' 이라는 것인데, 즉 한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겁니다. 시간을 초월한 사랑 말입니다. 물론 창세 전부터 준비된 사랑이고 말입니다.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그러므로 그러한 주님의 사랑을 취소시킬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데, 즉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권력자나 천사나 악마나, 그 어떤 것이라고 해도 그런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묵시적인 존재이신 예수님께서 영원토록 기도하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를 취소시킬 어떤 피조물도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복락이고 행복이란 말입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여기서 로마서 3장 28절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 주체가 과연, 예수님인가? 우리 자신인가?
여기서 '율법' 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를 했듯이 주체를 '우리'로 지목해서 말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여기서 '믿음으로' 라는 말은 주체자가 더 이상 우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주체는 율법의 행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출발은 율법의 행위밖에 없는데, 그런데 우리에게 또한 믿음이라는 것이 왔을 때, 만약에 믿음이 우리 주체에서 오게 되었다면, 것은 어디에 포함이 됩니까? 율법의 행위에 그만 같이 결합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따로 와야만 하는데, 그렇게 따로 와야하는 것을 가지고 '약속' 이라고 하고, 로마서 3장과 4장에 의하면 그것을 '은혜'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은혜' 라고 하는 것은 은혜의 주체자가 따로 있는 말인데, 즉 행동의 주체자가 따로 있어서, 그분이 그냥 그저 공짜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선물', 혹은 '은사' 라고 하는데, 즉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진다" 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4장 15절에 나오는데, 즉 율법이 없는 곳은 없기 때문에 진노를 받지 않을 인간은 없다는 말입니다.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계속해서 4장 1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롬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
여기에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라고 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은 은혜에서 왔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바로, 율법에 속한 우리의 행함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렇다는 말입니다. 즉 "은혜로 왔다" 라는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음이 찾아 왔습니다" 라는 뜻이고, "율법으로 왔다" 라는 말은, "행함을 내어놓으세요" 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에게 믿음이 생겼습니까? 그건 당신의 주특기가 아닙니다. 당신의 실력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가 주어졌기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라는 말인데, 그러면 은혜는 어디서 왔습니까? 은혜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약속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약속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왔다는 말입니다. 참, 김효은 집사님은 가셨나요? 점심을 먹고 가셨다고요? (섭섭??)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약속이 오고, 그 약속에서 은혜가 오고, 그 은혜로 믿음이 온 것이니, 그러면 이 아브라함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예수님의 것이 되고, 그러니 당연히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것임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 믿음과 행함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로서 !!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당신이 그렇게 정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한다면, 그래야만 행함과 믿음이 섞이지 않고 대립되는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만약 믿음도 '내'가 주체고 행함도 '내'가 주체라면, 그런 주체가 하나이기에 그건 같은 영역에 속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열심히 착하게 살아가는 것도 역시 '나'에게서 나오고, 또한 믿는 것도 '나'에게 나오면, 그렇게 된다면 둘 다 퉁퉁 '나'에게서 끄집어낸다는 말입니다. 퉁퉁 말입니다(ㅋㅋ)
그렇게 되면 대립된 관계가 아니고 둘 다 '나'에게서 나오는데, 그래서 "목사님, 이번에는 무엇을 드릴까요? 선한 행함을 드릴까요? 아니면 믿음을 드릴까요? 믿음을 원하면 믿음을 드리지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대립관계가 아니라 결합관계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만 하나의 주체에서 모두 다 튀어나오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러한 주체에 대해서, 즉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을 비교하는 로마서 3장과 4장의 취지와는 어긋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 4장 4절과 5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행함 - 정당한 내 노동의 대가를 주세요 !!
여기 4절에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열심히 열심히 일한 사람은 그 품삯을 공짜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것은 자기가 마땅히 받을 것이며, 오히려 앞으로 더 받아내어야 할 빚으로 여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만약에 돈을 덜 주면 왜 덜 주느냐고 따지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일한 만큼 돈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자기 주인을 그만 빚쟁이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돈을 더 빼내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 믿음 -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
그러면 5절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라고 하는데, 그러니 여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 속에 무엇이 포함이 됩니까?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은 표현이 무엇입니까? '믿었다' 라는 말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저는 믿습니다" 라는 말을 무슨 뜻입니까?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저는 '믿는다' 라는 일을 했잖아요. 제가 믿어주는 일을 했잖아요. 그렇게 제가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은, 마치 4절의 경우처럼, 그렇게 믿음을 자기의 삯으로 여기는 경우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서로가 대립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만 똑같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즉 "내가 믿었으니 삯을 내놔라"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그만 자기 노동의 일부로서 포함을 시키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 내가 당신을 믿게 했으니, '돈' !!
하지만 그것은 사도바울이 하는 말과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데,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인간도 있는데, 즉 "내가 당신을 믿게 했으니, 돈을 내놓아라" 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인간은 그야말로 도둑놈도 도망갈 도둑놈들인데, 즉 "내가 너로 하여금 믿게 해서 천당으로 가도록 했으니, 돈을 내놔라" 라고 말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교회에 가면 제일 높은 곳에 서서 폼을 잡고 서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당부하고 싶은 말은, "제발 목회성공을 하지 마세요" 라는 것인데, 왜 그런가요? 그래야 여러분이 목회성공을 하고 싶기 때문에, 즉 제가 그런 금지의 법을 정해 놓았기에 뿔따구가 나서라도 그것을 넘어서고 싶어한다는 말입니다(ㅋㅋ).
그런데 목회에 성공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래서 한다는 말이 "믿게 했으니 돈을 내놔라" 라는, 바로 그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즉 "내가 당신을 믿게 하였으니 돈을 엉뚱한데 내지 말고, 내가 믿게 하였으니 나에게 내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일하는 자가 자기 삯으로 당당한 권리로 주장하는 모습이란 말입니다.
◈ 은혜가 아니면, 결국 '나' 자신 !!
하지만 그건 믿음이 아니라 행함에 속하였기 때문에, 이런 행함에 속한 것은 어디에 속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결코 은혜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은혜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디에 속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한 그런 약속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디에 속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결국 예수님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님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디에 속한 것입니까? 예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나'에게 속한 것인데, 그러면 자기가 자기를 건지려고 하는 심보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을 대치해서 '내'가 지금 여기에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내가 나의 믿음을 통해서 나를 구원한다"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을 성경에서 '행함' 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삯을 주장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을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은혜가 왔다" 라는 것이 무슨 뜻인고 하면, "내가 은혜를 받기 싫어도 주겠다는 은혜를 거부할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즉 주님이 주시는 것을 거부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부하는 그것도 역시 행함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냥 주시면 받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지만, 우리는 거부할 권리든 뭐든, 그런 것은 일체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은혜로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런 주님의 은혜가 그야말로 거부할 틈도 없이 그냥 찾아왔다는 말입니다. 물론 성도에게만 말입니다.
◈ 가구야, 우리 집에 가자 !!
다음은 예수님의 비유인데, 즉 집에 있는 가구가 자기 집에서는 스스로 이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가구인체로 그렇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눈을 떠보니(?) 엄청나게 시끄럽다는 겁니다. 강도가 들어와서 주인과 싸워서 주인을 꽁꽁 묶고 나서, 그리고 그 강도가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가구를 보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는 말입니다.
* 강도 : 어이, 장롱아 우리 집에 가자.
* 가구 : 왜요?
* 강도 : 그냥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살자. 알았지?
* 가구 : 저는 그냥 이대로가 좋습니다.
* 강도 : 어허, 말이 많다. 가면 가는 거야.
* 가구 : 예. 알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가구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말입니다. 가구는 오히려 가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새로운 주인이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옛날 주인을 때려눕히고는 새로운 주인 마음대로 가구를 데리고 갈 때, 그것을 두 글자로서 '천국'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 라고 말입니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다시 말해서, 우리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은데, 그냥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납치해서, 그렇게 보쌈을 하듯이 해서 우리를 옮겨버렸다는 말입니다. 즉 'to 부정사' 라는 겁니다. 천국으로 옮겨놓고 보니까, 그러한 '나'에게 주신 것이 은혜였고 약속이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전체를 두고서 '믿음' 이라고 하고 말입니다.
◈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
이제 7절과 8절을 보겠는데, 이 7절은 더 웃기는(?) 이야기인데, 그냥 좋게 이야기해서 웃기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하는데, 사실은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그런 불법을 누가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 안에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까? 반성하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롬 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시 말해서, 그렇게 반성을 잘하고 회개를 잘하는 주특기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굳이 불법을 용서해줄 필요성을 우리는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락도 전혀 받지 않고 그냥 불법을 일방적으로 용서해버렸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허락도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바로 그런 사람을 두고 복이 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 다윗의 경우에 !!
그렇게 된 대표적이 사람이 바로 구약의 '다윗' 인데, 그에게 선지자인 나단이 찾아왔다는 말은 이미 다윗은 용서함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금식을 하다가 더 이상 금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옷은 신상품으로 차려입고, 그야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끔하게 해서 새롭게 등장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임금님, 왜 이제는 금식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니, 다윗은 뭐라고 합니까? "주께서 모두 알아서 처리하실 터인데, 내가 왜 금식하느냐? 내가 금식한다고 해서 어디 죽은 아들이 살아서 오겠는가? 그냥 일상근무로 들어가자" 라는 식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곧 선택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보편적 특성이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야말로 불법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는데, 오히려 그런 것은 바리새인들이 잘하는 짓거리라는 겁니다. 즉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금식을 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아닌 바리새인들의 주특기라는 것입니다. (어, 그것은 우리의 주특기가 맞는데?)
◈ 6,25를 기억하면서, 주먹밥을 먹읍시다 ??
예를 들어서, 6,25나 부활절을 앞두고서 목사들이 어떻게 합니까? 앞으로 얼마 남지를 않았는데, 겨우 6개월 정도인데 말입니다(ㅋㅋ). 즉 "여러분, 6,25를 기억하면서 우리 다같이 주먹밥을 먹읍시다. 지금부터는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하루에 한 끼라도 금식해서 우리 주위에 있는 불우한 이웃을 도웁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실은 제대로 돕지도 않으면서 그런 짓거리들을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호주머니를 챙기기에 급급하지 말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그런 짓을 해보았자, 금식이 끝나는 날을 기다릴 뿐이라는 말입니다. 씩씩거리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번 금식이 끝나고 나면 얼마나 잘 먹는지 한번 보자" 라고 하면서, 막강한 사료를 먹어치운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니 그동안 먹지 않는 것으로서, 그렇게 자기 의만 축적해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만찬 할 때도, 다음주에 성만찬을 한다고 하면 한 주간 동안 얼굴을 찡그리면서 "주여, 부족합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속으로는 "와이리 이번 주간이 기노?" 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한 조각의 떡과 한 자의 포도주만 먹고 나면 그야말로 해방이라는 말입니다. 다음 성만찬까지 말입니다. 오리고기에 사우나에, 그렇게 별의 별 짓을 다 한다는 겁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들에게는 이러한 반성하는 기능이 있다는 말입니다.
◈ 그런데, 반성하는 기능이 그만 일방적인 용서와 충돌을 !!
하지만 이런 인간의 반성하는 기능이 무엇이 충돌되는고 하면, 그냥 일방적으로 용서함을 받은 것과 그만 충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열심히 열을 내지 않더라도, 이미 십자가 피로서 용서함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런 것을 우리는 차후에 통보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또는 은혜를 통해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택한 자라고 하면, "너는 이미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야!" 라고, 그렇게 성령을 통해서 느껴지고 믿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범사에 감사할 뿐이라는 겁니다. "아, 나는 복 받은 놈이구나!" 라고 하는, 그것뿐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해보겠는데, 그러니까 여기 10절에 보면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면서 "할례나 무할례가 의미가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롬 4: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 여기서 사도바울이 왜 아브라함을?
그 다음에 이제 16절부터 보겠는데, 여기서 사도바울이 왜 아브라함의 예를 드는가 하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상은 아닌데,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님이지 아브라함은 아니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주께서 믿음을 주신 모델로서의 인물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주신 모델적인 인물이란 것입니다.
(롬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그것을 두고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 이렇게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제시하였다는 것은, 우리도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그 어떠한 경우에도 아브라함의 속성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런 믿음의 조상이 떴다고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