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07b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20100507b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100507b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아까 네 가지 중에서 ‘밤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낮은 누구 중심입니까? 인간 중심인데 진짜 중요한 것은 낮이 아니야. 밤이 중요하고 밤에서 틈새에서 올라오면 이 주체는 하나님이죠. 결국 하나님은 인간을 치기 위해서 밤중에 오죠.
오게 되면 인간이 중심이었던 여기서 어떤 질이 있는데 이 질은 부정당하고 저녁 때 일어나는 새로운 사건에 의해서 새롭게 균질화, 균질화라는 것은 평평하게 되는 것, 밤 때문에 세상이 달라졌다. 세상이 달라진 그 질이 앞으로 모든 질을 지배하는 새로운 성질로서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 밤에 하나님께서 오십니다. 잘 때 몰래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고. 밤을 지배하는 분에 의해서 정복당하게 돼있어요. 그리고 그 둘 사이는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지겠죠. 첫 번째 밤의 의미고.
그래서 이것이 신약까지 이어지면 에베소서의 너희는 빛의 자녀라고 주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통해서 나와 버리면 졸지에 십자가 안 믿는 사람은 당연히 어둠의 자녀에요. 항상 대결구조에요. 비교되고 대결구조 되고. 그래서 아까 출애굽기 11장 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분한다. 이거는 계속해서 가는 겁니다.
구별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약에 의해서 언약백성으로 등장해야 되고, 애굽 사람은 비 언약,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없는, 결국은 이스라엘과 애굽을 비교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 없는 사람들 앞에서 때로는 고립되고, 때로는 전쟁을 일으켜가는 것이 앞으로 남은 인류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구약에는 옛날 언약, 신약은 새로운 언약이 가미되어서 요한계시록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 옆에 자기 역사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옆에 자기 역사도 있고 몸이 있으니까. 아까 했지요. 자아는 허구고 몸이 실제라고. 그 몸은 사실은 우리 몸이 아니고 자아 몸이 아니고 창세전에 주께서 택해서 쓰실 몸이기 때문에 새로운 예수님의 계시가 있죠. 새로운 예수님의 계시는 알파요 오메가니까 이게 바로 언약입니다.
우리가 언약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언약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믿는 믿음은 행함이 돼버리고 선물로 준 믿음은 진짜 믿음이 돼버리고.
이걸 글로 쓰면, 내가 예수 믿으면 구원이 안 되고,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믿는 그것이 믿음이죠. 말장난 같이 들리죠. 내가 예수 믿으면 믿음이 아니고 내가 예수를 믿으면 그 믿음은 믿음이 되는 거예요. 주께서 믿게 하신 것은 믿음이고, 내가 믿는 예수는 행함이고 그렇습니다.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라고 해서 믿음조차도 내 행함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은 걸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잠자다 일어나서 깨어라. 빛의 자녀야. 빛에 네게 임한다. 그 말은 우리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어둠으로부터 우리를 빛으로 고립시켰어요. 그런데 어둠이 왜 빛으로 오지 않을까요? 요한복음 3장에 나오죠. 어둠이 어둠으로 드러날까 싶어서.
그런데 왜 우리는 빛으로 오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우리가 빛으로 왔습니다.’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자진해서 알아서 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행하심이 있기에 우리는 어둠에 있지 않고 이제는 빛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구약의 출애굽기 11장을 근거로 해서 연장돼있는 맥락이다. 거기서 쏟아진 거예요.
태양이 있는데 빛이 사방으로 나오겠죠. 태양에서 한 5미터 떨어져 보세요. 빛이 나올 때 이 빛을 빛1, 이 빛을 빛2라 합시다. 5미터 지점에서 빛1과 빛2의 간격이 좁겠어요, 넓겠어요? 좁겠지요. 그럼 멀리 떨어져봅시다. 태양이 빛이 계속 나오죠. 이 각도가 유지되어 나오니까 여기는 5미터라 했지요. 이쯤 떨어지면 500미터 될 수도 있죠. 그런데 똑같은 빛이 가면 갈수록 500미터 된다 이 말이죠.
교인들 처음에는 복음 좋아하고 복음 사랑하는 같지만 세월 지나면 나중에는 간격이 점점 멀어져서 서로 소통이 안 돼요.
구약에서 출발할 때 다같이 이스라엘인데 나중에 이스라엘 중에서 누가 구원받습니까? 은혜로 남은 자만 구원받는 거예요. 이것이 신약성경에 내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얻으리라 한 겁니다. 이 간격이 벌어지다 보니까 바리새인들이 누굴 죽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려요. 메시아 아닌 줄 알고.
빛이라 하는 것은 직진하기 때문에, 제가 어느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죠. 본 게 있는 사람은 양보가 없다 했어요. 어떤 차 사고를 목격했으면 입 다물라고 아무리 수표를 내밀어도 자기가 분명히 재벌 차가 오토바이를 쳐서 사람 죽게 한 걸 혼자 목격했다면 돈을 억만금 줘도 양보를 안 하죠. 법정에서. 저 같으면 돈은 돈대로 받고. 양심이 합니다. ‘그때 분명히 삼성 재벌 차가 치었습니다.’ 돈은 돈대로 받고. 괜히 돈을 왜 안 받아.
진짜 믿는 사람들은 노회를 가도 시찰회 가도 어느 목사 앞에 가도 본 게 있는 사람은 양보가 없습니다. 진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거는 십자가 피로 구원받은 것을 이혼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양보할 게 따로 있지 양보 못하죠.
요한복음 마지막에 사도가 목격자입니다. 얼마나 짜릿합니까. 부활의 목격자에요. 사도 바울이 양보가 있을 수 없어요. 사십에 한 대 감한 매를 다섯 번씩 맞아도 때린다고 해서 본 걸 취소가 안 되거든요. 엉덩이는 맞고 외칠 것은 외치고. 때린다고 딴 소리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가 조작했으면 딴 소리 나오겠죠. 그래서 성도는 맞아봐야 돼요. 맞아봐야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는 거지.
자기가 다메섹에서 주님을 봤는데 주님이 지금 부활해 있는데 살아있는 주님을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뭘 부인해요. 지금 살아계셔서 자기가 예수 안에 있는데. 죄인은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모든 게 확실하고 구름타고 오실 게 확실한데 어떻게 양보합니까? 안 되지요.
목사의 임무란 다른 게 아닙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면 돼요. 단 조건이 있어요. 십자가 복음 안에서만 영광 돼요. 다른 복음은 없으니까. 다른 복음은 저주받으니까. 다른 복음 전해서 저주받으면 안 되잖아요. 참된 복음 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실제로 현대인은 자기 자신만을 잘 되기 위해서 하죠. 이런 사람들에게 몸은 하나님 것이고 다만 섬길 때 복음 안에서 섬겨야 당신은 죄인이고 죄인을 용서하신 그 용서를 바탕으로 주님께 영광이 된다고 십자가 복음을 외쳐야 될 것이 목사뿐만 아니고 모든 성도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이 없으면 세상이 무서운 공포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명도 성령이 있어야 되는데, 아까 첫 번째 밤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밤은 인간 주체에서 하나님 주체. 두 번째가 죽음을 아는 자가 산 자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런 편평한 평지에 구멍이 뚫려서 푹 꺼졌어요. 블랙홀이 되어서 고립되듯이 이스라엘이 모여 있습니다. 바깥쪽은 애굽이고. 이런 식으로 구분했어요.
밤에 사건이 벌어지면서 푹 꺼진 사람만이 뭘 아느냐 하면, 여기 출애굽기 11장 5절 봅시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왜 죽입니까? 하나님이니까 죽인다는 말이 안 돼요. 하나님이 살려줄 때는 언제고 이날 밤에 왜 죽입니까? 답변해 보시라고 얼마나 하나님께 항의하겠어요.
오늘날 교인들이 죽이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죽음을 아는 자가 산 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는 이유도 모르고 죽어가고 있어요. 평생을 살아도 왜 죽는지 모르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별된 사람, 성도만이 앞당겨서 ‘죽어 마땅하네.’라는 이유를 알게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조치라는 걸 아는 겁니다.
아까 질문한 것에 포함돼 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는 사건을 과거의 일회성으로 끝내는 게 아니고 마지막까지 다 끌고 가버리죠. 그렇게 되면 계속해서 인간들은 선악과 따먹은 그놈의 자식들이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죽음을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죽으리라는 것을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이어져가는 것입니다. 그 원칙을.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생명나무의 생명이 진짜 생명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음과 대비시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있는 후손들은 이유도 모르는 채, 왜 죽는지 모르는 채 태어났으면 태어난 자리가 부모의 죄 된 몸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계속 죽어줘야 돼요.
그리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죽어줘야 됩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죽는 자리에서 갑자기 안 죽고, 죽음의 칼날이 지나갔는데 푹 꺼졌으니까 그들만은 살았잖아요. 이 구멍을 뛰었다 이 말이죠. 사실은 안 뛰면 구멍까지 따라오겠지만. 여기에 뭘 발랐습니까? 피를 발랐다는 말은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살한 게 아니고 누가 죽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의 장자를 하나님의 장자가 말씀 안에서 우리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장자 되신 우리와 함께 살았던, 출애굽기 12장에 우리와 함께 14일 동안 살았던 간직했던 어린양을 우리 자녀 대신 내놓아서 이 장자의 죽음이 곧 우리의 맏이의 죽음이라고 해서 피를 바른 거예요. ‘오지 마세요. 우리 애 죽었습니데이.’ 우리는 이미 세금 냈습니다와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 애가 이미 죽었다는 걸 대신해서 어린양 피를 발랐다는 게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이게 하나님 아이디어에요. 결국은 이스라엘은 애굽과 구별되는데 어떤 구별이냐 하면, 애굽은 모든 일처리를 자기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반면에 여기 블랙홀에 빠진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나설 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고 그대로 약속 앞장 세워서 하나님께 나서게 되는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 바칠 때 드러났죠. 줄 땐 언제고 바치라 하느냐? 따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하나님이 이삭을 줄 때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이라는 끈에 붙어 있는 파리로 봐서 이삭이라는 끈을 보내서 부모 된 아브라함과 사라가 걸려들어서 이삭을 살림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붙어있는 아브라함과 사라도 같이 덩달아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러한 원리를 구별된다, 다른 말로 ‘거룩’이라 했죠. 그 거룩의 제도가 할례제도입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 받은 사람이 최초로 이삭입니다. 이삭을 다른 혈통과 모든 선악과에 대한 불통을 고추 끝을 자름으로 말미암아 이삭은 혈통의 내림으로 계속 흘러넘침으로 오는 계통이 아니고 새로운 계통, 약속의 계통이라 해서 육에 속한 노선과 약속에 속한 노선이라고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두 노선으로 잡고 각자 언약을 배정을 해버립니다. 한쪽은 율법의 저주를 받아야 될 노선과 한쪽은 약속에 의해서 용서받을 노선을 배정해버립니다. 그전에 구약에 이미 두 개 노선이 나란히 나타나고.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어린양이 대기하고 있다가 시킨 대로 하라. 뭐요? 어린양 잡아라. 식구 같은 어린양을 잡아서 문지방에 발라라. 그리고 어린양은 죽여서 고기를 불에 태워 먹어라. 이미 고기를 나눠먹는다는 말은 어린양의 죽음에 나머지 식구들은 다 동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죽음에 온통, 하나님의 심판이 왔을 때 어디를 피난처로 삼느냐 하면, 어린양이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안에 새끼들이 있는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새로운 질적인 시간이 전개될 거야.’ 그렇게 있으니까 지나간 거예요. ‘다 됐습니까?’ 하고 들어보니까 다 된 거예요.
그러면 안 믿는 울산 시민이나 아저씨는 뭐 합니까? 수구리. ‘미쳤나. 뭐 합니까, 지금.’ ‘어린양 밑에 있어요.’ ‘웃기네. 희한한 종교를 다 믿네.’ 이렇게 되죠. 왜 희한하냐 하면 특이성이니까.
제가 하나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이랬거든요. 어떤 신학생이 질문했어요. 질문 잘 들어보세요. 질문 내용이 이렇습니다. ‘열 명의 목사가 다 다른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어느 목사 말 들어야합니까?’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 보면, 성령이 너희를 가르치리니 성령이 오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 없고 성령이 직접 가르치리니 성령한테 배우시면 됩니다. 따라서 열 명의 목사 가운데 마음에 드는 목사가 있다면 그 사람도 성령 받았고 나도 성령 받았다고 간주하세요.
그러면 이러한 생각을 모든 신학생이 할 때 그중에 어느 것이 진짜 성령 받은 것이고, 어느 것이 가짜로 성령 받지도 않으면서 마음에 든다고 성령 받았다고 일방적으로 단정 짓는 것하고 어떻게 구별됩니까? 그것은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게 딱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서 도저히 알아낼 수 없고, 오직 인간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보이는 거예요.
이거는 성령이 아니면 그 깊은 하나님의 마음을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신학이고 박사고 뭐고 다 치우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내가 병신이든 바보든 치매 걸리든 관계없이 예수님의 피가 나를 구원한다고 예수님의 피의 주체권을 넘어가면 이것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성령 받은 사람이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목사도 당신과 동일하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걸 가르치거든 절대로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간주하세요. 알아서 하세요. 그 수밖에 없지요.
이 말은 결국 내 안에 마지막 남아있는 키포인트는 내가 해내는가, 아니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간직하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교회사랑, 부흥하는 것, 병 고치는 것 다 인간이 할 수 있거든요. 왜냐하면 내가 했다고 나오니까. 하지만 십자가 믿는 사람은 만났다 하면 자기가 안 했대. 자기가 못한대. 오직 주께서 하셨다고만 고백할 때 그게 진정한 교회, 진정한 그리스도 몸이 되는 겁니다.
죽음이 죽음답게 지나가도록 죽음에서 피한 사람은 임무가 있어요. 어린양 피 때문에 피한 사람은 살았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나는 진정 죽음을 보았다.’ 이걸 증거하는 거예요. 나는 이 세상이 산 자의 세상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한 세상인 것을 드디어 알았다고 증거하죠. 그럼 너는? 우리는 어린양 때문에 살았노라. 덮었노라. 살았노라. 이제는 외치노라.
어린양으로 덮었노라. 나는 죽음을 알았노라. 드디어 이제는 외치노라. 하나님의 약속은 어린양 피였다는 사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피 언약이 우리를 살린다. 요한복음엔 피와 살로 돼있죠. 히브리서는 살도 날아가고 없어요. 피. 피가 우리를 살린다. 결국 우리는 그때부터 피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똑같은 세 끼 먹고 똑같이 키가 170 되도 산 자고, 피가 안 나오는 사람은 천하의 신학박사고 목사가 되도 그 사람은 죽음을 뭔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모르는 자의 특징이 자꾸 살려고 해요. 목사 질해서 살려고 해요. 그런데 복음을 아는 사람은 목사 질해서 죽으려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주 기뻐요. 이 몸이 죽는다는 사실, 내 말한 대로 이 몸이 죽어야 될 몸인 것을 내가 죽을 때 비로소 밝혀지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죠. 이 몸을 벗어버리고 그 날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그래서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죠. 사람을 친구 삼지 말고 죽음을 나의 동반자, 동행자로 삼아서 늘 죽음하고 이야기하고 ‘언제 죽이는데?’ 늘 죽음과 동반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현재 있는 모든 자식이나 남편, 아내 모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되고 감사하게 되죠. ‘이놈의 자식, 아직 살아있구나. 잠자는 것 봐라. 하나님이 살려주는구나.’
심장은 우리가 낮에 심장 관리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밤에 심장 관리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하시잖아요. 그러니까 밤이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불가능할 그 시점에 진정 주도권자가 우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증거해야 되고 부각해야 합니다. 두 번째 죽음은 됐지요.
세 번째, 누구를 죽이는가 하고 누가 죽이시는가? 누구를 죽입니까? 장자를 죽입니다. 왜 장자를 죽입니까? 해답을 미리 알려드릴게요. 장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장자가 따로 계시기 때문에 장자를 죽이는 겁니다. ‘목사님. 이스라엘 장자는 살았잖아요.’ 이스라엘 장자는 더 이상 그 집의 장자 아닙니다. 그거는 하늘의 장자한테 노예로 팔려가요. 어쨌든 간에 유월절 끝나고 난 뒤에는 애굽이든 이스라엘이든 장자를 일체 없습니다. 살아있는 장자는 하나님께 바쳐야 되고 죽은 놈은 죽은 놈이고.
유월절 사건 다시 말해서 십자가 사건은 이 땅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장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요, 유월절 사건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여 내 기뻐하는 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한 명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약상대자로서 하늘에서 따로 내려와서 지상에서 어떤 일을 경유해야 그분이 유일하게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계약관계에 있는 성자 하나님밖에는 다른 사람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짜로 얻어먹는 주제입니다.
이렇게 장자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유월절 끝나고 난 뒤에는 바로 하나님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살아있는 장자를 매개로 해서 하나님께 나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죽어야 될 장자가 살았다는 말은 누구 때문에 살았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 때문에 살았으니까 하나님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 없이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나지 않습니다.
‘그게 진짜입니까?’ 물으면, 유월절 지나고 우리 애 살아있는 걸 봐라. 살아있는 게 아침에 밥 먹어서 살아있는 게 아니야. 하나님의 심판이 넘어가서 살아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장자가 살아있는 걸 보면 볼수록 뭐가 기억나야 하느냐 하면, 유월절에 큰일 날 뻔했다는 것,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는 죽을 뻔했다는 그것이 기억나게 하는 장자, 그 장자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아닙니까. 그래서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는 거예요.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산 자냐, 죽은 자냐가 결판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 외에는 일체 너희들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전서 2장 2절의 말씀. 그런데 우리는 하루 종일 자기와 자기의 몸의 확장, 자기 새끼밖에 모르잖아요. 살려 주이소. 만날 철야 가서 살려 주이소. 옛날 정화수 떠놓고 성황당에 비는 것과 똑같이 빌어요. 서양식 건물이고 한쪽은 동양식 건물의 차이뿐이지 안에서 비는 건 똑같이 빌어요. 살려 주이소, 살려 주이소. 이것뿐이에요.
죽음을 모르는 자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아는 자는 살고 안 살고 간에 이미 자기 소관에서 떠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죠. 이미 죽은 자에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이 죽은 자에요.
그래서 하나교회에서 그림을 하나 그렸습니다. 십자가 나무가 있는데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여기에 몇 명 올라갔습니까? 달랑 혼자지요. 옆에 있는 강도 자기 십자가 따로 있고. 그런데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이 뒷면에 보니까 한 명 달린 게 아니에요.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해서 여기에 사람1, 사람2, 사람3 … 무수하게 많아요. 이게 뒷면에 있기 때문에 전면에 누가 돌아가셨어요? 예수님이 했지만 나중에 뒤에서 보니까 무수한 사람이 있는 거예요.
이 예수님이 바로 약속에 의해서 장자가 되는, 장자가 부활되면 나머진 다 사는 거예요. 장자에서 일어났던 심판 사건을 믿는 사람은 다 사는 겁니다. 그래서 뒤에 사람은 누굴 믿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 앞에 있는 장자를 믿는 믿음 가운데서 내가 살았다가 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림 하나로 해결됐잖아요.
그럼 어떻게 사느냐? 율법은 지켜야지. 장자가 지켜줬어요. 장자가 지켰다는 말은 장자 홀로 지켰다는 말이고, 장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같이 십자가 믿을 때 이미 율법 다 지킨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것 적어 볼게요. ‘십자가 믿는 것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것이다.’라고 할 때 백이면 백 다 이야기하는 반박이 뭐겠습니까? 그러면 ‘성경에 십자가 하나만 빼고 다 찢어야 되겠네. 사도 바울의 권면, 명령 다 찢어버려야 되네. 십자가만 있으면 되니까.’라고 하겠죠.
그 사람들이 그런 질문할 때 십자가 믿을 때 누구 힘으로 믿게 됐습니까? 십자가도 내 힘으로 믿고, 사도 바울의 권면과 명령도 내 힘으로 한다고 하니까 자기는 하나만 지키려하니까 이게 불만이에요. 하나만 지킬 것 같으면 성경에는 마태복음 1장부터 십자가 나와서 요한계시록 십자가로 끝내야 돼요. 다른 이야기 있는데 십자가만 이야기하고 부활 이야기 안 하고, 성령의 열매 왜 이야기 안 하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믿을 때 누가 믿게 하십니까? 주님이 믿게 한다는 것은 주님이 다가오는 거예요. 내가 다가서서 믿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 믿을만한지 조사해보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있는데 뭐가 덮치는 거예요. 덮치는데 그 뒷면에 모든 신구약 성경이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함이 통째로 덮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 어느 말씀도 우리가 못 지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못 지킵니다. 네 티끌을 빼라. 무슨 수로 티끌을 뺍니까? 안 됩니다.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여러분 중에 먹는 것, 입는 것 안 족해서 자살하고 싶은 사람 없잖아요. 먹는 것, 입는 건 되잖아요. 들풀처럼, 참새처럼. 참새가 어디 펀드 넣어놨습니까? 우리는 펀드 넣었잖아요. 들풀이 보험 안 들었어요. 보험들 이유가 없어요. 왜냐 하면, 자기가 탈 보험이 아니기 때문에. 지는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입장이기 때문에. 아궁이에 들어간 뒤에 보험 타봐야 소용없잖아요.
우리는 죄 된 몸이 있기 때문에 항상 우리에게서 내 역사가 나오는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 역사가 뭐로 구성돼있다? 과거에 잘난 것만, 노동한 것만 골라서 한 거예요. 노동한 것만 골라서 한 것이 천국에 못 갑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아침 열 시에 온 사람과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 이야기를 왜 했겠습니까? 인간 노동으로 천국에 못 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몸의 본성은 뭐냐? 내가 일한 만큼 보상 받는 그 틀에서 우리가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흔히 천국은 넣어줘야 되겠고 우리는 몸이 있는 이상 몸에서 나온 본성은 내가 일해서 벌었다는, 내가 알아서 믿어서 구원받았다는 것밖에 안 나오니까 주께서 친히 다가오는 겁니다. 그냥 말씀이 폭격기처럼 쳐들어오는 겁니다. 쳐들어오면 우리는 거기에 눌리게 돼있죠. 갈등이 느끼겠죠. 어느 쪽 맞느냐? 내가 십자가를 내 이성으로 믿었느냐, 아니면 십자가가 덮쳤기에 믿어지느냐? 그 문제 생기겠죠.
그럼 십자가만 달랑 믿는 게 아니고 모든 율법, 신구약 다 이뤄졌으니까 그 안에 재림도 들어있고 부활도 다 있으니까 그것이 나한테 덮쳐버리면 우리는 십자가 듣는 그 순간부터 나는 아무리 살았다고 우겨도 십자가 사건이 있는 이상은 주님 보기에 이미 죽은 자고 그리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삶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보고 우리가 이미 산 자가 됩니다. 함께 세례 받고 죽어서 함께 장사된바 됐다가 함께 이미 부활된 자가 돼요. 이제는 몸을 이루는 것밖에 안 남았어요.
그 모든 것을 할 때 과연 그것이 진실로 믿는 사람은 자기 자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라 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미리 정하신다 했거든요. 예수를 본받는다는 말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온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다가가는 게 아니고. 우리가 본받는 예수님은 우리가 조작한 예수에요. 내 구미에 맞는, 나를 안 죽이는 예수를 우리는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주님은 ‘이미 너는 죽었어. 내가 너를 만들 거야.’ 하는 식으로 예수 사람 만들어서 ‘이것은 내 솜씨야.’ 그러한 외침을 들으면서 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사도 바울은 이런 주장을 합니다. 내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서 죄인이 구원된 이 법칙을 나만 당한 것이 아니고 나같이 똑같이 당해야 너희들도 구원받지 나같이 안 당하면 너희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말 타고 가야 됩니까? 번개 맞아야 됩니까? 그럼 우리는 삼층천에 올라가야 되겠어요? 로마서 1장에 보면 우리가 하늘에 올라갈 필요도 없고, 지옥에 내려갈 필요도 없고 네 코앞에, 눈앞에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네가 시인하면 누구든지 예수 믿는 자는 사도 바울처럼 구원 얻는 거예요.
마귀 타고 가다 벼락 맞아 봉사되고 그런 복잡한 경로는 이제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그런 경로를 거쳐서 예수 믿던 그 예수님이 직접 십자가로 바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런 경로가 우리한테 필요 없다 이 말이죠.
그냥 뷔페에서 샤브샤브 먹다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거예요. 그럼 구원받기 위해서 샤브샤브 집에 예약해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말은. 코앞에 있다는 것은 성경말씀을 이야기해요. 말씀은 들음에서 온다 했잖아요. 말씀은 들어서 아는 거예요. 기적을 행함이 아니고 말씀을 듣고 믿으면 우리에게 구원이 이르는 거예요.
그래서 전파하는 자의 사명이 이 세상의 어떤 의사보다 더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 사람들은 육체의 병을 고치지만 전파하는 자의 발이여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은선 대장, 고생 좀 했죠. 그 발 아름답습니까? 오은선 대장이 에베레스트 올라가니까 그 꼭대기에 오뎅 장사가 와서 ‘오뎅 하나 먹고 가이소’ 하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자기 딴에 올라갔다했는데.
우리 안에 천국이 있어요. 지옥도 있고. 왜냐? 말씀 안에 들어있으니까. 십자가 안에 뭐가 죽음이며, 무엇이 생명인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에베레스트 안 올라가도 돼요. 안 올라가도 모든 걸 정복한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이런 복음의 광채가 시기 나서 어쨌든 간에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서 눈을 돌리도록 성경을 펼치지 못하게 만들어서 남들의 상식, 조선일보, 동아일보, 엠비씨, 케이비에스 이야기만 가득 들어있어서 북한 핵문제와 천안함 사건 그런 걸로 우리의 역사를 차지해서 그것 때문에 기도하고 애쓰고 떼쓰는 이렇게 만들기 위해서 지금도 이단 목사들 주께서 만나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 전한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본 게 있어서 양보가 안 됩니다. 그럴 일 없겠지만 천 명 교회에 부임했다. 복음 전한다. 석 달도 안 가서 열 명 남습니다. 물론 열 명 남지 않지요. 열 명이 쫓겨나겠죠. 부동산이 있는데 열 명한테 줄 리가 있습니까. 그렇게 때문에 그런 일 조차도 하나님 계획 속에 잡혀있는 겁니다. 과연 주님이 맞구나.
누가 죽이십니까? 장자가 죽이십니다. 누굴 죽입니까? 장자를 죽입니다. 왜? 진짜 살 가치가 있는 장자를 이미 어린양으로 끝났기 때문에. 그럼 ‘밤에’라고 해서 하나님이 일을 개시했다. 두 번째는 이미 이 세상은 죽음이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산 자가 돼야 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죽어 마땅한데 은혜로 살았다는 걸 보여주면 돼요. 이 사이에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가 개입되어서 약속이 개입되어서 살았다.
세 번째는 이로써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누굽니까? 우리 식구가 살아났고 둘째에요, 셋째에요? 장자. 장자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 매개체로 해서, 이 장자는 어떤 사건 때문에 장자 됐습니까? 바로 유월절 사건, 어린양 죽은 사건 때문에 장자 됐기 때문에 앞으로 진짜 하나님은 언약이 빠진 하나님은 우상이고, 하나님이 존재한다가 하나님이 아니고, 어린양의 사건이 계속해서 역사 속에서 터질 때 사건을 통해서 유월절은 반복이 되고 그 반복된 사건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건지시는 그런 식으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유월절 어린양은 그 다음에 제단법이 되고 이 제단법이 하나님 이름이 복을 주기 위해서 임재하는 겁니다. 이게 출애굽기 20장에 나오죠. 제단을 쌓으면 내가 주의 이름을 지정하는 곳에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그것이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부산강의에서 했지요. 양푼에 피를 담아 뿌려서 유월절 안 죽었다는 겁니다.
사사기 봅시다. 사사기 3장 1절과 2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넘겨두신 열국은”
이스라엘 됨이라는 것은 태어났다고 이스라엘이 아니고 뭘 알아야만 이스라엘답다 합니까? 전쟁. 전쟁은 누구와 누구의 전쟁이다? 언약을 아는 무리와 언약을 알지 못하는 사이의 전쟁. 그 전쟁을 왜 알아야 됩니까? 그 전쟁이 바로 유월절의 약속이 반복되는 형식은 오직 전쟁이란 형식을 통해서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슨 전쟁을 하고 있습니까? 영적 전쟁. 영적 전쟁 기준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복음이라는 그걸 쥐고 그 외에 다른 식으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모든 세력들과의 영적 전쟁이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은 예수를 이야기해도 다른 예수고, 복음을 이야기해도 다른 복음이고, 성령을 이야기해도 다른 성령이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너희들이 바로 악마의 하수인이다. 시찰회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전쟁에서 주체에 대한 평가 뭐냐? 이미 우리는 산 자가 아니고 죽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희열과 기쁨. 죽었기 때문에 또 죽어도 괜찮은 존재가 되죠. 만약에 내가 죽을까, 말까 한다면 어쨌든 간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게 급선무잖아요. 그런데 이미 죽은 자라면 지금 살아온 것도 누구 은혜입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고 지금까지 살아온 은혜라면 나를 지금 죽이는 것도 은혜에 해당되겠죠.
자살하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약 먹잖은 이야기가 아니고 항상 돌발 상태로 죽여 버립니다. 로또 당첨 되어서 놀래서 죽인다든지 땅을 열 평 사놨는데 땅값이 한 평에 1억 받으라 해서 놀래서 하든지, 갑자기 어느 교회처럼 교인 이십 명이 와서 됐다든지. 부천개혁교회처럼 교인 몇 명 남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십 명 와서 목사님 좋아서 교회 옮기고 있어요. 그러면 목사님은 교인도 떨어지고 이제 주께서 보낼 모양이라. 보내기는 이십 명 와버리니까 이제 안 보내실 모양이라. 그러겠죠.
‘날마다 우리가 죽노라’ 하는 말을 사도 바울이 했습니다. 그건 우리의 존재를 가볍게 만들기 위함이에요. 공포가 어디서 옵니까? 모든 공포와 두려움과 엄습하는 근심은 내가 살았다고 우길 때 일곱 귀신이 와서 데려가요. 자기한테 꿀 발라놓고 왜 자꾸 벌이 달려드는지 몰라. 꿀 치우면 되는데 벌떼 몰린다고 벌만 탓하지 마세요. 살고자 하는 죽는다는. 자꾸 살고자 하니까 마귀 일곱 귀신이 달려드는 거예요.
연애할 때 ‘그래 나는 그 여자 잊었어.’ 말만 하지 말고 진짜 잊어버리면 옛날 헤어진 여자 만나면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나오죠. 말만 잊어버리면 만났을 때 ‘왜 이제 찾아옵니까? 얼마나 기다렸다고.’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묶음입니다. 개별적으로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전체를 아담으로 묶어버립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옆 사람하고 섞이길 싫어해요. 나만 따로 처리하기를 원해요. 주님은 너는 이런 묶음 속에 하나로 봐요. 이래야 섬김과 희생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목사님. 교회 안 가도 십자가 알아요. 난 교회 안 가도 구원받을 수 있다.’ 이러면 안 된다니까. 하나님께서 복음을 줄 때는 나 구원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구별된 아담을 구원하고 전체 묶어서 주는 거예요. 우리는 묶음에서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는 장자하고 상대해요. 우리의 장자가 누굽니까? 예수님. 하나님은 예수님과 상대하거든요. 이게 언약이거든요.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단체에 속하면 여기서 개인, 개인이란 건 필요 없고 그리스도 몸에 봉사하게 하시고, 기도제목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심기게 하옵소서. 서로 사랑하게 하옵소서.’라는 그런 기도만 나올 뿐입니다.
‘나 구원받았지. 하나님, 이제 교회 안 나와도 됩니다.’ 이런 식으로 개별적인 간편함, 편리함, 자기 안일함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계약서에 그런 내용이 없어요. 누구 예수 믿거든 몸이 약하니까 빼줘라. 이런 것 없습니다. 몸이 약하면 약한 대로 섬기고, 봉사하고. 그렇게 해서 다같이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장자고 나는 진작 죽어야 될 자인데 장자 때문에 덕분에 십자가 대신 죽었기 때문에 죽어야 될 내가 살았다는 고백으로 하나님이 하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성경을 덮고 안 들을 때는 허황된 말처럼 들리는데 막상 성경을 펼치고 따져보니까 이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덮고 세상에 나가면 다 잊어버립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깨우쳐주셔서 우리의 역사만 우리를 휘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알파요 오메가인 주님의 뜻이 저희를 휘감아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게 하심을 살려내심을 저희들이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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