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4
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4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8)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4 (둘날 오전2) 법
2007,01,09 강의 이근호, 녹취 한윤범
◈ 나, 명품을 가진 여자입니다 !!
이제 시작할까요? 여자들이 명품을 좋아하는 것은, 그 명품의 쓰임새나 활용도가, 그것이 돈 값만큼 월등하게 낫기 때문에 명품이 아니고, 그런 명품이 하나의 금지의 법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즉 명품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사회가 구분될 때, 즉 명품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경계선이 그어질 때,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자아 자체를 'C'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이 'C'가 바로 상품이고 말입니다.
이렇게 자아 자체를 상품으로 내놓을 때, 이 상품을 결정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즉 돈이란 겁니다. 즉 'M' 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머니가 커스텀을, 즉 돈이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에, 신 앞에 "나, 명품을 가진 여자입니다" 라고 하는, 즉 자기를 어떤 상품으로서의 시장에 자발적으로 내놓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미 '나', 즉 자아를 초월하는 그런 이상이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무엇이 생기느냐 하면, 언어소통이 유지가 되는데, 그렇게 언어소통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언어소통이 가능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여기서 노는 언어소통에 동조하지 않으면 너는 우리 공동체가 아니야" 라고 하는, 그렇게 공동체에서 배제를 당하고 만다는 겁니다.
◈ 라캉 - 주체는, 공동체가 결정 !!
이걸 가지고 '라캉' 이라는 사람은 주장하기를, "주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공동체가 결정한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북한의 주체의식 아닙니까?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의 주체의식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아오지 탄광행이라는 겁니다. 아니면 탈북을 하든지 말입니다.
그것은 북한만을 욕할 것이 아니고, 오늘날 자본주의도 역시 형성된 주체를 공동체에서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면, 바로 주류(主流)가 되는 겁니다. 술 '주(酒)'자의 주류(酒類)가 아니고 말입니다(ㅋㅋ). 즉 다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 민주주의 - 주류에 의한 정치체제 !!
이런 주류에 의한 정치체제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두고 소위 '민주주의' 라고 하는데, 그러니 민주주의는 반드시 다수와 소수를 연결해서, 다수의 의견을 진리라고 규정하고, 소수를 여기에 통합시키는 정치제도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이고, 소위 주류가 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 23절, 24절에 보면, 사람을 자기 욕심대로 내어두고 방치하게 되면, 욕심과 욕심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된다고 하는데, 즉 어떤 의사소통을 해도 '내' 욕심과 '너'의 욕심이 타협하는, 그러한 시장이 형성된다는 겁니다. 즉 "내가 이만큼 양보해 줄게. 너도 이만큼 양보해 줘" 라고 말입니다.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그것은 남녀간의 결혼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아내라고 해서 남편 마음대로 못하고, 또한 남편도 역시 아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특히, 경상도 남자들이 얼마나 여기에 잘 적응하는지 모르는데(ㅋㅋ), 즉 서로가 어느 정도의 양보와 타협, 즉 정치적인 흥정이 있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 프로이드 - 인간내부도 역시 흥정을 !!
그런데 그러한 흥정을 우리 인간내부에서도 역시 그렇게 한다고 이해한 사람이 바로 '프로이드' 인데, 이 양반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는데, 즉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인간의 욕정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윤리가 서로 흥정을 해서, 그 중간에서 흥정된 지점에 나오는 것이 '에고' 라고 하는 자아가 형성이 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드' 라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활화산과 같은 욕망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반면에 '초이드'는 거기서 나온 윤리라는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중간에서, 어중간하게 그때 그때마다 적당한 흥정과 타협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되려면 여기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이러한 전체를 두고서 '질서'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제가 지금 로마서와 무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면 질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법' 이라는 겁니다.
◈ 인간이 만든 법과 하나님의 법 !!
이렇게 인간이 만든 법과 하나님의 법과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면, 인간이 만든 법은 자신의 질서를 인정하겠다는 것인 반면에,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인간을 심판하는, 즉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규정하기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율법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들이 그 어떤 욕정과 욕망에 의해서,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방치된 채로 살아가느냐를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은 왜 가인과 그 후손을 !!
지난번에 울산강의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만나는 사람마다 표를 해서 가인을 죽이지 않도록 하셨다" 라고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벨은 덜렁 죽이면서도, 그런 아벨을 죽인 살인자는 왜 자꾸만 살려주시느냐는 겁니다. 죽는 것을 방지시켜서, 억지라도 계속해서 살려줘서, 자자손손 가인의 속성을 이 땅에 의도적으로 확장시키려 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느냐 하는 말입니다.
(창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 즉 '여자의 후손' 이라는 것은, 그냥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뱀의 후손과 겸비해서, 즉 그렇게 병행해야만 거기에서 자기 윤곽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손인 라멕이 뭐라고 합니까?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칠 배지만, 나 라멕을 위해서는 벌이 칠십 칠 배이다" 라고 하는데, 즉 자기에게 상처를 낸 사람은 자기가 죽이는데, 가인을 위해서는 두 배로 죽였지만, 자기를 위해서는 일곱 배나 되 갚아준다고, 그렇게 철저하게 자기 중심주의로 나간다는 겁니다. 그런 행태로 모여서 도시를 이루고 말입니다.
(창 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 성(城)은 일종의 요새 !!
여기서 도시, 즉 '성(城)' 이라 하는 것은, 그냥 거주하기 위한 성채가 아니고, 전쟁용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새' 라고, 즉 요새화 된 캐슬, 즉 '성' 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고대 서양에 대한 고고학 관련 책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즉 모든 성들이 다 요새화가 되어있다는 겁니다. 요새화가 말입니다.
◈ 고급 주택은 요새화가 잘 되어야 !!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요즘 아파트가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 특히 서울의 고급 아파트가 말입니다. 브라질의 상파울루나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 같은 곳에 가보면, 거기에서 재미있는 것이 뭐냐 하면, 고급층의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그 하류민들이 사는 산 위에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철저하게 요새화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 사진과 같은 것을 통해서 보면, 고급 개인용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것을 저 위에서 들여다보기는 하지만, 그러나 들어가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다만 그들은 여기에 출근을 하고, 퇴근은 자기 산 위에 집으로 가야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는 마음껏 즐기고 말입니다(?).
그러니 점점 더 자기를 폐쇄화시켜야 되는데, 그렇게 폐쇄화를 시키면 시킬수록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자기를 단속하면 할수록, 즉 자기가 사는 거주지를 단속하면 단속할수록, 자기는 그만큼 가치가 더 높은 인간으로,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폐쇄화를 시키면 시킬수록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서 안타까워하든지, 아니면 "아이쿠, 참으로 부자는 불쌍해. 저렇게 갇혀서 살다니"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언제쯤 저렇게 나를 단속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을까?" 라고 하면서 부러워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러한 고급 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즉 사회의 모든 관습이나 문화나 문명 등, 그런 모든 것을 이끄는 주도적인 세력으로 등장을 한다는 말입니다.
◈ 가인의 문화 -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지켜야 !!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가인의 문화' 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지킬 만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이상적인 모델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창세기의 이야기가 로마서 1장에 줄줄이 나와있다는 겁니다. 28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도 그렇고 말입니다.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
(롬 1: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일종의 확대재생산인데, 즉 시장에 나가서 그것을 확산시키는 겁니다. 즉 "이것이 더 좋다. 퍼지고 확산될 수밖에는 없어"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욕망이 확산된다는 것은, 그만큼 저주의 대상이 넓혀지고 확대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곧 로마서, 즉 로마에 쓴 편지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당시 로마의 상황이, 그들이 비록 이방민족이지만, 이방민족과 고대에 있던 모세의 율법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지금 여기서 천천히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욕망 속에 있고 말입니다(??).
이제 로마서 2장을 보겠는데, 먼저 2장 5절과 6절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면, 로마에 있는 이방민족, 즉 각양 각색 모든 민족들이 다 모여있는 인종 집합체가 되는 로마제국의 중심가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겨냥했다는 말입니다. 즉 "너희들이 어떤 민족이든, 어디서 어떻게 살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는 하나님의 법대로 처리한다" 라고 말입니다. 물론 인간들이 만든 법은, 자기를 위한 자기를 상품화시키는 법인데, 그런 법은 모든 법에 다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2장 12절에 보면,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또한 율법이 있고 범죄하는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여기서 "율법 없이 망하고" 라는 것은 누구를 의식해서 말하는 것입니까? 이방민족을 의식한 것이고, 그리고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다" 라는 것은 누굴 의식한 것입니까?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말입니다.
(롬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 걱정하지 마세요. 확실히 망합니다. !!
그러니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망하는 것은, 그것은 필연적인 순서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확실히 망한다는 것인데,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걱정하세요. 망합니다" 라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즉 "확실히 망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확실히 무너지게 합니다" 라는 것을, 이 로마서 2장에서 이렇게 깔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육의 종말이고 말입니다.
그 확실한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인데,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더 이상 건질 것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죽지 않고 살지 않는 이상, 너희들이 아무리 살려고 해봐도 안 된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고 다시 살아난 분에 의해서 살지 않는다고 하면, 즉 그 어떤 인간이라도 자기 행함으로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말입니다.
◈ 왜 그분이 죽음이란 세계에 '풍덩' 빠졌는가?
십자가 의미가 바로 그러한데, 이 십자가가 그냥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죽음에 '풍덩' 빠졌다가 다가옴으로 말미암아서, 즉 "왜 그분이 풍덩 죽음이라는 세계에 빠졌는가?" 라는 것을, 즉 그분의 죽음의 의미를 놓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주님이 갔던 그 죽음의 길을 지금도 그냥 그대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십자가를 지고 따라는 것은 아니고 말입니다.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
그것을 아까 뭐라고 표현을 했습니까? 그것을 한 글자로 '육(肉)' 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요한복음에 보면 잘 나오는데, 즉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다" 라고 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까 "무너지게 된 세상 속에 너희가 살고 있구나" 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 인간은, 왜 '율법'으로 심판을?
지금부터 약간 어려워지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봐야 될 것은 무엇인고 하니, "왜 심판이 되어야만 되는가?" 라는 문제인데, 즉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고, 자기 나름대로 법을 만들어서,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데, 사실 우리가 부족한 인간인 이상, 이미 죄인인 이상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왜 율법으로부터 심판을 받아야 되느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은 왜 율법으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것인데, 지금 제가 칠판에 쓰는 이 글씨는 국과수에서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데, 어떤 때는 제가 메모를 해놓고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설교시간에 애를 먹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ㅋㅋ).
아무튼 우리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아니, 율법이 뭐기에? 하나님이면 다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즉 "왜 우리를 심판하는가?" 라고 하면서 따진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왜 율법으로 심판을 하느냐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왜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가?" 라는 것인데 말입니다.
◈ 하나님은, 왜 마귀의 자녀를?
제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이게 광주강의에서 나왔던 질문인데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만든 사람 속에 사랑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요한일서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라고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마귀의 자녀들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것이 저의 질문인데, 물론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왜 마귀의 자녀가 되라고 만들었습니까?" 라는 문제인데, 우리가 기독교 신자라면, 그것을 풀어야 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만 만들면 되는데, 왜 마귀의 자녀까지도 일부러 만드셨느냐는 말입니다.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
정답을 미리 알려드리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드러내기 위해서인데, 그것이 정답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예수님을 그만 빼버리고, 자꾸 교회에 나와서 자기와 하나님만, 그렇게 단 둘이서만 상대하는 것처럼 여긴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 사랑해 주소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까?"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를 사랑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정작 예수 그리스도는 빼버리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만 잊어버리고, 마치 자기를 위해서 만든 것처럼, 사랑의 하나님이 자기에게만 사랑을 듬뿍 준 것처럼, 그런 식으로 오해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겁니다. 다만 잠시 죄를 씻기 위해서, 그것도 자범죄가 아니고 원죄, 오리지널 신(SIN)을 씻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원죄를 씻지 위해서 잠깐 들어왔다가, 그렇게 그냥 자기가 할 일을 하고는 빠진다는 겁니다. 즉 "이제 예수님은 빠지세요. 그만 빠지고, 나는 앞으로는 하나님과 상대를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분명히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욥기 - 하나님이여, 왜 나를 만들었습니까?
욥기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왜 마귀의 자녀를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이 나오는데, 즉 욥이 "하나님이여, 왜 나를 만드셨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것도 믿음이 있다고, 그렇게 마귀 앞에서도 칭찬한 자기를, 그런 자기 자신을 왜 이렇게 고난받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정답은 뭡니까? 신약이 해답이 되는데,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인화지로 복사하기 위해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 1장 10절과 11절에 보면 나오는데, 즉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증거하도록 한다고 말입니다.
(벧전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벧전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 히브리서 11장 - 왜? 왜? 왜?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에서, 왜 에녹이 방주를 만들지 않고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야만 되고, 또한 왜 에녹은 시체로 가는 게 아니고 산 채로 올라가야 되고, 또한 왜 아브라함은 방주를 만들어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왜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치면서 구원을 받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왜 야곱은 두 손자들에게 어긋맞게 축복해야 되는지, 그리고 왜 모세는 그냥 일반백성이 아니고 애굽의 바로 공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러면서도 애굽의 모든 보화를 버리고 가야되는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각자의 역할이 따로 있기에 !!
그것은 바로 각자 각자의 하나의 피자의 조각처럼 퍼즐로서의 역할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피자를 한 판을 다 먹을 수는 없는데, 한 부분만 먹는다는 겁니다. 즉 우리 각자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클러스트(?) 피자의 한 조각, 한 조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조각들이 있는데, 그 조각들을 모아보면 그게 전체가 무엇인고 하니,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지체' 라고 하는데, 즉 지체란 몸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만 있을 뿐인데, 그 믿음의 실체는 누구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즉 성도는 그 보이지 않는 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지금 자기가 원치 않는, 자기가 요구하지도 않는, 그런 인생 길을 하나의 피자 조각처럼 살아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와있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어떤 사람의 역할은 사사기에서 승리하는 역할이고, 또 어떤 사람은 톱이 베여서 죽는 역할이고, 그런 것들이 히브리서에 다 나온다는 겁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는 역할이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암에 걸려서 죽도록 고생하다가 죽는 역할이고 말입니다.
물론 그럴 때, 우리는 이왕이면 주인공 주몽을 하고 싶지, 주몽 옆에 있는 졸병을 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또한 연타발을 하고 하고 싶지, 부득불 역할을 하고 싶은 사람 누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물론 연타발과 연탄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그렇다고 소서노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ㅋㅋ).
◈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 !!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이 배치한 대로 있어야 될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 로마서 1장에서도 보았듯이. 왜 그런가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것' 이라는 말은, 더 이상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내' 소유가 아니라면, '나'의 소망, '나'의 믿음, '나'의 사랑 등등, 그렇게 '나'의 것을 끄집어내면, 그러한 것은 모두 다 거절을 당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육적인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말씀을 지키려 해도, '내' 소망, '내' 믿음, '내' 사랑이 거기 퍼부어져서, 그렇게 해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주님께는 전혀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킨 그런 율법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과 믿음과 소망은 오직 예수님만이, 즉 그것은 예수님만의 자기 홀로 담당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하는고 하면, "왜 우리는 안 되는가?" 라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그것을 '부정적 방법' 이라고 하는데, 즉 '부정신학(否定神學)' 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부정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 꽃으로도 때리지 마세요 ??
제가 아직까지 "왜 율법으로 심판을 받아야 되는가?" 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왜 율법으로 심판을 받아야 됩니까? 탤런트 김혜자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아이들을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라고 말입니다. 그런 책도 나와있는데, 그런데 저는 그 제목이 얼른 납득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혹시 학교를 다닐 때 교탁에 있는 꽃으로 맞아본 기억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그런 꽃으로 맞으면, 특히 꽃의 줄기부분은 상당히 아프다는 겁니다. 물론 "꽃으로도 때리지 마세요" 라는 것은, 그 정도로 아이들은 연약하다는 의미인데, 하지만 실제로 꽃으로 맞아본 사람이라면 기분이 엄청 나쁘다는 겁니다. 차라리 몽둥이가 낫지 말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웃음이라도 때리지 말라" 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조금은 유치한 제목이지만 말입니다(ㅋㅋ).
◈ 인간은, 자기와 무관한 율법으로 얻어맞아야 !!
아무튼 우리 인간이 율법으로 심판을 받아야 될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그것은 바로 율법이 사람과 관련된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무관한 율법을 가지고, 왜 우리를 건드리는고 하니, 그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과 관련된 사항을 가지고 사람을 심판해버리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면 사람은 당장 "다음에는 잘 할게요" 라고 하는데, 즉 대답이 성립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 학생을 보고 "너는 왜 신발을 함부로 벗는가?" 라고, 그렇게 심판을 해버리면, 그 학생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앞으로 신발을 나란히 잘 정리할게요"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맞는 말인데, 실제로 그렇게 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할 때 어떻게 하는고 하면,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었다" 라는 것이 이미 증거된, 이미 그것이 왕년에 확정이 되어버린 법을 가지고서 때려줘야만, 그래야 얻어맞고 난 뒤에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이지, 그래서 앞으로 다시는 "이 율법을 어기지 않고 잘 지킬 게요" 라는 소리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7장의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꽃이 아닌 율법으로서 때리는데, 그런데 인간이 어떤 인간이냐 하면, 즉 율법으로 인간을 때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면, 인간은 맞으면 맞을수록 오기가 더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과 관련이 되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 율법은, '죄'를 겨냥해서 !!
그렇다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로마서 7장에 보면 나오는데, 한 글자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죄'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죄가 바로 우리의 대장이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율법은 졸병인 우리가 아닌, 우리의 대장인 죄를 겨냥한다는 겁니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데, 즉 율법의 쏘는 것은 뭐라고 합니까? 밑에 있는 인간이 아니고, 어디를 향해서 발사하는고 하니까,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을 완전히 잠식했던, 그 죄를 향해서 율법을 쏜다는 겁니다. 즉 죄가 표적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철도 없이, 날아가는 주몽의 화살을 그만 자기가 받아 가지고는 "내가 지킬 게" 라고 한다면, 그건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율법의 쏘는 것인 곧 죄인데, 그런 죄도 전혀 감당하지 못하는 주제에, 자기가 율법을 받아서 지켰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말입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그러면, 인간은 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가?
그런데 인간이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 제가 아까 말했는데, '카오스' 라고 말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를 둘러싼 너무나도 변화무쌍한 세계에서, 그런 세계에서 자기가 생물학적으로 적응하기 위해서, 그래서 자기만의 구역을 정해놓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 여기는 내 구역이다 !!
예를 들어서, '동물의 왕국'과 같은 것을 보면, 한 마리의 사자가 자기가 대장질하고 난 뒤,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오줌을 찔찔 갈기는데,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는 내 구역이다" 라고, 그렇게 자기 영역을 정해놓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하고 똑같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줌마들이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기 가방을 먼저 던져놓고 뛰어가는데, 자기 가방을 왜 던집니까? "이건 내 끼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극장이나 음악회에 가서라도, 자기 소지품을 가지고 전부 자리를 다 먼저 잡아놓고는, 그렇게 자기 교회 식구들을 챙긴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도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먼저 자리를 모두 잡아놓더라는 겁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어떤 권사님인데, 이번 수련회에는 참석을 못했는데 말입니다. 즉 "여기는 우리 식구들 자리이니, 다른 놈들은 오지마!" 라는 겁니다. 맞는지 틀리는지, 다음에 권사님에게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ㅋㅋ).
이렇게 사람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마저도 자기의 법으로 전환시켜서 그렇게 하니까, 결국은 이게 무엇입니까? 물론 유대인의 율법이기는 하지만, 유대인의 본래 양심이나 이방인의 양심이나 모두가 다 같다고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있고, 유대인에게 율법이 있다" 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율법이 있다고 해도, 율법이 있는 값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율법만 있는 게 아니고, 죄로 물든 양심도 함께 있어서, 율법해석에 그만 죄로 물던 양심에 첨부가 되어서, 그렇게 우리는 선입관을 가지고 무엇을 해도 한다는 말입니다.
◈ 가다머 - 그 어떤 문장도, 인간은 선입관을 가지고 해석을 !!
가다머가 그것을 지적했는데, 즉 "인간은 그 어떤 문구나 어떤 문장을 해석해도, 자기 선입관이 없이 해석하는 법은 없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하는 선입관은 도대체 어디서 생겼는고 하니, 그 시대의 공동체가 요구하는, 그런 의사소통이 되는 개념을 가지고, 즉 그런 선입관을 가지고 해석을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역사의 지평' 이라고 하는데, 혹은 '의미의 지평' 이라고도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것을 해석해도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그게 국어시간에 하는 해석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식의 동향을 해석해도, 이미 과거의 선입관을 가지고 해석하는데, 그렇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사회라는 것은, 인간사회가 있고 그 다음에 언어가 있는 게 아니고, 먼저 언어가 인간사회를 만들어내는데, 즉 인간사회를 새로이 만들어낸다는 말입니다.
◈ 의사소통이 안 되면 이민이라도 가야 !!
그래서 만약에 자기와 의사가 안 맞고 의사소통이 안 되는 동네라고 하면, 그런 사람은 미국 LA로 이민을 가면 되는 겁니다. 즉 서울 강남에서 살다가, 정부에서 세금을 너무 때려서 못 살겠다고 하면 어디로 가면 됩니까?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 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미국에서의 언어소통과 한국에서의 언어소통이 서로 다르니까 말입니다. 즉 "나는 이런 사회에서는 언어소통이 안 되고 왕따를 당해서 싫다. 그러니 내 언어에 맞는, 나와 언어소통이 되는 나라로 이민을 가겠다" 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이민을 간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제가 지금 국어시간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데, 즉 '문장 만들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공동체가 요구하는 그대로인데, 그러니 그게 거대한 타자, 즉 타인이란 겁니다. 그렇게 거대한 타인이 요구하는 대로 수긍하면서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사회에서 적응하는 방식이란 말입니다. (문장을 하나 해석해도 그런 식으로 하는데?)
◈ 자기를 상품화시켜서 !!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시장에 하나의 상품을 내놓으려면 자기 가치가 있어야 되는데, 그래서 자기 가치와 의미를 무엇으로 포장하는고 하니까, "나는 하나님을 말씀을 이렇게 잘 지켰다" 라는 자기의 성화론 가지고, 그것을 상품화시켜서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목사가 교인에게 권위가 있게 가르친다" 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적어도 그 목사에게 배우는 교인은 목사보다는 성화가 덜 되어있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라, 만약에 그 목사보다 더 말씀을 잘 지키고 착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그만 목사의 권위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인이 이렇게 열 명이 앉아 있다고 하면, 그래서 목사가 하는 말이 "나는 카리스마적인 권위가 있다" 라고 하면서 나름대로 가르치는데, 그래서 '맑음', '맑음', '맑음' 이라고 그렇게 되는데, 그런데 이쪽에 'D' 라는 이 교인이 목사보다 더 착하면, 그만 '흐림'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상도 말로 표현하자면, 그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묵어주기', '묵어주기', '묵어주기', 그런데 '안 묵어주기' 라고 되는데, 그러니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 나가란 말이야. 다른 교회로 가란 말이야" 라고 하면서 그만 빼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묵어주기', '묵어주기', 그리고 '온통 묵어주기' 라고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즉 "나는 지시하는 사람, 너는 지시를 받는 사람" 이라는 말입니다.
◈ 니체 - 명령이 순종보다 더 어려워 !!
거기에 대해서 니체가 한 유명한 말이 있는데, 즉 "명령하는 사람이 순종하는 사람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라고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명령하는 사람은 순종하는 그 고통까지 다 껴안고 난 뒤에 명령하라는 겁니다. 명령을 제대로 하려면 말입니다. 꼭 예수님과 같은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명령하는 사람은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즉 순종하지 못하는 책임까지도 모두 질 수 있는 사람만이 명령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보다 더 위대해 보이는데(?), 물론 그는 예수를 전혀 믿지 않는 불신자이지만 말입니다.
◈ 하비 콕스 - 신의 죽음 !!
그래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사람들은 그 명령체계 안으로, 즉 순종체계 안에 들어와 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잠입을 해서 돌아다니는 신, 즉 흘러 다니는 사건의 흐름으로서의 어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메시야를 찾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세 글자로 '세속화' 라고 하는데, 이것을 하비 콕스는 이것을 두고 '신의 죽음' 이라고 표현했는데 말입니다.
◈ '낮은 자'의 하나님 ??
다시 말해서, 헤겔의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이미 우리 내면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신, 즉 하나님은 그런 낮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느 쪽이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하나님 쪽이 되는데, 그러니 그쪽 신학에서 귀하게 여기는 성경구절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창세기 21장에 나오는데 말입니다.
무슨 내용인고 하니, 이스마엘이 쫓겨나가면서 울부짖고 방성대곡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고통을 들어주시고 축복하는 그 장면인데, 즉 비록 이스마엘도 하나님이 축복해주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한 창세기 4장에서, 살인자인 가인도 보호해주는 장면, 따라서 사형제도는 당연히 폐지가 되어야한다고 주장을 하는데, 성경말씀이 주로 그런 쪽으로 사용이 된다는 말입니다.
(창 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창 21:15)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창 21:16)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창 21:17)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창 21: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4장에 봐도, 없는 자, 어려운 자, 눌린 자, 가난한 자 등등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이사야서를 펴면서 하신 말씀이 뭡니까?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라고 하셨는데, 즉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바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자기 목회를, 즉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야, 이게 맞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최일도' 라는 썩은 인간이 패러디를 해서, 밥 퍼주는 사랑을 들먹거렸고 말입니다.
(눅 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 출발점이 언약이 아니라, '가난한 자' ??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면, 인간이 신을 추구함에 있어서, 자기 고통의 입장에서부터 신을 추구하면, 그런 신으로 자기에게 되돌아오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벌써 출발점이 언약이 아니고, '나' 라는 존재를 정당화하고, 즉 자기는 비록 가난하지만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나님을 찾다보니까, 어려운 자를 돌보는 하나님이고,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미 출발점이 어떻게 되고, 자신의 가난함이 뭐가 됩니까? 가난 자체가 그만 의(義)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즉 하나의 가치가 되고, 의미가 되어버린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조차 무엇이 공격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저주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말입니다.
◈ 율법을 내면화시키는 인간들 !!
그래서 인간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내면화시키고 마는데, 자기의 가난함으로 말입니다. 마치 법정 스님처럼, 그렇게 무소유를 주장한다는 겁니다. 즉 "교회도 없다. 가진 것도 없다. 자식도 없다. 부모도 없다. 나도 없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법정처럼 무소유를 주장함으로서, 비록 산에 올라가는 길이 다르지만, 즉 불교와 기독교라는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하지만 결국 올라가면 신은 무엇인고 하니,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러니 이 무소유가 맞다고 주장한다는 말입니다.
◈ 이제 무소유의 종교를 !!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피난처로 삼는 종교가 무엇인고 하니까, 바로 이 무소유의 종교인데, 즉 "천주교야, 기독교야, 우리 불교야, 이제 서로 종교의 장벽을 허물어버리고, 무소유에서 하나로 만나세. 그래서 이 사회에서 가치 있는 종교로서 거듭나세" 라고 주장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범 통일적이고, 범 기독교적인 모임인데, 그런데 그것마저도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율법을 가지고 심판을 하시는데, 바로 그 고소함, 그런 맛으로 우리가 사는데 말입니다(ㅋㅋ). 아무튼 그런 것이 종교라는 말입니다.
◈ 인간은 왜 자기 존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가?
이제 교재를 한번 살펴보겠는데, 교재 1페이지의 '본론'을 보면, 거기에 "인간은 왜 자기 존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적어놓았는데 말입니다.
** 사람은 자기에게 감동하며 사는 자들이다. 사람이 가장 크게 기뻐하는 경우는 자기 존재의 가치를 새삼 인정하고 확인할 때이다. 그것은 사람들은 '은총'으로 감지한다. 즉 자기가 자신의 근원을 부인하지 못할 때, 사람은 자기 존재가 품고 있는 신비로움에 경외심을 갖게 마련이다.
◈ 나는 내가 너무 마음에 들어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야, 내가 이 정도였나? 아, 미치겠다. 정말. 나는 내가 너무 마음에 들어" 라는 것인데, 혹시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까? 그것이 사람에게는 뭐냐 하면, "주여, 저한테 은총을 주셨군요"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에게 은총을 주었기 때문에, 그러니 남에게 주는 은총은 은총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쁜 하나님인데, 은총이 방향이 자기에게 와야지, 왜 저쪽으로 가느냐는 말입니다. 즉 남에게 주는 은총은 은총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도 은총이 되려면, 자기에게 와서, 자기가 스스로 어떤 가치를 느낄 때 비로소 은총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남이 가지는 은총은 서로 공유하지 못하게 되어있는데, 그것을 '개별적 존재' 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신비로움' 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사람은 알 수 없는 자기 존재의 신비로움에 감탄하고 감동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해도 해도 너무한데,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겠습니다.
** 그런데 이 신비는 '내 안'에 있는 신비도 아니요, '내 앞'에 있는 신비도 아닌 이유는, 아예 '나' 라는 기대조차 의미를 상실해 버리게 만드는 신비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 '나' 라는 존재의 신비로움 !!
특히 영성훈련을 해보면 이렇게 되는데, 이 영성훈련은 천주교의 '트레디아스'에서 출발해서, 지금은 천주교뿐만이 아니라 합동이나 통합 등등, 전부가 다 시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내 안 있는 신비도 아니고, 내 앞에 있는 신비도 아니고, '나' 라는 기대조차 의미를 잊어버리는, 그러한 신비이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이것을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인고 하면, '하이데거' 라는 철학자인데, '존재와 시간'으로 유명한데 말입니다. 즉 "나를 잠식하고, 나를 통제하고, 나를 점령하고, 나를 포함시키는 존재의 신비" 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빠져 있습니까? 힌트로 세 글자인데, 즉 '십자가'가 빠져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저주이니 말입니다. 그런 저주가 빠지니까, 그만 낭만으로 치닫고 만다는 겁니다.
◈ 형식미학과 숭고미학 !!
그래서 여기에서는 뭐냐 하면, 돈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아름다움으로라도 자기의 공허함을 메우려고 한다는 겁니다. 돈은 뜻대로 안 벌리니까, 그러면 남는 것은 바로, 즉 '나' 라는 존재는 신의 은총으로 아름답다는 겁니다. 그런 것으로 자기의 공허함을 메우려고 자꾸 변명하시는데, 그것을 두고 칸트는 '형식미학'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있는 자체로서 즐거워하고, 있는 자체로서 그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형식미학이 낭만시대로 가면, 이게 무슨 미학으로 되는고 하니, '숭고미학'으로 되는 겁니다. 숭고함, 즉 그 거룩함 앞에서 인간은 그것을 그림 속에 다 그려 넣지 못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때 인간은 개미만큼 작게, 대자연은 아주 크게 그린다는 겁니다. 오늘 그림이 좀 되는데 말입니다(ㅋㅋ).
아무튼 이렇게 산이나 폭포를 아주 크게 그림으로 말미암아서, "조그마한 '나' 라는 존재가 이 거대한 대자연의 숭고함 속에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그렇게 숭고함을 나름대로 표현한다는 말입니다. 즉 대자연을 크게 그리고, 사람은 작게 그림으로서 말입니다.
◈ 아도르노 - 자연의 아름다움은 있는 그대로 !!
그런데 '아도르노' 라는 학자는 이러한 대자연의 숭고함까지도 거부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자연 자체는 있는 그대로 그냥 놔둠으로 말미암아서, 그것이 곧 아름다움이다" 라고, 그렇게 주장을 했다는 겁니다. 있는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라고 말입니다.
아무튼 이 세상에서, 소위 과학기술에서 낙후가 되고 탈락되고 거기에서 뒤쳐진 사람들은, 비록 뒤쳐졌지만 또 다시 뒤쳐진 그 나름대로의 존재의 보람과 신비를 찾기 위해서 계속해서 개발을 한다는 겁니다. 마치 온천을 개발할 때, 뜨거운 물이 나올 때까지 개발을 하듯이 말입니다.
◈ '나'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 !!
그러니 이렇게 돈이 되는 쪽으로 안 되면, 자기에게 있는 존재를 가지고 파고들어서, 그러한 존재의 신비에서 어떤 아름다움과 존재의 의미를 얻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독교의 십자가 신비와 결합이 되어버리면, 그게 마치 십자가의 복음인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마저도 전혀 육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글들이 어렵다는 겁니다. 인간이 시도하는 모든 시도를 여기에다 다 집어넣어 놓았다는 겁니다. 인간이 기껏 노력하고, 또한 신학을 동원하든 철학을 동원하든지, 하여튼 인간이 애쓰고 노력한 모든 것을 다 집어넣었다는 말입니다. 짧지만 여기 이 교재의 글 속에다 말입니다.
이제 교재 2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예를 들면, 회사 직원들끼리 회식 자리에서 술을 어느 정도까지 먹어야, 다른 직원들 눈에 경계와 존경이 조화를 이루는 중간지점일 수 있느냐를 생각해야만 한다. 술을 너무 많이 먹게 되면, 술에 대해서 일시적으로 존경의 시선을 모을 수는 있지만, 남보다 술에 너무 세다는 평을 받게 되면, 남들로부터 시기의 대상이 되어 미움을 자초하는 일이다.
** 또한 술을 전혀 안 마시는 것은, 대다수 다른 직원의 약간의 세속적 해이함을 심판하는 위치에 있다고 오해를 받아 따돌림을 당하고, 그것이 누적되면 회사 운영의 중요 정보통에서 배제가 되어 승진하는데 장애요소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퇴직하고 나면 자기 존재의 품위를 지탱하는데 필요한 돈도 없이 노숙자로 전락할 수도 있다.
◈ 회사에서는 술을 한 잔 하더라도 !!
그러니 술을 너무 많이 먹게 되면, 술에 대해선 존경을 받을지 몰라도(?), 나중에 돌아서서는 "저거, 술꾼이 하나 들어왔네" 라고, 그렇게 욕을 듣게 되면, 그것도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왕따를 당하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울리지를 못하고 회사의 중요정보에서도 배제가 되는데, 그래서 "아니, 당신은 회사가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무슨 과장이 되려고 하는가?" 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겁니다. 그래도 과장 정도라도 올라가려고 하면, 회사의 중요정보에 참여가 되어야하고, 그렇게 참여하려면 회식도 같이 하면서, 그렇게 어울려서 회사가 돌아가는 전반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통제하기는커녕 정작 자기 할 일도 몰라서 헤맨다는 겁니다. 그러면 위에서 어떻게 노는지를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 것을 따로 챙기는 것 밖에는 안 되니까, 그런 경우에는 높은 자리에 전혀 가담을 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회사생활을 하더라도 그런 어려움과 고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마누라는 그러한 것을 알 리가 없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다시 신비로 돌아오는데, 즉 "주여, 제가 이런 존재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저의 충정을 조금이라도 ??
제가 이렇게 존재 이야기를 하는 것은, 로마서를 강의를 제가 이렇게 준비를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물론 들을 때는 '아멘' 이라고 하다가, 이 로마서 강의를 다 듣고 난 뒤에 다시 존재로 되돌아가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을 당부하기 위해서 제가 이런 글을 교재로 삼아서 썼고 말입니다.
그런 저의 충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해달라는 것인데(ㅋㅋ), 그런데 실컷 하고 난 뒤에 보면, 그만 다들 자기 존재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즉 "나는 이 정도라도 나름대로의 가치를 건졌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이지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 십자가 - 인간은 주님이 같이 '풍덩' 해야만 !!
그러니 '십자가' 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계속해서 그냥 '나' 라는 인간은, 예수님이 껴안고 함께 풍덩 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마치 심청이가 아닌 논개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어제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나 그렇고,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그럴 수밖에 없는, 즉 우리 인간은 그럴 가치 밖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나'의 죄를 대신 가져가신 분이고, '나'는 주님이 가져갈 죄를 생산하는 놈이고 년인데, 그런 주님과 만나서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또한 주께서 살려주심으로 말미암아서 구원되는 것이지, 따로 독자적으로 '내' 존재의 신비를 찾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미리 당부를 했는데 말입니다.
◈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인간 !!
그러므로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다" 라는 것은,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죄를 겨냥하고 있는데, 물론 죄는 지금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을 때는 미쳐 몰랐는데, 그런데 듣고 난 뒤에는 더욱 더 금지한 그것을 소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하지 말라" 라고 하면 더 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TV프로가 재미있는고 하니, 내용 자체보다도 옆에서 보지 말라고 했는데 보았을 때, 그것이 제일 재미있고 기쁘다는 말입니다(ㅋㅋ).
◈ 사람이 사는 보람은, 죄 짓는 것에 !!
제가 어느 설교시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의 기쁨은 어디 있는고 하니, 죄를 짓는 데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죄를 안 지으면 사람은 사는 보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뭐든지 다해라" 라고 하면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자꾸만 뭔가 금지한 게 있어야, 그것을 타 넘는 재미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는 자극도 되고, 도전도 되고, 그렇게 재미가 난다는 말입니다.
아이들의 경우에, 학교를 다닐 때는 괴로워하는데, 그래서 어서 방학이 되었으면 하는 겁니다. 하지만 막상 방학이 되면, 환장하고 미친다는 겁니다. 심심해서 말입니다. 물론 요즘은 심심할 시간이 없지 싶은데 말입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엄마, 법을 이야기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법을 지키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즉 법이 없이는 못 살겠다는 말입니다.
◈ 니체 - 나는 권태가 두려워 !!
니체가 가장 무서워하고 겁을 냈던 것이 바로 '권태' 라는 것이었는데, 즉 심심하다는 것은 그야말로 환장을 한다는 겁니다. 기업가들을 보면,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기업을 하는 게 아니고, 심심해서 한다는 겁니다. 제가 박사동네에 10년을 있었는데, 그 시골 동네에서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데, 돈을 벌려고 짓는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짓지 않으면 심심하니, 즉 심심해서 농사를 짓는다는 말입니다.
제 앞집에 있던 팔십 여섯 먹은 할머니가, 그분이 권사님인데, 50평에 파 농사를 짓는데, 가을에 파를 다 거두니까 돈이 얼마나 나왔느냐 하면, 삼만 원이라는 겁니다. 50평이나 되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기쁨으로 거둔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자기가 노동한 대가를, 그것을 심심풀이로 때워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사회주의가 망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경쟁을 억누르게 하고, 그냥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면 되는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을 일종의 '사육' 이라는 것인데, 그럴 때 먹는 것은 양식이 아니고 사료라는 말입니다(ㅋㅋ).
가난한 집보다는 부잣집의 외동아들이 자꾸만 엇나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사건과 도전을, 즉 그런 경계를 타 넘으면서 사는 재미를 느껴서, 그래서 자꾸 탈출을 하고 탈선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저 아이는 먹을 것도 주고, 입을 것도 넉넉하게 주는데, 왜 그런지 몰라?" 라고 하는데, 하지만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는 사는 재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 목회성공비결 - 여러분, 목회성공을 하지 마세요 ??
제가 여러분에게, 특히 목사님께 목회에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자면,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는 겁니다. 즉 "여러분, 목회성공을 하지 마세요" 라고, 그 한 마디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로 돌아가서 목회성공을 하고 싶어서 환장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곧 법이니 말입니다. 그 법을 어기고 싶어서 말입니다.
또한 "목회성공이 곧 죄입니다" 라고 하면, 그 다음부터 사람은 그 죄를 짓고 싶어서 미치고 환장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서, 비로소 그 사람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엔돌핀이 마구 마구 솟나난다는 겁니다. 즉 사람이 살아가는 에너지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양의 침묵' 이란 영화를 보면, 유난히 얼굴에 생기가 도는 놈이 있는데, 그것도 그런 에너지인가요?)
◈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마라. 주눅든다 ??
그래서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즉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마라. 십자가를 말하면 사람은 주눅이 든다. 그렇게 주눅들게 하는 십자가를 왜 이야기하는가?"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무슨 그런 십자가가 다 있습니까?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평소에 주눅이 들기 싫은 쪽으로 살고 싶으니,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 것은 전부 거부하겠다" 라고 하는, 그런 고민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우릴 주눅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한계성을 이미 알려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에서 우리는 누구를 만납니까? '내' 죄를 대신해서 가지신 분, 즉 '내' 죄가 그분에 의해서 해결되었다는 겁니다. 그분이 가져간 그 죄를 생산한 '나', 즉 죄인인 '나'와, 그리고 그 죄를 대속하신 그분, 즉 우리는 죄인이고 그분은 대속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 의인(義人)이란, 오로지 의(義)의 관계 속에서만 !!
바로 그러한 관계를 두고, 곧 '의(義)'의 관계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 의의 관계에 놓여있는 자들을 두고서 '의인(義人)' 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인 중에 있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의인 중에 있는 죄인 말입니다.
◈ 성도는, 의인으로서 죄인 !!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입니까? 의인으로서 죄인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이 되어야, 죄를 가져가신 분이 결합되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 관계를 한 글자로 '의(義)' 라고 하고, 그런 의에 포함된 자들을 두고 의의 관점에서 '의인'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잘나서가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독자적으로 떼어내서 생각하면 안 되는데, 그냥 때내서 "나는 의인이다, 죄인이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의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의인이고, 독자적으로 우리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죄인으로서 의인의 관계에 놓여있는 말입니다.
저는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 인간에 대해서 더 이상은 설명할 수 없다고 지금도 감히 자부하는데, 즉 "인간은 죄인인가? 의인인가?" 라고 물을 때, 이런 관계와 독자적인 관계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 성도의 임무 - 나에게서 어떻게 죄가 생산되는가?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의 할 일은 뭡니까? 우리 할 일은, 계속해서 죄가 어떤 식으로, 그렇게 "우리에게서 죄가 생산되는가?" 라는 문제라는 겁니다. 이것은 전혀 행함의 문제가 아니고, 실천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실천을 해서, 즉 죄가 나오는 실천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그런 통치권 속에 우리는 놓여있다는 말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듭니까? 의의 능력이, 즉 하나님의 의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런 능력을 우리에게 퍼붓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는 무엇입니까? 어느 놈 치고 죄를 짓자고 안달이 난 놈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죄가 무엇인고 하면, 우리는 독자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지고서 계속해서 의인되는 방법을 간구한다는 겁니다. 즉 완벽하게 주님께 순종하는 방법으로 애를 쓴다는 말입니다. 독자적으로 말입니다.
◈ 착한 일을 할 때는, 입가에 악마의 미소가 !!
그렇게 애를 쓸 때마다 우리는 입가에 미소를 짓는데, 왜 그런고 하면, "내가 말씀을 이렇게 지키기 때문에, 즉 세 가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가지 나쁜 일을 해도 눈감아 주세요" 라고 하는, 그런 나쁜 쪽의 경계선을 넘고 싶은 일탈, 바로 그러한 일탈을 소망하기 위해서, 그러한 일탈을 정당화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