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3
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3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8)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3 (둘날 오전1) '신'이라는 우상
2007,01,09 강의 이근호, 녹취 오용익
◈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어 !!
어제는 로마서 8장 1절에 나오는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했는데, 즉 '예수 안' 이라는 것은 결코 본인이 원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인이 원해서 들어가는 상태는, 기껏해야 이스마엘이고, 사울이며, 또한 레위지파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다윗언약, 곧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생겨나야만 했다는 겁니다. 즉 우리가 천국에 가겠다고 애쓰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 쪽에서 따로 마련해서 준비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자들이 말입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이미 창세 전에 !!
그런 사람들은 출생부터가 예수 안에 있도록 출생되었기 때문에, 예수 바깥에 나갈 수도 없는 입장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으로 가게 되면, 하나님의 선택문제가 나오는데, 즉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로 작정된 사람은, 본인의 달음박질이나 본인의 원함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로 그 사람에게 사랑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아브라함의 경우에 !!
그것을 로마서 1장부터 계속해서 살펴보면, 그것이 구약 때부터 계속해서 이어져온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렇게 구약 때부터 이어져 왔다고 하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할 때, 그래서 제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인간이 육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즉 시녀 출신의 이스마엘과, 그리고 인간의 태가 끊어져서 죽음에 처해진 상태에서, 즉 "이제 인간은 끝났네. 그렇게 구원을 받고자 애를 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우리 인간의 한계는 이것 밖에 안 되네" 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다 접었을 때, 바로 거기에서 불현듯 등장한 것이 곧 '이삭' 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을 보여주고 하니, 약속에 의해 태어난 사람과, 사람의 육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을 이렇게 완전히 구분한다는 겁니다. 즉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같은 사람이 아니고, 오직 약속에 의해서 출생된 사람과, 그리고 육의 확산에 의해서 출생된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 이삭류와 이스마엘류 !!
그렇게 나누게 되면, 구약 때는 '이삭'과 '이스마엘' 이란 좁은 범위에서 나누었지만, 신약에서는 무엇으로 나누는가를 이제부터 뽑아봐야 한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보면, 아브라함에서 이삭류와 이스마엘류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중간에 다시 다윗류와 사울류로 분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다윗은 무조건 왕이 되어야 하는데, 실수를 하든 죄를 짓든 간에,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애초부터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울은 인간들의 요구에 의해서 왕이 되지만, 본의 아니게 몇 번 실수를 했다는 이유 때문에 가차없이 왕에서 폐위를 당하고 제거된다는 말입니다.
◈ 이스마엘류 - 율법의 경계선 안에 갇혀있어 !!
이렇게 이삭류와 이스마엘류로, 그리고 다윗류와 사울류로 나누어지는데, 그런데 이것이 신약성경에 오면 어떻게 구분이 되느냐는 겁니다. 이쪽에 있는 사울류과 이스마엘류는 율법의 정죄를 당하게 되는데, 즉 경계선 안에 갇혀있는 꼴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데, 즉 "인간들이 자유를 가지고 무제한의 자유를 행사해서, 물론 아직은 부족하지만 계속 수련을 거듭하고 종교적인 영성훈련을 하게 되면, 나중에는 차츰차츰 개선이 되면서 신의 대한 헌신의 단계도 높아지고 찬양하는 마음도 높아진다" 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뭔가 점점 나아진다는 사고방식으로 나아가는데, 하지만 그런 것은 율법이 있어서, 율법의 테두리 안에 여전히 갇힌 채로 율법의 정죄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사울류와 이스마엘류 쪽은 율법의 경계선을 전혀 돌파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 이삭류 - '하나님의 의'의 능력으로 자유로운 상태 !!
그런데 이삭류는 어떠합니까? 이미 율법 자체로부터, 즉 율법의 정죄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으로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 약속의 능력을 '하나님의 의'의 능력이라고 하는데, 어제 마지막 시간에 했지 싶은데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의 능력이 뭐냐 하면, 말씀이 완성된 성취상태를 말하는데, 즉 말씀이 성취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능력이 여기에서 무엇을 생산하게 되는데, 즉 이삭류를 생산해내는 작업을 한다는 말입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하다보니까, 저쪽에서는 인간이 의를 이루려면 율법을 다 지켜야만 되지만, 그러나 이쪽에서는 이미 다 이룬 의로운 상태에서, 즉 완제품이 그냥 생산되는 상태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 곳이나 '푹' 찌르면 "믿음으로 의로워집니다" 라는, 즉 이미 '의' 안에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새로운 약속의 자녀가 생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둘로 나뉘어지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어떤 결론에 도착하게 되는고 하니까, 예수 안에 있어서 율법의 정죄함이 없는 이삭류와 다윗류와 같은 사람은, 왜 그런고 하니, 그들은 예수 안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복음인데, 즉 예수 안에서, 즉 예수님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어나서 어떻게 하다보니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될 수밖에 없는 증거물로서, 이미 출생부터, 사실 출생정도가 아니라 아예 창세 전부터인데, 즉 창세 전부터 이미 사랑을 받기로 작정되어서 태어나야만 되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은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어떤 작업을 벌이셨기에, 우리가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는 상태가 되었는가?" 라고 하면서,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 로마서의 구조 - '예수님의 성취'와 '인간의 행함'이 세트로 !!
이 로마서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고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의 능력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어떤 식으로 성취했는가?" 라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로마서는 기록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성취에 초점이 맞추니, 당연히 "왜 인간들의 행함으로는 안 되는가?" 라는 것과 더불어서 이 로마서가 구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로마서는 첫째로 "왜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는가?" 라는 점을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왜 예수 바깥에는 정죄함 뿐인가?" 라는 것인데, 즉 모든 사람에 대해서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그렇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었다고 하면, 우리 인간이 그 율법을 지키려다가 설령 90%정도 심하게 어겨서 정죄받을 짓을 했더라도, 그래도 10%정도는 착한 일을 했기에 건질 것이 조금이라도 있는데, 그런데 왜 그 모든 일체에 대해서 전혀 의롭다고 하는 것이 없느냐는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미리 말씀을 드리면, 로마서 3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 물론 자기는 지켰다고 자부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즉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이것은 전혀 아니야" 라고 거부를 해버리면 말입니다. 자기 딴에는 남들보다 더 열성을 내서 바르게 살았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 쪽에서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거절한다면, 자기가 열심히 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리 경쟁을 해봐야 !!
보통 자본주의 사회를 이야기하기를 '경쟁사회' 라고 하는데, 그래서 '진리' 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비교해서 추가적인 진리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즉 계속해서 남들과 경쟁하다 보면 예상치도 못한 새로운 것이 나오는데,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것을 두고, 추가적으로 진리에 더 접근했다는 식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 싸워서, 거기에서 추가적인 것들이 나와봤자, 즉 중요한 것은 "너희들이 어떻게 해서 이겼느냐?" 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래 원하지도 않은 것을 아무리 생산해 봤자, 그런 것은 소용없는 게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라는 것은 소용없는 짓거리인데, 물론 기독교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은 해도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합니까? 달리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바로 이스마엘 쪽에서 설명하는데, 그렇게 이스마엘 쪽에서 설명해줘야, 이 '예수 안' 이라고 하는 의미가 밝혀지니 말입니다.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
이제 오늘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는데,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쉽게 이야기하려고 상당히 많은 애를 쓰는데, 물론 전혀 기대는 하지 않지만 말입니다(ㅋㅋ) 아무튼 지금부터 굉장히 어려운 대목에 들어가는데, 신경을 조금만 더 쓰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하는 것이 무슨 내용인고 하니,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를 못하고 우상을 섬기는데,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그들을 그냥 방치하는 쪽으로 나간다고 하는, 그것이 로마서 1장의 이야기인데, 이제 그 시작을 로마서 1장 23절부터 한번 해보자는 겁니다. 물론 어렵지만 어려운 것부터 먼저 해보자는 말입니다.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 카오스와 코스모스 !!
인간이 생각하는 자연이 따로 있고, 그 자연 바깥의 자연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생각하는 자연과, 그 자연 바깥에 있는 자연이 따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생각하는 "이것이 자연이다" 라고 여기는 그 자연 이상의 자연이 따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연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자연을 '카오스(혼돈)' 라고 하고,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자연을 두고 '코스모스(질서)'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있는 '혼돈'을,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변화' 인데, 즉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합리적으로 굳히려는 방식으로 사용하는데 그것을 두고 '이성', 즉 '깨우침'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구조적으로 점검한다는 말입니다. (구조적으로?)
◈ 으악, 이럴 수가 !!
예를 들어서, 남자들이 총각 시절에 여자 친구의 집에 갑작스럽게 방문을 했다가 깜짝 놀라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 왜냐하면 여성은 외모적으로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들을 주로 보여주니까, 당연히 그런 여자가 살고 있는 집안도 그렇게 깨끗하고 단정하다고 여길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고도 하지를 않고, 놀래주려고 막상 가보면, 혼돈 그 자체라는 겁니다. 그때는 "으악, 이럴 수가!" 라고 하면서, 도리어 자기가 놀라게 된다는 말입니다(ㅋㅋ). 자기하고 만날 때는 그렇게 천하의 깔끔을 다 떨고 하더니만, 그런데 집구석에 가보면 설거지는커녕, 방구석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채,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저희 어머니가 현장에서 증언을 하는데, 저희 어머니 집에 자취생들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이 영남대생들인데 말입니다. 학교에 갈 때에 보면, 그래도 남자들은 어느 정도라도 방 정리를 깔끔하게 하고서 나가는데, 그런데 여자들은 드라이기도 마구 던져놓고, 숟가락도 굴러다니고, 또한 머리카락도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그래서 될 수만 있으면 여자들에게는 방을 내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아무튼 혼돈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ㅋㅋ).
◈ 잠시, 숫자 '0'에 대해서 !!
그렇다면 그 여자들은 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 채로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 겁니까? 대자연의 혼돈 속에서 '자아' 라는 것을 따로 모으려면 깔끔하게 정돈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정돈되는 그것을 가지고 철학에서는 '형식화' 라고 하는데, 즉 우리 인간은 무슨 일이든지 할 때는, 뭔가 정리정돈을 한 뒤에 일을 하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숫자에서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0' 이란 숫자라는 말입니다. '0'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과가 하나 있으면 이것은 '1'이고, 사과가 두개 있으면 '2'가 됩니다. 그러면 '0' 이라는 숫자는 왜 튀어나옵니까? 그것은 없는 것인데, 그렇게 없으면 그만이지, 그래서 굳이 왜 지시할 것도 없는데, 왜 '0' 이라는 숫자가 있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이 '0' 이라는 숫자를 인도에서 처음 만들었는데, 물론 '없다' 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그렇게 주장했지 싶은데, 그쪽에서는 자연수만 숫자로 본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정확하게 있는 것에 대해서만 셈을 하고 헤아릴 때, 그것이 바로 이 우주의 혼돈에 대항하는 아주 적합한 방법이라고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니 당연히 '0' 이라는 숫자는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0' 이라는 것이 없다고 하면 당연히 입을 다물어야지, 이렇게 없는 것을 '0' 이라고 해버리면, 그 다음부터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어, '0' 이라는 숫자는 있잖아?" 라는 말이 나와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일종의 반칙이데, 즉 없는 것은 침묵하고 없애버려야 할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없는 것도 굳이 '0' 이란 숫자를 만들어서 사용해야 된다는 말은, 그것은 바로 실제의 자연과 인간이 합리적으로 만든 자연과는 뭔가 삐걱거리고 서로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 '25'와 '205'의 차이점은?
그렇다면 이 '0' 이라는 숫자가 왜 있는지 살펴보겠는데, 먼저 제가 여러분에게 "25와 205의 차이점이 뭡니까?" 라고 묻는다면, 또는 "25와 250처럼 '0'이 들어가는 숫자와의 차이점이 뭡니까?" 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미 십의 자리하고 백의 자리로, 그렇게 층이 달라진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층이 다를 때, 그런데 이 '0'을 빼내버리면 25와 205의 차이점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즉 '0'을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서, 십 단위와 백 단위의 차이를 말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이러한 형식을 걸어놓는다는 것은, 자연은 계속 변화, 즉 혼돈을 일으키니까, 그 변화를 인간이 수용을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아니, 그렇게 깊은 의미가?)
◈ 스트레스는, 변화에 대처하는 수련을 !!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는 인생관을, 즉 자기가 굳혀놓은 이해를 다 수용을 못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두 수용을 못할 때는, 그것을 두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라고 하는데, 물론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아야 변화에 대처하면서 수련을 쌓아서 변화를 수용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집에서 놀던 청년들이 놀던 그 가락을 가지고 논산훈련소에 입대하게 되면, 군에서 그냥 마구 굴려 버린다는 겁니다. 막말로 해서 그냥 마구 조져버리는데, 왜 그런가요? 집에서 하던 그대로, 즉 별이 빛나는 밤에를 다 듣고 나서 그 다음날 아침 11시에 일어나고 말입니다. 그런 것을 그대로 다 가지고 있으면, 이 나라를 어떻게 지키고 간첩은 누가 잡느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멋대로 해서는, 즉 자기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자고 싶은 대로 자는 식으로, 그렇게 해서는 군대생활이 전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규율 속에 집어넣어야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 규율로 인해서, 그것이 자기에는 그야말로 억지가 되고 무리가 되어서, 거기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다가 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점점 수련이 되어서 나중에는 어지간한 스트레스는 전혀 문제도 안 되는데, 그렇게 되어야만 나중에 전쟁터에 나가서 적과 싸워야만 하는, 그런 험악한 환경 속에도 생존이 가능한 숙달과 수련의 인간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곧 '자연세계' 라는 것입니다.
◈ 우상이란, '자기 합리화' !!
제가 지금 "우상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이 우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고 하면, 우상은 일종의 합리화인데 말입니다. 어떤 식으로 합리화를 하느냐 하면, 자연세계를 형식화하는데, 그런데 그 자연세계에 새로운 변화가 다가올 때면, 그러면 수정을 해야하는데, 그것을 두고 '메타형식' 이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용어가 조금 어렵지요? 여기서 '메타' 라는 말은 무엇인고 하니, 뭔가를 '극복한다', 혹은 '뛰어넘는다' 라는 뜻인데, 바로 이러한 메타형식을 두고 '우상'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메타형식을 가지고 또 형식화를 만들어버린다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일단 형식을 만들었는데, 새로운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정보를 집어넣어서, 그렇게 새롭게 적응하기 위해서 전에 있던 형식을 버리고, 새로운 메타형식으로 자꾸만 자기 자신을 이동시킨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이러한 존재이다" 라고 하는데, 즉 "옛날에 나는 이랬는데, 지금의 나는 이렇게 되었다" 라고 말입니다.
왜 남자들이 군에 있을 때는, 어떤 여자든지 치마만 입었으면 결혼한다고 해놓고는, 말년이 되고 또한 제대하고 나면 그때는 골라잡는다고 난리를 피운다는 겁니다. 즉 "이전에는 어떤 여자하고도 결혼을 하겠다" 라고, 그렇게 상황이 어려울 때는 그런 식으로 형식화를 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제대도 하고 취직도 해서 배가 부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 쪽에서 점수를 매겨 골라잡겠다는 말입니다.
◈ 그런데 '잉여분(+α)'이 계속해서 남아 !!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메타형식이 생겨나면서 그렇게 이동을 하게 되는데, 그러나 인간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메타형식에는 항상 만족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미쳐 다 채우지를 못한 플러스 알파(+α)가, 즉 잉여분이 계속해서 남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잉여분을 무엇으로 남겨두는고 하니까, 그것을 신의 이름으로 남겨둔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보이즈 비 엠비셔스(Boys be ambitious!)" 라는 것인데, 소위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청년들이여, 엠비시를 봐라" 라고 하는데, 물론 요즘은 "청년들이여, 엠피쓰리를 들어라" 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말입니다(ㅋㅋ).
◈ 우상마저도 못 채우는 잉여분이 곧 '신' !!
바로 이렇게 "비전을 가져라!" 라는 것이 한국교회의 모토가 아닙니까? "2007년도에는 당신의 뜻대로 되리라!" 라는 식으로, 그렇게 잉여분을, 즉 '+α'를 만드는데, 그것을 곧 '신'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여기에서 합리화와 메타형식까지는 우상이고, 그러한 우상마저도 채우지 못하는 잉여분을 두고서 '신' 이라고 규정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인데, 곧 기독교이고 불교라는 겁니다. 물론 그것이 한국교회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성으로서 이렇게 형식화를 시킬 때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코스모스' 라는 것을, 그것을 '질서' 라고 하는데, 즉 "질서를 부과해서 형식화를 시킨다' 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오늘부터 성경을 3장 읽고, 주일은 5장을 읽어서, 올해에는 반드시 성경책 한 권을 다 읽는다" 라고 했는데, 물론 재수가 있으라고 한 것인데, 그런데 그만 재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형식을 바꾸는데, "하루에 성경 5장을 읽고, 또한 기도시간도 30분에서 1시간으로 더 늘인다" 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여기서 "인간이란 과거의 산물이다" 라고 할 수 있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자아, 곧 인간의 이성 속에는 자신의 경험, 곧 과거가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즉 과거가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는데, 그래서 인간은 과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느 인간이든지 자기가 살아온 자기 경험과 체험이 있으니 말입니다.
칸트는 말하기를 "인간은 느낀다는 감성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오성에 의해서 자신의 과거 체험을 정리정돈을 함으로서 새로운 자아, 즉 주체가 형성이 된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즉 '자아' 라는 것이 있어서, 이 자아가 자기의 경험, 즉 자기가 수집했던 정보들을 자기의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형식화를 만든다는 말입니다.
◈ 밑줄 쫙 - '금지의 법' !!
그런데 여기에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즉 어떻게 새로운 형식화를 만드는고 하니까, 지금 이 순간이 이번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데, 여기에다 별표를 '쫙' 해야하는데 말입니다. 그만 '금지의 법'을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냥 법도 아닌 금지의 법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누가 만듭니까? '내'가 만드는데, 그러면 규칙은 또 누가 만듭니까? '내'가 만든다는 겁니다. 그렇게 '내'가 '나'에게 법칙을 만들어야만, 그런 혼돈에 법칙이 들어가면 질서가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즉 "혼돈에 내가 만든 규칙을 집어넣으면 질서가 생겨나고, 그렇게 질서가 생기면 그것이 곧 우상화가 된다" 라는 것입니다.
◈ 이삭의 존재의미가 무엇인가?
그런데 제가 처음에 이야기를 했듯이, 이삭계열에는 무엇이 없습니까?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규칙을 적용해서 이삭을 낳았습니까? 즉 "나는 오늘부터 철야기도를 한다" 라는 규칙을 적용해서, 그런 철야기도를 해서 이삭을 낳았느냐는 말입니다.
이삭의 존재의미가 무엇입니까?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갖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이 갖게 된 느낌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내'가 '나'에게 어떤 규제를 가하고, 어떤 법칙을 정하면서, 그렇게 '내'가 어떤 종교적인 형식을 취했기에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의 어떤 육적인 행위와는 상관없이 거저 주어졌다는 것이 이삭의 존재의미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할 때, 아브라함은 덜렁(?) 이삭을 누구에게 바칩니까?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입니다.
◈ 믿음 - 하나님이 그만 알아서 하이소 !!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하나님이 알아서 하이소" 라는 것인데, 그래서 창세기 22장에 있는 그 사건을 가지고서 두 글자로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믿음' 말입니다. 로마서에서 우리가 그렇게 살펴보고자 하는 믿음이, 이렇게 벌써 창세기 22장에 나온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4장에 아브라함의 그런 행동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 뒤에 붙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아브라함은 율법의 행위로 한 것이 아니고, 이삭은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받은 것뿐이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여러분, 그러니 이것이 한국교회의 '교인 만들기' 라는 것과 얼마나 다릅니까?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정말이지 억수로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자칭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 내부에서 선악적인 요구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말입니다.
◈ 첫째로, 외부변화조차 수용 못하는 인간 !!
바로 여기에서 이렇게 형식화가 되었는데, 즉 인간 이성으로 형식화가 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혼돈을 질서로서 잡았다는 말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질서를 잡은 뒤에, 이 형식화에 대해서 인간은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첫째로, 이 세상이 돌아가는 그 외부의 변화조차도 수용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 다시는 만화를 보지 않을 거야 ??
쉬운 예를 들면, 어느 한 청년이 교회에 와서 결심을 하는데, 이제 다시는 만화를 보지 않겠다는 결심을 말입니다. 즉 "내가 만화를 보거든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려도 좋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결심을 해놓고는 그만 친구 집에 가서 만화를 보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자기가 세워놓은 형식화, 즉 질서에 수정을 가하는데, 즉 "이제 두 번까지는 보지 않겠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놓고는 친구 집에 가서 또 다시 만화를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만화를 보는 게 뭐 대수인가? 만화를 봐도 괜찮다고 해주세요. 믿음으로 구원받지, 어디 행함으로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그렇게 하면서 자기 쪽으로 수정해나간다는 말입니다.
자기는 정직하게 살겠다고 하면서 제 아무리 교회에 다녀보지만, 그러나 이 사회는 정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도 자기는 몇 번 정직하게 살려고 시도는 해보지만, 즉 "주여, 사탄을 이기게 하옵소서" 라고 하다가,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사탄이고 뭐고 다 알아서 하세요" 라는 식으로 나가고 만다는 겁니다. 즉 정직을 포기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 둘째로, 더 골치 아픈 게 '내부의 욕망' !!
그러니 인간은 이렇게 사회, 곧 외부의 변화에 대해서 자신이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둘째로, 사실은 이것이 처음 것보다 더욱 더 골치가 아픈 것이 바로 인간 내부의 욕망인데, 즉 "주여,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겠습니다. 다만 먹는 음식은 짜지 않게 해주세요" 라는 식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입는 것으로 족한 줄은 알겠는데, 다만 입는 것은 그래도 백화점 물건으로 입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조건을 다는 겁니다. 인간은 언제나 이런 방식인데, 그렇게 자꾸만 추가적으로 뭔가를 가져다 붙인다는 말입니다.
◈ 그냥 설교만 할 수 있으면 족합니다 ??
목사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하나님, 저는 설교만 해도 만족합니다" 라고 하다가, 그 다음에는 "교인이 10명만 와도 좋습니다" 라고 하다가, 그 다음에는 "그냥 백 명 정도만 되면 좋겠습니다" 라고,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추가를 하는 겁니다. 만일 교인이 백 명이 나왔다고 하면, 그 다음에는 20% 인상을 해서 120명을 만족의 수준으로 높인다는 말입니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인상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내부적인 욕망과 외부적인 변화를 본인이 감당을 못한다는 겁니다. 계속 수정해나가야 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수정하지 아니하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수정하는 쪽으로 자신을 방치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 라는 것이 '내' 맘대로 살아지는 '내'가 아니고, 외부에서 변화를 주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욕망이 '나'를 못살게 굴게 되어서, 그렇게 거기에 그냥 휘둘리는 것이 인간이란 겁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을 보고 자기 변명으로 계속 일관하는데, 즉 자기 합리화를 끊임없이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 인간은, '차이'로서 '존재 의미'를 !!
그렇게 형식화에서 메타형식으로 이동할 때 여기에서 '차이'를 두는데, 그렇게 차이를 둠으로서 "나는 왜 의로울 수밖에 없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즉 "전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다" 라는 '차이'로서 대답을 함으로서, 그렇게 자기의 '존재 의미'를 끄집어낸다는 말입니다. 차이를 가지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 이제 발전했습니다" 라는 겁니다. 즉 "전에는 술을 못 끊어서 하루에 소주를 세 병씩이나 먹었는데, 이제는 한 병을 줄여서 참이슬을 두 병밖에 먹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즉 한 병을 줄인 그 차이에서 자기 존재의미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 소쉬르 - 언어의 특징은 분절에 있다 !!
언어 기호학자인 '소쉬르' 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언어의 특징은 분절에 있다" 라고 말입니다. 어려운 것을 한다고 미리 말씀드렸는데(ㅋㅋ), 즉 모든 언어가 자연을 제대로 묘사해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딱딱 끊어서 묘사를 한다는 말입니다. 왜 '아' 다르고 '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 하고 '어' 사이에 음성은 어떻게 도저히 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 그나마도 '아'와 '어'를 분절해서, 즉 잘라내고 연결해서, 즉 끊어냄으로서 대충 묘사할 뿐이란 말입니다. 그야말로 대충 말입니다.
우리나라 말에도 분절이 발달해서 여러 가지 용어들이 많은데, 즉 "삼삼하다, 잘빠졌다, 알록달록하다, 새록새록하다" 등등 말입니다. 하지만 언어 자체가 분절이기 때문에, 제 아무리 용어를 잘 사용해서 자연과 가까이 접근하려고 해도, 속시원하게 그 전부를 담아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 E=Δmc²- 하나의 축약된 잉여일 뿐 !!
예를 들어서, 아인슈타인의 "E=Δmc²" 라는 공식이 있는데, 즉 "에너지라는 것은, 이전의 에너지와 현재 에너지의 차이의 광속의 제곱에 의해서 물질과 에너지가 서로 교환된다" 라는 등가성을 공식으로 세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매우 합리적이면서 정확할 것같이 여겨집니까? 천만의 말씀이란 겁니다.
그 에너지의 개념이 뭔가에 대해서 열대여섯가지가 나오고, 또 무게와 질량의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즉 어떤 경우에는 무게이고, 또 어떤 경우에 질량인지, 그 개념이 중력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달라지면서, 그렇게 열대여섯가지가 나오고, 그리고 광속의 의미가 무엇인지, 거기에 대한 개념들도 여러 가지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공식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냥 하나의 축약된 것일 뿐, 속시원하게 모든 것을 다 해소한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즉 '잉여' 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뭔가 여분의 것이 항상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 인간은, '현재' 라는 댐 안에 갇혀있어 !!
그저 혼돈이 된 변화와 혼돈이 된 이 사회에서 우리의 육체가, 즉 그렇게 이스마엘이 원했고 사람들이 원했던, 그렇게 아까운 우리의 육체가 살아남기 위해서, 또한 편리하게 적응하기 위해서, 접근하고 또 접근하기를 시도할 뿐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런 시도도, 과거에 누적된 경험과 정보를 기초로 해서, 겨우 몇 발자국을 더 가는 수준밖에 안 되지만 말입니다.
지금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었다고 하더라도, 내일의 주가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게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전도서에도 나오는데, 즉 우리 인간이 아무리 지혜를 탐구하고 탐구해도 항상 '현재' 라는 댐 안에 갇혀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과학이 아무리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도, 그런 댐을 넘어서서 "내일은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보장하는, 그런 인간의 지혜는 아직까지 나온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렇고 말입니다.
◈ 주가는, 단지 예측만 할뿐 !!
주식의 경우를 조금 더 이야기하면, 아마 오늘 주가가 폭락한다는 것을 미리 정확히 알았다고 하다면, 조금의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어제라도 서둘러서 모두 다 팔았을 겁니다. 그리고 혹시 오늘 어떤 종목이 상한가로 오른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하면, 그 위험한 신용미수를 사용해서라도 왕창 몰빵을 했을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주가는 아무도 모르는데, 다만 예측을 할뿐이란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측을 너도나도 같이 하다보니까, 예측된 그 종목이 그만 폭락을 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수학자들이 추측해서 투자하고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자기는 나름대로 전문가라고 여기고,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어떤 종목이 오를지 자기만 알고 예측하면 돈을 버는데, 그런데 다같이 안다고 하는 것은, 어떤 변수가 도중에 생길지 도저히 예측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예측을 못하면 바보입니까? 천만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어떤 바보라고 해도 자기를 바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는데, 정신병자가 자기를 보고 정신병자라고 하는 사람이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의 존재 의미를 어디에서 찾게 됩니까? 그래도 한 살이라도 더 먹고 하루라도 더 살았으니, 지난 과거와 현재 오늘의 것과의 그 '차이'에서, 자기는 죽지를 않고 계속해서 살아야 된다는 자기의 존재 의미를 계속해서 고수하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 '신' 이란 천막으로 한꺼번에 !!
인간이라고 하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데, 다만 '기독교인' 이라는 인간들은, 이것을 더 큰 범주로, 즉 '신' 이라는 범주로서 그것을 변명한다는 말입니다. 즉 "이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신' 이라는 테두리를 가지고서, 마치 천막처럼 그렇게 한꺼번에 확 뒤집어씌운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의 존재의미를 찾기 위해서, 즉 앞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지금까지 다 살아와 놓고는, 그것을 전체적으로 '신' 이라는 대형천막으로 덮어놓고, "모든 것이 다 신의 뜻입니다. 그러니 죽어서 좋은 곳으로 보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신자라고 하면 "이것이 다 부처님의 은덕입니다" 라고 뒤집어씌우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는데,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을 알되"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식은, 즉 인간이 보는 그 자연의 범주 안에서 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흡족해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 신(神)이란, '+α'(잉여분) !!
이것이 불트만의 '로마서 주해' 라는 책에 나오는데, 즉 로마서 1장 21절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 라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인간은 처음부터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또한 그런 인간 존재의 현실을 깔고 들어간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물론 바르트도 마찬가지이고 말입니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알되" 라고 할 때, "그러면 교회에도 다니지 않고 오직 돈만 밝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잖아?" 라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 개념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아는 범위를 벗어난, 그 바깥에 있는 무한대의 미지로 남겨둔 '+α'(잉여분)를 추가해서 통째로 안겨주는 개념을 '신(神) 개념' 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 너무나 순진한 '마르크스' !!
이것이 자본주의 개념에 그대로 다 들어오도록 되어있는데, 지금부터 그것을 한번 살펴보고자 하는데 말입니다. 지금 아침 시간이라서 잠이 오지만 조금 참으시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는데, 즉 "20미터의 삼베가 한 벌의 저고리와도 같다" 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20미터의 삼베가 어느 만큼의 가치가 있느냐는 것은, 시장에서 어떤 물건과 교환이 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시점에 보니까 한 벌의 저고리와 똑같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저고리가 사용되는 것에 따라서, 그것이 사용가치인데, 그렇게 20미터 짜리 삼베의 가치가 결정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역적으로 변동이 되어서, 즉 20미터의 삼베의 가치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는 저고리 한 벌이 되는데, 그런데 시장에 물건이 그렇게 딱 두 개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20미터의 삼베는 두 개의 호빵과 같다든지, 아니면 자동차 바퀴 하나와 같다는 식으로, 그렇게 계속해서 등가식을 하게 될 때, 만약 졸지에 생고무가 딸려서 자동차 바퀴 값이 올라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20미터의 삼베를 가지고 자동차 바퀴 하나를 살 줄 알았는데, 그만 반값도 안 되는 경우가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되어서 어떻게 혼돈을 합리적인 형식으로 잡을 수 있느냐는 문제가 생기는데, 물론 왜 그렇게 되는지, 그 원인을 마르크스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마르크스는 생각하기를, 가치란 무엇인고 하니,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애쓰고 수고한 것은, 마치 창세기 3장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시간을 투자해서 고픈 배를 움켜쥐고 수고한 것은 값으로 그 안에 그대로 들어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마르크스의 순진함인데 말입니다.
◈ 자기가 투자한 노동가치는 어디서?
예를 들어서, 어떤 치킨집 주인이 새벽부터 생닭재료를 사다가 튀겨내서, 이제 그것을 만원씩 받으면 된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런데 옆에서 새로 닭집을 낸 아줌마가 아가씨처럼 분장을 해서 온갖 아부를 해가면서 춤까지 춰가면서, 그렇게 해서 손님을 다 가져가니까, 먼저 있던 닭집은 아예 팔리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자기 자신이 투자한 노동의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귀신의 조화냐는 말입니다. 누가 자기 가치를 빼앗아 갔느냐는 겁니다. 물론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그것이 다 밝혀졌다는 말입니다.
◈ 오렌지와 참외, 그리고 테니스공과 럭비공 !!
그것을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은데, 여기에 오렌지와 참외가 있다는 겁니다. 또 여기에는 테니스공과 럭비공이 있는데, 어제 강의시간에 이것을 약간 했는데 말입니다. 왜 다윗혈통을 이야기하면서, 레아와 라헬, 그리고 본부인과 시녀의 관계로서 살펴봤는데, 그것과 약간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렌지와 참외는 과일이라는 것으로 묶을 수가 있는데, 그리고 테니스공과 럭비공은 공이라는 점에서 묶을 수가 있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렌지는 테니스공과 서로 닮았으니 또 묶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참외는 럭비공하고 닮았으니 한 묶음으로 묶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보면, "오렌지(a)-참외(b), 테니스공(c)-럭비공(d)" 라는 것으로, 그렇게만 나란하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즉 그렇게 일률적으로 계속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 올라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오렌지(a)-테니스공(c), 참외(b)-럭비공(d)" 라는 식으로도 연결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무원들의 경우에, 하급 공무원들은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 고급 공무원이 되면 어떤 일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법대로 집행을 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겁니다. 특히 법조 공무원인 경우에는, 경북고등학교 동창생이 다른 경제부처의 고급관료로 있다면 그쪽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유리하게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데, 그런데 그 반대쪽의 불리한 쪽에 자신의 외척이 또 있다는 말입니다. 엄마 친척이 말입니다.
◈ 점점 더 꼬이는 사회구조 속에서 !!
이렇게 인간 사회라는 것이, 자기와 전혀 무관한 듯이 보이는 다른 요소들이 자꾸만 엮여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의사를 결정할 때, 'A'보다는 'B'가 낫겠다 싶었는데, 'C'쪽에서 압력이 들어오는데, 보니까 같은 교회 장로님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사회에서 합리적으로 살아야지 비로소 '나' 라는 것을 아는데, 즉 "내가 이런 인간이다" 라고 하는 '나' 라는 주체성이 확립이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합리적으로 살면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가 그만 점점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지고 만다는 겁니다.
◈ 대형마트를 하나 오픈하더라도 !!
예를 들어서, 작은 할인점에서 콜라는 500원을 받고 사고 팔면 되는데, 그런데 그 할인점이 평수가 2000평 정도가 되는 대형마트로 달라졌을 때는, 물건가격을 정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달라지는 겁니다. 즉 지역사회에 세금을 얼마를 낼 것이며, 또한 이웃돕기성금은 얼마를 낼 것이며, 그 땅을 임대해준 지방자치단체에는 어떤 출자를 해야하는지, 그런 것을 모두 다 고려한 상태에서 원가에 대한 계산이 따로 나온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복잡해지는데, 그러니 정직하게 산다는 말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대형마트에 단골이 되어서 계속해서 납품을 하는데, 그런데 그 대형마트 사장이 자기 아파트 앞에 신축공사를 벌이는데, 그만 단골납품업자의 마누라는 아파트 부녀회에서 신축공사 반대데모를 벌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때 그 사람은 아내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단골확보를 위해서 대형마트 사장님 편을 들어야 할지, 그런 갈림길이 생기게 된다는 겁니다. 신문을 자기는 조선일보를 보고 싶은데(?), 아는 친척이 한국일보에 다닌다고 해서 하나 더 받아주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말입니다.
◈ 막스베버 - 정치적 합리, 도덕적 합리, 물리적 합리 !!
그러니 결국 남는 것이 뭐냐 하면, 정치적 권력과 타협, 그리고 조정이란 겁니다. 그것을 막스베버는 '합리' 라고 했는데, 즉 인간의 합리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정치적 합리, 둘째는 도덕적 합리인데, 사람이 행동을 너무 비도덕적으로 하면 안 되니 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물리적 합리인데, 즉 자기 몸이 약해지면서까지 성경공부에 참석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런 합리를 통해서 자기 행동을 조정함으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행동을 잘했다는 식으로, 그렇게 거기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물리적인 합리에 도달한 것 같은 분위기인데(ㅋㅋ), 조금만 더 참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되니까, 상품의 가치를 논하게 되는데, 그런데 자본가들은 생산된 가치를 이자 이상으로 가져가서 거저 먹는 식으로 하고, 또한 노동자들은 노동의 가치를 도둑맞는 것처럼 그냥 뭉치로 빼앗기고, 그렇게 소외를 당한 채로 빈 껍데기로 남아있게 되니, 그렇게 되면 그런 상태에서 어디에 가서 물건을 살 것인지, 그렇게 상품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C-M-C ⇒ C-M-C´⇒ M-C-M´!!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더 발달하게 되면, 처음에는 상품(C)이 화폐(M)를 얻고, 그걸 다시 상품(C)으로 교환하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런 원리가 아니라, 돈으로 상품을 사는데 상품을 사는 이유가 또 다시 돈을 벌기 위해서 상품을 산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C-M-C"에서 "C-M-C´" 라는 것으로, 그리고 "M-C-M´"으로 전환이 된다는 겁니다. 즉 "상품-화폐-상품´"에서 "화폐-상품-화폐´" 라는 것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얼마나 물건이 좋은가?" 라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이것이 돈이 될 것인가?" 라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얼마입니까? 그것을 집에다가 걸어놓는다고 해서 어디 수십 억이 생깁니까? 그런데 그걸 왜 사려고 합니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 하나밖에 없는 자전거, 희귀우표 등등, 이런 것을 왜 수집합니까? 물건 자체가 좋아서 삽니까? 그게 아니라 돈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 상품은, 돈으로 환원될 때 !!
옛날에는 상품이란 것이, 자기의 육체 만족을 위하면 그만이었는데, 그런데 자본주의 시대에는 돈으로 환원될 목적의 상품이 되어서, 그럴 때만 가치가 매겨진다는 말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돈이 신이 되어 버리는데, 그러니 아무리 행복하게 살아도, 남보다 돈이 없으면 그만 가치가 없는 인간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돈=가치=신" 이라는 말인데, 즉 "왜 나의 신이 저 사람의 신에게 꿀리느냐?" 라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공통적인 신의 축복을, 즉 신의 혜택을 누가 더 많이 받아내느냐는 것인데, 많이 받았으면 복을 받은 것이고, 적게 받았으면 그는 저주받은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축복과 저주가 어떻게 결정이 됩니까? 돈의 소유에 의해서 그만 결정이 나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상품자체에 가치가 있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상품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가치가 없는 것이라도 돈이 될 수만 된다면 임시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 알렉산더 - 이 세상은 도박판이다 !!
그래서 '알렉산더(?)' 라는 학자는 "이 세상의 모든 자본주의는 도박이다" 라고 말했는데, 도박이 무엇인고 하니, 삼팔 한 끗을 쥐고도 판쓸이를 하는 것 아닙니까? 저쪽에서 장땡이를 쥐고 있는데, 그런데 이쪽에서 삼팔 한 끗만 쥐고 있어도 이긴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도박인데, 그러니 도박하는 사람이 돈을 버는 이유가, 집에 화투를 많이 쌓아놓고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화투를 잘 활용해서 돈을 번다는 말입니다. 오랜만에 올바른 소리를 하는데(ㅋㅋ), 즉 허름한 화투라도, 그 화투를 가지고 돈으로 교환을 잘해서 돈을 번다는 말입니다.
◈ 혹시, 베트남 유전펀드를 아세요?
요새 온 나라가 펀드로 난리인데, 그런데 이 펀드가 뭡니까? 뭐 "베트남 유전펀드" 라는 것도 있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베트남 유전에 대해서 사람들이 정말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전혀 모르는데, 아마도 베트남 유전자체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을 것이고 말입니다. 다만 무엇에만 관심을 가지는고 하니까, 차후에 그것이 자기에게 더 많은 수익을 얻어주게 되면 그냥 펀드에 가입하는 겁니다.
그것이 베트남이든 말레이시아든 간에, 그런 나라가 있는지 없는지 사실상 관심도 없다는 말입니다. 남들이 있으니 있다고 여길 뿐인데 말입니다. 다만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만 주게 된다면, 그것만 생각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사실 펀드든 주식이든, 유전이 관련된 것은 사기일 가능성이 더욱 더 많은데 말입니다.
◈ 15평 짜리 낡은 아파트가, 5억 ??
그리고 아파트가 무엇입니까? 비가 오면 비를 피하고, 밤에 들어가서 잠자는 곳인데, 그런데 지금은 아파트가 뭡니까? 아파트의 그런 기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서울의 강남 옆에 있는 과천의 낡은 주공 아파트 15평의 시가가 5억이라고 하는데, 아마 그 돈을 가지면 대구 영주에 가면 땅을 천 평은 족히 사지 싶은데 말입니다.
이것은 아직도 "좋은 상품이 좋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라는 낭만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기가 막힐 노릇이라는 겁입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노무현이가 이렇게 말아먹었습니까? 전혀 노무현이 탓할 문제가 아닌데 말입니다.
◈ 노무현이든, 이명박이든 !!
그런데 사람들이 노무현을 왜 원했습니까? 돈으로 환산될 수 있을 것만을 생각한 겁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명박을 뽑는다면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명박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는데, 그가 전과자인지, 또한 교회의 장로인지, 그런 것은 관심도 없고, 다만 중요한 것은 돈으로 환산이 될 수 있는지, 그것만 본다는 겁니다. 즉 자기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게 하면 좋은 대통령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까? 그런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소망하고 원하는 것에 대한 추상체, 즉 그런 추상개념을 신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것이 골로새서 3장에 있는 대로 "탐심이 우상숭배니라" 하는 말씀의 실현이란 말입니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러므로 이것은 "되니, 안 되니" 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육체로서 그 세계 속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습니까? 교회 신이나 세상 신이나 다른 게 뭐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교인들이 교회 신이 여호와라서 믿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돈이라는 신을 위하여 '여호와' 라는 중간매체를 이용하는 것뿐이란 말입니다. "여호와여 빕니다. 돈이란 신이 나에게 찾아오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그것뿐이라는 말입니다.
◈ 그런데, 문제는 '육(肉)' !!
그런데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에는 그러한 원인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한 글자로 '육(肉)', 즉 육신에서 찾는다는 겁니다. 육신은 성령과 반대개념인데, 이 육신은 철저하게 방치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욕망하는 대로, 요구의 변화가 일어나는 대로,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이는데, 하지만 아무리 신을 향하고 찾고 해도, 그 테두리에 무엇이 둘러쳐져 있습니까? 율법에 갇혀 있는 꼴임을 알려준다는 말입니다. 오직 성경말씀만이 말입니다.
◈ 육은, 율법에 갇혀있는 신세 !!
여기서 '육'이 무엇인고 하니, 욕심을 내는 것, 죄를 짓는 것 등등, 그러한 것이 아니라, 육은 율법에 갇혀있는 신세, 바로 그것이 육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좋은 말을 할 때는 좀 적어 놓으세요(ㅋㅋ). 즉 율법에 갇혀 있는 신세를 두고서 육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은 무엇입니까? 영은 육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은 것, 즉 자유하는 아들의 영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종이 되는 것은 육신이고, 영은 거기서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에서 영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데, 전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정죄함이 없는 것이지, 그것이 인간의 노력으로는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 인간은, 자신에게 법을 집어넣어서 !!
이제 5분 정도 남았지 싶은데, 조금만 더 집중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로마서 1장을 보면서 "나는 부처를 안 믿고, 마리아상에게 절하지 않는다" 라는 것으로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육이 뭔지를 모르고 있기에 나오는 소리라는 겁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육이란 스스로 자기에게 우상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복습을 겸해서 다시 정리해보면, 우상을 만들 때 무엇을 집어넣는다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 법을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법을 집어넣어야만 그것이 굳어진다는 말입니다. 왜 두부를 만들 때 간수를 집어넣어서 굳히지 않습니까? 즉 허황된 세상변화에 대해서, 자기가 자기에게 규칙을 정해버리면 "나는 이렇게 가치 있는 인간이다" 라고, 즉 하나의 두부처럼 굳혀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시 새로운 변화를 만나고 새로운 욕망이 다가올 때면 어떻게 합니까? 옛것을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금지의 법으로 다시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이 주님 앞에서는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인데, 그야말로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로지 십자가 피로 구원을 받는데, 그렇게 십자가의 피로 구원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매일같이 십자가의 피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자기의 규칙을 의지하면서, 즉 "나, 잘났어. 나는 오늘도 성경 3장을 읽어서 벌을 받지 않을 거야. 십일조를 해서 저주를 받지 않을 거야" 라고, 그따위 짓을 하는데, 그런 짓을 양산화시키는 교회, 그래서 저는 그런 교회를 우상이라고 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우상의 집단이고 욕망의 집단인데, 그러면서도 교회는 그런 것으로 만족하지를 않고, 새로운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야말로 수상쩍은 신의 이름을 부르는데 말입니다. 그것을 두고 '확대재생산' 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 자본주의 - 거름지고 장에 간다 !!
자본주의 사회도 그런 확대재생산의 사회라고 하는데, 좋은 말로 그렇게 표현을 했지만, 사실은 "이유 없는 재생산" 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왜 장에 갑니까? 거름지고 장에 간다는 겁니다. 말을 하고 보니, "거름지고 장에 간다" 라는 것이 참 멋지게 자본주의를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자본주의가 시장에서 형성이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거름지고 장(시장)간다" 라는 표현이 기가 막히게 딱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장에 갑니까? 그래야 비로소 자기 속에 숨어있는 욕망이 무엇인지, 즉 자기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안다는 겁니다. 우리가 십 년만 제대로 된 깊은 산 속에 있게 되면, 자기가 무엇을 욕망하는 지를 모르게 되는데, 그런데 시장에 가면 어떻게 됩니까?
시장에 가면 돈이 없는 자에게는 금지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람에게 금지된 것이 있을 때 거기서 욕망이 발생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말이 아니라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즉 탐내지 말라고 하면, 탐심이 시동을 건다고 말입니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원피스 한 벌에 150만원 !!
우리가 그냥 집에 있을 때는 허름한 옷을 입고 있어도 되는데, 그런데 막상 백화점의 쇼윈도를 보게 되면, 상품이 그리운 게 아니고, 거기에 "돈 150만원이 없는 사람은 사지 마세요" 라고 하는 금지어를 적어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백화점의 가격표가 금지의 법인데, 즉 상품가격이 150만원이라는 것은, 150만원이 없거든 아예 쳐다보지도 말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금지가 되어있으면, 인간은 어떻게 합니까? 그냥 곱게 돌아서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먹고 말거야. 치토스!" 라고, 그렇게 욕망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는 옷장에 걸려있는 50만원 짜리 멀쩡한 자기 옷을 보고는, 그 불만을 다음과 같이 터트린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청춘이 왜 이 모양인가? 이렇게 내 인생이 망가지는구나. 겨우 50만원 짜리 옷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이것은 나의 본 모습이 아니야. 나에게 너무나 실망스러운 일이야. 뭔가가 억울하고 허술해. 이것으로 멈출 수 있는 내가 아닌데, 언젠가는 입고 말거야. 150만원 짜리!"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신앙의 흉내를 낸다고 해보는데, 즉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