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1자유게시판로마서

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1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8)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1 (첫날 저녁1) 사라진 정죄

2007,01,08 강의 이근호, 녹취 오용익

◈ 오잉, 정죄함이 없어 ??

먼저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그동안 지내왔던 저희들이, 천국에 입성하기 전에 과연 저희들이 천국에 입성할만한 사람들인지, 또한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주님은 어떤 식으로 자기 백성을 선택하고 골라내는지, 그 지혜를 이 시간에 허락해 주셔서, 주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일치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로마서 8장 1절에 보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말이 나오는데, 제가 여기 칠판에다 이것을 적어보겠는데, 즉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 라고, 상당히 짧은 문장인데 말입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여기서 우리는 뒷부분을 상당히 좋아하는데, 즉 "정죄함이 없다" 라는 부분을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제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언했다는 것이 중요한데, 아무튼 하나님이 앞에 어떤 조건을 제시하든지 간에 그것은 상관할 필요가 없이, 아무튼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두 번 다시 정죄함이 없다는 상태를 제시했다는 것,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즐겁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죄함이 없다" 라는 것은, 그 무슨 짓을 해도 정죄함이 없다는 말인데, 즉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기를 "내가 없다면 없는 거야. 누가 옆에서 뭐라고 수군수군거리고 해도, 그런 소리는 일체 듣지 말고, 내가 없다고 하면 없는 거야" 라는, 그런 상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성경전체가 뭐냐 하면, "왜 예수 안에서만 정죄함이 없는가?"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이 '예수 안' 이라는 조건을 빼버리면, 이러한 전체가 정죄함을 유발시키는 조건들로 출렁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 안' 이라는 것만 빼버리면, 소크라테스나 공자나 부처를 믿는다든지, 아니면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나' 홀로 살아간다든지, 아무튼 그런 삶의 상황들과 전혀 관계가 없이, 이 '예수 안'에 있지 아니하면, 이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정죄함' 덩어리라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곳에 있든지 간에, 즉 지하실 바닥이나, 바다 끝이나, 하늘 끝에 있든지 간에, 그런 것에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 안'에 있을 경우에는 어떠합니까? 무조건 이유 없이 정죄함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데, 즉 일단 예수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너는 얼마나 착하며, 또한 너는 얼마나 죄를 지었는가?" 라는 것을, 그러한 것을 일체 묻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서는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고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 ① 왜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는가?
◈ ② 왜 예수 바깥에는 정죄함 뿐인가?

그런데 예수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자기가 얼마나 성실하든지 얼마나 착하든지 상관없이 거기에는 정죄함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이 세상에는 두 가지밖에 없다는 말인데, 즉 "첫째로, 왜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는가?" 라는 것과, 그리고 "둘째로, 왜 예수 바깥에는 정죄함 뿐인가?" 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도 많고, 또한 평생을 신을 부르짖는 바리새인들도 있고, 그리고 일본만 해도 수십만 가지의 종교들로 가득 들어차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 수많은 종교가 나름대로 자신들의 인격과 성의를 다 인정하는데, 또한 우리도 그들의 타고난 성품을 우리가 충분히 존경해주고 말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정죄함을?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예수 바깥에 있는 것이고, 그래서 정죄함을 당해야만 하는지,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해서, 그리고 앞서 말한 '예수 안' 이라고 하는 두 가지 점에 대해서, 이번 수련회 시간에 한번 살펴보자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로마서를 통해서 말입니다.

사실은 이 두 가지가 모두 어려운 문제인데, 그 중에서도 두 번째가 정말로 어렵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어렵다기보다는, 이 두 번째는 정말이지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 바깥에는 정죄함 뿐인가?" 라는 것이 말입니다.

◈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2번 !!

여기서 예수 바깥에 있는 대표적인 예를 그림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은데, 물론 수많은 예가 있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면, '나'는 여기에 있고, 예수님은 저기 계신다고 하면, 여기서 '내'가 저기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이 곧 예수님 바깥에 있는 대표적인 사례중의 하나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대표적인 예수 바깥에 있는 인물들의 전형적인 모습들이란 말입니다. 물론 기독교적 냄새가 나지만, 그러나 그 사람도 역시 2번에 해당되는데, 그것이 뭡니까? 즉 '정죄함' 뿐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당연히 천당에 가지 못하는, 즉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이고, 또한 어렵다는 것입니다.

◈ 예수 안에서, 예수님을 믿어야 !!

그런데 여기에 반해서 "예수 안에 있다" 라는 것은, 여기 아까 그림처럼 이렇게 바깥에서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예수 안에서 예수님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곧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고, 즉 정죄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 바깥에서 예수님을 하나의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서 믿게 되면, 그것은 백 날을 믿어도 예수 바깥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정죄함뿐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신약에서는 이것을 예수로 보았지만, 구약에서는 여호와로 보았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여호와를 믿는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존재를 믿는다", "여호와의 활동을 믿는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심을 믿는다" 라고 하는, 그렇게 전부를 다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믿는데, 그런데 그들이 믿는 종교가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바로 유대교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의 경우에, 자기들이 그렇게, 즉 '내'가 여호와를 믿는 것이 문제였기 때문에, 그 여호와의 그 자리에 예수를 가져다가 놓아봐야, 즉 여호와나 예수나 서로 자리를 바꾸어봤자 역시나 예수 바깥에 있기는 마찬가지란 겁니다. 즉 아무리 여호와를 예수로 바꾼다고 해도, 그것을 예수 안에 있다고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하나의 '대상'을 믿게 되면, '정죄함' !!

그래서 이 두 번째 그림, 즉 자기가 예수님 바깥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 또는 여호와를 믿는 것, 또는 삼위일체를 믿는 것, 이런 것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그것이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물론 성경지식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는 여전히 바깥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믿는 것이 하나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정죄함이 없는 예수 안에 있는 상태는 아니올시다" 라는 겁니다. 즉 정죄함이 없다고 규정한 그 예수 안에 있는 상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그러면 예수 안에서 예수를 믿는 그 현상은 적어도 2번 그림처럼, 그렇게 바깥에서 믿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는, 그런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 안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2번처럼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해서 믿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경우인데, 즉 1번처럼 "나는 예수 안에 있다" 라고 해놓고, 거기에 대해서 누군가가 "어떤 식으로? 어떤 식으로? 어떤 식으로?" 라고, 그렇게 물으니까,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믿는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방금 제가 이야기한 2번에 해당되는 것이지, 결코 1번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 잠시 '브라운 운동'에 대해서 !!

잠시 상식적인 과학 이야기를 하면, 과학에 '브라운 운동' 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러분이 학창시절의 과학시간에 잘 알아들었겠지만, 여기서 잠시 살펴보게 되면, 이렇게 물위에다가 고운 꽃가루를 띄우면, 그 꽃가루가 이렇게 물위에 뜬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물위에 뜬 꽃가루가 자꾸만 움직인다는 겁니다. 즉 수면 위에 떠 있는 꽃가루가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두고 옛날 사람들은 꽃가루가 움직인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까 꽃가루는 가만히 있는데, 이 꽃가루보다 작은 물분자들이 움직임으로 말미암아서, 그래서 가만히 있는 꽃가루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그렇게 판명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브라운 운동' 인데, 즉 액체 속에 있는 다른 분자의 움직임을 다른 대체물을 던짐으로서 확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곧 과학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과학은 눈에 보이는 것만 측정해서 대충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변하고 움직일 때는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그런 변화를 유발했는지, 그런 보이지 않는 원인까지도 규명해냄으로서, 동일한 결과를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을 취득하는 것이 곧 과학이 목적하는 바라는 말입니다.

◈ 하나님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면 안 되는가?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고 하면, 우리 인간이 신을 규명하고 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신은 상식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다같이 신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활동을 통해서, 그 사람을 움직이게 했던 다른 원인을 신의 능력으로 일단 잡는다는 겁니다. 즉 신이 능력을 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야, 저 사람에게서 저런 변화와 기적이 일어났구나" 라고 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과 저 사람의 모든 활동들을 다 종합해서, "아하, 신은 이런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구나" 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혹은 귀납적으로 증명하면, 그것을 연역적이라는 표현도 사용하는데 말입니다. 하여튼 그런 식으로 논리적으로 해서, 신을 정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입장으로 보면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타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나타났기 때문에, 그래서 나타난 것만 얼추 정리를 하게 되면, 그 보이지 않는 숨어있는 신의 진짜 모습을, 물론 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숨어있는 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런 것은 어느 정도라도 감은 잡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바로 과학인데, 이런 과학이 신을 파악하는 것이 종교와도 너무나 흡사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일 정도로, 그야말로 완벽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을 아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 정말이지 그럴 싸하고 문제가 없어 보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분자는 적어서 눈에 안 보인다. 너무 적기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을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 즉 매체물의 움직임이 보이는 꽃가루를 던졌다. 그랬더니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꽃가루가 움직였다. 그것은 바로 꽃가루 밑에 있는 물분자가 움직인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파악해서 !!

그러면 이와 마찬가지로, 그 원리 그대로 하나님의 경우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파악해서,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잘못되었고, 그게 도대체 무엇이 문제냐는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야 옳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또한 그것밖에 달리 하나님의 실체를 찾아낼 방도가 없어 보이는데, 그러면 그것이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했을 때, 과연 어떻게 되느냐는 말입니다.

만약에 과학의 브라운 운동과 같은 것을 탐구하는 것을 금지하는 사람이 있어서, "어이 그러면 안돼. 하지마" 라고 하면서 막는다고 하면, 그게 가능하냐는 겁니다. 막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호기심이니 말입니다. 즉 궁금하다는 겁니다. "저 꽃가루는 왜 움직일까? 번개는 왜 칠까? 온도가 0도씨 이하로 내려가면 왜 물이 얼까?" 라고 하는, 그런 호기심을 누구도 금지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 그런데 로마서는, 'NO!'

그런데 로마서에서 천명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그런 식으로 과학을 보고, 또한 그런 식으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을 하나님이 총체적으로 금지한다고 하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점이 로마서를 푸는데 있어서 가장 난점인데, 즉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하나님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파악하겠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 선하고 대견스러운 일을 금지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런 것을 금지할까요? 한가지 예를 들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 말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그런 과학자가 화학실험을 한다고 했을 때, 그런데 옆에서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는 말입니다.

* A : 어이, 그런 실험을 하지마.
* B : 선생님, 왜 그걸 하지 말라고 합니까?
* A : 그것은 율법이야.
* B : ? ? ?

그렇다면 이 율법하고 브라운 운동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그것은 사람이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은 일종의 생리현상이라는 겁니다. 즉 먹고 나면 방귀가 나오고, 저녁을 먹고 나면 잠이 오는 것은 생리현상이라는 겁니다. 즉 당연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려고 할 때, 다음과 같이 나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A : 어이, 하지 마.
* B : 왜요?
* A : 율법이 금지한 거다.
* B : ? ? ?

그런데 성경에 그렇게 박식한 기존의 유대인들은 어떠한고 하니, 율법이 신에 대한 것을 금지한다는 것을 감히 상상도 못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 쪽에서, 인간들이 신에 대해서 아는 것을 막으리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전혀 몰랐다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라" 라고 하든지, 또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빛이다" 라는 시편 119편부터 해서, 온 성경전체가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식인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이사야 1장에서도 "나귀는 주인을 아는데 왜 너희는 나를 모르는가?" 라고, 그렇게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말씀으로 여겼고 말입니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 사도바울 - 모든 것이 우상이었음 !!

그런 내용이, 그것이 설마 하나님을 아는 것을 금지 쪽으로 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꿈에도 예상치 못한 것인데, 그런데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로마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알고자 했던 것은 모든 것이 우상이었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인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고, 성경말씀을 총 동원해서 만들어 낸, 그렇게 인간들이 만든 신이란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왜 신을 만들었는고 하면, 인간은 자기가 믿고 구원을 받을 대상을, 그렇게 스스로 자기들이 선택했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자기들이 믿고 구원받을 신을 선택하는데, 그런데 그냥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납득이 되는 식으로 조작해가면서, 즉 아름답게 꾸며 가면서, 스스로 조정하고, 개선하고, 고쳐가면서, 그렇게 자기가 믿고자 하는 신을 자기가 만들어 내면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믿고 말입니다. 그것을 로마서 1장에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임의로 만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 중요한 것은 '예수 안' !!

이것을 일단 알았다고 치고 칠판을 지우겠는데, 다시 한번 지우기 전에 물어보겠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는데, 그러면 예수 바깥에서는 뭐가 있습니까? 정죄함,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을 위해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믿는가?", 혹은 "내가 어떤 대상을 믿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예수를 믿는다든지 여호와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자로서, 예수를 믿는가?" 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 라고 하는 것이 말입니다.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이렇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체 자기의 행함에 의한 믿음이 나오지 않게 되어있는데, 즉 "내가 믿어야지, 믿어야지" 라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자기의 행함에 의해서 나온 믿음은 예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그런 것은 모두가 가짜이고 말입니다.

◈ 비트켄슈타인 - 믿는다는 것은 실천의 다른 표현이다 !!

예수 안에서 믿음이 일어날 때는, 이런 것이 어려운데 말입니다. 어떤 학자는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믿는다는 것은 실천의 다른 표현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는데, 어떤 무용수가 춤을 추고 있을 때, 거기서 무용수와 춤을 분리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게 비트켄슈타인의 주장인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용수가 춤을 출 때, 여기서 '춤' 이라고 하는 것은, 무용수가 춤을 추는 그 실천자체를 두고서 춤이라고 하는 것이지, 그것을 "무용수가 춤을 춘다" 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굉장히 어려운데, 즉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고, 그냥 무용수가 춤추는 것이란 말입니다. 비트켄슈타인이란 양반의 주장은, 그렇게 자기 이름만큼이나 어렵다는 겁니다(ㅋㅋ).

◈ 당신은 믿습니까 ??

그냥 들으면 말이 다 똑같은 것 같은데, 이것을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믿는다" 라고 했을 때는, 거기에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그것을 따로 뽑아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믿는다" 라고 할 때는, "당신은 그 믿음을 믿습니까?" 라고 물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무엇을 믿습니까?" 라고 하든지, 혹은 "어떤 것을 믿습니까?" 라고, 그렇게 물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믿습니까?" 라고 물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즉 "당신이 어디 안에서 실천하고 있는가?" 라는 것을 묻는 물음이 되어야지, 그냥 "당신은 믿습니까?" 라고 묻게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굉장히 바쁘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이것은 잠자는 것이고, 이것은 믿는 것이고, 또한 이것은 먹는 것이고" 라는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자기의 행위들 중에서 따로 믿는 것을 뽑아내느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그만 굉장히 분주해져 버린다는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고방식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라든지, 메시야라든지, 그렇게 자기가 믿어야 할 대상으로서, 이미 자기가 어떤 신을 골라잡아서 선택하고 나서, 그 뒤에 믿는 내용을 보수하고 끼워 넣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구조는 바뀌지 않고, 내용물만 이방종교의 내용물로 집어넣으면 된다고 여기는 것은, 그것은 인간의 타고난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그 누구라도 모두 타고나는 것인데, 즉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따라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갓난애는 몰라도, 두 살이나 세 살이 되면 다 나온다는 말입니다.

◈ 엄마, 내가 안 깼어요 !!

예를 들어서, 엄나가 동생을 보고 "이 컵을 누가 깼어?" 라고 하면, "내가 안 깼어요" 라고, 여기서 '나' 라는 것이 벌써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형이 깼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의식이 벌써 발생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의식이 생겨나라" 라고 엄마가 추궁한 것이 아니고,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자의식이 발생되고, 그 다음부터는 말릴 수도, 걷잡을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자기가 판단해서 자기가 선택해서 한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무조건 엄마 말을 듣다가도, 조금 더 자라게 되면, 자기가 판단해서 듣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아하, 이것은 유리한 말, 저것은 불리한 말, 또 이것은 들을 말, 저것은 듣지 않아도 되는 말이구나" 라고, 그렇게 다 자기가 판단을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강의도 여러분이 나름대로 그렇게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 아이가 커서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석가나 공자를 믿어도 마찬가지이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자기가 믿어야 할 하나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 대상에다 제 아무리 풍성하게 성경말씀으로 큐티를 하고, 찬송을 하고, 그 무엇으로 치장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TV에 나오는 C.F에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는데, 즉 가수 보아와 비가 나와서 퉁퉁 치니까 옆에서 날개가 튀어나오는 것이 말입니다. 전혀 모른다는 표정인데(ㅋㅋ), 즉 자기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인데, 그런데 퉁퉁 치니까 예상치도 못한 것이 튀어나온다는 말입니다.

◈ 믿음은, 영역의 차원 !!

그것은 바로, "내가 어느 안에 들어있다" 라는 것 때문에, 그렇게 그 어느 안에 들어있는 값을 하기 때문에, 바로 그 안에 있는 이유 때문에, 그 안에서 실천할 수밖에 없는 것이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행함이 되었든지, 찬양이 되었든지, 혹은 밥 먹는 것이 되었던, 그러한 것 전체를 두고 '믿음' 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 하는 것은, "무슨 행동을 할 것인가?" 라는 차원이 아닌, "어디 안에 들어있는가?" 라고 하는 영역의 차원이라는 겁니다. 즉 어디 어디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오직 그리스도를 위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전체를 두고서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 믿지 않고 행한 것은, 곧 '죄' !!

그것을 로마서에 국한해서 말해보면, 믿지 않고 행한 것을 두고 '죄' 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 말이 참으로 재미가 있지요? 칠판에 한번 적어보겠는데, 즉 "믿지 않고 행한 것은 죄이다" 라고 말입니다. 즉 "그런 행함 속에 믿음이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않느냐?" 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 즉 "노는 동네가 다르다" 라는 것인데, 믿는 동네가 따로 있고, 행함의 동네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 두개를 섞어버리면 안 된다는 말인데, 즉 노는 동네가 위층이 있고, 또한 아래층이 있는데, 그러니 이 두 개의 층을 서로 섞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얼마든지 행해도 되는데, 다만 믿음으로 행하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행하지 마세요" 라는 것은 믿음이 아닌데, 우리 십자가 마을이 오해를 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까, 물론 이제는 뉴 십자가 마을이지만 말입니다(ㅋㅋ).

아무튼 이 십자가 마을에서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렇다면 안 해도 됩니까?" 라는 식의 질문이 자꾸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는 주저하지 말고 "맘껏 행하세요. 다만 믿음으로 행하면 됩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행동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 '율법' 이라는 철조망이 있어서 !!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만, 인간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자기가 어떤 대상을 선택할 때는, 그만 그 전체 테두리에 '율법' 이라는 철조망이 있어서, 그것을 그만 금지시켜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율법이 어떻게 하는고 하면, "제대로 못할 것이면 하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제대로 못할 것을 왜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일조의 경우에도, "니가 십일조를 아나? 니가 십일조의 맛을 알아? 의와 신과 인을 버려놓고도, 니가 십일조를 한다고?" 라고 하고, 또한 사랑을 이야기해도, "뭐라고? 니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예수인 나만큼 사랑을 했어? 그것도 못해놓고 무슨 율법을 거론한다는 말인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한 마디로 말해서, "하지 말라"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못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해봐야 죄만 가득 나오는데, 왜 하느냐는 겁니다. 즉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뭔가 경계를 하고 금지를 하는데, 즉 해도 소용이 없다고 큰 테두리를 친다는 말입니다.

◈ 그런데 '예수 안'에서는, 금지의 테두리가 없어 !!

그런데 예수 안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런 금지의 테두리가 없는데, 그러니 맘껏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 안에서 나오는 실천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금지할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런데도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 스스로 자제하면서 금지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수상하다는 겁니다. 정말이지 굉장히 수상한데,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율법을 제조하고 있다는 뜻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믿는 층이 아니고, 아래층인 믿지 않는 층인데, 즉 스스로 금지를 당하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란 말입니다.

◈ 십일조가 하나의 대상이 되어버리면 !!

너무 밀도 있게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ㅋㅋ), 이제 슬슬 더워지려고 하는데, 십일조의 경우를 다시 보겠는데, 좀 어려워져도 계속 해보자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십일조라는 법을 행하려고 드는데, 그러면 일단 십일조라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는 겁니다. 즉 십일조가 인간이 바라보는 하나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십일조가 하나의 대상이 되어버리면, 자기가 십일조를 지키는데 있어서 여기에는 그만 금지할 법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의지를 행사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것이라 해도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을 싫어하니 말이다.

◈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행하겠다고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간섭하는 것을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금지하신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금지할 법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금지하신 선악과를 날름 따먹었으니, 더 이상 자기의 자유의지를 방해할 그 무엇이 남아 있겠느냐는 겁니다. 자기가 이제부터 자기가 작은 신인데 어떻게 방해를 한다는 말입니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까지도 그만 먹어 버렸는데, 그러니 방해거리가 더 이상 뭐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더 이상은 금지할 법이 없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은 핑계하기를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소서" 라고 하는 겁니다. 사실은 이미 가져갔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가져가 놓고 더 달라고 하는 것은, 더욱 더 나쁘고 밉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안경집이 있는데, 그런데 그 안경집을 그만 자기 뒤에 몰래 숨겨 놓고서 "선생님, 안경집을 저에게 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줄까 말까, 줄까 말까" 라고 하고 있는데, 그런데 저쪽에서는 헤헤거리면서 뭐라고 합니까? "벌써 내가 가졌지롱" 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자유의지를 주옵소서 ??

그러니 "자유의지를 주옵소서" 라는 말은, 새삼스럽게 자유의지를 달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자유의지를 무한대로 사용할 테니까,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달지 마세요" 라는 뜻인데, 그것이 그야말로 솔직한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제가 몇 년만에 솔직한 이야기를 하는데(ㅋㅋ),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이 없는데, 그런데 인간이 무슨 자유의지를 달라고 합니까? 새삼스럽게 말입니다. 이미 다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해놓고는 신학을 하는 작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니? 없니?" 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다는 겁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말입니다.

본인을 포함해서 자기 조상이 이미 자유의지를 모두 다 가져갔는데,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허용했니? 안 했니?" 라고 하면서 따지냐는 겁니다. 이미 자기들이 지금 잘 사용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것을 새삼스럽게 따지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만약에 자유의지를 허용하지 않으면, 그런 신은 선택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라고 하는, 그런 자유의지까지 발휘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금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율법으로 금지하지 않는 한, 우리 인간은 자기의 자유를 무한대로 사용한다는 겁니다. 무한대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딸아이가 요즘 운전을 막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 운전조교가 바로 저라는 말입니다. 아주 훌륭한 조교인데(ㅋㅋ), 그 아이가 차의 엉덩이를 뒤로 집어넣어서 주차하는 것을 잘 못한다는 겁니다. 앞으로 달리는 것은 어느 정도 되는데, 주차할 때는 집어넣는 것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운전면허를 취소해야 할까요? 한 번, 두 번, 자꾸만 하다가 보면, 결국에는 제대로 딱 집어넣을 수가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 차츰 차츰 나아지는 인간 ??

그렇다고 하면,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는데, 그런데 어려서는 철도 없고 잘 몰라서, 즉 인생경험이 적어서 실수할 때 있다는 겁니다. 즉 남의 사정을 잘 몰라서 자기 욕심만 챙길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한 번 터지고 두 번 터지고, 자꾸 욕을 얻어먹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차츰 차츰 나아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도 사형을 시키지 말고 더 오래 오래 살게 놔두면, 남에게 착한 일을 많이 하게 될지 누가 알겠느냐는 겁니다. 사실은 누가 아는 게 아니고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스물 살 때 사람을 죽인 나쁜 살인자가, 그런데 나이가 90이 되면 칼을 들 힘이 없어서 죽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착해졌습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라는 것을 인간에게 무한대로 주게 되면, 어느 인간이라고 해도, 착해지지 않고 싶어도 궁극적으로 착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 칸토르의 무한수(無限數) !!

그것을 가지고 수학에서는 '무한수(無限數)' 라고 하는데, '칸토르' 라는 학자는 이러한 '무한수' 라는 것마저도 하나의 수로 여겨서, 그래서 그 다음에 '초무한수(超無限數)' 라는 것을 생각해서, 그 모든 것을 자기 앞에 놓여진 또 하나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즉 "내가 대상으로 삼았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리 자기 앞에 있는 것을 몰라도, 즉 로케트를 타고 가지 못해서 저 우주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지금 현재에 있는 것에 의해서,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하면, 즉 지금 현재 물분자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물분자의 움직임을 확인시켜 줄 매개체인 꽃가루를 던져서, 그 물분자가 움직인다는 것을 확인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먼 우주에 있는 것이나, 또한 아무리 적은 박테리아 미생물의 세계를 다루는 과학이라고 해도, 지금 그렇게 이미 시작을 했다는 그 자체로서, 즉 앞으로 시간만 허락이 된다면 언젠가는 그 모든 우주의 비밀은 궁극적으로 풀린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반드시 풀리도록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 과학자들 -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

그러니 과학자들이나 인문학 학자들이, 온 우주의 궁극적 비밀이 풀리는, 그런 경우를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그것을 한 글자로 '신(神)'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엉터리 하나님이지만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를 해보면, 우리가 자유의지가 있고, 그래서 우리가 미처 다하지 못하면 우리 후대가 계속해서 갈 것이고, 그렇게 계속해서 가게 되면, 거기에서 누구를 만난다는 겁니까? 신의 비밀, 즉 신의 지식에 결국은 접촉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 나는 믿을 수 있는 능력자 !!

그러니까 '율법' 이라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안' 이라는 개념은, 지금 이 시대에 적절하다는 겁니까? 적절하지 않다는 겁니까? 적절치 않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로 "믿는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에게 무제한의 자유가 있으면, 그것으로서 지금 신에게 다가가고 있음을 믿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 라는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를 믿는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능력자이다" 라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란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전체가 있는 이상, '금지', '단절', '분리', '거부' 라고 하는, 그런 것은 뭔가 적당한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 바로 오늘날 모든 현대인들의 인식들 속에 들어차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요즘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로마서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 상황이 옛날보다도 더 훨씬 어렵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 아직도, 사도신경 ??

어떤 사람은 과거의 중세신학을 그냥 옹호하는 사람도 있고, 또한 개혁주의 신학을 옹호하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현대 21세기의 폴틸리히가 주장한 신학을 옹호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그것은 철학적으로 신학을 다시 풀이한 것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 자유겠지만, 그러나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생각한다면, 그런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들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해낼 수 있는, 그런 복음의 내용이 더욱 더 크게 확장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사도신경이라든지, 그런 것만 되풀이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아직까지는 제가 '예수 안'이 무엇이고, 또한 '예수 바깥'이 무엇인지 설명한 적도 없는데, 단지 제가 지금 이야기한 것은, 이렇게 '예수 안'과 '예수 바깥'을 나누었던 로마서에 나타난 사도바울의 견해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견해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견해가, 이처럼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펴고, "자, 나는 여기에 있다. 나는 구원되어야겠다. 예수여,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성경을 통해서 달려가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예수 바깥에서 하나의 대상으로서 삼아서 믿는, 그런 인식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제 아무리 로마서를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전혀 제대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그냥 시간만 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 목사님, 로마서를 다 하겠습니까?

제가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말하기를, "이번 수련회에 로마서를 공부하게 되는데, 그 많은 것을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해서, 그래서 제가 "물론 다 합니다" 라고 했는데, 모두 다 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자신하는 이유는 바로 양쪽을 다 설명하면 되니 말입니다. 즉 이 로마서를 1장부터 16장까지 한 줄 한 줄 일일이 다 설명할 필요 없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그런 양쪽 세계의 차이점만 이야기하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어떻게 건너가느냐고 하는, 그렇게 건너는 문제는 전혀 제 소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제가 할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 안에 있는 인식과 예수 바깥에 있는 인식이, 이 로마서를 봐도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만 이야기를 할뿐이란 말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

지금까지 딱딱하고 어렵게 했는데, 이제 로마서 1장부터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로마서 1장 1절부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예수 안에 있다" 라는 것을 규정하고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이라고, 그렇게 시작이 된다는 말입니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다시 말해서, 자기가 예수를 믿고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어디 안에, 즉 어떤 통치 안에서, 즉 누구의 지배를 받는 종속관계에 있다는 겁니다. 즉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자기처럼 이런 종속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이 로마서가 이해될 리가 없고, 결코 풀릴 리가 없다는 것을, 그런 것으로 먼저 운을 던지고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에 사도바울이 여기 이렇게 있다면, 아까 이야기 한대로 인간은 모두 실천하는 인간이니까, 사도바울이 뭔가를 실천할 때, 이것이 자신의 실천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은 자기는 지금 어디 안에 있기 때문에 나와야만 되고, 또한 나올 수밖에 없는 실천을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즉 "무엇의 종이냐?" 라고 할 때, "나는 예수님의 종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종을 부각하는 그런 종은 없는데, 그래서 우리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부터 눈에 보이는 사도바울이 어떤 인간인지를 분석하고, 그것을 심리화시켜서, "아하, 사도바울이 이런 심리로서 로마서를 썼구나" 라는 식으로, 그렇게 로마서에 접근하고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이미 틀려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심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도대체 어떤 일을 했기에, 사도바울이 종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라는, 그것만 파악하면 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 도대체 어떻게 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 아니,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무슨 짓을?

치킨 C.F에 보면 이런 것이 있는데, 즉 "무엇을 가미했기에 이렇게 닭이 맛있게 튀겨진 겨야?" 라고 말입니다(ㅋㅋ). 즉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닭이 그렇게 맛이 있느냐는 겁니다. 물론 실제로는 별로 맛이 없겠지만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도대체 어떤 일을 남겼느냐는 겁니다. 즉 어떤 짓을 했느냐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냥 보내어진 사도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여기 1절에 보니까,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란 분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해서 사도바울에게 이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그렇게 했다면, 그런데 그 주님께서 똑같은 일을 우리에게 동일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이 로마서 전체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동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 이래야 주님의 성도구나. 이래야 믿는 자라고 할 수 있겠구나"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가?

그렇게 된다면, 이제는 "예수님이 누구인가?" 라는 것에 논점이 있게 되는데, 즉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하겠다" 라는 것은 그만 사라지고, "예수님이 누구인가?" 라는 것에 말입니다. 즉 "내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나는 구원되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가?" 라는 것이 관심사가 되고 주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것은 완전히 끊어지고 사라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한다" 라는 것은 '휙'하고 선풍기 바람에 날리듯이 그렇게 날아가 버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은 없는데, 오직 "예수님이 지금도 나에게 무슨 짓을 계속해서 퍼붓고 계시는가?" 라는 것이 초점이 되는 겁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것은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인데, 나중에 거기에 대해서 또 다시 이야기를 하겠지만, 아무튼 처음 초반에는 "예수님이 나에게 무엇을 행할 것인가?" 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행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즉 '예수님의 죽음' 이라는 말입니다. 첫 번째 강의에서 이것이 제일 중요한데, 즉 '예수 안'과 '예수 밖'의 차이점이 어떤 공간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쉬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 안' 이라는 것이 '대전' 이라는 공간이고 하라면,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대전으로 가면 되는데, 차가 없으면 걸어서라도 말입니다. 물론 이렇게 '안'과 '밖'이라고 공간적인 표현하지만, 하지만 실제로 이 예수 '안'과 '밖'은 어떻게 구분되는고 하면, '사건'으로서 구분이 된다는 말입니다. 공간이 아닌 사건으로 말입니다. 이런 점이 어렵다는 겁니다.

◈ '사건'으로, 예수 안과 예수 바깥이 !!

그러니까 어떤 교회에, 즉 어떤 지점에 등록한다고 해서 '안'에 놓여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사건이 터지면 안에 있는 것이고, 예수님 사건이 터지지 않으면 여전히 바깥에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그런 사건이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터진 사건이고 말입니다.

또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건이 일어났는데, 즉 엠마오로 제자들이 가는데 어떤 낯선 사람이 나타나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나중에 식당에 가서 식사하고 보니까,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 변신을(?) 하셨다는 겁니다. 마치 간담V가 변신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어? 예수님이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서, 현미경으로 분석하듯이 분석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즉 자기 쪽에서 믿으려고 애써서 믿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니까, 즉 눈을 열어주는 사건이 임하니까, 그 사건 안에서 너무나 쉽게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겁니다. 너무나 쉽게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렵다는 사람은 굉장히 수상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보면 되는데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번개를 맞는 것이 굉장히 쉬운 사람이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이미 번개를 맞은 입장에서는 굉장히 쉽다는 겁니다. 그리고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이 굉장히 쉬운 사람이 있는데, 즉 이미 로또복권에 당첨된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당첨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로 쉬우냐 하면, 자기는 아무 것도 행한 것도 없이 그냥 당첨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것은, 즉 천국에 가는 것은 아무 것도 행한 것도 없이 거저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무지무지 쉽다는 말입니다.

◈ 그러니 중요한 것은, '사건' !!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건 때문에 쉬운 것이지, 그러한 사건도 없이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면 얼마나 어려운지, 마치 낙타를 바늘구멍으로 집어넣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신다" 라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 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 19: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바로 이 대목에서 제가 강의하는데 상당히 힘이 드는데, 제가 이런 식으로 강의하게 되면,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오는데, 물론 나중에 할 질문이지만 미리 당겨서 해보면, "목사님, 그렇다면 교회를 50년을 다녔어도 그런 사건이 터지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합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왜, 그게 기분이 나쁩니까?" 라고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 인간에게는, 이미 정해진 판단기준이 !!

사실은 이러한 질문과 답변이 굉장히 여러분 주위에서도 가끔은 듣고 하는 소리이기에 별 것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려운 질문과 답변인데, 다음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를 한번 들어보자는 말입니다.

* 아 들 : 아버지, 저는 왜 들창코가 아닙니까?
* 아버지 : 왜, 들창코가 아니라서 기분이 나쁘냐?
* 아 들 : 예, 기분이 나쁩니다.
* 아버지 : 들창코가 되면 친구들이 놀릴텐데.
* 아 들 : 그래도 기분이 나쁩니다.
* 아버지 : ? ? ?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그만 반대로 하고 말하고 말았는데(ㅋㅋ), 아무튼 이렇게 자기가 들창코가 되는 것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은, 이미 그러한 사람은 자기가 들창코라고 봐도 괜찮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지만 말입니다.

* 아 들 : 아버지?
* 아버지 : 왜?
* 아 들 : 왜 저를 들창코로 만들었습니까?
* 아버지 : 들창코가 되는 것이 기분이 나쁘냐?
* 아 들 : 예, 기분이 나쁩니다.
* 아버지 : 미안하다.

그러니 이렇게 이미 자기의 판단기준에는, "들창코는 나쁜 것이고, 들창코가 아닌 것은 좋은 것이다" 라는 것이 이미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이미 자기 자유의지를 마음대로 남용하면서 활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주님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선택기준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를 구원하지 않는 예수를, 나는 결코 믿지 않겠다" 라고 하는, 그런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머리가 나쁜 분들은 제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를 못하지 싶은데(ㅋㅋ), 즉 이미 안경집을 자기가 딱 이렇게 끼고 있으면서, 그래놓고는 더 좋은 안경집을 내놓으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즉 "더 좋은 안경집을 내놓으세요" 라고 요구해놓고는, 그래서 "그래, 여기 있다. 가져가라" 라고 하면, 그때는 "아, 싫어요. 싫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이미 자기가 만든 예수가 있기에 !!

그러니 이미 자기가 쥐고 있으면서, 그렇게 자기가 메시야를 만들어 내고있고, 자기의 구세주가 이미 확정되어 있는데, 거기에가 사도바울이 믿는 그런 예수를 전하게 되면, 그게 없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나름대로 자기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자기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예수가 들어올 자리가 없어서 믿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즉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이 이미 모두 확정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수이기 때문에, 그래서 거부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깊은(?) 예정론의 문제가 아닌데,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진짜 최종적인 판단은 자기가 내리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최종 판단은 자기가 내리겠다는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신이시여, 좋은 메시야를 보내주세요. 그러나 최종점검은 내 쪽에서 점검합니다" 라고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자기 쪽에서 최종결정을 내리겠다고 하는 이상, 거기에다가 십자가를 전하고 그 무엇을 전해도, 이미 자기가 꽉 차있는데 거기에는 그 무엇도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놓고는 핑계대기를, "그것은 진짜 복음이 아니고 어쩌고" 라고 하면서, 그런 식으로 자꾸만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다는 말입니다.

◈ 죽어라, 이 놈아 !!

그래서 정답은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였듯이 우리 인간도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종내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복음을 다 측정하고, '내'가 알아서 '내' 취향에 맞는 복음을 '내'가 알아서 채용하겠다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죽이신다는 겁니다. 날마다 말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로마서 1장 3절이 있는데, 즉 예수님께서도 죽고 난 뒤에 성령으로 부활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입힘이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선택하라고 쟁반에 담겨져서 오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우리보고 선택하라는 식의, 그런 미스코리아 후보자와 같은 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날 뽑아달라", 혹은 "날 믿어달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방법을 사용한 적이 없는데, 즉 우리 인간이 "가만히 있어보자. 저 예수가 좋구나" 라는 방식을 사용하도록 하셔서, 그렇게 해서 사람을 구원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 십자가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

교인들이, 신학자들이, 목사들이 이 십자가를 모르는데, 놀랍도록 십자가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를 전하면, 십자가를 선택대상으로 알고 골라잡으려고 하는데, 즉 십자가를 하나의 선택의 대상으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평소에 자기들이 해온 것처럼 말입니다. 즉 "아이쿠 좋다. 믿자"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십자가는 다 가짜라는 겁니다.

안셀무스와 같은 경우에는 "십자가는 대속이기에 믿어야 한다. 그러니 믿자"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이 안셀무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십자가가 무엇인고 하면, 이 십자가는 우리 죄를 대신한 십자가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어야 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 아하, 나는 죽어도 마땅한 놈이야 !!

진짜 십자가는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선택해서 십자가를 믿겠다" 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나' 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 앞에서 이미 살해를 당해도 마땅하다는 것을 수용하는 겁니다. 즉 그따위 사고방식을 가지고서 구원을 받겠다고 나서는, 그런 '나'는 진짜로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가운데 잘 모르는 분도 계시겠지만(ㅋㅋ), 서울에 가면 전철이 있는데, 그 전철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면, 전철이 아무리 빨리 달리고, 구로동을 가고, 안산을 가고, 수원을 가고, 또 그 어디를 가더라도, 전철은 그 꼭대기에 전선에서 매달린 채로 달리는데, 그것을 전혀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 이란 전선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는 지하철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그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우리 등어리(등?) 위에는 고압선이 흐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죽음' 이란 초강력 고압전선이 흘러서, 즉 '지지지지직' 하면서 죽으라고 전기를 마구 흘려 내리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뭐든지 '내'가 선택하는 것이, 그것이 곧 우리의 주특기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즉 뭐든지 자기가 선택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마음껏 우리의 자유의지를 발휘하는데서, 인생이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말입니다.

◈ 육신의 층에서 성령의 층으로 !!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 "이 아들은 육신으로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성령으로서는 육신가운데 부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라고 하는데, 즉 부활이라는 것은, '육신'이란 층에서 '성령'이란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러니까 어떤 인간들만 아들을 믿을 수 있는 겁니까?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성령으로 함께 하지 아니하면, 그렇지 않으면 함께 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가신 그 코스를 그대로 따라가지 아니하면, 주님을 만날 수가 없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는지, 그 코스대로 진척하고 진행시킨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참으로 빨리 가는데,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기에, 그래서 새삼스럽게 "죽어라, 죽어라" 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정죄' 라는 것은, 죄 값이 사망이기 때문에 당연히 죽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또 다시 죽은 자를 보고서 그 죄를 물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유월절인데, 즉 유월절 안에서 이미 어린양의 피가 있었다면, 그 안에 있는 어떤 인간에 대해서도 더 이상 죄를 묻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그냥 넘어가 버린다는 말입니다.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까지도 죽어야 !!

그러니 사람들은 '죽었다' 라는 말을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죽어야 합니까?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까지도 죽어야 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게 된다는, 그것을 수용해야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보고 자기가 한번 믿어보겠다고 하면서 달려드는 것은, 그것은 또 다른 행함의 연장이라는 겁니다. 즉 자기는 펄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큰소리로 외치는 것인데, 즉 "나를 죽이면 안됩니다. 나를 죽이면 나는 죽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물론 "내가 죽으면, 나는 죽습니다" 라는 말은 맞기는 맞는데, 아무튼 "내가 죽으면, 나는 안됩니다" 라는 인식을 가지고는,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가 어떻게 되어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는지, 그것을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왜 예수 안에 없는, 즉 바깥에 사람은 반드시 정죄함을 당할 수밖에 없는지, 그 기초를 닦을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 사울의 혈통과 다윗의 혈통 !!

이제 남은 2분 동안에 할 것은, '다윗의 혈통'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겠는데, 다윗의 혈통이라는 것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먼저 사울의 혈통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울이 1대왕이고 다윗이 2대왕이라는 겁니다. 누가 봐도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식의 계보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데, 즉 사울을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86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9,017 자유게시판 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3 로마서 최고관리자 10-05-11
9,016 자유게시판 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2 로마서 최고관리자 10-05-11
열람 ➜ 자유게시판 다시 듣는 0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로마서1 로마서 최고관리자 10-05-11
9,014 우리교회 [일반] 예수님이 친히 목회하시는 교회 [일반] 최고관리자 10-05-11
9,013 묻고답하기 예수님이 친히 목회하시는 교회 - 최고관리자 10-05-11
9,012 자유게시판 027강-눅6장1-11(안식일의 의미)-luk100509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5-10
9,011 묻고답하기 신을 기만하고 신의 힘을 해체시킨다.. - 최고관리자 10-05-10
9,010 우리교회 주일학교 5월 9일 설교 - 최고관리자 10-05-09
9,009 우리교회 삼하 15: 7-12 (압살롬 쿠테타) 사무엘하 최고관리자 10-05-09
9,008 설교 누가복음 6장 1-11절 제목 : 안식일의 의미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5-09
9,007 묻고답하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성령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나요? - 최고관리자 10-05-08
9,006 자유게시판 20100504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6-하나님 임재의 선물 [신학] 최고관리자 10-05-08
9,005 자유게시판 20100504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6-하나님 임재의 선물 [신학] 최고관리자 10-05-08
9,004 강의 울산 5월 7일 출12장 강제적인 구별(빼돌리기)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10-05-08
9,003 자유게시판 [10 대구강의 5] - [피 23] - 죄악된 시간관과 70이레 [피] 최고관리자 10-05-06
9,002 자유게시판 061강-렘17장24-27(안식일거룩)-jer100505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10-05-06
9,001 우리교회 [일반] 5월 12일 방송 [방송] 최고관리자 10-05-05
9,000 우리교회 렘 17:24-27 (안식일 거룩)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10-05-05
8,999 강의 [헬레니즘 철학] - 최고관리자 10-05-05
8,998 우리교회 [일반] [헬레니즘 철학] -철학과 신학의 허상 시리즈 [철학] 최고관리자 10-05-05
8,997 강의 부산 5월 4일 강의 침멀리 06 구약신학 - 하나님 임재의 선물 p111 [신학] 최고관리자 10-05-04
8,996 묻고답하기 십자가가 만개한 날 (안식일)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5-04
8,995 우리교회 [주보] 십자가가 만개한 날 (안식일)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5-04
8,994 자유게시판 안산강의-요한일서03강-091211(나라교회, 이 근호목사) 요한일서 최고관리자 10-05-04
8,993 자유게시판 서울100402빌3장10절 참된 사람이란(왜 죽어야만 하는가?)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10-05-03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