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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00504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6-하나님 임재의 선물자유게시판[신학]

20100504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6-하나님 임재의 선물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100504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6-하나님 임재의 선물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해봅시다.

언약으로 임재한다고 했는데 그 언약이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화돼요. 언약이 구체화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돌판을 만들었습니다. 돌판이 깨진다는 말은 바로 네가 이러하기 때문에 언약이 깨졌다. 하나님 쪽에서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너는 내 앞에서 깨어져야 될 놈이야.’라는 식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나 깨면 안 돼요. 나 훌륭해요.’ 이런 식이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안 깨지기 때문에 주님 쪽에서 깨지는 거예요. 그것이 사실은 깨어질 것은 너희들이 깨어질 건데 너희를 대신해서 너희들의 실상과 본 모습을 하나님 쪽에서 보여주겠다는 것이 언약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언약이라 하는 것은 저쪽의 언약 대상자를 마지막 운명까지 포용해서 다 포함시켜버리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전 중심으로 하는데 성전이전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셔서 상대방을 포용할 그때 나오는 걸 ‘이름’이라고 이야기해요. 하나님 여기 감추어 계시고,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실체라 하는 것은 언약 대상자를 모든 운명을 포괄하고 포용하고 포함시키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은 결국 인간들이 보기에 인간들을 다루어서 어떤 변화를 유발시키죠.

하나님 이름으로 해서 키 180에다 몸무게 이렇게 나타내는 게 아니고, 그렇게 되면 또 객체가 되잖아요. 대상이 되잖아요. 구원하는 백성을 포용하는 분의 이름이잖아요. 그러면 포용하기 위해서는 이름이 나타날 때는 어떤 모습이냐 하면, 바로 자기가 포용한 백성들의 변화 조짐으로 나타난다 이 말입니다.

제일 쉬운 것은 귀신 나타날 때 귀신은 형체가 없잖아요. 귀신이 누구한테 들어가면 싱긋이 웃기도 하고 미쳐서 게거품 물고 이러잖아요. 귀신이 들어가니까 거품이 일어나고 하잖아요. 신약에 나오잖아요. 간질 일어나고. 그게 뭐냐 하면, 그 인간은 누구한테 포용돼있다? 일곱 귀신한테 완전히 묶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한테 나타날 때는 바로 인간이 귀신 들린 것처럼 인간 전체를 변화를 유발을 통해서 발생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드러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드러난 언약을 언약2라 본다면 언약1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실인이구나, 율법이구나를 알고 있는 건 누가 알고 있겠어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겠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는 언약1을 언약2로 바꾸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언약이 드러나는 그것만 관심 있어요.

여기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아주 되먹지 못한 하나님이든, 율법이든, 천국이든, 어떤 개념, 땅 개념 이 모든 개념을 하나님이 원하는 개념으로 바꾸기 위해서 인간 속에 참여하신 분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 이름이냐 하면, 인간은 신을 부를 때 바로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그래요.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의 더러운 행색을 닮아요. 성경에 보면 그게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인간이 왕을 달라 하면 왕을 줘버려요. 누가 누굴 흉내 내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흉내 내요. 가인이 제사 드렸잖아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아버립니다. ‘제사 드리지 말라’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제사는 이 제사야.’라고 인간이 하는 것이 먼저 있고 그걸 흉내 내서 하나님이 인간을 따라옵니다.

유치원 아이들을 선생이 가르칠 때 아이들 노는데 선생님은 가담 안 하고, ‘이것 빨리 외워.’ 이러는 게 아니고 같이 노는 거예요. 놀면서 선생답게 놀고, 저쪽은 애답게 놀죠. 애답게 파악하는 언약을 스승답게 하나님답게 언약적 관점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위치까지 내려가는데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뭐냐? 모든 인간은 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신은 안 보이니까 이름을 부르죠.

그런데 그 이름을 부를 때 항상 망령되이 부를 수밖에 없죠. 왜? 자기가 기껏 아는 신이니까. 망령되이 부르는데 누가 쫓아옵니까? 주께서 오셔서 네가 부를 때 잘못된 선입관으로 망령되이 불렸다는 것을 깨우쳐서 전환시키는 작업을 하나님의 이름이란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이 말이죠.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로 오셔서 여호와 아닌 그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와 정반대되는 일들을 벌이면서 ‘내가 바로 여호와고, 내가 주다.’ 그때 나온 것이 발생론이다. 장로 세우고, 감독 세우고, 교회 일곱 집사 뽑고 교회라고 인간이 조직 시켜놓고 그게 교회가 아니고. 그것도 교회 아닌 것도 아니고 거기서 발생론적으로 교회가 나오게 하죠. 흩어지게 해서.

인간이 손댔다 하면 다 더러워요. 대전에서 그런 강의했는데. 마이더스의 손처럼 손대면 황금으로 변하는 손처럼 인간이 손대면 다 더럽습니다. 그런데 손대도록 누구 허용하느냐? 주님이 허용해요. 손대놓고 망치게 만들고, 후회하게 만들고. 물론 성도에게만 그렇습니다.

교인이 자꾸 떨어지고 안 나온다. 심방해야 되겠다. 심방하게 하시고 교인 열 명 더 떨어지게 만들고. 철야를 해야 돼. 같이 산기도 해야 돼. 그래야 교회 단결이 되겠어. 해서 산기도 가서 집사 둘이 싸우고 내려오고. 그렇다고 해서 가만있습니까? 뭔가 해야 되는데 뭔가 움직이는데 움직일 때마다 펄럭이면서 거기서 죄를 다 끄집어내고.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선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다 살려내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혼자 일하시지 않고 꼭 엉터리 바보등신 같은 우리를 일시키고. 일하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게 없고 탕자에 불과한 것을 발생론적으로 들추어내면서 모든 영광은 주님께서 홀로 다 가져가시고. 모든 영광과 찬양은 주께서 받으시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무슨 규칙을 만드는 것을 정당화할 필요는 없지만 규칙을 폐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규칙 폐지한다고 옳은 교회 되는 게 아닙니다. 규칙 없는 것도 일종의 규칙이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도록 준 곳이 어디냐? 성경 찾아봅시다. 교재에도 나와 있으니까. 침멀리는 출애굽기 24장을 굉장히 중요시하는데 그것은 제대로 본 거예요. 24장 6절에 보면,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침멀리는 출애굽기 20장 23절, 24절에 나오는 이 대목의 완성이 출애굽기 24장이라고 보는 겁니다. 침멀리 이야기인데 제가 거기에 동의합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이 출애굽기 20장 24절의 말씀이 출애굽기 24장에 ‘언약의 피’로 구체화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인하여 네가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방편, 도구, 그러한 제도, 규칙, 법령 이미 줬지요. 뭐냐 하면 언약의 피와 제단과의 만남이죠. 제단은 출애굽기 20장이고, 언약의 피는 24장이고. 피와 제단의 만남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여튼 제단 쌓고 피 흘리면 무조건 복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으로서 각인되게 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안 부르게 되면 복을 못 받게 되죠. 어떻게 이름을 불러야 돼요? 아무렇게나 이름을 부릅니까? 그게 아니고 이름 부를 때 어떤 구체적인 형식을 갖추어서. 그 형식이 제단 쌓고 그 다음에 언약의 피 뿌리고. 그 중에 하나 있다면 여러 가지 제사법을 백성들에게 낭독하고. 그러면 백성들이 생각하기를 그것만 반복하면 계속 복, 복 오겠지요.

여기서 침멀리 논리에 허점이 있다는 것이 뒤에 나와 있어요. 무슨 허점이냐? 그게 대해서 잘못된 건 아니고 그건 맞는데 침멀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자유성’을 이야기합니다. 이 책에 보면 나옵니다. 사실 여러분이 다 읽고 왔다고 생각하고 계속 강의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유성을 인정하는데 여러분 생각에 자유란 게 뭡니까? 어떤 형식이나 법에 매이는 게 자유겠어요? 아니잖아요. 자유란 뉘앙스가 뭐예요? 어떤 형식이나 어떤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게 자유 아닙니까. 그런데 침멀리는 이야기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인간에게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유성을 발휘한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또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자기 제단에서만 영광을 받는다고 돼있다고. 그러면 결국 제단이 하나님 자유성을 발목을 잡는 게 돼요.

선녀가 하늘을 날 때 공기 저항을 무시하고 그야말로 날개옷만 있으면 자유롭게 하늘나라 갈 수 있죠. 그런데 그와 동시에 뭘 의미합니까? 나무꾼이 선녀 옷을 감춰버리면 그 선녀 어떻게 돼요? 자유롭게 못 가잖아요. 그러면 선녀는 날개옷에 얽매이게 되잖아요. 그게 무슨 자유입니까? 선녀도 그 정도인데 하나님 같으면 진짜 자유여야 돼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진짜 모든 인간적인 방법에 구애받지 않아야 되잖아요.

하나님이 남자를 여자로 바꾸고,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을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전능하심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성경적입니까, 아닙니까? 성경에 없죠. 하나님은 언약에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라는 게 언약에 안 나와 있습니다. 못 바꾸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한테 예속되는가? 하나님은 자기한테 예속돼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들이 이미 잘못된 하나님관이 전능하시고 자유로운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그걸 피해가시는 거예요. 너희가 자유로운 하나님 믿나? 믿습니다. 그럼 난 안 자유로운 하나님으로 오시는 거예요.

신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느냐? 받습니다. 그러면 내가 못 받게 할게. 꼭 인간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동조해버리면 죄와 동업을 한 셈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생각한 걸 모두 피해가야 됩니다. 피해가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바를 줘버려요. 제단 쌓는 것, 이건 손만 있으면 돼. 벽돌 하던지 돌 주워서 하면 되잖아요. 그 다음에 양 잡는 것, 칼로 양 잡아서 피 내면 되잖아요. 이게 뭐가 어렵습니까? 참 쉽죠.

오늘날 교인들이 십일조 할 때 어렵습니까? 안 어려워요. 곱하기 0.1해서 내면 되잖아요. 봉투 잘 맞추어서 넣으면 되고, 이름 하나 쓰면 되고. 내는 것? 주고 싶을 때 안 볼 때 내던지 안 그러면 까만 매미채에 넣던지 그게 뭐가 어려워요.

하나님은 인간이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과 언약으로 줘놓고 실제로 그 언약과 말씀은 아무리 해도 이룰 수 없는 말씀으로 나중에 들통 나게 하십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다 해놓고 보니까 결국 뭘 해도 전혀 일치되지 못하는 그런 방식으로 말씀을 준 거예요.

그리고 하는 말이 너희들이 이 말씀을 해석이 잘못됐다. 너는 죄에 태어나서 죄로 해석하기 때문에 행동은 바로 네 죄에서 나온 행동이다. 나무가 잘못됐으니 열매가 옳을 리가 있습니까? 안 되죠. 그래서 제가 늘 하는 것 있잖아요. 인간은 이 성경말씀을 못 지킨다. 어떤 성경말씀도 지킬 수 없어요.

따라서 우리는 뭐든지 해도 된다. 왜냐? 이건 해야 되고 이건 하지 말라고 구분한다는 자체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거고 이건 못 하겠고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구분하는 거예요. 자기가 그렇게 구분하겠다는 말은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이 말씀은 내가 해낼 수 있는데’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 생각이 잘못된 거예요. 아무것도 못하기 때문에 뭐든지 해도 괜찮아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우리를 뭐든지 해도 되는 사람으로, 뭘 해도 죄인이에요.

하나님이 우리 행함 보고 구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라든지 움찔거릴 필요가 없어요. 평소에 안 놀라는 게 문제에요. 안 놀라는 건 그만큼 자기를 장하다고 여기는 모양이에요. 우리는 절대로 장한 게 없습니다.

세상에 내가 출제위원이고 내가 문제 내면 누가 다 맞추어요? 내가 다 맞춰버려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 되시는 문제만 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는 풀지 못해야 됩니다. 우리는 풀고 싶어도 안 풀려야 되고 풀리지 않는 문제라고 아예 다짐을 해야 돼요. 왜? 주님만 풀 수 있는 문제기 때문에.

바로 이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면서 이 격차를 계속해서 이끌어냅니다. 언약궤를 만들어놨는데 인간들은 그걸로 뭘 하느냐?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적들이 물러간다는 소리를 듣고 언약궤를 무기로 삼았어요. 홉니와 비느하스. 그 언약궤 빼앗겼습니다. 빼앗긴 다음에 ‘적들은 좋겠다. 우리는 망했다.’ 하거든요. 언약궤를 탈취한 블레셋이 재앙을 받는, 저주를 받는 일들이 벌어졌을 때 나중에 참다못해서 블레셋이 토해냅니다. 마치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내듯이.

그러면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의 이름이 승리했죠. 왜? 분명히 언약궤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간들은 언약궤를 만들면 자동적으로 하나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언약궤를 우리가 만들었으니까 하나님 이름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 아니고 하나님은 하나님 편이에요. 그 차이를 우리는 평생 유지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편이에요.

하나님 편에 우리가 고맙게도 참여할 수 있고 우리가 거기에 동조할 수 있도록 뽑아 세워서 우리로 졸병 만들고 바보등신을 만드는 거예요. 우리를 탕자로 만들고 죄인으로 만들고. 이게 주님의 함께 계심이 아니면 나타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아주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여기 침멀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성전과 자꾸 관련시켜서 했는데 제가 아까 했죠. 그게 바로 문제였다. 그러면 보수적인 신학자,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카이저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해서 어떻게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가? 거기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카이저는 가시적인 건축물을 성전으로 봤습니다. 사람 손으로 성전을 지었다는 자체를 성전이 존재하는 걸로 본 겁니다. 성전은 누가 지었습니까? 벽돌 쌓는 것 누가 했어요? 사람의 손으로 했죠. 그 성전은 사람으로 지어진 성전이 되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아 맞아 죽은 이유가 있어요. 사람으로 짓지 않은 성전이 있다고 우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거라 하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엔 하나님이 절대로 계시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에는 계신다. 이 말은 뭡니까? 성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있는데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전을 고수하는 사람은, ‘우리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이죠. 왜 그 사람들이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을 고수하느냐 하면, 그 성전에 우리 노동을 가미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성전에 속한 사람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내가 손댔다는 이유 때문에 내 성전, 내 하나님, 내 메시아, 내 예수 되고 싶어 하는 겁니다. 내가 헌금 내어서 예배당 지으면 이 예배당에 주님이 반드시 있어줬으면 좋겠어. 왜? 내가 손댔기 때문에. 만약에 건너편 교회 예배당에 주님 계시면 이 교회 치우고 거기 가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헌금은 하나님께 바칠 수가 없어요. 하늘로 돈뭉치를 던져도 하나님 받을 수가 없어요. 헌금은 군자금이에요. 복음을 위하여 쓰여지는 거예요. 그것을 하나님은 나에 바쳐진 돈이라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지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 주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는 거예요.

그러면 카이저가 뭐라고 했는가 봅시다. [카이저는 ‘다윗의 가문’, ‘다윗언약의 혈통’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간주하고 그 약속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지상의 ‘예배하는 집’으로서 성전을 허락했다고 보고 있다.] 여러분 이 말이 맞습니까? 저는 총신 때 이렇게 배웠고 읽었어요. 다윗의 혈통, 가문은 성전이고 그들이 예배하는 집으로서 하나님께서 성전이라는 건축구조물을 허락했다는 카이저의 이 말이 맞느냐 이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성전이 두 개가 필요하죠. 성전에서 종사하는 육적인 사람 필요하고, 그 다음에 그들이 종사해야 될 터전, 직장이 필요하고. 그 둘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성전이 아닌 게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서 사람으로 지어진 것을 빼도 성전으로서 온전하다고 만약에 주님께서 주장한다면 아마 사람들이 그 주님을 돌로 쳐 죽일 거예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성전 짓지 말라하지 다윗이 성전 지을 때 왜 허락했습니까? 같은 질문입니다. 백성들이 왕을 달라 할 때 왕을 안 주면 될 텐데 너희들이 왕을 구함은 나의 왕 됨을 버림이라 말씀은 해놓고 왜 왕을 허락하느냐 이 말이죠. 앞뒤가 안 맞잖아요. 하나님 하시는 일이 융통성이 없고 일관성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 인간 같으면, 마찬가지 이야기입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안 되면 선악과 없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왜 선악과 심어놓고 따먹지 말라고 약을 올리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구조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구조가 없으면 인간이 없어요. 인간은 인간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구조가 하나님의 형상을 위하여 인간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을 위하여 육질덩어리, 살점덩어리가 있는 거예요. 언제부터인가 살점덩어리가 스스로 독립해서 나라는 이름으로 튀어나갔어요.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이 구조가 날아가 버렸어요. 살점덩어리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 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이 말은 인간이 이런 구조 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지, 만약에 이 구조가 날아가 버리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지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예수님만 하나님 형상이에요. 우리는 그 형상을 본받을 뿐이죠.

형상이란 말은 다른 말로 얼굴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주님이에요. 주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고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대로 우리를 만드신 거예요. 풀이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만든 겁니다. 인간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면 안 돼요. 구조적으로 이미 시스템으로 짜여져 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선악과 따먹으면 저주가 땅에서 피어오릅니다. 저주가 피어오르면서 부부사이가 균열되고 이마에 땀이 나면서 결국은 우리에게 죽음이 주어집니다. 죽음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 형상이 없어진 것이냐? 아니에요. 죽음이 주어졌다는 말 자체가 이미 우리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걸 증명하는 겁니다.

여러분, 건물 안에 스프링클러 들어있죠. 그게 스프링클러인지 언제 압니까? 불질러봐야 됩니까? 아니죠. 스프링클러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건물이 지어진 것처럼 불나면 물 쏟아지게 돼있어요. 물이 없잖아요. 물이 없는데 언제 물 나옵니까? 불날 때 물 나오죠. 그러면 불 안 날 때도 물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불내면 안 된다고 조심해야 되잖아요.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못 살아요. 만약에 자기 마음대로 살면 저주와 죽음이 와요. 심판이 와요. 그런데 그렇게 오는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됩니다. 이제 나는 날 위한 존재가 아니고 구조적으로 말씀 안 들으면 저주받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자체가 비로소 우리가 눈 뜨인 거예요. 비로소 내가 누구인줄 아는 거예요.

그 스프링클러처럼 장착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앞에 설 때에 나는 지금 내가 피 흘리고 내가 저주받아야 될 당사자가 저분이 아니고 바로 나구나. 자기 본 모습을 제대로 안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런데 밖에 나가면 이 구조를 십자가를 벗겨버립니다. 벗겨버리면 남는 것은 내 몸이 남죠. 내 몸이 곧 나의 형상, 내 얼굴이 되니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거예요.

주일날 설교에 예를 든 이휘소 박사라고. 힘의 강력, 양력, 중력, 전자기력 네 개 있습니다. 원래 전기, 자기 구분돼있었는데 이걸 합친 사람이 패러데이 실험에 의해서 맥스웰이 수식으로 합쳤어요. 양력과 전자기력을 합쳐야 돼요. 지금 네 개 다 합친 이론이 나오긴 나옵니다만 사람들이 다 옹호하진 않아요. 실험은 그렇게 합쳤지만 그걸 수식으로 만든 사람이 이휘소 박사에요. 노벨물리학상 따 놓은 당상이에요.

이걸 표준이론이라 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네 가지 힘에다 중력까지 합쳐서 통일장이론을 만들어버리면 우리가 중력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중력을 만들어내면 낙하산이 필요 없어요. 중력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내면 반 중력, 밀어내는 힘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이에요.

그렇게 돼버리면 그 다음에 빛, 모든 것도 만들어낼 수 있어요. 그러면 늙지 않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시간이라 하는 것은 빛에 의해서 늦게 가고 빨리 가고 하기 때문에 보통 24시간 가야 될 것을 1분으로 줄여버리면 우리는 한 십년 살면 세 시간 되는 정도 우리 자체가 안 늙어가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 몸은 원자로 돼있어요. 원자는 전자로 돼있습니다. 우리 몸이 전자로 돼있기 때문에 전자가 이 네 가지 힘의 말을 들어요. 힘만 조종해버리면 위장과 심장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 내 있는 원자, 전자도 우리 말 안 들어요. 그 힘의 말 듣기 때문에 결국 우리 몸은 우리 몸이 아닙니다. 분해해보면 전자로 구성돼있어요. 지금 과학자들이 그걸 추구하는 겁니다.

인간이고, 믿음이고, 사랑이고 그런 것 다 없애버리면 진리는 뭐냐 하면, 어떻게 네 가지 힘을 합치느냐? 그 네 가지 힘을 합치는 이론 중 하나가 뭐냐? 끈 이론, 초끈 이론이라 하죠. 끈 이론을 합친 것을 M 이론. 거기에 매진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 성경 안 봅니다.

그런데 그 이휘소 박사가 죽더라 이 말이죠. 로마서 6장에 말씀처럼 우린 죄의 종이기 때문에 반드시 죄 값은 사망이에요. 그럼 죄가 뭐냐를 알아야 되는데 죄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죄라는 것은 몰라야 될 것을 알아버린 것. 이게 뭐냐 하면, 우리 인간을 둘러싼 구조, 창세기 3장에서 이 구조가 생명나무와 선악과죠. 이건 몰라야 돼요.

몰라야 되는데 알았으니까 선악과는 이미 훼손됐지만 생명나무는 따로 나가잖아요. 생명나무 하나 온전하면 우리가 아무리 죄 지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온전한 생명나무에서 주어진 우리는 그 생명나무 때문에 의인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분리되는 거죠.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무슨 나무가 없어져요? 선악과 없습니다. 생명나무에서 천국 충분하게 만들어냅니다. 이 죽음이라 하는 건 몰라야 될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는 이미 죄 아래 태어난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힘을 합쳐도 죽음이라는 걸 연기할 순 있지만 의학이 발달해서. 그것 왜 자꾸 연기를 해요. 먼저 매 맞는 게 낫지. 뭐하려고 자꾸 연기합니까? 연기해봤자 안 돼요.

그러니까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면, 늘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면 최고입니다. 매일같이 죽음을 가까이 두면 돼요. 죽음을 가까이 하게 되면 자기 존재의 무게가 없어지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없어집니다. 죽음이 항상 나와 내 그림자처럼 따라붙어서 ‘힘들지? 그만 오너라.’ 이렇게 하면 참 편하죠. 죽음이 우리의 유일한 동행자가 돼야 돼요. 아내의 동행자가 남편이 아닙니다. 죽음이어야 돼요.

나중에 자식들 시집보내고 누구하고 사노? 누구하고 살 것 없어요. 죽음하고 살면 돼요. 죽음을 친구로 여기고 살게 되면 욕심이 없어집니다. 무소유도 그런 무소유가 없어요. 죽겠다는데 소유가 의미가 없죠. 성령께서 늘 우리를 죽음에 넘기고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생명나무의 온전함만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고 하시죠.

하나님의 성전의 의미는 뭐냐 하면, 동행입니다. 어떻게 동행하느냐? ‘네 성질대로 해봐라.’ 해서 나온 게 성전이거든요. 그러니까 성전을 만들어주면서 인간이 만든 저지름에 동참하시고 동행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그냥 지시지 않고 먼저 물세례 받았어요. 물세례 받는다는 것은 회개할 사람만 받아야 돼요. 회개할 게 없는데 왜 세례 받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이 만들어낸 그 판에 주께서 거기에 참여하셔서 죄인이 되셔서 죄인 입장에서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주님께서 불러내시면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을 끄집어낼 정도의 위력이죠. 죄 안 진 사람만 오라 해서 십자가 믿으란 게 아니고 현재 죄 있는 사람. 회개해서 착한 사람 되어서 예수 믿는 게 아니고 회개란 뭐냐? ‘나는 죄인이구나.’ 깨닫는 그 자체가 바로 자기 주변을 알고, 자기 본색을 아는 그게 회개고. 회개 있으면 십자가 피가 건져내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언약이라 하는 것은 왜 살이고 피냐? 이 살과 피라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목숨을 이미 죽은 목숨으로 바꾸었다는 그것이 인간이 육체가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되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돌아가고 있으니까 거기에 참여하신 겁니다.

인간이 육밖에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육의 모습으로 하나님 이름의 동행하심을 드러내시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어떤 사람은 그러겠지요. ‘십자가에 죽었다며?’ 그래. ‘사흘 만에 부활했다며?’ 그래. ‘그렇다면 처음부터 죽이지 말지.’ 처음부터 왜 죽이느냐 말이죠.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 이름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동행하시는 우리 속에 참여하신 분이 주님이에요. 죄에 참여하지 않으면 주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야 선악과 의미와 생명나무 의미가 다 드러나죠.

그래서 구조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동행을 하기 위해서 성전을 만드시는데 성전이 갈수록 점점 더 깨어지죠. 특히 에스겔 같은 경우에 성전이 깨지잖아요. 그런데 성전이 깨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성전 중심으로 일하셨다 이 말이죠. 누구든지 죄 지면 어디 가서 기도하면 낫는다? 성전에 오면 죄 사해줄게. 하나님이 지었던 성전이 있습니다.

요나가 어디 보고 기도했습니까? 성전은 하늘에 계시니 하늘보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요나조차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어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왜 성전에 의미가 있느냐 하면, 아직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이 땅을 떠나지 않았거든요. 하나님께서 땅을 포기하면 그때 그 땅에서 만들어진 성전도 함께 의미 없이 날아가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에서 쫓겨날 때 성전은 위로 이동했거든요. 그 위에 뭐가 있느냐? 에스겔 1장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다시 성전이 되어서 내려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은 성전에서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이 절차, 이 절차를 그대로 경로를 밟은 것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에 참여했다가 그 다음에 부활하셨다가 다시 재림하잖아요. 재림의 의미가 바로 하나님의 보좌가 다시 이 땅에 내려온다는 의미에요.

지난 시간에 부산 강의할 때 재림 이야기했죠. 에스겔 30장 이야기했잖아요. 기억 안 나십니까? 다윗 왕이 다시 온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재림이라 할 때는 예수님 재림뿐만 아니고 언약적 근거가 구약에 있단 말이죠. 그게 하나님의 보좌 중심이에요. 성전이 위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는 겁니다.

그러면 성전이 없어지면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 가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에서 쫓겨나면 이스라엘 백성의 씨들이 있겠죠. 언약엔 두 가지 있습니다. 언약은 씨와 땅. 이걸 번창하는 걸 복이라 합니다. 땅이 없어져도 씨만 있으면 회복되게 돼있어요. 땅과 더불어 이 땅에서 씨도 말라 버렸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시아 때 신앙이 부흥되면서 그때부터 해서 히스기야 이후에 이 사람들이 먼저 빠져요. 먼저 빠진 사람 중에 다니엘도 있고 에스겔도 있고. 예레미야는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결국 에스겔은 양쪽 다 있었고. 다니엘은 아예 여기 온 사람이고.

씨에서 해놓고 중심은 씨가 중심이 아니고 뭐가 중심이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성전 중심입니다. 성전이 깨지면서 위로 올라갔죠. 위로 올라가면서 씨와 만나는 것이 다니엘이 말하는 성전개념입니다. 그 성전 내려올 때 나오는 것이 70이레라는 거예요. 제 논문의 흐름이 그렇게 돼있습니다. 논문 제일 마지막에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성전은 반드시 깨어져야 돼요. 깨어져야 될 성전을 주께서 만들라고 한 겁니다. 성전이 깨어져야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가 하나님의 씨와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냥 못 만나고 70이레를 아는 사람을 통해서 만납니다. 누가 압니까? 70이레를 아는 사람은 다니엘 시대에 한 사람밖에 없죠. 하나님께서 다니엘 보고 ‘인자야’ 인자를 통해서 비로소 성전이 위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요한복음 2장에서 주님께서 죽었다고 부활하고 난 뒤에 제자들이 뭘 알았습니까? 성전이 3일 만에 짓는다. 3일의 의미가, 성전이 없어져야 될 그것이 십자가고, 없어지고 주께서 진짜 성전을 다시 보여주는 그 기간이 3일이에요. 그 3일이 70이레에서 한 이레에 속합니다. 그래서 3일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한 때, 두 때, 반 때 7이레를 삼으로 구분하고 있어요. 그 구분을 역사적인 그림자로 보여주는 게 바로 유대의 망함이죠. 유대나라의 망함이 한 때, 두 때, 반 때로 완전히 헬라와 로마제국한테 왕창 망해버립니다.

바벨론, 파사, 헬라, 마케도니아, 그 다음에 나오는 로마의 바다에서 올라오는 네 가지 짐승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전부다 삼키는 기능이 발달한 거예요. 독수리, 곰, 표범, 사자. 이게 뭐예요? 전부다 공격적이죠. 순하지 않지요. 이거는 무조건 잡아당기고 찢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존의 성전을 추구하는 자들을 다니엘 7이레 동안에 이스라엘 역사가 다 포함돼있어요. 이스라엘 성전이 왜 무너졌느냐?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성전 다시 지으라고 합니다.

3학년 2반에서 생물시간에 실험했잖아요. 그 다음 시간은 3학년 3반이 하겠지요. 보통 고등학교 때 그랬잖아요. 3학년 2반에서 생물시간에 거기서 성전 깨졌잖아요. 그 다음에 3학년 3반에서 성전 만들고 성전 깨지고 그 다음에 어디 가요? 3학년 4반 가야 되겠죠.

7이레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포로 잡혀가되 성전 지으라 하는 거예요. 성전을 짓는 때가 7이레에요. 그 성전 다 깨지는 게 뭡니까? 62이레입니다. 그럼 성전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1이레 때 성전이 없습니다. 없는데 있습니다. 누구만 있으면? 하나님의 인자만 있으면 성전 짓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성전을 부술 수밖에 없는 역사였다는 걸 70이레가 보여주죠. 그 70이레 내용 전체를 예수님의 특히 3년 생애에서 다 보여줍니다. 바로 너 때문에 내가 세례 요한한테 죄 속에 들어가야 되고, 유대인 죄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되고, 그런데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함으로써 인자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올 수 있다.

계속 축약, 축약해가면서 긴 역사가 70이레. 그래서 70이레를 분해해보면 1이레는 예수 그리스도에 속하고, 1이레 속에서 7이레 다시 해석해야 되고, 62이레를 다시 해석해야 된다는 것이 이 논문의 흐름이에요. 성전 중심이에요. 모든 게. 만약에 그렇게 해석을 안 해버리면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을 또 고수하면서 하나님 여기 계시다고. 왜? 우리 보고 성전 지으라고 했다고.

BC 414년 말라기 계시 끝납니다. 그 다음에 BC 4년인가 세례 요한이 오지요. 그 사이에 계시가 없지요. 왜 계시가 없느냐 하면, 그 사이에 무엇이 숙성해야 되느냐 하면, 바다에서 오는 짐승이 하나님의 예언대로 충분하게 기왓장을 깨듯이 이스라엘을 산산조각내야 됩니다. 모든 걸 다 짓밟아야 됩니다. 유대인들 박살나야 되고 그 가운데서 유대인 자체도 짐승으로 충분하게 익어야 돼요.

그러니까 메시아가 오기 전에 충분하게 악마가 점령해야 되는 이 방식이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하나의 밑바탕, 밑그림으로 다 들어있습니다. 그게 충분하게 세상이 짐승의 나라가 돼줘야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주가 되신다는 걸 충분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전체가 구약 전체를 축약한 거예요. 구약한 전체를 축약한 것이 70이레고, 70이레를 축약한 것이 예수님 공생애고, 그 공생애가 프리즘으로 쫘악 처음부터 창세기 1장부터 펼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창세기부터 흘렀는데 도로 어디로 옵니까?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여기에 서있으면 ‘나는 알파요 오메가, 처음이요 나중이요’ 결국은 예수님부터 출발해서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이 구조, 이 구조를 위해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고.

주의 주되심, 하나님 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하고 달라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숨어있어요. 하나님의 자기의 모든 뜻을 앞장세우신 주의 이름을 통해서 다시 돌아와서 완성을 시키는 겁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언약이란 것을 위하여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있다는 것이 정립이 되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인간적인 힘으로 알 수 없던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왜 계신지 왜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일을 주시는지 우리를 왜 사용하시는지 이제 그것만 우리의 관심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00504b 부산강의.hwp (53.5K), Dow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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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8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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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