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04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6-하나님 임재의 선물
20100504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6-하나님 임재의 선물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100504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6-하나님 임재의 선물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땅 이야기했죠. 우리가 생각하는 땅하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땅하고 개념이 좀 다르죠. 보통 땅이라면 사람이 사는 땅, 땅 자체가 가만히 있고 고정돼있고 우리 인간만 왔다갔다하는데 성경에서는 그런 땅이 아니고 약속의 땅은 인간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새 인간을 만들어내는 땅입니다. 어떻게? 약속된 인간으로.
사람이 어느 동네에 살면 내가 선택해서 이사 왔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한 오년 지나면 그 동네분위기에 내가 어느새 변해져있죠. 성경은 땅이 우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우리는 그 땅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지배할 수가 없고 약속의 땅 자체가 누구 소속이냐 하면, 하나님 소속이거든요. 하나님 소속이기 때문에 사람을 여기서 길을 들여요. 사람을 다루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땅이 축복과 저주를 하나님이 조절해서 저주스러울 때는 이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고, 축복될 때는 감사케 해서 조절이 되죠.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방식이 율법의 전제가 되는데 그것이 절기라는 겁니다. 절기라 하는 것은 인간하고 상관없고 하나님하고 땅하고 상관있어서 절기되면 곡식을 내죠.
그러면 이 땅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를 보여주는 하나의 흔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이방민족이 들어가게 되면 그냥 땅이에요. 약속된 사람에 의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땅이라면 이 땅에서 나오는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살아계신 증거, 흔적으로서 하게 되면 인간은 땅이 요구하는 절기, 쉽게 말하면 율법이 되겠지요. 율법과 그 율법에 반응을 보이는 율법적 사람이 되어서, 율법적 사람을 거룩한 백성이라 하거든요. 다른 말로 언약이라 할 수 있는데, 율법적 사람이 되어서 거룩만 생산해내면 되는 거예요.
물어봅시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있습니까?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있거든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교회 올 때는 자기가 얻어 챙기려고 오잖아요. 복음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할 생각을 안 가지고 오는 거예요.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 땅의 개념이 어떻게 확실히 되느냐 하면, 성령이 계시는 성령의 처소로 보는 겁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이걸 교회라 하죠. 교회라 하는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 반 감추다가 죽었죠. 베드로가 이건 나를 속임이 아니라 성령을 속임이라고 했죠. 성령을 속인다는 말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교회에 왜 왔겠어요? 살려고 왔지 죽으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살려고 왔다가 죽고 나갔다 말이죠. 그것은 내가 살고자하는 그 목적 자체가 성령께서 교회 세운 목적과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성령께서 요구하는 것은 현재 주님이 부활하셔서 여기에 살아있다. 그리고 살아있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천국 백성을 만들어내느냐? 십자가의 복음의 위력이 어떤 것이냐? 그것을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일하시는데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도라는 인간 그리고 같은 집사라는 인간, 같은 교인이란 인간, 너나 똑같은 인간들만 눈에 보이는 거예요. 인간들만 눈에 보이니까 인간들끼리는 속임이 가능하겠죠. ‘속여 버리면 그만이지’ 가능하겠죠.
그러면 사람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성령의 처소에 들어왔겠습니까, 안 들어왔겠습니까? 못 들어오고 바깥에 있는 거죠. 약속의 땅에 못 들어오고 바깥에 있으면서 교회라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특징이. 사실 그런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오늘 [하나님 임재의 선물]할 때 제가 기초로 지난 시간에 땅 이야기한 것과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철학이나 과학에서 제일 난맥상이 이 세상에서 원인을 이 세상 말고 다른데서 원인이 있다는 것을 차단해버려요. 하나님이 원인이 되어서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 원인과 결과를 연결해갑니다. 이걸 합리적이라고 하고 합리성이 행정, 법, 윤리, 도덕, 문학, 인류문화학, 영어, 수학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원인과 결과를 이 세상에 있는 것과 관련해서 연결 지어야 돼요.
예를 들면, 신학을 한 사람 같으면,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죠. 그러면 사진을 찍어봅시다. 그 사진을 들고 신학자나 철학자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만 보이죠. 사울이라는 사람이 말을 탔다가 뭔가 벼락 맞고 떨어졌다. 이것을 어떻게 해명하느냐 하면 현재 우리가 아는 원인으로 설명하겠지요. 강력한 벼락이 있어서 깜짝 놀라서 떨어질 때 눈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그래서 눈이 갔다고 보는 거예요.
대표적인 그러한 해결들이 동방박사가 별 따라 온 별의 움직임을 기원전 사년쯤에 있었던 별의 물리적인 움직임을 찾아내서 그 별이 그 별이라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전쟁할 때 해가 멈춘 것은 ‘지구가 멈추었느냐, 해가 멈추었느냐?’ 그런 이야기를 전에 했잖아요. 그런 식으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원인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지하철에 사람들이 많은데 사진을 찍으면 하이힐을 신은 어떤 여자가 넘어졌다. ‘어떤 남자가 넘어뜨렸구나.’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선 그 여자가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넘어뜨렸구나. 어떤 남자를 통해서 나를 넘어뜨렸다. 창피스럽게 했다.’ 그런 말을 과학이나 철학에선 하지 말란 거예요. 왜? 그런 말 하려면 원인이 나와야 되는데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면 원인이 없잖아요. 원인이 없다는 말은 납득이 안 되잖아요. 납득이 안 되면 사람을 기쁘게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보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 종이 아니라고 했단 말이죠.
그러면 복음이라는 것은 사도 바울은 이거에요. 내가 예수님한테 다메섹에서 당했듯이 똑같이 너도 당해봐라 이거에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 만나기 전에 논리나 합리적인 면에서 자기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어요. 최고였습니다. 박사 중에 박사겠죠. 그런데 그것이 직접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그게 헛짓한 거예요.
그러면 내가 당해서 새로운 피조물 된다면 너희들도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것은 나처럼 당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 예수님의 부활은 마지막 때 자기에게 줬고 이게 마지막 부활을 본 자기에게 주님께서 계시를 주셔서 자기가 만났던 그 부활과 똑같은 효능, 구원받는데 하자 없이 똑같은 능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이야기 그대로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 그 들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네가 예수를 믿으면 네가 구원을 얻는다.
두 번 다시 사람마다 전부다 말에서 떨어지고 자동차에서 떨어지고 그럴 필요 없다 이 말이죠. 네가 천국을 보겠다하느냐? 그러지 말라. 네가 지옥을 보고서 믿겠다? 그러지 말란 말이죠. 누가 천국을 올라가며 지옥에 내려가겠느냐? 바로 네가 코앞에, 입 앞에 있는 말씀 안에 천국과 지옥이 다 들어있는데 구태여 엘리베이터 타고 천국에 올라갔다가 또 엘리베이터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가 그럴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 복음 전하는 사람은 자부심과 긍지를 느껴야 됩니다.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로 이 원리입니다. 옛날 보통 이방인들은 땅에서 자기를 정주, 정주란 말은 무슨 뜻이죠? 정착, 안주 그냥 주거하는 거예요. 보통 사람에게 땅은 여기서 정착을 하기 위한 물리적인 바탕이 되겠지요. 땅이 있어야 사람이 안정이 되니까. 배 위에서는 사람이 불안정, 떨려서 잠을 못 자잖아요. 육지에 가면 잠 잘 수 있잖아요. 안정된 땅에서 정착을 하려 하는데
정착을 해버리면 뭐가 안 되느냐? 땅은 하나님의 계시와 언약과 말씀에 의해서 계속해서 사건이 이뤄져요. 뭐냐 하면 과거에서 미래로 계속 사건이 이뤄진다고. 그러면 약속의 사람은 여기 정착할 생각 말고 계속해서 땅에서 같이 호흡을 맞춰줘서 여기 땅에 있는 인간은 뭔가 떠나는 객이고 나그네라 하죠. 정착하지 말고 자꾸만 우리가 떠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떠나는 방식으로 살려면 나, 주체라 하는데, 나를 정립하지 마세요. 나를 정립해버리면 이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건도 그걸로 스톱이 돼버려요. 내 중심으로 세상이 끝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 번 예를 들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 여고생이 시험 떨어졌다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왜 죽느냐 하면, 그 애가 죽는 이유가 더 이상 살 마음이 안 들거든요. 그런데 걔가 세상을 다 압니까? 그런데 왜 죽느냐? 자기가 아는 범위에서 정착되었기 때문에, 고정화 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다음에 심판이 있다.’ 이런 말씀이 오게 되면 그 말씀이 우리 인간을 그냥 그 자리에 정착하게 만들지 않고 흔들게 만들어요. 흔들어서 우리 좋으라고 이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너는 이 말씀이 실제 현실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걸 느껴야 되죠. 그러면 말씀이 계속해서 흔들리면 우리도 같이 흔들려 가면 돼요.
우리가 흔들렸다는 말은 우리는 걸쭉한 그게 아니라 늘 출렁출렁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것이 되어라. 이건 내 것이다.’ 할 그런데 신경 쓸 이유가 없죠. ‘무엇을 하리까?’ 이것만 필요하지, ‘어때요 저?’ 이럴 필요 없다 이 말이죠. ‘내일은 뭐하면 됩니까? 모레는 뭐하면 됩니까?’ 흘러가는 데로 사건이 유발시키는 대로 만들어갈 뿐이지, ‘지금 내 믿음 좋지요?’라고 폼 낼 필요 없다 말이죠. 왜냐하면 그 순간 우리는 고정이 되기 때문에.
그러면 이 땅에서 자기 약속의 백성을 만들어낼 때 누가 땅을 흔드는가? 땅이 알아서 바람 불면 흔들리는가, 폭풍 불면 땅이 뒤집어지는 지진이 일어나면 흔들리는가? 아닙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에요. 하나님이 땅에 임재하심.
이번에 오은선 대장이 올랐던 산 이름이 뭐죠? 안나푸르나. 만약에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뎅집이 있다고 봅시다. ‘오은선 대장님 먹고 가세요.’ 얼마나 올라가는 게 시시하겠습니까? 거기서 오뎅 팔고 있는데 자기는 올라가보면 우습겠지요. 인간은 나름대로 인생의 목적을 두고 올라가지만 이미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선점했습니다. 하나님이 차지하고 있어요.
방금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해보면, 약속의 땅에 하나님이 우리보다 선점해서 땅 자체에서 율법을 야기시키는 땅으로 전환시킨다 했지요. 거기에 대해서 약속의 백성만이 호응해서 결국 하나님의 법은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구약의 언약 백성의 실존 모습이라고 이야기했죠.
그럼 여기서 어렵게 해봅시다. 이 땅에 오늘날 세상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하나님이 어떻게 임재하시느냐 하면, 이 책에도 나왔습니다만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이름의 임재에요. 하나님이 임재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갈라져요. 구분된다고. 삼위일체를 자꾸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구분을 못 합니다. 구분을 못해서 봉우리가 세 개라.
성부, 성자, 성령이 돼서 교회사 삼위일체 형성과정을 보게 되면 스피드 카가 경쟁을 해요. 성부 높였다가 성자가 따라붙고, 둘만 하나님이가? 성령은 폼으로 있나? 또 따라붙고. 성령이 올라갔다면 성자가 뒤쳐지고 또 성자가 올라가면 성부가 뒤쳐지고. 사람들이 세 개를 한꺼번에 못 믿잖아요. 반드시 세 개 있다는 건 서열이 있게 마련이죠. 공자도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세 사람 가운데 그 중에 하나는 스승이라고. 성경에 나오잖아요. 사람은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느니라.
삼위일체 형성과정이 이래요. 너무 성부가 앞서가니까 보조 맞춘다고 성자도 성부가 갖고 있는 위상 있잖아요. 전능하심, 선하심, 완전하심, 구원하심 이 요소를 다 집어넣어서 맞춰놨네. 성령은 쳐지는 거예요. 뒤에 나오는 성령을 또 올려서 맞춰놨어요. 교인들이 또는 그 당시 교회 권력구조 내에서 성령이 앞장서면 같이 성부, 성자를 또 보조를 맞춰줘야 돼요. 이게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바르트가 성자를 앞장세우니까 또 바르트 공격한다고 성부, 성령 보조 맞춰준다고 바빠요. 신학자 하는 일이 이 짓이에요. 봉우리 세 개를 다 믿으려고 하니 그러니까 시아버지 세 사람 다 믿으려하니 본인이 헷갈릴 지경이라.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유일신, 하나 신, 하나의 신 이런 개념들, 여호와는 하나의 신이다. 여호와는 한 분이시다. 성경에 나오는 이런 개념들을 현대식 사고방식으로 짜 맞춰서 그래요. 그럼 현대식 사고방식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사람이 뭔가 구상을 할 때는 반드시 자기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구상을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문법이라든지 역사를 이야기할 때 인간이 자기가 갖고 있던 역사관을 가지고 역사를 하거든요.
인간의 역사관이라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전에는 과거가 있었고, 후에는 미래가 있겠지요. 그러면 과거는 어디서 가져온 거예요?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가져온 것 아닙니까. 이게 구조에요. 에덴동산에서 인간만 만들어놨습니까? 선악과, 생명나무 같이 만들었어요? 이게 같이 있잖아요. 인간은 선악과, 생명나무 없는 인간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구조 안에 갇힌 존재에요.
어제도 그런 강의했습니다만 몰라야 되는 걸 왜 알았느냐 이 말이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좀 알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아는 걸 나도 알 수 있다는 자체가 구조 안에 있는 인간이라는 걸 벗어버리고 ‘나도 같이 신 합시다.’고 나오는 겁니다.
엄마가 애를 위해서 털옷을 입혔는데 애가 놀러가면서 털옷이 껄끄러우니까 훌러덩 벗고 맨 몸으로 바깥에 놀러간다 해보세요. 엄마가 애를 부르잖아요. ‘이리와. 털옷 입어야지.’ 자기가 만든 털옷을 입혀서 보내는.
인간을 만들 때 선악과, 생명나무와 그 안에서 인간을 만듦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것은 링컨이 이야기한 거고. 인간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인간은 누굴 위해서, 누군데? 그거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몰라요. 신을 위해서 있지. 그 신은 가짜라니까요. 그 신이라는 구상은 그 기초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이미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전제에서, 이게 어렵네.
내 사상에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과 다른 인간 모습이 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을 이야기해버리니까 그 신은 그야말로 가짜 신입니다. 그럼 어떤 인간이든 가짜 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반대한 사람 누구였습니까? 단 한 명도 없지요. 베드로가 칼 들고 설쳐도 하나의 객기입니다. 설쳐봐야 세 번씩 부인하는 게 그 사람이에요. 목자를 치면 양들이 어떻게 돼야 됩니까? 흩어져야 목자가 목자 값을 하는 겁니다. 목자를 칠 때 양들 흩어져서 그게 양 본인도 모르는 양의 속성이에요. 목자 치면 내 양은 내가 살리려고 도망칠 수밖에 없는 그런 양이 있을 때 진짜 목자가 빛이 납니다. 그냥 그 목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양 대신 저주를 받는 목자, 심판을 받는 목자.
도망친 양은 뻘쭘하니 목자가 어떻게 되는지 구경만 하는 거예요. 어떻게 되기는 그냥 죽지요. 죽음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없어지는 거예요. 없어진다는 말은 한 때 가느다란 추억이 있죠. 예수 삼년 동안 따라다녀도 과거에 삼년 동안 예수라는 것이 있었습니다만 십자가에 달린 그 순간 예수는 과거와 더불어서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게 가장 솔직한 거예요.
교인들이 가장 솔직한 마음은 예수는 없고, 예수를 이야기하는 목사만 있다. 그러니까 인간만 있다. 교회는 인간들이 모인 집단에 불과하다. 그걸 아주 혹독하게 평생을 살며 우리는 절감해야 됩니다. 그래야 왜 하나님은 저에게 살아계신 분으로 나타나는지 의미가 있죠. 이순신 장군이 없는 것처럼 예수도 없는 것이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는 그런 시대에 주님이 왜 저에게 나타나셔서 살아있다고 제에게만 알려줍니까? 그런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인 그 다음부터는 별로 중요한 아닌 게 되고, 예수님 살아있는 것이 내가 살아있는 것보다 더 짜릿한 현실이 돼요.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내가 없을 때 나는 어디 있느냐하는 질문과 같은 거예요. ‘내가 없을 때 나는 어디 있는가?’ 질문 자체가 성립 안 되죠.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질문이 된다니까요. 천국에 수능이 있다면 수능문제내고 싶어요. ‘당신이 없을 때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강남에 있는 강사도 못 맞출 거예요.
세례 요한이 뭐라 합니까?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죠. 그러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선택한 자로 있겠죠. 창세전에. 에베소서 1장 4절에. 그러면 내가 있는 거예요, 그분이 있는 거예요? 나는 있어도 없어질 존재고, 진짜 있다고 이야기할 분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만 있을 뿐이고 우리는 안개가 되어서 있었나? 없었는데?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있음에서 출발하는 모든 인간들의 논리는 전부다 주님 앞에 허용 안 됩니다. 항상 주님은 매일같이 우리를 없애면서 ‘나 있다’ 등장하는 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살려주시죠.
어제 대구강의에서 했지요. 참새를 주께서 기르시고, 들풀을 주께서 기르시는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르신다는 걸 왜 못 믿느냐? 참새에 무슨 자아가 있습니까? 들풀에 무슨 자아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괜히 자아가 있어서 길러줘도 자기가 자길 살린데. ‘괜히 자아있어, 괜히 자아있어. 있으면 안 되는데.’ 햇빛과 공기를 줘서 길러줘도 자기가 열심히 해서 자기가 살았데. 세상에 이런 반칙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면서 모든 인간은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겁니다.
이 구조가 돼버리면 과거에 있던 자아상을 그래도 가지고 이스라엘 역사와 하나님 말씀을 문법적으로 분해버리면 여기에 대한 의미는 이걸 아셔야 돼요. 문법 주장하는 사람은 이 한 마디면 끝납니다. 문법에서 의미가 안 나와요. 의미는 차이에서 나옵니다. 이게 우주 빈 공간에 이것 하나 덜렁 있으면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요구르트 병이 하나 있으면 이름을 지어야 돼요. 왜? 이름을 지어야 이것과 이것하고 차이가 납니다. 이름 지을 그때 의미를 줍니다.
이걸 물이라 하면 물은 요구르트가 아니란 의미에서 물로 지어야 돼요. 요구르트는 물이라 하지 않고, 물이 아니란 의미에서 요구르트로 지었습니다. 요구르트라는 o, ㅛ, ㄱ 이란 기호는 아무 의미 없어요. 그냥 작대기에요.
누가 나보고 욕을 하면 왜 기분 나쁩니까? 돌멩이 보고 욕 해보세요. 돌멩이 기분 안 나빠요. 그런데 인간은 욕인 것과 욕 아닌 것을 평소에 자아 속에 포함이 돼있어요. 포함이 돼있기 때문에 상대방 들어보고, ‘내가 알고 있는 욕 같아.’ 그러면 욕하고 싶어 하고. 사람이 생전 처음 들은 욕을 하면 욕인 줄 모릅니다. 여행 가서 욕 들으면 욕인 줄 몰라요. 그건 새로운 차이성에 새로운 언어가 추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몰라요.
주님께서 말씀을 침묵으로 하신 게 아니고, 계속해서 아람어로 그 당시 사는 사람말로 해댄 것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차이에 내 말이 내 뜻이 문법적으로 포함이 된다. 확인해보라. 그런데 아무도 알아보질 못해. 자기가 알고 있는 그런 개념 앞에는 도대체 예수님 말이 생전 처음 듣는 거예요. 그러니까 봉사가 자기가 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못 보는 거예요.
인간의 의미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의미를 조합해서 만든 게 의미인데, 예수님 말씀은 예수님 몸에서 나온 거예요. 예수님 몸에서 나왔기 때문에 인간의 몸에서 알 수 있는 의미는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 말씀은 전혀 모릅니다. 그게 이 교재에 제가 70이레에 대한 11페이지에서 14페이지까지 복사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어떤 차원에서 주어지는가를 이걸 보면서 같이 생각해보자고 복사해 온 겁니다.
다윗도 성전이 뭔지 몰랐어요. 이렇게 보면 돼요. 다윗은 익히 자기가 알고 있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려고 애를 썼지만 다윗이 잘못됐다, 성전개념 틀렸다고 하는 게 아니고 다윗의 공부를 새로 시키는 게 아니고 다윗의 몸을 쳐요. 몸을 치면서 다윗의 고정된 몸에서 하나님의 사건에 의해서 움직이는 몸으로 바뀌면서 주님께서 사건 속에 새로 담아준 의미가 움직임 속에서 새로 피어나겠지요.
그게 만약에 삼년 전이라면 삼년 전에 수고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또 안 되지요. 육년 뒤에 또 어떤 게 있을지 모르죠. 결국 다윗은 죽잖아요. 모든 인간은 A, B, C 어디에서나 어디로 간다? 전부다 죽음으로 간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적인 의식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라 해서 내가 여기서 태어나서 이렇게 간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의 땅 개념 자체가 인간 몸 중심이 아니고 임재 중심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몸 중심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모든 시간 개념은 묵시적 개념이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봐야 짧아요. 초끈, 짧은 끈이에요. 다 어디 있느냐? 한 곳에 다 모이게 돼있습니다. 여기에 죽음이 있어요. 이 죽음이 무슨 죽음입니까? 율법이 완성되는 죽음. 그게 뭐예요? 십자가잖아요.
그동안 땅도 움직였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던 그 언약과 모든 율법이 완성되는 율법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떤 것도 이 죽음 앞에서 다 되게 돼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죽음 자체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어떤 자격을 주느냐 하면, 구약의 여호와 이름의 자격을 줘요. 그럼 주가 되죠. 주라 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제일 쉽습니다. 심판자, 심판주.
심판주가 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일단 죽여 놓고 그 다음에 긍휼과 자비로 살려낼 사람은 자기 자신이 따로 뽑아내고. 물론 독자적으로 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살려낼 사람은 따로 뽑아내고, 안 뽑아내면 그냥 그대로 죽어서 지옥의 저주받고.
이러한 신약의 이야기가 구약에도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대로 이뤄지고 있더란 말이죠. 그것이 바로 땅에서 하나님이 임재를 할 때 그냥 임재하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은 항상 감추어진 분이고 하나님 이름은 땅을 움직이는 나타난 하나님. 그러니까 삼위일체에서 어떻게 됩니까? 나타나신 나사렛 예수님 해놓고 그 다음에 배후에 감추어진 예수님의 아버지인데 예수님께 속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 또는 너희 아버지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9장에서 20장에서 왜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지금 현재 알고 있는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고 마귀다. 너희 아비는 사탄이다. 악마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앞장세우지 않는 하나님은 전부다 악마입니다. 인간이 상상한 거예요. 상상했고 또는 마귀가 그렇게 조작했고.
반드시 하나님이라면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 뒤에 감추고 앞에 등장합니다. 등장할 때 이 자리가 주님으로 등장하죠. 그러니까 이건 좀 복잡하지만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기능을 바로 예수님께 일임해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기능이 곧 아버지 하나님의 일로 나타나게 하신다 이 말이죠.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고, 예수님이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그게 수용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아무리 지극히 믿어도 엉터리 하나님 아닌 가짜 하나님을 믿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믿으면 그것이 아버지를 믿는 것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처럼 하나님 믿고, 성령님 믿고, 예수 믿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예수 믿으면 그게 바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예수도 믿어야 돼. 성부도 믿어야 돼. 성령 믿어야 돼. 이래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 권력자들이 조작해낸 거예요.
그런데 삼위일체에 보면 나는 성부도 믿고 성자도 믿고 성령도 믿사오며. 그게 아니라니까. 성경에 그런 것 없어요. 성경은 예수를 믿으면 그것이 곧 성령 믿는 게 되고, 예수 믿는 게 되는 거예요. ‘세 분 계시니까 세 분 다 믿어야지.’라고 나온다면 그 믿음이 바로 예수 안 믿는 믿음이에요. 예수 안 믿기 때문에 그렇게 내 쪽에서 납득이 되는 식으로 세 분 다 믿고자 하는 거예요.
어떤 교회 가면 성부, 성자, 성령만 믿으면 안 돼요. 딴 거 믿어야 돼요. 성부 믿고, 성자 믿고, 성령 믿고, 예배 믿고, 기도 믿고, 목사 믿고 다 믿어야 돼요. 그 사람들이 믿는 건 뭐냐 하면, 웨스터민스터에 나오는 그 내용을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걸 믿는다고 생각한다고. 믿는다는 말은 내 모든 것을 강탈당하는 걸 말합니다. 내가 아는 것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게 믿는 거예요.
내가 웨스터민스터를 알고 있다면 안다는 그것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안다면 성경 아는 것이 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아는 것이 날 구원하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걸 믿는 것 그리고 구원은 반드시 예수님께 나온 예수님의 피의 능력으로 구원하다는 것 그게 믿어져야 되는 거예요.
저도 옛날에 목사들 설교하면 요약해서 다 적습니다. 제가 대구 성일교회 있을 때 아주 잘 적었어요. 설교 적고 집에 와서 읽어보면 그때 감동이 전혀 안 살아나요. 그냥 글자 끄적끄적한 무미건조한 글자만 나열될 뿐이에요. 그렇게 해놓으니까 남는 게 있어요. 잘못된 게 남는데, ‘하나님 저도 이렇게 설교 받아 적으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제 취직자리 알아봐주세요. 제 결혼 좀 빨리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그게 내가 보상을 얻어내려는 공로처럼 느껴져요.
어느 날 쓰는 것을 치웠어요. 왜냐하면 그런 걸 자꾸 하니까 내 자신이 지금보다 더 커지고 부풀어지고 더 위대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노트가 이만큼. 이사할 때 그걸 버림으로 말미암아 다시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푹 꺼져버렸어요. 다시 푹 꺼질 때 존재가 얼마나 가벼운지. 아무것도 아닌 탕자로 돌아갈 때 비로소 거저주신 은혜가 눈앞에 펼쳐지며 주께서 다 해주셨다는 것이 그때 느껴지는 겁니다.
지금 저희 집에 가면 옛날 설교테이프 이만큼 쌓여있어요. 김대식 집사님 줘서. 그 테이프를 우연히 듣게 되면 그때는 그때 필요했던 말씀인 줄 모르지만 지금은 안 필요해요. 그걸 또 써먹으려 하니까 내가 고착되니까 고정이 돼버리니까 주께서 매일같이 일하시는 건데 보조가 안 맞춰지는 거예요. 주께서 지금 쉬지 않고 주무시지 않고 일하는데 보조가 안 되는 거예요.
주님 따라 가자 하니까 아버지 장례 치르고 따라가자 한 제자 있었죠. 완전히 꾸중 들었잖아요. 왜냐하면 주님은 흐름인데 자기는 과거에 대한 고정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 장례 치르는 장한 아들, 그런 상. 그리고 부자 청년이 부자라는 것을 고정 자리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어떻게 착해서 구원받느냐고 나올 때 네게 있는 고정 자리, 부자라는 것, 네 모든 걸 팔고 그 다음에 나를 따라오너라. 자꾸 우리의 고정 자리가 없어지는 거예요.
포도원 비유에서 아침 열 시에 온 사람 있잖아요. 열 시에 온 사람은 일하면서 뭐가 발생됐습니까? ‘나는 아침 열 시부터 왔다. 열 시부터 왔다.’ 계속해서 고정된 자리가 보장됐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완전히 약 올리기 작전인지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 주니까 자기 자리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한데 기쁨이 아니고 분노로 변했죠. 한 시간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 다섯 시간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 얼마나 낯 뜨겁겠습니까?
주님께서 제자들 보고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진다는 것을 아예 양이 되어서 목자를 믿어서 구원된 사람 아무도 두지 않으리라. 역시 나는 괜찮은 양이라서 목자 알아봤다고 이런 인간, 이런 양을 한 마리도 두지 않는 거예요. 잃어버린 상태에 있게 하고, 잃어버린 이를 주께서 찾아가는 식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사울을 다메섹에서 찾아가듯이. 그냥 있으면 뽑아내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처음부터 모든 율법은 인간이 이루는 게 아닙니다. 모든 율법은 성부 하나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차이를 두어야 돼요. 예수님과 예수님을 만나야 될 백성들과 차이를 둬서 진정한 약속의 땅의 성취는 어떤 인간의 공로도 거기에 삽입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계속해서 교재 펴놓고 안 들어가는 이유가 뭐냐? 들어가 버리면 진짜 논리가 굉장히 어려워요. 아마 지루한 세미나 하려면 좋지요. 쭉 읽으면 되니까. [보수주의 경향의 구약 신학자 카이저나 비-보수주의 경향의 구약학자인 침멀리나 모두 성전의 의미를 어쨌든 다윗의 기획과 …] 이것 읽으면 두 시간 후딱 갑니다.
11페이지 제일 위에 봅시다. 발생적 성전관, 여기에 주가 6번으로 돼있죠. “‘발생적’이란 말의 취지는 대상과 개념의 일치가 자동적으로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일방적인 선이해적이고 우월한 의미결정권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숨겨진 의미가 비로소 드러나는 상황을 표현한다.” 상장 줄 때 이런 표현을.
여기서 ‘대상과 개념의 일치가 자동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게 핵심이에요. 대상과 개념, 뭐냐 하면, 선풍기잖아요. 선풍기 한 대밖에 없으니까 일치되잖아요. 일치되면 발생되지 않아요. 어제도 선풍기였고, 내일도 선풍기잖아요. 계속 선풍기로 불려져서 그 자리에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일 와보니 선풍기가 아니고 여기에 궤짝이 있다면 그 궤짝은 발생돼야 되죠. ‘선풍기 어디 갔지?’
그러니까 발생이란 말은 어떤 때 사용하느냐 하면, 계속해서 변화되는 걸 표현할 때 발생이라 합니다. 만약에 고정 같으면 발생이라 하지 못하죠. 그냥 교회라 하면 계속 교회 되는 거죠. 그러면 고정된 개념으로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봅시다. 교회입니까? 교회라고 분명히 시작했는데 일곱 교회에서 고정된 것은 주님의 오른 팔에 있는 일곱 촛대, 고정돼있죠. 주님의 품 안에서 고정된 일곱 교회인데 실제로 역사 속에 있는 일곱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전부다 나중에 없어져요.
그러면 이럴 경우에 지상에 있는 일곱 교회 아닙니까? 맞아요. 맞는데 일곱 교회라고 붙드는 순간 뭘 놓치느냐 하면, 주님의 손에 있는 일곱 촛대라는 개념이 역사적으로 다 일치가 안 돼요. 다 포함을 시킬 수 없어요. 그러면 교회가 아니냐? 맞아요. 그런데 그 교회는 구원받은 교회는 아니에요. 맞는다고 해놓고 아니라고 하면 무슨 소리냐? 이게 발생되는 거예요.
우리가 의인이냐? 맞지요. 의인이기 때문에 뭘 해도 의가 된다? 이건 아니란 말이죠. 항상 처음의 인간이 선악과와 생명나무 구조 안에 있죠. 구조가 어떤 구조인 줄 모르고 구조를 벗어버리면 의인 되었으면 영원한 의인 되어야 돼요. 하지만 구조적으로 봤을 때 의인으로 발생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고정적인 것은 예수님의 말씀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의인되게 하심으로서 의인되는 겁니다. 죄인이. 어떤 방식으로? 죄를 드러내면서 의인되게 하죠. 죄를 아는 자가 곧 의인. 자기가 탕자라고 아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아들이 됩니다.
“주체의 일방적인 선이해적이고 우월한 의미결정권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그러니까 나는 과거에 선풍기라고 봤습니다. 그것은 이미 선풍기라는 개념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죠. ‘난 어제 선풍기였어.’ 갖고 있는 이런 우월권에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예상 못한 새로운 의미가 나오죠. 그것이 발생론적이고 그런 것으로 성전을 봐야 된다는 겁니다.
여기 11페이지 제일 위에 “다니엘 70이레는 성전의 위상에서 배출되어 나온 시간 구조다.” 했는데 제가 [우주의 구조]라는 걸 쓰면서 뒤에 평할 때 나온 게 있죠. 모든 진리는 어디서 나온다 했습니까? 성전에서 나온다 했습니다. 에스겔에 분명히 돼있거든요. 성전은 뭐냐 하면, 거룩이다. 히브리서에 보면 성전을 가지고 땅에 있는 것을 그림자로 보지요. 위에 있는 것은 그림자가 아닌 실체가 되겠지요.
예수님께서 그냥 땅에 갔다가 그냥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일도 안 하고 구경 잘했다며 올라갔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땅에 오심으로서 성전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시키시고 올라갈 때 그냥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으로서 올라가는 거예요. 주님으로서 땅을 거쳐서 경유해서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이 주님으로부터 이 땅은 심판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뭘 심판하느냐? 바로 땅 자체만으로 자기를 고정적인 주체를 확보할 때는 전부다 저주받습니다. 내 자리가 없어야 돼요.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성전이 우리 몸에 오게 되면 우리의 몸이 나의 몸이 아니고 주님의 임하시는 성전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하늘의 주님뿐만 아니고 내 안에서도 주님이 돼요. 그래서 땅에 바다에 하늘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자의 주가 되게 하심이라.
그 작업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임재를 하게 됩니다. 임재할 때 제단이 있는데 그 제단에 하나님의 이름이 임하게 됩니다. 뭐로 임하느냐? 바로 다음 시간에 이야기할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임한다. 언약을 통해서 임하기 때문에 인간이 갖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한 자기의 고정관념, 자기의 선입관은 언약과 드디어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겁니다. ‘나는 이 자리 맞습니다.’라고 우길 때 언약은 발생론적으로 그걸 치게 돼있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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