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5월 7일 출12장 강제적인 구별(빼돌리기)
울산 5월 7일 출12장 강제적인 구별(빼돌리기)
이름 : 관리자(IP:124.59.86.6)
100507 출12장 구별하는 취지(왜 죽어야 하나? 장자)
관리자(IP:124.♡.86.6)
10-05-08 10:58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울산/울산100507a출12장a.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울산/울산100507b출12장b.hwp
관리자(IP:124.♡.86.6)
10-05-15 13:11
울산100507a출12장a
20100507a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11장했는데 다시 한번 해봅시다. 그림으로 나겠습니다. 애굽이란 나라에 여기에 구멍이 뚫려있다고 봅시다. 이걸 옆에서 보면 지평선에 구멍이 뚫려있는 거죠. 애굽이란 나라의 중앙이 꺼진 곳이 되죠. 이렇게 되면 쉬운 말로 고립입니다. 사방에 적들로 둘러 쌓여있는 고립된 상태. 오늘날 성도입니다. 고립돼야 돼요. 고립이 되어줘야 이쪽에 있는 성질, 질적인 문제와 이쪽이 달라요. 이것을 특이성이라 하죠. 특이점.
특이점이라 하는 것은 블랙홀, 구멍이 생겨서 거기서 모든 빛도 삼킬 정도로 강력한 정말 이상한 확 잡아당기는 중력이 생겨서 모든 걸 집어삼키듯이 그런 공간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애굽나라에 블랙홀 같은 특이성을 가진 구멍을 만들어버렸어요.
그렇게 되면 히브리인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지 않았으니까. 여기에 전부다 쏠리게 되는 겁니다. 갑자기 자기가 사는 집이 푹 꺼져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어제까지 있었는데 이 집 어디 갔어? 당신은 그 구멍에 왜 들어가 있는 거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애굽에 고립을 시켜버렸죠.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애굽의 기존의 성질이 있지요. 애굽을 1번이라 하고, 이쪽을 2번이라 합시다. 2번의 성질 또는 성격을 완전히 다르게 가져가는 겁니다. 출애굽기 11장 7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구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취지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애굽 사람과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 히브리인들이 구별할 수 있는 권리가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없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구별되는 것도 싫어요. 그것도 귀찮아요.
만약에 울산바닥에 하나님의 성도만 사는 집에 아파트가 푹 꺼져서 블랙홀처럼 빠진다는 소식을, 목사님께서 ‘여러분 성도 맞습니까? 그렇다면 내일 아침 되면 아파트 푹 꺼질 겁니다. 당신은 지하에 가있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별하시겠답니다.’라고 한다면 그 소리를 듣는 교인들이 기분이 좋을까요, 별로일까요? 안 좋은 거예요. 그냥 사는 대로 살고 싶은 거예요. 어디 취직하고 결혼하고. 그냥 조용하게, 귀찮게 하지 말고, 죽어서 천국에서 만나고,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지 그냥 조용하게 가줬으면 좋겠어. 푹 꺼지고 특별하게 다뤄지는 것이 괴로워.
괴롭다는 말은 그렇게 하나님은 구별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그렇게 구별되는 것이 우리가 싫어.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 푹 꺼져버린 이스라엘 사람이나 안 꺼지고 남아 있는 애굽 사람이나 생각하는 것이 대동소이하다. 같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 말하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은 2번의 히브리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닌 거예요. 블랙홀에 빠진 사람들이 본래의 성격을 여기다 모아놓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뭐냐? 바로 이 안에 어린양이 기다리고 있어요. 어린양이 기다리고 있는 블랙홀에 갑자기 푹 꺼져서 한 떼의 이스라엘이 모였다면 모여진 이스라엘은 어린양이 갖고 있는 아직까지 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어린양의 성격과 일치된 성격을 가질 것을 요구받게 되는 겁니다.
구별한다고 숫자 세어서 구별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 몇 명, 여기 몇 명 이렇게 구별하는 것이 아니고, 구별은 양적이 아닌 질적으로 구별하는데 그 구분이 정작 히브리인들은 그게 귀찮고 번거롭고 싫다는 말입니다. 싫어도 블랙홀에 빠졌다는 말은 그 블랙홀에 이미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 관점에서 구원을 하겠다는 하나님 나름대로의 성질과 성격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거는 애굽인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고? 정작 구원받는 히브리인들도 그 점은 금시초문이라. 몰라요. 히브리인들은 애굽 사람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생소한 성질, 그것도 귀찮아.
교회에서 돈 준다 하면 교회 오죠. 교회 참석하면 십만 원 준다는 소리 없으면 시간 있으면 가고, 없으면 다른데 가고 싶고. 그런 겁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출애굽기 11장 7절에서 내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을 구별지으리라 아무리 해도 우리는 죽어서 좋은데 가기를 원하지만 이 땅에서부터 구별되기는 원치 않아요.
그냥 울산 사람에 같이 묻혀서 어디에 있는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안 들키면서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조용하게,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소박하게 살다가 치매도 안 걸리고 조용하게 자는 잠에 죽고 싶고. 그러한 일상적인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이 블랙홀에 집어넣어서 어린양의 성격과 동일한 성격을 갖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구원받은 우리들의 아이디어가 아니죠. 새순교회 교인들이 모여서 합의하고 회의해서 생긴 아이디어가 아니잖아요. 이 아이디어는 예상 밖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이디어를 우리가 강요받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공부해야 되고 알아야 될 것은 벌써 드러났지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기 위해서 구별된 백성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될 새로운 성격은 어떠어떠한 겁니까? 묻기만 하면 돼요. 그런데 요즘 교인들이 그걸 묻질 않아요.
‘시간 없는데 억지로 교회 왔습니다. 날 알아주세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분명히 구별된 백성인데 구별된 백성은 저쪽 사람들하고 어떤 차이가 나는가? 그게 궁금해서 어서 교회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런 교인 있으면 업어주고 싶습니다. 진짜 점심 때 밥 한 그릇 더 주고 싶어. ‘다음 주가 너무 기다려져. 도대체 어떻게 달라지는 인간인가? 궁금해 미치겠는데 어서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세요.’ 이렇게 궁금해 하는 사람이 없어요.
대신 반대입니다. ‘제발 교회 안 나와도 내비 둬. 날 귀찮게 하지 마. 내가 알아서 예수 잘 믿어주고 죽어서 천당 갈게.’ 이런 식으로 자기 옛날 성격 그대로 세상 사람과 똑같은 성격을 유지하는데 전력을 다하여 꼭 쥐고 안 놓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죠. 안다지만 알긴 뭘 알아요. 성경에 들어가면 점점 더 깊이 있는 게 나오는데.
여기 나오는 성경 중에서 출애굽기 11장에 나오는 몇 가지 내용만 제가 하겠습니다. 첫째, 밤중에. 낮이 아니고 밤. 이건 김성환 목사님이 글을 썼기 때문에 그걸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제 의견을 거기다 첨부해드리고요. 두 번째가 중요합니다. 애굽 사람들이 왜 삽니까? 살고자 해서 살지요. 블랙홀에 빠진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살고자 해서 사는 게 아니고 새로운 성격을 부여받습니다. ‘죽어야 산다.’ 살기 위해서 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말 정말 어렵다.
‘살기 위하여 죽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여전히 노림수가 어디에 있습니까? 살아야 되겠다는데 노림수가 있죠. 그런데 2번은 살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가 아니고 죽음을 안 자만 결과적으로 산 자라고 간주된다 이 말입니다.
세 번째가 2번과 연관돼있습니다. 보통 애굽 사람들이 죽는다는 건 자기 목숨 끊어지는 거잖아요. 세 번째는 누가 죽이는가? 누가 함부로 인간을 죽이는가? 어느 소설가가 그런 이야기했죠. 누가 함부로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하는가? 그런 식의 소설이 있는 모양이에요. 인간의 하늘같은 존엄성을 누가 감히 짐승처럼 간주하느냐? 못 됐기로.
인간이란 전부다 자기가 고귀한 맛으로 살잖아요. 자기 존엄성을 자기가 가마 태우듯이 살잖아요. 그런데 블랙홀에 빠진 이스라엘은 ‘왜 우리가 죽어 마땅합니까?’를 아는 것 가운데 드러나는 거예요. 누가 죽어야 하는가의 정답은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장자가 죽는.
1번은 뭡니까? 낮에 이뤄집니까, 밤에 이뤄집니까? 밤에 이뤄진다. 두 번째가 뭡니까? 죽는 자만이 산다. 살기 위해서 죽으란 말이 아니고 죽은 자만이 산 자로 간주된다. 세 번째, 누굴 죽이는가? 장자를 죽이는데 장자를 죽이는 의미가 뭐냐? 이 세 가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애굽과 다른 사람입니다. 애굽과 다른 성격, 달리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빼돌린 사람, 고립시킨 사람, 구별되게 하신 구원받은 성도가 이런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성격이 신약성경에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구약 없는 신약이 없다는 말이에요. 이 성격을 모르고 그냥 신약을 바라보게 되면 마치 애굽 사람이 자력으로 천국가려는 시도와 똑같은 거예요. 이것은 애굽의 종교, 애굽의 우상에 불과하지 진짜 블랙홀에 빠져본 히브리인들의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그 신앙은 아닌 겁니다.
결론을 뜸들이지 않고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 가지 어떤 때는 네 가지, 낮이 아니고 밤, 죽는 자만이 비로소 산 자다. 세 번째 누가 죽이고, 누굴 죽이는가? 이렇게 되면 뭡니까? 질문 자체도 중요하니까. 4번은 누가 죽습니까? 장자가 죽고. 누가 죽이십니까? 하나님이 죽이시죠.
그러면 블랙홀 밑에 있는 하나님과 블랙홀 끌러가기 이전의 하나님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죠. 성질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죠. 애굽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블랙홀에 따로 고립돼있고 모여 있는 사람의 하나님과 완전히 다른 거예요.
그러면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갑자기 하나님이 졸지에 두 종류의 하나님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여기 블랙홀에 빠진 사람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한다면 결국은 두 종류의 하나님이 그냥 두 종류로 평화롭게 가는 것이 아니고 그 둘 사이에는 반드시 앞으로 전쟁이 벌어져요. 군대니까. 군대가 하는 역할이 뭐예요? 군대는 전쟁하는 일. 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계속 구별되는 작업은 전쟁이란 매개로 이뤄진다 이 말입니다. 논리가 그렇게 돼요.
그래서 11장의 이런 내용을 깔지 않으면 12장의 내용을, 블랙홀에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같은 평토에서 봐버리면 이러한 새로운 성격을 부여받지 못한 채 내가 애굽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성격 그대로 갖고 있으면 뭐라고 우기느냐 하면, ‘나는 구원받았어요. 난 어린양의 피로.’ 이러고 있다고.
그러면 그런 사람에게 묻지요. 하나님께서 어린양을 왜 죽였습니까? ‘난 그런 것 알고 싶지도 않고 골치 아파서 몰라도 돼. 하여튼 나는 어린양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어린양이 누구신데요? 그러면 ‘아니고 몰라요.’ 어린양이 우리에게 새로운 성격을 부여합니다. 그냥 있는 구원받았다고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다 벗겨내고 우리 안에 새로운 성질을 집어넣어요.
제가 하나교회에서 집회하면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성도라 하는 것은 풍선 껍데기인데 풍선이 그냥 있을 때는 딱 들어붙어있지만 거기다 헬륨 가스를 집어넣으면 갑자기 형틀이 바뀌죠. 납작한 고무풍선이 부풀어 오르죠. 그 다음에 그걸로 끝납니까? 위로 올라가잖아요. 고무풍선이 지향하고 목적이 뭡니까? 땅에 있는 고무풍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위로 올라가야 되는데 고무풍선 자기가 알아서 올라가는 게 아니고 안에 공기보다 가벼운 헬륨 가스가 들어갔잖아요. 그걸 집어넣으니까 떴잖아요.
그렇다면 그 고무풍선이 누굴 자랑해야 됩니까? 나는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성령 때문에 뜬다고 이것을 증거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땅에 납작하게 붙어있는 고무풍선의 그 성질하고 전혀 다른 성질이 고무풍선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성질이 들어오면 그 성질은 어디를 지향하게 돼있어요? 하늘로 향하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이미 성도된 하나님 아들 된 자는 땅에서 죽었고 하늘에 살았으니까 하늘에 살았다는 생명이 이미 들어있다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땅의 것을 생각지 않고 하늘을 향하여 살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출애굽기 11장의 네 가지 성질을 모르고 골로새서 3장을 그냥 봐버리면 ‘기도원 차릴까요?’ 이래서 또 세속의 직장도 때려치우고 처자식도 버리고 혼자 도 닦는다고 기도원에 가서 나무 흔들고 있단 말이죠.
출애굽기 11장의 이런 구약적인 바탕 없이 그냥 골로새서만 보고 하면 노자 사상이나, 불교 사상이나, 가톨릭의 침묵으로 도 닦는 수도원 또는 수녀원 그 짝 나요. 그거는 도 닦는 거잖아요. 그건 기껏 고무풍선 안에 헬륨 가스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고무풍선 겉면에 침 뱉어서 반짝반짝 빛내는 거예요. 뜨지도 않으면 그냥 윤기 나는 그냥 납작한 고무풍선.
언젠가 했죠. 떠야 비행기지 뜨지 않는 게 자동차보다 못하다 했잖아요. 비행기의 맛은 뜨는데 있는데 뜨질 않으니. 납작한데 윤기 있어. 온갖 똥폼 다 잡고, 은혜 받고 뭐. 그러지 말고 뜨란 말이에요. 예수 믿는다고 자기 자랑하지 말고. 뭔가 떠야 돼요. 뜨는데 기도원에 가서 뜰 필요는 없다 말이에요. 직장생활하면서 충실하게 주부생활하면서, 목사생활하면서 항상 어떤 설교를 하던지, 목회를 하던지 간에 나는 목회라는 걸 통해 위로 올라가고 있다는 그게 즐거움 속에서, 감사 속에서, 용서 받음 속에서, 존재의 가벼움 속에서 펼쳐져야 되잖아요.
그럼 헬륨 가스는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성경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자존심은 추방당하고. 실제론 추방당한 게 아니라 말씀사건에 의해서 그것이 정죄 받고 유죄라고 인정받고 남는 것은 말씀사건이 넘쳐나죠. 기체가 들어오게 되면 활발하게 운동, 브라운 운동이라 하는데 운동을 해서 충돌해서 열을 내면. 기체가 많이 넣으면 그 안에 열에너지가 있는 이유는 기체의 원자들이 서로 충돌해서 에너지를 발생해서 그렇거든요.
그처럼 우리 속에 하늘 쳐다보는 마음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착해서가 아니라 말씀들이 활성화되어서 말씀이 우리를 떠오르게 하는 겁니다.
제가 물어볼게요. 자기가 죄인 된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옳은 일이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다. 그럼 왜 사람들은 착한 일 해서 나쁜 놈 되려합니까? 논리상 보세요. 주님 앞에 나쁜 인간 되는 것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하나님 뜻에 부합되지요. 그런데 왜 자꾸 착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나쁜 놈을 자진해서 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존심 때문에 그렇잖아요.
성경해석은 간단해요. 간단하게 대비가 됩니다. 애굽적인 것과 블랙홀. 한쪽은 하나님과 같이 있으면 모든 자기 책임, 남은 팔자와 운명을 하나님께 다 맡기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만나보지도 못하고 만난 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맡길 대상이 없어요. 맡길 대상은 없으면서 남한테 맡겼다는 폼을 내야 되니까 기껏 내세우는 것이, ‘나는 예수 믿고 많이 착해졌어.’ 예수 믿고 왜 착해지는데. 예수 믿고 착해지는 것이 자진해서 나쁜 놈 되겠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 인간적으로 주님 앞에 나쁜 놈은 되지 맙시다. 나쁜 인간으로 드러나서 의로운 사람 돼야지 나쁜 인간 되려고 착한 일은 하지 맙시다. 자꾸만.
여기서 개혁주의 성화론자들이 아무리 설명해도 도대체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분명히 저 사람들의 논리는 뻔한데 어떤 뚜렷한 차이가 있는가? 믿을 놈은 자기밖에 없다는 것이 본심이고 진심이기 때문에 믿는 척은 해야 되겠고 실제로는 믿을 놈은 나밖에 없고 하나님 믿다가 낭패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하나님 믿는 사람은 그 다음부터는 잠도 잘 와요. 더 이상 내가 잠 안 올 일이 없어져버렸어요. 하나님의 말씀, 지시에 의해서 할 일은 태산 같지만 내가 잠이 안 올 정도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공포심을 느낄 일은 없는 겁니다. 왜냐? 모든 일은 어린양에서부터 출발해서 어린양으로 실시 되서 어린양을 경유해서 도로 어린양으로 포섭이 되고 끌려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이러한 어린양으로 개시된 일에, 이걸 언약이라 하는데, 그냥 우리가 마치 지저분한 식당에 보면, 파리 잡는 끈끈이처럼 주님의 혓바닥에서 나온 끈끈이에 달라붙은 것이 바로 우리 성도라 이 말이죠. 달라붙어있으면 되잖아요. 하나의 가지로서 하나의 혹처럼.
달라붙은 끈끈이를 어린양께서 주님 쪽으로 점점 더 가는데 가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기존의 애굽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 다시 말해서 세상의 지옥 가는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내 안의 사고방식이 이 네 가지, 밤에, 죽어야 산다, 누가 죽이는가? 장자를 죽인다. 어린양의 취지를 살려내는 네 가지의 특이성이 말씀사건으로 이 안에 헬륨이 되어서 터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옛날에 세상 사람과 알았던 그 사고방식을 익히 알지요. 태어날 때 천성이 그러니까. 새롭게 말씀사건이 터지는 것이 내가 나 된 것은 주님 위하는 것이지 내가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겁니다.
제가 하나교회에서 강의한 걸 잠깐 맛 보여드릴게요. 여러 가지 핵심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만 할게요.
그때 그림을 그대로. 사람이 있는데 사람에 끈 같은 것이 둘러져 있어요. 이 끈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역사를 자기 주변에 둘러서 이것을 자아라고 삼는 겁니다. 이 끈의 출발점은 출생점이에요. 출생, 네 살, 일곱 살, 열다섯 살, 스물 몇 살, 만약에 오십 됐다면, 삼십, 사십, 오십, 뒤에는 뭐가 와요? 아직까지 오십 이후는 점선이 되겠지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여섯 살 때 나, 일곱 살 때 나, 이걸 식빵이라면 칼로 자르면 단면 하나씩 분류되어 나오겠죠. 이걸 하나 빼보자 말이죠. 마치 벌 키우는 사람이 벌통 끄집어내면 판때기 하나 나오듯이, 끄집어내면 여기는 일곱 살 때 사건이 나오겠죠. 보고 도로 집어넣고 그 다음에 여덟 살 때. 일곱 살, 여덟 살 이걸 하나의 토스트 빵 같이 있는데 그걸 하나로 뭉쳐버리면 그것이 현재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내세울 수 있는 동질 된 식빵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정작 이야기할 건 남아있어요. 여기까지 이해돼야 돼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가 누적이 되어서 내가 된다 이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과거 없는 내가 없다 이 말입니다. 가짜 여권 만든다고 사진 붙여놓으면, ‘아저씨, 사진은 비슷한데 일곱 살 때 어느 초등학교 나왔어요?’ 물으면 모르죠. 왜? 사진은 비슷하지만. ‘대구 대성초등학교 나왔는데.’ ‘이 사람 가짜네.’ 이렇게 된다 말이죠. ‘울산에 무슨 초등학교입니다.’ ‘아니잖아, 이 사람.’ 아무리 지금은 비슷해도 과거가 누적된 과거가 나와야 되는데 딴 사람이에요.
쌍둥이가 DNA 99% 거의 일치되어도 나중에 얼굴 달라지고 다 달라지죠. 환경이 다르면 성질도 모든 게 달라져요. 왜냐? 언니 인생, 내 인생 따로 있어요. DNA는 같더라도 인생이 따로 있어요. 과거가 누적된 게 인생입니다.
주체라 하는 것은 과거가 사건들이 누적된 거다. 사실은 나라는 것은 사건이 뭉쳐진 것인데 사람들은 자기 몸둥아리 있으면 이걸 자기라고 생각해요. 내 몸은 과거에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을 쏟아 부어서 만든 세포의 덩어리거든요. 나라는 게 없어요. 없는데 과거가 만든 하나의 기념물인데 이걸 자꾸 나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 그림 그리면서 이건 빨간 걸로 그렸어요. 여기에 한 바퀴 더 돌아버려요. 그것 하기 전에, 초반에 출생이라 했죠. 그러면 사람이 기억 가운데 출생하기 전에 압니까? 사모님, 출생할 때 풍경이 기억납니까? 안 나죠. 기껏 머리 좋은 사람은 한 세 살, 더 좋은 사람은 두 살. 그러면 출생도 사실은 점선으로. 출생 점선은 뭐로 메우느냐 하면, 아빠 나 태어날 때 밤이냐, 낮이야? 묻겠지요. 물어봐야 실제로는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편집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꾸며서 각본 짜서 집어넣는 거예요. 어쨌든 인간의 한계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 같으면 무슨 역사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이 우리 몸과 있으면 이 몸이 우리 몸이라 하지만 이 몸과 주님의 몸이 같이 있죠. 그럼 바깥의 역사는 뭡니까? 알파와 오메가가 펼쳐지죠. 알파와 오메가는 우리의 출생 날이 아닙니다. 창세전의 우리를 예수 안에서 택했잖아요. 이미 창세전부터 시작하죠.
세례 요한이 예수님한테 뭐라 했습니까?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또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뭘 느꼈습니까? 내가 있기 위해서 나보다 예수님이 먼저 있어야 되고, 앞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되고. 그러니까 모세와 엘리야는 자기 인생이 있어요. 이 땅에서 팔십, 구십 인생이 있지만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있게 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예수님의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요 나중의 계시가 둘러버리죠. 여기까지 이해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믿으라고 하는 것은 뭐냐? 네 인생 네가 잘 착하라고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처음부터 아담에 의해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바깥에 의인되신 주님이 둘러쳐서 예수 안에서 너는 의인이 된다 이 말이죠. 이것 하나로 신구약이 해결 다 돼버렸어요.
그리고 성화론자는 이 역사가 두 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다 말이죠. 나는 아홉 살 때부터 교회 갔어. 나는 모태 신앙. 나는 스무 살 때 교회 갔어. 역사가 뭐냐? 아무리 하나님이 줘서 어디다 끼워 넣습니까? 이거는 건전한 것, 이거는 은혜 받은 것, 이것은 기도해서 값나가는 것 전부다 집어넣으니까
그래서 하나교회 교인들에게 물었어요. 만약에 여러분이 치매 걸린다면, 칠십 다섯 살 때, 그 사람은 구원받습니까, 구원 안 받습니까? 답변을 못 해요. 역사가 두 개라면 치매 걸린 것도 누구의 뜻입니까? 바깥에 있는 주님의 말씀사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치매 걸린 거예요.
‘치매 걸린 자여 다 내게로 오라. 내가 구원하리니.’ 치매 걸렸다고 예수 못 믿는 인간 다 오라.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마태복음 9장의 말씀이 이뤄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치매 걸렸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치매 걸려도 구원받을 자와 구원 안 받을 자를 어떻게 하느냐? 그걸 제가 이렇게 답변했죠. 치매 걸리기 전에 이미 십자가의 복음을 믿은 사람은 치매뿐만 아니고 나중에 십자가가 어디서 온 거예요? 빨간 바깥에 있는 선에서 왔죠.
그렇다면 역사는 내 중심이 아니에요. 내 중심은 기억 중에서 좋은 것만 골라서 반칙으로 나라는 걸 좋은 인간으로 근사하게 만든다 이 말이죠.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생 만났는데 만약에 칼 들고 죽인다고 하면, ‘너 왜 이러냐?’ ‘너 기억 안 나. 오학년 때 욕했잖아.’ ‘기억 안 나.’ 기억 안 날 수밖에. 그런 기억은 편집해서 일방적으로 빼버렸죠. 내게 유리한 것만 골라서 기억하기 때문에 진정한 역사입니까, 역사 아닙니까? 내 중심의 일방적인 편집된 역사죠. 그걸 허구라 합니다. 허구에서 만든 자아는 허상이죠. 그래서 우리는 자아라는 허상을 믿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자아란 허상을 믿고 있는데 내 몸은 거짓말 안 해요. ‘친구야. 오학년 때 싸웠지. 엉덩이에 흉터 있을 거야. 그것 내가 짱돌 던져서 그런 거다.’
우리는 기억하기 싫은데 내 몸은 오히려 우리보다 더 정직해서 우리의 허상에 속아 넘어가지 않죠. 그런데 이 몸이 늙어서 죽는다면, 늙어서 죽는다는 것은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 그러니까 이 몸이 누구 몸입니까? 자꾸 이 몸을 내 몸이라고 우기는데 내 바깥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 비춰보니까 이건 몸입니까? 주님께서 몸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성경 안 보고 말씀을 놓쳐버리면 바깥의 빨간 것이 자꾸 날아가 버리고 뭐만 우깁니까?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고 일방적인 자기 의사만 고집하면서 ‘주님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만날 이런 식으로 항의하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 보는 시간이 이만큼 귀한 겁니다.
지금 여기서 한 가지 이야기 안 했는데 그것마저 이야기할게요. 치매 안 걸렸을 때 십자가 믿었다는 말은, 십자가가 빨간데서 와서 주님의 계시에서 나라는 몸과 마음에다 흔적을 남겼죠.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믿었다. 그러면 십자가가 우리가 만든 사건입니까, 주님이 만든 사건입니까? 주님이 만든 ‘다 이루었다’의 말씀사건이죠. 그러면 빨간 계시 안에는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재림도 들어있죠. 그것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죽는다도 들어있죠. 그럼 우리는 죽어야 돼요, 안 죽어야 돼요? 죽어야 돼.
그러니까 영화 찍을 때 엑스트라 안 죽으면 감독 골치 아픕니다. ‘총 맞고 죽어. 칼 맞고 죽으라고.’ 죽어야 되는데 자기는 살고 싶어서 하필이면 왜 저를 죽이십니까? 시나리오 봐라. 너는 마흔두 살 때 죽게 돼있어요. 빨리 죽어.
성경에서 이걸 이야기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나한테 유익함이라. 그 말 어렵다. 그것도 있고 로마서 14장에 보면,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다. 그게 이제 실감나십니까? 이렇게 테두리를 두 개 해야지 해석이 되는 거예요.
이런 사고방식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마귀가 싫어해서 복음의 광채를 가리기 위해서 말씀과 가까이 하는 모든 경우에 대해서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자꾸 눈 돌리게 만들죠. 눈 돌리면 뭐가 남아 있느냐 하면, 바로 세상과 차이나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사람과 차별 시키려 하는데
우리의 아담의 죄악 된 본성은 ‘그냥 갑시다. 차이는 무슨 차이? 귀찮아 죽겠네. 내비 둬.’ 자꾸 세상 사람과 닮아서 돈만 사랑하고. ‘그쪽으로 가다가 죽어서 천당 갈게요. 예수 믿어줄게요.’ 이런 식으로 자기 역사, 하나의 역사만 고집하는 그런 식으로 가기를 마귀가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도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재림 돼봐야 알지’ 이러면 안 됩니다. 십자가 지신 그분이 성령의 보증금을 줬기 때문에 성령 주신 분이 십자가 믿는 사람은 죽어도 재림 날 무덤 열리고 다시 삽니다. 나팔소리 듣고.
이쪽은 허구니까 이쪽에서 뭐로 빠져나가야 돼요? 우리로 하여금 너는 죽었고 하는 순간에, 이 역사도 사실 죽은 건데, 옛 아담의 몸의 역사, 자꾸 이게 떠올라줘야 우리가 뭐가 됩니까? 착해지지 말라 했지요. 계속 죄인 되는 거예요. 우리가 죄 지어서 죄인 되는 게 아니라 죄인을 물려받은 거예요. 물려받은 것을 언제 반납합니까? 죽을 때 반납하죠. 반납 때가 있어요. 그냥 자살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죽을 때 자기 편하려고 죽으면 안 되고 죽는 것을 통해서도 십자가가 복음이라는 증거하는 용도로 쓰여져야 돼요. 철저하게 주께서 제한하십니다.
우리 머리카락 하나 발끝까지 이게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도 오늘 기르시나니. 들풀이 들으면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우리는 그런 들풀 같은 믿음도 없는 거예요. 내일 차 사고 나서 죽을 인간도 오늘 주께서 은혜 주시나니.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기도할 때 이 기도했잖아요. ‘나는 쓴 잔 받기 싫은데 아버지 뜻이거든 어떻게 하든 그냥 넘어가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예수님 따로 빨간 계시 따로 가게 하옵소서. 하지만 만약에 주의 뜻이거든 이 빨간 계시, 주의 뜻이 나를 덮쳐서 제가 순종하겠나이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는 기도는 하나밖에 없죠. ‘너희가 기도하는 걸 알지 못한다. 내가 준 쓴 잔을 마시라.’ 그걸로 기도 내용이 이미 확정됐습니다. 주님의 쓴 잔을 마시는 그것뿐이에요.
좋은 대학 가려고 하는 게 아니고 주의 쓴 잔을 마셔라. ‘엄마 이 어려운 수학문제 쓴 잔이야.’ ‘그래 쓴 잔이야. 말씀사건이야. 그 쓴 잔을 마셔야 돼. 너희 선배들 쓴 잔 다 마셨어.’
오늘 본문으로 다시 가봅시다. 김성환 목사님께서 밤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보통 로마역사에 보면 낮을 우대하고 밤은 다음 낮에 가는 정도로만 본다. 밤은 별 볼 일 없습니다. 왜냐하면 낮에 누가 활동합니까? 멀쩡히 살아 있는 게 우리잖아요. 낮을 중시한다는 말은 활동 주체인 우리를 스스로 주체로 해서 시간을 그렇게 관점으로 보는 거예요. 밤을 기다리는 사람은 누굽니까? 화류계의 여인들이나 도둑놈, 간첩 그런 사람들이 좋아하겠지요.
그런데 성경에 창세기 1장에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낮이라’ 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의 날은 낮에서 낮이 하루가 아니고 저녁부터 그 다음 저녁까지가 하루로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물론 그 내력이 성경이 있느냐 하는 그 문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맞아요. 유대인이 맞는 생각은 아니잖아요. 유대인 생각이 맞는다면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잖아요. 하여튼 유대인 생각이 그렇다 이 말이에요.
그렇다면 밤, 저녁에서 저녁으로 한다면 저녁을 시작하신 주체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쉽게 말해서 낮에 과수 일을 할 때 누가 돌봐요? 과수주인이 돌보죠. 그러면 밤에는 누가 돌봅니까? 멧돼지가 돌봅니까, 하늘의 별이 돌봐요? 밤에도 식물이 자라도록 하나님이 돌봐주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예속된 입장에서 일한다는 관점에서 보게 되면, 창세기 1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 세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쪽에서 하나님이 중요한 사건을 일으킬 때 밤을 부각시킨다고 보시면 돼요. 인간의 기존적인 사고방식을 뒤엎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부가해서 말씀드릴게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낮이라 했을 때 이것을 첫째 날이라 하고 바로 붙어서 둘째 날 우리 인간은 이렇게 보잖아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고 하나의 날이 지나면 불연속적으로 그 다음 날은 더 높은 층으로 이전해버립니다. 층을 이렇게 높게 책정하는 이유는 아래층에 통하는 성질과 위층의 성질이 연속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뭐든지 연속돼버리면 사건이 들어가나마나 에요. 사건이 들어간 의미가 없어요. 사건이 들어간다면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건 시작점이 새로운 성질을 가져다주는 사건으로서 새로 시작되는 겁니다. 이거는 첫째 날이라면 그 다음 둘째 날 되고.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같으면 하나님 며칠 만에 천지창조 했어요? 하루. 육일 아니었습니까? 육일 다 모아서 하루야. 이렇게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육일이라고 했다고요. 그 육일이라고 한 이유는 텀의 의미를 두기 위해서. 저녁과 아침이 되는 하나의 자체에서 완결되고, 그 다음에 저녁과 아침은 또 하나의 완결로서 서로 각기 다른 질을 갖고 있듯이 육일 다음에 마지막 칠일 째는 기존의 질과 또 다른 이걸 안식일이라. 그래서 마지막 일곱 째 날이 안식일이죠. 물론 김성환 목사님은 이야기 안 했지만 더 나가보면 이렇게 돼요.
안식은 안식일을 위하여 안식일에 완성됨, 안식일의 뜻이 뭡니까? 쉬는 거잖아요. 완성이잖아. 다 했다. ‘작업 끝’하고 쉬는 거예요. 쉰다는 말은 다 이루었다는 뜻이에요. 결국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께서 이미 다 이루었음을 절대로 손해 본다고 본 적이 없어요. 처음부터 다 이루었어요. 그 점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하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뭘 다 이뤄? 다 이루었으면 선악과 그런 것도 없고 그 다음 심판도 없어야지. 다 이루었다면 완전한테 미완성처럼 일을 하셔? 미완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직 안식이 다 안 됐다는 뜻이 아니냐고 하는데
그래서 제가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나누는 겁니다. 선악과를 인간이 손댔잖아요. 손상 받지요. 그런데 얼른 하나님의 조치가 뭡니까? 선악과를 다시 심는 게 아니고,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구분해서 그걸 피신시킴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구분시키고, 구분을 거룩. 그러면 질적으로 생명나무만 적용되는 질이 따로 있을 것이고, 선악과의 질이 취소되지 않고 그대로 있어야 되죠. 선악과 따먹었다는 것.
선악과는 없어요. 왜? 선악과를 따먹은 손상된 선악과만 있지요. 그리고 선악과 따먹으면 죽음이 오죠. 그러니까 따로 빼돌림으로 말미암아 생명은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의 질이 없는 나머지 모든 것은 뭐가 됩니까? 선약과 따먹으면 죽으리라 하니까 이건 죽음의 세계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요. 하나님의 관심은 생명나무의 생명 됨과 우리의 죽음 됨을 구별하기 위해서 적절한 피조물이 이 땅에 출몰할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선악과 따먹을 때 몇 명이 따먹었습니까? 달랑 두 명이에요. 가인이 안 따먹었어요. 아벨이 안 따먹었어요. 그런데 따먹은 두 사람한테 뭐가 생산되게 합니까? 자식이 계속 나오죠. 그 자식과 그 부모 사이에 불연속성이 아니고 연속성이었어요. 그 연속되는 관계를 형상이라 합니다. 아담의 형상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땅에 떨어질 때 우리가 느껴지는 겁니다. 말이 좀 어렵습니다만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친구들 시집가서 애가 있으니까 노처녀가 하는 말이, ‘너는 처녀 때 주님 말씀만 생각하더니 교회와도 애 피아노 이야기만 하고 애만 챙기고 목사님 말씀 좀 들어라.’ 그러니까 친구가 ‘너도 애 낳아봐라. 교회고 뭐고 지 새끼 자랑하기 바쁠 거야.’ ‘설마 믿음 없는 자나 그렇지.’ 했는데 그 노처녀가 오십 되어서 남자 만나서 결혼해서 애 낳았다 합시다. 좋아서 애 감기 들면 교회 안 나와요. 애 위주지 주님 위주가 아니에요. 교회 위주가 아닙니다. 오직 자기 애 위주에요.
그러면 그 처녀가 신앙이 없어서 그래요? 열심이 없어서 그래요? ‘믿음 좋으면 그런 짓 안 하지’ 하는 것은 자아에 해당되죠. 그런데 자아는 허상이죠. 자아를 배태하는 것은 인간의 몸이잖아요. 아까 뭐라 했습니까? 자아는 속일 수 있어도 몸은 속일 수 없어요. 자식 사랑은 자아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몸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아빠는 자식이 별 관심이 없지만 엄마는 ‘관심 안 둔다. 니 마음대로 살아라’ 하지만 답답한 것은 엄마가 답답해요. 아빠가 호적 파서 나가라 하지만 엄마는 호적 파서 나간 애들 뒷돈 다 대줍니다. ‘밥은 먹었나? 요새 잠자리 편하나? 아빠한테 이야기하지 마래이.’
왜 그렇습니까? 이거는 자아문제가 아니고 어미와 자식 간의 몸의 문제에요. 몸의 확장입니다. DNA확장이에요. 이거는 동물들 새끼한테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왜? 선악과의 죽음을 나는 그때로 끝맺은 적이 없다. 언제까지? 세상 멸망할 때까지.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죽음이라는 이 사실, 따먹지 말아야 될, 알지 말아야 될 지식을 알았다는 이 사실을 주님은 끝까지 가는데 그것은 바로 생명을 생명 되게 하고, 죽음을 죽음 되게 하는 하나님 본래의 창조 완성을 피조물 통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관리자(IP:124.♡.86.6)
10-05-15 13:12
울산100507b출12장b
20100507b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아까 네 가지 중에서 ‘밤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낮은 누구 중심입니까? 인간 중심인데 진짜 중요한 것은 낮이 아니야. 밤이 중요하고 밤에서 틈새에서 올라오면 이 주체는 하나님이죠. 결국 하나님은 인간을 치기 위해서 밤중에 오죠.
오게 되면 인간이 중심이었던 여기서 어떤 질이 있는데 이 질은 부정당하고 저녁 때 일어나는 새로운 사건에 의해서 새롭게 균질화, 균질화라는 것은 평평하게 되는 것, 밤 때문에 세상이 달라졌다. 세상이 달라진 그 질이 앞으로 모든 질을 지배하는 새로운 성질로서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 밤에 하나님께서 오십니다. 잘 때 몰래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고. 밤을 지배하는 분에 의해서 정복당하게 돼있어요. 그리고 그 둘 사이는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지겠죠. 첫 번째 밤의 의미고.
그래서 이것이 신약까지 이어지면 에베소서의 너희는 빛의 자녀라고 주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통해서 나와 버리면 졸지에 십자가 안 믿는 사람은 당연히 어둠의 자녀에요. 항상 대결구조에요. 비교되고 대결구조 되고. 그래서 아까 출애굽기 11장 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분한다. 이거는 계속해서 가는 겁니다.
구별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약에 의해서 언약백성으로 등장해야 되고, 애굽 사람은 비 언약,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없는, 결국은 이스라엘과 애굽을 비교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 없는 사람들 앞에서 때로는 고립되고, 때로는 전쟁을 일으켜가는 것이 앞으로 남은 인류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구약에는 옛날 언약, 신약은 새로운 언약이 가미되어서 요한계시록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 옆에 자기 역사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옆에 자기 역사도 있고 몸이 있으니까. 아까 했지요. 자아는 허구고 몸이 실제라고. 그 몸은 사실은 우리 몸이 아니고 자아 몸이 아니고 창세전에 주께서 택해서 쓰실 몸이기 때문에 새로운 예수님의 계시가 있죠. 새로운 예수님의 계시는 알파요 오메가니까 이게 바로 언약입니다.
우리가 언약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언약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믿는 믿음은 행함이 돼버리고 선물로 준 믿음은 진짜 믿음이 돼버리고.
이걸 글로 쓰면, 내가 예수 믿으면 구원이 안 되고,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믿는 그것이 믿음이죠. 말장난 같이 들리죠. 내가 예수 믿으면 믿음이 아니고 내가 예수를 믿으면 그 믿음은 믿음이 되는 거예요. 주께서 믿게 하신 것은 믿음이고, 내가 믿는 예수는 행함이고 그렇습니다.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라고 해서 믿음조차도 내 행함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은 걸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잠자다 일어나서 깨어라. 빛의 자녀야. 빛에 네게 임한다. 그 말은 우리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어둠으로부터 우리를 빛으로 고립시켰어요. 그런데 어둠이 왜 빛으로 오지 않을까요? 요한복음 3장에 나오죠. 어둠이 어둠으로 드러날까 싶어서.
그런데 왜 우리는 빛으로 오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우리가 빛으로 왔습니다.’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자진해서 알아서 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행하심이 있기에 우리는 어둠에 있지 않고 이제는 빛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구약의 출애굽기 11장을 근거로 해서 연장돼있는 맥락이다. 거기서 쏟아진 거예요.
태양이 있는데 빛이 사방으로 나오겠죠. 태양에서 한 5미터 떨어져 보세요. 빛이 나올 때 이 빛을 빛1, 이 빛을 빛2라 합시다. 5미터 지점에서 빛1과 빛2의 간격이 좁겠어요, 넓겠어요? 좁겠지요. 그럼 멀리 떨어져봅시다. 태양이 빛이 계속 나오죠. 이 각도가 유지되어 나오니까 여기는 5미터라 했지요. 이쯤 떨어지면 500미터 될 수도 있죠. 그런데 똑같은 빛이 가면 갈수록 500미터 된다 이 말이죠.
교인들 처음에는 복음 좋아하고 복음 사랑하는 같지만 세월 지나면 나중에는 간격이 점점 멀어져서 서로 소통이 안 돼요.
구약에서 출발할 때 다같이 이스라엘인데 나중에 이스라엘 중에서 누가 구원받습니까? 은혜로 남은 자만 구원받는 거예요. 이것이 신약성경에 내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얻으리라 한 겁니다. 이 간격이 벌어지다 보니까 바리새인들이 누굴 죽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려요. 메시아 아닌 줄 알고.
빛이라 하는 것은 직진하기 때문에, 제가 어느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죠. 본 게 있는 사람은 양보가 없다 했어요. 어떤 차 사고를 목격했으면 입 다물라고 아무리 수표를 내밀어도 자기가 분명히 재벌 차가 오토바이를 쳐서 사람 죽게 한 걸 혼자 목격했다면 돈을 억만금 줘도 양보를 안 하죠. 법정에서. 저 같으면 돈은 돈대로 받고. 양심이 합니다. ‘그때 분명히 삼성 재벌 차가 치었습니다.’ 돈은 돈대로 받고. 괜히 돈을 왜 안 받아.
진짜 믿는 사람들은 노회를 가도 시찰회 가도 어느 목사 앞에 가도 본 게 있는 사람은 양보가 없습니다. 진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거는 십자가 피로 구원받은 것을 이혼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양보할 게 따로 있지 양보 못하죠.
요한복음 마지막에 사도가 목격자입니다. 얼마나 짜릿합니까. 부활의 목격자에요. 사도 바울이 양보가 있을 수 없어요. 사십에 한 대 감한 매를 다섯 번씩 맞아도 때린다고 해서 본 걸 취소가 안 되거든요. 엉덩이는 맞고 외칠 것은 외치고. 때린다고 딴 소리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가 조작했으면 딴 소리 나오겠죠. 그래서 성도는 맞아봐야 돼요. 맞아봐야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는 거지.
자기가 다메섹에서 주님을 봤는데 주님이 지금 부활해 있는데 살아있는 주님을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뭘 부인해요. 지금 살아계셔서 자기가 예수 안에 있는데. 죄인은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모든 게 확실하고 구름타고 오실 게 확실한데 어떻게 양보합니까? 안 되지요.
목사의 임무란 다른 게 아닙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면 돼요. 단 조건이 있어요. 십자가 복음 안에서만 영광 돼요. 다른 복음은 없으니까. 다른 복음은 저주받으니까. 다른 복음 전해서 저주받으면 안 되잖아요. 참된 복음 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실제로 현대인은 자기 자신만을 잘 되기 위해서 하죠. 이런 사람들에게 몸은 하나님 것이고 다만 섬길 때 복음 안에서 섬겨야 당신은 죄인이고 죄인을 용서하신 그 용서를 바탕으로 주님께 영광이 된다고 십자가 복음을 외쳐야 될 것이 목사뿐만 아니고 모든 성도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이 없으면 세상이 무서운 공포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명도 성령이 있어야 되는데, 아까 첫 번째 밤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밤은 인간 주체에서 하나님 주체. 두 번째가 죽음을 아는 자가 산 자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런 편평한 평지에 구멍이 뚫려서 푹 꺼졌어요. 블랙홀이 되어서 고립되듯이 이스라엘이 모여 있습니다. 바깥쪽은 애굽이고. 이런 식으로 구분했어요.
밤에 사건이 벌어지면서 푹 꺼진 사람만이 뭘 아느냐 하면, 여기 출애굽기 11장 5절 봅시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왜 죽입니까? 하나님이니까 죽인다는 말이 안 돼요. 하나님이 살려줄 때는 언제고 이날 밤에 왜 죽입니까? 답변해 보시라고 얼마나 하나님께 항의하겠어요.
오늘날 교인들이 죽이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죽음을 아는 자가 산 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는 이유도 모르고 죽어가고 있어요. 평생을 살아도 왜 죽는지 모르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별된 사람, 성도만이 앞당겨서 ‘죽어 마땅하네.’라는 이유를 알게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조치라는 걸 아는 겁니다.
아까 질문한 것에 포함돼 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는 사건을 과거의 일회성으로 끝내는 게 아니고 마지막까지 다 끌고 가버리죠. 그렇게 되면 계속해서 인간들은 선악과 따먹은 그놈의 자식들이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죽음을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죽으리라는 것을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이어져가는 것입니다. 그 원칙을.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생명나무의 생명이 진짜 생명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음과 대비시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있는 후손들은 이유도 모르는 채, 왜 죽는지 모르는 채 태어났으면 태어난 자리가 부모의 죄 된 몸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계속 죽어줘야 돼요.
그리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죽어줘야 됩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죽는 자리에서 갑자기 안 죽고, 죽음의 칼날이 지나갔는데 푹 꺼졌으니까 그들만은 살았잖아요. 이 구멍을 뛰었다 이 말이죠. 사실은 안 뛰면 구멍까지 따라오겠지만. 여기에 뭘 발랐습니까? 피를 발랐다는 말은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살한 게 아니고 누가 죽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의 장자를 하나님의 장자가 말씀 안에서 우리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장자 되신 우리와 함께 살았던, 출애굽기 12장에 우리와 함께 14일 동안 살았던 간직했던 어린양을 우리 자녀 대신 내놓아서 이 장자의 죽음이 곧 우리의 맏이의 죽음이라고 해서 피를 바른 거예요. ‘오지 마세요. 우리 애 죽었습니데이.’ 우리는 이미 세금 냈습니다와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 애가 이미 죽었다는 걸 대신해서 어린양 피를 발랐다는 게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이게 하나님 아이디어에요. 결국은 이스라엘은 애굽과 구별되는데 어떤 구별이냐 하면, 애굽은 모든 일처리를 자기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반면에 여기 블랙홀에 빠진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나설 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고 그대로 약속 앞장 세워서 하나님께 나서게 되는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 바칠 때 드러났죠. 줄 땐 언제고 바치라 하느냐? 따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하나님이 이삭을 줄 때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이라는 끈에 붙어 있는 파리로 봐서 이삭이라는 끈을 보내서 부모 된 아브라함과 사라가 걸려들어서 이삭을 살림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붙어있는 아브라함과 사라도 같이 덩달아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러한 원리를 구별된다, 다른 말로 ‘거룩’이라 했죠. 그 거룩의 제도가 할례제도입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 받은 사람이 최초로 이삭입니다. 이삭을 다른 혈통과 모든 선악과에 대한 불통을 고추 끝을 자름으로 말미암아 이삭은 혈통의 내림으로 계속 흘러넘침으로 오는 계통이 아니고 새로운 계통, 약속의 계통이라 해서 육에 속한 노선과 약속에 속한 노선이라고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두 노선으로 잡고 각자 언약을 배정을 해버립니다. 한쪽은 율법의 저주를 받아야 될 노선과 한쪽은 약속에 의해서 용서받을 노선을 배정해버립니다. 그전에 구약에 이미 두 개 노선이 나란히 나타나고.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어린양이 대기하고 있다가 시킨 대로 하라. 뭐요? 어린양 잡아라. 식구 같은 어린양을 잡아서 문지방에 발라라. 그리고 어린양은 죽여서 고기를 불에 태워 먹어라. 이미 고기를 나눠먹는다는 말은 어린양의 죽음에 나머지 식구들은 다 동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죽음에 온통, 하나님의 심판이 왔을 때 어디를 피난처로 삼느냐 하면, 어린양이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안에 새끼들이 있는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새로운 질적인 시간이 전개될 거야.’ 그렇게 있으니까 지나간 거예요. ‘다 됐습니까?’ 하고 들어보니까 다 된 거예요.
그러면 안 믿는 울산 시민이나 아저씨는 뭐 합니까? 수구리. ‘미쳤나. 뭐 합니까, 지금.’ ‘어린양 밑에 있어요.’ ‘웃기네. 희한한 종교를 다 믿네.’ 이렇게 되죠. 왜 희한하냐 하면 특이성이니까.
제가 하나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이랬거든요. 어떤 신학생이 질문했어요. 질문 잘 들어보세요. 질문 내용이 이렇습니다. ‘열 명의 목사가 다 다른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어느 목사 말 들어야합니까?’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 보면, 성령이 너희를 가르치리니 성령이 오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 없고 성령이 직접 가르치리니 성령한테 배우시면 됩니다. 따라서 열 명의 목사 가운데 마음에 드는 목사가 있다면 그 사람도 성령 받았고 나도 성령 받았다고 간주하세요.
그러면 이러한 생각을 모든 신학생이 할 때 그중에 어느 것이 진짜 성령 받은 것이고, 어느 것이 가짜로 성령 받지도 않으면서 마음에 든다고 성령 받았다고 일방적으로 단정 짓는 것하고 어떻게 구별됩니까? 그것은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게 딱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서 도저히 알아낼 수 없고, 오직 인간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보이는 거예요.
이거는 성령이 아니면 그 깊은 하나님의 마음을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신학이고 박사고 뭐고 다 치우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내가 병신이든 바보든 치매 걸리든 관계없이 예수님의 피가 나를 구원한다고 예수님의 피의 주체권을 넘어가면 이것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성령 받은 사람이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목사도 당신과 동일하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걸 가르치거든 절대로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간주하세요. 알아서 하세요. 그 수밖에 없지요.
이 말은 결국 내 안에 마지막 남아있는 키포인트는 내가 해내는가, 아니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간직하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교회사랑, 부흥하는 것, 병 고치는 것 다 인간이 할 수 있거든요. 왜냐하면 내가 했다고 나오니까. 하지만 십자가 믿는 사람은 만났다 하면 자기가 안 했대. 자기가 못한대. 오직 주께서 하셨다고만 고백할 때 그게 진정한 교회, 진정한 그리스도 몸이 되는 겁니다.
죽음이 죽음답게 지나가도록 죽음에서 피한 사람은 임무가 있어요. 어린양 피 때문에 피한 사람은 살았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나는 진정 죽음을 보았다.’ 이걸 증거하는 거예요. 나는 이 세상이 산 자의 세상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한 세상인 것을 드디어 알았다고 증거하죠. 그럼 너는? 우리는 어린양 때문에 살았노라. 덮었노라. 살았노라. 이제는 외치노라.
어린양으로 덮었노라. 나는 죽음을 알았노라. 드디어 이제는 외치노라. 하나님의 약속은 어린양 피였다는 사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피 언약이 우리를 살린다. 요한복음엔 피와 살로 돼있죠. 히브리서는 살도 날아가고 없어요. 피. 피가 우리를 살린다. 결국 우리는 그때부터 피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똑같은 세 끼 먹고 똑같이 키가 170 되도 산 자고, 피가 안 나오는 사람은 천하의 신학박사고 목사가 되도 그 사람은 죽음을 뭔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모르는 자의 특징이 자꾸 살려고 해요. 목사 질해서 살려고 해요. 그런데 복음을 아는 사람은 목사 질해서 죽으려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주 기뻐요. 이 몸이 죽는다는 사실, 내 말한 대로 이 몸이 죽어야 될 몸인 것을 내가 죽을 때 비로소 밝혀지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죠. 이 몸을 벗어버리고 그 날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그래서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죠. 사람을 친구 삼지 말고 죽음을 나의 동반자, 동행자로 삼아서 늘 죽음하고 이야기하고 ‘언제 죽이는데?’ 늘 죽음과 동반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현재 있는 모든 자식이나 남편, 아내 모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되고 감사하게 되죠. ‘이놈의 자식, 아직 살아있구나. 잠자는 것 봐라. 하나님이 살려주는구나.’
심장은 우리가 낮에 심장 관리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밤에 심장 관리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하시잖아요. 그러니까 밤이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불가능할 그 시점에 진정 주도권자가 우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증거해야 되고 부각해야 합니다. 두 번째 죽음은 됐지요.
세 번째, 누구를 죽이는가 하고 누가 죽이시는가? 누구를 죽입니까? 장자를 죽입니다. 왜 장자를 죽입니까? 해답을 미리 알려드릴게요. 장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장자가 따로 계시기 때문에 장자를 죽이는 겁니다. ‘목사님. 이스라엘 장자는 살았잖아요.’ 이스라엘 장자는 더 이상 그 집의 장자 아닙니다. 그거는 하늘의 장자한테 노예로 팔려가요. 어쨌든 간에 유월절 끝나고 난 뒤에는 애굽이든 이스라엘이든 장자를 일체 없습니다. 살아있는 장자는 하나님께 바쳐야 되고 죽은 놈은 죽은 놈이고.
유월절 사건 다시 말해서 십자가 사건은 이 땅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장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요, 유월절 사건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여 내 기뻐하는 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한 명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약상대자로서 하늘에서 따로 내려와서 지상에서 어떤 일을 경유해야 그분이 유일하게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계약관계에 있는 성자 하나님밖에는 다른 사람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짜로 얻어먹는 주제입니다.
이렇게 장자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유월절 끝나고 난 뒤에는 바로 하나님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살아있는 장자를 매개로 해서 하나님께 나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죽어야 될 장자가 살았다는 말은 누구 때문에 살았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 때문에 살았으니까 하나님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 없이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나지 않습니다.
‘그게 진짜입니까?’ 물으면, 유월절 지나고 우리 애 살아있는 걸 봐라. 살아있는 게 아침에 밥 먹어서 살아있는 게 아니야. 하나님의 심판이 넘어가서 살아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장자가 살아있는 걸 보면 볼수록 뭐가 기억나야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