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100402빌3장10절 참된 사람이란(왜 죽어야만 하는가?)
서울100402빌3장10절 참된 사람이란(왜 죽어야만 하는가?)
이름 : 김창길(IP:222.112.87.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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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사람이란(왜 죽어야만 하는가?)"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기 위한 그의 죽음을 본받음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 이런 이야기하는 사람 이름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란 사람이죠. 방금 읽었던 빌립보서 3장10절의 이야기했던 사람이 사도바울 인데 이 사도바울이 사람입니까? 사람 아닙니까? 사람이죠. 둘 중에 하나일 텐데,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처럼 고백 못 하는 사람은 사람입니까? 사람 아닙니까? 사람이 아니죠. 사도바울 같은 고백이 안 나오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가 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사도바울처럼 고백하지 않은 사람은 사람 아니다.’라고 하니까 이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항의를 하게 되죠. 화를 내게 되죠. ‘왜, 우리가 사람인데 사람 아니라 하느냐!’ 화를 내게 되죠.
오늘 읽었던 본문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한다 할 때 사도바울이 사람이라 할 때는 어떤 조건이 있느냐 하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형체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주변에 힘에 의해서 둘렸어야 돼요. 그 힘이 뭐냐 하면 부활의 권능이고 부활될 수 있을 때 사람이고 부활되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죽음으로 가야됩니다.
우리교회에 장로님이 계시는데 작년에 이사를 했어요. 이사한 아파트 모습이 이렇습니다. 여기 앞에 보면 300미터 이상 되는 산이 있는데 산책하기에 좋습니다. 여기에 고속도로가 나와 있습니다. 고속도로가 나 있는데 만약에 여기 아파트에서 바로 고속도로 담 타넘고 중앙분리대 타 넘고 하면 죽지요. 죽어버린다고요. 여기 산에 가고 싶은데 산에 사람들이 와서 뭐라 하냐 하면 ‘야-호’ 하고 있습니다. 여기 장로님께서 자기도 산에 올라가서 야호하고 싶어서 ‘어, 기다려 나도 곧 올라가서 야호 할게.’하면 고속도로에서 중앙분리대 때문에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아파트에서 어떻게 했냐 하면 밑에 통로를 파놨어요. 누구든지 아파트주민들은 고속도로를 건너지 말고 밑에 통로를 파면 산 밑자락이 되는 겁니다.
참된 인간이란 사도바울이 부활의 권능에 참여 하기 위해서 ‘나도 살고 싶어.’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고속도로 여기 밑을 파서 와야 여기가 부활의 권능이 되는 거예요. 여기 밑을 파는 것이 바로 십자가 인데 십자가에 참여해서 부활의 세계에 도착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이 십자가 판은 자기가 삽 들고 팠습니까? 아니죠. 여기 십자가 가는 길은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라 누구 이야기였습니까? 예수님 이야기였죠. 그러면 예수님 말고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길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 말고 생명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 말고 진리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유일하게 진리이고 유일하게 생명이고 유일하게 길인분이 십자가를 통과해서 이 산에서 ‘야호’라고 외쳤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너희들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지만 그때는 우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나의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 예수님만이 알고 있던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님의 가는 길을 가야만 그 하나님의 아버지에게 도달될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과 하지 않고는 부활에 들어 갈 수 없고 십자가에 통과 할 사람은 사도바울처럼 참된 사람일 경우에만 십자가에 들어가고 참된 사람일 경우에만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참된 사람 된 것은 십자가와 부활에 둘려 싸여서 참된 사람 되었으니까 사도바울도 사실은 참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때문에 그것을 받쳐주니까 사도바울이 참된 사람이 된 거예요.
사도바울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처럼 고백을 못한 사람은 사람이 아니에요. 여기에서 두 가지가 있는데 사람을 묘사할 때 사람을 규정할 때 복음으로 사람 있느냐 묻는 것과 법으로 사람 있느냐 라고 물을 때 복음으로 사람여기 있습니까? 하면 여기는 한 명도 없습니다. 사람 같은 사람 없어요. 그런데 법으로 사람 있냐고 하면 전부 다 ‘예, 예 나, 법 잘 알아요.’ 법을 잘 안데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법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법적으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 오다 보니 길에 간판에 진리치과가 있었어요. 혹시 봤습니까? 여러분, 진리치과가 말이 됩니까? 치과에서 이빨 치료하는 것과 진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진리라는 것이 이 땅에 없어서 주님이 내가 진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진리로 치료를 한다고 되어있지요. 이 자체가 말이 안 돼요. 진리라고 하는 것은 누구한테만 붙느냐 하면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진리라는 것도 예수님에게만 해당되고 생명도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십자가에 죽는다고 해서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죽을 것을 그냥 죽는 거예요. 서해안에 46명 죽었는데 그 사람들은 죽을 사람이 죽은 겁니다. 안 죽을 사람이 죽은 게 아니죠. 그 유족들이 들으면 기겁할 겁니다. ‘네 새끼 죽여 봐라!’ 하고 이렇게 나올 거예요. 안 죽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물에 빠뜨리면 책임을 하나님이 지어야 하는데 어차피 죽을 인간을 물에 빠져 죽인 거예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죽으면서 살려 달라고 할 것이 아니고 내가 왜 죽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물에 빠져가는 가판위에 달려 산사람이 있어요. 뱃머리에 매달렸을 때에 ‘살려주세요! 해경아저씨!’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왜 저는 죽어야만 되는 존재입니까?’ 이렇게 물어야 돼요. 그런데 다급한 병사가 편지 쓴 것 보니까 ‘하나님 살려주세요.’ 라고 쓴 거예요. 무슨 권리로 살려달라고 합니까? 하나님 언제 봤다고?
복음으로 봐서 정답은 사람 없습니다. 사람 자체는 없어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복음으로 봐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내 아들이요, 내기뻐하는 자다. 이 세상에서 사람 같은 사람은 단 한 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을 때는 ‘아, 나는 사람 아니구나, 나는 진작 죽어 없어 져야 되는 구나’ 사람 없습니다.
옛날에 목사님이 젊었을 때 유행했던 노래가 있었어요. 한대수의 ‘물 좀 주소’ 뒤에 나온 노래 중에 ‘빈 의자’라는 노래가 있었어요. 두 노래의 가사를 조립해 보면 의자는 있는데 앉을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누구 없소?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난 다음에 ‘사람 없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있는데 우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이 사람 좀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있는 사람 구출하는 게 아니고 아예 없는 사람을 만들어 내요. 무엇으로 만들어 내는가 하면 예수님이 원판이 되어서 예수님에게 나오는 영혼, 예수님이 나오는 그 육체, 예수님의 그 마음, 그 성질을 통해서 사람 없는 데서 사람을 새로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기존에 법적인 사람은 폐기처분해 버립니다.
어떤 병사가 지금 물에 빠지는 데 “하나님, 제가 왜 저는 죽습니까? 하나님 누구십니까?” 그런 것 물을 시간이 없죠. 목 터지라고 마지막 ‘help me' ‘살려 주세요’ 라고 누구나 이야기 했을 거예요. 사람이 아무리 신앙이고 믿음이고 사랑이라고 하지만 누구나 다급하면 자기 밖에 몰라요. 살려달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저 사람 맞잖아요.’ 하나님은 ‘아닌데 아무리 봐도 아닌데’ ‘저 사람 맞잖아요. 사람이니까 하나님이 저를 만들었으니까 살려줘야죠.’ ‘아닌데 너 사람 아니야’
법적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선악적으로 사람 있느냐 라고 물을 때 사람들은 전부 다 ‘제가 사람입니다.’ 라고 합니다. 왜냐 하면 선악을 알고 있으면 사람으로 쳐 줄 테니까 하면 ‘제가 선악에 대해서 잘 압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법으로 사람 규정하는 것을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복음으로 사람 바꾸는 작업을 위해서 인간에게 무엇을 주느냐, 율법을 주었어요. 이방인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양심을 주고 율법을 줘서 양심껏 사람 되려 하고 법적으로 죄는 멀리하고 선은 가까이 해서 사람 되려고 애쓰는 것, 그것을 실컷 하게 해요. 동양철학 같은 경우에 맹자, 노자, 논어 같은 것 보게 되면 인간이 짐승이 아니라면 부모에게 효도 하라고 해요. 우리 부모님들 그 소리 들으면 은혜 받습니다.
동물도 자기 새끼라도 엄마 공경 할 줄 알고 또 동물의 어버이도 자기 새끼 귀할 줄 아는 데, 어떻게 시집와서 자기 새끼 놔두고 도망가나 하는 옛날이야기가 많아요. 말을 함부로 못하겠네. 해당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ㅎㅎ) 어떻게 짐승보다 못하냐! 할 때는 항상 인간이라는 것이 뭐냐?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를 해야 인간이라는 거예요. 연예계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가 인기 좀 있다고 의시되지 말고 인간이 먼저 되라!’ 하지요. 인간되고 인기 없어서 도태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여기도 하나 있죠. 인간은 됐는데 인기 없어서 그만둔 사람 한두 명이 아닙니다. 인간된다고 인기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네가 인간이 돼야지’ 그래서 사람들은 ‘나는 교회는 안가고 예수는 안 믿지만 난 교회 가는 사람보다 절에 가는 사람보다 난 더 바르게 살았고 누구에게도 해로운 소리 안하고 삼강오륜에 충실하며 어느 집보다 반듯 하게 착하게 살아가니까 나는 죽어도 좋은데 갈 자신 있다. 자신 만만하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오니까 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맞습니다. 그렇게 양심이 고운데 하나님이 버릴 리가 없습니다.’ 그 양심에 예수 믿는 착한 일까지 더 보태어 지면 금상첨화입니다. 이래서 떼로 유교신자 불교신자를 기독교신자로 바꿔 놓으니까 문제가 교회 다니고 지옥가고, 예수 믿는 다고 우기면서 지옥가고 하는 희한한 현상이 벌어진 겁니다. 성경을 모르는 거예요. 성경을 봤다 하면 무조건 여기에 쳐 바르기에 바빠요. 착한데다가 뭘 쳐 바르느냐 하면 너는 십자가 고난에 동참해서 부활에 이른다 하니까 이것을 지키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받습니다. 이제 부활에 이르렀죠?’ 하여튼 성경보기만 하면 자기에게 쳐 바르기에 애를 써요.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하니까 양심은 곱지, 마음씨는 착하지 그러니까 두렵고 떨림을 가지고 여기에 또 쳐 되는 거예요. 안에 인간도 없으면서 말씀을 선악적인 방법으로 모든 것을 율법적으로 쳐 되니까 그거 구원받습니까? 사람 됩니까? 베드로가 예수 믿고 사람 되려고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받치려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말렸습니다. ‘베드로야!’ 경상도 말로 ‘니 와이카노? 니가 미쳤구나! 니 와이카노? 니 주제를 모르나’ ‘주의 제자입니다. 제가 보디가드 해 드리겠습니다.’ 칼을 빼들고 ‘누구야! 우리 예수님을 해치는 자가’ 남의 멀쩡한 귀를 베고 하면서 하니까 주님께서 안됐다는 듯이 ‘베드로야 칼 접어라 꽂아 넣어라 객기부리지 말고 니는 니 자신을 몰라’ ‘제가 지키겠습니다. 제가 수제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 만들기 하지 맙시다. 구원받는 인간 만들기는 우리 주님이 하시도록 좀 놔두세요! 우리가 우리자신을 사람 만들지 마세요! 사람 만들수록 주님이 만드시는 그 모든 공로와 그 모든 작업이 무시당하고 다 가려집니다. 소용없어요.
선악을 아는 사람은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찾아내서 ‘너는 사람 아니다.’ ‘사람 아니면 뭐예요?’ “흙이다. 너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라!’ 해서 이름이 아담입니다. ‘너는 기껏 해 봐야 흙이다.’ 여러분, 흙이 사람 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주물러 줘야 되요. 그러니까 흙이 흙을 다듬어서 사람 되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 손에 흙만 묻어요. 흙에서 사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창조하신 그때 창조주께서 다시 창조의 능력을 발휘해 줘야 흙이 그 다음부터는 사람 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가 사람 되지 말고 그냥 짐승으로 삽시다.
오늘 이런 말하려고 이날을 기다렸습니다.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를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어요. 우리 짐승 됩시다! 짐승 되고 사람 되지 맙시다. 괜히 사람 되려고 애쓰면 주께서 주신 사람하고 충돌을 일으켜요. ‘괜히 사람 됐어~ 괜히 사람 됐어~’‘ 뿅~’ ‘이단’ (ㅎㅎ)
율법을 주니까 인간들은 ‘야 이것은 이해된다.’ 해서 법으로 ‘시키라! 하라!’ 하는 것은 이해되고 ‘하지 마라!’ 하면 이것은 이해 되서 하라 하지 마라를 열심히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라, 하지 마라를 계속하면 할수록 점점 더 무엇과 멀어지냐 하면 점점 더 저주와 가까워요. ‘아, 이래서 저주받는 구나’ 점점 더 저주를 유발하는 존재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그런 소리 다 치우고 아 진짜 사람을 어떻게 만듭니까? 우리는 그게 듣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죠. 그것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세례요한 태어날 때 누가 와서 세례요한 이름을 지어졌죠?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요한의 탄생과 이름까지 다 지어줬다면 적어도 세례요한은 훌륭한 사람, 죽을 때도 위대하게 죽어야 하는데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처참하게 죽었죠. 여러분, 앞뒤가 매치가 됩니까? 우리집사님 애기가 태어날 때 혹시 가브리엘 천사가 온 적 있습니까? 천만다행입니다. 만약에 왔다 하면 물에 서해안에 빠져 죽을 수도 있었어요. 사람들은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탄생될 때 별들이 동원되었죠. 동방박사 동원됐죠. 별이 와서 예루살렘에서 멈추고 다시 떴다 했는데.......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가요? 별의 진행과정이 아기 예수님의 진행과정 동일하거든요. 예루살렘 와서 별이 없어 졌죠. 그리고 예루살렘 지나가니까 다시 별이 나타나잖아요. 외부에서 와서 예루살렘이란 곳을 거치면서 별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는 것, 이처럼 동방박사가 와서 경배하고 천사가 와서 하늘에서 찬양소리를 듣게 하는 것, 이정도로 하나님께서 출생에 대해서 축하를 해줬으면 시작이 그렇게 화려했으면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미약하다. 죽을 때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여러분, 그게 매치가 됩니까? 생일잔치 멋들어지게 했는데 실 잡을래? 책잡을래? 돈 잡을래? 부모들이 세 가지 놓죠. 왜 부모들은 돌잔치 할 때 옆에 십자가를 놓지 않습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잡으면 부활에 이르는데 실 잡아서 지옥가고 돈 잡아서 지옥가고 책잡아서 지옥 가는 겁니다. 제가 돌잔치 설교를 몇 번 해 봤는데 십자가 옆에 놓고 애가 어느 것 짚는가 보면 만약에 애가 철이 없어 십자가 잡는다 하면 부모가 말릴 거예요. ‘얘가 믿쳤나, 십자가 길을 왜가 고난의 길을 왜 가는데’ 이것이 빌립보서 2장 10절의 말씀입니다.
어찌하던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느 길을 잡아야 된다? 십자가의 고난을 봐야 어디 간다? 부활의 세계에 가는 거예요. 아까 장로님 집 봤죠. 야호 하려면 어디가야 해요? 고속도로로 가면 안 됩니다. 보이는 데 가면 안 돼요. 보이는 것은 허상입니다. 허상이 허상이 아니라면 그 보이는 것이 먼저 보이는 곳에 먼저 도달하신 그 가신 그분의 노선을 따라야 돼요.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에 갔습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십자가에 베드로가 가려하는데 주님이 말렸습니다. ‘베드로야 니 주제 파악도 못 한 게’ ‘주여, 제가 십자가 길 가겠습니다.’ ‘너는 못가는 거야’ 그 주님 가신 길은 우리가 인간이 갈 수 있는 길을 인간이 아닌 짐승 같은 인간이 흙인 인간이 참된 인간이신 주님가신 길을 우리가 갈 수 있다 이 말입니까? 하라 한다고 하고 하지 말라 해서 안할 수 있는 재주가 있어요? 안됩니다. 그냥 짐승으로 삽시다.
참된 인간 만들기는 항상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 들이대면 우리는 피해버리고 피하면 다시 십자가들이대고 그 십자가들이 된다고 피한 다고 다른 길을 가면 또 십자가 있고 계속 십자가로 해서 마치 박지성이 공 몰듯이 요리 저리 몰고 가는 거예요. 몰고 가 골인하는 거예요. 공 누가 넣었어요? 공이 알아서 갔습니까? 선수가 몰고 가니까 간 거예요. 주님 앞에 사로잡히고 주님께서 휘둘리고 주님께서 사용하시니까 가다 보니까 짐승 같은 인간도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 했고 부활의 권능에 이른 겁니다.
세례요한 같이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그 하나님의 사명 이야기하고 이름 지어 줬을 때는 부모들이 무척 좋아했을 거예요. 하지만 처참하게 망가지고 예수님도 마찬가지 한 것처럼 이 땅과 하늘나라 사이에서는 단절, 다리가 끊어져 있어요. 여기 십자가를 걸쳐봐야 선교단체서 말하는 건데 십자가를 통해서 간다 하는데 십자가를 걸쳐봐야 여기에서 십자가 올라가면 똑 떨어져요. 십자가라는 계단을 설치해 봐야 우리는 이 십자가 말고 다른 계단을 따로 만들어요. 항상 우리는 선악적으로 사람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여기서 복음이고 십자가고 언약이고 무슨 소리 해 봐야 항상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가는 거예요. 이 엉뚱한 길로 가는 이 모습을 오늘 본문을 설명하면서 제가 그림 하나를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이 그림을 평생 여러분들이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길이 이렇게 새총처럼 되어 있는데 여기 지옥이냐 천국이냐 갈림길에 십자가가 서 있어요. 이 십자가는 무슨 십자가가 인가하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넓은 가시밭에 있는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 말리다가 ‘거기 아니야’ 라고 말리다가 죽어버린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건 아니야 그 길은 아니야’ 라고 말리다가 얻어터져가지고 거기서 죽어버린 피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그렇다면 지금도 우리는 넓은 길을 좋아하고 짐승이니까 날 때부터 우리는 선악적이니까 여기 가는 사람들 전부 다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법대로 합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법으로 되어 있데요. 맞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법적 양심이 있기 때문에 그 법을 최선을 다하여 지키면 우리는 법을 지킨 것이 되고 그리고 우리는 구원받는다! 라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가요. 그리고 이런 사람 외에 다른 사람 없어요. 모든 인간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원받은 사람이 나왔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엘리야나 세례요한이나 사도바울이나 구원받은 사람이 나왔거든요. 이쪽 가던 사람이 어느 길로? 이쪽 길로 가는 사람이 있더라 이 말입니다.
이쪽으로 갈 때 반드시 주께서 십자가로 말려서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십자가가 오늘날 의존교회나 우리교회나 성도들에게 뭐가 필요 합니까? 법이 필요한 게 아니고 십자가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뜻은 거기는 길이 아니야 라고 말리는 거예요 십자가 모습도 한번 보세요. 말리는 모습 아닙니까? (ㅎㅎ) 이것은 좀 오버다 (ㅎㅎ) 가면 안 돼.
내가 너희들에게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이 말은 지식을 보태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가는 길 자체가 엉터리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네가 법적으로 알고 있는 율법적으로 아는 길 말고 법이 없는 길로 가면 돼’ 라는 법이 사라진 길, 오랜만에 어려운 말 나오는 데......,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나의 그림자가 없는 길’ 아, 이것은 너무 문학적 이다. 나의 그림자가 없는 길, 사람이 자기가 있을 때는 그림자가 생기잖아요. 나의 그림자가 없다는 말은 뭐가 없다? 내가 이미 죽은 자가 돼서 없는 거예요
제가 안산에서 책을 보니까 관속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그림이 나와 있어요. 바라코시대 작품인데 관속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 그림을 정말 잘 그렸는데 그 그림의 주제가 뭐냐 하면 일반인들의 죽음하고 똑같다는 겁니다. 그게 주제예요. 예수님의 죽음이 멋있는 죽음이 아니고 그 그림을 보니까 얼굴이 하얘졌어요. 얼굴이 하얘져서 그야말로 죽었어요. 죽었다는 말은 자기 힘으로 일어날 여력이 있다? 없다? 진짜 죽었어요. 보통 서울대학병원 영안실 관속에 있는 사람하고 똑같아요.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됐다면 역시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우리는 희망이 없다 하면 다행인데 우리는 마치 희망 있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로 가냐 하면 자꾸만 남들이 찾아가는 법이 깔려있는 길, 법이 사라진 길이 아니고 법으로 법으로 계속 이어진 길을 좋아하는 겁니다. 어느 쪽이 나쁜 길이고 착한 길이고 자꾸 착하다 나쁘다 의롭다 악하다 그것이 구분되는 법적으로 아스팔트를 깔아놓은 법이 가득 찬 거기, 거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원하느냐 하면 자신의 존재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가치 있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웃기고 있네, 똥 폼을 잡는구먼! 성경 한 백독 했다고’ 성경 백독 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성경백독이 법적으로 착한 일이 되어 버렸어요. ‘성경백독 했다.’와 ‘나는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어느 것이 착합니까? 백독한 것이 착하죠. 벌써 생기잖아요. 법적으로 생긴다 말이죠. 한 달에 교회 한번 나온다와 열 번 나온다. 어느 것이 착해 보입니까? 열 번 나온 것이 착해 보인다고요. 벌써 법적으로 자기는 착하다는 거예요. 이런 인간 죽이면 하나님이 아깝다는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을 살려야지 누구를 살리나?’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사람이 법이 있을 때 흥미를 끕니다.
라카이라는 사람이 ‘인간은 없고 법만 안에 들어 있다’ 인간은 없고 그 안에 법만 들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언어만 들어 있다 이 말입니다. 욕망이 나올 때 꼭 말로 나옵니다. 죽은 사람은 뭐가 없습니까? 말이 없죠. 살았는데도 말이 없는 사람은 산 사람이에요? 죽은 사람이에요? 있으나 마나 한 인간이에요. 꼭 살았다고 표를 낼 때는 뭘 해야 합니까? 말을 해야 되죠. 대답이 없으면 죽은 거예요. 인터넷 하다가 인터넷 사이트 죽어버리면 그 사람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죽은 자가 되요. 그 사람이 어느 동네에 살아도 인터넷 안 떠오르면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끔가다 인터넷하면 아, 이분 아직 살아 있구나! 아는 겁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복음전할 때는 복음에는 법이 사라진 길이죠. 복음전할 때는 교인들이 아무 소리 안 해요. 어느 정도냐 하면 우리교회 교인들에게 주일 오후에 기도 하라 하면 다 도망 가 버려요. 조용해요. 그런데 그런 교인들도 만약에 제직회 하라 하면 그 다음부터 말이 막 됩니다. ‘제직회 이번 결정 3분의 2로 할까요? 과반수로 할까요?’ 하면 전부다 ‘저요! 저요! 3분의 2로 해야 돼요’ 복음 아닌 이야기는 어떻게 서로 말하려고 달려드는지……. 우리교회는 그런 경우 없는데……. 다른 교회…….(ㅎ ㅎ)
복음 아닌 것에는 그렇게 말이 많아요. 복음적인 이야기는 입을 다물다가 기도 하라고 하면 기도 못합니다. 하다가 연속극 이야기하면 아내가 돌아왔다 하면 좔좔좔 이야기가 나오는지....... 그만큼 평소에 법으로 조직된 짚인형, 옛날에 장희빈할 때 인현왕후 죽으라고 장희빈이 짚으로 인형 만들어 바늘로 콕콕 찌르니까 몇 키로 떨어진 왕비가 윽윽 하고 죽잖아요. 말도 안 된 소리죠. 성질 같으면 한국교회 목사들 인형 만들어서 대구에서 푹푹 찔러서 강대상에서 피를 토하고 죽고(ㅎ ㅎ)
물에 빠진 병사들은 배 모형에다 누가 바늘 찔러 다 빠져죽었습니까? 원래 바늘 가지고 찌르는 것은 마귀에요. 마귀가 바늘을 찌르는데 문제는 왜 찔리나 이 말입니다. 안 찔리면 될 텐데. 왜 찔립니까? 왜 정죄함을 당합니까? 우리가 자꾸 법적으로 자기 의로움을 무장하려하니까 그것을 변호하려하니까 마귀가 장희빈이라는 마귀가 짚 만들어서 계속 찔러대는 거예요. ‘니 오른 눈으로 죄를 범했잖아 빼버려! 빼버려! 어제는 왼손이 잘못했잖아 잘라 버려!’ 계속해서 ‘니가 주님 말씀 들어 봐!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한 거잖아! 니 죽어버려!’ 계속해서 법적으로 찔러대는 거예요. 말씀가지고……. ‘하루에 성경 3장 보는데 어제 1장밖에 못 봤잖아! 바쁘다고’ 계속 정죄하잖아요.
여러분 그것을 알아야 돼요. 인간이 선악과에 관심 없었으면 인간은 죄지을 필요 없어요. 그런데 마귀는 인간을 선악과 쪽으로 눈 돌리게 만들어 버린 거예요 유혹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법을 안 봐도 구원받는데 법을 보게 하므로 말미암아 잠자고 있는 우리 속에 있는 법을 일깨우게 만들었어요. 탐내지 마라 하는 순간 그때부터 우리는 탐낼까? 말까? 갈등을 유발되는 겁니다. 구원은 법이 사라진 길을 통해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법이 사라진 그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법이 없는 길에는 법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법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아무 것도 안 따집니까?’ 아무 것도 따지지는 않아요. 다른 것 가지고 따지죠. 뭐냐 하면 ‘너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법은 타인을 끌고 오지 않습니다. 법은 남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명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법은 나한테 문제에요. ‘너는 어제 얼마나 착했어? 너는 어제 얼마나 나빴어?’ 마귀가 내 문제에 대해서 따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밖에 계신 예수님을 끌고 와서 ‘너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너는 너와 어떤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때 우리는 ‘법적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리다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율법의 완성으로서 오신분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 봅시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여기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죠. 그러면 예수 믿는 것은 율법의 행위입니까? 율법의 행위 아닙니까? 아니죠. 그러면 행위입니까? 행위 아닙니까? 아니죠. 예수 믿는 것은 완전하게 우리의 행위에서 나온 예수 믿는 것은 있다? 없다? 없다 왜? 율법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율법 주신 것은 죽으라고 주신 것을 우리는 펄펄 살아서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문제가 되어 버려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 물이 있습니다. 물을 예수님도 바라보고 저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물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물을 마시고 ‘아 맛있다’ 살았습니다. 같은 물을 마셨는데 다른 결과가 나왔죠. 결국 우리는 이 물이란 율법을 지키지도 못한 거예요. 율법을 지키면 우리도 제대로 예수님처럼 죽어야 돼요.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받으시고 저주받아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율법을 제대로 지키면 저주받아 죽어야 되는데 우리는 율법을 받아 더 위대해 지고 더 착해 진다고 생각했으니까 이것은 율법도 모르면서 율법을 지켰다고 우긴 샘이 되는 거예요. 율법의 요구는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율법을 행해서 살자는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사람의 현재 형편은 율법을 지키므로 말미암아 의롭다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인 나를 봐라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 있는 자로 하여금 저주아래 있게 하기 위함이고 진짜 네가 사는 길은 내가 부활한 능력을 입어야 된다. 그것이 행함이 아니란 의미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율법에서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어요. 율법이라는 것은 하라 하지 마라니까 행함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믿으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복음 혼자 따로 등장한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뭐와 짝을 이루느냐 하면 율법의 행위로서는 ‘아니오!’가 짝을 이룹니다. 왜 그러냐 하면 율법의 행위가 아니요 하는 것도 우리 힘으로 안 되고 복음 믿는 것도 우리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이 중간에 뭐로 연결시켰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연결시켜서 예수님의 복음을 믿게 하는 것은 너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믿게 되는 거예요.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안에 누가 살아있습니까? 십자가에서는 나는 죽고 내안에 예수님이 살아있다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안에 십자가의 능력이 살아있다는 거예요. 십자가의 능력이 살아있으려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율법이 주는 저주의 힘이 계속 있어야 해요. 저주의 힘이 계속 있어서 우리를 계속 죽여야 계속 산다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가치가 있어요. 남들 보기에 평평한 장판인데 나는 계속 발을 구르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남들 보기에는 안보이지만 여기서 계속해서 구더기가 올라오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편하게 살고 있는 데 주님께서 계속 밟고 있는 겁니다. 율법의 저주가 주님의 십자가로 계속 밟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증인되는 겁니다.
성경 이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처음에 만든 인간은 선악과를 모르는 인간이었는데 선악과를 이미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이라 할 수 없고 그냥 흙인데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흙에서 사람 만들어 내는 몫은 우리 몫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뜻과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 질 때 사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함에 있는 게 아니에요. 죽은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에요. 죽은 우리를 살리려면 아예 처음부터 우리를 죽이지 말아야 됐어요. 처음부터 ‘조금만 죽어줘 내 살려줄게’ 하는 이런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기독교의 신학은 ‘인간아 조금만 참아라. 내가 살려줄 게’ 이랬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런 거짓말을…….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살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구원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하여 죽은 자를 이용하는 겁니다. 우리는 계속 죽어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안합니까? 우리의 그림자는 이미 사라졌어요. 우리는 예수 안에서 늘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은 이미 주인공이 예수님이니까 결국은 나의 자아가 아니고 주님의 자아로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니까 마태복음 10장 같은 경우에 “네가 말하는 것은 네가 아니요 네 속에 성령께서 이야기함이라” 라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다. 말한 이는 네 안에 성령님이라 이것은 죽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자는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려져 있는 그런 도자기 하나 새로 굽었다고 보면 됩니다.
죄로 죽었던 도자기에 십자가 피로 덮음으로 말미암아 밑에는 죄, 위에는 십자가, 양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그런 새로운 도자기 그릇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가게 되는 겁니다. 도자기가 천국에 입고되어야 천국에서는 어린양만 영화롭게 되는 어떤 인간도 서로 서로 자랑하지 않고 주님만 면류관 받고 주님만 영화롭게 되는 주님의 세계가 그래서 만기하고 꽉 차게 되는 겁니다.
더 이상 법이 없는 길을 가면서 법적으로 잘했다 못했다 두 번 다시 따지지 않기로 우리 약속을 하고서 떡을 먹도록 합시다!
서울100402빌3장10절b
"참된 사람이란(왜 죽어야만 하는가?)"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기 위한 그의 죽음을 본받음
지난 시간에 율법이 주어지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율법을 온전하게 이루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늘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죽은 자가 되는 것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죽은 자가 되게 되면 우리는 어떤 점이 유리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것이 우리를 살리려고 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 즐거움이 있어요.
우리는 모든 것을 나 잘 되라고 줬다고 생각하면 점점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 준 것은 우리를 구원함이 아니고 너희 구원자가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를 염색처리 한다고 할까요, 우리를 탈색 시킨다 할까요, 우리 자신을 “비켜 선악과를 따먹은 너는 제발 좀 비켜” 라고 이것을 처리 하는 화학약품,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이 오게 되면 우리가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우리는 저주가 계속 일어납니다. 결국은 저주의 끝은 죽음 아닙니까? 처리화학약품, 누구를 처리하느냐, 나를 처리하죠. 나를 처리하는데 결과는 무엇인가 하면 나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는데 죽음에 이르는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하자? ‘즐거워하자.’ 이 말입니다. “내가 죽었데, 내가 죽었데.” 이것을 좋아서 이야기 해요. “그럼 당신 죽으면 성경 말씀을 누가 지키는데요? 이것을 지켜야 구원 받는데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당신이 구원받아요?”
나를 죽이게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