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5월 3일 24강 성화론의 허구성 vs 기르심
대구 5월 3일 24강 성화론의 허구성 vs 기르심
이름 : 관리자(IP:220.81.41.203)
100503 피24강 성화론의 등장 vs 기르심
____________(나는 신이다 vs 십자가)
관리자(IP:220.♡.41.203)
10-05-03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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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19 18:41
대구100503피p097성화론등장과기르심
[10 대구강의 6] - [피 24] - 성화론의 등장과 기르심
10,05,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신학의 하이라이트, ‘성화론’!!
오늘은 교재 97페이지에 나오는 ‘성화론’에 대해서 살펴보자.
** 신학의 하이라이트는 ‘성화론’에 있다. 자아가 생각해도 참으로 흠모할만한 자아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줄 수 있는 핵심분야로서 각 시대마다 맞춤 신학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전혀 흠모할만한 것이 없는 메시야를 증거하는 신학은 아니었다(사53:2).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신학에서 말하는 모든 진리는 상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데, 즉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이 머리로서 상상할 수 있는데, 하지만 그것이 상상에 가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현실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손에 만져지는 우리의 몸이나, 혹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같은 것이 바뀌게 되면, “아하,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와주시는구나” 라고 파악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바뀌지 않으면 하나님도 역시 없는 것인데, 즉 자기가 느끼지 않으면 하나님도 없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 인간은 ‘나’의 죽음이 느껴질 때, 비로소 !!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그게 언제 들통이 나는고 하니, 자기가 죽게 될 때, 즉 아직은 죽기 싫은데 죽는다든지, 혹은 죽기 이전이라도, 왠지 알 수는 없지만 자기도 모르게 죽는다는 것이 두려워질 때, 그렇게 자기가 그만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 겁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중심의 세계관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교재 97페이지를 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읽어보자.
**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는 성화론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마셨던 그 쓴잔을 같이 들이켜야 한다. 곧 자신을 죽이고 부인하는 십자가의 잔이다(막 10:38).
(막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 예수님曰, ‘너희의 기도 엉터리야’ !!
여기 인간의 기도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기도를 어떻게 보았는고 하니, 우리 인간들은 잘못된 내용의 기도를 하고 있음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즉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즉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기도하는 그런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왜 이런 지적을 받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그 기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인간의 기도는 모두 엉터리다” 라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가 있고, 우리 인간들은 전혀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 신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진리나 계시나 신이나 천국과 같은 것은 모두 추상적인 개념들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추상적’ 이라는 것은, “있으나 없으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그런 것들은 없어져도 괜찮은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그만 자기 자신이 없어지면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그만 사라진다고 하면, 즉 자기가 죽는다는 것은 겁을 내지만, 그러나 진리가 없어진다는 것이 대해서는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이 죽어도 별로 겁을 내지 않는데, 자기가 죽어야 비로소 겁을 내지 말이다.
◈ 그러나, 자기 집에 불이 나면 !!
예를 들어서, 우리는 남의 집에 불이 나면 어떻게 하는가? 그냥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던지, 아니면 평소에 하던 대로 술이나 한 잔 걸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집에 불이 나면 어떻게 하는가? 당장에 술집에서 나와서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역시 ‘나’ 자신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진리나 계시나 천국이나 신과 같은 추상적인 것들이 자기와 관련이 있을 경우에만, 그제야 비로소 신경을 조금이라도 쓰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와 관련이 없다고 한다면,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냥 무덤덤하게 여기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 말로는 신경을 쓰는 척을 하겠지만, “아이쿠, 참으로 안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해도, 그런 “하나님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은 자기 몸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경우에만, 즉 자기의 몸에 자기가 기대한 어떤 변화가 있을 때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조차도 없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하나님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서, 그렇게 아무튼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기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 인간은 죽음 앞에서 공포심을 !!
그런데 어느 날 자기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갑자기 거기서 공포심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고 하니, 물론 신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자기는 죽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 생각, 그것이 어떻게 해서 현실이 되느냐는 말이다. 즉 공포심이 왜 생기느냐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왜 내가 겁을 내는가?” 라는 말이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죽으면 안 되니까 그러한데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이렇게 “내가 죽으면 안 돼!” 라는 말과, “결국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 라는 말이 서로 있다고 하면, 이것은 둘이서 서로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즉 한 쪽에서는 “나는 죽을 수밖에 없어!” 라고 하면, 다른 쪽에서는 “나는 죽으면 안 돼!” 라고 말이다. 이것을 두고 철학자들은 ‘모순(矛盾)’ 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쉽게 말해서 그냥 ‘억지’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지요?
여기서 다음의 대화를 한번 들어보자.
* A : 하나님을 믿으세요.
* B : 나는 믿지 않습니다.
* A : 그러면 당신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 B : 죽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 A : 지금 죽여버린다 !!
* B : 싫어 !!
◈ 나는, 지금 당장은 죽기 싫어 !!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은 인정한다고 하면서, 하지만 정작 자기를 죽여버린다고 하니, 그것을 싫다고 하면,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은 내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그러니 강도가 “지금 당장 돈 내놔. 그렇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라고 했을 때, 누구든지 돈을 꺼내서 주었으면 주었지, 자기가 죽으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도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즉 그런 상황에서 “나는 어차피 죽는데, 그러니 지금 당장 죽여!” 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더라도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죽는 것은 몰라도, 등산을 하다가 미끄러져서 죽는 것은 좀 억울하다는 말이다. 즉 죽더라도 제법 폼 나게 죽고 싶지, 그렇게 시시하게 죽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마음대로 하겠느냐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잔디도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라고 했는데, 그것을 헤겔철학에서는 ‘차이’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차이가 나는 이 세상에서 자기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억지를 부리고 우기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나는 한결같은 사람이야”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말로 안 되는 소리인데, 사람은 상황이 바뀌게 되면 변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 인간의 욕망이 종교를 낳았기에 !!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연구하게 시작했는데, 그것을 연구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종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종교는 한 마디로 기도로 묶을 수가 있고, 이 기도는 또한 욕망으로 묶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욕망이 종교를 낳았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종교의 핵심은 기도에 있는데, 그래서 성경말씀은 아무리 보라고 해도 안 보지만, 그러나 기도는 누구나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무리 무식하든지 똑똑하든지 간에 말이다. 똑똑한 사람도 답답하면 기도하게 되어있고, 자기는 무식해서 성경을 봐도 모른다고 하는 사람도 역시 답답하면 기도는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기도의 보편성 앞에서 !!
그러니 이러한 기도의 보편성 앞에서 만약 자기가 신을 믿는다고 하면,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기도를 해도 다 정당한 기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은 바로 “너는 니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라고, 즉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잘못된 기도를 한다고 지적하신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자기의 욕망이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을 믿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게 되면, 그 하나님은 자기 기도에 대해서 응답할 책임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하나님이 자기가 기도한 것 말고 다른 것을 간섭하게 되면, 자기는 다른 신을 찾아서 섬기겠다고 한다는 말이다.
◈ 일본에는, 신이 약 600만개 ??
일본에는 신이 약 600만여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물론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데 말이다. 왜 그렇게 신이 많은가? 그것은 바로 골라잡으라는 것이다. 즉 상품이 다양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잡으면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먹는 라면의 경우에, 종류가 왜 그렇게 많은가? 그렇게 되면, 소비자는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무슨 선택이 폭이 있겠는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하는데 말이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선택의 폭이 넓으냐는 것이다.
◈ 이방종교는, 선택의 폭이 넓어 !!
이방종교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신도 얼마든지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더 여유를 부리는데, 즉 “우리가 믿는 신만 좋은 신이 아니라, 남들이 믿는 신도 좋으니 똑같이 존중해주겠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도대체 무슨 신이냐는 말이다. 나이키보다도 더 못한 신인데 말이다. (나이키도 승리의 여신인데? ㅋㅋ)
다시 말해서, 남의 신을 존경해주는, 즉 남의 종교를 존중해주는 것이 어떻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고 사상이란 말이다. 즉 “나는 남의 사상을 존경한다” 라고 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왜냐하면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말이다. 즉 부잣집 아들이 시장에 가서 씨레국을 먹지 못한다고 하면 얼마든지 이해가 되는데, 매일 스테이크에 칼질만 했으니 말이다.
◈ 차별화 -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
하지만 이 ‘종교’ 라는 것은 그런 것이 전혀 아닌데, 그런데 종교도 마치 잔디밭이 제 아무리 넓어도 잔디가 모두 다르듯이, 그렇게 종교도 잔디처럼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취미생활이나 오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래서 진짜 여호와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해서, 그만 차별화를 시키는데, 즉 모든 종교를 일절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물론 우리가 다 알지만 반복을 해야 되는데,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언약’이 나온다는 것이다.
◈ 깨어진 두 돌판의 등장으로서 !!
물론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의 이성, 즉 인간의 지식에 주어지는 것은 언약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이 언약이 눈에 보이는 방식인데, 즉 ‘두 돌판’ 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이 돌판이 깨어지고 마는데, 왜 그렇게 깨어졌는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깨어지지 않은 돌판과 깨어진 돌판의 차이점을 너희들이 알아라”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돌판이 깨어졌다는 것은 언약이 깨어졌다는 것이고, 그렇게 언약이 깨어지면 당연히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 인간은 “내가 왜 죽을까? 죄를 지을까? 저주를 받을까?” 라는 것을 몰랐는데, 그런데 우리 앞에 등장한 두 개의 돌판이 그만 깨어짐으로 인해서, “아하, 아무런 죄도 없는 거룩한 이 돌판이 깨어진 것을 보니, 사실은 내가 깨어질 인간이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이 등장함으로 무엇을 알게 되는고 하니, 그 이전에는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그런데 그 깨어진 두 돌판의 등장으로서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인간에게 이야기하고자하는 내용이란 것이다. 즉 “너희들이 알고 있는 때문에, 진짜 하나님이 너희들과 언약을 성사시킬 수가 없다” 라는 것인데, 인간들이 이미 알고 있는 기존의 잘못된 하나님 때문에 말이다.
◈ 인간은 ‘법’적 요소 때문에 !!
어제 오후에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는데, 우리 인간에겐 법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이 가려진다고 말이다. 즉 인간의 선악적 요소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 가려진다는 것이다. 그런 요소가 깨어져야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꾸만 법으로 나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가리워 진다는 말이다.
◈ 왜 인간은, 자기 기도를 알지 못하는가?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는 기도를 너희가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근원적인 인간의 욕망 자체에서 신이나 진리, 천국과 같은 것은 허구가 되고, 실제로 느끼게 되는 것은 자기 몸뚱아리였는데, 그런데 그러한 자기 몸뚱아리만 현실로서 간주되는 의식에서, 이제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우리의 몸도 날마다 변한다고 하는, 그런 자의식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신이나 진리, 천국과 같은 것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변하고 말이다. 그렇게 기존의 우리는 입장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잘못된 기도에 대해서 지적을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나서,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데, 그 진리의 내용이 교재 98페이지에 보면 나온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는 성화론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마셨던 그 쓴 잔을 같이 들이켜야 한다. 곧 자신을 죽이고 부인하는 십자가의 잔이다(막 10:38). 이것은 곧 자아의 포기이다.
(막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 주의 쓴 잔을 마시게 하옵소서 !!
여기에 보면, 물론 이 부분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는데, 여기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나서, 즉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거기에 대해서 말씀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가 기도할 변하지 않는 내용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그 잔을 저도 마시게 하옵소서” 라고 말이다. 그러니 예배당에 굳이 뭔가 쓰려고 하면 “하면 된다!” 라고, 그런 쓸데없는 글을 걸지 말고, “주의 쓴 잔을 마시게 하옵소서!” 라고 써놓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더 적합하다는 말이다. 즉 “이 교회에는 평생동안 주님의 쓴 잔을 마시겠다는 사람만이 들어오세요” 라는 의미인데, 그러면 아마 천 명이 모인 교회라면, 많아봐야 3명 정도가 남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 그러면 과연 어떤 인간이 쓴 잔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되는가? 이 세상에서 쓴 잔을 마시기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하지만 쓴 잔을 마시게 해달라고 기도함으로 말미암아서,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쓴 잔을 마시지 않던 인간에서 즐겨(?) 쓴 잔을 마시는 인간으로 달라지도록 해주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찾아오신 목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서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를 보면 참 재미가 있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나. 성화론의 허구성] - 성화론의 초점은 이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거룩한 구원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에 해당되는 항목은 강렬한 ‘주체의식’으로 대변된다. ‘내가’, 혹은 ‘우리가’, 혹은 것은 ‘자아가’ 라는 의식으로부터 출발하겠다는 것은, ‘우리’가 해내지 못할 거룩이라면 애초에 거룩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는 의중을 드러내는 것이다.
계속해서 살펴보자.
** 이렇게 되면, 인간이 성취해내지 못할 거룩은 거룩으로 간주하지 않고, 인간을 살려내지 못할 진리는 진리가 아니며, 인간이 믿지 못할 복음은 복음이 아니며, 인간이 순종하지 못할 말씀은 말씀이 아니며,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메시야는 메시야로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 ‘거룩’의 판정문제는 과연 누가?
그러니 결국 성화론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거룩’의 판정문제를 인간 차원에서 머물러있겠다는 것이 곧 성화론자이고, 반면의 그 거룩의 문제를, 즉 무엇이 거룩인지 아닌지를 예수님에게 물어보자는 것이 곧 복음이라는 말이다.
지금 성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해야지!” 라고 하는데, 그런데 막상 그 거룩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룩을 이야기하면서도 말이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들이 거룩을 안다고 나서니 말이다. 그야말로 웃기는 짜장면인데(짬뽕?), 자기들이 거룩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거룩은 거룩이 아니라는 말인데, 꼭 바리새인들과 같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우리는 메시야가 누구인지 알아본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메시야는 구름을 타고 와야 되고 어떻고 하면서, 즉 자기들은 성경을 좀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거룩도 모르고, 또 메시야도 모르는데, 즉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니가 나를 알겠는가?” 라는 심오한 노랫말도 있지만(ㅋㅋ), 무슨 노래인지 알지요? 아무튼 인간은 그렇게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을 안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선한 선생님이여 ??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보고 “선한 선생님이여!” 라고 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얼마나 깨어졌는지 모르는데, 즉 “이 건방진 놈아! 니가 어떻게 선을 알아?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뿐인데,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내느냐?” 라고 쿠사리만 실컷 얻어먹었다는 말이다.
그래도 그 청년은 “저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하자, 예수님은 “그렇다면 니가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 오너라” 라고 하니, 그만 근심하면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때 갑자기 음악소리가 들리는데) 아이쿠, 죄송합니다. 녹음기가 그만 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네요. (‘타타타’ 인가? ㅋㅋ)
(막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막 10: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막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 이건 자신 있으니, 거룩이야 ??
그러니 여기서 ‘거룩’ 이라는 것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즉 우리 인간들은 성령께서 아직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룩을 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거룩함과 거룩하지 않음을, 쉽게 말해서 더러움인데 말이다. 아무튼 그것을 자기들이 알아서 판정하겠다는 것이다. 즉 거룩과 비거룩의 문제를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것을 인간이 그냥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다 자기가 거룩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자기가 할만하다고 여기는 것은 거룩으로 그만 포함을 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에게 부담스러운 것은 비거룩에 포함을 시켜버리고 말이다.
◈ 예수님으로부터, 거룩을 다시 규정해야 !!
이러한 차원에서 거룩과 비거룩을 보게 되면, 이런 인간들이 누구를 죽였는가? 결국은 거룩한 분을 죽이고 말았는데, 그러니 거룩이라는 판정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고 하니, 인간이 알고 있는 최고의 경지를 밟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그들에게서 거룩하지 않다고 비난을 받은 그분, 즉 예수님으로부터 거룩을 다시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렇게 사람들이 있고, 또한 예수님이 계신다고 하면,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떠밀림을 당하신 분으로부터 거룩을 시작하려고 하면, 여기에는 반드시 무엇이 들어있어야 하는고 하니까, 왜 인간은 거룩한 분을 거룩하다고 알아보지를 못하고, 비거룩이라고 하면서 비난을 해야하는지, 그것도 포함이 된 채로 거룩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참된 거룩 - 야, 인간의 거룩은 더러워 !!
그러므로 참된 거룩은, “여기에 거룩이 있다. 받아라” 라고 하면서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래서 너희들이 생각한 거룩이란 판정은 도리어 더러운 것이다” 라는 지적을 하면서,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6장 8절을 보면 뭐라고 하는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 즉 “성령이 오게 되면,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신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즉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우리는 “아하, 내가 바로 아담의 죄로 인해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지금부터 조금 어려운 논리를 전개하려고 하니까, 긴장을 조금만 더 하시고,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먼저 1절에서, 즉 “눈앞에 십자가가 있는데 누가 너희를 꿰더냐?” 라고 하면서, 그 뒤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 십자가는, 율법의 행위와 믿음을 모두 다 !!
거기에서 사도바울이 둘로 나누고 있는데, 즉 “아브라함이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었다” 라고 하면, 그 앞서서 5절인가에 보면, “너희가 믿은 것은, 성령의 일하심인가? 아니면 율법의 행위인가?”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목사님, 물론 의미는 같지만, 문장의 구조가 좀 다른데요? “성령의 일하심은, 율법의 행위인가? 아니면 믿음인가?”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 왜 그렇게 둘로 나누는가? 그냥 합치치 않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 십자가 사건은 이렇게 둘을 모두 다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해명이 되고, 그렇게 해서 그 내용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한 쪽을 빼버리면 왜곡된 십자가의 내용이 나온다는 말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갈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 야, 십자가 덕분에 내가 살았다 ??
사도바울은 이렇게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면서 두 가지를 다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만약에 인간이 그것을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옛날에는 율법으로 행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성령으로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자꾸만 옛날 이야기라고 하면서, 그것을 없애버리는 쪽으로 나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니 나는 구원을 받았잖아” 라고, 그렇게 우기려고 말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십자가에 있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그런 십자가에는 관심이 없고, “야, 십자가 덕분에 내가 살았다” 라고, 그렇게 최종적인 도착지점을 자기 구원에 두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이 툭 튀어나오면서 소리가 “하여튼 구원을 받으면 안 됩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십자가는 ‘간이역’ ??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십자가이지 인간의 구원이 아닌데, 그런데 인간들은 그 액센트를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구원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인간에게 이 십자가는 무엇인가? 자기가 처음 교회에 나와서 의례적으로 스쳐서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지, 그 과정을 통과하고 나면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나만 좋으면 되지 않는가?” 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고, 또한 욕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이 하는 기도는 무엇이겠는가? 쓴 잔을 마시는 것이 아닌데, 그런 쓴 잔은 구원받을 그때까지만 마시면 그만이고, 일단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는, 새 생명의 달콤한 풍성한 열매를 달라고, 그런 것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말이다.
◈ 율법의 행위와 성령의 일을 비교하면 !!
여기서 율법의 행위와 성령의 일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의 일은 그 주체가 당연히 성령인데, 즉 하나님이 주체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의 행위는 그 주체자가 누구인가? 그게 율법의 행위이니, 그것은 곧 ‘나’ 라는 말이다.
물론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 12절에서, 율법 그 자체는 선하다고 하는데, 즉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을 이루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율법을 성령께서 이루시면 그야말로 율법은 선이고 거룩이 된다는 말이다.
(롬 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사도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인간이 주체가 되는가? 아니면 성령이 주체가 되는가?” 라고 하는 두 가지를 서로 비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아닌 성령님께서 주체가 되어서 율법을 이루게 되면, 그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고 하니까, 믿음을 주게 된다는 말이다. 믿음을 말이다.
◈ 성령께서 일을 하시면, 곧 ‘믿음’ !!
왜 그런고 하니, 조금 전에 살펴본 갈라디아서 3장 5절을 보면 뭐라고 하는가? 즉 성령께서 우리에게 일을 하게 되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들음에서 나온 믿음이란 말이다. 그런데 성령이 없는 사람이 하게 되면 무엇인가? 그것이 곧 율법의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6절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한다는 말이다.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율법을 행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두 가지의 결과가 나오게 되는데, 물론 율법은 제대로 행하게 되면 축복인데, 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가? 저주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명기 28장에 줄줄이 나오는데 말이다.
◈ 율법에는, 축복과 저주가 모두 다 !!
그러므로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축복만 받은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도 함께 주어졌다는 것이다. 즉 축복과 저주가 모두 다 율법 속에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저주를 받게 되는데, 왜 그러한가? 우리 인간은 율법을 전혀 지키지를 못하니까 말이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래서 그 사람에게 전도를 하는데, 즉 “당신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라는 것도 반드시 이야기를 해야된다는 것이다. 축복만 이야기하고 저주를 빼먹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 아줌마, 선지국이 너무 비싸요 !!
그러니 교회는 음식을 파는 식당이 아닌데, 무슨 말인고 하니, 배가 고파서 식당에 갔는데 선지국이 그만 한 그릇에 6000원이나 한다는 것이다. 선지국은 싼 맛에 먹는데 말이다. 그래서 비싸다고 여기면, 그러면 그냥 그 식당에서 나오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의 교회는 그게 아니라, 들어갔다가 그냥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의 특징인데, 즉 천국은 자기가 가지 않으면 그만이 아닌데, 반드시 지옥으로 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식당의 경우에도, 음식값이 비싸다고 먹지 않고 그냥 나오면 주인이 뒤에서 소금을 뿌리면서 저주를 할지 몰라도 말이다(ㅋㅋ).
사도바울은 자기가 하고 싶다든지 답답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닌데,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축복과 저주의 종으로서 한다는 것이다. 옛날 구약 때는, 즉 모세는 율법을 통해서 축복과 저주를 전했는데, 이제는 그 율법의 완성이 되는 십자가를 가지고 축복과 저주를 전한다는 말이다.
◈ 인간외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구조화가 !!
그렇게 십자가로서 증거할 때, 사도바울의 모습은 무엇인고 하니까, “너희들은 이미 저주를 받았다” 라는 것인데, 마치 세례요한이 하는 소리와도 같은데,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말이다. 즉 “이런 꼴통들아, 너희들도 구원을 받으려고 왔느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도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똑같은 소리를 했는데, 즉 “개 같은 여자야!” 라고 말이다.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것은 인간이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인간외부에 하나님의 말씀이 구조화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을 ‘구조’ 라는 말 외에 다르게 설명할 길이 없는데, 즉 우리 인간 속에 그런 구조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러한 구조에서 우리 인간은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태생이 그렇다는 말이다.
◈ ‘기르심’에 대해서 !!
공중의 참새를 누가 기르는가?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되어있는데, 또한 들풀도 역시 하나님이 기르시고 말이다. 그러면 참새와 들풀은 구조화가 되어있는데, 즉 그들은 자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냥 기르시는 분 앞에서 기르심을 당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구조화’ 라고 말할 수 있는데, 즉 덮어 씌어져 있다는 것이다. 혹은 다른 체제 속에 갇혀있다는 것이고 말이다.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참새와 들풀을 이야기하시면 우리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정작 우리는 무엇인가?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 인데, 또한 ‘무소유’이고 말이다. 또한 봉은사의 스님이고 말이다. 그리고 청와대의 비서실장이란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는데,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인간다우냐는 것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말이다.
◈ 예수님을 믿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 !!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정말 신기한 일이다” 라고 하는데,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는 말이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구조를 뒤집어씌우면 당연히 답답하다고 하면서 벗어버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인간의 참모습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어야 교회가 부흥이 되고, 화목하고 재미난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라도 자기에게는 그 무엇이라도 뒤집어씌우지 말라는 것이다. 즉 식당에 가서도 자기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테니, 즉 선지국이든 육개장이든 말이다. 그런데 “너는 이것을 먹어야 돼” 라고 구조적으로 뒤집어씌우지 말라는 것이다.
◈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만 ‘벌겋게 된 채로’ !!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자기 입맛에 당기는 국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십자가’ 라는 그야말로 뜨거운 국밥이 그만 자기에게 왕창 쏟아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 머리부터 해서 모두 데이고 말았는데, 얼굴은 벌겋게 되어있고 말이다. 그렇게 십자가가 뒤집어 씌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깨닫는고 하니까, “아하, 내가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 뜨거운 십자가 앞에서 말이다. 그러니 그 동안 화장을 하면서 꾸미고 한 것도 그만 모두 다 날아가 버리고, 그냥 벌겋게 데인 채로, 즉 죄인으로서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가 그만 삼계탕으로 만들고 말았는데, 속속들이 말이다(ㅋㅋ). 또한 그것이 구조화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런 놀라운 믿음이 생긴 것은 아브라함이 골라잡은 것이 전혀 아닌데, 즉 “우리 돼지국밥을 먹을까? 아니면 짜장면이나 돈까스를 먹을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런데 목사가 교회에서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야만 믿음이 생깁니다” 라는 말을 말이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설교시간에그만 버럭 화를 낼까 싶어서 말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정말 착하지요? 그러니 알라서 골라잡으세요” 라고 해야 교인들이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선택도 자기가 해야만 흐뭇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짜장면이든 돈까스든 간에 말이다.
◈ 야그가, 그만 못쓰게 !!
하지만 성도는 그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뜨거운 물을 홀랑당 뒤집어쓰고 말았기에, 그야말로 벌겋게 되어서, 그만 다 익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으로부터 “야, 너는 교회에 한번 갖다오더니만 어떻게 그렇게 되고 말았지?” 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뒤집어 씌어버리니 그 모양 그 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들어올 때는 멀쩡했는데, 그런데 나갈 때는 그만 십자가의 종이 되어서, 즉 그야말로 십자가에 미친 사람이 되어서 나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사건이라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아주 극렬하게 반발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성령이 역사하니 율법의 행위를 포기하게 되는데, 그렇게 모든 법의 행위에 대해서 포기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는데, 즉 우리 인간에게는 주체가 살아있어서 무엇이든지 지키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키면 지키려고 할 수록 율법은 이룰 수가 없고, 자기에게 저주만 주어진다는 사실까지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구조화 -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에 !!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그 뒤 10절에서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즉 “율법에 속한 사람들은,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에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구조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에 있다는 것이 말이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알지 말아야 할 것까지 알아버린, 인간 !!
이러한 십자가를 지실 분이 제자들에게, 또한 지셨던 분이 사도바울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밝히면서 다가오게 되면, 드디어 우리 인간들의 행함의 구조가 노출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행함의 구조가 무엇인고 하니, 즉 “알지 말아야 할 것까지 알았다” 라는 것인데, 즉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것은 우리 피조물인 인간은 몰랐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모르고, 오직 들풀이나 참새처럼 “주께서 기르시나니” 라고 하는, 그 구조에 그대로 만족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께서 길러주시고 주께서 살려주시는 그 위에 있는 구조, 그것이 곧 선악의 구조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칸막이를 치시고, “그것은 따먹지 말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선을 넘어가면 안 되는데, 넘어가면 곧 저주이고 죽임이란 말이다.
◈ 같은 피조물인 뱀의 말을 들으면 안 돼 !!
그리고 인간은 뱀의 말을 들으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스린다는 것은, 피조물을 말을 듣지 말라는 것이다. 다스려야 될 피조물인 뱀의 말을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만 피조물에 불과한 뱀의 말을 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것은 창조주의 말씀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 창조주의 말씀을 듣지 않고, 피조물의 말을 들었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창조주의 말씀보다 같은 피조물의 말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서 1장에 나오는,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라고 하는, 오늘날 이 세상의 모습과도 너무나 똑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말씀을 백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말을 듣는 것을 더욱 더 좋아하니 말이다. 즉 성철이나 법정이 하는 말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예수님 - 들을 말씀만 듣겠다 !!
알다시피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는데, 즉 “천하의 모든 것을 다 주겠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천하를 모두 받고 말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 마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그것만 구분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면 마귀가 믿지 말라고 해도 믿을 것이고, 하지만 그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마귀가 그 무엇을 다 제공해준다고 해도, 전혀 들을 필요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알지 말아야 될 것을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 하지만, 악마가 피조물 속으로 들어옴으로서 !!
그런데 천상에서 전쟁을 일으켜서 패배한 악마와 그 하수인들이, 그만 이 땅으로 쫓겨나서 이제 우리 피조물 속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사실상 뱀은 아무런 죄도 없는데, 전쟁을 일으킨 악마나 그 잔당도 아니고 그냥 주께서 기르시던 뱀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그 뱀 속에 악마가 들어가는 바람에, 그 뱀이 인간에게 악마의 음성으로 속삭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찾아오셔서 인간과 뱀을 ‘꽈당’하고 서로 박치기를 시키고 말았는데, 마치 선생님이 청소도 안 하고 농땡이를 치는 학생을 둘 다 불러서 박치기를 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남과 여와 뱀이 그만 서로 ‘꽈당’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바로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몰았어야 되는데, 그런데 왜 알았는가?” 라는 것인데, 즉 구조가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관리자(IP:220.♡.41.203)
10-05-19 18:41
◈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생명나무를 철수시킴으로서 !!
십자가 마을에 김성환 목사님이 ‘빛’에 대해서 글을 올려놓았는데, 참 좋은 글인데,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글이 점점 더 많이 올라왔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제가 거기에 댓글을 달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서 생명나무를 철수시킴으로 말미암아서, 즉 비록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할지라도 생명나무만 보존하게 되면, 하나님의 안식과 완성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고 하니, 인간을 일을 저지르게 되니, 그 다음부터는 어떤 마음이 드는고 하니, 그만 자존심이 생기게 되어서, 즉 “우리가 저지른 일은 우리가 해결하자.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자” 라고 하는, 그야말로 되도 못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생명나무를 철수시켰다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거기에서 무슨 몸부림 만부림을 치고 발악을 해도, 결코 이미 알게 된 사실을 잊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우리 인간에게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
그러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산이든 바다든, 그 어디든 가서 이야기를 해야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즉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안 되는데, 그렇게 인간은 뭔가 알고 있는 것은 나팔을 불어야만, 그렇게 해야만 스트레스가 풀리든지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이 더 이상 그 위에는 아무런 구조도 없이, 즉 “나는 이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산다” 라는 것에, 그것에 한번 맛을 보게 되면, 즉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맛을 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미 맛을 본 것을 그만 쏙 빼버리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구조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을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순종을 하는 척을 해도, 역시 사람이 사는 맛은 무엇인고 하니, 그런 드라마도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이 사는 맛은, 신이 부처이고 간에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최고라는 것이다.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말이다. 이미 그것이 몸에 완전히 박혀있기 때문에, 그것이 평생을 두고 죽기 이전까지는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 나는, 장동건의 결혼소식이 더 좋아 !!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잔소리로 들리고, 같은 인간의 이야기는 아주 다정 다감하게 들리는데, 쉽게 말해서, “성경말씀을 들을래? 장동건과 고소영의 결혼 이야기를 들을래?” 라고 하면 무슨 이야기를 듣겠느냐는 말이다. 당연히 장동건의 결혼소식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성경말씀은 위의 구조에서 눌리는 명령처럼 들려서 골치가 아픈 것이고, 하지만 결혼 이야기는 자기도 어느 정도 비판할 수 있는, 즉 그렇게 비판을 한다는 것은 결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만큼은 안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남을 심판하겠다는 것인데, 즉 그런 것을 통해서 인간은 곧 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누구보다 더 뛰어나고 누구보다 더 월등한 영웅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 라는 책도 있는데 말이다. 즉 우리 인간은 최고의 자리를 그리워하고, 또한 사모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이 에베레스트에 처음 올라갔을 때는 대단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이미 7번이나 올라간 사람이 있는데, 그러니 이제는 시시하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14좌를 모두 등정하고, 그러면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모르겠는데(ㅋㅋ), 그래도 뭔가를 좀 남겨놔야 하는데 말이다.
◈ 이미 맛본 것은 유혹거리가 될 수 없어 !!
하지만 이미 맛본 것은 유혹거리가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유혹거리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최고의 자리를 향해서 자꾸 채찍질을 당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 보면, “누구든지 순종하면 그 사람의 종이 된다” 라는 말씀이 있다는 말이다. 즉 악마가 시키는 대로, 그러한 악마의 꾐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전혀 그런 악마의 유혹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아무튼 우리 인간은 몰라야 되는데, 그런데 그만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서 그 선을 넘어버렸다는 것이다. 신이란 것은 자기 마음대로, 즉 자기 원하는 것은 다 선이고 거룩이란 말이다. 자기가 하는 것을 다 옳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바로 그런 신의 맛을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 이 버릇을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누가 그런 인간을 길들이겠는가? 아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는데, 이미 악마가 더 좋다고 하는 인간을 말이다. 하나님은 잔소리를 하기에 싫고, 악마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해주니, 그런 악마가 훨씬 더 좋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 복음은 어떤 것인가? “신에게 경배하라” 라고 했을 때 “나도 신이다” 라고 나오는, 그것보다 더 좋고 기쁜 소식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즉 믿고 싶으면 믿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것을 자기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선택하고 말이다.
◈ 칼빈주의 ‘5대교리’ - 인간이 자기에게 던지는 메시지 !!
칼빈주의에 ‘5대교리’ 라는 것이 있는데, 소위 ‘TULIP' 이라고 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에게 관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에게 하는 소리라는 말이다. 즉 자기가 자기에게 말해서, “나도 신이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렇게 되어버리는데,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그런 5대교리가 모두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섬긴다는 것은, 그것을 고신측에서는 ‘코람데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하나님은 바로 자기 모습이란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섬기는 방식이 곧 5대교리라는 것이다. 즉 ‘무조건적인 선택’은, 자기가 자기를 선택한다는 말이다. 또한 ‘저항할 수 없는 은총’도 자기가 자기에게 은총을 쏟으니 당연히 저항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하나님인가? 예수님인가?” 라는, 그 둘 중에서 하나인데,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도 잘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차이가 난다고 하는 것을, 그것을 십자가 안에 모두 다 담아놓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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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주의 5대교리 - 영어의 첫 머릿글을 따서 일명 ‘튜울립(TULIP)’ 이라고 하는데, 칼빈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5대교리가 아니고, 칼빈은 이미 1564년에 사망했고, 화란의 라이덴 대학의 교수였던 알미니우스(Arminius)에 의해 주장된 5가지에 대해서, 도르트 회의(1618년)에서 칼빈주의자 고마루스(Gomarus)의 활약에 의해서 결정된 내용. 공교롭게도 고마루스가 알미니우스에게 신학박사를 학위를 수여함. 그리고 이 알미니우스 주장을 따르는 자들을 알미니안이라고 하고, 전통적으로는 존 웨슬레의 감리교가 여기에 속함. (녹취자 정리, ㅋㅋ)
1. T (Total depravity - 전적타락, 전적무능) ↔ 부분적인 타락
2. U (Unconditional election - 무조건적 선택) ↔ 조건적인 선택
3. L (Limited atonement - 제한된 속죄) ↔ 우주적 속죄
4. I (Irresistible grace - 불가항력적인 은혜) ↔ 항거할 수 있는 은혜
5. P (Perseverance of saints - 성도의 견인) ↔ 은혜의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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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를 아십니까? - 뭔 말 ??
그래서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믿느냐고 하면 상당히 기분 나빠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을 믿느냐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도 옛날에 주일학교를 다녔다” 라고 하면서 나온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지금도 하나님은 믿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고 하면, 그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도 자기가 부정되는 것이 느껴지니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선택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뜨거운 물이, 아니 용광로의 쇳물이 위에서 쏟아지듯이 그렇게 덮어져야, 즉 성령께서 우리에게 일을 하셔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이 임한 사람은 믿음이 나오고, 그것이 아닌 사람은 행함이 나온다는 말이다.
◈ 사도바울의 권면도 율법인가?
그러므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 과한 수많은 질문을 종합해보면, 결국은 “사도바울의 권면도 율법인가?” 라는 것인데, 물론 사도바울의 권면은 선한 것인데, 즉 거룩하 의로운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계시이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율법도 악한 것이 아니고 선한 것인데, 그런데 문제는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이, 그것을 자기들의 행함으로 지키기 때문에, 그것이 저주가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 6장에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라고 했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당연히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레벨이 다 같은데, 아니 오히려 신약에서의 사도바울의 권면이 구약의 율법보다 더욱 깊이가 있기 때문에, 수준이 더 높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약의 사도이니 말이다.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 율법의 완성으로 덮쳐온 것이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