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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0. 4. 23) 2강자유게시판에스겔

광주 강의(2010. 4. 23) 2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24)

광주 강의(2010. 4. 23) 6-2

둘째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24장 19-20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이것이 아마 결정적인 것 같아요.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그렇다면 이 복이 계속 쭉 이어지는 복이 아니고 이 복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복 내리시는 분이 화도 내릴 수 있고 멸할 수도 있는 분이 복을 내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죠.

그러면 뭐가 복입니까? 복음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복이 누구한테서 왔으며, 그 오신 분에 대해서, 오신 분의 현실로 우리가 들어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항상 이 복을 내 소유로 여깁니다. ‘나 복 받았다.’ 이렇게 까불다가는 화가 임하고 멸망당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복이 되는 겁니다.

이 복 안에 화도 들어있고 멸망도 들어있고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복과 화, 멸망을 통해서 여호와만 섬기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수아는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결단코 여호와를 섬기지 못한다. 그래서 너희는 복 받았지만 화도 받고 멸망 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방금 했던 이 이야기를 확실하게 심는 장소가 어디냐 하면, 여호수아 24장 26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 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라고 했지요.

이정도 준비 단계를 거쳐야 에스겔이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복을 줘도 얼마든지 화와 멸망 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복 받았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뭐가 잘못되었어요? 그 사람은 곧 화 받을 사람이고 멸망당할 사람이에요. 정말 복 받은 사람은 ‘복 받았다. 그 복을 누가 주셨는가? 그분만 섬기자.’ 이렇게 되지요.

복은 복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복을 받았으면 ‘누가 주셨습니까?’ 라고 묻고, 그 복 주신 분을 섬기는 거지요. 다시 정리해 봅시다. 일단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복 주신 분이 누구인지 물어야 하고, 다음은 복을 주신 분이 언제든지 우리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성소를 만들어서 거기에 안치해서 증거물로 삼은 겁니다.

이제 에스겔 5장 1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여기에서 ‘성소를 더럽혔다’고 합니다. 복을 주시는 분이 화도 주시고 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로 성소가 있는데, 성소를 더럽혔기에 복 주신 분이 화와 멸망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성소는 인간이 더럽힌다고 해서 여호와께서 그 성소를 포기하는 분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어떤 경우라도 복, 화, 멸망 이 과정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제 신약 성경에서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보면 혼란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한 번 믿음은 영원한 믿음이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진짜 하나님이 복 주시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화도 주시고 멸하게 하시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영원한 구원이 아니고, 영생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성령 받고도 나중에 지옥 가는 경우가 생기지 않습니까? 목사님 답변해 주세요.’

하여튼 사람들이 말을 할 때 중요한 핵심은 빼놓고 자기가 원하는 내용만 골라 챙기기 때문에 그런 요해가 생깁니다. 항상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십자가에서 구원이 주어지면 이 구원은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선악과 따먹은 다음 날 십자가가 오면 되잖아요. 왜 구약의 긴긴 시간이 있습니까?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주체(나)를 위한 십자가는 십자가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 받아 놓고 하는 말이 ‘이제는 걱정 없다. 나는 무슨 짓을 해도 구원 받는다.’ 이러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의 십자가는 결국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아니고 ‘나는 복 받았다.’고 하는 것처럼 ‘나는 이제 구원 받았다.’로 끝나지, 누구를 위한 구원인지 관심도 없어요. 구원을 주신 분(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될 사람이 구원 받은 본인을 섬기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이 이런 식입니다.

제가 강의를 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육에서 영으로 옮기는 것이 인간 힘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까 그림 다시 한 번 그리겠습니다. 덕수궁 돌담. 덕수궁 안이 영이라면, 육에서 영으로 들어갔으면 ‘목사님 어떻게 할까요?’ 물을 것도 없어요. 그저 ‘감사합니다.’라는 고백만 나온단 말이지요.

그런데 안으로 안 들어가고 바깥에 있으니까 만날 구경만 하는 거예요. 담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안이 다 보인다면, 안에 있는 바울이나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밖에서 흉내를 내는 거예요.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신학을 공부하고 개혁주의를 해서 성경을 알기는 얼마나 많이 아는지,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아요. 그냥 바깥에서 개혁주의 주장하면서 먹고 사는 거예요. 이것은 목사뿐 아니라 장로,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육인데, 이들이 섬기는 것은 이방 신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이방 신들이 있는데 ‘너희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했잖아요. 요즘 이런 말하면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친다’는 소리 나와요. “이근호 목사 이상해. 주님만 섬기라는 말은 맞는데, 그것은 반만 이야기한 것이다. 주님을 섬기면 우리한테 이런 복이 온다는 것도 이야기해야지, 왜 복 온다는 소리는 안 하고 주님만 섬기라고 하는가?”

하나님 이용해서 복 받으려고 하다가 멸망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얼마나 자기 주체가 펄펄 살아있고, 자기 현실만 고수했으면 복에 환장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교회 오실 때는 ‘주여, 제가 어떤 인간이기에 저주 받아야 마땅합니까?’ 이런 입장에서 교회에 와야 합니다.” 라고. 아마 이런 이야기를 100번도 더 했지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복 받습니까? 회개하면 복 받습니까?” 만날 자기 주체를 더 키우고, 자기가 자기 현실을 만들어서 멋있고 품위 있는 현실을 소유하려 하는데, 이것은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를 빙자해서 자기 자신을 섬기는 모양새입니다. 이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멸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 주의할 것은, 그들이 그 땅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지옥 갔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들이 땅을 잃어버리는 과정 속에서 비록 땅을 잃어버렸지만 다니엘처럼 진짜 여호와가 누구냐를 알게 된 사람은 땅 잃어버리고 쫓겨나면서도 구원 받았습니다. 구약은 하나의 모형이니까 지옥 가는 것과 연관시키면 안 돼요.

여호수아를 한 군데 더 보고 에스겔로 넘어가겠습니다. 여호수아 22장 19절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라는 말씀이 있지요. 단을 쌓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제단에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는데, 복을 받아도 우상을 섬기고 패역하면 화내고 멸망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기죠.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라고 했지요.

단을 쌓게 되면 단 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안에 언약과 말씀이 있지요. 그러면 앞으로 단을 중심으로 한다는 말은 인간이 여기 있으면 단에서 언약과 말씀이 흘러나와서 이 언약과 말씀대로 땅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만 섬긴다’는 말은 ‘모든 것이 주님의 약속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잉크를 쏟으면 잉크가 어떻게 됩니까? 주인 좋으라고, 청소하기 힘들 것을 생각해서 잉크가 가만히 있습니까? 아니죠. 잉크가 퍼지잖아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퍼집니다. 지금 에스겔의 위치는 뭐냐 하면, 잉크병이 깨지듯이 성소가 깨어지면 그동안 담겨 있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마다 뒤쫓아 가겠지요. 장차 예수님 때문에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삼분의 일은 뜻이 뭐냐 하면, 하늘, 땅, 바다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현실이 아닌 곳이 없다는 것을 차근차근 보여주는 겁니다.

계시록에서 일곱 나팔을 불었다는 말은 나머지 삼분의 이는 어떻게 됩니다. 일곱 인, 일곱 대접, 일곱 나팔 세 차례에 의해서 세상이 심판 받잖아요. 그러면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삼분의 일이라는 것은, 결국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은 주님의 성전이 깨어질 때 이미 확정되었어요. 이 각본대로 되는 거예요.

잉크병이 깨지면서 여기에서 복을 받은 자가 화를 당하고 멸망 받지요.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아까 봤지요. 삼분의 일이 누구를 따라 갑니까? 멸망당해야 될 유다 백성을 따라 가죠. 유다 백성은 지금 어디에 가 있죠? 이방나라 전 세계에 퍼지잖아요. 그렇게 퍼지면 누가 따로 옵니까? 주님이 따라오지요.

그렇다면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 그곳이 하나님께서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한 유대인으로 그들은 남은 역사를 이방인들에게 보여줘야 됩니다. 하나님의 전략이 멋지지 않습니까? 자기 백성 저금통 안에 두었다가 저금통을 탁 깨니까 동전이 우루루 흩어지고 굴러가서 침대 밑으로 들어가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안 나와 이놈아!” 하고 침대 밑으로 가서 동전을 꺼내면서 그 유대인 곁에 있는 이방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은 참 지독하구나!” 라고 알지요.

‘유대인 = 멸망 받아야 될 자들.’ 이게 기본 청사진 또는 밑그림입니다. 에스겔의 밑그림은 인자의 털이 잘리는 것을 통해서 복 받은 자도 화를 당하고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에스겔에서 성전이 깨어지는 것이 이유가 되어서 그들이 멸망 받잖아요. 그러면 왜 성전 깨지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멸망 받습니까?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 즉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깨어졌다는 것은 잉크병이 깨진 거예요. 성전이 깨지면서 성전 안에 있던 말씀이 바깥으로 흘러나온 거예요. 저금통이 깨지면 동전이 흘러나와서 사방으로 흩어지지요. 이 원칙이 뭐냐? 에스겔을 통해서 나온 하나님의 진노가 반드시 유대 백성을 멸망시키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인자지요. 에스겔 자리에 누구를 대입시킵니까?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을 대입시키죠.

요한계시록에 보면 유대인이 있던 곳이 이방인의 세계죠. 옛날에는 유대인을 갉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관여한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갉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는데 관여한 모든 세계를 주께서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첫 번째고.

그 다음 두 번째는, 심판이 전제될 때만 구원이 성립 됩니다. “왜 저는 저주 받아야 마땅합니까?”를 아는 사람은 이미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심판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심판 받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면 이방인들은 알 방법이 없어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면 이방인인 우리는 당연히 심판 받겠구나.’ 이렇게 되지요.

그런데 주께서는 유대인을 심판하시면서 그것을 통해서 진짜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이방인이 있어요. 이런 이방인을 통해서 ‘우리가 저주 받아야 마땅한데 구원 받는구나!’ 라는 그 본래의 말씀의 사랑과 자비를 알게 하시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좀 더 하도록 하고 이제 다른 말씀을 좀 하겠습니다.

공간 전체는 하나입니까, 아닙니까? 미국에 있으나 한국에 있으나 우리는 한 지구 공간에 있지요. 그렇다면 시간은 전부 하나입니까, 아닙니까? 이게 어려워요. 과거와 우리는 딴 동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간을 ‘흐르는 강물’이라고 해요. 강둑에서 보면 강물이 흘러가잖아요. 그처럼 현재의 물은 과거로 흘러가고 미래의 물이 현재로 오고 이렇게 되잖아요.

만약 우리 자신이 강에 뗏목을 타고 들어갔다고 합시다. 강둑에서 보면 이것이 다 보이지요. 이런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네모난 식빵이 있습니다. 이것을 칼로 자릅니다. 1592년 이순신 장군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런 면이 있어요.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1961년 5월 16일, 5.16혁명. 1980년 5월 18일, 5.18 민주화 운동.

우리가 이쪽에서 보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 덩어리가 되겠지요. 만약 햇볕을 쪼이는 기계가 있어서 빵 한 조각을 뽑아낸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뽑아낸 단면들을 다 모으면 전체의 시간이 되겠지요. 하나하나 뽑아내면 하나하나가 기억나겠지요. ‘아, 이건 이순신 장군. 이건 5.16 혁명.’

그러면 우리 자신의 면은 누가 봅니까? 이것을 내가 들여다보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흐르는 강물의 뗏목을 내가 타고 있다면 그것을 보는 나는 어디 있습니까? 강둑에 있습니까? 뗏목 타고 강가에 있습니까? 강가에 있지요. 그러면 이것이 뭐냐 하면, 누가 강둑에 서서 강가에 흐르는 나를 볼 수 있습니까? 그렇게 본다 한들 그런 것을 본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봐요? 내가 둘이 되어서 하나는 뗏목을 타고 있고, 또 하나는 뗏목을 타고 있는 나를 보고 있고.

빵이 흘러가는 강이 아니고 하나의 굳어진 하나의 전체 시간이 되는 거예요. 어느 인간도 시간 밖을 나올 수가 없고 모든 인간들은(시간이 이렇다고 우기는 그 인간도) 시간의 단면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까 공간적으로는 하나가 맞지요. 미국에 있으나 한국에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의 공간입니다. 문제는 시간적으로도 그러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면 그 말씀을 이루는데 있어서 말씀이 A라는 사람에게 적용할 때 B는 그냥 팔짱끼고 구경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 세계에서는 허용이 안 돼요.

만약 제가 광주에서 강의할 때 이곳에서 몇 백억 광년의 거리에 있는 안드로메다에 어떤 아저씨가 있다면 그 아저씨가 기침을 하게 되면 여기 있는 나도 기침을 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물리학에서 ‘상대성 원리’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 그 모든 것이 공간뿐만 아니고 시공간적으로 어느 한쪽이 살아가는데서 모든 사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간 + 시간’이 아니라 합쳐서 ‘시공간’입니다. 이 시공간 세계에서는 시간, 공간이 전부다 흐르는 강물이 아니고 얼어붙은 얼음. 미래까지 전부 얼어붙은 얼음이 되면 어느 시점도 서로서로 한 통속 안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이걸 누가 증명했는가?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내가 오기 전에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나를 보냈다.”는 겁니다. 내 뒤에 오실 분이 사실은 나보다 먼저 계셔서 “요한아, 내 앞서서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례요한은 독자적인 자기만의 세계는 아예 없고, 주님께서 이미 예상한 현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보다 6개월 앞서서 세상에서 활동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뿐만 아니고 구약에 있는 아브라함이나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45장 7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전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라고 했는데, 이것이 요셉의 겸손입니까, 새로운 현실을 본 겁니까? 이것이 사실이고 현실이죠. 요셉은 이런 현실을 봤는데 우리는 왜 이런 현실을 못 봅니까?

요셉의 형들은 이런 현실을 못 봐요. 그래서 요셉만 붙드는 거예요. 요셉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못보고. “요셉아, 제발 살려다오. 그때는 우리가 정말 잘못했다.” 이러고 있어요. 요셉은 자신이 더 미안해해요. “형님들, 이러지 마세요. 하나님이 당신들을 살리기 위해서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으면 ‘나는 복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복을 주셨으면 이 복이 어디서 왔는가를 봐야 돼요. 어디서 왔는가를 보게 되면 그분은 복을 주실 뿐만 아니고 화도 주시고 멸망케도 하실 분이란 사실을 믿어야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망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믿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상실함으로써 “나는 죄인 중에 괴수며, 내가 알았던 하나님은 엉터리였고 진짜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했다.” 이런 말을 바울이 해요.

바울이 예전에는 몰랐어요.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알게 되었어요. “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구나.”를 안다고요. 모든 것이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고 이미 냉동실에 굳어 있는 얼음 덩어리. 그 안에서 공간이 하나인 것처럼 시간도 결국은 하나가 되고.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같은 공간에서 이야기한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이 한 덩어리가 된 시간관입니다. 그 시공이 덕수궁(천국) 안에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이 안에 안 들어온 사람은 이 세계를 몰라요. 만날 ‘어떻게 하면 복 받습니까?’ 이런 소리만 하는데, 그 복 받아봐야 모든 것이 자기중심이니까 그 받은 복 때문에 저주 받지요.

덕수궁 안에 들어와야 되는데 들어오지 않고 있어요. 사실은 안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못 들어오도록 막고 있어요. 하나님이 은혜를 줘놓고는 못 들어오도록 막아요. 막는 것도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막으시는 겁니다.

시간적으로 하나가 되면 그 다음부터는 인자, 에스겔은 뭘 관여했습니까? 유대인을 끝가지 잡아서 유대인을 다 멸망시키는 일에 관여했다면, 이 에스겔의 자리가 인자의 자리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예수님을 집어넣으면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 아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과정을 통해서 에스겔 예언대로 세상을 삼분의 일씩 나눠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조치하십니다. 그리고 난 뒤에는 속이 시원하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제가 강의에서 안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비가 나오고 용서가 나오는가? 그 이야기는 아직 안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은 오늘 본문대로 이스라엘을 추적해서 끝까지 멸망시키는 진노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지금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구원과 자비와 용서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자리, 멸망의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를 위한 현실만 현실로 봐요. “하나님, 저 교회 왔습니다. 복 주세요.” 이렇게 하면서 오잖아요. 복 달라는 말은 ‘내가 왔으니까 나에게 복 달라’는 것입니다. 주체가 나입니다.

내 자체가 스스로에게 저주와 벌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 같은 인간은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어떤 증거물이 먼저 주어져야 됩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인간이 주님을 버렸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옛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버리고 포기했습니다. 그게 우리한테는 무척 다행스럽지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저주했기 때문에 우리끼리 복 많다 적다가 성립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이미 이방인들은 자체가 언약이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성소가 없어요. 성소가 없다는 말은 이미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 줄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죄지요. 이미 저주 받기로 작정된 인간들이기 때문에 아예 없고, 이스라엘 같은 경우도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지만 멸망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성소의 자리, 땅의 자리가 이스라엘 때문에 장소가 비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에스겔에 나옵니다.

에스겔 6장 4절을 보면 “너희 제단이 황무하고 태양상이 훼파될 것이며 내가 또 너희 중에서 살육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고 했지요. 그렇게 하신 이유가,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추방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뭘 보존하겠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깨끗하게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이렇게 쫓아내면 이 땅은 비어있는 땅이 되겠지요. 여기에 인자가 오게 되면, 인자는 “내가 온 것은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 위함이라.”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왔다고 해놓고는, 정작 믿음이 있는 자는 이방인 백부장입니다. 나라의 본 자손은 쫓겨나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는 온단 말이지요. 올 때 인자되시는 분이 어떤 언약을 맺는가 하면, 인간의 행함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인간의 마음속에 율법을 심어 넣어요. 성령을 통해서.

이렇게 해서 그 마음에 뭔가 꽂힌 사람은 주도권이 껍데기(인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안에 들어 있는 분에 의해 주도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모든 현실은 껍데기의 나를 위함이 아니고 안에 계신 분을 위하여 모든 것이 성취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중의 괴수에게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옴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은 졸지에 의인이 됩니다. 그 사람의 행함이 아니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믿음) 때문에 의인이 돼요.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려고 생각 안 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약속 때문에 된 것이지 아브라함 본인의 약속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삭을 낳는 것도 누구 뜻입니까? 아브라함은 애 없이 그냥 살려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아기를 준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질질 끌려가는 거죠. 내 안에 성령이 계시면 모든 현실이 겉에 있는 나는 내 현실이라고 우기고, 속에 계신 주님은 ‘너의 현실이 아니고 내 현실(예수님께서 우리를 쓰시는 현실)이다’라고 하고, 이 투쟁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벌어집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1)우상을 추방하고 2)여호와만 섬기죠. 그런데 우상을 누가 섬겼습니까? 이스라엘이 섬겼죠. 언약을 버렸기에 우상을 섬겼죠. 그러면 이방인인 우리들은 우상 섬기는 자였습니까, 여호와 섬기는 자였습니까? 이스라엘도 우상 섬기는데 우리 같은 이방인이야 뻔하지요.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는데 그 우상을 누가 만들었어요. 이방인들의 종교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날 때부터 이방인이죠. 우상 섬기는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나만 섬기는 거예요. 이것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 뭘 분명히 해야 된다? 나는 날 때부터 나만 섬기는 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돼요. 이걸 분명히 드러내는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께서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올 때 ‘주여, 제가 어떤 죄목 때문에 죽어야 마땅한 죄인입니까?’를 싱글벙글 웃으면서 들어보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 이래서 우리는 우리만 섬기는 인간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작업을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이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런 일이 벌어진 사람은 주님만 섬기게 되지요. 주님이 아니면 나에게 그러한 차이점을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 힘으로 주님을 섬기면 이것은 누구의 주님입니까? 주님의 주님이 아니고 내 좋아라고 하는 내 현실의 주님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까 말한 덕수궁(천국) 안에는 들어오지 않고 돌담만 평생을 서성이면서 ‘나는 목사네, 나는 장로네’ 하면서 빙빙 돌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막상 들어오면 “주여,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은 창세전부터 모든 말씀을 성취시키시는 주님만 믿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구약으로 말하면 ‘오직 주님만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게 성소요 성전입니다. 주의 말씀이 집결되어 있는 곳, 거기서 성취를 보는 곳.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저주와 심판을 확대시킵니다. 우리는 나만 생각하고 나만 섬기는데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강제로 어디에 집어넣는가? ‘너는 심판 받아야 마땅하고 너는 저주 받아야 마땅해.’ 라는 자리에 넣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저 같은 인간을 왜 구원 하십니까?’ 이런 소리가 나오지요.

이것은 낯선 현실입니다. 내가 생각한 현실을 주께서 주시지 않고 나로 하여금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고 깨우치는 그런 현실 속에 왜 저를 집어넣었습니까? 그러면 주님은 ‘네가 바로 남은 자다.’라고 하시지요.

하박국 3장 17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이 말씀과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저주 받는다는 말씀을 비교해 보세요. 왜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습니까? 신명기로 하면 저주 받아서 열매가 없지요. 그러니까 하박국 3장의 이 말씀은 뭐냐? 우리는 저주 받아도 마땅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저주 속에서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8).” 이것이 바로 복과 저주와 진노를 다 거쳐서,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멸망한 그 자리에 우리 이방인들을 초대해서 ‘바로 나는 개입니다. 그러나 혹시 먹다 남은 부스러기 없습니까?(눅7:28)’ 라고 하는 이런 사람이 구원 받는 자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는 항상 심판과 저주로 인도하지만 말씀이 없는 곳에서는 “여러분, 성공해야 됩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해야 되고, 양떼가 많아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 자신을 계속 멸망당할 수밖에 없도록 끌고 갑니다.

복 받으려고 오면 안 됩니다. 이미 우리는 복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복 받은 것에 머물면 큰 일 납니다. “누구십니까? 나 같은 자에게 복을 주시다니” 라고 그분을 믿어야 됩니다. 주 여호와를 믿어야지 복 받은 나를 믿으면 안 됩니다.

제자들이 그런 일이 있었지요.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어 예수님이 풍랑을 잔잔하게 한 뒤에, 풍랑이 문제가 아니고 “누구십니까? 풍랑도 잔잔케 하시는 분이” 이런 식으로 “누구십니까?” 라고 말하는 순간 잠시 누구를 잊었어요? 나의 현실을 잊지요.

에스겔 7장 2-3절을 보겠습니다. “너 인자야 주 여호와 내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말하노라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발하여 네 행위를 국문하고 너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끝났다고 했지요. 요한계시록 8장 13절에 보면 비슷한 말씀이 나와요. 독수리가 날아다니면서 큰 소리로 하는 말이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에스겔 7장 4절을 봅시다. “내가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여기 끝부분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라고 했지요. 여호와는 자기 현실밖에 몰라요. 자기가 만든 현실 외에 다른 현실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착각해서 한 모퉁이를 떼서 가까이 있는 이것은 나의 현실이라고 우기다가 혼나는 거예요. 이처럼 나의 현실로 우기다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놀라운 은총이 우리에게 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살아온 현실이 우리 현실이 아닌데 내 현실이라고 우기면서 살았습니다. 내 것과 주님의 것을 구분하며 흘러가는 강물을 쳐다보듯이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시공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자로, 갇힌 자로, 배치되어 있는 자로, 주님의 일을 위해 쓰여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 4. 30. 11:1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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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