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우주의 구조] 브라이언 그린 저 박병철 역 승산(서울:2008)
[일반] [우주의 구조] 브라이언 그린 저 박병철 역 승산(서울:2008)
이름 : 이근호(IP:117.55.136.28)
우주의 구조
브라이언 그린 저 박병철 역 승산(서울:2008)
2010-04-29 12:57:24 이름 : 이근호
Ⅰ
‘시간과 공간, 그 근원을 찾아서’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만큼 인간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요소로 환원된 대자연의 부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물리학은 그 대자연을 자신의 주체적 인식 안에서 다시 소집하려한다. 이렇게 되면 대자연에서 의미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을 위한 대자연인 셈이다. 물리학은 이런 인간의 본심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도리어 절대적 기준점으로 굳히려 한다.
이 절대화 놀이를 위해 대자연은 파트너가 된다고 여긴다. 잡으려고 하면 도망치고, 포기하면 다가오고, 참 재미난다. 이렇게 해서 인간만이 대자연에서 유일하게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즉 대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해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 아니면 결코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해석을 멈추지 못한다. 대자연에 대한 해석자가 곧 대자연의 주인공이라는 논리에 의해서다. 인간이 생각하는 신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의미 없는 겁니다” 이 논리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보일까?
Ⅱ. 공간과 시간이 과연 절대적인가?
운동에는 두 종류가 있다. 등속운동과 가속운동이다. 등속운동이란 속도에 변화가 없으면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가속운동이란 속도 자체가 변화하거나 방향이 바뀌는 운동을 말하는데 이럴 경우 비교되는 대상이 없이도 감지된다. 그것은 비교되는 대상이 따로 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공간이다.
뉴턴은 회전하는 물통실험을 통해서 이 공간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아무 것도 없는 우주공간에서 회전하는 물통 속의 물이 오목하게 수면이 들어가는 것은 오로지 절대공간만이 있기에 거기에 대해서 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통이 멈춰도 어느 정도까지는 물이 오목하게 돌고 있다. 이처럼 절대공간은 물체의 운동여부를 판단하는 최후의 보루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절대공간 안에서 우주 전체가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이동했다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도대체 절대공간 안에서 왼쪽은 어느 쪽이며 오른쪽은 어느 쪽인가? 난처한 문제다.
여기에 마흐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게 된다. 텅 빈 공간에서 홀로 회전하면 본인이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길이 없다. 가만히 서 있는 것하고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돌아가고 있음을 확인 기준들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별들이 산재되어 있는 우주 안에서 우리 몸을 회전하면 사지가 바깥으로 당겨지는 힘을 느낀다. 따라서 가속하는 힘은 주변에 널려 있는 물체의 양에 비례하는 것이다. 즉 공간이란, 뭔가가 있어야 하고 그 있는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타나는 힘의 장(場)이고 보았다. 아무 것도 없으면 공간도 없다고 본 것이다.
맥스웰은 1800대 초반, 이 장(field) 개념을 찾아낸 사람이다. 막대자석 주변에 쇳가루를 뿌리니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 역선(力線)이 나타났다. 공간이 그냥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고유의 자기장이 자석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 공간에 빛이 등장한다. 빛과 더불어서 시간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게 되었다. 뉴턴은 시간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시간은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은 채 스스로 존재하며, 외부의 어떤 기준에도 상관없이 항상 동일한 속도로 흐른다”
그런데 빛이 등장으로 이 시간관이 깨어져버렸다.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고부터, 공간과 시간이란 그것을 바라보는 구경꾼(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틀려지게 된다. 만약과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라면 빛이라는 것도 관측자에 따라 속도가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빛의 속도는 그 어떤 공간이나 시간이나 각도에 따라서도 빠르거나 늦거나 하지 않고 동일하다. 따라서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절대공간과 절대시간관을 수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빛은 특이하게도 항상 광속으로 달리기 때문에 나이를 먹지 않는다. 만일 광자가 시계를 차고 있다는 그 시계의 초침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빛은 100억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이 똑같다. 즉 시간 자체가 빛의 세계에서는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동시에’라는 표현도 사람마다 환경마다 다 다르게 된다. 모든 이가 동시를 느낄 수 없다. 동시의 상대성이다. 시간과 공간은 이렇듯 절대가 아니며 빛의 속도만이 절대이기에 시간과 공간이 같이 변동한다는 시공간성이 곧 절대적이다.
2. 힘
빛의 보여주는 불변의 속도로 인하여 시공간성이 절대적이라면 우주의 모든 힘도 이 빛의 속도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다. 사람이 힘을 느끼는 것은 중력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중력에 온 몸을 맡기면 체중이 없어지는데 그 이유는 몸을 구성하는 모든 원자들이 중력과 같이 가속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속운동을 하고 있다면 시공간이 달라진다. 이로서 중력을 받고 있는 물체는 중력이라는 가속도 때문에 휘어진 공간에 놓여서 움직이는 바이다.
따라서 체중에 따라 각자가 놓여있는 시공간이 다 다르다. 이는 곧 개인마다 느끼는 점이 다르다는 말인데 과연 개인마다 실체가 다 다를까? 여기에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양자역학이 이 문제를 엄밀하게 다루게 된다. 공간에 두 마리의 새가 나르면 그 새들은 각자 상호 독립적인 개체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그 두 마리의 새가 상호 신호전달과정이 없더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와 구조 속에 놓여있다면 공간이라는 것이 엄밀하게 두 마리의 새를 분리하는 척도가 될 수가 없다.
물질의 궁극적인 입자들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으며, 한 입자를 관측하여 특성이 알려주면 그 결과는 다른 입자의 관측결과에 즉각적인 영향을 준다. 즉 마치 한 덩어리에 속해있는 특성을 보이는 것이다. 어떤 특성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속성을 공유하게 되면 각 개별체를 각각의 실체로 간주할 수 없게 된다.
입자들은 개별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행동을 보인다. 그것이 바로 파동성이다. 혼자서 통과한 전지입자가 스크린에 와 닿을 때는 간섭무늬(파동의 중첩성)를 낳는다. 이것은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했다는 말이 된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논리다. 이것은 곧 하나의 입자가 두 종류의 과거를 갖는다는 말이 된다. 선택의 몫은 관측자의 몫이다. 소위 ‘과거 골라내기’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관측자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하나의 과거만이 채택되는 것이다. 하나의 과거만을 고수한다는 것은 곧 다른 과거를 지운다는 말이 된다. 달리 말해서, 미래에 일어난 사건(선택사건)의 도움을 받아 과거의 스토리가 완성된다는 말이다.
이런 개체적 입자를 찾을 때는 확률이 동원된다. 방금 전에 ‘여기’ 있던 전자가 잠시 후 ‘저기’에서 발견될 수가 있다. 만약에 5군데가 다 발견할 확률이 있는데, 결국 한곳을 지정하면 조금 전까지 발견할 확률이 있었던 4 군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한 곳에만 등장한다. 이렇게 모든 과거는 다 상호 간섭 현상의 결과물이다. 실체란 일종의 퍼포먼스에 불과하다. 허상이다 는 말이다. 양자역학이 아무런 한계 없이 모든 만물에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이라면, 관측자와 관측대상도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이는 곧, 진실과 실제를 인간이 알 수 없고 단지 확률에 따라 환상만 양산할 뿐이다 는 말이다. 이것은 아무리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똑같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성 원리와 시공간성을 하나로 묶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가 모순 없이 결합되지 아니하면 우주의 힘의 원천을 알 길이 없고 우주의 구조도 설명할 길이 없다.
거대 우주의 실상을 위하여 시공간성으로 따져보는 상대성원리의 도입되지만 미소 우주에 대해서는 양자역학이 도입된다. 우주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흐르는 시간관’을 버리고 ‘꽁꽁 얼어버린 전체 시간관’을 고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한순간, 한순간 모두다 내용이 변동되지 않는 빵조각 단면들이 된다. 그 단면들이 모여서 꽁꽁 얼어버린 하나의 길쭉한 식빵처럼 전체 우주상을 이룬다.
그렇다면 왜 시간에 대해서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방향성을 갖는다고 하는가? 그것은 엔트로피, 곧 무질서도(無秩序度) 때문이다. 계란이 깨어버린 후 다시 하나의 계란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즉 질서에서 무질서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우주는 왜 이런 성질을 갖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곧 ‘왜 최초의 우주도 과연 질서정연한 우주였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하지만 수학적으로 따지고 보면, 대자연은 늘 대칭성을 갖고 있다. 현재 지점에서 질서가 무질서로 나아간다면, 그 시간적 대칭성으로 인하여 초기의 우주도 극히 무질서해야 한다. 즉 확률적으로 초기 우주가 무질서 상태로 놓이기 보다는 질서 상태로 놓이는 것이 극히 비정상적이다 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질서가 생기고(저低-엔트로피 상태) 그 질서 상태로부터 계속해서 고-엔트로피(무질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초기에 무질서에 급작스럽게 질서 쪽으로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상대성 원리보다 양자역학이 동원되어야 한다.
우주의 질서가 잡힌 것은 빅뱅(큰 폭발) 때문이다. 이 빅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공간 개념을 늘려 잡아야 한다. 빅뱅이 이미 존재하는 고정된 공간 속에서 발생한 폭발사건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팽창하면서 나타나는 결과라면 우주공간에는 ‘팽창의 중심’이라는 개념이 필요 없다. ‘공간의 경계선’이라는 개념도 필요치 않다. 즉 빅뱅은 어느 한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전 공간에 걸쳐 한꺼번에 일어난 사건이다.
우주 자체가 상전이(相轉移)가 일어나면 그동안 갖고 있던 대칭성을 잃어버린다. 우주의 온도가 지극히 높았을 때에는 모든 힘들이 하나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온도가 내려가면서 우주적 위상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지금과 같이 네 종류의 힘(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이 대통일이론의 기본 가설이다.
우주가 완전히 무질서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면 우주의 진화는 단순히 ‘무질서한 상태를 유지하는 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 초기에 있었다는 말인데 뭐가 있는가? 원래 중력이란 잡아당기는 힘이니 밀어내는 힘이 아니다. 밀어내는 중력이 초기에 있었기에 폭발한 것이다. 현 우주의 구성은, 빛을 발하는 밀도가 전체의 5%를 차지하고, 암흑 물질의 밀도가 25%를 차지한다. 그러면 70%가 아직 규명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초기 인플레션에 의해서 설명해 줄 수 있는 증거물이 된다.
아무런 입자도 없을 때, 초고온 상태였던 초기우주에서 차츰 식다가 한계온도에 도달하면 얼음처럼 얼어붙는데 다 얼어붙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역(장 field)이 출현하게 된다. 숨어있던 성질이 나오는 것이다. 이 장이 힉스장이다.(질량조차 없는 우주의 근본 입자의 장) 전 우주 공간이 힉스장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최소한의 에너지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힉스장이 없다면 모든 입자들이 질량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질량이란 에너지 장 속에서 움직일 때 갖는 저항이기 때문이다.
이 과냉각된 힉스장이 가운데 높은 위치 에너지를 갖고 있었는데 이는 곧 상대적으로 고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에너지 그릇의 중심에 있는 돌출부에 안착한 힉스장은 마치 언덕 꼭대기에 놓인 공이 계곡으로 굴려가는 것처럼 아주 빠른 시간 내에 최소지점으로 찾아들어가면서 이 힉스장에서 ‘밀어내는 중력’, 즉 음력(음力)을 내놓게 된다. 여기에서 엄청난 팽창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공간내의 모든 지점들을 서로 멀리 도망치게 밀어내었다. 이 힉스장을 ‘인플라톤장’이라고 해서 우주 인플레이션의 본질로 보고 있다. 이 인플라톤장은 고에너지 상태에서 이탈하여 에너지 그릇의 가장 깊은 계곡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와 함께 밀어내는 중력도 사라졌다. 에너지 계곡을 찾아가는 인플라톤장은 양자역할의 법칙에 따라 약간의 요동을 겪는다. 이 요동 때문에 인플라톤장이 최소 에너지에 이르는 시간은 각 지점마다 조금씩 달라지게 되고, 인플레이션 팽창이 끝나는 시간도 각 지점마다 조금씩 달라져서 공간의 팽창률은 위치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게 된다.
피자 반죽을 만들 때 균일하게 문지르지 않으면 군데군데 작은 덩어리나 주름이 생기는 것처럼, 우주공간에도 약간의 주름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혼돈상태의 원시우주에서 우연히 일어난 양자요동으로 탄생한 것이다. 대형 오락실에서 수백 개의 슬롯머신이 동시에 작동되고 있을 때, 그들 중 여러 개가 대박을 터뜨릴 수가 있는 것처럼 인플레이션이 단 한 곳에서만 일어날 필요는 없다.
인플라톤장에 의해 밀어내는 중력이 약해지면서, 끌어당기는 중력이 전 공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끌어당기는 중력은 양자적 요동으로 생겨난 작은 불균일성을 기점으로 물질이 뭉쳐지도록 만든다. 가까이 있는 태양과 행성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별과 은하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태양이 분출하는 저-엔트로피(낮은 무질서도) 에너지는 지국에 서식하는 저-엔트로피 생물인 식물의 생명활동을 가능하게 했고 그로부터 엔트로피가 더욱 작은 고등동물이 탄생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열을 비롯한 여러 가지 노폐물과 쓰레기가 생성되면서 총 엔트로피는 꾸준히 증가해왔다. 식탁에 있는 계란이 식탁에서 추락하여 깨지는 사건은 고-엔트로피 상태로 사정없이 이동해 가는 우주의 일부인 것이다.
1948년에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헨드릭 카시미르는 전자기장의 진공요동을 실험하면서 진공상태에서에서도 양자적 요동이 끊임없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그리고 두 금속판을 가까이 가져가면 장의 요동이 무작위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패턴을 갖고 있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이것은 공간의 변화율이 0이라고 할지라도 조용한 것이 아니라 상쇄되었기 때문이었다. 미세 표면에서서 소립자들이 그야말로 난장판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기서 ‘끈이론’이 나온다. 모든 입자들이 내뿜는 다양한 패턴들은 더 궁극적인 단위라고 할 수 있는 끈의 진동에서 나온 변화들이다. 초미세 영역에서는 ‘점’이라는 주체 개념은 사라지도 ‘진동’만 있을 뿐이다. 입자의 진량이란 진동하는 끈의 에너지에 해당된다. 입자들 사이의 의 대칭 또한 끈이 진동 패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끈 이론’은 ‘초대칭 끈이론’, 즉 ‘초끈이론’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 초끈은 ‘숨어있는 차원’이 있다. 이 숨어 있는 공간차원은 7차원이다. 기존의 감각적으로 알 수 있는 깊이, 넓이, 길이의 3차원의 공간차원과 시간 차원까지 포함하면 총 11차원이 된다. 초미세 영역에 살고 있는 벌레를 저녁파티에 초대하려면 공간과 관련된 총 10개의 정보를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파티 시각까지 포함해서 11개의 정보가 필요하다.
이 여분의 차원이 우리와 함께 있어도 우리는 차원을 알 수가 없는 이유는, 사물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전자기력이 도움으로 물체의 존재를 감지해야 하는데 우리가 3차원의 막 안에 속박되어 있다면 여분의 차원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을 감지할 방법이 없다. 광자가 그 여분의 차원에 침입했다가 다시 나와서 우리의 눈에 들어와야 하는데, 광자는 우리에게 친숙한 3차원 공간을 이탈할 수가 없으므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력은 이 여분의 막차원에 구애받지 않고 그 여분의 차원의 영향력을 3차원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정보를 주고 있다. 중력장이 여분의 차원을 다 마저 채우고 난 뒤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중력자의 크기가 달라져 있게 된다. 실험 물리학자들은 1mm 이내의 거리에서 중력이 거리에 역제곱 비례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사례를 발견하기 위해 지금도 안간힘을 쓰고 있다.
Ⅲ. 복음적인 평
공간을 절대적으로 보지 아니하므로서 ‘왼쪽, 오른쪽’ 측정을 시도할 관점마저 공간 안에 포섭이 된다. 이렇게 되면 ‘왼쪽, 오른쪽’을 결정할 절대적 기준의 자리에서 우리 인간은 떠나야한다.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가늠하는 자격자가 되신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태복음 25:31-33)
또한 시간의 모든 사건들이 상호 영향을 주므로서 시간 안에 갇혀 있는 인간으로서는 시간 전체를 판단하거나 조망할 자격이 박탈된다. 모든 일은 창세 전에 확정된 내용만으로서 시간의 막대는 채워진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3:9)
이는 이미 주체자가 느끼고 있는 믿음은 미래까지 이어질 믿음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주체로 바뀌어지면서 새로운 믿음으로 채워지는 식으로 성도가 살아가게 됨을 말해준다. 즉 말씀이 유일한 해석자께서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매일같이 성도를 다루심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해석을 늘 버려지고 새로운 해석으로 채워지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10-11)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공간으로서 공간의 전부를 말할 수 없는 것은 시간을 초월한 여분의 묵시적 세계가 늘 이 3차원의 세계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태복음 17: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우주의 중심을 모른다. 우주의 중심은 성전이다.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예레미야 17:12-13)
다니엘의 70이레의 의미를 비롯해서 모든 우주의 일들을 완성하신 하나님의 성전중심으로 다루시는 것이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주가 되셔서 어린양의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요한계시록 6:12-16)
움직이는 별을 보았던 동방박사들은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경배했다. 물리학의 모든 진리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으로 그 완성을 향한 발걸음을 멈춰야 한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린도후서 10:5)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립보서 3:8-9)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도 없고 마음으로 알 수 없는 사실, 그 구원의 진리는 오직 십자가 피흘심의 지속되는 능력에서만 나온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린도전서 1:18-19)
3차원에서 나오는 문법과 역사 이해에 근거한 신학, 이것도 십자가 앞에서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들의 어리석은 지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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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10-04-30 12:12
우주의 구조
브라이언 그린 저 박병철 역 승산(서울:2008)
2010-04-29 12:57:24 이름 : 이근호
Ⅰ
‘시간과 공간, 그 근원을 찾아서’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만큼 인간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요소로 환원된 대자연의 부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물리학은 그 대자연을 자신의 주체적 인식 안에서 다시 소집하려한다. 이렇게 되면 대자연에서 의미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을 위한 대자연인 셈이다. 물리학은 이런 인간의 본심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도리어 절대적 기준점으로 굳히려 한다.
이 절대화 놀이를 위해 대자연은 파트너가 된다고 여긴다. 잡으려고 하면 도망치고, 포기하면 다가오고, 참 재미난다. 이렇게 해서 인간만이 대자연에서 유일하게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즉 대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해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 아니면 결코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해석을 멈추지 못한다. 대자연에 대한 해석자가 곧 대자연의 주인공이라는 논리에 의해서다. 인간이 생각하는 신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의미 없는 겁니다” 이 논리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보일까?
Ⅱ. 공간과 시간이 과연 절대적인가?
운동에는 두 종류가 있다. 등속운동과 가속운동이다. 등속운동이란 속도에 변화가 없으면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가속운동이란 속도 자체가 변화하거나 방향이 바뀌는 운동을 말하는데 이럴 경우 비교되는 대상이 없이도 감지된다. 그것은 비교되는 대상이 따로 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공간이다.
뉴턴은 회전하는 물통실험을 통해서 이 공간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아무 것도 없는 우주공간에서 회전하는 물통 속의 물이 오목하게 수면이 들어가는 것은 오로지 절대공간만이 있기에 거기에 대해서 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통이 멈춰도 어느 정도까지는 물이 오목하게 돌고 있다. 이처럼 절대공간은 물체의 운동여부를 판단하는 최후의 보루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절대공간 안에서 우주 전체가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이동했다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도대체 절대공간 안에서 왼쪽은 어느 쪽이며 오른쪽은 어느 쪽인가? 난처한 문제다.
여기에 마흐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게 된다. 텅 빈 공간에서 홀로 회전하면 본인이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길이 없다. 가만히 서 있는 것하고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돌아가고 있음을 확인 기준들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별들이 산재되어 있는 우주 안에서 우리 몸을 회전하면 사지가 바깥으로 당겨지는 힘을 느낀다. 따라서 가속하는 힘은 주변에 널려 있는 물체의 양에 비례하는 것이다. 즉 공간이란, 뭔가가 있어야 하고 그 있는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타나는 힘의 장(場)이고 보았다. 아무 것도 없으면 공간도 없다고 본 것이다.
맥스웰은 1800대 초반, 이 장(field) 개념을 찾아낸 사람이다. 막대자석 주변에 쇳가루를 뿌리니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 역선(力線)이 나타났다. 공간이 그냥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고유의 자기장이 자석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 공간에 빛이 등장한다. 빛과 더불어서 시간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게 되었다. 뉴턴은 시간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시간은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은 채 스스로 존재하며, 외부의 어떤 기준에도 상관없이 항상 동일한 속도로 흐른다”
그런데 빛이 등장으로 이 시간관이 깨어져버렸다.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고부터, 공간과 시간이란 그것을 바라보는 구경꾼(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틀려지게 된다. 만약과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라면 빛이라는 것도 관측자에 따라 속도가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빛의 속도는 그 어떤 공간이나 시간이나 각도에 따라서도 빠르거나 늦거나 하지 않고 동일하다. 따라서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절대공간과 절대시간관을 수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빛은 특이하게도 항상 광속으로 달리기 때문에 나이를 먹지 않는다. 만일 광자가 시계를 차고 있다는 그 시계의 초침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빛은 100억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이 똑같다. 즉 시간 자체가 빛의 세계에서는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동시에’라는 표현도 사람마다 환경마다 다 다르게 된다. 모든 이가 동시를 느낄 수 없다. 동시의 상대성이다. 시간과 공간은 이렇듯 절대가 아니며 빛의 속도만이 절대이기에 시간과 공간이 같이 변동한다는 시공간성이 곧 절대적이다.
2. 힘
빛의 보여주는 불변의 속도로 인하여 시공간성이 절대적이라면 우주의 모든 힘도 이 빛의 속도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다. 사람이 힘을 느끼는 것은 중력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중력에 온 몸을 맡기면 체중이 없어지는데 그 이유는 몸을 구성하는 모든 원자들이 중력과 같이 가속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속운동을 하고 있다면 시공간이 달라진다. 이로서 중력을 받고 있는 물체는 중력이라는 가속도 때문에 휘어진 공간에 놓여서 움직이는 바이다.
따라서 체중에 따라 각자가 놓여있는 시공간이 다 다르다. 이는 곧 개인마다 느끼는 점이 다르다는 말인데 과연 개인마다 실체가 다 다를까? 여기에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양자역학이 이 문제를 엄밀하게 다루게 된다. 공간에 두 마리의 새가 나르면 그 새들은 각자 상호 독립적인 개체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그 두 마리의 새가 상호 신호전달과정이 없더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와 구조 속에 놓여있다면 공간이라는 것이 엄밀하게 두 마리의 새를 분리하는 척도가 될 수가 없다.
물질의 궁극적인 입자들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으며, 한 입자를 관측하여 특성이 알려주면 그 결과는 다른 입자의 관측결과에 즉각적인 영향을 준다. 즉 마치 한 덩어리에 속해있는 특성을 보이는 것이다. 어떤 특성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속성을 공유하게 되면 각 개별체를 각각의 실체로 간주할 수 없게 된다.
입자들은 개별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행동을 보인다. 그것이 바로 파동성이다. 혼자서 통과한 전지입자가 스크린에 와 닿을 때는 간섭무늬(파동의 중첩성)를 낳는다. 이것은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했다는 말이 된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논리다. 이것은 곧 하나의 입자가 두 종류의 과거를 갖는다는 말이 된다. 선택의 몫은 관측자의 몫이다. 소위 ‘과거 골라내기’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관측자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하나의 과거만이 채택되는 것이다. 하나의 과거만을 고수한다는 것은 곧 다른 과거를 지운다는 말이 된다. 달리 말해서, 미래에 일어난 사건(선택사건)의 도움을 받아 과거의 스토리가 완성된다는 말이다.
이런 개체적 입자를 찾을 때는 확률이 동원된다. 방금 전에 ‘여기’ 있던 전자가 잠시 후 ‘저기’에서 발견될 수가 있다. 만약에 5군데가 다 발견할 확률이 있는데, 결국 한곳을 지정하면 조금 전까지 발견할 확률이 있었던 4 군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한 곳에만 등장한다. 이렇게 모든 과거는 다 상호 간섭 현상의 결과물이다. 실체란 일종의 퍼포먼스에 불과하다. 허상이다 는 말이다. 양자역학이 아무런 한계 없이 모든 만물에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이라면, 관측자와 관측대상도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이는 곧, 진실과 실제를 인간이 알 수 없고 단지 확률에 따라 환상만 양산할 뿐이다 는 말이다. 이것은 아무리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똑같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성 원리와 시공간성을 하나로 묶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가 모순 없이 결합되지 아니하면 우주의 힘의 원천을 알 길이 없고 우주의 구조도 설명할 길이 없다.
거대 우주의 실상을 위하여 시공간성으로 따져보는 상대성원리의 도입되지만 미소 우주에 대해서는 양자역학이 도입된다. 우주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흐르는 시간관’을 버리고 ‘꽁꽁 얼어버린 전체 시간관’을 고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한순간, 한순간 모두다 내용이 변동되지 않는 빵조각 단면들이 된다. 그 단면들이 모여서 꽁꽁 얼어버린 하나의 길쭉한 식빵처럼 전체 우주상을 이룬다.
그렇다면 왜 시간에 대해서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방향성을 갖는다고 하는가? 그것은 엔트로피, 곧 무질서도(無秩序度) 때문이다. 계란이 깨어버린 후 다시 하나의 계란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즉 질서에서 무질서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우주는 왜 이런 성질을 갖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곧 ‘왜 최초의 우주도 과연 질서정연한 우주였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하지만 수학적으로 따지고 보면, 대자연은 늘 대칭성을 갖고 있다. 현재 지점에서 질서가 무질서로 나아간다면, 그 시간적 대칭성으로 인하여 초기의 우주도 극히 무질서해야 한다. 즉 확률적으로 초기 우주가 무질서 상태로 놓이기 보다는 질서 상태로 놓이는 것이 극히 비정상적이다 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질서가 생기고(저低-엔트로피 상태) 그 질서 상태로부터 계속해서 고-엔트로피(무질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초기에 무질서에 급작스럽게 질서 쪽으로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상대성 원리보다 양자역학이 동원되어야 한다.
우주의 질서가 잡힌 것은 빅뱅(큰 폭발) 때문이다. 이 빅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공간 개념을 늘려 잡아야 한다. 빅뱅이 이미 존재하는 고정된 공간 속에서 발생한 폭발사건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팽창하면서 나타나는 결과라면 우주공간에는 ‘팽창의 중심’이라는 개념이 필요 없다. ‘공간의 경계선’이라는 개념도 필요치 않다. 즉 빅뱅은 어느 한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전 공간에 걸쳐 한꺼번에 일어난 사건이다.
우주 자체가 상전이(相轉移)가 일어나면 그동안 갖고 있던 대칭성을 잃어버린다. 우주의 온도가 지극히 높았을 때에는 모든 힘들이 하나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온도가 내려가면서 우주적 위상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지금과 같이 네 종류의 힘(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이 대통일이론의 기본 가설이다.
우주가 완전히 무질서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면 우주의 진화는 단순히 ‘무질서한 상태를 유지하는 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 초기에 있었다는 말인데 뭐가 있는가? 원래 중력이란 잡아당기는 힘이니 밀어내는 힘이 아니다. 밀어내는 중력이 초기에 있었기에 폭발한 것이다. 현 우주의 구성은, 빛을 발하는 밀도가 전체의 5%를 차지하고, 암흑 물질의 밀도가 25%를 차지한다. 그러면 70%가 아직 규명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초기 인플레션에 의해서 설명해 줄 수 있는 증거물이 된다.
아무런 입자도 없을 때, 초고온 상태였던 초기우주에서 차츰 식다가 한계온도에 도달하면 얼음처럼 얼어붙는데 다 얼어붙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역(장 field)이 출현하게 된다. 숨어있던 성질이 나오는 것이다. 이 장이 힉스장이다.(질량조차 없는 우주의 근본 입자의 장) 전 우주 공간이 힉스장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최소한의 에너지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힉스장이 없다면 모든 입자들이 질량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질량이란 에너지 장 속에서 움직일 때 갖는 저항이기 때문이다.
이 과냉각된 힉스장이 가운데 높은 위치 에너지를 갖고 있었는데 이는 곧 상대적으로 고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에너지 그릇의 중심에 있는 돌출부에 안착한 힉스장은 마치 언덕 꼭대기에 놓인 공이 계곡으로 굴려가는 것처럼 아주 빠른 시간 내에 최소지점으로 찾아들어가면서 이 힉스장에서 ‘밀어내는 중력’, 즉 음력(음力)을 내놓게 된다. 여기에서 엄청난 팽창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공간내의 모든 지점들을 서로 멀리 도망치게 밀어내었다. 이 힉스장을 ‘인플라톤장’이라고 해서 우주 인플레이션의 본질로 보고 있다. 이 인플라톤장은 고에너지 상태에서 이탈하여 에너지 그릇의 가장 깊은 계곡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와 함께 밀어내는 중력도 사라졌다. 에너지 계곡을 찾아가는 인플라톤장은 양자역할의 법칙에 따라 약간의 요동을 겪는다. 이 요동 때문에 인플라톤장이 최소 에너지에 이르는 시간은 각 지점마다 조금씩 달라지게 되고, 인플레이션 팽창이 끝나는 시간도 각 지점마다 조금씩 달라져서 공간의 팽창률은 위치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게 된다.
피자 반죽을 만들 때 균일하게 문지르지 않으면 군데군데 작은 덩어리나 주름이 생기는 것처럼, 우주공간에도 약간의 주름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혼돈상태의 원시우주에서 우연히 일어난 양자요동으로 탄생한 것이다. 대형 오락실에서 수백 개의 슬롯머신이 동시에 작동되고 있을 때, 그들 중 여러 개가 대박을 터뜨릴 수가 있는 것처럼 인플레이션이 단 한 곳에서만 일어날 필요는 없다.
인플라톤장에 의해 밀어내는 중력이 약해지면서, 끌어당기는 중력이 전 공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끌어당기는 중력은 양자적 요동으로 생겨난 작은 불균일성을 기점으로 물질이 뭉쳐지도록 만든다. 가까이 있는 태양과 행성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별과 은하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태양이 분출하는 저-엔트로피(낮은 무질서도) 에너지는 지국에 서식하는 저-엔트로피 생물인 식물의 생명활동을 가능하게 했고 그로부터 엔트로피가 더욱 작은 고등동물이 탄생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열을 비롯한 여러 가지 노폐물과 쓰레기가 생성되면서 총 엔트로피는 꾸준히 증가해왔다. 식탁에 있는 계란이 식탁에서 추락하여 깨지는 사건은 고-엔트로피 상태로 사정없이 이동해 가는 우주의 일부인 것이다.
1948년에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헨드릭 카시미르는 전자기장의 진공요동을 실험하면서 진공상태에서에서도 양자적 요동이 끊임없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그리고 두 금속판을 가까이 가져가면 장의 요동이 무작위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패턴을 갖고 있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이것은 공간의 변화율이 0이라고 할지라도 조용한 것이 아니라 상쇄되었기 때문이었다. 미세 표면에서서 소립자들이 그야말로 난장판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기서 ‘끈이론’이 나온다. 모든 입자들이 내뿜는 다양한 패턴들은 더 궁극적인 단위라고 할 수 있는 끈의 진동에서 나온 변화들이다. 초미세 영역에서는 ‘점’이라는 주체 개념은 사라지도 ‘진동’만 있을 뿐이다. 입자의 진량이란 진동하는 끈의 에너지에 해당된다. 입자들 사이의 의 대칭 또한 끈이 진동 패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끈 이론’은 ‘초대칭 끈이론’, 즉 ‘초끈이론’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 초끈은 ‘숨어있는 차원’이 있다. 이 숨어 있는 공간차원은 7차원이다. 기존의 감각적으로 알 수 있는 깊이, 넓이, 길이의 3차원의 공간차원과 시간 차원까지 포함하면 총 11차원이 된다. 초미세 영역에 살고 있는 벌레를 저녁파티에 초대하려면 공간과 관련된 총 10개의 정보를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파티 시각까지 포함해서 11개의 정보가 필요하다.
이 여분의 차원이 우리와 함께 있어도 우리는 차원을 알 수가 없는 이유는, 사물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전자기력이 도움으로 물체의 존재를 감지해야 하는데 우리가 3차원의 막 안에 속박되어 있다면 여분의 차원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을 감지할 방법이 없다. 광자가 그 여분의 차원에 침입했다가 다시 나와서 우리의 눈에 들어와야 하는데, 광자는 우리에게 친숙한 3차원 공간을 이탈할 수가 없으므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력은 이 여분의 막차원에 구애받지 않고 그 여분의 차원의 영향력을 3차원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정보를 주고 있다. 중력장이 여분의 차원을 다 마저 채우고 난 뒤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중력자의 크기가 달라져 있게 된다. 실험 물리학자들은 1mm 이내의 거리에서 중력이 거리에 역제곱 비례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사례를 발견하기 위해 지금도 안간힘을 쓰고 있다.
Ⅲ. 복음적인 평
공간을 절대적으로 보지 아니하므로서 ‘왼쪽, 오른쪽’ 측정을 시도할 관점마저 공간 안에 포섭이 된다. 이렇게 되면 ‘왼쪽, 오른쪽’을 결정할 절대적 기준의 자리에서 우리 인간은 떠나야한다.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가늠하는 자격자가 되신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태복음 25:31-33)
또한 시간의 모든 사건들이 상호 영향을 주므로서 시간 안에 갇혀 있는 인간으로서는 시간 전체를 판단하거나 조망할 자격이 박탈된다. 모든 일은 창세 전에 확정된 내용만으로서 시간의 막대는 채워진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3:9)
이는 이미 주체자가 느끼고 있는 믿음은 미래까지 이어질 믿음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주체로 바뀌어지면서 새로운 믿음으로 채워지는 식으로 성도가 살아가게 됨을 말해준다. 즉 말씀이 유일한 해석자께서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매일같이 성도를 다루심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해석을 늘 버려지고 새로운 해석으로 채워지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10-11)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공간으로서 공간의 전부를 말할 수 없는 것은 시간을 초월한 여분의 묵시적 세계가 늘 이 3차원의 세계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태복음 17: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우주의 중심을 모른다. 우주의 중심은 성전이다.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예레미야 17:12-13)
다니엘의 70이레의 의미를 비롯해서 모든 우주의 일들을 완성하신 하나님의 성전중심으로 다루시는 것이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주가 되셔서 어린양의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요한계시록 6:12-16)
움직이는 별을 보았던 동방박사들은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경배했다. 물리학의 모든 진리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으로 그 완성을 향한 발걸음을 멈춰야 한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린도후서 10:5)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립보서 3:8-9)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도 없고 마음으로 알 수 없는 사실, 그 구원의 진리는 오직 십자가 피흘심의 지속되는 능력에서만 나온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린도전서 1:18-19)
3차원에서 나오는 문법과 역사 이해에 근거한 신학, 이것도 십자가 앞에서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들의 어리석은 지혜일 뿐이다.
우리교회
10-04-30 12:54
아고라 Agora 2009
이근호 목사가 올린 [우주의 구조] 평가 글을 보고
http://media.woorich.net/성경신학/철학과신학/우주의구조.hwp
아고라 Agora 2009
이 글을 보니 이 영화가 생각나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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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화질
클럽박스 에서 회원가입후 검색하면 아래 파일이 있습니다. 개인들이 파일 소유하였기에 다시 박스가입을 클릭한 후에 파일 다운 받으면 됩니다. 무료입니다.
http://www.clubbox.co.kr
아고라 (Agora) .2009.DVDRip.XviD-FUSiON.smi 125.9 KB 2010-03-02
아고라 (Agora) .2009.DVDRip.XviD-FUSiON.avi 1.5 GB 201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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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질은 별로이지만 그냥 볼수 있는 카페가 있네요
바로 보실수 있습니다. 클릭하시면 바로 됩니다.
http://blog.daum.net/phillippine/17046531?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phillippine%2F17046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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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설명
4세기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배경으로 철학자이자, 무신론자인 히파티아에 대한 이야기
아고라 (Agora, 2009) 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출연 레이첼 와이즈, 맥스 밍겔라, 오스카 아이삭, 아쉬라프 바홈
요약정보 스페인 | 어드벤처, 로맨스/멜로
홈페이지 http://www.agoralapelicula.com/
소름돋는 기독교 서막속 역사...아고라(Agora, 2009)
임이토의 소소한 房 http://blog.naver.com/limjinho1004/900845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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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파티아
2009.06.21 07:32 | 사람이 하늘/ 마음 빼기 | 은하999
http://kr.blog.yahoo.com/peacemother999/4149
하이파티아
(Hypathia, 그리스 원명 ‘휘파티아’로 발음하고, 영어로는 ‘하이페이티어’라 발음한다.)
위의 그림은 라파엘로(Raffaelo)가 1511년에 고대 그리스의 아카데미폐허를 방문하여 둘러보고나서 상상도를 그렸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의 건물이 위의 그림처럼 화려하고 예술적인 건축물이었으리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자기의 상상도에다가 라파엘로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들을 총망라하여 그렸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다이오게네스, 피타고라스 등…. 이 그림은 시각적으로 16세기 르네쌍스의 정신을 잘 표현해 준다. 그 그림에다 여자로서는 유일하게 하이파티아를 그려 넣었는데 알키메데스와 함께 서 있는 장면이다. 라파엘로는 그만큼 하이파티아는 당대의 학자들 사이에서 여성으로 유명했었다는 역사적 근거를 이야기 하려고 했다.
2009년 5월 18일 프랑스의 칸느영화제에는 우리나라의 ‘마더’라는 영화가 출품되어서 인정을 받았는데, 스페인의 ‘아고라(Agora)’라는 영화가 대상을 받았다. 2009년 12월 18일에 세계적으로 일제히 개봉된다고 하는데, 영화 ‘아고라’는 하이파티아의 일생을 다루면서 하이파티아를 숭경하기 위한 것이다. 하이파티아의 당시의 초상화와 현재 영화 ‘아고라’의 주인공의 모습과는 매우 흡사하다. 아래의 그림은 영화의 한 장면이다.
Ypathia (휘파티아)의 초상화 (405AD경) Rachel Weisz (‘Agora’의 Hypathia 역)
영화 ‘Agora’의 한 장면, 하이파티아가 수학강의를 하는 모습
‘아고라(Agora)’라는 고대 그리스어는 민주주의 정치를 위한 정치인들의 모이는 장소 즉 오늘날의 국회의사당과 같은 장소를 의미한다. 지금은 그리스에서 ‘아고라’라고 하는 말의 뜻은 ‘시장거리’를 의미한다. 스페인의 영화 ‘아고라’는 정치하는 곳, 학문의 전당 등의 옛날 그리스의 의미를 재현코자 한 것이다. 특별히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과 학교에서 하이파티아가 가르친 그 광경은 방대한 정신적인 포럼의 장소인 ‘아고라’였다는 것이다. 영화 ‘아고라’는 하이파티아의 일대기를 그 소재로 한 것인데, 2009년 4월 4일 미국의 ABS 방송에서는 하이파티아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그만큼 하이파티아의 의미가 오늘날 중요하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이파티아는 누구였는가?
370 – 415AD 에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하이파티아는 당대의 최고의 정신문화의 전당이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대학자였다. 그는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아버지 테온(Theon)에게서 어린시절에 < 신플라톤철학(Neoplatonism) >과 수학을 공부했다. 아폴로니우스(Apollonius)의 ‘원추형의 비밀’이라는 책을 해석하면서 하이파티아는 원, 타원, 포물선 등에 관한 기하학적인 원리를 많이 생각해낸 사람이다. 원추형을 여러 각도에서 절단하게 되면 원과 타원과 포물선이 나타난다. 원의 입방체는 구형인데, 지구를 비롯한 천체들이 모두 구형이라는 것과 행성들의 공전하는 궤적이 타원형이라는 것과 물건을 공중으로 던지게 되면 중력에 의해서 낙하하게 되는데 그때에는 포물선을 그리게 된다는 것을 하이파티아는 여러 젊은 남자들에게 설명했다. 당시 지구중심의 우주관을 타파하고 태양중심의 태양계론을 주장했고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여러 개의 행성들 중에 지구가 하나라고 하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플로티누스(Plotinus)의 신플라톤철학에 관하여 깊은 사상적인 교육을 받았다. 여기에서는 하이파티아를 철학과 수학과 천문학 그리고 기계공학에 있어서 큰 공헌을 남긴 희귀한 여류학자였음을 간략하게나마 이야기 하고자 한다.
첫째로 하이파티아는 아버지를 통해서 어린나이에 프톨레미의 우주천체론 (지구중심설)을 공부했다. 알마게스트(Almagest: 로마시대의 언어인 라틴어로는 ‘위대한 책’이라는 뜻)를 탐독했다. 거기에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이 원형의 궤도를 그리면서 공정하고 있고, 1022개의 별들의 위치들도 표시되어 있다. 우주의 모든 천체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공전하고 있다고 하는 우주관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 및 태양중심설을 주장하기 전에는 거의 절대적인 우주에 관한 해석이었다. 16세기때까지 세상에 유포된 우주관이었다.
<프톨레미(Ptolemy)와 그의 지구중심 우주관>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는 피타고라스의 학설이 유포되고 있었는데, 히케타스(Hiketas)와 필로라오스(Philolaos)등은 이미 200BC 경에 태양중심설을 가르쳤고, 지구를 비롯하여 9개의 행성들이 태양주위를 공전하고 있다는 신학설을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는 그들의 학설에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하이파티아는 아버지와 함께 알마게스트를 연구하던 중에 피타고라스의 학설이라고 하는 태양중심의 우주관에 매혹되어서 천체들의 운행이 타원형이며 또 지구로부터의 거리들을 계산해 내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아스트롤라베(Astrolabe)라는 우주천체관측기 (오늘날의 천문대)를 고안해내기도 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가 망원경을 발명했는데 하이파티아 당시에는 망원경이 없었기 때문에 육안으로 별들을 관측했다. 그러나 아스톨라베라는 기계는 별들의 위치와 거리들을 기록하는 계측기로서 오늘날의 천문대와 매우 유사하다. 다만 기계의 발전이 당시에는 지금처럼 되어있지 않았을 뿐이다. 아스트롤라베의 우주관측의 기록에서 하이파티아는 화성과 목성의 공전궤적이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한 방향이 아니라 역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로부터 화성과 목성이 지구의 주위를 공전하는게 아니라 지구와 함께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기 때문에 지구로부터 관측하는 각도의 어긋남으로 인해 화성과 목성이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고 믿었다.
유럽의 천문대에서 2009년 9월에 시작되는 화성의 공전궤도를 컴퓨터로 그리면 2010년 1월 29일부터는 역방향으로 후진하다가 2010년 3월 11일에서부터는 역방향을 그치고 다시 전진을 계속하게 된다. 그것은 지구가 화성과 함께 움직인다는 증거이다. 위의 그림 (오른쪽)을 살펴보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고 화성이나 목성이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게 되면 서로 공전의 속도가 달라서 지구에서 관측해보면 화성이나 목성이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것을 하이파티아는 아스트롤라베에서 유심히 관찰했던 것이다. 그 결과 코페르니쿠스보다 먼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며 다른 행성들도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가르쳤다. 그것이 성서적인 (하나님의 창조론) 견해와 어긋난다고 하여 기독교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313AD에 로마에서는 기독교의 박해가 종결되고 콘스탄틴대제가 스스로 기독교회로부터 세계를 받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후 하이파티아가 생존했을 당시 400AD경에는 로마제국은 동서로 나뉘게 된다. 서로마의 수도는 로마이고, 동로마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풀(지금의 터어키의 이스탄불)로 정해졌다. 그때부터 기독교가 동서로마의 국교로 제정되면서 교회의 총감독이 정치적인 세력을 통제하는 높은 위치로 승격되게 된다. 이러한 때에 알렉산드리아에는 로마의 정치적인 주권을 가진 총독으로 오레스테스(Orestes)가 부임되어오고, 알렉산드리아의 교회 총감독에는 시릴(Cyril)이 로마교회로부터 승인되어서 서로 세력다툼을 하는 이상한 정치적인 지배구도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하이파티아는 기독교인들이나 비기독교인들에게 한가지로 존경을 받았던 학자였는데 그의 처세가 오레스테스 (로마정치인)과 가까워지면서 시릴감독을 비롯한 기독교의 실권자들에게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우주관은 비성서적이라고 하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다분히 정치적인 세력구도로 인해서 하이파티아는 415AD에 시릴감독의 수하에 있던 광신자들에 의해서 무참히 살해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알렉산드리아의 최고의 지성을 가진 하이파티아가 제거됨과 동시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운영이 정지되었다. 많은 진귀한 문헌들이 도난 당하고 또 당시의 우주관과 과학에 관한 문헌들이 불살라지게 되었다. 기독교는 초창기부터 인류문화사에서 씻지 못할 과오와 죄를 짖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카토릭교회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아름다운 그리고 최고의 지성을 쌓은 여인들을 마녀로 취급하여 화형에 처했다. 그리고 르네쌍스 당시에서 많은 새로운 과학자들을 처형하고 옥에 가두는 일을 감행했다. 기독교의 인류사에 남긴 편견으로 인한 과오와 죄과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하이파티아의 경우는 너무나도 애석한 종교적인 편견의 희생제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과 업적은 없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온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친구이며 제자였던 시네지우스(Synesius)가 병으로 인해 고생할때에 약을 제조해서 물에 용해시켜 마시게 했는데, 물에 용해된 약품의 농도를 정확하게 계산해낼 수 있는 수중계측기(하이드로스코프: hydroscope)를 발명하기도 했다. 즉 천체를 관측하는 아스트롤라베(Astrolabe)와 수중관측기(Hydroscope)은 오늘날 과학자들에게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는 훌륭한 발명품인 것이다.
2005년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