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0. 4. 23) 1강
광주 강의(2010. 4. 23) 1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24)
광주 강의(2010. 4. 23) 6-1
에스겔 5장 12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삼분지 일은 온역으로 죽으며 기근으로 멸망할 것이요 삼분지 일은 너의 사방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삼분지 일은 내가 사방에 흩고 또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심판하시려면 한꺼번에 다 하시지 왜 삼분지 일, 삼분지 일, 삼분지 일 나눠서 심판하시는가? 이 의문점을 가지고 13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삼분지 일씩 나눠서 심판하시는 것은 무엇과 연관되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분노하심이 원인이 되지요. 노하심이 원인이고, 어떤 일을 했더니만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마음이 시원하려면 삼분지 일, 삼분지 일, 삼분지 일 나눠서 심판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분이 풀려서 시원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성경 말씀을 해석할 때 우리의 주체와 하나님의 주체를 비교시켜요. “내가 이렇게 심판해서 내 마음이 시원한데 너도 시원하냐?” 라고 묻는 식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삼분지 일씩 나눠서 심판해서 내 마음이 시원한데 너도 시원하냐?” 라고 물으시는 거예요.
묻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네가 가지고 있는 세상관을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관으로 옮기겠는가?’ 하는 것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온역, 기근, 전쟁 이런 것들을 통해서 혹독하게 다뤄줌으로 말미암아 ‘아하,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 현실은 완전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내 현실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현실이기 때문에 완벽한 거예요.
그러면 노하시고 분을 풀기 위해 심판을 내릴 때, 이 현실은 어떻습니까? 완전합니까, 불완전합니까? 역시 이 현실도 완전하지요. 하지만 당하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이것은 내가 예상 못한 현실입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면 저는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라고 짜증내고 원망을 하겠지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평소에 주어진 현실을 주님의 현실로 보지 않고 나의 현실로 본 거예요. 나의 현실로 봤기 때문에, 나의 현실에서는 ‘내가 벌 받아야 해.’ 라는 것이 있을 수 없지요. 이 현실은 나를 사랑해 줘야 하고, 나를 위해야 하고, 나로 하여금 사는 재미를 느끼게 해야 하고 --- 이런 것은 은근히 기대했는데 이 기대대로 잘 안 되면, 기도도하고 열심히 봉사도 하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너는 나(하나님)의 현실에 동조하면 그만이지 네가 따로 너 위주의 현실을 챙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한 말을 성경은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5장 1절을 보겠습니다.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삭도를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에 달아 나누었다가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지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지 일은 가지고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지 일은 바람에 흩으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털은 누구의 털입니까? 인자라 불린 에스겔 털이지요. 에스겔의 머리털과 수염입니다. 그러면 인자라는 에스겔의 털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삼등분을 해서 처리하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이 에스겔과 하나님 사이를 한 번 봅시다.
에스겔의 털이 삼분지 일씩 잘리는 현실을 에스겔 자신의 현실이라고 봅니까, 하나님의 현실이 본인이게 임했다고 봅니까? 하나님의 현실이 자기에게 임했다고 보지요. 그렇다면 에스겔은 이 현실에 대해서 불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만이 있을 수 없어요. 이렇게 쓰임 받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어요.
그렇다면 유다 나라의 입장에서 봅시다. 삼분지 일씩 온역과 기근, 전쟁으로 멸망 받아야 할 이것을 이해를 할까요, 못할까요? ‘저양반이 수염을 왜 칼로 잘라 날리고 야단이지?’ 이해가 안 되지요.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은 심판을 받아야 될 그 사람들이 보는 현실은 그저 자기를 위한 현실을 고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현실을 수용하는 방법은 누가 모델이 되는가 하면, 에스겔처럼 이렇게 쓰임 받는 것이 하나님과 에스겔 사이에 정성적인 관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인자’라는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자 되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는 말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현실은 하나님 위주의 현실인데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도 “저 사람이 십자가에 왜 달리지?” 그런데 예수님은 ‘너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어떤 스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라 갔잖아요. 그게 심각한 거예요. 무소유를 주장하면서 자기를 부인했는데 따라갈 모델이 없는 거예요. 인자가 없고, 인자를 안 믿는 거예요. 그냥 스스로 도를 닦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아버지도 있다.” 라는 것을 이루기 위한 현실이 바로 하나님의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에스겔을 앞장세운다는 이 현실 자체가 현재 인간들이 아무리 꿈을 꿔도 절대로 하나님은 이 현실을 우리 자신들에게 빼앗긴 일이 없습니다. 이게 어제 수요일 설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직접 상대하셔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환경이 주어지는데, 그 환경은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생각한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기 위한 환경을 만듭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육이 육을 조작해서 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어려운 환경, 우겨 쌈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도 이 현실마저 하나님께서 만드신 현실이라고 눈치 채는 그 사람이 영적 사람입니다. 이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았을 때 얼마나 힘들게 살았습니까. 힘들게 살았지만 예수님은 그 현실을 아버지께서 뜻을 이루기 위한 현실로 봤잖아요.
그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성령인데, 그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육에 속한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되게 했던 그 관계성이, 그 현실이 그대로 우리에게 덮치게 되고 우리는 이것마저 ‘하나님의 자녀 되기 위한 하나님이 주신 현실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제가 아직 삼분지 일을 설명 안했고, 왜 이런 벌을 내려야 하나님 마음이 시원한지 그것은 이야기 안 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면 될 텐데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을 왜 보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내 주변에 펼치진 환경(나와 멀리 떨어진 것 말고)은 나에게 주어진 현실이라고 우깁니다. 이것이 벗겨져야 됩니다. 이것마저 하나님의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현실에 무엇이 있느냐? 이제부터 무섭지요? 그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주어진 현실을 무엇을 가지고 해석할 수 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하나 해석이 가능해요. ‘아, 이 경우는 이 말씀에 해당되는구나.’ 갑자기 아이가 죽었다면, 욥기에 나오는 ‘주신 자도 하나님이고 거두어 가신 자도 하나님이다.’ 바로 이것이구나. 말씀대로 된 현실이 내 현실이라고 우길까 싶어서 찾아와서 ‘이 현실이 네 현실이야, 내(하나님) 현실이야?’ 라고 물으시는구나. 이 현실에서 ‘이것은 주님의 현실입니다.’ 라고 고백하면 그것이 바로 욥의 인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에서 나온 수염과 털을 하나님께서 잘라내서 무슨 용도로 사용했지요? 아직도 이 현실을 하나님의 현실로 보지 않고 내 현실로 보는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나는 분노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스겔의 털을 잘라서 세상을 심판하고 저주하는 용도로 쓰지요.
그러면 성도에게는 어떤 요소가 있습니까? 성도를 모델 삼아서, ‘너희들이 성도처럼 살지 아니하면 지옥 간다.’는 모델로 삼아 성도를 그 현장에 세우는 겁니다. 에스겔의 수염이 칼로 잘리고 불에 태워지는데, 이것처럼 우리 곁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성도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고, 만약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장 당한다는 것도 보여줍니다.
재미있는 것은 에스겔은 자신의 수염과 털을 본인이 잘라서 칼로 치고 했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성도에게 주어진 운명은(예수님도 마찬가지고) 외부인들이 핍박을 해요. 즉 성도를 못살게 굴면 성도는 탄식하게 되고, 그것이 세상에 대한 저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요한계시록에 ‘성도의 기도가 향로에 담겨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향로를 부으면 이 세상이 심판 받는 형국이 펼쳐집니다.
요한계시록 8장을 보겠습니다. 6-7절입니다.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여기에도 삼분의 일씩 나눠지지요?
8-9절에 보면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여기서도 삼분의 일이 나눠지지요.
10-11절에 보면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12절에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침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결국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방금 보았던 에스겔 5장에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할 때는 그냥 우리에게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에스겔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외부에 심판을 하죠. 에스겔의 털을 통해서 하잖아요.
그러면 이 시대에 에스겔과 같은 위상을 갖고 있는 분이 누구냔 말이지요. 그 당시 에스겔 때문에 누가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온역을 받았습니까? 에스겔을 둘러 싼 유다 나라가 심판 받았지요. 유다 사람들은 주어진 현실이 에스겔에게 독점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현실로 보다가 혼나잖아요.
그처럼 지금은 어린양 예수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인자되시는 예수님 중심으로 하늘과 땅과 바다 모든 것이 전부, 옛날 에스겔을 통해서 심판하듯이 지금 에스겔 같은 인자가 이미 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삼분의 일씩 똑같이 징벌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유 없는 징벌은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상을 미워하십니까? 에스겔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져야 마음이 시원해요. 마음이 시원한 것은 안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거예요. 이 전체를 두 자로 말하면 오늘날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심판하는 현실에 대해서 아주 기쁘게 영접합시다. 그리고 나를 위한 현실은 아예 없다고 여기세요. 애가 아프고, 남편이 어떻고, 아내가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등등의 어떤 현실도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건드려서 하나님께서 화를 내고 있는데, 화를 내고 그 화대로 심판해야 하나님 마음이 시원하기 때문에, 그 시원함에 우리가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이 때리면 우리 애는 어떻게 되지?’ 이렇게 걱정하시면 이것은 주님의 현실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내 현실을 챙기는 것이 되지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수염 내 놓으라고 할 때 안 내놓을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현실을 믿으면 얼마든지 우리 몸을 하나의 도구로 내 놓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 현실이 아니고 주님의 현실이라면 이 몸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주님의 현실의 일부로 포함이 되어 있어요.
주님이 쓰시려고 만든 몸인데 쓰실 때 마음껏 쓰시도록 내 놓아야 될 것 아닙니까. 내 놓는데 내 놓는 목적이 뭔가 하면, 이 세상이 우리가 있어야 징벌을 받아요. 징벌이 있어야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지금까지 한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이 세상 현실이 나를 위한 현실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모든 현실은 말씀대로 짜여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의 내용은 뭔가? 하나님께서 화가 나시면 진노를 퍼부어서 마음을 시원케 하는 그 목적으로 현실이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것 때문에 에스겔을 통해서 이런 진노를 내리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여호수아 23장 6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취우치지 말라.” 그 다음 12-13절에 보면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하나님의 관심사가 뭡니까? 자기 백성의 행복입니까? 아니죠. 6절에 나오지요.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여기에 있어요. 하나님의 법대로 되는 현실 외에 다른 현실은 꿈도 꾸지 맙시다. 예초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현실을 남겨두지를 않았어요. 우리 현실은 단 1%도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방 민족은 모세의 율법이 없어요. 바꿔 말하면 언약이 없지요. 이스라엘 땅 주변의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으니까 그들이 보는 현실은 내 생존을 위한 현실이고 이 현실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 안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 가거든 절대로 이방 민족과 혼인하지 말고 그들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 왜? 이스라엘의 현실은 하나님의 언약밖에 없는데 이방인과 친하게 지내면 자기를 위한 현실이 침투가 되지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가시가 되게 하고, 올무가 되게 하여 멸절시킵니다.
하나님은 융통성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분이에요. 하나님은 자기의 법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분입니다. 처음 듣는 소리라고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잘못 아셨습니다. 오해한 이유가 뭐냐 하면, 일단 내 중심의 현실을 먼저 챙겨놓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언제 가슴에 밀려오는가 하면, 모든 한국교회가 다 사기였다는 것을 아는 순간. 지금까지 사기당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속이 시원하고 마음이 굉장히 편해집니다. 건전한 곳이 어디 있을까? 저곳은 아닐까? 이렇게 찾아다니다가 아예 몽땅 다 엉터리라고 깨닫고 성경을 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다시 보게 되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무더운 여름에 목이 말랐는데 냉수에 얼음하나 넣어서 마시듯이 속이 시원해요.
그동안 엉터리로 배웠다는 것을 아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펑 뚫리는 느낌이 들면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구나!’ 하고 정리가 돼요.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밖에 모르는 분입니다. 우리가 울든지 웃든지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약속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읽어보세요. 그러면 성경이 다 뚫려요.
제가 20여 년 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처음 시도한 것이 뭐냐 하면, 창세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 단어들 중에서 출애굽기까지 이어지는 개념만 따로 골라서 뽑아내고, 그 다음 창세기에도 있고 출애굽기에도 있고 레위기에도 있는 개념을 뽑고, 이렇게 계속해서 요한계시록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개념이 뭔가를 골라내는 거예요.
골라낸 이유는, 그 골라낸 개념 가지고 다시 창세기를 보게 되면, 창세기에 열 가지 개념이 나온다면 그 중 계시록까지 계속 이어지는 개념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개념을 위해 나머지 아홉 가지 개념은 보조 역할을 했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만약 출애굽기에 아홉 가지 개념이 있다면 아홉 가지 다 아는 것이 아니고 그중 어떤 개념이 나중 신약까지 이어진다면 그 이어지는 개념을 가지고 다시 출애굽기를 보게 되면 하나 빼고 나머지 여덟 개는 하나를 받들어주는 보조역할을 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면 창세기 따로, 출애굽기 따로, 레위기 따로가 아니라 전체를 하나로 관통해서 볼 수 있는 안목이 만들어지지요. 이렇게 해서 나온 책이 [복음의 회복]입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의 죄 씻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인간은 죄를 지어야 했던 겁니다. 죄를 지어야 생명나무가 돋보이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선악과를 왜 심어놓았는지 이유가 드러납니다.
선악과를 심어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야 생명나무 없이는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이 나옵니다. 이 생명나무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 끝까지 나오는 개념이잖아요. 출애굽기에는 바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피.’ 이것이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 그렇다면 디모데전.후서에서 교회에 집사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피지요.
로마서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경건치 않은 우리를 의롭다 한 것. 율법 외에 다른 의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화목제물 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린도전서에도 나오는 십자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는 그 십자가.
그렇다면 내가 설교자가 되어서 이 핵심을 전하고, 듣는 분들이 만약 그 말씀에 동의하게 되면 그가 오늘 밤 죽어도 주님과 더불어 영생할 수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진리를 모르고는 강단에 설 수 없는데, 이렇게 해서 진리를 뽑아내면 강단에 설 수가 있겠다는 생각에서 그런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간증하는 것 같네.
그런데 이 작업을 하면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총신에서 같이 공부했던 동기생들이 뚝뚝 떨어지고, 선후배들이 떨어지고, 교회 식구들도 다 떨어져요. 로켓을 발사하면 처음에는 큰 뭉치가 같이 올라가는데 나중에는 옆에 붙은 것들이 하나하나 떨어지고 최후에는 캡슐만 올라가지요. 복음을 아는 사람은 복음이 그 사람 안에 내주하게 되면, 그 사람 자체가 복음화 되어 복음과 더불어 붕 떠서 외롭게 하늘나라로 올라가야 됩니다.
복음 아는 사람은 남들 보기에는 외로워보여도 본인한테는 ‘됐어!(희열) 바로 이것이구나!’ 이런 탄성이 나오지요. 얼마나 복음이 좋았으면 외로워도 울지 않지요. 모두가 떨어져 나가도 그 떨어져 나가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보상이 될 정도로 풍성함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만약 그 복음이 내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주저하게 됩니다. ‘알긴 알겠는데 이것으로 목회 성공하겠나? 목회 성공 못하면 진리 아닐 거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면 성경에서 점차 떠나서 교회에 사람 모으는 일에 몰입하게 됩니다.
천국은 좁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이 좁은 문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밖에서 보면 외롭고 슬프고 죽음으로 가는 길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십자가를 신학교에서 배웠어요. 그러나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아요. 그냥 십자가를 이용해서 목회해서 천국 밖에서 예배당 크게 지으려 해요.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면 희한한 세상이에요. 내가 십자가 밖에서 그토록 걱정했던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내가 어떻게 자식을 잘 키워야 합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교회 부흥시킬 수 있습니까?” 이런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나의 현실은 일체 없고 주님의 현실에 나는 하나의 포지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요.
말씀의 구조 안에서 나는 한 분야를 맡은 거예요. 어떤 사람은 눈이고, 어떤 사람은 코, 어떤 사람을 발. 즉 지체인데 지체가 서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지체 되게 하신 머리 되시는 주님만 바라보게 되지요. 머리되시는 주님이 일하시니까 지체는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주 안에 있는 자는 항상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고, 주 밖에 있는 자들은 “내가 뭘 할까요?” 라며 자기의 의미를 찾지요. ‘내가 뭘 하면 성경이 원하는 현실을 내가 만들 수 있을까’ 라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은 성경의 현실이 아니고 인간의 현실이지요.
십자가 안에서는 내 현실이 없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지요. 지금까지 주께서 쓰셨고, 앞으로도 쓰실 것이고 나는 계속 그분의 도구로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다 맡기세요. 주님께서 우리를 에스겔처럼 이 현실 속에 그냥 맡깁니다. 그러니까 주어진 이 현실은 우리가 어떻게 다룰 현실이 아니고 맡겨졌음을 계속 이야기하는 겁니다. “주께서 인도하신 대로 이렇게 흘러왔다.” 이것만 계속 말하면 됩니다.
여호수아 23장 15절을 봅시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일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불길한 일이 우리에게 임할 때, 나의 현실이 있는 사람한테는 불길한 일이 될 것이고, 나의 현실이 없는 사람한테는 이것도 전혀 불길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요. 자기 현실이 없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아니오’가 없기 때문에 불길하지 않지요.
‘불길하다’는 말은 이미 나의 것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이 나의 것은 하나님도 손대면 안 돼.’ 이런 마음. 나의 기대와 소망이 무너지면 불길하다고 여깁니다. 이처럼 나의 나 됨을 유지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내 놔! 네 몸은 너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이야.” 라고 빼앗지요.
16절에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
이제 에스겔에 나오는 진노가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진노가 나오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한 것을 간추리면, 하나님의 현실을 나의 현실로 우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때 다시 한 번 여호수아 23장 16절을 기억해서 정신 차리게 하지요. ‘아하, 내 것도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우겼기에 주님께서 소식을 전해 왔구나!’ 라고 회개하면서 주님의 현실을 주님의 현실로 내 놓을 수 있어야 되지요.
하나의 현실을 가지고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자기의 현실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내 놔.” “안 됩니다. 제 겁니다.” “내 놓아야 살아.” “아닙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살겠습니다.”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기고 하지요. 그러면 주님이 손 놓으면 반발력에 의해 우리는 꽝 넘어지지요. 그래서 다 깨지고. 그러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으켜 줄게.’ 하시면서 주님이 찾아오시지요.
주님은 자기의 법밖에 몰라요. 그런데 아직 그 법에 대해서는 말씀 안 드렸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가?
여호수아 24장 14절을 봅시다.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멸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기에서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는 뭡니까? 하나님이 ‘마음을 시원하게 하겠다.’고 하신 것은 무엇이 안 됐기 때문에 진노하셨고, 어떤 상태가 되면 하나님 마음이 시원한가 하면, 여호와만 섬기라. 신약으로 하면 주님만 섬기라.
변화산에서 구름 사이로 하늘의 음성이 들렸지요. “너희는 저의 말만 들어라.” 하나님의 뜻은 어렵지 않아요. 굉장히 쉬워요. “너희 죄를 용서할 내 아들 보낸다. 너희는 그만 섬겨라. 그러면 산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을 평생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절대 우리 힘으로는 안 되고 말씀대로 우리의 현실을 주님의 현실로 빼앗아갈 때 빼앗기는 그 상황에서 비로소 우리는 느끼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내 현실이라고 우겼는데 몽땅 다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덕수궁 돌담만 돌다가, 덕수궁(천국)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는 세리 아닌 자도 세리가 되어야 하고, 창기 아닌 자도 창기가 되어야 하고, 강도 아닌 자도 강도가 되어야 합니다. 강도가 되었다는 말은 뭘 빼앗겼단 말입니까? 모든 자기 의를, 자기가 내세울 만한 모든 장기와 주특기를 몽땅 다 빼앗긴 채, 여기서는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되어서 아무것도 자기 것 없이 진짜 주님만 섬기는, 이것을 바울은 “내가 죄인 중의 괴수다.” 라고 했지요.
10분 쉽시다.
(2010. 4. 28. 10. 2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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