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7: 5-11 (사람을 믿지말라)
렘 17: 5-11 (사람을 믿지말라)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203)
본문 : 예레미야 17장 5-11절
제목 : 사람을 믿지 말라
듣기 :
, 보기 :
우리교회
10-04-21 18:04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59강-렘17장5-11(사람을믿지말라)-jer100421.hwp
이근호
10-04-21 20:50
사람을 믿지 말라
2010년 4월 2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7:5-11
(렘 17:5, 개정)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렘 17:6, 개정)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렘 17:7, 개정)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렘 17:8, 개정)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렘 17:9, 개정)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 17:10, 개정)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 17:11, 개정)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하나님의 구원이란 인간 개인과의 관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래의 인간을 원하십니다. 원래의 인간은 환경없이 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이라는 환경 속에서의 인간이었습니다. 그 환경 속에서는 인간은 “선악과 열매를 따먹으면 죽는다”는 규정 앞에서 선 존재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이 선악과 열매를 먹고 난 뒤부터는 이 ‘죽음’이라는 환경이 그들의 환경이 되었습니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음’이라는 환경 속에서의 존재로 볼 때만 제대로 된 인간입니다. 이 환경 속에서는 인간은 ‘저주받아야 마땅한 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점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생존하는데 있어 불편하고 힘들고 고생스럽게 되어야 될 이유도 알지 못하기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이란 기껏 ‘좋은 환경으로 바꾸어 주시는 좋은 신’이기를 소원하고 있는 겁니다. 즉 환경과 분리된 채 자기 자신의 역량으로 좋은 환경이 되기를 소망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 에덴 동산에 인간을 두신 하나님의 취지가 무색해집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법과 말씀의 엄중함과 진실됨을 드러내기 위한 피조물로서 만드신 것입니다. 이점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사막길로 통과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 사막 길이라는 환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고 마음을 낮추게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즉 인간이 자력으로 자기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도리어 그 반대로, 인간이란 이런 저주스러운 환경에서 죽어 마땅할 정도로 저주스러운 존재임을 자인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내리신 ‘죽음의 속성’을 제대로 보여주어야 될 책임을 진 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단순히 “헉!”하고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아담과 하와는 무수한 후손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죽고 죽고 또 죽어야 하고 심판받고 심판 받고 또 받아 마땅한 자들임을 통해서 ‘죽음과 죄의 왕노릇’을 드러내게 됩니다.
사막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해보면, 축복이란 사막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해고 저주란 사막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본색이란 사막 가운데서 진정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가가 드러납니다. 인간들이 혈육적으로 믿고자 하는 신은 단지 삶의 환경 개선을 노리고 믿는 하나님입니다.
즉 “나는 이런 독한 저주스러운 환경에 있는 자가 아니니 속히 빼내주세요”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면 이런 인간이 비록 살기 편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고 할지라도 그 자는 원래 아담과 하와가 보여주어야 할 참 인간상이 아닌 것입니다. 참되고 복받을 자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밟아가고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바른 인간이요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2-1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시는데 그 능력은 결코 인간이 갖고 있는 혈육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이 하나님의 권세는 그 인간만이 상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 때처럼 적절한 환경과 더불어 그 속에서 자신의 사람을 친히 생산해 내십니다.
고린도후서 4:7-10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란 자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만드시는데 그냥 사도 바울에게 호소하는 식이 아니라 환경까지 조성해주십니다. 즉 답답하고, 우겨쌈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환경을 통해서 진정 사도 바울의 성도됨은 결코 자신의 능력이 있지 않음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즉 자신의 기도발이나 자신의 찬양발이나 자신의 헌신 능력이나 희생 능력으로 자신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혈육을 믿고 사람을 의지해서 그것으로 권력으로 여기는 자들은, 항상 자신의 능력으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우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란 이런 식으로 자신이 자기에게 능력을 가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9:28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오른편 보좌에 주님으로서 앉게 됩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일하시는 자리입니다. 결코 자신의 능력으로 일하시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이 자리에서만 진정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할 수 있는 자리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그 어느 누구도 이 자리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경과했던 그 능력을 그대로 성도에게 임하게 하사 그들로 하여금 그 길 속에서도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깨달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즉 “나같은 인간은 진작 하나님께서 포기하시고 버려도 될 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신 능력에 감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로서 성도에게는 더 이상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은 필요치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축복받은 자격도 못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이 현실이 우리를 위한 현실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하심의 현실인 것을 저희들이 믿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0-04-22 23:30
059강-렘17장5-11(사람을 믿지 말라)-jer100421
2010-04-22 11:27:50 이름 : 오용익
059강-렘17장5-11(사람을 믿지 말라)-jer10042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7장 5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7:5-1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많이 듣던 이야기 같은데 이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을 의지하라.’라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어떤 환경에 집어 넣어놓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사막, 광야, 건조한 땅 그야말로 자기본색을 다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가시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평소 상식대로라면 ‘우리가 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절대자를 신봉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식을 확 깨버리죠. 어떻게 깨느냐, ‘하나님께서 만들어준 환경을 믿으라.’고 합니다. ‘네가 자꾸 신을 찾지 말라.’는 겁니다. 자꾸 신을 찾아버리면 그것은 환경을 무시하고 자기와 신이 맞상대하려는 욕구를 갖게 됩니다.
환경을 완전히 무시하고 ‘하나님, 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만드신 하나님이 나타나소서. 제가 하나님께 나아가겠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상대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보고 믿으라고 할 때는 하나님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사람으로 적당한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지를 걸러내는 환경부터 먼저 만들어냅니다.
광야와 사막을 만들어놓고 그 광야와 사막가운데서 하나님, 나를 원망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합당한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환경 속에서 그 환경에 적합한 인간으로, 그 환경에 합당하도록 다시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그야말로 사람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저 눈에 띄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런 입장에서도 이런 환경을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찬양하고 경배하고 믿어지는 사람은 하나님이 만든 환경에 일치되는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런 식으로 구원하느냐,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 인간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냐 아니냐를 측정할 수 있는 에덴동산이라는 환경을 만들었어요. 에덴동산이라는 환경은 나무 하나에 따라서 순식간에 그 환경이 날아가는 그런 환경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만약에 따먹으면 에덴동산 자체가 철수하는 아주 기이하고 희한한 환경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환경에서 만약에 우리가 장난삼아 하나님을 욕한다, ‘나는 하나님을 욕하겠어요.’라고 한다면 그 말 하고 난 뒤에 이 땅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납니까? 아무 일 안 일어나잖아요. 하나님께 삿대질을 한다, ‘이렇게 삿대질을 하니까 하나님이 벌 줘봐, 벌줘봐.’ 그런데 하나님께 삿대질을 해도 아무 일 없어요.
오늘도 수만 명이 갓 바위에서 빌었을 거예요. ‘나 그럼 갓 바위에서 빈다.’ 갓 바위 멀쩡합니다. 대구시에서 백억 가까이 투자를 해서 동화사에 템플스테이라는 불교관광사업을 한다고 해요. 그러면 동화사에 우레와 번개가 치고 불에 타고 그래야 합니까? 아무 일도 없이 공사 잘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아, 별일 없구나. 별일 아니네.’ 처음에는 무섭고 조심스러워서 주춤주춤하다가 이제는 담대하게 마음껏 자기의 본색을 다 드러내지요.
주께서 기다렸습니다. ‘이제 기어 나오느냐. 속에 있는 네 본색이 이제 나오느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언제까지만 에덴동산으로 인정하느냐 하면 선악과 따먹기 전까지만 에덴동산으로 인정하는 거예요. ‘과연 선악과를 언제 따먹느냐.’ 그 말이지요.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에덴동산은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는 날아가 버리고 선악과나무의 모든 정신은 인간 속으로 들어와 버리지요.
인간이 사는 대지에는 선악적인 저주가 있고 ‘죽으리라’가 있는 겁니다. 약간 어렵지요? 인간이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살아 있어야 되는 겁니다. 인간은 죽을 수가 없어요. 왜? 인간이 죽어버리면 죽음이라는 것을 말 못하기 때문에. 말이 참 어렵습니다. 인간이 죽어버리면 죽음을 이야기 못해요.
인간이 계속 살아 있으면 죽음이 대대로, 인간의 개인적인 죽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인간 대대로 인간머리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금방 죽지 않아야 됩니다. 아담이 하와와 새끼를 까고 새끼를 까고 계속해서 자식을 낳고 또 낳고 계속 해도 살다가 죽고 살다가 죽고, 그것이 창세기 5장에 나오잖아요.
‘죽음이 인간의 왕 노릇 한다.’는 로마서 5장의 말씀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악착같이 살려둡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의 어디에 있느냐? 인간의 환경에 있습니다. 인간은 환경과 자기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죽음이라는 것이 저주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들이닥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그냥 헉, 하고 숨이 막혀 죽어버리면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몰라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죽음이 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인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죽어버리면 인간은 죽음이 뭔지 몰라요.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대지위에서 살면서 이마에 땀이 흐르고 여자는 해산할 때 고통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이라는 것이 그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으면 죽으리라.’ 할 때 인간은 죽음이 뭔지도 모르고 따먹었는데 따먹고 난 뒤에는 주변의 모든 환경과 뱀의 역사와 더불어서 자손대대로 고통과 저주가운데서 ‘죽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혹독하구나.’ 하는 것을 온몸으로 환경과 더불어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과 인간, 인간과 에덴동산을 하나의 세트로 만들어놓았어요. 그렇게 세트를 만들어놓았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환경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 탓을 하느냐, ‘하나님이여, 왜 자꾸 이런 힘든 환경을 주십니까? 왜 이마에 땀을 흘려야 되는 힘든 환경을 조성해주셨습니까? 못살겠습니다.’라고 자꾸 하는 거예요.
인간은 생각이 짧아서 ‘환경만 바뀌면 얼마든지 하나님께 찬양하고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리라.’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좋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찬양으로 받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본래 인간이 아니라는 거지요. 먹고 배불러서 찬양하는 것은 찬양 축에도 안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찬양한다고 해서 ‘아이고, 내 사람이구나.’ 그렇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인간이 하나님께 고마워하고 찬양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 = 하나님이 만든 환경 +그 환경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는 인간) 이게 바로 원래 진짜 하나님입니다. 원래 믿는 하나님이에요.
사람이 살기 힘드니까 그때부터 하는 짓거리가 뭐냐, 자기들끼리 힘을 합칩니다. 본문에 보면 5절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왜 사람만 의지합니까? 다 그것이 이유가 있는 겁니다.
사람이 왜 사람만 의지하겠어요? 하나님한테 빌어도 환경을 안 바꿔주니까 하나님 버리고 사람 의지하는 겁니다. ‘교회 나오면 하나님께서 사기당한 돈도 다 갚아주고 교회 나오면 하나님이 취직도 잘 시켜준다.’고 여기고 교회 나옵니다. 그 때 그 당시의 그 사람 마음속에는 예레미야 17장 5절의 말씀처럼 자기가 그렇게 살아간다고 착각하겠지요.
‘나 여호와가 말한다. 무릇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제는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겠습니다.’ 이렇게 하지요. 그런데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10년 지나도 전혀 하나님이 자기 환경을 바꾸어줄 기색이 보이지 않을 때 역시 그 다음부터 믿을 것은 사람밖에 믿을 것이 없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교회는 나와도 교회에서 내가 믿을만한 괜찮은 사람을 믿게 돼요. 교회 나와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믿게 돼요. 그래서 큰 교회 가는 겁니다. 작은 교회 가면 신붓감 신랑감이 거의 없어요. 물건 팔아줄 사람도 거의 없고 보험 들어줄 사람도 다 떨어져 나갔고 정수기도 몇 사람 팔면 다 끝나버립니다.
왜 사람이 사람을 믿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만 믿으면 도저히 살지 못하는 환경을 줬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식들이 부모 따라 교회 나온다고요? 하나님 믿는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아직까지 부모의 도움과 부모의 용돈이 필요하다 싶으면 부모 눈치 봐서 교회 나와 줍니다.
그런데 어느새 부모가 자식한테 용돈 얻어 탈 시점이 되면 그 때는 자식이 부모 따라 교회 안 나옵니다. 하나님 믿는 부모보다 하나님 안 믿는 내가 더 자립도가 높아지고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구태여 부모종교 선택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는다 할 때 그것은 이 세상이 우리 맘대로 안 되는 환경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일어난 상황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어도 만사형통할 것 같으면 우리는 하나님 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을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준 적이 없어요.
하나님 믿으면 복 받아서 모든 환경이 바뀐다는 것은 한국교회와 전세계교회가, 악마가 항상 내뱉는 뻔한 거짓말이고 사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곱게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광야로 인도했어요. 그것은 ‘너의 목숨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율례와 법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너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너를 통해서 말씀을 살리기 위함이다.’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말씀처럼 이 세상은 말씀이 위주지 인간이 위주가 아니에요. 인간이란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말씀을 드러내기 위한 피조물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뒤에 자기가 말씀을 어겼다는 그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왜 살아가는데 이렇게 꼭 힘들게 살아야 됩니까?’ 하는 불평만 가득한 채 ‘환경 바뀌면 섬기겠습니다.’라는 거래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에는 전부 다 집 크고 넓고 잘 사는 사람만 나오지요. 실제로는 서울 가 보면 둘이 맞벌이를 해도 전세 값도 마련 못하는 집들이 많습니다. 그런 집들 문에 보면 다 교회 이름이 붙어 있거든요. ○○동 교회, 다 붙어 있다고요. 그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뭘까요? 그 사람들이 교회 와서 기도하는 내용이 뭘까요? ‘하나님, 이런 환경 주셔서 비로소 내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할까요?
‘하나님, 이런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일까요? 그분들이 금요철야 하면서 그런 기도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 제가 하나님 믿잖아요. 어서 이 달동네에서 저 아랫동네로 내려가게 하옵소서.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아마 그런 기도가 더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에서 이웃사람을 믿는 것도 포함되지만 그게 바로 자기의 기도와 자기의 정성을 믿는 거예요. 마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처럼 ‘내가 이렇게 힘들고 애써서 노력하는데 하나님이 나의 정성과 노력을 봐서라도 좀 도와주소. 그동안 내가 헌금하고 투자한 것 생각해서날 좀 도와주소.’라고 자기의 혈육과 자신을 믿고 그걸 자신의 권력으로 힘으로 생존하고 세상에서 버틸 수 있는, 자기 목숨을 고집할 수 있는 힘으로 삼는 것, 이것 “저주를 받을 것이라.” 이것이 저주받을 짓입니다. 저주받으려고 용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망에 적합한 사람과 사망에서 벗어나야 될 적합한 사람을 분류하기 위해서 사막을 통과케 합니다. 저주받은 건조한 땅에서 비로소 나라는 인간은 말라 비틀어져 죽어도 마땅함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다. 참 말씀 재미있지요.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겁니다. 기도 잘하는 나에게 있지 않고 헌금 잘하는 나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봉사 열심히 잘하고 예배참석 잘하는 나에게 능력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뭐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환경이 어떤 환경이냐 하면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하는 환경이고요 답답한 일을 맞이하는 환경이고 핍박을 받는 환경 속에서도 ‘이 능력이 저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라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제조해 내십니다.
그 제조하는 방법은 답답한 일과 우겨쌈을 당하는 일, 핍박을 받는 일을 계속해서 유발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살아가면서 이런 환경을 매일 아침마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한 달 수입이 2천만 원이 들어와야 되는데 1천만 원 밖에 안 들어왔다든지 그런 것, 천 원 할 때 산 주식이 1,800원으로 올라야 되는데 1,750밖에 안 되는 것, 하여튼 내가 기대한 대로 안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발견해야 돼요.
내가 기도한 족족 안 되는 것, 하여튼 모든 것이 핍박과 우겨쌈과 답답하게 일부로 조성하게 하는 환경으로 몰아넣으시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맛보는 것,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갔던 길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지요. 엄청 고생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을 요약해서 말한 것이 ‘내가 약한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했어요.
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약하게 만들어요.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여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4-28)
하여튼 온 천지가 우겨쌈을 당하고 위험하지 않은 곳이 없는 거예요. 남들 보면 오해할 겁니다. 사도바울이 일부러 위험한 곳 골라서 간다고요. 자기가 에베레스트 14좌 등정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주께서 따라가는 거예요. 위험이, 항상 위태로운 환경이 따라와요.
하나님께서 왜 사도바울에게 이런 위태로움을 따라가게 했을까요? 요한복음 1장 12절, 13절에 보면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 사로잡혀서, 하나님께 휘둘려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사람은 예수님이 갔던 그 길의 능력이 고스란히 주어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겪었던 그 상황이 환경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 안에서 생산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권세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이 능력과 무슨 능력이 우리 속에서 싸우느냐, 내 자신을 믿는, 혈육을 믿는, 나 자신을 믿는, 내 기도 발을 믿고 내 봉사 발을 믿는, 내가 헌금하고 헌신하는 이것을 믿는 이 능력과 주께서 예수님 가신 길을 갔던 그 능력이 우리 속에서 마주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같이 태어나는 겁니다. 이렇게 되려면 환경이 내가 통밥 굴리는 환경, 내가 예상하는 환경은 우리 눈앞에서 여지없이 종잇장 꾸기듯이 꾸겨버리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핍박을 당했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내가 이렇게 베풀어주면 저쪽에서 인사치레는 하겠지.’ 혹시 ‘고맙다는 소리는 하겠지.’ 또는 ‘환영받겠지, 나를 고마운 분으로 인정하겠지.’ 이 정도가 아니고 ‘인사도 없는 채 그냥 냉담하다.’ 그 정도도 아니고 아예 박을 받는다니까요. 봉사하고 헌신하면 그 봉사하고 헌신한 것이 없을 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봉사하고 헌신한 그것이 빌미가 되어서 오히려 핍박을 자초하게 되어버린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거예요. +로 올리려고 하다가 -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에서 제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한번 해보고 환영해주면 고맙고 아니면 그만이고.’ 그 만이 아니고 +를 기대했다가 아예 욕을 얻어먹는다니까요.
세상에 이런 억울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되었던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제가 보기에 아주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이것보다 더 어려운 대목이 있을까 하는 정도의 어려운 대목이 나와요.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너희들도 열두 보좌에 앉는다.’라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제가 어렵다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앉는 보좌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습니다. 오른편이라는 자리의 의미가 뭐냐, 이게 성경적으로 무지하게 어려워요. 오른편의 자리란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 받는 자리거든요. 이러면 쉽지요. 그런데 거기에 더 깊은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 자리까지는 다 아는데 그 자리가 유일하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리,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있는 자리, 그렇다면 그 자리는 사람들이 일체 그 자리에 있지 않는 한 하나님을 못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오늘 본문과 연관시키면 도저히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는 자리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약속하기를 예수님의 열두제자는 영광의 열두 보좌에 앉는다는 거예요.
이 말을 쉽게 하면 ‘누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자녀가 안 되지요. 안되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막 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의 권세가 임해서 ‘하나님의 권세가 임한 자는 혈통이나 육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오른편의 자리에 예수님과 더불어 앉을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그냥 우리가 지금 보는 하나님, 이것은 자기 편할 때 자기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혈육에서 나온 신앙에 불과한 거예요. 진짜 성령이 찾아와서 진짜 믿음을 줘버리면 이것은 그냥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가 아니고 감사와 고마움의 희열을 느끼면서 ‘죽어 마땅한 인간을’, 반드시 들어가요, ‘죽어 마땅한 인간을,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을 안 믿어도 되는 인간이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게 되다니 이게 웬 떡입니까?’라고 하면서 불 가운데서 물 가운데서 환란가운데서 혼자 기쁨의 희열을 폭발시키고 있을 때 그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은 혈육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혈육으로 되면 이렇게 돼요. ‘하나님,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믿어줄 테니까 이 어려운 환경을 지나가게 해 주시겠습니까?’ 이것은 꼼수에요. 이것은 통밥 굴리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만든 자녀의 권세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혈육에서, 역시 자기 몸이 불편하니까 자기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드니까 한풀이와 탄식에서 나오는, 자기 아쉬움에서 ‘한번 믿어줘 볼까’라고 나오는 도박하는 식의 믿음인데 그것은 자기의 믿음을 믿는 것에 불과한 겁니다.
주님을 믿게 하는 것은 단순히 믿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권세로 하나님의 아들 만드는 작업에 동참시키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놀라운 기적, 하나님을 찬양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죽어 마땅한 인간, 당연히 이런 환경 속에서도 고생해도 좋을 인간, 이런 환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도록 해주니 감사하다는 그런 고백이 하나님의 권세에서만 나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속고 있었습니다. 억지로 믿는 척 했고 또 믿고 하나님 의지하면 내가 원하는 좋은 것을 줄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사기인줄 알면서도 왠지 그 사기에 마음이 끌린 것은 우리자체가 혈육으로 하나님을 믿고자 했던 오류이기 때문인 줄 압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모든 것을 잃어도 마땅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