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강-눅5장17-26(누가 죄를 사하는가)-luk100418
024강-눅5장17-26(누가 죄를 사하는가)-luk100418
이름 : 오용익(IP:59.3.201.250)
024강-눅5장17-26(누가 죄를 사하는가)-luk10041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5장 17절에서 2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6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5:17-26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게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상당히 어려운 대목입니다. 방향이 서로 대조가 되어 있지요.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못나갑니다. 인간 쪽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방향을 바꾸어봅시다. 하나님 쪽에서 인간 쪽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방향이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방향이 충돌하기 때문에 만일에 하나님 쪽에서 사람을 붙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게 되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의도와 사고방식은 포기해야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노림수를 가지고 나아가거든요. 병이 낫겠다, 죽어서 천국 가겠다, 구원 받겠다 이런 의도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의도를 가지고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버리면 문제가 뭐냐, 자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괜찮은 존재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돼요. 그리스로마 신화에 보면 이카루스가 나오는데 밀납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 가까이 날다가 그 파라핀이 녹아서 떨어지고 말았다는 신화입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기가 갖고 있던 노림수 같은 것이 파라핀처럼 다 떨어져 나가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뭐냐 하면, 죽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는 겁니다. 죽어서 목숨 끊어지는 것 말고 이 땅에서 자기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장애가 있어서 그 장애로 인하여 튕겨져 나오지요. 사람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무슨 자 밖에 안 되는가, 관람객 또는 군중밖에 안됩니다.
야구선수가 야구하는 것 하고 구경하는 것 하고는 천지차이입니다. 관람이야 그냥 잠바입고 앉아서 하면 그만이지만 유니폼입고 경기장에서 뛰는 것은 선수입니다. 하나님께서 벌여놓은 일에 우리가 양복입고 잠바입고 관람이나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전부 다 압수당해야 되고 전부 다 파괴되어야 돼요.
본문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향과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사람 만들 때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이 대목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다 설명하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 쪽에서 인간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을 구원할 때 반드시 거기에 어떤 틀, 형식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로마서 8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제가 이 대목을 가지고 책 한 권을 썼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 다음에 두 번째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무슨 수로 예수 안에 들어갑니까? 뒤에 ‘정죄함이 없나니’는 탐이 나지요. 세상의 어떤 인간이든 하나님 앞에 죄 없는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조건이 붙어요.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마귀가 너를 욕하든지 주위사람들이 너를 뭐라고 씹든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마세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는데 문제는 예수 안에 들어가는 것이 문제에요. 예수 안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예수 바깥에는 판사가 되든지 검사가 되든지 무조건 저주받습니다. 직업 관계없습니다. 교사, 공무원, 농부, 백수, 목사, 장로, 집사 아무 상관없습니다. 예수 밖에 있는 자는 교회 50년 다니고도 지옥 갑니다. 어쩔 수 없어요. 이것은 제 맘대로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교도소 들락날락 해도 천국 갑니다. 이 원칙은 사람이 만든 원칙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든 원칙 같으면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도사입니다. 그 사람들은 관람객이고 관중이에요. 그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하시는 겁니다. 로마서 8장 1절에 있는 말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 다음에 2절부터 나오는 말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자에게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계속해서 “해방”하고 있다는 겁니다. 구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참 희한하지요.
무슨 뜻이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그 영혼과 마음이 더 이상 자기가 손대는 공간이 아니고 주님께서 손을 대서 무엇을 보여주느냐, 끓어오르는 욕망과 죄가 매일같이 주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에 의해서 전환되고 있다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공간으로서 출렁거리는 그 마음과 영혼을 가지고 다닌다는 겁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다 죄가 되거든요.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다 죄가 되는데 주님이 하는 일은 다 우리한테 생명이 되고 영생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헌금해도 죄고 전도해도 죄입니다. 설교해도 죄고 강의해도 죄고 누굴 저주해도 죄고 축복해도 죄고 철야해서 기도해도 죄고 기도 안 해도 죄고, 모든 것이 죄일 수밖에 없는 이것이 예수 안에 있다는 어떤 특수한 조건 때문에 그 죄가 어떻게 의로 바뀌는지를 네가 몸소 느끼라는 겁니다.
그 작업에 동원된 공간이 바로 성도라는 거예요.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상상도 못합니다. 오늘날 신학자들도 이것을 아는 신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것 알면 교수 질 못하고 쫓겨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하실 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도록 하게 하기 위한 그 작업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온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갈 때는 이런 낌새를 도저히 느끼지를 못합니다. 왜? 나름대로 아쉬운 것이 있기 때문에.
신데렐라라는 동화에 보면 12시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할 신데렐라가 왕자하고 춤추느라 정신이 빠져 있다 보니 12시가 다 되어 가지요. 12시 땡 치기 전에 온다고 서두르다 보니까 유리 구두 한 짝이 벗겨진 채 오고 말았어요. 신데렐라와 춤을 췄던 왕자가 그녀에게 반해서 그 구두를 들고 주인을 찾습니다. 그 구두에 발이 맞는 사람을 찾는 거예요.
예수님이 왕자입니다. 예수님이 들고 다니는 구두가 뭐냐,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에 해당되는 사람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 쪽에서는 교회를 찾아 나옵니다. 교회를 찾아 나온 사람들은 교회라는 벽에 막혀서 천국에 가지를 못합니다. 제가 지금 희한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와서 천당 못 간다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오게 되면 전부 교회라는 벽에 막힙니다. 교회 오게 되면 전부 다 사람을 상대합니다. 주님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나 장로 이런 사람하고 상대하다 보니까 항상 교회 다녀오면 머릿속에 남는 것은 ‘저 집사는 어떻고 최 집사는 어떻고 박 집사는 어떻고 그 장로는 어떻고’ 이런 것만 남아요. ‘하여간 김 집사는 요리도 잘해. 얼마나 입맛에 맞게 하는지’ 그런 것만 남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상대합니다. 사람들을 상대하니까 교회에서 논의되는 것이 사람들 속에서 끄집어낸 원리와 원칙만 가지고 구원이 될 수 있다고 우기는 그런 동네가 되고 말았어요. 너도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 있는 것, 그런 재주들을 모아놓으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 통한다는 겁니다. 천국 문이 열린다고 우기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그런 교회에서 주님께서 불러준 사람이 한 사람만 있다면 그 사람은 교회 보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어떤 식으로 내 영혼 속에 말씀을 집어넣어서 하나의 어뢰나 기뢰가 되어서 퍽퍽 터져서 항상 나를 죽여서 아예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서 아예 이 세상에 나는 없고 예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주께서 뭔가 일을 꾸미려고 만들어놓은, 기능적으로 새로운 자아로서 늘 역사하고 일을 하는 식으로 바꿔지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을 느끼고자 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일이 현장에서 일어난다 해서 그걸 믿음의 관계라고 하는 겁니다. 본문에서 ‘믿음이 있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신데렐라공주를 찾아가는 왕자처럼 하나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유리구두를 가지고 우리의 발에 맞는가를 맞추어 봅니다. 그렇게 맞추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안 찾아주게 되면 우리는 나름대로의 인간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향을 모색하고 시도하게 되는 겁니다. 그 시도하는 사람들이 본문 17절에 나옵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라고 되어 있어요.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21절에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외람되고 건방진, “이 참람한” 너무 심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죄를 사할 수 없는데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왔을 때 ‘일어나서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네 병이 나았다.’ 그런 말씀을 한 것도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말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죄를 사할 수 없다.’는 이 사실에 일단 우리가 동의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 외에는 우리 죄를 사할 분이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인간이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해야 될 준비작업 같은 것 그런 것들을 그들은 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러면 죄 사함 받습니까, 저러면 죄 사함 받습니까, 이렇게 금식하고 착한 일 하면 주께서 죄용서 하시겠지요?’라고 죄 사함 받을 수 있는 준비과정을 갖추어야 되는 것이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공통점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행하시면 오늘날 죄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그것이 오늘날 기껏 교회가 하는 일이에요.
그것 헛방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중풍병자와 함께 한 이 사람들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지붕을 뚫었다. 지붕을 뚫었으니까 그것이 믿음’이라고 보는 거예요. 여러분, 지붕을 백 개 뚫어도 죄 사함 받지 못합니다. 지붕 뚫는 것이 죄 사함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붕 뚫는 것이 죄 사함이 될 것 같으면 저도 지금 지붕 뚫겠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의 머리를 친다.’고 하니까 뱀 잡는 뱀 장사들 다 구원받겠네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말에 우리는 적극 동의합니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이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단지 준비과정을 말하지만 우리는 준비과정부터 떼어 버립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사할 수 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해서 예수님만이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신다 그 말이에요.
이걸 확대해서 그렇게 해석해 줘야 돼요. 그것이 사도행전 4장에 나오니까.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사람만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여러분 오산입니다. 하나님은 죽어 있는 사람과도 상대합니다.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는 겁니다. 살아 있을 때 주께서 죄를 용서해주시면 그 사람이 죽어 있을 때조차 살아 있을 때처럼 주가 되시고 그리고 자기를 믿지 않고 죽은 자에게도 주님은 주가 되십니다. 그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저주해서 심판한다는 의미에서 주가 되십니다.
사도행전 4장에 예수님이 이것 때문에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죽었다가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산자나 죽은 자나 어떤 자라도 주님의 통치, 주님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날 위인은 이 세상에 없다, 그걸 분명히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본문에 나오는 당시에는 그들이 알지를 못해요.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17절에 보면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대목도 설명하려면 한 시간 갑니다. 왜 한 시간씩 가느냐, 여기서 예수님과 주의 능력이 따로 분리되어 있거든요. 예수님이 주가 아니라 주의 능력이 따로 있고 예수님이 따로 있습니다. 주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구약 때 이스라엘과 함께 했던 그 여호와 주님이 주님이라는 말이지요.
구약 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벗어나게 하고 홍해를 갈라지게 하고 그들에게 적들을 이기게 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그 주님의 능력이 지금 나사렛 예수라는 이 청년, 이 분과 함께 있더라, 그 말이에요. 나중에 예수님이 주님이 되고 그때는 그것이 확실하게 드러나지만.
어렵지요? 성경 하나하나가 왜 이렇게 어려운가를 따진다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쪽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도가 가득하기 때문에 그것과 어긋맞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꾸 붙잡으려고 합니다.
제가 이번 주에 <타이탄>이라는 영화를 하나 봤어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 신화에 관련된 책을 읽었습니다. 신화가 뭐냐? ‘아하, 신화가 뭔지를 알아야 성경에 나오는 우상이 뭔지를 아는구나.’ 신화가 뭐냐, 우상이 뭐냐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사람 피부에 북두칠성 같은 별자리를 그려봅시다. 그리고 난 뒤에 그 별자리가 그려진 피부를 잡아당기는 거예요. 잡아당기면 당기는 방향으로 죽 늘어나겠지요. 사람의 성질이나 성격을 하늘에다 그려요. 자기성격과 성질, 대인관계, 집안관계, 동서관계나 고부관계, 남매지간이나 부모자식관계 이 전부를 대자연을 백지로 여겨서 거기에 기입해요.
기입해서 그걸 쏙 잡아당기면 그것이 신들이 됩니다. 왜 그들이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 냈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고약한 성질 변덕스러운 성질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인간이 인간을 만들면 항상 착하고 곱고 고상하고 우아한 것이 나올 것인데 인간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고 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내가 원치 않는 고약한 성질이 나오더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책임은 신들이 져야 돼, 라는 입장에서 인간은 인간의 성격에 기준해서 신들을 만들어내고 대자연의 변덕스러움, 기후와 날씨의 변덕스러움을 그들에게 제사함으로서 타협과 조정을 보려고 한 그것이 세계의 모든 신화의 특징입니다.
제가 읽은 책이 『세계의 신화』라는 아주 두꺼운 책인데 그 책에 보면 거기에 세계의 모든 신화와 종교들은 다 나와 있어요. 방금 제가 한꺼번에 짧게 요약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믿는 신이라든지 하나님이든 성령이든 예수든 뭐가 되었든 간에 자기 성질과 자기성격에 따라서 믿는 거예요.
그래서 백사람마다 예수가 다 달라요. 예수의 성질도 다 다르고. 교회 나와도 신화를 믿는 거예요. 우상을 섬기는 거예요. 착한 사람들이 우기는 신이 뭔지 압니까? 착해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성질 급한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뭐냐, 굉장히 부지런한 하나님이에요. 느긋한 성격가진 사람들이 믿는 신이 뭐냐 하면 인자하시고 침착하신 하나님이에요.
전부 다 자기성격을 옹호하고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내용을 채우는 겁니다. 고추잡채에다 내용물 채우듯이 만두에 속 채우듯이 하나님이라는 신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자기의 모든 성격을 거기에 채웁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백사람을 만나면 백 명의 신을 만나는 거예요. 신을 만나는데 자기와 성격이 비슷한 신들을 만나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에서도 파가 나누어지게 되지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성질이 어떻고 성격이 어떻게 부모를 어떻게 만났고 형제간이 어떻게 되고 평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일체 묻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왜? 거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장애물을 쳐버려요.
로마서 4장에 이삭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오면서 거기에 이삭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은 받았습니다만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브라함은 그냥 평소대로 자기성질대로 그냥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기서 장애물을 쳤습니다.
‘너희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질 것이다.’라는 약속을 하나님이 먼저 제시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습니다. 이쯤 와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성격과 성질이 구상해낸 예수라든지 삼위일체 하나님 같은 것을 일체 하나님께서 받지 않고 무효로 돌립니다.
하나님 약속과 인간 사이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 조건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힘으로 믿어지고 인간의 힘으로 죄 사함 받고 인간의 힘으로 천당 가는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가위로 끊듯이 끊어버렸습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게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그저 자기 얼굴을 비추는 거울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것은 자기모습의 투영이에요. 투시라고도 하는데 자기 모습을 고상하게 다듬어서 그걸 신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게 이름을 예수라 해도 마찬가지고 성령이라고 해도 마찬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해도 다 마찬가지에요. 이스라엘이 그 짓 하다가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었어도 그들은 그들로서 가능한 종교를 만들었기 때문에 멸망당한 거예요. 차라리 종교를 포기하면 되는데, 차라리 교회를 포기하면 되는데. 교회를 포기하면 그 다음에 교회가 보여요. 이것은 제가 무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산 교회’거든요. 교회 앞에 뭐가 붙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산’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날 국민일보 같은데 나오는 교회 모습 보세요. 사람들의 기도로 만든 교회, 사람들의 헌금으로 세운 예배당, 사람의 구도와 봉사와 무소유로 만든 교회, 선교로 만든 교회, 고아원 같은 것을 지어서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는 교회, 노인들 복지사업 하는 교회,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교회, 제 눈에는 그런 교회밖에 눈에 띄지를 않아요.
성경에 나와 있는 유리구두, 유리구두가 뭔지 알아요? 아까 말씀 드렸지요?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제가 또 하나의 유리구두를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피로 사신 교회”, 이 교회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교회가 아니에요. 그래서 인간은 교회를 포기해야 됩니다. 교회 만들기를 포기해야 되고 교회 부흥되기를 포기해야 돼요.
교회 다니신다 싶거든 절에 다니신다 생각하면 됩니다.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 “우리사(寺)에 다닙니다.”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 “반야월제일사(寺)에 다닙니다.” 절에 다니는 거예요.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 “범어사(寺)에 다닙니다.” 저쪽에 잘 지어놓은 범어교회라고 있어요. 범어사, 서문사, 동일사, 거기에 보면 인간이 감동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어요.
하나님의 피를 하나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인간이 만들어냅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할 때 예수 안에 있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우리는 예수 안에 들어갈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항상 우리는 우리를 모시고 다니거든요. 어디가도 우리는 우리 안에 있지 우리 바깥에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 왔다고요? 예배당에 왔다고요? 예배당에 와도 우리는 내 안에 있어요. 나를 모시고 나를 가마 태워서 우리 교회 온 거예요. 어느 자리에 가든 ‘나’ 안에서 우리는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침에 아파트에서 남편은 회사로 아내도 자기 직장으로 가고 나면 그 아파트에는 아무도 남지 않지요. 다들 아파트 밖으로 나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둘은 각자 아파트 밖으로 나와서 각자 직장 생활을 해도 한 가정 안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정, 자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내 안에 있지 않다, 내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것이 있는데, 여기 내 손과 팔이 다 있는데 왜 내 것이 없다고 하느냐 이 말이지요. 누가 내 손목을 치면 내가 아야, 하지 남이 아야, 합니까? 이 몸뚱이가 전부 내 것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이 몸은 하나님 것인데 자꾸 네가 우긴다.’는 거예요. 하나님 몸을 가지고 내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내 것이라고 우긴다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내가 나의 주가 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안 바뀌면 구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뀌어야 된다는 겁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을 벌이는 공간인데 자꾸 우리는 이 몸을 내 영광을 위해서 바뀌는 공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본문 끝부분에 보면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은 하나님의 죄 사함이 벌어지는 그 현장에 우리가 참여하는 그 방식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관람객이에요. 누가 죄 사함 받은 것을 관람하고 박수는 치지만 내 몸이 그 현장에 하나의 마술에 쓰이는 재료처럼 예수님이 일을 벌이는 도구로 우리를 내놓을 줄을 몰라요. 이러면 안돼요.
사람이 “주여, 이제부터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를 사용해 주셔야 그때 사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영광이 없겠습니다. 제 몸을 주님의 일에 좀 사용해 주시면 안 됩니까? ‘이런 인간도 죄 사함 받는다.’ 라는 그 일에, ‘이런 인간이 예수 안에 있는 인간이다. 봐라, 결코 정죄함이 없잖아.’라는 하나님의 유리구두에 저를 신데렐라로 사용하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내놓으려면 반드시 여기에 장애가 있어요.
그 장애,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그 사고방식을 뚫고 나가야 됩니다. 사람들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믿고자 할 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하나님이 일을 하는 것을 일단 보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믿을 만하면 내가 믿겠다.’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방식을 사용해요.
자기를 완전히 석고로 생각해서 망치 가지고 자기를 다 깨어버리는 식으로 자기를 망치는 그런 경우는 없어요. 데카르트가 이런 이야기 했잖아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나 죽으면 하나님도 필요 없다.’ 그 말이에요. 내가 죽는 마당에 하나님이 뭐가 필요하냐 말이지요. '날 위해서 신이 있는 것이다.'라고 보는 겁니다.
이것이 로마그리스신화를 비롯해서 세상의 모든 신화입니다. ‘날 살리기 위해서 신이라는 것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죽어도 좋으니 내 한 몸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죽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날 만드신 분이 중요합니다.’라는 아이디어를 누가 가지겠습니까? 이걸 누가 가질 수 있냐 말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디까지나 자기위주지 어떻게 하나님 위주고 신 위주입니까?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는 몰라요. 다만 그 사람들이 알았던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믿는데 있어서는 어떤 장애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알았어요. 그 대목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계속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 있어서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것인데요. 지금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었습니다. 이미 자기 몸이 늙었습니다. 자기 아내의 태가 이미 죽었어요. 자식을 못 낳는다는 점에서 시체나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아기는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자손이 많아진다.’는 겁니다. 이 계획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로마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까 비록 내 힘으로는 안 되지만, 내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모든 것이 막혀 있어서 다 안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 쪽에서 약속을 믿게 해 줬다는 그 사실, 약속을 주셨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냥 주신 것이 아니고 그 약속과 더불어서 약속을 준 배후에는 약속을 이룰 수 있는 기적이 함께 따라와서 말씀이 우리에게 도달되면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가 믿어지게 돼요.
그 은혜가 임하면 그렇게 돼요. 기적이라는 말이 있다는 말은 기적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라는 말은 우리 힘으로 이루려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룰 수가 없어요. 우리는 어디가도 내 안에 나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미국에 가나 영국에 가나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여행을 많이 한 사람들을 보면서 약간 답답해하는 것은 자기가 아프리카나 어느 외국을 여행했다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보지 않고 ‘당신은 어디를 가도 거기 가 있는 당신 자신에 대해서 연구하고 탐구한 사람에 불과하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여행한 사람이다.’ 하는 겁니다.『피』라는 책에 보면 나옵니다.
바깥에 있는 것은 자기가 보는 안목에 불과하고 실제로 어디가도 자기가 주인공임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우리가 천로역정처럼 지상에서 천국까지 여행한다 합시다. 여행을 하게 되면 5년 믿었다, 10년 믿었다, 우리 마음에 쌓이고 쌓이는 것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아름다운 추억과 기억들만 소복하게 성화론적으로 계속 쌓이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자기 안에서 못 벗어나요.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수준이냐? 여러분이 거울을 보잖아요. 거울에 자기 모습을 투영해서 보면 거울 안에 비추인 자기모습이 있지요. 그냥 비추인 정도가 아니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아예 거울 안에 들어가서 그 희한한 거울안의 세계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엄마가 거울을 보다가 거울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습니다. 엄마가 없어요. “엄마, 어디 있어?” 하니까 거울 속에서 “나 여기 있다.” 하면서 거울 속에서 엄마가 나타납니다. “엄마, 나도 거기 들어갈 거야.” 하게 되면 박치기나 할 뿐이지 거울 속에 못 들어가잖아요. 그 정도로 불가능한 것이 예수 안입니다. 거울 속에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 몸 자체가 내 것이 되어 있기에 내가 장애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장애를 뚫을 수 있는 것은 뭐냐, ‘오직 예수님이 주신 약속밖에 없습니다.’라고 그것이 믿어질 때, 믿어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의 고백이 아니고, 내가 믿고자 하는 그 분의 말씀이 내 밖에 그냥 세워둔 채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이 온통 말씀 천지가 되고 내 안에 말씀으로 폭파할 때 그 때 우리는 예수 안에 들어온 사람이 됩니다.
예수 안에 들어온 사람이 되면 우리 안에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결코 정죄함이 없’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정말 제가 전하고 있으면서도 계룡산에서 도 닦아서 전하는 말씀인 셈이 돼요. 교회를 찾는 것은 쉬운데 성도를 찾는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전부 다 기적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좋은 소리 한 번 해 드렸습니다.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더 이상 우리는 내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그때부터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 앞에 주가 하나 붙습니다. ‘나의 주시여, 주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이것을 믿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 말씀자체가 우리 안에 깊은데서 크레인으로 인양된 배처럼 인양되어서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그 때부터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안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중풍병자를 메고 오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하면 사람들이 너무나 운집해 있어서 이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맞는 이야기에요. 사람은 예수께 가까이 못갑니다. 지금 저 뒤에서 병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람 말고 예수님 바로 앞에서 예수님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도 예수님을 관찰하는 관찰자요 예수님을 관람하는 관람객에 불과합니다.
아무 소용도 없어요. 예수님이 어떤 신기한 일을 하면 그 때가서 날름 챙겨서 믿으려고 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 앞자리 말고 저 뒷자리에 있던 사람이 지붕 뚫고 하이킥, 지붕을 뚫었어요. 이것은 그냥 관람객으로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냥 예수를 관찰하고 관람하고 연구하고 분석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이 누구인가는 바로 나 같은 사람이 있어야 중풍 병 들린 사람이 있어야, 이런 친구가 있어야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는가가 표가 나는 거예요. 지붕을 뚫었으니 기왓장이 다 떨어져 내렸겠지요. 그래서 친구를 지붕으로 내렸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했습니다.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믿음이란 인간이 행하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한 모든 약속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믿음 관계죠,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병 고치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돈 문제, 취직문제, 결혼문제, 교회부흥문제, 사업문제, 자식문제, 건강문제 이런 것들이 주 관심사가 되지요.
하지만 이런 것들에 얽매이면 그냥 병만 고치고 갈 뿐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심판 이 있다.’고 할 때 죽고 나서 심판이 있다고 할 때 무엇이 중요한가, 살아 있을 때인 지금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남자였던가, 여자였던가, 키가 컸던가, 작았던가, 그런 것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뭐가 문제냐? 죄,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돼요. 주님께서는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 문제까지 깔끔하게 해결해 주기 위해서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한 겁니다. 그걸 보고 있던 관람객들은 뭡니까? 전부 다 죄가 그대로 있는 거예요. 예수를 만나고 예수님의 솜씨를 구경해도 여전히 자기는 죄 사함 없이 그대로 ‘내 몸은 내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죄 사함 없이 ‘참 예수님 훌륭하네. 죄 사함도 주네.’ 하면서 자기 죄사하는 것은 못 느끼고 남 죄사하는 것 실컷 구경하고 지옥가고, 남 용서받은 것 실컷 구경하고 자기는 지옥가고.
본인 자체를 내 놓아야 되는데, ‘내 몸이 주님의 죄 사함의 현장입니다. 죄 사함이 벌어지는 그 현장이게 하옵소서.’ 자기 몸을 몽땅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나니.’에 내 놔야 될 텐데 자꾸 교회 와서 구경만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 몸만 챙기려 들어요. 관람객으로 관중으로 머물려고 해요. 주의 말씀이 앞에까지 와서 그냥 도로 가버려요.
‘머리가 나빠서 말씀이 요새는 기억이 안 되네.’ 머리 나쁜 것 따질 것 없어요.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무슨 짓을 해도 죄용서 받는 것이 드러나면 그 인간 자체가 말씀 덩어리입니다. 그 사람이 걸어가면 말씀이 걸어가는 거예요. 그 사람이 오줌 누면 말씀이 오줌 누는 거예요. 정죄함이 없는 인간이 오줌 누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밖에 안돼요. ‘에이, 하나님만 하는 것인데 어떻게, 안되지.’ 이렇게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직접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 직접 몸에 들어온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되어 버려요. 완벽하다는 말이 아니고 늘 죄가 끓어 올라오고 그 죄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서 계속해서 정죄함이 없이 돼요.
아침에 눈뜨면 ‘정죄함이 없느니라.’ 저녁에 눈 감을 때 ‘정죄함이 없느니라.’ 그 다음날 아침 되면 4월 19일에 또 ‘정죄함이 없느니라.’ 4월 20일에 또 ‘정죄함이 없느니라.’ 4월 며칠에 등산가면 또 ‘정죄함이 없느니라.’ 5월 달 어버이날 되어서 애들이 꽃 달아주면 또 ‘정죄함이 없느니라.’ 자식들이 잊고서 어버이날 꽃 안 달아줘도 ‘정죄함이 없느니라.’ 6월 달에 사기 당해도 ‘정죄함이 없느니라.’ 7월 달에 종기 나도 ‘정죄함이 없느니라.’ 그 모든 것 자체가 ‘결코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느니라.’
우리 안에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있으면 기껏 우리는 신화밖에 안됩니다. 내 성격에 맞는 신, 나 닮은 신, 그냥 거울 보듯이 내 모습 그대로 내가 나를 신봉하는, 나에게서 출발해서 나에게로 되돌아와 버리는 바보 같은 짓을 평생토록 하게 됩니다.
나에게서 출발했는데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이제는 돌아와도 말씀이 돌아와서 날마다 내가 말씀으로 교체되는 현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정죄함이 없느니라.’ 하는 인간된 우리자신을 내 보네세요. 죄 많은 우리를 주께서 세상에 드러내시면서 ‘내가 이런 짓을 해도 정죄함이 없느니라.’라는 그런 말씀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 우리가 무슨 수로 우리 바깥에서 주님을 영접하겠습니까? 그동안 예수 믿는데 갖은 장애가 있었습니다. 부부의 정도 장애요 가족도 장애가 되었고 교회가 장애가 되었고 교회 와서의 자존심도 장애가 되었고 잘사는 것 못사는 것 직업도 다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그것 무시하시고 말씀으로 약속으로 침투해주니 모든 것이 믿어지고 이제 우리가 말씀이 움직이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살아가면서 말씀만 드러나고 퍼지고 말씀만 이루어지는 것을 감사하는 하나님의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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