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13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5-땅과 여호와의 축복
20100413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5-땅과 여호와의 축복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100413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5-땅과 여호와의 축복
(강의:이근호 목사)
84페이지 [땅과 여호와의 축복]이란 대목에서 땅에 대해서 침멀리는 보수주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할 이론을 제시합니다. 땅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정착하는데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임시적인 정착이고, 하나는 본래부터 땅이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땅의 개념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은 총신이나 이런 신학교에서는 나올 수 없는 깊은 인식입니다.
제가 땅 강의하기 전에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항상 성경을 수직적으로 보게 되면 성경 표면에 있는, 문자로 기록된 창세기 1장 1절, 2절, 3절, 여호수아 1장 2절에서 4절, 5절에서 7절 끊을 수 있어요. 국어시간에 보면 문맥나누기, 프리셉트가 그런 것 아닙니까. 항상 성경해석을 할 때는 밑둥치로 들어가야 되는데 위로 들어가 버리면 국어시간처럼 문자중심해석에서 머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선과 밑에 있는 것은 다 연결돼있단 말이죠. 연결돼있다는 걸 구조적 의미라 하거든요. 밑에 구조적으로 전부다 매트릭스처럼 연결돼있는데 만약에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렇게, 이렇게 봐버리면 중구난방이에요. 여기서 이야기했던 것과 여기서 이야기했던 것 다 모순이 되는 겁니다. 특히 잠언서 같은 경우에는 문자적으로 나눠버리면 일관성이 없어요.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장신 학생들 신학원 들어가게 되면 장로회신학교에서 배우는 것 말고 성경을 무작정 읽게 하는 그러한 기도원 비슷한 게 있다는 겁니다. 시흥이나 그 근처 제가 얼른 가서 본 적이 있어요. 성경을 무작정 읽어서 목회자 될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몸에 익히도록 하는 훈련소 같은 게 있답니다. 그게 한두 군데가 아니고 여러 군데 되는 모양인데, 목사들이 성경을 너무 몰라서 신학은 줄줄하는데 성경도 모르면서 성경전문가로 강단에 설 수 있느냐 하는 그런 취지에서 적극 장려해서 성경을 강제로 읽게 하는 모양인데.
해봐야 문자적으로 단절되어서 밑에 내려가질 않아요. 항상 위에서부터 전체 이야기에서 위로 올라가야 돼요. 우리 수련회 할 때 항상 잠언 하던, 시편 하던 간에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다니엘 할 때도. 전체적인 구조적 의미를 이야기해서 이러한 성경구절들이 전체 구조에서 어떤 포지션을 갖는가? 그런 차원에서 전체를 봐야 앞뒤가 모순이 되질 않는 겁니다.
땅이란 의미도 마찬가지거든요. 성경에 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문자 말고 밑둥치를 파고 들어가는 겁니다. 파고 들어갈 때 땅에 관련된 여러 가지 구약의 성경구절, 신약의 성경구절 있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거죠.
골로새서 3장 같은 경우에 우리는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분명히 위를 바라보자 하죠. 그 땅은 어떤 땅이라 합니까? 우리를 살리는 땅이에요, 죽이는 땅이에요? 우리를 죽이는 땅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무슨 동입니까? 괘정동에 모인다는 것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죽이는 세력이 활동하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것은 물리적으로 땅을 파고 포크레인으로 판다고 해서 그 의미가 나오는 게 아니라 이 말이죠.
어떻게 해서 그러면 골로새서 3장에 의하면 땅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지, 우리 생명은 하늘에 있으니까 우리를 죽이는 땅에 대해서 미련 뚝 끊으라는 해석이 왜 나오느냐고 물으면, 그거는 골로새서 3장을 파고 들어가면 거기 주체가 나와요.
새로운 주체가 나오는데 침멀리가 지난 장부터 해서 이어오면서 멋들어지게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모든 구약의 개념은 이스라엘이라는 주체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이걸 문자적으로 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도대체 이걸 누굴 위한 율법 의미며, 성전 의미며, 땅의 의미냐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방인을 위한 여호와가 아니고, 이스라엘을 위한 여호와, 백성을 위한 여호와.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만들기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있다. 주체가 나거든. 내가 여기 있는데 나를 어떻게 살릴 것이냐? ‘여호와여 도와주소서.’ 그런데 나는 하나님이 보는 그 인간이 아닌 거예요.
영화 [아바타] 보면 괴물 같은 키 큰 여자들, 남자들 나오죠. 그 아바타들 우리 보기에 인간입니까? 아니죠. 근데 자기들끼리 모여 있으면 자기들은 고귀한 존재로 보지요. 인간의 표현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나비족, 고귀한 존재로 보잖아요. 고귀한 존재로 보든 우리 지구인이 봐선 쓰레기, 총 쏴서 죽어야 될 하나의 대상에 불과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보기에는 인간의 존엄성, 같은 인간끼리 예를 갖추어라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과연 인간일까요’ 하는 문제를 우리가 언제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 교회 올 때 자기가 인간이라고 교회 오잖아요. 만약에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건가? 하나의 아바타면, 인간이 아니라면 그리고 교회 와서 예배드려도 그걸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 그런 시스템이 위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성경을 이렇게 밑둥치로 바라보게 되면 나오는 결론 하나가 뭐냐 하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구나. 사람이 아니면서도 사람 행세하는구나.’ 사람이 아니면서도 사람 행세하려고 예수와 성령과 삼위일체를 논하고 여호와를 논하다보니까 그것은 하나의 가상적인 신에 불과하고 우상, 허상에 불과하지 진짜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한 짓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경배, 찬양, 예배, 기도, 전도 이 모든 것이 전혀 하나님과 무관한 하나의 인간이란 이름으로 벌리는 종교적인 파티에 지나지 않아요. 디오니소스의 집단, 오르페우스의 집단, 종교파티 절정의 술을 퍼마셔서 뿅 가는 그런 모습. 그걸 구약에서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들.
우상의 특징은 자기 자신을 신을 이용해서 현재 있는 자기에서 다른 자기로 변화시키려 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면 그들은 우상이 아니라 신이라 하겠죠. 자기가 믿는 신에 의해서 지금의 나에서 다른 나로, 내가 원하는 나2로 변하려 하는 겁니다. ‘신이시여 이렇게 기도하는데 나뿐만 아니고 내가 사는 환경, 모든 것이 변하게 하옵소서.’ 어떻게? 살기 좋은 쪽으로 살기 편한 쪽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신에게 하소연하고 비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제 기도를 열중합니까? 자기 형편이 어려울 때 하죠. 쉬울 땐 안 해요. 이게 인간이 아니면서도 인간인 척 하는 인간들의 본성 속에는 신을 부를 때는 다급할 때, 아쉬울 때, 힘들 때, 괴로울 때, 죽을 때, 답답할 때, 못 견딜 때 신에게 부르짖는 거예요. 그렇게 부르짖으면서 인간은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 놓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그렇게 부르짖는 내가 과연 부르짖을만한 존재냐 하는 것을 절대로 자기한테 묻질 않아요.
그런데 참 하나님은 뭐냐 하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달라질 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처음부터 설계도가 있어요. 설계도대로 착착 일이 진행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현재, 미래, 과거가 확정돼있고 고정돼있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이미 고정된 시나리오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변함의 여지가 없어요. 그냥 덮치는 거지.
어떤 건물 짓는데 맨 땅에 땅을 파고 기초하고 콘크리트 작업합니다. 시멘과 자갈과 모래가 섞여있는 그것이 레미콘에서 빙빙 돌다가 쏟아져 나오잖아요. 나와서 그 위에다 철근 콘크리트 하려니까 레미콘이 말하기를 ‘한 며칠 있다 하면 안 됩니까?’ ‘저는 콘크리트보다 흙이 좋은데’ 이렇게 요청할 자격이 콘크리트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설계사에 의하면 그 다음에 토목 공사해야 되거든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설계도면대로 만들어져갈 뿐인데 우리는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다룰 때 하나님 만나는 순간부터 기본적인 우리의 우상성이 있잖아요. 내가 되고 싶은 나, 그것하고 타협을 시도해요. ‘하나님, 살살합시다. 하나님 너무 성급하게 변화시키면 자빠집니다. 교회 안 나오는 수가 있어요. 적당히 합시다.’ 우리는 자꾸 타협적으로 나가요. 이거는 우리뿐만 아니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지만.
구약의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싸움은 이 싸움입니다. 그 정도는 설계대로 나겠다는 것은 하나님 뜻이고, 그걸 두 자로 언약이라 하죠. 언약대로 하겠다는 건 하나님 뜻이고. ‘우리의 소박한 소망과 포부를 너무 무시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버릴 수가 있어요.’라고 타협적으로 나가겠다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그래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는 과연 우리가 인간인가부터 건드려줘야 돼요. 우리가 구원받고자 왔는데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 앞에 합당한 뜻이 되는가, 안 되는가? 그것부터 따져보자.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고 우리 뜻이잖아요.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그러면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는 그 근거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 근거는 우리의 우상성, 내가 원하는 맞춤 신이 내 안에 꿈틀거리고 있다. 그걸 라캉의 철학에서 ‘잉여’라고 합니다. 상당히 재미있지요. 여분의 것. 잉여에서 나온 것이 인간의 자기 몸 중심의 시간론이 나오는 겁니다.
미래가 뭐냐? 현재에 만족하면 미래가 안 나와요. 여러분 안식에 미래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미래를 끄집어내어서 자꾸 방향을 미래 쪽으로 나가겠다는 것은 현재 자기가 영 성에 안 찬다는 거예요. 내 욕망과 현재 상태가 자꾸 어긋나는 거예요. 맞질 않아요. 맞질 않으니까 항상 뭔가 비는 자리가 있죠. 그 비는 자리가 주체에서 자꾸만 발생된다는 걸 가지고 인간의 주체는 여분의 것이 계속 나온다는 겁니다.
말을 어렵게 했는데 쉽게 그림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땅 이야기는 조금 있다 하고요. 오늘 강의가 어쩌면 지금까지 제일 어려운 강의일 수 있어요.
마음을 구, 공으로 표현한다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밝은 면이 나오죠. 여기는 어둡지만. 이 밝은 면을 ‘자아’라 하죠. 에고. 이 구 중에서 표면, 이걸 의식세계. 의식세계에서 어떤 감각이 와서 의식을 느끼게 되면 그때 자아가 느껴요. 스포트라이트가 만약에 여기를 비추면 여기서 감각을 했던 자아가 여길 비추면 여기에 의식되죠.
말로 하는 것보다도 실제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늙은 부부가 있었는데 자식이 세 명이라 합시다. 그런데 큰 아들이 교통사고 일어나서 자기 동네 병원에서 간병할 사람 없어서 늙은 부모가 간병할 때 뭘 잊어버리느냐 하면, 셋째 아들이 공무원시험 친다는 걸 잊어버린 거예요.
그럼 여기서는 감각은 뭐냐? 첫째 아들이 교통사고 나서 지금 아프다. 여기만 관심 있다 이 말이죠. 그때 에고는 뭐냐 하면, 큰 아들 키우는데 얼마나 고생했나. ‘애는 하여튼 어릴 때부터 일이 안 풀려.’ 어릴 때부터 생각하면서 이 자아가 과거, 현재, 미래 시간관을 에고가 만들어내요. 그러면 큰 아들이 교통사고 나는 동시에 잊어버렸던 큰 아들과 관련된 과거가 의식되는 거예요. 의식된 동시에 그 과거 중심으로 새롭게 현재, 미래가 구성되는 겁니다. 이 미래가 뭐겠어요? 현재 아들이 교통사고 일어났지요. 소망이 뭐예요? 어서 일어나서 현직에 복귀하기를 하죠. 이 나름대로의 시간관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순간에 셋째 아들이 공무원시험 친다는 걸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합격했다는 소식 들렸습니다. 갑자기 합격하니까 의식이 큰 아들이 아프든 말든 셋째 아들 합격한 여기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면 갑자기 여기서 이쪽 시간관에서 이쪽에 뭐가 생깁니까? 의식이니까 과거, 현재, 미래 생기죠. ‘역시 걔는 어릴 때부터 공부 잘했어.’ 이렇게 나온다고. 새로운 시간관이 형성된다고.
그러면 그 다음에 뭐냐? ‘걔가 이번에 공무원시험 합격했기 때문에 나이도 서른 넘었는데 빨리 좋은 여자 만나서 장가갔으면.’ 새로운 미래 나오겠지요. 이 할머니가 만약에 교회 갔다. 무슨 기도 하겠습니까? 셋째 아들이 공무원시험 치는 줄 모를 때는 아무리 기도 오래해도 셋째 아들 기도가 안 나오는 거예요. 왜? 의식이 어디에 초점 돼있기 때문에? 첫째 아들 교통사고에 초점 돼있기 때문에 셋째 아들 공무원시험 치는 걸 깜빡 잊어버렸어. 알았으면 미리 기도발 해도 주여 이 기도응답해서 셋째 아들 할 건데 잊어버렸어요. 셋째 아들 합격한 뒤에는 큰 아들 그만 잊어버렸어요. 나중에 나이 들면 점점 그렇지만.
그러니까 에고라 하는 것은 결국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표면 따라서 변하지요. 변하면서 미래에 소망도 변하지요. 현재와 미래 사이에 개입해 들어가는 것이 우상성, 인간의 종교적이죠. 신에게 부르짖음으로서 지금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것을 기도라는 응답으로 응답해달라고 한다 이 말이죠. 이것이 에고에요.
이 밑의 핵심이 뭐냐? ‘셀프’입니다. 셀프를 자기라 합니다. 표면 세계가 의식이라면 자기 세계는 무의식 세계에요. 무의식 세계는 아무리 인간이 해도 달라지지 않는 대목이 무의식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는데 이건 아주 간단한 전부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는데 만들어진 인간은 누가 관리하더라? 내가 관리하더라. 이게 앞뒤가 맞는다고 보십니까. 상식으로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었으면 만든 분이 모든 부속품을 알아요. 인간이 뭐가 문제며, 영적으로 어떤데 빠지며, 보임직도 먹음직도 빠진다는 그걸 누가 알아요? 아담은 몰라요. 누가 알아요? 하나님은 알아요. 창세기 2장에 이걸 따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 할 때 그 죽음에 대해서 아담이 압니까, 모릅니까? 따먹게 되면 죽는 걸 모르죠. 그럼 누가 알아요? 하나님이 알고 뱀이 알죠.
그러면 인간은 날 때부터 모든 걸 안다, 모른다?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피조물은 이미 아는 분의 그 설계도, 그 뜻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피조물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뱀이 와서 이 고리를 잘라버리니까 그 다음부터 누가 누굴 관리하느냐 하면, 자기 것도 아닌 자기가 기껏 관리하는 게 셀프로 관리하는 게 아니고 뭐로 관리합니까? 에고로. 자아로 관리하는 이 자아가 항상 유동적이고 환경 따라 시류에 따라 변한다 이 말이죠.
이게 김길태일 수 있고, 분명히 김길태도 언젠가 횡당보도 건널 때 빨간불에 서고 파란불에 건넜을 거예요. 어떤 교수가 돈 때문에 아버지를 죽였는데 그때 방송에 나왔는데 보니까 손톱이 깨끗하게 손질돼있었어요. 잡히기 전에 손톱 깎았단 이 말입니다. 그건 무슨 뜻이에요? 인간 막 돼먹었다 해도 그냥 막 돼먹은 것 아니에요.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실내에선 담배 안 피웁니다. 노숙자나 피우지.
인간은 어디서 조정하느냐 하면, 인간은 항상 막 돼먹은 게 아니고 인간은 그때그때마다 자기가 모르는 무의식에서 나오는 거기에 의해서 자아가 형성되는데 이 자아의 형성을 사도 바울은 ‘자기 의’라 합니다.
개혁주의의 치명적인 이단성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 의가 없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거예요. 그들이 아무리 자기 의를 부정해도 모든 개혁주의 모든 체계가, ‘당신이 선한 게 있어야 그 선한 것 때문에 당신은 나름대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쪽으로 모든 관점이 오로지 지향점이 거기다 쏠려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가 제일 화를 내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 제일 그들은 발칵하고 뒤집어집니다. 반항해요. 복음과 개혁주의신학의 차이가 그 차이에요. 자기 의를 인정할 것이냐, 자기 의를 말아먹을 것이냐? 하는 겁니다. 말아먹는다면 개혁주의가 뭐라 합니까? 자기 의를 포기한다면 인간은 방종할 수 없고, 그 다음에 자기 마음대로 살 것이고, 무율법적으로 나갈 거란 거예요.
뭔가 방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짐승 되지 않기 위해서는 붙잡아둘 게 있어야 되는데 붙잡아두는 방법은 행위하는 주체가 자기 나름대로의 간직한 거룩, 의로움 이게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걸 키우기 위해서 목회가 있고 목사가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이 말을 차마 못하죠. 비복음적이니까. 그 말은 못하지만 모든 글 하나하나 보면 그쪽으로 쏠리게 돼있어요.
여러분 구원은 갖고 있는 의의 양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러면 저는 그 사람에게 묻지요. 인간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성경에서. 당신 말대로 인간은 좋은데 가기 위해서 선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인간들의 생각인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인간을 하나님께 과연 인정한 적이 있느냐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가 나름대로 선을 갖고 있어야 구원받는 게 하나님 뜻이라면 개혁주의에 대해서 동의하겠는데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 못해서 안달 난 그런 인간이 아니고 이미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아놓았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이 생각하는 인간은, 인간이 스스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참고로 들어서 거기서 자기 거룩을 만들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따로 있다. 하나님이 만드는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시는 방법이 따로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셀프. 하나님의 인간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로서만 나타나는 인간이거든요. 예수님은 포도나무거든요. 포도나무에 맺지 않는 건 다 잘라버려요. 가지는. 포도나무가 하신 열매인데 그 열매는 포도나무 따로, 열매 따로 아니라 예수님 포도나무에서 나온 그 열매로 나오는 거예요.
유리작품 만들 때 어떻게 합니까? 파이프에 장인이 불면 유리용액이 동그랗게 튀어나오잖아요. 이쪽에서 불면 동그랗게 나와서 유리 녹은 물이 나와서 유리제품 되듯이 부시는 분은 누굽니까? 주님이고, 동그랗게 나오는 건 우리고. 그 재료는 바로 우리 죄인이잖아요. 주님의 덕으로 살잖아요. 우리가. 그럴 때 그 사람은 자기 증언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이미 그거는 계획된 대로 하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되겠다는 건 없어요.
이것과 오늘 본문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이제 본론에 들어갑시다. 땅에서 침멀리가 멋진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땅의 개념이 두 개다. 하나는 임시적이고, 하나는 정착용이다. 땅의 개념을 이렇게 본 신학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침멀리의 말이 맞느냐 하는 게 문제에요. 그걸 따져보겠어요.
땅이라 하는 것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임시용이고, 하나는 정착용인데 침멀리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재를 읽어보셨으면 강의가 쉬울 건데 쉽게 가봅시다. 임시적이라 하는 것은 족장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시대인데 히브리서 11장에 나오잖아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가라 할 때 정착용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까 그들은 객이요 나그네였다. 임시적으로만 있을 곳이다.
그러면 정착용은 어디 있느냐? 바로 하늘에 하나님께서 친히 장만한 새 예루살렘, 본향이 따로 있다. 그렇다면 임시적에서는 땅에 두 가지가 있죠. 하나는 안식할 수 없는 땅과 안식이 보장되는 땅 두 종류로 나뉜다는 겁니다. 성경 하나 찾아봅시다.
에스겔 20장 10절. “그러므로 내가 그들로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에 이르게 하고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느니라”
지금 침멀리는 이 대목을 상당히 중요시하는데 그 말은 맞아요. 뭐냐 하면, 이 땅에 구약에서 에스겔 이전에 그렇게 말했던 땅은 자기 육체, 신체를 누울 수 있는 편하게 쉴 수 있는, 내가 누구냐는 묻지도 않아요. 무조건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힘든 광야 생활 거쳤으니 이제 내 몸을 편하게 누울 수 있고 아름답게 먹을 수 있는 양식이 피어나는 그 땅이 되게 해 달라 했는데 하나님 뜻은 그게 아니고 거기다가 하나님 안식을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 20장 12절에 보면, 내가 안식일을 주어서 땅이라는 의미가 네 몸체에서 생각하는 땅의 의미가 다르고 안식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안식을 주고자 하는 땅으로 보겠다는 겁니다. 여기 12절에 보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느니라” 13절에 보면, “그러나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땅이라 하는 것은 안식할 수 없는 땅과 안식하는 땅으로 나누는데 이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 때는 그렇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정착하는 땅의 의미가 생기는데 이거는 오늘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이 정착할만한 사람이 등장할 때 정착하는 땅이 돼요. ‘살기 좋다. 그냥 들어가자.’ 이러면 이방인 됩니다. 약속의 땅 가봐야 쫓겨나요.
하나님은 땅을 통해서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1절까지 나오는 하나님이 창조해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안식하시잖아요. 그래서 안식일 생겼잖아요. 이 땅 자체에 무슨 정부를 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를 담는 거예요. 땅은 보기에 심히 좋았는데 그 위에 땅을 차지할 사람마저 창조의 완료가 되려면 거기에 흡족한 적합한 합당한 적합한 인간도 하나님의 안식에 적합한 인간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설계도면대로 만들어나가는 거예요. 이거는 히브리인들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던지 간에 관계없어요.
인간들은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셀프는 모르고 에고만 알고 있잖아요. 에고라 하는 것은 세상을 몰라요. 느끼는 감각대로 사태만 벌어지면 자기 몸만 세포덩어리만 챙기면 그만이에요. 200조 개의 세포가 있는데 이 세포가 밥 달라고 난리고 DNA 번식하려고 난리고. 번식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에너지 확보하면 끝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경제는 하나에 없습니다. 에너지 확보에요. 인간의 단백질은 이백 몇 십도 아니면 힘들어서 단백질 기능을 못해요. 세포 기능을 못한다고. 적절한 비, 적절한 햇빛 줘야 돼요. 산소 있어야 돼요. 산소 없는 동물도 있다고 최근에 나와 있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산소 있어야 되고. 과학자는 거기에 대해서 연구합니다. 인간이 아는 건 그것밖에 없어요. 모든 경제는 과학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내 몸만 편하고 챙기면 그게 죽어서 어디 가고 그건 시시한 문제고 지금 내 세포들이 행복을, 편함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안식, 약속의 땅,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그거는 겉절이입니다. 그건 일단 내 몸부터 챙기고 난 뒤에 나중에 종교적인 행위로서 해주면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걸 제가 인간의 몸에서 에고 나오지요. 자아가 나왔잖아요. 인간의 몸은 자아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타자, 우리말로 하면 남이 나와요. 인간의 몸은 자아만 나오는 게 아니고 타인이 나오는데 타인 속에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부터 해서 일가친척, 친구 다 포함되죠.
그러면 이 타인은 아까 제가 인간의 몸은 자아 중심이니까 의식된 자아가 계속해서 유지하는 자아가 자기 의라 했지요. 자기 의란 영혼의 존재 의미. [존재의 의미] 부른 가수가 있죠. 나는 의롭기 때문에 영혼이 존재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아하고 타자가 구별되는데 항상 그래요.
이게 구별 안 될 때가 언제냐 하면, 태어나서 6개월까지는 구별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조사해보니까 구별된다고 알려져 있어요. 심지어 엄마 뱃속에서도 구별돼요. 애는 자기밖에 몰라요. 하여튼 인간은 입술과 눈에 보이는 시청각적인 그런 요소 말고 몸이 어떤 구성체가 된다는 것은 6개월 뒤에 생긴다는 거예요.
자아성이 주체성이 생기게 되면 그 다음부터 뭐가 성장합니까?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것 안 되면 사회생활 못하죠. 이것 안 되는 사람이 귀신들린 자라든지, 정신병자는 이게 안 돼요. 남의 입에 들어가는 걸 빼어서 자기 입에 집어넣는, 구분이 안 돼요. 네 것은 네 것, 내 것은 내 것 구분이 안 되는 거예요.
타인이 될 때 자아와 타자 사이에는 자기 의를 굳히기 위해서 에너지가 필요하죠. 그러면 모든 타인은 나를 위한 에너지 공급자로서 나의 이용물이 되죠. 그중에 하나님이 포함돼있죠. 하나님이 타인이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있고, 예수님이 날 위해 있고. 항상 뭘 기도해도 돌아오는 것은 날 위하여. 하나님 날 위하여 복 주시면 영광 돌리겠습니다. 항상 날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러한 몸을 아까 유리제품 불 때 이걸 죄라고 하는 거죠. 잘 들어보세요. 이스라엘이 죄인인 걸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인간은 날 때부터 죄진 건 알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죄인은 아니에요. 내가 저주받을 만큼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이 있다는 자체가 이미 독자적으로 있기 때문에.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가 없는데 하나님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누굴 만나게 해줘요? 이걸 무슨 나라? 이방민족이라 하죠. 다같이 저주해야 될 것은 이쪽은 저주하지 않고 이방민족을 침으로 말미암아 현재 자기가 죄인인 것도 모르는 이스라엘을 진짜 이스라엘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맹세와 언약을 통해서 하시는 겁니다.
신명기 7장에 보면, 내가 너를 구원하면 너의 선함이 아니고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다. 그 이야기를 왜 하는 거예요? 신명기 봅시다. 31장 20절 누가 읽어보세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여기 보면 이 예언대로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되지요. 그런데 예언 속에 뭐가 포함 돼있습니까? 너희들은 결국 필히 망한다가 들어있는 거예요. 이 예언을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겠습니까, 그대로 되겠습니까? 이것은 지키는 문제가 아니고 그대로 될 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뭐라 했습니까? 너희 죄를 위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죠.
주님께서 십자가 진 자체가 우리를 이미 저주받을 죄인으로 규정할 때 우리가 그 말씀을 지키겠습니까, 그대로 되겠습니까? 그대로 되죠. 예수님께서 유리대롱으로 불면 예수님 시키는 대로 되겠습니까? 그 안의 액체가 스스로 지키겠습니까? 주님께서 부시는 대로 될 뿐이죠. 그러면 불어낸 대롱 끝에 나오는 유리제품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신명기 31장이 포함돼있고 십자가 복음이 포함돼있으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거예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 게 포함이 돼야죠.
이걸 개혁주의자들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이미 예수 믿고서 의인 되었는데 왜 자꾸 죄인이라고 하느냐고 나오는 겁니다. 그들은 본인이 원했던 바가 있었던 거예요. 음흉하게 노리는 게 있었는데 그게 예수 덕분으로 고쳐져서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용어에 관계없이 내용 자체가 이방인이 생각하는 우상입니다. 예수란 이름의 우상이고, 다른 복음입니다. 개혁주의가 이단일 수밖에 없어요. 결국은.
제가 지금 뭘 부수려고 하느냐 하면, 캘빈, 루터 이후에 오늘날까지 그 개혁주의가 어떻게 변질 되었는가? 그 책임, 교회사에 안 나와요. 왜 안 나오느냐 하면, 변질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안 나와요. 변질 안 됐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칼 바르트는 알아요. 그래서 칼 바르트를 미워하잖아요. 우리는 전통대로 고대로 하는 거예요.
루터와 캘빈 이후에 쏟아져 나온 게 신앙고백서거든요. 신앙고백서가 뭐예요? 지침서 아닙니까. 지침서를 매 예배시간마다 하고 일 년에 몇 번씩 그걸 교인들에게 가르치기 때문에 가르치고 반복한 그걸로 전통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가르치고 그것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유대인들이 이미 해왔던 거예요. 이마에 붙이고 손목에 매고 지금도 하고 있어요. [회복]이란 영화 보세요. 지금도 하고 있어요. 그 영화를 부산에서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창원에선 물론 안 할 거고.
이방인들을 자꾸 주변에 까는 이유가 사람이 자기를 보호하는 거예요. 사실은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 건데 자기를 보호하는 거예요. 제가 말 이렇게 하면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너희들이 법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과 충돌 되는 말씀이 아니에요. 새 인간을 위해서 법이 있다는 말은 맞아요. 하지만 헌 인간을 위해 율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내가 개라는 것, 세리와 창기 된다는 것 이것을 인간이 자력으로 스스로 그걸 인정할 수가 없어요. 화투를 쳐도 돈 잃기 위해서 화투치는 인간 없습니다. 트릭을 써서라도 다 따기 위해서 하죠. 돈 잃기 위해서 화투 갖고 있을 필요 없어요. 바닥에 늘어놓으면 돼요. ‘나 칠 땡이다. 알아서 기라.’ 해서 돈 벌 사람 아무도 없어. 화투로 돈 못 법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처음부터 패를 다 까 놔요. 십자가 죽은 것은 너는 처음부터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이라고 패를 까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십자가 우리는 감추기 바빠. 안 들키려고.
너무 패를 까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여 버렸잖아요. 그래서 요한복음 7장에 나오죠.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죄를 죄라고 지적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귀신 들렸다고. 요한복음 7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보고 율법도 모른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네가 모세를 알아. 네가 모세를 알았다면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을 심판하는 것은 내가 아니야. 모세가 너희를 심판할 것이라.’ 도대체 율법이 왜 있는지 몰라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었습니까? 게임 끝났습니까? 뒤 따라서 율법이 주어집니다. 왜? 저주에 더욱더 저주를 더하기 위해서. 네가 죄 속에 갇혀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알았죠. 이 땅에는 안식할 땅이 없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그걸 믿음으로 구원받았죠. 그러면 아브라함 같은 사고방식이 아니면 아브라함 같은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사고방식이 아니면 뭘 추구하겠습니까? 만날 땅을 추구할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이 그렇더라도 처음에 태어난 이삭과 야곱은 뭐 때문에 싸웠습니까? 내가 형 할 게 싸운 이유가 뭐냐? 그것은 처음에는 땅에 있는 걸 복인 줄 알고 싸운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야곱이 요셉 잃고 난 뒤에 어긋맞게 축복할 때는 뭡니까? 내가 이 땅을 험한 나그네 길을 130년 동안 살았다. 험한 꼴 보면서 그게 아니구나.
세상은 하나님 언약대로 되지 내 뜻대로 안 되는 이유는 처음부터 나라는 것이 하나님에 합당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보고 상대하지 않고 언약과 상대하는구나. 나중에 언약과 상대하신 주인공이 나타나죠. 신약 때 처음부터 하나님은 예수님하고 상대하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라의 태가 죽고 난 뒤에 아기가 태어나게 하고, 이삭이 장자 되게 하고, 에서를 저주받게 하고 이 모든 것의 배후에 주인공이 따로 있었습니다.
처음 인간 말고 진짜 인간,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 그분이었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분이 모델이 된다 해서 그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했고,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본받아야 돼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우리는 저주받아야 될 육의 형상, 죄의 형상 또 다르게 이야기하면 흙의 형상, 우리는 흙으로 나서 흙의 형상으로 꺼지는 것은 그냥 꺼지면 안 돼요.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서 하나의 부는 재료로서 우리는 흙이었고,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기 형상을 이루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스스로 자기 일에 잘했다고 감탄하면서 손 털면서 이것은 창세기 1장의 다 이루었다와 똑같은 안식입니다.
그래서 안식이라 하는 것은 항상 인간이 손대면 안 돼요. 예수님만 개입될 때 하나님 이름만 개입될 때 비로소 안식되는 거예요. 그러면 안식이 아닌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은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될 그러한 포지션으로서 그런 역할을 담당해야 됩니다. 이 땅에서. 모든 게 헛되고 헛되며 헛되도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한 귀한 일들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것도 즐겨, 아주 신난, 감격한 마음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떨어진.
그런데 우리는 만만치 않죠. 그래서 이 땅이라는 걸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 때 이 교재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아름답게 만들었어요. 이 말은 그 땅이 보기에 아름다운 땅이라고 보는 겁니다. 에스겔 20장 6절에 보니까 “그 날에 내가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그들을 위하여 찾아 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에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는 ‘아름다운’은 인간의 육적인 아름다움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아는 아름다움.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 나오는 천국의 아름다움은 누구만 알아요? 우리 하나님만 알아요.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눈으로 보는 아는 아름다움이 아니고 우리의 심령이 정말 아름다운 심령으로 달라진 사람에 한해서 그 아름다움과 접촉이 되게 돼있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을 저희가 볼 것이요.” 이것은 우리 심령 자체가 자기에 대한 자기 의를 몽땅 다 옛 사람 육적인 것으로 버려버릴 때 오직 예수님이 주신 공짜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만 가득 찰 때 그게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고 그럴 경우에만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 때 그게 주님 보시기에 심히 온전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않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그 마음 자세,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 내놓고, 죽으면 죽으리라. 이런 것.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모습.
이번 시간 끝으로 아주 어려운 것 하나 하고 10분 쉬고 합시다.
육적에 있어서 아까 이야기한 과거, 현재, 미래 되잖아요. 이게 영적인 사람은 구약이니까 언약적인 사람 돼버리면 하나님께서 육의 과거를 항상 끊어줘요. 복음이 좋은 점이 뭐냐 하면, 항상 우리를 예수님의 죽으심에 넘겨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과거에 뭘 했는지를 끊어지는 다 없애버려요. 만약에 나이가 사십이라면 삼십구 년의 행적은 주님 앞에는 없는 거예요. 왜?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로 갓 태어났으니까 없는 거예요.
첫 번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시간관은, 우리의 에고 안에 어떤 시간관을 주느냐? 복음 안에서는 과거가 모두 없어져요. 과거에 전과 7범이던 백범이 되던 김길태가 되던 예수 믿는 순간 모든 과거는 사람 죽이던 어떤 것도 사라져버립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육에 있던 미래를 우리의 과거에 첨가시킵니다.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꼬리로 첨가시키면 뭐가 되느냐 하면, 영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우리의 죄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내가 만약 전과 7범입니다. 성령이 임했어요. 눈물이 쏟아지면서 세상에 공짜로 구원받는데 내가 지금까지 무슨 짓 했느냐? 나는 인간도 아니었다. 내가 생각한 인간은 주변의 타인들의 모습을 보고 나도 저런 인간이라고 흉내 내는 내가 착각 속에 있는 인간이었고, 진짜 인간은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이것만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알았다 합시다.
그러면 과거는 날아가 버렸어요. 인간의 에고라 하는 것은 항상 시간관은 과거, 현재, 미래란 틀이 없는 인간은 없어요. 예수를 천 번, 만 번 믿어도 마찬가지에요. 똑같은데 그때 과거는 뭐냐 하면, 옛날 육적인 시절에 소망했던 것, ‘내가 돈만 벌면 하나님께 십일조 듬뿍하겠습니다.’ 이런 것 있잖아요. 그것이 우리의 과거에 첨가가 됩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벗어났지만 우리 죄가 항상 인식하게 되는 거예요. 그 인식한 죄가 우리가 생각했던 미래상이 꼬리에 붙습니다.
꼬리에 붙으면 4월 2일에 만약에 새 사람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4월 3일에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허접스러운 야망이 꼬리에 붙습니다. 그러면 4월 3일에 어떻게 돼요? 우리는 날마다 죽고 새로 살겠지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니까. 그러면 4월 4일은 어떻게 돼요? 4월 3일에 생각했던 그것이 끊어지고 4월 4일의 미래가 우리 꼬리로 붙어서 ‘어제 예수 믿고 이런 것도 희망했잖아. 지금 생각하니까 희망 개떡인 걸 가지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고 십 년 되도, 이십 년 되도 항상 인간의 나의 죄라 하는 과거의 꼬리가 붙어있어요. 꼬리에 붙는 작업을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계속 붙여줍니다.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작업을 성령 안에서 이뤄지게 합니다.
더 자세한 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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