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4월 19일 피23강 죄악된 시간관과 70 이레
대구 4월 19일 피23강 죄악된 시간관과 70 이레
이름 : 관리자(IP:220.81.41.203)
100419 피23강 죄악된 시간관과 70 이레
관리자(IP:220.♡.41.203)
10-04-19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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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08 10:56
대구100419피p094죄악된시간관과70이레
[10 대구강의 5] - [피 23] - 죄악된 시간관과 70이레
10,04,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아니, 시간이 죄악이라고요 ??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93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모든 인간들의 시간적 의미마저 죄악된 시간관으로 드러나게 하는, 그러한 종말된 상태로 드러났다. 인간의 시간 다룸을 통해서도 죄가 나오는 시기이다.
여기에 보면 ‘죄악된 시간관’ 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들은 시간이 무슨 죄악된 것이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즉 사람들은 시간을 두고 죄악이라고 하면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과 서로 시간은 서로 따로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말이다. 즉 인간이 이렇게 있다고 한다면, 시간은 시간대로 따로 흘러간다고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 이라는 것은, 인간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는 것이 칸트 이후에 분명하게 밝혀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시간도 인간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하는데, 즉 시간을 인간의식으로 흐름으로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각자의 시간이 다 다른데, 어떤 사람은 같은 시간이라도 해도 길게 느껴지고, 또 어떤 사람은 아주 짧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선을 봐도,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그 시간이 짧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길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도 그렇고 말이다. 재미있는 영화는 두 시간이라도 금방 지나가고 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우리가 각자 각자가 보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 정도는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것도 모르고서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 개혁주의 신학을 절대적인 것으로, 그렇게 오해를 한다는 말이다.
◈ 개혁주의 신학은 칸트철학의 아류 !!
제가 보기에 개혁주의 신학은 칸트철학의 아류에 불과한데, 즉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공간에 의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살펴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그만 시간과 공간 속에 가두어두는 꼴이 되고 마는데, 그렇지 않은가?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모눈종이로 볼 수 있는데,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다가 말이다. 이렇게 공간이 있는 것을 3차원이라고 하는데, 즉 넓이가 있고 또 높이가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시간을 더하면 4차원이 되는데, 그런 4차원의 틀에 하나님의 일을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그것이 곧 죄입니다 !!
그렇게 4차원으로 이 세상을 보는 것, 그 자체가 곧 우리 인간들의 죄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개혁주의자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면 죄가 아닌 것이 무엇인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지요?
하지만 죄가 아닌 것은 이러한 것 말고, 즉 죄가 아닌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죄입니다” 라고 지적하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묵시적 사건이, 즉 성령의 일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이 오신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죄로 드러내기 위함이란 것이다.
바로 이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예수님이 심판을, 즉 재판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생각한다고 하지만, 정작 인간들 앞에 등장한 예수님을, 이런 자기들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예수님을 재판했고, 또한 예수님은 그러한 인간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지적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의 이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예수님을 재판을 해버렸는데, 그렇게 되니 인간들의 죄와 의와 심판이, 즉 그 모든 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를 전부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6장 8절에 보면, 성령이 오시게 되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다시 말해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모든 것에 대해서, 즉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그냥 인간이 가만히 있으면 모르는데, 즉 그냥 벚꽃을 구경하고 있으면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예수님 앞 어떻게 죄를 정립하고, 어떻게 의를 정립하고, 어떻게 심판을 정립하는지, 즉 예수님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인간을 심판할 때, 어떤 기준으로 심판을 하는지 말이다. 바로 그런 심판의 기준을 보게 되면, 비로소 거기에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 모두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심판한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법’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죄’, ‘의’, ‘심판’과 같은 것은 모두가 다 율법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즉 이렇게 인간들이 생각하는 율법은, 자기들의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해석하는 율법이라는 것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성경을 해석할 때, 즉 창세기나 잠언이나 전도서와 같은 지혜서나, 요한계시록 등등, 그 모든 성경을 해석할 때, 즉 인간은 그냥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과 공간성을 가지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해석이 바로 예수님 앞에서는 죄가 된다는 말이다.
◈ 천년을 하루같이 !!
그러니 예수님에게 있어서 시간은 무엇인고 하니, 즉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같이” 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 동안 왕 노릇하리라” 라는 것에 대입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 요한계시록은 전혀 인간들의 시간론과 공간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해석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현재 멕시코의 고대문명이 ‘마야문명’ 인데, 거기서 2012년 12월 23일에 이 세상이 멸망한다고 예언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얼마 남지를 않았는데, 그때 이 세상이 멸망을 당하는데, 그렇게 해서 정화가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고 하니, 인간이 만든 기계에 의해서 말이다.
인간들은 고대에서나 현대에서나 그렇게 자꾸만 계산을 하는데, 그러면 이렇게 숫자를 가지고서 계산한다는 것은 어디에 기인하는고 하니, 태양과 달과 별의 움직임을 가지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엇인고 하니까, 즉 천년이 하루와 같은 시간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 거기서는 기존의 해와 달과 별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기존 시간과 공간의 충돌을 통해서 !!
그것은 어디까지나 옛 하늘과 옛 땅에 관한 것인데, 그렇게 옛 하늘과 옛 땅에 준해서 나온 시간관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시간관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런 기존의 시간관은 죄로 규정을 받는, 저주받은 시간관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기존의 공간관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말씀한 모든 것을 인간들이 해석할 때는, 그렇게 해석을 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하면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해한 해석과 진짜 제대로 된 해석의 차이점은 무엇인고 하니, 항상 예수님의 영으로부터 우리가 지적을 받는 가운데서, 그런 가운데 무엇이 참된 성경해석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지적을 받을 때, 성경에 대해서 올바른 해석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그것이 궁금하지 싶은데, 그것이 교재 93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 모든 역사는 예수님이 하신 일 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십자가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제대로 된 시간이 방출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공간과 시간은 십자가 사건이 장악한다.
◈ 역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잡아당겨서 !!
여기에 보면 “모든 역사는 예수님이 하신 일 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모든 역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잡아당기는 식이라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인류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랐는데, 그런데 그야말로 아주 희한하고도 독특한 나라가 하나 등장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 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 이스라엘이 왜 중요한고 하니까, 이스라엘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말이다. 그분이 바로 모세를 배후에서 조종하시는 분인데,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언약의 하나님 말이다.
그런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줌으로 말미암아서, 이 율법은 무릇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즉 이 세상의 시작부터 끝 날까지의 그 모든 원리원칙을 다 제공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율법이 이 세상의 중심인 십자가로 끌려 들어가게 되는데, 모든 과거와 미래가 다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되니, 그래서 모든 역사는 십자가에게로 당겨져서 들어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세상은 말씀으로 되어있고, 그 말씀을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물론 사도바울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렇게 십자가에서 모두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그 나머지 세상도 다 십자가에게도 빨려 들어간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일종의 소용돌이나 와류처럼 말이다. 바로 그것이 사도바울의 주장인데, 즉 “세상 만물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때문에, 말미암아서 창조되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에서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하는데, 물론 골로새서 1장도 역시나 그러하고 말이다.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런 가운데 예수님이 등장하시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그냥 등장하시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등장하신다는 말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몸으로 등장하는 것을 이 세상의 모든 중심으로 보고, 바로 그것을 두고 ‘교회’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교회는, 예수님의 피묻은 음성에 호출된 자들 !!
오늘 아침에 제가 십자가 마을에서 댓글을 하나 달았는데, 거기에서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교회는 예수님의 피묻은 음성에 의해서 호출을 당한 사람들이라고 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현재 시간과 공간이 아닌 묵시세계에 계시는데, 그렇게 묵시의 세계에서 역사에 있는 자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시는데, 물론 그렇게 부름을 받은 자들은, 물론 이 세상에서는 죄를 짓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세계에 들어가면 그만 의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인데 말이다. 왜 그런고 하면, 끌어당기니까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그냥 평범한 사람이 구름 속에 들어가면, 마치 신선들이 바둑을 두는 것처럼(?), 그렇게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의 껍질이 벗겨지게 되면, 우리의 속은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하게 되는데, 즉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변해버린다는 것이다. 즉 안에는 이렇게 속살이 있고 바깥에 옷을 입고 있는데, 그러니 옷을 벗게 되면 새로운 속살이 그 안에서 나와서,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V?)
그러니 성도의 죽음이라는 것은, 몸을 벗어버리는 것인데, 아까 집사님이 10년만 살고 싶다고 했는데, 생각을 제대로 잘하셨다는 것이다. 귀찮은 옷을 오래 입을 필요가 없이, 때가 되면 그냥 벗어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짧은 옷을 말이다. 왜냐하면, 키가 작으니 옷도 짧다는 것이다(ㅋㅋ).
사도바울의 소망이 무이었는가? 자기의 지금 무거운 옷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만나서 사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지금 자기에게는 사명이 남아있어서, 즉 “너희들 때문에 내가 죽지 못하고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조금 더 증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 우리 칼빈주의는 옳다 ??
그런데 이러한 것도 모르고 아직까지도 역사 속에서 성경을 해석했다고 폼을 잡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사를 보면 ‘신학’ 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사에서 모든 신학들이 바로 이러한 자들의 교권과 공동체의 자존심과 관련이 되어서 신학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 중심의 그런 신학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공동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즉 “우리 칼빈주의는 옳다”, “우리 루터주의는 옳다”, 혹은 “우리 카톨릭은 정통하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기들 조직의 정통성을 위해서 역사가 쓰여지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나오는 신학과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을 가지고 결코 마귀를 결코 대적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댓글에도 그런 내용이 있는데, 무슨 마귀가 개혁주의 신학에게 지는, 그러한 마귀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바르트 신학에게 마귀가 두 손을 들겠는가? 마귀는 결코 신학에 지지 않는데, 마귀가 노리는 것은 ‘새 언약’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 오로지 그것만을 노린다는 말이다. 인간들의 그러한 신학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학은 움직이는 동사를 명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백 날을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개혁신학회 발표 ‘70이레 비역사적 해석’, 참조)
◈ 왜 나를 공격하지?
그런데 사람들은 신학을 공격하면 그렇게 싫어하는데, 마치를 자기가 공격을 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주로 목사들이 싫어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이 ‘목사’ 라는 주체가 신학을 마치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그 신학을 마치 자기의 석고상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굳어져서, 그 신학을 치면 마치 자기를 치는 것으로 여겨서 화를 낸다는 말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의 경우에, 엄마가 울게 되면 같이 따라서 울듯이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나는 날마다 나를 버린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 신학을 꼭 쥐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을 공격하면 자기를 공격하는 것으로 여기는데, 하지만 인간은 사실상 칠 가치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십자가 사건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즉 십자가 사건의 되풀이란, 모든 현실이 종말이라는 하나의 시간적 공간으로 다 모아졌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실은 처음부터 종말이었는데, 즉 역사의 시작부터가 말이다. 여기서 ‘종말’ 이란 것은, 항상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남아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이러한 방식의 종말적 시간관은 구약에도 징후가 있었다. 다니엘 선지자는 처음에 단순히 기존의 역사관에 입각해서, 징벌의 기간인 70년이 지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원래의 고향으로 되돌아갈 것을 위해서 기도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려준 계시는 70년이 아니라, ‘70이레’였다. 즉 ‘70이레+62이레+1이레’로 구성된 역사를 제시하셨다(‘이레’ 라는 말은 1주간=7일).
◈ 70년만 지나면 고향에 돌아간다 ??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어떻게 생각했는고 하니까, 자기들은 “70년만 지나면 고향에 돌아간다” 라고 여겼는데, 즉 묵시적 시간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금 어려운데, 그들은 기존의 시간개념에 준해서 땅을 해석했다는 말이다.
그들에게는 땅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 땅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면 이 성전이 왜 중요한가? 성전이 없으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곳이, 즉 ‘만남의 장소’가 그만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자칫 잘못해서 그렇게 되면, 영영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여겼다는 말이다.
◈ 성전은, 다윗언약의 구체화 !!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한 것은 다윗언약을 구체화한 것인데, 즉 다윗언약이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여기 이 공간에서 언제나 늘 되풀이가 되어서, 그렇게 해서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다윗언약의 자비와 은총이 주어지기를 소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한 장소, 즉 거룩한 장소에 묶여놓기를 원해서, 그래서 다윗이 성전을 지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윗이 지은 성전은 무엇인가? 당연히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다윗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은 “나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는 있지 않겠다”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이 ‘다윗가문’ 이란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까, 다윗가문이 혈육적인 가문이 아니라 영적인 가문을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다윗의 혈통이라고 하면, 즉 다윗의 DNA를 받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시는 가문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 다윗의 가문에 대한 충돌이 !!
그러니 이 둘 사이에는 자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나면서, 무엇이 쇠퇴하는고 하니, 인간의 가문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악마가 지배하는 이스라엘로 바뀌고 만다는 것이다. 악마가 지배하는 말이다. 그것이 곧 유대나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스스로 무엇이라고 여기는고 하니, 자기들은 곧 다윗의 자손인데, 즉 마태복음 1장 1절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세계(世系)’는 족보를 의미하는데 말이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육적인 족보가 어떻게 영적인 다윗가문에 속하는지, 그것을 마태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기는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오히려 이방인인 로마의 백부장이 천국을 차지하고 그들은 쫓겨난다는 것이다.
◈ 누구세요? 나가주세요 !!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사스러운(부끄러운?) 일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리도 아닌데 앉아 있다가, 그만 원래의 주인이 와서 “누구세요? 나가주세요” 라고 할 때라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바로 그런 꼴인데, 천국의 주인은 전혀 마음이 없는데 자기들은 천국에 갈 것이라고 폼을 잡고 앉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가 와서는, 자기 자리가 아닌데 앉아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다 내보낸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교회에는 자기 자리가 아닌 줄로 알고 교회에 오지도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말이다. 친목위주로 교회에 다녀야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니 교회에 다니는 것이 무섭다는 것이다. 즉 사람을 사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고 하면 그 교회에는 가기가 두렵다는 것이다. 사귈 줄도 모르는, 무슨 귀신들이 모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ㅋㅋ).
◈ 그분들이 왜 무서운가?
제가 왜 “무섭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고 하니, 자기는 계속해서 친목을 도모하면서 사람을 사귀기 위해서 오는데, 그런데 그런 것이 다니다가 보면 결국에는 들키고 만다는 것이다. 주님이 아닌 그런 것에 마음이 가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행여나 누군가가 자기의 속마음을 지적하게 되면 그만 덜컥 겁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당하기 먹기 전에 미리 나가고 만다는 것이다.
지금 역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한 마디로 말해서 무엇인고 하니, ‘분리작업’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분리작업 말이다. 물론 하나님은 일을 완벽하게 하시는데, 그런데 이런 분리작업에 있어서 우리 인간은 개입하지 못하고, 성도는 오직 복음만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복음만을 전하게 되면, 그 분리작업은 주님께서 철저하고 완벽하게 해내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 복음을 들으려고 오는 것도 기적이지만, 그 복음에 대해서 배척하는 것도 역시 놀라운 기적이라는 것이다. 복음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반박을 하라고 하면 물론 반박은 하지 않는데, 하지만 왠지 듣기 싫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기독교 방송을 보면 속이 마구 울렁거리듯이 말이다. 30분만 보라고 해도 아마 다들 뛰쳐나가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 목적이 이끄는 삶 ??
그렇게 되면, 그런 사람은 무엇까지도 거부하게 되는고 하니, 결국에는 성경말씀까지도 인정하지 않게 되는데, 즉 “성경은 그냥 옛날 책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같은 인간들끼리 모여서 친목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런 흘러간 책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구닥다리 책보다는 오히려 “목적이 이끄는 삶”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여기 밑에 있는 교회에서 그런 짓을 지난주에 했는데, 목사는 한복을 입고 설치면서 돌아다니고, 버스를 대절하고 거창하게 행사는 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친목이 될 때, 사랑이 넘치고 아주 이상적인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현대인들은 외로워서 그러한데, 그러니 교회가 그런 외로움을 달래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외로움을 달래주면서 희생적으로 하게 되면, 그런 희생이 그리워서 외로워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철새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아주 단단하게 응집력을 가지는, 더 이상은 헤어지지도 않고 외로움도 타지 않는, 그런 집결력을 가진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목사들의 희망사항인데, 성경은 이미 신학교를 다닐 때부터 버렸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랑이 넘치는 교회는 만드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재미나고도 집결력이 있고, 또한 힘이 되는 교회, 그래서 이 사회에 대해서 빛과 소금이 되면, 그러면 또 외로운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고 말이다.
◈ 결국, 악마가 지배하는 유대나라로 !!
하지만 바로 그런 것이 무엇인고 하니, ‘유대나라’ 라는 것이다. 악마가 지배하는 말이다. 그러한 유대나라에 있어서 집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즉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고, 모세이고, 다윗인데, 따라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그 말씀이 오늘날의 우리를 낳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들을 그렇게 집결하게 했다는 말이다.
‘회복’ 이라는 영화에도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말이다. 그런 것이 바로 혈육적인 유대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영적인 유대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그런 육에게 성령을 주어서 바꾸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니고데모는 울고 싶어라 !!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곧 그것인데, 이 니고데모는 이미 깊숙히 유대나라에 관여된 사람인데, 즉 회당장이라는 것이다. 요즘말로 하자면 국회의원인데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니가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니고데모는 혈육적으로 이미 확고한 유대인인데, 그러면 다 된 것이지, 그 이상 어떻게 다시 태어나고 말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니고데모나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미 인간으로서 자기는 할 도리는 모두 다 했는데, 그래도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시키는 것을 다 했는데, 그러니 누가 보더라도 흠 잡을 것도 없이 바르게 산다고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이상 더 어떻게 무엇을 하라는 말이냐는 것이다.
육적인 사람에게 십자가의 복음이 들어가면 짜증을 내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데, 즉 “더 이상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뭐라고 하면 됩니까? “아니, 누가 하라고 했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면 상대방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러면 예배에 참석하지 말까? 또 헌금도 하지 말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물론 그때는 “하지 말란 말이야”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행함” 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은 믿음도 행함에 속하고 만다는 것이다. 즉 믿는 것도 자기가 알아서 믿고, 또한 행하는 것도 자기가 알아서 행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를 도통 이해를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주님 쪽에서 우리를 구원합니다” 라는 것도 못 알아듣고 말이다.
◈ 너는 이미 구원을 받았어 !!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한 중풍병자를 고쳐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죄 사함을 받았다” 라는 완료와, “너의 침상을 들고서 일어나라” 라는, 즉 그렇게 아직도 행함을 주장하는 것이 비교가 되는데, 그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쉬우냐는 말이다.
물론 우리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로 간다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무엇 무엇을 하라” 라는 것이 더욱 쉬운데, 하지만 예수님 쪽에서, 그렇게 장악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아니라, “너는 어디를 가도 죄 사함을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이 더 쉽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더 쉬운 것을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관람객인 인간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어제 설교내용이었는데, 그렇게 예수님은 아주 쉽게 이야기를 하신다는 것이다. 즉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이다.
◈ 예수님, 지붕을 뚫을까요?
하지만 그들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쪽에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죄 사함을 받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지붕을 뚫을까요?” 라고 했는데,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지붕을 뚫는다고 해서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지붕 뚫고 하이킥을 봐도 죄 용서가 되지 않고 말이다(ㅋㅋ).
하지만 기존 교회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하는가? 지붕을 뚫는 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구라를 치는데, 즉 “니 재산을 다 바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꼭 그렇게 돈 문제로 나가는데, 그러니 결국은 돈이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 지붕 뚫는 일을 하는, 그런 집 철거를 전문으로 하는 노가다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구원을 받지 싶은데, 즉 직업도 잘 골라야만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ㅋㅋ).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날마다 주님이 자기를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지는 것인데, 즉 “아하, 날마다 주님은 나를 잡아당기고 있구나” 라고 말이다.
(눅 5: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눅 5: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눅 5: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눅 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 5: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눅 5: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눅 5: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눅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눅 5: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눅 5: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 예수님과 십자가 !!
아무튼 이 다윗가문에 있어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즉 주님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육에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 쪽에서 오셔야만 되는데, 즉 주님의 영을, 성령을 보내야 이 육이 영으로 변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아기 예수로만 오면 안 되는데, 즉 아기 예수로 와서는 성령을 보내지 못한다는 말이다. 적어도 죄인이 의인이 되려고 하면, 그만한 율법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뭔가를 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뭔가를 하셔서, 그 하신 일을 근거로 해서 육이 의인이 된다는 말이다. 놀랍게도 말이다.
그렇게 할 때,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먼저 죄인이 의인이 되려고 하면, 죄인이 하나님의 법을 모두 다 지킬 수 있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되려고 하면 모든 율법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지켰다고 하는, 그런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근거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영이 나오면,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영이기 때문에, 그런 십자가의 영이 임한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즉 자기가 행한 것도 전혀 없이 의인이 되는 복을 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인데, 모든 것이 십자가에게로 달려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물위를 걸었으니, 너도 걸어라” 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또한 “내가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으니 다 지켜라. 내가 오병이어를 기적을 했으니, 너도 해라. 내가 문병을 고쳤으니, 너도 고쳐라” 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 것은 이초석이나 그 똘마니들이 하는 짓인데, 조용기도 그렇고 말이다. 즉 예수님은 그렇게 무엇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인간의 육으로는, 그 무엇을 행해도 ‘죄’ !!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온다는 것은, 인간의 육으로는 그 무엇을 행해도 죄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는 식인데, 바로 그렇게 십자가의 영인 성령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이다. 즉 성령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는데, 그 십자가가 지적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무엇을 해도 어리석은 우리 자신의 지혜에 근거해서 행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죄가 된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과거 우리의 육의 입장에서 봐서는,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고 바보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십자가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이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도바울이 자기가 사도가 되기 이전에, 율법도 지켰고 할례도 행했고, 또한 십일조도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다 해보았지만, 그러나 그때는 육으로 예수를 알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자기는 그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면서도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십자가의 영이 오게 되니, 그동안 자기가 행한 모든 것이 다 죄였고,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제 자기가 자랑할 것은 오로지 십자가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것이 더 중요한데(?) 말이다.
◈ 전적으로 주님이 택하셨기 때문에 !!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님을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택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집안이 별 볼일이 없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해도, 그러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보라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잘난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그 주님의 택하심으로 인해서, 그런 주님의 택하심만을 자랑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라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다시 정리하면, 다윗성전(다윗가문?)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인간은 자기 혈육을 중요시하고, 그리고 공간, 즉 땅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그 땅에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있으니 말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보아서, 모든 선지자의 말을 여기 땅 중심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즉 팔레스탄인의 그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봐서,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만에 다시 돌아온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 ‘70이레’와 ‘70년’ !!
그런데 정작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70이레의 의미와 70년의 의미를 나누어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가지의 의미를 말이다. 즉 70이레 안에 70년이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70이레는 인간의 역사적 안목을 공격하는 묵시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70이레는 그냥 70이레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70년이라고 하는 역사적 의미를 죄로 규정하면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처음에는 7이레로 나타나는데, 즉 7이레 속에는 인간들이 다시 성전을 지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처음은 ‘7이레’, 그 다음은 ‘62이레’, 그리고 마지막으로 ‘1이레’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70이레’가 된다는 것이다.
◈ 70이레 = 7이레+62이레+1이레 !!
그러므로 이 7이레가 포함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들은 역사적 의미의 땅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그들은 그것이 죄인 줄을 전혀 모른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62이레를 통해서 보여주는데, 즉 인간들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이 박살날 때까지가 곧 62이레라는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제대로 지켜서 한다고 했는데, 말씀을 제대로 해석을 해서 말이다. 그런 기간이 7이레라고 하면,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것이 완전히 다 묵사발이 되어버리고, 그야말로 나라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 곧 62이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무’로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즉 모든 역사가 끝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 한 때, 두 때, 반 때 !!
그렇게 끝나면서 마지막 1이레에 어떻게 되는고 하니, 예수님은 그런 죄를 품으셨는데,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로 품으셔서, 죄로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서 새로운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한 때, 두 때, 반 때” 라고 하는데, 예수님에 의한 예수님의 공생애(?), 즉 ‘3년 반’ 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마지막에는 “한 때, 두 때, 반 때” 라고 해서, 시간자체가, 즉 역사자체가 어떤 사건에 의해서 그만 토막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때, 두 때, 반 때” 라는 토막이 난 사건들이 일어날 때, 그 사건이 어떤 묵시적 사건에 의해서 토막이 나는지 유심히 살펴보라는 것이다.
◈ 기존 시간은, 해와 달과 별 !!
이 ‘시간’ 이라는 것은 항상 무엇과 관련이 있는고 하니, 창세기 1장을 보면, 해와 달과 별인데, 그런 해와 달과 별이 그냥 고요하게 있으면, 시간은 토막이 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시간은 해와 달과 별이 주기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그리고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돌고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주기적으로 돌기 때문에, 그래서 시간을 토막낸다고 하는 것은, 저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토막낼 때, 그때야 비로소 토막이 난다는 것이다.
◈ 아, 섬진강 벚꽃이 그리워 !!
예를 들어서, 벚꽃이 피는 것을 보고 1년을 정한다고 하면, 그런데 벚꽃은 온도에 의해서 피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1년이 그만 들쭉날쭉 한다는 것이다. 온도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조절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즉 해와 달과 별은 사람 손이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 우주선을 타고 가서 태양을 정복해서, 편리하게 인간들 마음대로 달 옆에다가 붙여놓을지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아무튼 지금은 해와 달과 별에 대해서 전혀 손대지 못하는데, 그러니 인간은 어디까지나 시간 밑에 논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 인간이 태양을 조절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인간의 수명도 엄청 늘어나지 싶은데, 왜냐하면 시간을 따라서 말이다. 그리고 해는 져야하는데, 그런데 그대로 있다고 하면 아마 엄청나게 불안해하지 싶다는 것이다. 물론 북극에 가면 백야현상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 태양아 멈추어라 !!
그런데 여호수아서에 보면 무슨 장면이 나오는가? 태양이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시간은 무엇인고 하니, 즉 구약의 그 여호수아가 하는 전쟁이 보면, 적들과 여호수아 사이에, 적들은 해가 질 것을 예상했는데, 그러나 여호수아 쪽에 의하면 해가 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저들이 보기에는 어떠한가? 자기들이 알고 있던 기존의 시간관은 이스라엘이 등장함으로서 한 순간에 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분명히 해가 져야만 하는데, 그런데 해가 지지를 않으니 적들은 계속해서 당하고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심으로, 즉 하나님은 언약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 모든 자연체계도 언약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모든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말이다.
◈ 십자가 사건으로, 새로운 시간대가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만 해가 깜깜해지고 말았는데, 즉 태양이 그만 빛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일식차원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새로운 시간대가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이 땅에 개입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눅 23:44)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눅 23: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 사건’ 이란 것은, 어느 일개 정치범을 재판한 결과로서 일어난 사형집행의 사건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을 해서 일으켰던 일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니 예수님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것은 인간이 관여할 문제가 아닌데, 즉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 사이의 둘 만의 주고받는 대화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 인간들이 감히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왜 버려야만 하는지, 즉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말이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런데 예수님이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왜 자기를 버리느냐고 하시다가, 나중에 다 이루었다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영혼을 받아달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이미 예수님은 무엇을 알고 있는고 하니까, 인자가 고난을 받고 사흘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런데 십자가에서는 예수님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시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는 말이다.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고, 각본대로 무슨 시나리오를 읽고 있느냐는 것이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 전적으로, 성부와 성자만이 !!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가운데, 그렇게 절망감을 표시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 인간이 관여해서 해석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성부와 성자만의, 즉 그분들만의 문제라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만의 말이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논리적으로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즉 절망을 했으면 아예 절망을 하든지 말이다. 그러니 그런 절망조차도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그것의 하나의 과정으로서 포함되는 절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희망을 염두에 둔 절망이기에 온전한 절망이라고 볼 수 없는데, 물론 인간적인 안목으로 보면 말이다. 그것은 절망인척 하는 절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십자가는 인간의 지식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데, 그래서 이 세상은 주님의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 - 십자가의 흔적을 보여주는 남은 역사 !!
아무튼 다니엘서의 ‘1이레’ 라는 것이 “한 때, 두 때, 반 때”로 끝이 남으로서, 이제 나머지의 그 모든 역사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흔적을 보여주는 남은 역사가 된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난 것을 보여주기 위한, 바로 그런 남은 역사가 요한계시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그것이 곧 “한 때, 두 때, 반 때”의 모습이란 말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이런 “한 때, 두 때, 반 때”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모르면, 전혀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물론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관리자(IP:124.♡.86.6)
10-05-08 10:56
◈ 다시, ‘70이레’에 대해서 !!
다니엘서의 ‘70이레’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면, “7+62+1” 이라고 되는데, 즉 7이레 동안에는 역사적 요소로서, 인간들이 직접 성전을 지어야 되고, 그때 동원되는 선지자가 학개, 느헤미야, 그리고 에스라 라는 것이다. “너거 집은 좋은데, 왜 하나님의 집은 개판이고?” 라고 부흥사들이 써먹는 것이 바로 학개서인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62이레에서는 무엇이 없어지는고 하니까, B.C 433년의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어지는데, 그 이후에는 계시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예를 들어서, 우리가 방앗간에 가서 고추를 빻는다고 하면, 일단 고추를 넣었으면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 기계 앞에서 가서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기다릴 필요가 없이 말이다.
◈ 고추는, 고춧가루가 되려면 반드시 빻아져야 !!
그러므로 모든 계시는 성전중심인데, 왜냐하면 그 성전이 다윗언약과 관련이 되어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 다윗언약 다음이 바로 새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성전이 깨어지는, 마치 고추가 부수어지는, 그런 시기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굳이 계시가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그냥 부수어지면, 즉 그냥 망하면 된다는 것이다. 참 쉽죠잉?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망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고추가 고춧가루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고추가 다시 퍼렇게 되려고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일이냐는 것이다. 물론 풋고추 매니아도 있겠지만(ㅋㅋ), 하지만 그러한 것은 계시를 거스리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데(?), 그러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망해야 한다는 계시라고 하면 그냥 망하면 되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여야 우리가 부활이 되는데,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죽으면 된다는 것이다. 접시물이 빠져 죽든지, 아니면 조금 더 넓은 접시인 서해안에 빠져 죽든지 말이다. 그렇게 죽는 인생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살려달라고 교회에 와서 빌면, 그것은 반칙이란 것이다. 그냥 우리는 지켜볼 뿐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죽이시는지 말이다.
제가 이번에 울산에서 강의를 할 때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우리가 죽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아하, 나와 같은 인간도 구원이 되는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죽이신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 때문에 이러한 인간도 구원된다” 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렇게 하면서 우리를 죽이신다는 말이다.
◈ 부활 - 성도의 몸에도 십자가의 흔적이 !!
아무튼 여기 70이레에서, 그 마지막 1이레가 끝나게 되면 예수님의 몸이 부활하게 되는데, 바로 그런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뿐만이 아니라 우리 성도의 몸도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의 역사적 흔적으로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 - ①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
②성도의 몸은 이렇게 사용되어진다 !!
그렇게 되면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두 가지가 되는데, 하나는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라는 것이 되고, 다른 또 하나는 “성도의 몸은 이렇게 사용되어진다” 라는 것이다. 즉 성도의 몸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이 들어가서, 성도의 일생도 그렇게 십자가의 일생이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 성도의 몸이 모여서 일곱 교회가 되는데, 그러니 그 일곱 교회의 움직임이 예수님의 십자가부터 이 세상 끝 날까지의 모든 과정을 다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요한의 몸은 교회가 되고, 그 교회는 세상이 되는데, 그런데 이 교회가 바로 일곱 교회이니, 이 세상도 역시 일곱 교회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맞추어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서, 이 세상은 그렇게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교회도 그렇게 끝나고 말이다. 아무튼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마지막에는 다 그렇게 최후의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는 것이다.
◈ 그러면 목 베인 영혼은?
하지만 산 사람은, 즉 목 베인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하늘에 따로 준비가 된 처소가 있어서, 이 땅에서 바로 직접 거기 처소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목 베인 영혼, 즉 순교자들은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올라가서 새로운 시간 속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천 년 동안 왕 노릇을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 잠시 ‘천년’에 대해서 !!
그런데 그것을 밑에서 역사적으로 보게 되면, 마치 천년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서 천년은 시간을 초월했다는 의미인데 말이다. 이 ‘천년’ 이라는 것이 십계명에 보면 나오는데, 제2계명을 보면 뭐라고 하는가? 벌을 받는 것은 삼 사대에까지 받는데, 그런데 복을 받는 것은 천대에까지 받는다는 것이다. 즉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라고 한다 말이다.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말씀도 인간적으로 보면 역시 해석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천 대까지 복을 받을 짓을 해놓고는, 또 다시 저주받을 짓을 한다면 천 대가 취소가 되는가?” 라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삼 사대까지 저주를 받아야 되는데, 그런데 2대 째에 복 받을 짓을 했다면 나머지 한 대는 취소가 되는가?” 라는 문제도 생기고 말이다. 즉 인간적으로는 성경말씀의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
아무튼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이렇게 함으로서, 이것이 결국에는 다니엘서에 있는 7이레 속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그러면서도 이 전체가 다 하나님의 창조까지도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70이레가 되는데, 그러니 예수님께서 직접 손을 대어서 이런 과정대로, 즉 그렇게 이미 확정된 각본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즉 “7이레, 62이레, 1이레” 라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레’이기 때문에, 결코 인간의 시간개념이 아닌 묵시적 개념인데, 즉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이 들어있는, 즉 창조의 완료성에서 나온 시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완료된 시간관이 바로 이 ‘70이레’에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진도를 나가겠는데, 교재 94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 수직 층은 거룩과 세속 됨의 구별을 나타낸다. 원래 이레(7일)란 제사장이 세속적인 것들을 거룩한 것으로 전환시키는 직무의 단계를 나타내는 단위였다. 더러운 문둥병 환자가 거룩한 공동체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서 완치되고 난 뒤에도 7일을 대기해야 했다(레 14:2-9).
(레 14:2)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레 14:3)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 …
(레 14:9) 칠 일만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여기에서 하필이면 왜 7일인고 하니, 하나님이 일을 하셨지 인간이 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즉 “하나님이 일을 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시간적으로 표현할 때, 그것을 두고 ‘7일’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는 ‘7’ 이라는 숫자가 들어가는데, 즉 ‘7일 창조’, ‘7교회’, ‘70이레’, 또한 ‘이레(7)’ 자체도 그렇고 말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더러움에서 거룩, 곧 죽음에서 생명의 전환이란 반드시 거룩한 피가 필요하고, 이 피를 생산하는 시간대가 ‘거룩한 시간’이다.
이렇게 더러움에서 거룩으로, 즉 사도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육에서 영으로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려면 반드시 거룩한 시간이 덮쳐야 하는데, 하지만 거룩한 시간은 반드시 거룩한 몸이 되신 예수님의 손에 장악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