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복음의 싸움꾼
[일반] 복음의 싸움꾼
이름 : 강구만(IP:121.150.1.16)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죽음을 병행시키십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발꿈치를 물고 뜯는 난리가 일어납니다. 한쪽은 물고 뜯고 한쪽은 대가리 깨지고. 그래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이 아들의 속성이 뭐냐 하면, ‘싸움꾼’이 돼요. 야곱처럼 싸움꾼이 되는데 그 싸움꾼이 바로 출애굽기 7장 4절과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곧 나의 군대’라고 합니다. 칼 한 자루 없고, 총 한 자루 없는 군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벌려놓으신 전쟁판에 본의 아니게 뛰어들게 된 군대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도를 닦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싸움꾼입니다. 교회는 도 닦고 완벽한 자아로 거듭나는 사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적과 싸우는 곳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교회에서 싸우는 사람이 없어요. 도 닦는 사람만 있어요. 스트레스 풀고 마음의 평정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어디 참선하러 왔습니까? 교회에 필요한 것은 자본금이 아니라 ‘군자금’입니다. 경성에서 나이트클럽 운영해서 그 수익으로 만주에 있는 독립군들에게 군자금 보내듯이 해야 합니다.
사적인 마음의 평정을 위해 하나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적이 있으며 그 적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활동하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모르게 되면 적과 아군을 분간 못하게 됩니다. 그냥 도만 닦고 있으면 자신의 의로움을,잘남을 알아주지 않는 인사들은 모조리 적군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패거리가 생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각자 자기 의로움을 유지하려고 힘을 모으다보면 패거리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사적인 적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공로에다 인간 행함의 가치를 섞어 넣는 자들이 다 하나님의 원수들이요 악마나라의 요원들입니다. 과연 우리가 아들이라면 아버지가 벌리시는 전쟁의 취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참 아들의 모델이 누구에요? 바로 요단강에서 예수님 세례 받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도 이 땅에 도 닦으러 오신 분이 아니지요. 싸우려고 오신 분입니다. 부처처럼 보리수 밑에 앉아서 깨달음에 집중했습니까 아니면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까? 무화과나무를 저주했고 성전을 엎어버렸어요.
“내가 길이고 진리고 내가 곧 생명인데 너희들 뭐하고 있느냐” 말이죠 도대체. 그래서 장부 조작한 인간이 이 세대의 지혜자보다 더 지혜롭다는 겁니다.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게 아닙니다. 소위 진리를 쥐고서 잘났다는 자들이 오죽 못났으면, 오죽 엉터리였으면 불의한 횡령꾼을 그들과 대비시켜 놓고 횡령꾼을 지혜의 측면에서 우위에 두겠습니까. 왜 우리 시대에 지혜가 없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사적인 관점으로 세상과 미래를 바라보면서 자기 이외에는 달리 사랑할 대상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근호 목사님 잠언 원고중에서)
나의 유익이나, 존재감 찾기나, 내 이름 장식 하려고 교회 나오는 종교꾼이 아닌 복음의 싸움꾼이 보고싶은 오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