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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0. 3. 26) 2강자유게시판에스겔

광주 강의(2010. 3. 26) 2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24)

광주 강의(2010. 3. 26) 5-2

둘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에스겔 5장에 보면, 에스겔은 제사장인데(제사장은 수염을 못 깎게 되어 있는데) 수염을 깎으라고 해요. 이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위기죠. 제사장이 품고 있는 거룩성이 바깥으로 쏟아지게 되면 이것이 심판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제사장의 수염을 날렸다. 그러면 날아가는 수염이 누구 털입니까? 제사장 털이죠. 제사장 의 머리털과 수염을 삼등분해서 불살랐는데, 그 타이밍을 어디에 맞추는가 하면, 예루살렘 성이 불탈 때입니다. 그 때 삼분의 일은 성읍 안에서 태우고, 또 삼분의 일을 성읍 사방에 칼로 치고, 또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 바깥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나리오는 제사장 실존 안에 응축되어 있죠. 계시라는 것은 특정 인물에게 응축된 그 말씀이 한 꺼풀, 또 한 꺼풀 펼쳐지면 그것이 바깥의 하나님 사건으로 확산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응용문제 냅니다. 우리가 방금 에스겔 5장 말씀을 살폈는데, 이 고난 받는 것이 에스겔이 아니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고난 받는다면 이 고난은 예수님 고난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세상 심판으로 이어지겠지요.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죽으신 후 옆에 있던 백부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저분은 진실로 메시아였다’고 하지요.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보고 메시아라고 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모습, 처참하게 망가지는 그 모습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 라고 했다면, 우리는 그렇게 볼 수 있는 눈이 있느냔 말이지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 진 강도를 생각해 봅시다. 그 강도가 목숨 끊어지기 전에 주님 십자가 달린 그 모습을 보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3).” 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똑같이 그 모습을 보았던 다른 강도는 뭐라고 합니까?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놀리지요.

제가 언젠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심정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가짜일 가능성이 많다”고. 가룟 유다가 3년간 예수님 따라다녔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배반했잖아요. 가룟 유다는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왜? 선생님을 팔고 난 후 마음의 가책 때문에 자살을 했으니까. 이 사람의 내린 결론은 결국 예수님께 속았다는 거지요.

속았으니까 그 복수심이 바깥으로 튀어나와서 예수님을 팔아 넘겼지요. 그렇다면 그만큼 가룟 유다는 뭘 생각했습니까? ‘예수 당신 진짜야, 가짜야?’ 이 부분에 대해서 심사숙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의 한계는 “‘혹시’ 하다가 ‘역시’ 아니었어.” 라는 것은 가룟 유다뿐만 아니고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들이 한계점에 도달할 때, 사랑한 사람과 버려둔 사람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지요. 만약 구원 받았다면 어떻게 구원 받겠습니까? 내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가룟 유다 같은 나를 뭘 보시고 사랑해 주십니까?’ 하면서, 온전하게 구원은 주님의 은혜로 돌리겠지요.

그래서 예수님 안에는 열 두 제자의 모든 사건들이 종이 접기처럼 접혀 있고, 그것을 하나씩 펼칠 때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야 되고, 베드로는 배반해야 되고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이것을 성경 말씀에서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요5:39)”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이 어떤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그것은 ‘말씀이 응하게 하기 위해서’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유의 주, 구약에서는 여호와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5장 초반은 이제 이해 되셨지요? 제사장 하나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면서, 제사장 안에는 말씀이 응축되어 있었고, 제사장이 행동하는 그것과 실제 사건과 항상 일치를 이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못하지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역사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에스겔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되는 이유는 에스겔 본인도 하나님의 시나리오, 그리고 에스겔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도 주님의 시나리오, 전부 주님의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에스겔은 철저하게 주님 앞에 매인바 되는 겁니다. 첫째 시간에 이것이 무슨 자리라고 했습니까? 맨홀 뚜껑에 햇볕이 비취는 자리인데, 이 자리가 에스겔 자리인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나의 자리, 내가 행복한 자리를 따로 만든다고 했지요.

이것을 들뢰즈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천개의 고원’이라고 했습니다. 표현 잘 했지요? ‘고원’이 뭐예요? 볼록볼록 튀어나온 지점. 대전 강의에서 한 이야기를 다시 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는 청과물 시장 협의회, 이곳은 안동 권씨 종친회, 여기는 해남초등학교 교사 모임, 여기는 한일교회 장로회, 이쪽에서는 해병대 26기 모임. 전부 각자의 주체가 돌출되어 있지요. 이게 바로 우리 각자의 자리가 된다는 것이지요.

사람 몸은 하나입니다. 일요일 오전 11시에 교회 가야 되는데, 하필 그 시간에 청과물 시장 협의회가 모인다면 청과물 시장 총무를 맡은 사람은 그곳에 참석해야 되겠지요. 오후 2시에는 안동 권씨 종친회가 있다면 또 그곳에 가야하고. 몸은 하나인데 오라고 하는 데는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왜 쫓아다닙니까? 이 모든 곳이 나의 자리이기 때문에. 이런 힘들이 모여서 응축되면 자아가 되는 겁니다.

힘이 모여서 자아가 되니까 자아를 펼치면 힘이 나오죠. 재력, 학력, 인맥 등이 나와요. 그래서 힘이 없으면 사람구실을 못하는 이유가 ‘나 여기 있다.’고 하면 안 알아줘요. ‘당신 안에 접혀 있는 힘들을 내놔 봐라. 그 힘이 내가 이용할 가치가 있다면 나는 당신과 사귀겠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자리입니다. 이것을 현대 철학에서는 ‘주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 또는 ‘자아’지요. 그런데 나의 자리에서는 뭐가 보입니까? ‘나의 영광’이 보이죠. 그런데 나의 자리를 주께서 에스겔의 자리로 잡아당기는데 처음에는 안 오지요. 안 오니까 에스겔이 펄럭펄럭하면서 주님의 심판 사건의 불똥이 튀게 되면 나의 자리가 불타버리지요. ‘앗 뜨거’ 하면서 이 불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고 찾게 되지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이 자리, 이것이 바로 언약의 자리입니다.

에스겔을 인자라고 불러요. 인자가 만났던 그 하나님의 언약의 자리가 모든 하나님의 약속과 미래가 응축되어 있고, 그 응축한 것이 나의 자리만 고수하는 이 세상에서 불똥이 튀게 되어 있다고 에스겔 5장에서 설명하는 겁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 두어 열방으로 둘러 있게 하였거늘 그가 내 규례를 거스려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 둘러 있는 이방보다 더하니”

이제부터는 상징에 대한 해석이 나오는데, 해석을 들으면 쉽다고 느껴지지만 해석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다같이 13절을 읽어봅시다.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자기 백성을 벌주고는 마음이 상쾌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변태 같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자기 백성을 벌하고는 속이 시원하다고 하시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 마음을 이제부터 우리가 이해해야 됩니다. 이해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개별 구원은 없고 성경에는 집단 구원 밖에 없습니다. 이것부터 이해해야 됩니다.

물론 성령께서 개별자에게 찾아가지만, 와보면 내가 나의 이름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어떤 집단에 속해서 구원 받은 것이 나옵니다. 어부가 투망을 하지요. 그래서 그물 안에 고기가 153마리가 걸렸다고 합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해서 던지니까 많은 고기가 잡혔지요.

문제 냅니다. A라는 고기와 B라는 고기가 서로 경쟁해서 구원 받았습니까? 둘이 경쟁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지요. 경쟁이란 내가 개별자인 것처럼 상대방도 개별자가 될 때 개별자와 개별자의 경쟁이 되는 거예요. 하지만 집단으로 구원이 되면 경쟁이 없지요. 그러면 구원 되는 것이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으면, 고기 한 마리마다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으면 서로 돌아보면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고 ‘어, 당신도 피가 묻어있네. 나도 피가 묻었는데.’

이렇게 되면 너, 나라는 개별자 의식은 필요치 않지요. 우리는 한 몸, 한 지체로서 집단 구원된 것이 틀림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서로 싸운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안 되지요. 만약 제가 돈이 많아서 각 집에 똑같은 냉장고를 줬다고 합시다. 교회에 개별자로 와서 그것을 모르는 거예요.

박 집사: 역시 기도했더니만 효과 봤어.

김 집사: 뭔데?

박 집사: 집에 냉장고가 생겼어.

김 집사: 나는 기도한 적도 없는데 집에 냉장고 생겼는데.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은 원인은 모르고 결과만 알고,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추적(상상)하지요. 원인을 모르고 결과만 안다면 결과에서 역으로 원인을 찾으면 여기서 법이 생깁니다. 그러면 이 방정식을 적용하면 다음에도 이런 것이 나올 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지요. 또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지요. ‘누가 이렇게 해서 이런 복 받았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하면 그런 복 받습니다.’라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 원인만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결과 안에, 껍데기는 결과인데 안에는 원인만 차있는 거예요. 이 원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죠.

이렇게 되면 우리는 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했더니만 복 받았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증인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몰랐던 원인만 가득 있으면 이렇게 됩니다.

B: 당신 어떻게 그렇게 되었어요?

A: 우리 주님이 이렇게 했습니다.

B: 어제 교통사고 났는데 왜 그렇습니까?

A: 우리 주님이 일으켰어요.

B: 그런 심각한 일을?

A: 사소한 문제입니다.

내가 원인을 알았다는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나머지 일(이혼하고, 교통사고 나고 등등)은 다 사소한 일입니다. 왜냐? 원인이 내가 갖고 싶은 결과보다 더 세기 때문에, 내가 평소에 노리고 있던 축복의 결과보다도 그런 축복을 주시는 원인자가 나보다 더 크게 자리 잡기 때문에 나머지는 별것 아닌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개별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개별자로 구원 받더라도 일단 합세해보면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다.’ 에베소서 4장에 나오지요. 우리는 한 몸의 지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우리 사이에는 시기와 질투, 경쟁이 있을 수가 없지요. 이것을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고 하지요.

성령의 열매를 개별자로 맺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집단에 소속된 것을 아는 그 순간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면 육의 열매는 뭡니까? 개별자로 나오지요. ‘나는 이런 원리로 이만큼 성화 되었다.’ 라고 할 때, 이것은 바로 자기가 자기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는 시기와 질투가 자연적으로 나옵니다.

여러분, 부부생활은 어떻습니까? 개별자입니까, 집단입니까? 남자들은 집단이기를 원해요. ‘당신이 우리 집안에 시집 왔으면 아버지 생신에 가야하지 않겠나?’ 그러면 여자들은 ‘당신 아버지만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생신 때 당신 갔나?’ 이것은 결국 개별자와 개별자의 만남이죠. 여기에 자식들 셋 있으면 자식들까지 전부 개별자지요. 각자가 ‘엄마는 나에게 뭘 해줬는데?’ ‘아빠는 나에게 뭘 해 줬는데?’ 전부 개별자가 되는 거예요.

개별자가 되면 이것은 자기 자리지요. 여기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서로의 만남에서 은혜를 주목하게 된다면 은혜를 아는 새로운 가정이 되겠지요. 그런데 개별자가 은혜에 주목하려면 뭐가 깨져야 됩니까? 개별자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뭔가 일이 꼬인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나는 나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나와 만나는 사람과 하나가 될 때, 너와 나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면 개별자가 깨지고 같이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개별자가 아니라 집단 구원이라는 이 개념이 처음부터 이스라엘이란 나라 자체에 나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스라엘을 아들들이라고 합니까, 아들이라고 합니까? 이스라엘은 아들이에요. 이스라엘이 40만 넘게 애굽에서 나오는데 그것을 아들들이라고 하지 않고 아들이라고 하지요.

제가 보편적 단독성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스라엘을 하나의 단독자로 보는 거예요.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을 내가 신경 쓰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 다루겠다.’ 전체를 아들로 다루는데, ‘개별자로 다루지 않고 집단으로 다루는데 반발하는 놈은 나가라.’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를 하나로 다루십니까? 그러면 나의 가치, 내 존엄성은 어디에서 찾습니까?’ 이렇게 반발하고 싶거든 죽으라는 것입니다.

단체를 이해 못하고 ‘그럼, 저는요?’ 라고 나오면 잘리는 거예요. 대표적인 사건이 아간입니다. 아이성을 얕보고 들어갔다가 작살이 나고 난 후 그 원인을 찾아보니까 암세포가 있었죠. 이스라엘의 전쟁은 모든 공로가 하나님께 돌아가야 됩니다. 왜? ‘붙여주시는 전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전봇대에 아바타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으면, 전봇대와 아바타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바타 영화 제작하는데 이 전봇대가 보태준 것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오고가는 사람들이 이 전봇대 쳐다보는 거예요. 왜 봅니까? 전봇대를 보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포스터가 붙어 있기 때문에 본단 말이죠. 이 전봇대가 이스라엘이고 아바타 포스터가 하나님의 언약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전쟁은 하나님의 ‘붙여주심의 전쟁’입니다.

여호수아가 칼을 들고 나가니까 앞에서 칼을 들고 막는 사람이 있었죠. 누구입니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죠. 여호수아에게 “신발 벗어. 무릎 꿇어!” 이것은 여호수아가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천사가 모세 언약에 따라서 약속의 땅을 점령하는 그 내력이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어떤 원칙대로 움직입니까? 모세에게 준 약속을 여호수아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천군천사들이 이루는데, 그러면 여호수아와 백성들의 일은 뭡니까? 전봇대. 우리한테는 모세 언약이 붙어 있다.

제가 개혁신학회에서 논문 발표할 때 제 옆자리에 있던 교수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근호 목사처럼 그런 주장을 한다면 우리가 신학을 하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라고 했어요. 제가 뭐라고 답했습니까? ‘신학을 하는 것은 우리의 감춰진 죄를 드러내는 가치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사람들은 자기가 앞서서 전쟁을 하고 싶어 하지만, 적들이 오는 것도 자기가 부른 것이 아니고 주께서 부른 적들을 주께서 물리치기 위해서 하늘의 태양이 멈추고 우박이 떨어지고 --.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하나의 연극이에요. 연극할 때 조명시설과 음향효과 이런 것이 있지요. 주인공이 넘어지니까 “꽝꽝꽝” 하고 음악이 나오잖아요.

우리는 연극배우에 불과해요.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귀 기울이는 사람 없습니다. 그래도 나중에 천국 가서 필름을 한 번 보세요. 그러면 그럴듯하게 영화 잘 만들어졌어요. 우리가 성경 공부 할 동안에 서울의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와 목사가 돈 때문에 싸움이 붙어서 난리를 쳐요. 우리는 전체를 모르니까 ‘의미도 없는 것을 왜 해? 우리가 한다고 누가 알아주나?’ 이런 마음이 들지만, 주께서 모든 것을 다 기획하시고 뜻대로 완벽한 작품을 만드십니다.

우리는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 못해요.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좁기 때문에 전체를 모르지만 주께서는 전체를 다 아니까 우리한테 그 일을 시키는 겁니다.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해서도 몰라요. 다만 우리의 일 자체가 원인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의 상급은 복음 전하는 그 자체가 나의 상급이다.’ 라고 했어요.

그 논리가 뭐냐 하면, 남들은 뭘 하고 결과로써 자기가 원하는 것을 획득할 때 ‘내가 하나님의 일을 했구나.’ 확인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은 아예 자기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원인으로 보는 겁니다.

실제로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갈 때 그냥 곱게 못 갔지요. 배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어요. 태풍을 만났을 때 주의 사자가 바울이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행27:24).”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게 하신다면 로마로 가는 특별 차량을 준비하든지 할 것 같은데, 로마로 가라고 하시고는 가는 도중에 죽을뻔 하잖아요. 그러면 결국 사도바울은 무슨 존재입니까? 질점. 한 점에 불과합니다. 이 점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묻혔어요. 이것이 에스겔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하나의 행동을 할 때마다 펄럭이면서 앞으로 이루어질 사건이 툭툭 튀어나오지요. 에스겔은 그것을 몰라요. 우리도 이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주님은 그것이 필요해서 일으키신 일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집단 구원을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지요. 그들은 개별 구원만 알아요. 개별자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는 줄 알아요. 집단을 위한 개별자라는 생각을 안 하고.

군중과 집단은 다릅니다. 모여도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 군중입니다. 개별자가 모여도 그것은 집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냥 개별자의 모임에 불과하지 집단은 아닙니다. 하나의 집단이 되려면 개별자로 행동하던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사건들이 터져야 ‘아, 우리의 사적인 구원 욕구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흘린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거예요.

뭔가 어디에 복속된다는 거예요. 개별자를 집단으로 만드는데 투입되는 것이 구약에서는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의 특징은 공평합니다. 모세가 팔을 높이 들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 불뱀에 물리고, 그 때 모세가 놋뱀을 들었지요. 이것이 요한복음 3장에서는 놋뱀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개인 구원이 아니고 놋뱀의 의미에 우리는 하나로 뭉쳐져 있는 거예요. 개별 구원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항상 집단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일어나야 돼요. 그게 민수기에 보면 계속 나옵니다. 고라의 자손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했지요. ‘왜 너희 집안만 대장 짓하느냐?’ 라고. 이 때 하나님께서 각 지파 지팡이를 가지고 오라고 했지요. 그런데 아론의 지팡이에만 살구꽃이 피었어요.

이것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개별자가 우수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누가 우리 대신 희생하심으로 우리는 그 희생에 예속되는 방식으로만 구원 된다는 것. 하나님은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 개별적인 솜씨를 발휘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솜씨를 다 막아버리고 놋뱀을 바라보듯 주님의 솜씨만 쳐다보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옛날에 알았더라도 세월이 가서 나이가 들어도 계속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가 이 말씀입니다. ‘한 분이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산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개별자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심이라(고후 5:15).’ 항상 그래요.

이것을 설교시간에 전하게 되면 ‘그런 일이 있는가?’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옆 사람이 기도한 것이 아니고 내가 기도했으니까 기도한 개별자 나에게 복이 오고, 기도 안 한 김 집사한테는 복이 안 가야 공평하다는 거예요. 사람들의 공평은 개별자의 한 행동에 따라 보상이 주어져야 이것이 공평이고, 주님은 인간들의 모든 개별자를 묵살시키는 것이 공평입니다.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놋뱀이 너희들을 건진다는 하나에 예속된 공평이 공평이고, 인간들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을 때 그것을 공평이라고 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언약이 구체적으로 신명기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것을 설명해야 에스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말씀을 공부하면서 왜 엉뚱한 성경을 보는가 생각할 분이 있는데, 엉뚱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은 땅 문제입니다. 땅에서 뭐가 빠지는가 하면 성전이 빠져요. 이것을 알면 에스겔 전체를 아는 것입니다. 땅에서 거룩한 성전이 빠집니다. “오늘 저녁 식사시간에 제일 먼저 나온 음식이 뭐라고 했습니까?” “해삼 내장.” 그러니까 해삼 껍데기는 있는데 내장부터 먼저 빠져나온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성전을 이뤘던 것이 뭐였죠? 성신이었죠. 그 다음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제사장이죠. 에스겔이 제사장이죠.

해삼 껍데기 말고 해삼 내장을 먼저 끄집어내는 겁니다. 뽑아내서 성신이 있는 곳, 진짜 제사장이 있는 곳이 앞으로 성전이 된다면, 이 성전이 들어선다면 앞에 있었던 성전은 필히 없어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 있다고 아직도 여기에 미련을 두는 거예요.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 오셔서 뭘 했습니까?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어요. 스데반 집사가 설교할 때 무슨 말을 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이 땅에서 발붙일 곳이 없게 했다.’는 것이 요점이고, 유대인들은 ‘이 땅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이 땅은 우리 땅이다.’ 이 두 주장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럴 때 유대인은 ‘그러면 이 성전이 존재하는 이유는 뭔가?’ 라고 물었고.

스데반 집사는 해삼의 내장입니다. 주님 계신 곳이 성전인데 먼저 빠져나와서 주님 계신 곳에 먼저 간 거예요. 갔다는 말은 이곳은 지옥이 되지요.

아브라함 언약은 땅 개념 +씨 개념 나오지요. 스데반 집사는 땅에서 우리가 발붙일 곳이 없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왔을 때 자기는 그곳에 정착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객이고 나그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니까, 고향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 있다는 것을 말하지요.

주께서 그곳으로 가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그곳에 정착하라고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보니까 그곳은 하나님이 말씀한 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땅이 아니면 언약하신 것 중 뭐가 남습니까? 씨가 남죠. 아브라함의 자손. 갈라디아서 3장에 아브라함 자손 나오죠. 여러 명이 자손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이 자손이죠.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전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어떻게 깨어지는가 하는 그 내용을 품어야 용서라는 의미가 드러납니다. 죄가 있어야 용서가 의미 있으니까. 이걸 품고 여기에 먼저 성전 되시는 분을 뽑아내는 겁니다. 뽑아낼 때 제사장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인자야!’ 라고 부르면서 (예수님 이름이죠) 뽑아내고, 거기에 따라서 성신이 임하면 여기에 있는 사람 중 예레미야, 에스겔처럼 뽑혀 나와서 따로 살림을 차리는 거예요. 이 작업을 한단 말입니다.

여기에서 나올 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언약 따라 나옵니다.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가 뭔가 하면 ‘왜 개별자가 아니고 집단인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1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분명히 약속의 축복을 받았는데 여호와를 잊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축복 받은 것입니까, 안 받은 것입니까? 아직 못 받은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17절에 “또 두렵건데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그렇다면 20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18절을 보면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자, 여기서 돈을 벌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돈을 벌었는데 어떻게 생각해야 언약을 안 잊어버린다고 했습니까? 이 돈은 내 손과 내 능으로 번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다. 돈이 와야 하기 때문에 온 거라는 말이죠.

여러분들에게 누가 돈 주면 얼른 받으세요. 가난하게 된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부자 된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항상 돈 뒤에 언약 따라 주신 거예요. 언약에 따라 주신 것을 알고 있어야 나중에 그 돈을 사기 당해도 언약대로 사기 당한 거예요. 이것을 욥기에서는 ‘주신 자도 여호와시고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다.’라고 했지요. 이것은 돈 뿐 아니라 우리의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건강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건강 잃으면 하나님이 잘못 처리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건강할 때부터 이미 그 건강 뒤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서 약속대로 건강하라고 주신 건강입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항상 주님의 언약과 연관해서 하란 말이죠.

사람이 언약에 종속되지 않고 항상 ‘이것은 내 것.’ 이런 개별자 의식에서 탈피하지 못합니다. 법정이란 인간 보세요.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혼자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도움으로 삽니다. 그러면 죽으면서 ‘여러분의 도움으로 잘 살았습니다.’하고 그냥 죽으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소유한 게 많아서 죽고 난 뒤에 ‘내 책 출판하지 마라.’ 이런 소리 왜 합니까? 죽고 난 뒤에도 자기의 영향력을 펼치려고 하니 그것만큼 욕심꾸러기가 어디 있습니까? 이게 무슨 무소유입니까? 얼마나 소유욕이 많았으면 ‘죽고 난 뒤에 내 책 출판하지 마라.’ 이 따위 소리 하겠어요? 그냥 곱게 죽지.

인간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자기 혼자 힘으로 산 것이 아니고 주변에서 도와줘서 산 것입니다. 심지어 과학자가 현미경 하나 들여다보는 것도 우주의 힘이 다 연결되어서 들여다보는 거예요. 하여간 모든 것에 남들의 힘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겁니다.

그게 뭐냐? 우리는 종속되어 있다. 언약에 종속되어 있어요.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언약에 종속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개별자가 아닙니다. 개별자가 아니면 둘이 붙어서 사는가? 그것이 아닙니다. 언약이 해야 될 일을 지시를 하지요. 다른 말로 하면 사명, 임무. 이것이 주어져요.

만약 이것이 아니고 개별자가 되면 ‘내가 구원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항상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데, 언약에 종속되면 할 수 없는 것이 와요. 내가 생존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것을 가지고 두 자로 ‘은혜’라고 합니다.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아직도 살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했을 때, 할 수 있는 능력이 나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주체가 되어 내가 일을 하게 되고, 그러면 이 일은 주님의 일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보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을 우리가 지킵니까? 지키면 우리가 개별자가 되는데. 우리가 이것을 못 지키고,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인 것을 알 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무리를 합시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왜 약속의 땅에서 멸망했습니까? 해답이 나왔지요. 언약에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약에 종속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이 땅에서 그들을 멸망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 다시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언약에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추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의 땅에 다시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철저하게 언약이 불러줄 때 올 수 있지요. 그래서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인간이 양심이 있잖아요.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되지, 개별자가 알아서 하면 되지 왜 미리 정하신 자를 부릅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항상 무엇을 잊지 않습니까? ‘주님은 미리 정하신 자를 불렀다.’ 이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셨는데, 그러면 그 의가 어떻게 됩니까? 이미 아신 자에게는 반드시 주어져야 될 의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과거완료입니다. 이미 아신 자에게 그대로 다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자들이 뛰어다니면 그 속에서 뭐가 출렁입니까? 주님의 언약이 있으니까 그 사람은 언약에 종속되어서 살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자기만 그렇게 출렁이는 줄 알았더니만 그런 사람이 또 있으니까, 이런 자들은 다같이 자기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피만 자랑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미 아신 자를 불렀기 때문에.

교회는 부동산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규모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는 분에 의해 부름 받은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고 했지요. 그게 교회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아셨으니까,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면 하나의 에스겔이지요. 에스겔이 되고 선지자가 되고. 여러분이 가시는 곳에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는 역사가 항상 있으니까. 우리가 이 복음을 알았으면 그냥 복음대로 살면 되는데, 복음은 안다고 주장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신학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혈관이 막히겠지요.

복음이 나와야 되는데 신학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언약에서 이미 끊어진 거지요. 분명히 그 사람은 복음을 안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서 복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주님이 불러서 왔다는 주님의 공로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했다는 것이 나오니까 이것은 거짓이지요. 주위에 이런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마을에 왔다 갔습니다. ‘복음 전하니까 교회가 안 되더라’고 하면서 엉뚱한 소리 하고 있어요. 바라기는 화평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어디를 가도 동맥경화가 되면 안 되고, 구멍을 뚫어서 주님의 말씀이 흘러가도록 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냥 파이프(관)이니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세요. 말씀을 자기가 조정하지 마세요. ‘이런 말하면 저쪽에서 무슨 소리를 할까?’ 이런 계산 하지 마시고 그냥 외치세요.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그냥 나오시면 나의 파이프를 통해서 언약이 전달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십자가 지셔서 이미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가 새삼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마귀에게 휘둘리지 말고 십자가 바라보면서 항상 가벼운 마음으로 살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 4. 16. 10:29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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