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0. 3. 26) 1강
광주 강의(2010. 3. 26) 1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24)
광주 강의(2010. 3. 26) 5-1
에스겔 4장을 보면 에스겔이 이상한 행동을 해요. 1절에 박석(돌)을 가져다가, 그 위에 예루살렘을 그리고, 2절에는 운제(전쟁 때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 높이 세우는 것), 토둔(흙을 쌓아서 높이 만들어서 적의 성과 같은 높이를 만들어서 그곳에서 활을 쏘고 하는 것), 공성퇴(창처럼 앞에 뾰족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성문을 부수는 기구) 이런 것들을 그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런 일을 하라고 시켰어요. 하나님이 광주 사람들에게 이런 일 시킵니까? 안 시키지요. 그런데 에스겔에게는 시켰어요.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선지자의 자리에 가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부분입니다.
예전에도 말씀 드렸는데, 지하로 통하는 맨홀 뚜껑이 있다면 지하세계가 아무리 화려해도 맨홀 뚜껑이 있는 자리로 오지 아니하면 지상으로 올 수 없듯이, 이게 뭐냐 하면 선지자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그냥 일상에 따라 살아가죠. 학생은 학교에 가고,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면서 분주한데, 이런 우리들에게 ‘너는 토성을 쌓아서 어느 성을 공격하라.’ 이런 계시를 안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운 이유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우리의 일상의 자리가 구분됩니다. 이것을 ‘개별자’라고 합니다. 각각 따로 노는 거예요. 교회 주일날 잠깐 모일 때도 개별자로 왔다가 예배 마친 후에 속히 다시 따로 놀고. 제가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를 봤지만 초대교회는 따로 노는 법이 없어요. 한 형제고 자매라고 되어 있지 각자 따로 노는 것은 없어요.
선지자의 자리에 오지 아니하면 바깥에 있는 태양이 안 보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자기 자리가 깜깜해도 좋으니까 자기자리만 차지하면 그만이에요. 초대교회는 성도가 모일 때마다 즐거워했습니다. 모였다가 헤어질 때는 아쉬워했는데, 요즘은 반대로 되어서 교회 잠시 왔다가 재빨리 자기자리로 돌아가 버려요.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자리지 선지자의 자리가 아닌 겁니다.
하나님이 구멍을 뚫어놓고 선지자의 자리에 오지 아니하면 주님과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한다는 것을 구약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우리가 바로 선지자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우리가 선지자입니다.
우리가 선지자가 되려면, 선지자가 받았던 계시를 동일하게 받아서 하나의 심지처럼 우리에게 박혀서 우리가 어디를 가더라도 선지자가 됩니다. 항상 말씀이 같이 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위에 태양이 방긋 웃겠지요.
그러면 에스겔 선지자의 자리와 우리 자리의 차이점이 뭡니까? 선지자 자리에는 대적해야 할 원수가 있고 악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자리를 고집하면 원수도 악도 없어요. 그냥 이웃 사람이지 악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에요. 그냥 이웃집 아저씨지요. 내가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것처럼 그 사람도 평범하게 살 따름이죠. 저 사람은 마귀새끼고 나는 선지자다. 이런 대립이 아니고, 그저 정을 주고받고 다정하게 사는 이웃일 뿐이에요. 그래서 여기서는 영적 전쟁 개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 자리를 고집한다면.
청와대의 자리는 세종시 반대하는 민주당이 적이 될 것이고, 여러 가지 정치적 대립 관계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선지자는 악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와 싸우는가 하면, 힘과 싸우고 있어요. 돈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리는 하나님의 계시로 만들어진 자리라고 볼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만들어진 선지자의 자리는 뱀의 후손이 등장해야 되는데, 우리는 평소에 생활하는 가운데서는 뱀의 후손이 느껴지지 않아요. ‘저 사람이 얼마나 내게 도움이 될까?’ 그런 것만 기대하지 ‘저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야!’ 이런 생각을 안 갖습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야!’ 라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하면, 내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일 경우에만 복음에 관심 없이 살아가는 자들을 보면 화가 나고, 적개심이 생기고, ‘하나님 언제 세상을 심판하시렵니까? 빨리 시행하옵소서.’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내 자리만 사수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 그런 감각 자체가 없어요. 사람들을 만나면 “안녕하십니까? 식사는 하셨습니까?” 이것뿐이지, “예수님을 경외하십니까?” 이런 것을 묻는다는 것은 실례가 되지요.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에 당선되고는 기독교가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불교가 기고만장해요. 드라마에서 절에 가서 기도하거나 조상에게 빌 때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소식만 나오면 ‘종교 편향적이다. 대통령이 장로니까 불교를 탄압하는 것 아닌가?’ 이런 식으로 아주 예민하게 나와요.
그래서 제가 ‘지금 세상은 개판이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누가 만들었으며, 인간이 죽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 가도 선지자가 없어요. 에스겔 같은 사람이 있어야 “아하, 우리가 잘 못 살고 있구나.” 이런 인식이 들 것인데, 교회 가도 돈 이야기, 집에 와도 돈 이야기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형제가 되어버렸어요. 좋은 이웃이 되고 말았어요. 직장에서도 하나님 거론 않기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죽이는 재미로 살기.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했어요. 요즘 사람들이 보기에 신이 죽었다고 주장한 니체는 순진하고 착합니다. 요즘은 신을 죽이고 있어요. 신을 모독하고 죽이면서 ‘인간은 위대하다.’고 해요. 신을 약화시키고 죽이면서 반대로 인간의 위상을 높여요. 이런 분위기 속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선지자는 본인도 괴롭고 다른 사람도 선지자의 존재를 거북해하면서 무시하고. 선지자는 하나님께도 당하고 사람들에게도 당하고. 그러니 누가 선지자 노릇하고 싶겠습니까? 아무도 하고 싫어하지 않지요. 만약 에스겔이 신학교를 세운다면 입학생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왜냐? 좌편으로 누워 390일을 지내고, 우편으로 누워 40일 지내고. 누가 이런 짓을 하고 싶겠습니까? 학교에 가면 박사학위 받기를 원하지.
본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맞도록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4:8).”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하시는지 꼼짝 못하게 묶어요.
북쪽 이스라엘의 범죄를 위해서 390일, 남쪽 유다의 범죄를 위해서 40일, 에스겔은 묶인 채 누워서 지내야 했습니다. 유다의 범죄가 40년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 부터인가 하면, 요시아 왕이 종교개혁하고 그 이후부터 범죄한 날 수를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선지자가 이렇게 누워 있으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마음대로 못 움직이도록 묶어서 이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내용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의 원수가 보였고, 일반인들에게는 다정한 이웃만 보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는 내 자리를 고수하면 안 되고 선지자의 자리에 서 있어야 거기에 방긋 웃는 태양 같은 하나님의 뜻이 보이는 겁니다.
매일 교회당에 가서 살라는 말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과 통하는 말씀이 있는 곳을 반겨야 된단 말이지요. 왜냐하면 선지자의 자리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그 선지자가 받는 하나님의 계시가 수월합니까, 힘듭니까? 맨홀 뚜껑 (위에는 하나님이 방긋 웃고 있지만)밑에 있는 선지자(에스겔)의 자리가 어떻습니까? 힘들지요. 힘들다는 말은 주변 상황이 너무 어둡다는 거예요. 그런데 선지자를 안 만날 것 같으면, 나 혼자 내 자리 같으면 혼자 웃고 있고, 행복하기 짝이 없어요.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바라 본 (내 쪽이 아닌)안쪽에 있는 부자 집,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어 온기가 가득한 집안에서 화목한 가족들이 케익을 먹는 그런 분위기에요.
나의 자리에는 어떤 어려움도 없고, 어두움도 없는 행복과 웃음과 따사로움만 가득하지요. 이런 자리와 선지자의 자리를 비교해 보란 말이지요. 사람들은 뭘 그리워합니까? 성냥 팔이 소녀가 그리워했던 풍요롭고 행복한 가정을 그리워해요. 그러면 이런 행복한 가정이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을 듣겠습니까?
우리가 에스겔을 공부하면서 깨달아야 할 것은, 지금 우리의 따듯한 현재 이 모습은 사실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무서운 악의 힘에 둘러싸인 한시적인,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계시가 아닌 나만의 자리입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착각’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상상력을 발휘하는데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든다.
어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이분은 광양에서 연구원으로 일하시는 여성인데, 전화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기는 30년 동안 평범하게 교회를 다닌 사람이었는데, 옛날에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7년 전부터는 내가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이끄는 삶을 살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담임 목사에게 하면 목사는 잘못된 신앙이라고 꾸중했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자신의 신앙이 잘못된 것인지 책도 읽고 인터넷을 찾아 이곳저곳 헤매다가 우리교회 홈페이지에서 제 설교를 듣고는 ‘아, 내가 미친 것이 아니구나. 내 신앙이 성경적으로 맞구나.’ 해서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제게 전화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오늘 광주에서 성경공부 모임이 있는데 참석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퇴근 시간이 6시 30분이래요. 광양에서 이곳까지 오면 1시간 이상 걸리지요? 그래서 못 오시는 것 같아요(두 번째 시간에 참석했음 - 녹취자 주). 이름까지 당당하게 밝히면서 전화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분께 말씀드렸어요. “이것은 기적입니다.” 라고.
그분이 30년 동안 교회 잘 다니면서 바른 신앙인이라고 여겼던 것은 착각이었던 거지요. 교회가 행복을 주는 곳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보면, 에스겔하고 교회하고 달라요. 교회는 적이 없지만 에스겔에게는 주변에 하나님의 원수가 있어요. “하나님, 빨리 유황불로 세상을 심판하소서. 더러워서 세상 살기 싫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게 만드는 원수들. 내 돈 떼먹고 도망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 마치 정상인 것처럼 인식되는 그런 사회 분위기. 이것이 분통이 터지고 화가 나면 이것은 에스겔입니다. 그런 사람은 에스겔의 안목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런데 다복한 가정을 염두에 두고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하면 ‘저 사람은 내 생활에 얼마나 보탬이 되겠는가?’ 이용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과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잘 사귀어서 내 행복에 이용하고 나도 필요하면 도움을 주고 이렇게 서로 어우러져 살려고 합니다. 이것은 에스겔의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에스겔은 정말 희한한 짓들을 합니다. 그 이상한 짓을 계속 살펴봅시다.
5절에 390일 동안 좌로 누워 자고, 그 후에 다시 우편으로 누워서 40일 동안 자고. 8절에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맞도록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에스겔을 꽁꽁 묶어요. 그러니까 에스겔이 원해서 모로 누워 자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하시기에 에스겔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자야 했습니다.
마치 제게 전화하신 그 연구원 같아요. 모든 신앙을 다 버리게 만드시는데 그것이 신앙이라는 거예요. 지난 30년 동안 믿어왔던 것들을 몽땅 다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비로소 성경이 보이고 --
그러면 그동안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한 것은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훼방하고, 하나님 말씀이 내 종교행위 때문에 가려진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찢어버리니까 뒤에 원판이 남지요. 그동안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주셨고,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도해 오셨다는 것이 비로소 실재로 뚜렷하게 다가올 때, 그분이 하는 말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채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같아요. 평생을 나는 아무 한 것도 없는데 공짜로 지금도 구원 받고 있고, 또 구원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내력은 성경에 다 나와 있지요. ‘네가 한 것이 아니고 내가 했다.’ 내가 너를 대신해서 에스겔을 보내고, 예레미야를 보낸 것은 너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너는 하지 마라. 내가 다 할게.’ 이것입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언제 알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종교생활을 포기할 때.
성도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그 교회 목사는 ‘당신 신앙은 문제가 많다. 어디서 잘못 배운 것이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면 그분은 대답하기를 ‘내가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분의 전화를 받고 놀랐어요. ‘나도 정신 차려야겠구나. 설교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계속 본문을 봅시다. ‘너를 줄로 동이리니’ 그래야 ‘날이 맞도록 몸을 이리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이제 에스겔은 죽어납니다. 에스겔 팔자는 희한한 팔자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에스겔이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에스겔이 당한 이 고통은 자기 행복만 추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무엇 때문에 줄에 꽁꽁 묶이고, 왜 모로 누워서 긴 세월을 자야 하는가?’ 하는 것을 좀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성경을 보게 하십니다. 평안할 때는 성경을 봐도 건성으로 넘어갑니다. 진실로 성경을 보게 될 때는 뭔가 다급한 일이 생길 때입니다.
그 다음 9절을 봅시다.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이것들은 원래 한 그릇에 담을 것이 아니라 따로 담아야 하는 것인데 한 그릇에 담습니다. 그만큼 양식이 귀하다는 뜻입니다.
10절에 “너는 식물을 달아서 하루 20세겔 중씩 때를 따라 먹고” 20세겔은 220g입니다. “물도 힌 육분 일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1.6리터입니다. 겨우 목을 축일 정도의 양이지요.
이것을 누가 먹고 누가 마십니까? 에스겔 선지자가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의 자리는 뭐냐? 앞으로 우리에게 들이닥칠 미래의 삶을 선지자에게 먼저 예고편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을 계시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BC 586년에 유다가 멸망하는데, 7년 전(593년)에 이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7년 후에 있을 일을 에스겔이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에스겔이 자기 집에서.
12절에 “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 인분 불에 굽는다는 것은, 연료가 바닥이 나면 사람 똥에서라도 에너지를 뽑아야 됩니다. 이것은 나중에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살기가 힘들다는 것을 에스겔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자, 여기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왜 이런 일이 있는가? 문제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약속이 없는 땅으로 쫓아내는데, 쫓겨 가면서 그들은 이렇게 힘이 듭니다. 그러면 약속이란 것이 뭘까요? 약속이 없는 땅에 가니까 힘들다는 말은(약속의 땅은 힘들지 않다는 것인데), 약속의 땅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어요. 약속의 땅에 특징이 뭡니까?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힘들지 않다는 것은 그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려면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진짜 모습을 완전히 노출시켜야 될 그런 기회가 필요하겠지요. 그러면 이들이 포로 잡혀 갔다가 다시 오게 되면 비로소 뭘 느낍니까? ‘우리가 그동안 은혜를 입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알지요. 나가면서 죄를 알고, 들어오면서 은혜를 사모하면서 올 때, 과거 애굽에서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러면 빠져 나온 이것이 바로 구약이고, 죄인 가운데로 다시 들어온 것이 신약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모세가 데리고 나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서 자기 잘난 척하다가 쫓겨나잖아요. 그렇다면 앞으로 다시 애굽 같은 세상에서 나올 때는 그런 실패를 두 번 다시 해서는 안 되겠지요. 늘 왔다 갔다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애굽에 있는 인간들은 죄를 알 뿐이지 죄를 스스로 이길 힘이 없어요. 사람이 죄 짓는 이유가, 죄 짓는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거예요. 죄 짓는 것을 알면 죄인이 안 됩니다. 말이 어렵지요? 죄 짓는 것을 본인이 알면 그것은 죄로 간주하지 않고, 죄 짓는 것을 모를 때만 죄라고 간주하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관건은, 은혜를 주느냐 마느냐 그것이 관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초점은 여기에 있어요. 환자가 병원에 올 때 스스로 고칠 수 있다면 병원에 올 필요가 없지요. 환자가 병원에 오면서 예수님을 의사로 인정하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구약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준 것은 율법을 받은 인간들이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인간들은 안 됩니다. 율법을 줬으면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인간은 안 됩니다. 인간은 법을 줘도 이 법이 다 흘러내립니다. 말씀을 줘도 그 말씀이 다 흘러내립니다. 말씀이 꽂혀야 되지, 그렇게 되지 않고 듣기만 하면 신학박사 됩니다. 인간은 안 달라지고 신학적 지식만 쌓일 뿐입니다.
말씀이 인간을 깨뜨려야 되는데 깨뜨리려면 말씀대로 주께서 인간을 다뤄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가? 인간을 들어서 은혜가 없는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는 은혜가 있었는데 옮겨 온 땅에는 은혜는 없고 힘이 움직이는 세상이니까, 힘없는 자들이 힘을 추구하는 곳에 갔으니 얼마나 설움과 핍박을 받겠습니까? 그러니까 먹을 것도 변변찮고 연료가 없어서 사람 똥으로 겨우 불을 피우고 그런 처참한 환경에 처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지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렇게 망가질 때 신약에 오면 과부, 세리, 문둥병자, 소경 이런 사람들이 주를 찾지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약속을 고대한 자들(이스라엘)이 이제는 이렇게 망가지고 난 뒤에 이제 메시아가 오시지요.
그런데 이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이 누구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방해하지요. ‘우리가 법을 못 지켜서 쫓겨났다. 법을 지켜야 구원 받지.’라고 했지요. 이건 순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법을 줘도 못 지킵니다. 에스겔처럼 돌아누우면 구원 받습니까? 390일이 아니고 30분도 못 견딥니다.
그 다음 4장 16절을 봅시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경겁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민답 중에 물을 되어 마시다가 떡과 물이 결핍하여 피차에 민답하여 하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
민답하다는 것은 안타깝고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런 신세가 되었는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이런 소리가 절로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신자든 불신자든 사람을 괴롭게 하는 분이 누군가 하면 하나님입니다. 못되면 다 하나님 탓이고, 잘 되도 하나님 탓입니다. 사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전문가입니다. 내가 내가 원하는 인간을 만들 수 없어요. 내가 내 힘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 포기하세요.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되면 주께서 말씀대로 다루는 나의 진면목이 가려집니다. 주께서 은혜로 인간 잘 만들고 있는데 우리는 괜히 앞에서 ‘하나님,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면서 헛소리 하고 있는 거예요. 찬송 부르고 있는데 뒤에서 굿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죄밖에 안 나오니까 내가 뭘 해서 구원 받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시면 그때부터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가는 인간이 바로 나라는 것을, 내가 바로 주님의 작품이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께서 지금까지는 이만큼 만들었구나. 내일은 또 어떤 나를 만드실지 기대가 된다.’ 이렇게 될 때,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기도 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상태가 되면 절로 기도가 나오겠지요. ‘하나님, 내일은 어떤 나로 만드실 겁니까?’ 하면서.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사람은 원인을 모르니까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소급해서 찾아간다.” 그래서 이것을 비진리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원인을 알아요. 약속대로 주께서 택한 백성에게 말씀이 주어지는데, 양식도 없고 물도 (저울에)달아서 먹고 하는 가운데서 ‘아하, 세상이 우리가 살만한 세상이 아니구나. 어서 천국에 가야지.’ 라는 느낌을 주도록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하는데, 우리는 물 없고 양식 없으면 ‘하나님이여, 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내가 기도를 열심히 안 했다고 이런 벌을 주십니까? 내가 주일 예배 두 번 빼먹었다고 이렇게 까지 벌을 주십니까?’ 이런 식으로 결과만 보고 원인을 찾는(내가 행동을 삐딱하게 하니까 하나님도 치사하게 나에게 이런 식으로 나오는구나) 식으로 자기가 방정식을 일방적으로 만들어요.
이게 얼마나 큰 착각입니까? 평생을 신앙생활 하면서 착각 속에서 살았어요. 주님은 십자가 진 강도도 구원했어요. 그 사람에게 일곱 살 때 뭘 했는지, 얼마나 착한 일 했는지 묻지도 않고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어요. 살인강도라도 주께서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으면 그 취지와 뜻을 좀 헤아릴 줄 알아야 하는데, 자꾸 자기 마음대로 원인을 끄집어낸단 말이지요. 선악적으로 스스로 법을 만들어서 평가를 내립니다. 완전한 착각이지요.
에스겔에게 보여줬다는 말은 ‘이 땅에서 네가 고생하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고생해야 그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 은혜였다는 것을 안단 말이지요. 교회가 깨져봐야 ‘교회 다녀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그제야 안다는 말입니다. 서울대학 나온 목사가 무슨 수용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에스겔이 필요해요. 스데반이 필요하고, 거지 나사로가 필요하고, 진짜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이 필요하지 말씀을 입으로 나불거려서 돈 벌이하는 인간은 필요치 않습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요. 우리의 자리는 없어요. 약속이 만들어 내는 자리. 여기가 우리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들어오려면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늘 포기해야 됩니다. ‘이 자리 만들려고 얼마나 내가 고생했는데 이 자리를 포기해?’ 고생한 것은 알겠는데 그것도 은혜인줄 아시고, 내 자리는 나를 망치게 만듭니다. 주님의 약속이 나를 구원한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만든 자리는 내 자존심만 키우기 때문에 점점 교만해 져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는 안 보이고 나의 원수만 보입니다. 부부가 왜 이혼합니까? ‘아이고, 이 원수야!’ 하지요. 제가 대전에서 그런 강의 했습니다. 이혼문제의 해결책은 하나뿐입니다. 여러분도 이혼하기 전에 이 말씀 먼저 들으세요. 이혼은 사소한 문제입니다. 전혀 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혼하고 싶으면 하시고, 그리고 같이 사세요. 왜?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에 목숨 걸지 마세요. 이혼문제가 큰 경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결혼을 나의 행복을 보장하는 나의 자리로 간주할 경우에만 큰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이혼하게 하십니다. 왜? 그 자리는 너의 구원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선지자가 있었지요. 누구입니까? 호세아. 이 경우는 여자가 나갔으니까. 데려와도 또 나가니까. 그래서 선지자를 잘 봐야 돼요. 그들은 본인이 원해서 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줄로 꽁꽁 묶듯이 ‘딴 데는 계시가 없다. 너에게 유일한 계시가 떨어졌다.’ 그 식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계시는 누구한테 떨어졌어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 떨어졌지요. (이근호 목사한테 떨어졌다고요? 하하하!)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야말로 세상 모든 것은 시시하고 사소한 문제, 목숨 걸 이유가 없는 문제로 전락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소한 문제에서 얼른 벗어나서 말씀이 있는 자리에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와야 해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있었지요. 마르다는 자기 솜씨를 부리는 자기의 자리가 있었어요. 손님 왔다고 잡채하고 부침개 굽고 굉장히 분주했지요. 그런데 마리아는 자기 자리가 없어요. 마리아의 자리는 말씀이 떨어지는 자리, 그곳이 자기 자리에요. 그러니까 마르다가 뿔따구 나서 “예수님, 동생한테 나를 좀 도우라고 해 주세요.”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2).”
그 다음, 선지자에게 무슨 해괴망측한 일을 시키는지 봅시다. 5장 1절입니다. “인자야!” 인자라는 말만 나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또 무슨 희한한 일을 시키실지. “너는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삭도를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에 달아 나누었다가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지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지 일은 가지고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지 일은 바람에 흩으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너는 터럭 중에서 조금을 가져 네 옷자락에 싸고 또 그 가운데서 얼마를 가져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
시나리오가 복잡하게 되어 있지요? 어떤 시나리오인가 하면, 에스겔에게 머리털과 수염을 깎으라고 했어요(에스겔은 제사장이고 제사장은 수염을 안 깎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시기(BC 586년)가 되거든, 그것을 삼등분해서 삼분지 일은 성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지 일은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삼분지 일은 바람에 흩으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이 털이 바람 부는 방향대로 날아가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뒤를 따라 가시는데 그곳에서 불이 나와서 사방을 태운다고 합니다. SF영화를 보는 것 같지요.
제사장 수염을 깎아서 이렇게 하는 것인데, 제사장이 제사장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고, 제사장으로 삼으신 이유가 뭔가? 철저하게 버릴 것 없이 다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선지자가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잠재되어 있던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드러나는 거예요.
선지자의 몸짓이 없으면 하나님의 시나리오를 모르지요. 그런데 때가 되어(예루살렘 성이 멸망하는 때) 선지자가 합세하면 선지자가 그 전에 이야기했던 것도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진리죠. 왜? 선지자가 펄럭이면서 나왔던 그것이 해석이 되니까. 사건과 말씀이 일치를 보는 순간을 위하여 선지자가 때를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인자야!’ 라고 했는데, 인자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할 때 처음부터 다 벌리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일을 감춰 놓았다가 때가 되어 그 말씀을 응하게 하는 식으로 하나씩 펼치십니다. 그러면 펄럭이면서 펼칠 때마다 숨어있던 예비 된 하나님의 사건들이 나오겠지요.
시간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들의 시간. 이 시간은 인간들이 행함으로 채우는 거예요. 예를 들어, 안식일이라면 “안식일에 우리 뭘 할까요?” 안식일이라는 시간이 먼저 있고, 그 다음 그 시간을 채우는 식이지요. 마치 조상 제사 지낼 때 “아빠, 오늘 무슨 날이야?” “오늘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제삿날이다.” 오늘이 제삿날이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전을 굽고 떡을 하고 뭔가 제삿날에 할 일을 하잖아요. 이게 인간들의 시간입니다.
학교에서 첫째 시간은 영어시간이다. 그러면 영어 시간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요. 시작종을 치면 선생님은 영어를 가르치지요. 마침 종이 울리면 영어 시간이 끝나지요.
시간이 먼저 정해져 있고 그 내용을 채우는 것이 인간의 시간이라면, 하나님의 시간은 사건이 먼저 있고 그 사건이 유지되고 그 다음 사건이 나올 때까지의 이것을 시간이라고 합니다. 사건이 먼저이고 그 사건의 성질이 계속 유지되면 그게 바로 시간이 되는 거예요.
천지를 창조하고 쉬면 그때부터 안식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전체 창조에 위배되는 것은 이 안식일에 위반되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완료되면 안식일은 완료되고 끝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지요. 그러면 이후부터는 어떤 것이 죄가 되는가 하면,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 끝나는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심판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예수를 안 믿는 그런 시기는 끝나버리죠. 지옥 가도 믿고, 천국 간 사람도 역시 믿고.
지옥 간 사람은 가슴을 치면서 ‘왜 안 믿었던고’ 하면서 후회하는 시기가 온단 말이지요. 그것이 재림의 사건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까? 생각하지 말고 사건으로 봅시다. 아침에 눈을 떴어요. 눈을 뜬 것도 주께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오늘도 살게 하셨어요. 주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살게 하셨어요. 내가 먼저 살아서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계신 흔적이 뭐냐? 내가 주님 덕분에 오늘을 살면 하루 종일 주님이 이렇게 살아계셔서 오후 5시는 이런 일을 주시고, 7시에는 어떤 손님을 만나게 하시고 --- 이 모든 것이 주께서 보내주신 일로 간주하고 밤에 잠드시면(잠을 잔다는 것은 내 눈꺼풀이 내려앉은 것이죠) 그러면 사건이 끝나는 거예요. 잠은 죽은 상태거든요.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그러다가 아침에 잠에서 깨면 또 새롭게 주께서 다루시는 하루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염려는 오늘로 끝나고, 내일 염려는 주께 맡겨야지요. 주께서 살아 계시니까 내일 또 살게 하시면 또 일거리를 주신단 말이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참새를 키우는 방법이고,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도 오늘 예쁘게 가꾸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참새도 들풀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걱정 없이 잘 사는데, 인간인 너희는 뭐냔 말이지요. 마귀 때문에 만날 자기 시간을 따로 갖고 있어요. 내 일을 하나님이 도와달라는 식으로. 그리고 자기 생활이 따로 있다 보니까 그 시간은 날 위한 시간이고 나 좋으라고, 나의 영광을 위한 시간이 되어버려요.
10분 쉽시다.
(2010. 4. 9. 09:1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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