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5:12-16 (예수님과 문둥병)
눅 5:12-16 (예수님과 문둥병)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203)
본문 : 누가복음 5장12-16절
제목 : 예수님과 문둥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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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10-04-11 09:52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23강-눅5장12-16(예수님과문둥병)-luk100411.hwp
이근호
10-04-11 13:31
예수님과 문둥병
2010년 4월 11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5:12-16
(눅 5:12, 개정)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눅 5:13, 개정)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눅 5:14, 개정)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눅 5:15, 개정)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눅 5:16, 개정)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병들인 사람과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은 이 만남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병을 고치는 사람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병자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병을 고백합니다. 즉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정상인임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훌륭함을 보이면서 ‘자기 증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이 망가져버린 자임을 밝힙니다. 이것은 일반인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입니다. 양쪽 다 독자적인 입지를 고수하면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둥병자는 자신을 포기하듯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 예수님 앞에서의 성도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문둥병자에게 단순히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꺼내놓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에게 있어 이 문둥병자와의 만남이란 말씀 성취를 위한 조치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는 바도 이런 데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자신이 기대하는 힘과 능력을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에게서 나올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성취성 뿐입니다. 이 성취성에 있어 예수님을 만나는 인간은 누구나 병든 자이어야 하고 마땅히 죄인이며 죽음의 냄새를 피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독자적인 자기 가치를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대는 짓는 다 헛짓입니다.
성도란 자생력으로 버티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덕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희생 앞에서 비로소 자신들이 스스로 버텨봐야 소용없는 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와 만난 것은, 이 문둥병이라는 것이 그 당시, 하나님의 저주의 징표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저주한 병이란 인간의 힘으로 치료될 수 없으며, 치료는 오로지 병을 주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줄 때만 성립된다고 여기고들 있었습니다.
이러한 긍휼과 희생은 인간의 요청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은 늘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숨어계시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하나님의 오른쪽 자리, 곧 주의 자리에서 세상에 나서게 되는데 이 주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인간들은 걷잡을 수 없을 지경으로 공격하고 달려들고 미워하고 저주하고 참살시켜 버립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염두에 둔 하나님상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럴 때 비로서 인간이란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임이 노출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란 바로 이런 인간들을 구원하지 않아도 무방한 하나님에게서 나오게 됩니다. 제대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나 같은 인간, 지옥불에 집어 넣으셔도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비롭고 정의로우신 분입니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긍휼이란 어디까지나 나의 형편을 고려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의에 의한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성도는 늘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문둥병자의 만남의 초점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예수님에게 달성되느냐를 보여주자는데 있습니다.
레위기 14:2-9에 보면, “문둥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화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는 피를 젖시고 뿌리기 위한 도구들입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저주의 피가 흐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죄였다“는 소리를 고래고래 치면서 온 몸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저주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어긴 존재로 살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1:2에 보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고 되어 있습니다. 새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를 물에 잡아서 그 피를 다른 살아있는 새의 쭉지에 바르게 되면 그 새는 비로소 창공을 향해 자유로이 날아갈 수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날 성도는 바로 이런 새에 해당됩니다. 사도행전 20:28에 보면,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란 이처럼 사람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 뿌림을 받은 자입니다.
이렇게 받게 되면 그의 미래는 이미 확정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피는 인류의 미래를 고정시켜버렸습니다. 그 피의 효능과 피 없는 자의 저주스러운 심판날로 미래가 결정나버렸습니다. 성도는 내름대로의 새로운 미래상을 꿈꿀 필요조차 없습니다. 성도의 미래는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바대로 갑니다. 그 미래상은 바로 ‘죄씻음 받은 의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런 긍휼과 희생이 통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자력으로 버티려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몸과 정신은 ‘자력으로 버틸 때까지 버텨보기’입니다. 결코 희생이니, 봉사니 하는 것을 용납되지 않는 세계에 적합한 몸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우리가 곧 문둥병자입니다.
출애굽기 4:5-7에 보면,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문둥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안목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뱀과 하나님과 벌리는 전투장이요, 그 와중에서 우리는 문둥병자이며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란 죽음의 세상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피 뿌림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15:42-44에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산다’는 말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다시 산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렇게 심각한 미래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다시 살면됩니다. 왜요?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힘의 세상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희생과 긍휼을 품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10-04-14 17:37
023강-눅5장12-16(예수님과 문둥병)-luk100411
2010-04-14 13:55:53 녹취 : 오용익
023강-눅5장12-16(예수님과 문둥병)-luk10041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5장 12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6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5:1-11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병 나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천국에 갈 것인가? ‘병 낫고 지옥 가시렵니까, 아니면 우리 전체가 천국 가시렵니까?’ 라는 질문을 성경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낫게 했으면 ‘그래, 이제 깨끗함을 얻었지? 동네방네 다 떠벌여라. 내가 병 고치러 온 사람이다.’ 이렇게 하면 얼마든지 자기 팬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쉿! 쉿! 하고 ‘네 병 나은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병 낫게 되고 건강하게 되면 다시 자기의 보따리를 생각합니다. ‘차라리 아프지 말 것을, 안 아프고 안 나으면 될 것을, 괜히 병 주고 약주고 이게 뭔가?’라는 본전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런데 하나님의 초점은 “네 문둥병이 나은 것이 초점이 아니고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들어봐라. 네가 가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제사장에게 가라. 가서 성경의 모세율법에 이른 대로 ‘이러이러한 제물을 바치고 이러이러한 제사를 바쳐라.’ 한 그 대목을 네가 염두에 두고 필요한 제물들을 뽑아서 제사장 앞에 나가서 ‘예수님께서 이 제사의 제물을 완성시켜서 저를 이렇게 고쳤습니다.’라고 그들 앞에서 증거 하라”는 겁니다.
사적인 문둥병 치료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 땅에 문둥병자 골라서 그 병을 치료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이 근원적으로 치료할 수 없는 것 ‘내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며 어디에 하자가 있으며 대체 나는 어디로 끌려가는 거야.’라고 본인도 모르는 그 미래, 그 장래,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데 대체 심판은 어떻게 생겨먹은 심판이며 죽음이후라고 하는데 그 죽음이후는 누가 가본 사람이 있나, 도대체 그 죽음 이후는 어떻게 생겨먹은 세계인가에 대해서 인간은 모릅니다.
인간이 이 미래를 모른다는 말은 현재 자기 자신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내가 왜 사는지, 왜 태어나야 하는지 그걸 모른다는 거예요. 장래에 대해서, 어떤 구조의 세상에 들어가느냐 하는 그것을 우리가 미리 알고 파악하게 되면 지금 내가 누군지를 알게 되고 그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대비할 수 없는 그러한 대비점을 주께서 고맙게도 우리를 막아서면서 자신에게 이루어진 일을 우리에게 덧 입혀서 병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전체를 낫게 하는 그러한 혜택을 주시고자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나는 건강한 자가 필요 없다. 나한테는 병든 자가 필요하다. 왜? 나는 의사로 왔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우리가 모르는 미래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의 현재라는 것은 자기가 임의로 골라잡아서 그것만을 현재라고 우기지요. 지금 대구에서 마라톤 대회 하고 있어요. 현재입니다. 지금 마라톤 대회 하고 있어요. 이봉주가 지금 해설하고 있습니다. 현재입니다.
하지만 이봉주가 우리 미래까지 보장 못해주거든요. 마라톤 1등 한다고 우리가 천국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세계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기는 창창한 여러분의 인생길에서 주님이 이러한 말씀으로 좀 그 길을 가로막았으면 좋겠어요. 성경 보라고 하면 피해버리고 교회 오라고 하면 또 피해버리고.
‘내 앞에서는 성경 이야기하지 말고 주님 이야기하지 말고 하나님 이야기하지 말아다오. 내 앞에서는 오직 벚꽃놀이뿐이다.’ 이런 식으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제발 주님이 좀 가로막았으면 좋겠어요. 쉿! 하면서 오셔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아라. 너에게만 이야기해 줄게. 내가 너를 고치고 싶거든. 내가 너의 전체를, 아예 미래까지 완벽하게 너를 보장하고 싶거든. 그러니까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지금부터 잘 들어라.’ 하는 이런 이야기가 너희에게 지금 임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문둥병자가 듣고 제사장 앞에 서게 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한꺼번에 줄이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누구의 덕분으로 산다.’는 겁니다. 교회(교인들)가 뭐냐? 염치없게도 예수님덕분으로 사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참 염치없지요. 남들은 다 자기노동의 대가로 성공했네, 하고 살아가는데 우리는 참 염치없고 뻔뻔하게 ‘저는 주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것도 미래까지 보장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 성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의 덕분으로 산다.’하는 이것을 떨쳐버려야 자기의 자유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자기주제파악이 잘 안되어서 그렇습니다. 요새는 문둥병은 너무 천한 용어라고 해서 한센병이라고 부르는데 다 천합니다. 문둥병을 문둥병이라고 한다고 해서 실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둥병자를 등장시켜서 예수님과 마주치게 한 것이 어떤 점에서 우리한테 고마우냐 하면, 문둥병이라는 것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모델케이스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못 고치기 때문입니다. 사람 힘으로 못 고친다는 말은, 사람의 힘으로 못 고치는 그 질병이 누구에게 일어났다는 말은 직접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손댔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손대서 일어났다는 말은 그 해결도 하나님이 손대줘야 해결된다는 겁니다. 그 적절한 케이스가 그 당시에 문둥병이었습니다. 이런 문둥병과 예수님의 만남에서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겁니다. 이 문둥병이 그냥 문둥병이 아니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는 거예요. 키에르케고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말을 했는데 쉽게 하면 ‘죽음의 냄새가 피어난다.’
우리는 아로마, 들풀향기의 향수로 화장을 해서 좋은 냄새를 피우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위적인 향수냄새를 맡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냄새를 맡아요. 창세기 8장에 보면 “그 냄새를 흠향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코가 굉장히 예민한 모양입니다. 누굴 만나도 이 근호, 저를 만나도 흠, 하고 죽음의 냄새를 맡아요.
‘흠, 곧 가겠구나.’ 이렇게 죽음의 냄새를 맡아요. 주님은 사람들을 볼 때에 죽음의 냄새를 맡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를 볼 때는 힘을 요구합니다.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오셨으니 힘을 주세요.’ 요새 말로 하면 ‘돈 주세요.’ 혹은 팔자 펴게 해 달라는 거지요.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는 동시에 주님이 그 사람에게서 끄집어 내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힘을 얻기 위해서 갓 바위에 빌듯이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주님에게서는 뭐가 나오느냐? 14절을 봅시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그것이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사회에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차림, 키, 몸무게 이런 것을 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성도를 대할 때는 그 사람에게서 무슨 성경말씀이 나오는가를 유의 깊게 봐야 됩니다.
아까 장로님 기도하실 때 우리가 듣는 것은 ‘기도 중에 무슨 성경말씀이 나오는가.’입니다. 성경말씀이 나오면 그 기도에 대해서 우리는 아멘,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성경말씀이 삶에 녹아져서 그분의 삶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에 녹아진 성경말씀이 나올 때 성도와 성도, 집사와 집사,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오직 말씀이 튀어나오면 ‘우리는 이 말씀에 준해서 구원받았습니다.’라는 똑같은 목소리로 고백할 수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또 오후에 기도하는 분이 부담이 되겠군요.
사람들은 예수님한테 와서 힘 달라고, 능력 달라고 오는데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성경말씀이 나오는데 ‘그 말씀은 앞으로 네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지키고 덕은 누가 보느냐, 네가 덕을 본다.’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끄집어내 놓았는데 그 내놓은 성경말씀은 주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 다 이룬 혜택을 주님하고 대화하고 있는 우리가, 우리 길을 막아선 주님에 의해서 길이 막혀선 우리가 그분의 혜택을 입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모세의 율법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레위기 14장 2절부터 9절의 말씀입니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할게요. 문둥병자란 뜻이 있어서 하나님이 손을 대었기 때문에 사람 손으로는 치료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일으킨 병이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주목해야 될 인물로서의 병자가 문둥병자입니다.
그 문둥병자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어느 날 깨끗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손대고 있다는 증거지요. 그렇게 했을 때 문둥병자를 들리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고 낫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인데 다 낫고 난 뒤에 문둥병자는 제사장에게 가서 이러이러한 예물을 드리라는 겁니다.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가고 새 두 마리를 가져가는데 한 마리는 물에서 잡아서 그 피를 내서 그 피를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에 그 피를 발라라. 그 피 적신 것으로 문둥병 걸렸다가 나은 그 사람에게 뿌리라. 그리고 나머지 살아 있는 새 한 마리는 그냥 날리지 말고 죽은 새의 피를 가져다가 날개 죽지에 발라서 날려 보내라.’
‘누가 죽은 덕분에 누구의 희생덕분에 이렇게 저주에서 거룩함을,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하는 겁니다. 이것을 보여주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옛날에 한 때 있었던 에피소드가 아닐까? 옛날에 이스라엘이라는 독특한 나라에서 있었던 종교적인 시스템이고 제도에 불과하지 않을까?’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거예요.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피 뿌리는 사람 따로 있고 그 피를 덕지덕지 처바르는 사람 따로 있는 거예요. ‘우리 심령에 피 뿌림이 주어지면 그 피가 너희 모든 죄를 사한다는 약속의 성취 그 자체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성취’라는 겁니다.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뜻이에요. 어떤 경우에만? 피 뿌림을 받을 경우에만. 하얀 도화지는 일반인도 문방구에서 살 수 있습니다. 똑같은 도화지에요. 하지만 거기에 물감이 뿌려져서 작품이 되는 것은 일반인들이 못합니다. 해 봐야 어설프지요. 하지만 작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합니다. 아름다움을 창조해내지요.
우리가 하얀 도화지 같으면 주님께서 파스텔이나 물감 들고 일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입니다. 죄인에게는 물감을 칠해봐야 아름답기만 하지 죄용서는 안돼요. 죄인이기 때문에 물감을 뿌리는 것이 아니고 피를 뿌려야 되는 겁니다. ‘지금 네가 갖고 있는 목숨은 하늘나라에 안 통하는 목숨이’라는 말입니다. 저주받을 생명이라는 겁니다.
우리 목숨은 몸속에 피가 흐르는데 아침에 눈만 뜨면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라는 그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어긴 그 죄가 말초혈관부터 심장까지 다 흐르고 있습니다.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어긴 죄가 품고 있는 그 피가 흐르고 있는 거예요. 전설의 고향처럼 한다면 ‘왜 따먹었어. 왜 따먹었어.’가 되는 거예요.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 죽는다고 했잖아.’ 죽는 것 정도가 아니고 저주받아요. 선악과 따먹으면 마귀처럼 저주받습니다. ‘따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는 악마를 겨냥해서 심어놓은 나무에요. 인간은 거기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악마가 들어가는 그 유황불에 같이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우리의 부끄러움, 수치스러움을 가리려고 하는데 그 수치스러움이란 것은 뭔가 정상이 아니고 내가 제자리에 없다는 뜻이에요. 사람이 낯선 자리에 갈 때는 뭔가 허전함을 느끼거든요. 사람이 자기 몸이 부끄럽다는 것은 정상적인 몸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래 주신 정상적인 몸과 그 안에 담고 있는 정신상태, 그 사고가 서로 아귀가 안 맞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담은 부끄러워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 몸을 가렸습니다. 그래가지고는 해결 안 됩니다. 어떤 분이 심장수술 한 뒤에 들려준 이야기가 있어요. 이것은 그냥 그분 느낌을 전해들은 것이라서 과학적으로 맞는지 어쩐지 잘 모르겠어요. 그 분이 심장수술 중에 수혈을 많이 받았어요. 그 때부터 별 다른 이유 없이 자꾸 몸이 간지럽다는 거예요.
수술 받은 당사자인 그분의 개인적인 해석은 이렇습니다. ‘원래 내 피였으면 안 간지러운데 남의 피가 도니까 이게 안 맞아서 원래 피와 차이가 나서 충돌이 일어나서 자꾸 간지러운 것이 아닌가?’ 그렇게 자기소견을 이야기했어요. 지금 우리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처음 인간은 옷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옷을 입고 있다는 자체가 지금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옷을 입는 것이 정상이라면 빨강 옷을 입어야 됩니까, 안 그러면 분홍 옷을 입어야 됩니까, 아니면 앙드레 김한테 가서 맞춰 입어야 합니까? 어떤 옷을 입어야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의 옷을 입지 않으면 구원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옷이 원단이 뭡니까? 제일모직에서 나온 원단입니까? 어떻게 예수님의 옷을 해 입습니까?
어떤 사람은 저보고 성경을 쉽게 설명하라고 하는데 참 난처합니다. ‘예수의 옷을 해 입으라.’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더 쉽게 합니까? 아예 원단에 ‘예수 옷’이라고 써놓고 그것을 가위로 오려서 해 입으면 그것이 예수 옷 해 입는 거예요?
성경전체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보고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지적해 주면 지적당한 그 개념이 바로 ‘너’ 개념이라는 거예요. ‘나는 누구냐?’ 할 때 ‘네가 너 보고 누구라고 말하지 말고 까불지 말고 입 다물고 내가 너보고 이렇다, 하면 그게 바로 너야.’ 그런 뜻입니다. ‘내 덕으로 네가 산다.’고 하면 너는 그런 줄 알아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 그 덕을 입는 거예요.
문둥병자가 병 낫거든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 그렇다. 헌금 많이 해서 그렇다.’ 그러지 말고 ‘나는 예수님 덕분에 살았다.’ 하는 그 자체가 문둥병자 바로 ‘너’라는 말이지요. 주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에 공통성이 있어야 돼요. 예수님 말씀 때문에 구원받았고 용서받았어요, 라는 말을 다 같이 고백할 때 그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에요. 이걸 꼭 실감하기 위해서 돼지 피나 소피를 양동이에 담아서 둘러쳐진 이 옥색 커튼에 뿌려서 부두교 무당 같은 짓을 할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교회라는 것은 그 심령에 하나님의 피 뿌림을 받은 사람이에요. 레위기라는 것은 아주 옛날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당시로 따져서도 1200년 전이에요.
그렇게 긴 세월 전의 레위기에 보면 ‘우슬초와 백향목과 홍색 실에 그 피를 적시는데 우슬초로 뿌리는 용도로서 썼다, 하는 것은 1200년 후에 예수님께서, 장차오실 말씀의 주인공 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이 말씀을 사람의 형태로서 어떻게 달성하는가를 너희들이 그 때는 알리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방금 제가 설교를 죽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세상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가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가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세상에서는 ‘누구 덕으로 누구 희생으로 산다.’는 원칙이 통하지를 않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 내내 세상에서 희생하면 그것은 쪼다입니다. 사업이 자선이 아닙니다. 자선사업도 이제는 수익사업 되어버렸어요. 이 땅에서는 남의 것을 빼먹어야 내가 삽니다. ‘몇 년 살았습니까?’ ‘60년 살았습니다.’ 60년 동안 빼먹었다는 뜻이에요. 어릴 때는 부모 것 빼먹고 청년 때는 친구 것을 빼먹고 40때는 남 등쳐먹고, 목사는 교인들 헌금 빼먹고 다 이렇게 모든 것을 빼먹은 거예요. 그게 산다는 거예요.
이렇게 모든 것을 빼먹기 위한 기술을 익히는 겁니다. 김 연아는 피겨해서 수십억의 광고를 찍잖아요. 제 아내가 동계 올림픽을 보면서 명언을 남겼습니다. ‘저희들 끼리 잘 논다.’ 저희끼리 잘 노는 거예요. 저희끼리 잘 노는데 그게 돈이 되더라는 말이지요. 희한한 일이지요. 아이스링크 만들어놓고 저희들끼리 놀고 스케이트 타고 스피드내면서 저희들끼리 돌고. 더 웃기는 것은 축구를 보세요. 공 22개 주면 자기 공 가지고 각자 놀 텐데 한 개만 주니까 싸우잖아요. 그렇게 자기들끼리 노는데 박지성이는 돈 벌어요.
세상에서 희생이라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해야 돼요. 희생? 누구의 덕? 웃기지 말라.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몸 자체가 남에게 희생 덜하기, 남의 것을 빼먹기 위해서 단련된 몸이에요. 거기에 수종 들어주는 몸이고 기계화된 몸입니다.
그런 몸을 가지고 교회 왔을 때 ‘예수님 덕분으로 예수님의 희생으로 여러분은 죄용서 받아서 구원받았습니다.’ 했을 때 적응이 안돼요. 이게 적응이 안 되니까 교회에서도 승진제도를 만들고 성과급을 하고 교회에서도 대장이 있고 그 밑에서 시중드는 종이 있어야 되고 명령 하는 사람 따로 있어야 되고 명령 받는 사람이 따로 있어야 되고, 교회 와서도 그게 오히려 맘이 편한 거예요.
‘희생하세요.’라고 하면 교인들이 듣고는 하는 말이 ‘희생하면 얼마 줄 건데요? 희생 할 테니까 뭘 줄 건데요? 희생하면 하나님께 백배로 천배로 갚아 줄 겁니까?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줄 겁니까?’ 성경자체를 주고받기로 이해하고 이용하는 겁니다. 누구 덕으로 사는 것을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익혀본 적도 없고 배워본 적도 없어요.
참 우리는 뻔뻔스럽지요. 주님의 희생을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우리보고 희생을 많이 하라는 뜻이 아니고 ‘주여, 죄인 맞군요.’를 고백하라는 뜻이에요. 문둥병자가 주님 만나기 전에 세수하고 온 것이 아닙니다. 주님 만나기 전에 세수하고 후시딘 연고 바르고 그리고 나서 오면 안돼요. 그냥 죄인 그대로 오세요. 희생도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그 모습 그대로 오세요.
내 모습 이대로, 그냥 그 자체로 주님 앞에 나오면 나올수록 무엇이 부각되느냐 하면, ‘이런 인간도 너끈하게 용서가 되는구나.’라는 주님의 은혜가 더욱 빛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둥병자와 예수님과의 만남 속에서 ‘문둥병자는 일을 잘못해서 문둥병에 걸렸고 나는 착해서 문둥병에 안 걸렸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문둥병자를 차라리 우리의 대표자로 삼아버립시다. 우리가 그 속이 문둥병자이면서도 아닌 척 하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껍데기를 확 벗겨버리고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로서 드러나는 것, 오히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여기서 희생의 의미와 긍휼의 의미를 생각해야 됩니다. 희생과 긍휼의 의미의 차이점이 뭐냐? 희생이라는 하는 것은 저 사람이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 하는 것은 희생이고 긍휼이란 것은 저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데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냥 방치해도 무방한 존재의 관계일 때 긍휼입니다. 희생이라 할 때는 ‘저것이 가치가 있다.’ 할 때는 희생이란 말을 쓰지만 전혀 긍휼이 여길만한 가치는 없는데 그냥 ‘불쌍하다’ 하는 불쌍히 여김만 담겨 있을 때 긍휼이 되는 겁니다.
긍휼로서 구원하고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에는 희생의 의미도 있지만 먼저 긍휼이 있고 그 긍휼로서 예수님이 희생하셔서 그 다음에 우리를 용서한다, 이런 순서거든요. 먼저 긍휼을 알아야 될 텐데 긍휼을 알려면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는 하나님으로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우상의 신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신을 상상해 냅니다. 인간이 신을 상상해 내면 상상한 그 순간부터 그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는 하나님일거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신을 창조해 내요. ‘하나님, 나 여기 있어요.’ 그런 뜻입니다.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항상 숨어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더라도 무방한 하나님입니다. 제가 2천년 신학가운데 제일 어려운 대목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가볍게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2천년역사 가운데 신학자들이 총동원 되어도 풀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유독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났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나타나든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정체를 드러내라.’고 요구할 자격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가짜 하나님, 우상 하나님은 인간이 부르면 반드시 그 자리에 등장을 해야 돼요. 뽀빠이, 하면 나타나야 되고 슈퍼 맨, 하면 나타나야 됩니다.
진짜 하나님은 안타나도 관계없어요. 지난 누가복음에 보면 ‘그 많은 도시에 과부가 많았어도 오직 사렙다 과부에게만 찾아왔고 그 많은 마을에 문둥병자가 있어도 한 사람에게만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보고 쉿! 이렇게 항상 나타나면서도 항상 뭘 염두에 두는가, ‘안 나타나도 되고 숨어 계시는 하나님일수도 있지만 너를 긍휼히 여겨서 나타난다.’는 식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주’개념입니다. 주개념이라는 것은 주님의 오른손개념인데 주님의 오른손에 나타난 하나님 따로 있고 그 오른손을 내미는 숨어 있는 은닉된 하나님이 따로 있어요. 이것은 일반 사람들이 아는 신이 아닙니다. 신은 모든 것을 다 드러내요. 하지만 하나님이 숨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들의 가짜 하나님에 의해서 충돌과 마찰을 유발시켜서 주님이 주님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죄인으로 취급받는 수모를 당하는 가운데서 인간이 평소에 얼마나 엉터리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가를 노출시키는 작업을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개념이고 주의 오른손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한다는 것은 건질만한 가치가 있어서 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모독한 그냥 스쳐지나가도 괜찮은 인간이에요. 우리를 구원 안 해도 관계없어요. 하나님은 구원 안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구원하지 않더라도 충분하게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서 불쌍히 여겨서 구원할 필요도 없는 인간을 사랑하고 건질 필요도 없는 인간을 건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불쌍히 여겼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을 받은 사람, 사랑을 아는 사람의 특징이에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주님께서 일부러 시험했습니다. “주여, 제 딸이 죽게 되었나이다. 구원하소서.” 하니까 “나는 개를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하는 말이 ‘그 개 여기 있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개라도 주인장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안주지만 개한테도 아들 옆에 붙어 있다는 것 때문에 혜택을 입게 한다는 겁니다. 그럴 때 ‘네가 나를 아는구나. 이스라엘 중에서 이런 믿음은 없다.’고 한 거예요.
주님께서 유난히 칭찬합니다. 어떤 백부장은 “주님이여, 주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세상에, 이런 믿음을 봤나.” 유난히도 칭찬합니다. “나라의 본 자손은 다 쫓겨나고 너 같은 인간이 천국 가게 된다.”고 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긍휼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긍휼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아직도 잘난 것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파버려야 돼요. 십자가 끝이 원래 뾰족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팍 뚫어서 구멍을 내야 돼요. 구멍을 내서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그 부분에 구멍이 펑 하고 뚫려야 됩니다. 구멍이 뚫려서 거기에 주님이 구원 안 해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찾아오셔서 구원해주려고 희생한 그 희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야 됩니다.
말로만 구원한 것이 아니고 죽음으로 구원했다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내가 죽는 것에 대해서 아까워하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거예요. 우리는 남의 목숨 죽어도 상관없어요. 서해안에 46명 빠져죽어도 내일 아니니 개의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손가락에 가시 하나만 박혀도 난리가 납니다. ‘주여, 하필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하고 있습니다.
뭐가 하필입니까? 뭐가 하필인데요? 가시 하나가 아니라 온몸에 가시가 박힌 상태가 문둥병이에요. 온몸에서 죽음의 냄새가 피어나는 겁니다. 우리는 온몸이 문둥병이 되고 온몸에 가시가 박혀야 이 몸 자체가 죽음을 위한 몸이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을 대변하기 위한, 저주받기 위한 몸으로 만들어졌고 그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찾아왔을 때 모세는 신나게 자기백성 구원한다고 애굽에 가고 있는데 그 모세를 붙잡습니다. “모세야, 이리 와.” “저는 가야 됩니다.” “이리 와. 가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너 지팡이 갖고 있지?” “예” “한번 그 지팡이를 던져봐라.” 던져 보니까 그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네 눈에는 지팡이가 그냥 지팡이로 보이지? 그러나 하나님이 동행하면 너는 너의 일을 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인간은 없고 뭐가 남아 있는가? 뱀과 하나님과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그게 뱀에 관한 사항이었어요. 그러니까 모세의 일은 인간 쪽에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고 배후에 있는 뱀과의 전쟁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모세야 네 품에 손을 넣어봐라.”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뱀 앞에서 인간이 뭐냐?’입니다. 넣어봤습니다. 넣었다 빼보니까 그 손이 하얗게 문둥병 걸린 손이 되었습니다. 기겁을 했지요. 아침에 로션을 바르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품속에 넣었다 꺼냈다는 말은 그 품 전체가 손뿐이 아니라 그 몸 전체가 다 문둥병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넣었다 꺼내 봐.” 다시 한 번 하니까 멀쩡하게 된 손이 나왔어요.
이 뱀과의 전쟁이 어떤 효과를 주느냐? ‘문둥병자일 수밖에 없는 내 백성을 멀쩡하게 새롭게 깨끗하게 정화하기 위한 전쟁의 효과를 준다.’는 겁니다. 세 번째는 만일 그 이적을 안 믿거든 지팡이를 하수에 넣으면 그 강물이 피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 세상 전체가 죽음의 세계라는 겁니다.
죽음의 세계에서 같이 저주받은 백성을 주님께서 우리가 처리할 수 없는 악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셔서 그 결과물로 더러운 자기백성을 깨끗하게 끄집어내는 작업에 모세와 오늘날 우리들을 동참시켰습니다. 어떤 경우에만 그러한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만 비로소 그것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가 어떤 사업을 한다든지 어떤 일을 할 때에 사업 잘되게 해 달라, 몸 건강하게 해 달라, 애 공부 잘하게 해 달라, 그런 것은 모세가 동행했던 하나님의 뜻은 아니에요. 하나님과 동행 없는 모세의 사적인 것으로 볼 때는 그렇게 보이고 우리가 육적으로 해석하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순간 우리에게 피 뿌림의 의미가 없어요.
우리가 피 뿌림을 받았으면 그 피 뿌림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온 현실세계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느냐를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순간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희생과 긍휼이 아니면 안 되는가를 깨닫게 하는 일들이 벌어져요. 그 중심에 누가 있느냐? 우리 자신이 서 있습니다. 남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욕심쟁이에요.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우리가 바로 욕심쟁이입니다.
남한테 지면 성질나서 밤잠이 안 올 정도입니다. 심지어 자살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인가?’ 하면서. 주님의 긍휼? 이게 언제 적 들어본 이야기입니까? 십자가희생? 교회에서도 못 들어본 이야기죠. 힘, 돈, 권력, 능력, 지력, 소유, 도대체 이런 것 외에는 생각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럴수록 이상하게 우리 속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진동을 해요. 문둥병이라는 것은 죽음의 흔적인데 그 죽음의 냄새가 온천지를 진동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인간은 죽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3절에 보면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여기서 ‘다시 산다.’는 말이 왜 나오는지를 일반인들은 도무지 못 알아듣습니다. ‘더러운 세상 그냥 저냥 살다가 죽을래. 죽고 나면 묘소나 양지바른 곳에 해놓고 애들이 정기적으로 벌초해주고 제사지내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시 산다는 것을 만약에 생각한다면 불도우자 가지고 자기무덤도 확 밀어버려야 돼요. 무덤이 왜 필요합니까? 다시 사는데. 다시 살잖아요, 다시! 우리 몸은 어떤 몸이라고요? 다시 살 몸입니다. 다시 사는데 다시 사는 것이 우리의 요구사항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우리가 기대한 것이 아니에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피 뿌림을 받으면 우리의 미래는 확정적입니다. 우리의 미래, 우리 맘대로 안 되고 우리 뜻대로 안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피 뿌림을 증거 하는 식으로 우리의 미래는 일방적으로 고정되고 맙니다. 우리의 미래는 재벌 2세 되고 빌딩 짓고 잘살고, 그것이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 조상 섬겨서 후손들 잘되는 그런 것이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 ‘왜 피 뿌림이 중요한지를, 심판 날에 예수님의 피 뿌림이 없었다면 저주받고 지옥갈 수밖에 없었다. 역시 피 뿌림이 최고다!’ 라는 쪽으로 시나리오가 확정지어졌습니다.
그 시나리오는 우리가 못 뜯어고칩니다. 이미 끝난 미래에요. 미래가 확정적입니다. ‘다시 살고.’ 그래서 다시 살 사람은 다시 사는 거예요. 그리고 영원히 지옥 불에 가는 사람은 영원히 지옥 불에 가는 겁니다. 계속 읽어보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44-47)
이 모든 계획과 시나리오는 우리가 예상한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피를 뿌릴 때부터 ‘너의 미래는 이미 결정난거야. 너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다시 살 거니까 우리 미래에 대해서 염려 걱정 붙들어 매라, 그 말은 지금 우리가 나의 힘으로 나의 노동으로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도 매일같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우리 속에서 작렬하고 있다는 그 재미로 살라는 말입니다.
어제 경주에서 야고보서 강의했습니다. 세 시간을 강의했는데 셋째시간에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지요. ‘성도의 특징은 개인적인 역사는 없고 사건이 만들어서 사건의 질이 유지되는 한 마지막 사건이 주어진다.’ 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이 뭐냐 하면 ‘주님께서 네 죄를 용서한다.’는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면 그 사건에 휘말린 우리들의 미래는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서 죽 살게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저는 ‘인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약 5:11) 할 때에 제가 부연해서 설명했듯이 욥은 별로 인내한 것 없어요. 아프면 아프다고 고함질렀고 왜 태어나게 했느냐고 고함질렀고 원망하고 그랬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욥에게 먼저 자식과 재산을 다 빼앗기게 되는 사건에 욥이 휘말렸고 욥에게 그 사건이 유지되면서 마지막에는 욥에게 복을 주는 사건이 그를 장식했습니다.
그 사이를 가지고 ‘욥의 인내’라고 한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우리 스스로 뭘 참는 것은 인내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존심이고 진짜 인내는 뭐냐? “주님께서 왜 저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저의 죄를 몽땅 씻어주셨습니까?” 하고 물으신다면 주님께서는 “그 다음사건이 있잖아.’ 그게 사건의 전부가 아니라 그 십자가사건이 계속 이어지면서 마지막에 ‘다시 살고’라는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너를 지금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육의 사람이 아니고 영적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다시 사는 그 가치에 비해서는 다 시시한 것이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들입니다. 부도가 나고 애가 아파도 병이 들어도 다시 산다는 것에 비하면 그리고 내가 피 뿌림을 받아서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내 죄가 다 씻겨 내려갔다는 이 하나님의 사건에 비하면 내가 일으키고 내 죄가 일으킨 사건은 그 앞에서 다 희석되고 다 날아가 버립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항상 썩어질 몸이고 육의 몸입니다. 행주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걸 향수 뿌리고 옷 잘 입어서 가려봐야 나중에 나이 90되어서 똥오줌 쌀 때는 기가 찹니다. 간병인만 남고 나머지는 다 도망갑니다. 목사도 코 막고 기도하고. 이게 원래 안에 다 들어 있던 거예요. 주께서 미리 다 아셨던 거예요. 우리만 모르고 나만 몰랐지요.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잘난 체한 겁니다. 괜히 잘난 체한 거예요. 주께서는 다 아시고 피를 뿌렸는데.
그 사건중심으로 우리를 재편성하시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희생 없는 힘과 힘이 마주치는 세상에 살다보니 우리 정신도 우리 영혼도 하나님덕분에 산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여, 그게 바로 죄였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다시 한 번 주님께서 흘린 십자가의 피 앞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라는 의미를 이제 알았사오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그 긍휼과 희생과 사랑을 내놓고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사건에 휘말린 주님의 작품으로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