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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온 분을 사모하며 !!자유게시판요한복음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온 분을 사모하며 !!

이름 : 구득영(IP:203.223.97.161)

201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1 (첫째 날 저녁1)

2010,01,10 강의 이근호, 녹취 한윤범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뜻에 의해서 이렇게 여러 각처에서 살던 우리 성도들을, 주님께서 뜻이 있어서 요한복음에 관해서 더 깊숙한 그 세계에 들어가도록 위해서 같이 모이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이 쓰셨기에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깨닫지 못하오니, 이 시간 우리에게 문자로서 보이지 말게 하여주시고, 오직 성령께서 어떤 의도로 요한복음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가게 하셨는지, 그 내력을 저희들이 소상히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요한복음과 목회성공 ??

아직 오지 않은 분이 있어서 시작하기가 좀 껄끄러운데, 그래도 그냥 합시다. 우리가 이 요한복음을 볼 때, 요한복음으로 목회를 성공하겠다든지, 혹은 요한복음을 가지고 우리 가정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정말 곤란하다는 겁니다. 이제 오시는데(누구지?),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요한복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겠다든지, 혹은 이 요한복음을 가지고 목회에 성공하겠다든지 하는 의도를 가지고, 즉 어떤 사적이고 개인적 문제가 있는데, 그것을 이 요한복음의 어떤 구절을 통해서 따로 은혜를 받겠다든지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식으로 이 요한복음을 접근을 하게 되면, 그것은 이 요한복음 자체가 이야기하는 것과는 전혀 달라지는데, 그러니 우리가 이 요한복음을 이용하겠다고 하면, 그것을 요한복음이 그만 거부한다는 겁니다. 즉 요한복음 자체가 그러한 것을 몽땅 다 차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대충 괜찮은 구절을 몇 개 뽑겠다는 식으로 이 요한복음을 다룬다면, 그것은 요한복음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은 다 때려치우고, 이 요한복음 자체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 창세기 - 하나님의 형상으로 !!

먼저 이 요한복음과 무엇을 대비를 해서 봐야 하느냐 하면, 그전에 창세기가 있다는 겁니다. 즉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거기서 무엇을 만드셨는고 하니, 인간을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뭔가 창세기에 보면 개입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뭔가 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 인데,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해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볼 때는, "하나님의 형상이 중요한가? 아니면 인간이 중요한가?" 라는 것을 창세기가 우리에게 요구한다는 겁니다. 즉 "너, 인간아? 네가 중요할까? 아니면 하나님 형상이 중요할까?" 라고, 그렇게 묻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너를 만들었을까? 아니면 너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동원되었을까?" 라는 것을 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뭐가 동원이 되었는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것 없이, "하여튼 나에게는 내가 중요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었든지 간에, 현재 내가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 주방장님, 제발 주방으로 가주세요 !!

예를 들어서, 아주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귀한 요리를 먹을 때 귀찮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주방장이 자기 주방에 그냥 머물러 있으면 되는데, 그런데 테이블에 나와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우리 레스토랑은 보통 레스토랑이 아닙니다. 이 음식에는 특별 버섯을 가미했고, 소스는 프랑스산 무엇을 사용했고" 등등, 그렇게 일일이 설명을 다 해준다는 겁니다.

물론 미식가 같으면 거기에 관심이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 같으면 자기가 밥을 먹을 때는 옆에 아무도 없어야 하는데, 그러니 그냥 가주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비싼 돈을 내었으면, 음식을 먹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만들고 무엇을 넣어서 이 음식이 맛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맛있어야 되는지는, 그런 것은 주방장의 관심사이지, 보통 손님들의 관심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그 자리에 선을 보려고 나왔다고 하면, 음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앞에 있는 여자를 꼬드겨야 되기 때문에, 그것이 급선무이지 음식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방장을 보고는 "주방장님, 제발 좀 그냥 들어가 주세요" 라고 하면, 그러면 주방장이 그만 시큰둥해져서 주방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 얘들아, 내가 너희들을 나의 형상으로 만들었단다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이와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들어놓고 뒤따라와서는, 창세기를 통해서, 또 모세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시는데, 즉 "인간아, 내가 인간을 만들 때 나의 형상으로 만들었단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수월하게 살게 해달라는 것뿐이지, 뭐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고, 그러니 그 형상을 본 받으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주방에서 놀면서 하시고, 그저 우리는 우리의 다급한 것, 즉 지금 살기가 힘든 것이나 해결해주시고, 그리고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 그저 그것이 우리들의 관심사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인간은 자기의 관심사밖에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 그런데, 인간에게는 언제나 요구사항이 !!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자기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형상대로 살라고 하는, 그러한 요구조건이 위에서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인간은, 그만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우리 인간에게는 나름대로의 요구사항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할 사항이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 요구사항을 다른 말로 하면 '질문' 이라고 하는데, 더 쉬운 말로 하면, 여러분이 잘 아는 소위 '기도'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질문을 우리가 만들 테니까, 다만 이 질문에 합당한 답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기도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하나님은 뭐만 하면 된다는 겁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만 해주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중간에 뭐가 빠지고 말았습니까?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올 때는 무엇을 경과해서 왔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을 경과해서, 그것을 거쳐서 왔는데, 그런데 우리 쪽에서 하나님께로 나갈 때는 갑자기 뭐가 없어졌어요? 그 형상이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 여기 다꽝 하나만 더 주세요 ??

다시 말해서, 주방장이 요리를 만들 때는 수입산 고급 버섯에 의미를 두고 만들었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 음식 안에 있는 버섯보다는 상치나 시금치에 더 관심이 있어서, "시금치 하나만 있으면 더 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제가 요리사라고 해도 "참, 메인 요리가 맛있습니다. 이것을 하나 더 줄 수 없습니까?" 라고, 그렇게 나오면 기분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꼭 요리의 진수를 모르는 인간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여기 다꽝을 하나 더 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그냥 다른 곁들이 반찬을 맛있다고 달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은 시중에서 사오는 것이지, 그곳에서 만드는 게 아니라는 소리를 대전강의를 하면서인가 들었는데 말입니다. 물론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냥 지나가고 말입니다.

◈ 하나님 - 내가 준 유사성이 있는가?

아무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올 때, 반드시 이렇게 거쳐서 온 것이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 이라 하고 보니, 사실상 참 어려운 말인데,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복사, 즉 카피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안에는 뭐가 있는고 하면, 역시 어려운 말인데, '동질성'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복사를 했다는 말은, 원본하고 복사물하고 유사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유사성, 즉 비슷한 게 없으면 복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만 찢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준 흔적(유사성)을 갖고 있는가?" 라는 하면서, 그 유사성을 유심히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마귀가 좋아하는 짓을 해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그만 유사성을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흙으로 바꿔버린다는 겁니다. 즉 그냥 없었던 것으로 말입니다. 즉 "우리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하자" 라고, 그렇게 없는 것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면 그냥 '흙'으로 !!

어렵게 이야기를 해서 다음과 같은데, 인간이 만약에 하나님 형상을 상실하면, 그러니까 카피가 되지 않으면 그 인간을 바로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그냥 흙으로 보내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흙으로 보낼 때,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죽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흙으로 보내는 것도 역시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 사이의 언약에 의해서, 즉 계약에 의해서 보내는데, 즉 "만약에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아니하면 흙으로 보내겠다" 라는 것이, 그 계약내용에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저도 들었던 이야기인데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타이거 우즈가 자기 부인하고 결혼하면서 "당신이 10년 동안 살아주는 조건하에 위자료를 주겠다" 라고 계약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10년 동안은 무슨 짓을 해도 위자료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부인은 죽으나 사나 10년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 지금은 10년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래서 지금 위자료는 한 푼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결혼할 때 계약에 10년 동안 살아주는 조건하에서 위자료를 주게 되어있으니 말입니다.

◈ '내가 여기 있네' 아니라, '여기 있네. 내가'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그 하나님 형상에 대한 내막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냥 "내가 여기 있네" 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 있네. 내가" 라는 식으로 한다는 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내가 여기 있네" 라고 한다면, 여기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누가 나를 여기에 있게 했다" 라고 하는, 즉 '누가' 라는 것을 도입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여기 있네. 내가" 라고 하게 되면, "내가 여기 있음" 이라는 에만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라는 것이 굳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인데, 그러니 모르면 그냥 넘어가면 되는데, 아무튼 그런 게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인간은 "여기 있네. 내가" 라는 것으로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서 뭘 생략을 하느냐 하면, 지금 잘 들어야 하는데,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여기 있네. 내가" 는 것에서 '내가' 라는 것을 지워버리면, 그러면 남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있다, 내가 배고프다, 내가 하고 싶다, 내가 웃고 싶다, 내가 즐기고 싶다" 라고, 즉 "즐기고 싶다. 내가", 그리고 "TV를 보고 싶다. 내가" 라는 것에서 이' 내가' 라는 것을 생략해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 된다" 라는 말입니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됩니까? (예, 안 됩니다. ㅋㅋ)

예를 들어서, "너는 왜 사느냐?" 라고 했을 때, "내가 살고 싶으니까 삽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 위쪽에 보면, 즉 "내가 여기 있네" 라는 것에서, 그러면 당연히 "내가 여기 있으니, 그러면 누가 있게 했느냐?" 라고, 그렇게 질문이 된다는 겁니다. 즉 "누구야? 나를 이런 식으로 살게 하는 자가" 라고, 그렇게 묻는 대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 누구야? 나를 이런 식으로 살게 하는 자가 !!

다시 말해서, "그것이 부처인지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나를 힘들게 하는 게 누구야? 빨리 나와.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내가 이렇게 올바르게 열심히 사는데, 누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도대체 누구야? 빨리 나와" 라고 하면서 따지는데, 바로 그러한 질문을 누가 만든다는 겁니까? 자기 자신이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그런 질문을 언제 만듭니까? 자기가 살기 어려울 때, 즉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지를 않고 너무나도 힘들 때, 그렇게 뭔가 일이 자꾸만 꼬일 때, 또한 몸이 엄청 아플 때, 그리고 생빚을 내서 하는 개척교회가 제대로 안 될 때, 그렇게 해서 빚만 자꾸 늘어날 때, 바로 그럴 때 우리 인간은 질문을 자기가 만든다는 것입니다.

◈ '나' 자신이 곧 정답 !!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창세기부터 우리 인간에게는 이렇게 문제가 있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질문을 만들 자격도 전혀 못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질문을 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 해답이라는 것도, 우리 인간이 그런 답을 얻으려고 하면 안 되고, 현재 우리가 움직이는 그 자체가 정답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정작 하나님의 그러한 질문을 모르고, 우리가 그냥 살아가니까 어떻게 됩니까? 자기 자신이, 즉 우리 자신 그 자체가 답인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만든 질문에 대해서 답이 따로 있는 줄로 알고 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 인간은 '은혜'의 항목을 따로 만들어서 !!

오늘 오후시간에 그런 설교했는데, 복을 달라고 할 때는 사람들은 복을 재산인 줄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복을 받아서 자기 재산으로 만들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성경에서 복이 뭐냐 하면, 복이 오게 되면 "지금 현재 너에게 있는 것이 복이야" 라고, 그렇게 지적하기 위해서 복이 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복이 와서 복으로 변화가 되는, 즉 "아하, 이 자체가 곧 복이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복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진도를 너무나 빨리 나갔지 싶은데, 그러면 3일 동안 견디기가 어려운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성도는 자기가 있는 존재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옥에 갈 사람들은 그 자체를 은혜로 여기지 않고, "이것이 은혜구나" 라고, 그렇게 '은혜' 라는 항목을 따로 만들어서, 그런 질문을 만들어서, 즉 "하나님, 이런 은혜를 주실 때만 나는 은혜라고 간주하겠습니다" 라고, 따로 그것을 고집한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놓치는 인간 !!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 자기 심장을 뛰게 해주고, 부모도 있게 해주고, 햇빛도 있게 해주고, 비와 폭설도 내리게 해주는, 그렇게 모든 존재 자체가 은혜의 바탕으로, 즉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우리가 핑계치 못한다는 사실을, 그것을 자꾸 놓쳐버리고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도 마찬가지인데, 성도도 역시 매일같이 놓쳐 버리는데, 그냥 주신 은혜를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가 받은 은혜를 은혜가 아니라고 여기고는, 자기에게 아쉬운 것을, 그것을 집에 가서 연구를 한다는 겁니다. "내일 새벽기도 때 어떤 것을 구할까?"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에게 필요한 항목을 하나님께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 여기, 소주 한 병만 주소 !!

예를 들어서, 가게를 운영할 때는 물건의 구색을 맞춰야 되는데, 그래서 손님이 "소주 한 병만 주소?" 라고 해서, 그래서 참 이슬을 내주었는데, 그런데 그 손님이 "그것 말고 다른 소주 주소?" 라고 한다면, 그래서 다른 소주를 주지 못했다고 하면, 즉 구색이 안 맞으면 손님이 떠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살펴서 모든 구색을 맞춰야 되듯이, 그렇게 기도하기 전에 먼저 문제를 자기가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대로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그런 하나님의 의견과 하나님의 뜻이 그만 홀라당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왜 이러한 이야기를 지금 하는고 하니, 바로 그러한 이유가 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밝혀진다는 말입니다.

◈ 주체 - 동사를 명사로 !!

어쨌든 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자기의 형상대로 만들었는데, 그런데 인간은 아까 말한 "여기 있다" 라는 것, 그것을 '동사' 라고 하는데, 즉 무엇무엇을 하고 싶다고 하는 것, 즉 "묻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축구를 하고 싶다" 등등, 그런 것을 '나'로 만들었으니, 그것을 두고 '명사'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동사를 명사로 만들 때, 이렇게 여기 있는 이 덩어리를,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주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나' 라는 것인데, 이러한 '나' 라는 덩어리, 그것이 전혀 안 깨어진다는 말입니다. 아주 단단한데, 마치 암석 같다는 겁니다. 5000원 짜리 사파이어 같은데(?), 얼마나 단단한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누가 강력한 꼬챙이로 쑤셔줘야 깨지지, 즉 히브리서 4장에 있는, 그런 말씀이 와서 쪼개줘야 된다는 겁니다.

◈ 인간은 처음부터 '말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

여러분, 우리 사람은 '가라' 라고 한다고 교회에 가는 게 아닌데, 즉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고 해서 예수님이 믿어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말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을 자를 수 있는 것도 오직 말씀으로만 단층촬영을 하듯이 해야, 그렇게 해야만 쪼개진다는 말입니다. 마치 정육점의 톱날이 고기를 자르듯이, 그렇게 잘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이 아니면 잘라지지 않는데, 그런데 사람에게 만약에 말씀이 아니고 그냥 말, 즉 명령이 와버리면, 사람은 그것을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명령을 준 사람을 모독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또 다시 어려운 것이 나오는데, 즉 말씀대로 지켜줌으로 말미암아서 자기에게 잔소리하고 명령한 사람의 안면을 완전히 박살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경상도 말로 "케라, 다 지킬 게" 라고 하는데, 그렇게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순종을 요구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그런 수작을 부린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이 말입니다. 그러니 정말이지 못 됐는데, 굉장히 못 됐다는 말입니다. 또한 교회가 그것을 이용하고 말입니다.

◈ 하늘의 법은, 복종을 하지 않음으로서 !!

그러므로 하늘의 법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복종을 하지 않음으로서 법을 지키는 건데, 이건 또 무슨 희한한 소리인고 하니까, 하늘의 법이 우리를 죄인이 되도록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불순종함으로서 현재법을 지키는 현장을 생산해낸다는 말입니다. 이런 영양가 있는 소리가 날이면 날마다 나오는 소리가 아니니, 잘 들어보시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은 법에 복종을 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서 법이 법다운 것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는 하나의 그릇, 즉 도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러분은 "목사님, 법을 지키지 말까요?" 라고 하는데, 우리는 법을 지켜도 지킨 것이 되고, 법을 안 지켜도 지킨 것이 되니까, 그러니 제가 여러분에게 "니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러나저러나 법은 끄떡없으니 말입니다.

◈ 법의 내용조차도 모르는 인간 !!

카프카의 '유형지' 라는 작품에 보면, 카프카는 그 글을 쓰면서 우리 인간이 법의 내용을 모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즉 징벌이 주어졌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 사람의 죄에 대해서 바늘로 찌르면서 기록하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의 죄의 내용이 그 사람의 육체에 박히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먹물로 인해서 바늘이 자기의 육체에 글씨를 남기기 전까지는 본인도 무슨 죄를 졌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왜 우리가 TV를 보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판 위에다 바늘로 마구 찍어서 정보를 입력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반도체에 내용이 입력되듯이, 우리가 바로 그런 반도체 칩이라는 겁니다. 즉 뭔가 와서 부딪쳐서 징벌을 내리게 되면 "아, 내가 이런 죄를 짓고 있구나" 라는 것을 그제야 비로소 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법의 밥인데, 즉 법이 지나가는 그런 바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법을 지키는 것도 누가 지킵니까? 법을 만드신 분이 법을 지키는 것이지, 법을 만들지 못한 사람은 법을 지킬 수 있는 힘도, 권한도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법을 만드신 분에게 일방적으로 당함으로서 법의 지킴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다시 정리를 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살펴보겠는데, 여기에 이렇게 "내가 여기 있다" 라고 하면, 여기서는 동사가 주체가 되는데, 그리고 이 동사 다음에는 명사가 되고, 그래서 명사가 주체가 되는데, 그런데 만약에 이 주체에 문제가 생겼다면 어떻게 될까요? 즉 "살기 힘들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명사를 통해서 "누구야? 나를 힘들게 하면서" 라고 하는데, 여기서 동사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새로운 힘을 받아서 지금보다 형편이 나아지기를 바라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서 또 다시 나아가게 되면, 즉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하면, 다시금 그 은혜가 다시 굳어져서 자기 주체의 하나의 요소로서 딱딱하게 되어서 들어온다는 겁니다.

◈ 동사→명사, 또 명사→동사, 또 동사→명사 !!

그렇게 딱딱하게 들어오면, 그런데 뭔가 주체가 문제가 있어서 기계가 제대로 안 돌아가면, 즉 흐물흐물해지면 딱딱한 주체가 다시 동사로 변하는데, 그렇게 동사로 변하면 또 여기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다시 딱딱한 주체로 바뀌고, 자꾸만 그런 식으로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데,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형상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 어디에 들어올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아라" 라고 할 때, 그것이 신약성경에서 에베소서에 나오는데, 즉 "빛의 자녀들아,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아라. 너희는 어둠에 속하지 않았다" 라고, 그런 이야기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으려면 이러한 인간의 자리를 떠나야 되는 겁니다. 인간의 자리를 떠나서, 이쪽 하나님의 형상 자리에 포섭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함몰되어야, 즉 정복을 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엡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바로 그럴 때, 즉 하나님의 형상 자리 위로 올라갈 때, 그때야 보이는 하나님은 어떠한고 하니, 바로 저 밑에서, 즉 형상 밑에서 불평불만이 가득해서 외치던 하나님하고, 여기 이쪽 위에서 보는 하나님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여기 위에서는 감사밖에 없고, 그래서 감사와 찬양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 선지자 이사야의 경우에 !!

그렇게 하나님 형상대로 했던 여러 가지 피조물 중에서, 대표적으로 천사가 있는데, 그런데 이 천사는 육체는 없는데, 에스겔에 보면 하나님 형상대로 여러 가지 형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천사가 하는 일이 뭡니까? 이사야 6장을 보면, 천사가 날개 6개를 가지고서 뭘 합니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천사는 하나님이 주신 동사밖에 없다는 겁니다. 즉 자기 주체가 되는 명사는 거기에 없다는 말입니다. 즉 "뭘 할까요" 라는, 이것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냥 동사인데, 즉 "주여, 뭘 할까요" 라는 것뿐이지, "내가 뭘 가질 수 있습니까? 무엇이 내 것입니까? 어디서 어디까지 내 것이고, 어디까지 저 사람의 것입니까?" 라는, 그러한 구분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만든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여, 뭘 할까요?" 라는 것이 디모데전서에서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라고 하고 말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누가 가서 복음을 전할꼬?" 라고 했을 때, 이사야 선지자가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갈게요" 라고 했는데, 그럴 때에 이사야 본인의 뜻은 그야말로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자기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말입니다.

◈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예수님을 미리 !!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네가 가봤자, 그들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를 못할 것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그렇게 주어진 할당 업무는 누가 할당을 했습니까? 이사야 자신이 지어낸 건가요? "아마 내가 가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야"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즉 이사야가 "제가 할게요" 라고 했을 때, 그렇게 자기가 감당해야 될 업무지침은 이미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예수님 사이에 결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사야는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먼저 맡아서 하면 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그들이 알지 못하는" 바로 그런 일, 그것이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똑같이 벌어질 일인데, 그렇게 이사야는 자기 백성들에게 오실 메시아를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동사라는 말입니다.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그런데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가끔씩 명사 쪽으로 오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는데, 즉 "주님, 나 못하겠습니다. 더러워서 못해요. 바른 소리하는데 욕한다고 하지 않나" 라고 말입니다. 아마 우리 노회 목사님들 가운데서 그런 분들이 많지 싶은데 말입니다(ㅋㅋ).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렇게 하다가 뒤에 단서가 붙는데, 즉 "더러워서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고 본인은 싶지만, 성령이 임하니까 어쩔 수 없이 "제가 하겠나이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혼자 삐쳤다가 혼자 깨졌다가 그야말로 난리를 치는데, 누가 옆에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잘못했다고 회개를 하고 말입니다.

◈ 요한복음 - '이적층'에서 '표적층'으로 !!

이러한 현상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바로 이렇게 인간 층에서 위층으로, 즉 형상의 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두고서, 그것을 이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적층에서 표적층으로 옮겨간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적층' 이라 하는 것은 대전강의에서 제가 이야기를 했었는데, 즉 초대교회 때에 어떤 소문이 돌았느냐 하면, 사도에게 가면 교회에 가면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도 고치고, 귀신이 떠난다는 소문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도가 있는 데로 몰려왔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전하실 때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는데, 즉 예수라는 말만 들어도 모조리 다 몰려와서 혜택을 입겠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 혜택이라는 것은, 본인이 원했던 것을, 즉 본인들이 아쉬워했던 것을 그들은 찾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 왜? 왜? 왜 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데, 즉 그들은 오병이어를 하고 아랫배가 배불렀는데,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왔고 말입니다. 그렇게 따라왔을 때 예수님께서 휙 돌아보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는데, "왜? 왜? 왜 왔는데?"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 예수님 : 왜? 왜? 왜 왔는데?
* 무리들 : 저, 거시기...
* 예수님 : 떡을 먹고 배불렀구나.
* 무리들 : 예, 맞습니다.
* 예수님 : 기껏 찾는 것이 썩어질 것, 바로 그런 것을 원하는구나.
* 무리들 : 그냥 썩은 거라도, 여기 귤이라도 하나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예수님 : 그러나 내가 주는 이적이 아니고, 내가 주는 것은 표적이다.
* 무리들 : ? ? ?

그렇게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이적이 아니고 표적인데, 즉 아래층인 인간 층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에 서있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표적층에 들어오게 되면, 놀랍게도 이적층과 표적층은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가 되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는 서로 반대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기적을 보여줘" 라고 하는 것은 기적 층인데, 그렇다면 표적은 뭡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밖에 없다. 내가 죽어서 사흘만에 살아나리라. 이것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이다" 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그들은 원하는 것은 결코 표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눅 11: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눅 11: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 인간들은 예수님과 소통하기를 원하지만 !!

그러니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서로 같은 아래층에서, 즉 "예수님 당신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니까, 우리 인간들끼리 소통하는 것으로 그렇게 서로 소통하자. 그러니 소통할 수 있는, 즉 우리에게 아쉬운 걸 달라. 그것 주면 믿겠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소통이라는 주제가 들어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원하는 기적을 베풀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표적층을 경과하지 아니하고 바로 하나님 층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하나님은 계시지도 않은 하나님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적을 받고 지옥으로 가고, 그야말로 꼴 좋은데, 참으로 희한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 누가복음 17장의 문둥이 열 명의 경우에 !!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문둥이 열 명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서 아홉 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니 눈을 뜨고 지옥으로 가는 것이나, 눈이 감긴 채 지옥으로 가는 것이나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즉 지옥에 가보면, 동쪽 문으로 들어오나 서쪽 문으로 들어오나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안에 들어오면 전부가 다 사우나이고 얼마나 뜨끈뜨끈한지 모르는데, 마치 제가 머무는 205호 같다는 겁니다(ㅋㅋ).

(눅 17: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 17: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 17: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러니 바로 창세기를 진짜 수천 번을 읽어도 그 보는 관점이 "여기 있다. 나", 또는 더 나가서 "내가 여기 있는데, 왜 힘든가? 누구야.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게. 책임져라" 라고 한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니가 선악과 따먹었잖아"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이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 왜 심어놨어요?" 라고 하는데,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 만날 묻는 게 바로 그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뭐라고 합니까? '선악과' 라는 위험한 요소를 제거해줘야 그게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냐는 겁니다. 즉 "아니, 세상에 그 좋은 에덴동산에다 지뢰를 묻어놓고는, 그리고 그 지뢰를 밟았다고 책임을 우리가 다 져야만 된다고 하고, 물론 국가에서 연금도 안 주고 말이다. 지뢰를 당연히 제거해줘야 하지 않는가? 아니, 애들이 노는데 가시덤불을 만들어 놓고는, 애들이 다치니 애들에게 책임을 지우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깡패 같은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라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니가 말이 안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칼 바르트는 여기에 대해서 "바로 그런 식으로 묻는 놈을 위하여 지옥을 만들어 놨다" 라고 했는데, 물론 그것은 칼 바르트가 선악과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핑계 삼아 이야기한 것이지 싶은데, 왜냐하면 정작 본인은 지옥을 잘 믿지 않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요한복음 - 이적층에서 표적층을 경과해서 하나님께로 !!

아무튼 이적층에서 표적층을 경과해서 하나님 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 전체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물론 요한복음에서 표적이 7개인지 8개인지, 또 그것을 가지고 다투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은 헤아리는 사람들 마음이니, 그런 것은 중요한 건 아니고, 하여튼 이 요한복음은 표적과 표적의 연결고리로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표적' 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눈에 보이는, 즉 "여기 있다. 내가" 라는 것에서부터는 하나님을 찾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부터 문제를 끄집어내든 답을 끄집어내든, 그것은 문제도 전혀 문제 같지를 않고, 또한 답도 전혀 답이 아니라는 겁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창조의 원리에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기도해놓고, 물론 그 응답도 자기 마음대로 응답이라고 규정을 짓는데, 즉 응답도 아닌 것을 두고 응답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

그래서 실컷 응답을 하고는 문둥이 아홉 명은 지옥에 가고 한 명만 예수님께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즉 "주여,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보통은 눈을 떴으면 "아, 내가 잘났군요" 해야 되는데, 하지만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물고기를 잡아주니 뭐라고 합니까? "주여,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눈을 뜨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것으로 표현을 하자면, "내가 아래층에서 하나님 이용해서 나의 아쉬운 것만 챙기려는, 그런 이적층에만 머물러있으면서 나밖에 모르는 딱딱한 주체, 그것이 곧 저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라고, 그렇게 고백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을 했다고 해서 표적층으로 올라가는 것은 아닌데, 즉 그것을 했다고 구원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일의 시작인데, 즉 그렇게 하면서 일이 슬슬 개시가 되는, 즉 "드디어 조짐이 왔구나"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신약의 베드로, 구약의 다윗 !!

그러므로 베드로가 자기가 겪어야 될 그 죄라는 것은 아직도 멀었는데, 왜냐하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법이 되기 때문에, 그 법과 접촉하는 순간 순간에 베드로의 육신에서는 "무엇이 죄인가?" 라는 것이 바늘로 새겨져야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끝에 보면, 베드로 전체가 바로 죄 덩어리임이 드러나는데, 즉 베드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배신이란 배신은 모두 다 하고, 즉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는 모두 다 지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구약에서의 다윗처럼 말입니다.

◈ 하얀 도화지에는 그림이 그려져야 !!

오늘 여기 이 장소에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계시지만, 보통 야외에 나가서 캔버스를 걸어놓고 붓을 들고서 그림을 그리는데, 그런데 화선지나 도화지가 바람에 자꾸 펄럭이게 되면 어떻습니까?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단단히 고정을 시켜놓고 그림을 그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하얗던 도화지가 나중에 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인해서 시커멓게(?) 되는데, 그런데 여전히 그 도화지는 자기가 하얗다는 것을 고집하는데, 즉 "나는 하얗다, 나는 착하다. 나는 깨끗하다.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 나는 성령을 받아서 새사람이 되었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만날 자기가 하얀 것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표적층으로 데려갈 때는 그 전체를 아주 시커멓게 만들어서 데려고 간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거기서 무엇이 기다리기 때문입니까? "주님은 의인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즉 시커멓게 되어야 예수님의 준비된 복음이 가치를 발휘한다는 말입니다.

◈ 내가 십자가를 믿어줄 테니 ??

그런데 아래층에선 뭘 노리느냐 하면, "내가 십자가 믿어줄 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내놓을 거야? 안 내놓을 거야?"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은 자주 나오는 것이 아니니 노트에다가 좀 적어놓으면 좋은데(ㅋㅋ), 즉 "내가 무엇 무엇을 해줄 테니,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렵니까?" 라고, 그렇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무엇 무엇에다가 어떤 것을 집어넣습니까? 즉 "내가 십자가를 믿어줄 테니, 내가 회개를 해줄 테니, 내가 교회에 나가줄 테니, 내가 반성을 해줄 테니, 내가 성령을 받아줄 테니"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요구하는데, 즉 "나를 천국에 보내주시고, 복을 받게 해주시렵니까? 부모님을 교회에 나오게 해주시렵니까?" 라고, 그런 것들이 붙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흥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 뭐가 아쉬워서 사람하고 흥정을 하겠습니까? 그야말로 웃기는 짬뽕인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하고 흥정을 할 것 같으면 아예 사람을 만들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경찰서에서 범죄자가 죄를 지어놓고 형사하고 흥정을 하는데, "나를 풀어주면 마약 두목을 알려줄 테니까, 감량해서 풀어주시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두목은 잡혔는데, 그러니 그 두목이 어디 있는지 아는데 굳이 흥정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형사는 "여기, 죄 하나 더 추가요" 라고 하면서 꿀밤만 하나 더 맞는다는 겁니다.

옛날 어떤 영화를 보니까(투캅스?) 기록지에다가 뭐를 쓰는 게 있는데, 그래서 성질이 급한 취조원이 그것을 가지고 범인의 머리를 친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에는 컴퓨터로 치기 때문에 자판으로 쥐어박는지 모르겠는데, 컴퓨터로는 때릴 수가 없을 것이고 말입니다(ㅋㅋ).

◈ 하나님은 인간의 행세에 관심이 없어 !!

아무튼 이렇게 "내가 뭐뭐를 해줄 테니까,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렵니까?" 라고, 인간들이 이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행세에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즉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관심이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어차피 선악구조에서 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바로 그런 선악구조에 있는 인간을 생명구조로 빼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선악적으로 더 선했느냐? 더 악했느냐?" 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주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행위에서 대해서, 자기 행세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겁니다. 말을 하고 보니 이런 것이 바로 기쁜 소식인데 말입니다(ㅋㅋ).

그렇게 평생토록 교회에 속아넘어가서, "그런 짓을 하니까 저주를 받지. 그런 짓을 하니까 벌을 받지. 그런 짓을 하니까 자녀가 대학에 또 떨어졌지. 그런 짓을 하니까 몸이 아프지" 라고, 그렇게 매일같이 교인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서 바짝 신경을 쓰도록 세뇌를 받았다는 겁니다. 정작 주님은 관심도 없는데 말입니다. 물론 목사들이 관심이 있는데, 압력을 가해야만 돈이 나오고, 눌러야 지갑이 열리는데, 즉 지갑과 누르는 것은 비례한다는 겁니다. 바짝 눌러서 압력을 가해야만 지갑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 우리교회는 누르는 게 없어서 ??

그런데 우리교회는 누르는 게 없으니까 지갑이 안 열리는데(ㅋㅋ), 배짱이라는 겁니다. 전부가 다 말입니다. 벌써 5년째 11시 반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점점 늦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11시 반에 왔다가, 다음에는 11시 45분에 나오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저는 그에 비례해서 설교를 늘려버리는데,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설교 하나 더 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여기에 성재필 성도가 있는데, 그분이 처음에 우리교회에 나올 때는 다른 교회처럼 10시 반에 오는 줄로 알고 자기도 그렇게 나왔는데, 그런데 분위기 파악이 하고 나서 보니 10시 반에 오는 것은 자기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11시가 되어서 오는데, 슬슬 분위기에 익숙해진다는 말입니다. 즉 몸에다 바늘로 벌써 찍혔다는 겁니다(ㅋㅋ).

◈ 이적층 - 내 몸만 편하면 끝 !!

아무튼 여기 이적층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사는 게 힘드는데, 이미 주님의 저주받은 상황 속에 저주받은 몸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러한 이적층의 관심사는 자기 몸 편한 것인데,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자기 몸 하나 편하게 해주면 그게 구세주라는 겁니다. 부처고 공자고 뭐고 따지고 묻지도 않고 말입니다. 하여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자기 몸만 편하게 해주고, 자기 소원대로 이루어주고, 자기의 비전과 꿈만 이뤄주면 무조건 좋은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 이적층에서 응답을 받는데 있어서 항상 거래와 흥정이 있게 되는데, 그러니 행함이라는 겁니다. 즉 "내가 뭐뭐를 해줄 테니까, 그 반대급부로 내가 원하는 걸 내놔라" 라는 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인간들이 요구하는 게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선악논리가 개입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 뭘 요구하느냐 하면, "내가 악에서부터 점차 멀어지고 선한 쪽으로 갈 테니까, 그 반대급부로서 선한 자에게 주는 축복을 나에게 보상해달라" 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술을 끊는다든지, 혹은 담배를 끊고, 또 예배시간에도 일찍 오고, 그리고 십일조도 제법하고 말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해줄 테니까, 그러나 그 대신에 자기가 원하는 걸 달라는 겁니다.

◈ 과연 천국이 '내 나라인가?

여기에서 이렇게 "내가 뭔가를 해줄 테니까"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의 인간의 본성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하지만 여기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내' 나라이지, 그것이 무슨 천국이고 무슨 주님의 나라이냐는 말입니다. 즉 지상의 나라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것이 왜 있어야 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빠져있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래서 생각한다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내' 가족이 원하는 것, 또한 '내' 자식이 원하는 것, '내' 남편이 원하는 것 등등, 자꾸만 그렇게 '나' 라는 것을 집어넣는다는 말입니다.

◈ 아니, 설교는 하고 나서 설교문을 !!

제가 주일 오후설교를 마치고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설교를 마치고 그것을 요약해서 A4 두 장으로 집에 가서 대충 정리를 하는데 말입니다. 흔히 목사님들은 미리 정리를 다 해놓고 설교하는데, 그런데 저는 설교를 다 해놓고 그것을 나중에 녹취를 한다는 겁니다. 설교문 작성부터 먼저 하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저는 왜 그렇게 하는고 하니, 토요일에 설교문을 작성하게 되면, 그것은 토요일에 은혜를 받은 것이지 주일날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정작 주일에는 자기는 은혜를 못 받았는데, 다른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말씀은 서로가 그 시간에 다같이 봐야 되니, 토요일 것은 잊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요한복음을 공부하고 있는데, 그러면 같이 말씀을 보면서 같이 은혜를 받는다는 겁니다. 저만 어제 미리 준비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고 난 뒤에는 설교문을 작성하는데, 그런데 그때는 설교시간에 하지 않은 내용도 들어가는데, 그래서 여러분이 그것도 보셔야 된다는 말입니다.

◈ 복은 자기 혼자 받아야 !!

오늘 오후시간에 복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복을 같이 받으면 복이 안 된다" 라고 하는데, 우리 인간의 심리가 말입니다. 즉 "복을 주옵소서" 라고 해서 복을 줘버리면, 사람들은 복을 받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대번에 "나만 받았는가봐" 라고 하는데, 즉 남하고 같이 받으면 복을 받지 않았다고 여긴다는 말입니다. 즉 남과 같이 받으면 신경질이 나는데, 그러니 자기만 특별나게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말이 되는 것이, 여러분들이 만약에 변호사를 일 년에 26만 명을 뽑는다면 그게 고시가 되겠습니까? 원서만 내면 모두 합격인데 말입니다. "누구네 가문 삼대독자가 고시에 합격했다" 라고 플랜카드로 붙이겠습니까? 원서만 내면 다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 돌출이 곧 주체 !!

그러므로 반드시 남들이 안 가졌는데 자기만 가질 때, 거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나' 라는 존재의 의미가 보편화에 함몰되지 않고 돌출이 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돌출을 철학자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 사회에서 말하는 '주체'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나' 만의 세계인데, 왜냐하면 '나' 만 돌출이 될 때니까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회사에서 계장이 10명 가운데서 과장으로 진급이 10명이 모두 다 되어버리면, 그러면 축하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이번에 계장 10명 가운데서 과장된 사람이 단 한 사람일 때, 그러면 다른 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과장님, 이런 입에 잘 안 붙는다. 그래도 과장님, 축하합니다" 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무슨 뜻입니까?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되는 건데" 라는 의미인데, 즉 일종의 시기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주체'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같이 있을 때는 주체가 아니고, 마치 돌고래가 물 속에서 튀어나오듯이 톡 튀어나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 축복은, 그냥 나만 튀는 것 !!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상한 버릇이 있는데, "야, 올해 같이 취업에 힘든 해가 없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내년이 되면 후배가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그래도 형님 때가 제일 한창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때에 비하면 훨씬 수월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여튼 자기 때가 제일 힘들고, 자기 때가 제일 살기 어려웠었고, 아무튼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냥 다같이 묻혀가기가 싫다는 말인데,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는 튀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축복이란 뭐냐 하면, 그냥 튀는 겁니다.

사람들이 도박을 하는 이유가 바로 튀려고 하는 것인데, 그걸 '존재의 의미' 라고 하는 겁니다. 뭔가 튀려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돈을 보고 도박하다가, 나중에는 자기가 다 쓸었다는 것에, 즉 상대방을 꺾고 자기가 거기에서 돌출했다고 하는, 바로 그 쾌감 때문에 도박에 빠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직도 술을 먹는 이유에 대해선 저는 모르겠는데, 왜 술은 혼자 먹어선 안 되는지 말입니다. 왜 다같이 먹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다같이 망함으로서, 자기가 망하는 것에 대해서는 같이 섞이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냥 없는 걸로 여기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케 하옵소서 !!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줄 테니" 라고 하시는데, 즉 정작 그렇게 원하는 '나'를 무엇으로 바꾸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원하는 그 해답은 그렇게 자기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하시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형상'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제 모든 것을 드릴 테니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케 하옵소서" 라고 하는, 그 정답 외에 다른 것은 하나님이 성경말씀에서 준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에 가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그냥 받아버리면 또 자기가 형상을 가진 것이 되기 때문에, 여기의 이적층이 아니라 표적층에서 제공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표적층에 들어가 버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자가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앞에 등장을 하는데, 그분은 우리의 위해서 피 흘리신 분이고, 우리는 그분 앞에서 시커먼 죄인으로 서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 그분 앞에 죄인으로 사는 것, 그 자체가 !!

그렇다면 이렇게 죄인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 자체가 이미 형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형상을 형상답기 위해서는, 그분 앞에 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그분 앞에 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 하나가, 그것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영원한 계약, 즉 언약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언약을 우리가 지킨다고 하면 어떤 논리에 빠지느냐 하면, "하나님. 내가 이 언약을 지켜줄 테니, 그 다음에 내가 원하는 걸 주세요" 라고 되어버리면, 그것은 앞에 언약을 지킨다고 하는 그 언약은 착각한 언약, 즉 잘못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제가 십자가 믿어줄 테니까, 저에게 이런 이런 것을 주세요" 라고 한다면, 그런 십자가는 전혀 엉터리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 제가 십자가를 믿어줄 테니까, 저를 구원해주세요" 라고 한다면, 그것도 전혀 구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10원도 아니고 8원도 아니라는 말입니다(ㅋㅋ). 당연히 "제가 회개를 해줄 테니, 저에게 이것을 주세요" 라고 한다면, 그것도 역시 회개가 아니고 말입니다.

◈ 이제는 주님의 소유로서 !!

그러므로 "내가 뭘 할 테니" 라고 하는 그 자체도 없애야 하는데, 그렇게 "내가 뭘 드릴 테니" 라고 하는, 그것을 없애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주께서 나를 아예 삼켜버리소서" 라고 하는 겁니다. 즉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불거리는 '나' 전체가 아예 주님의 소유가 되게 해달라고 하는, 그렇게 해서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입니다" 라고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내가 살고 죽는데 있어서 내가 관여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소관이지 저의 소관이 아닙니다" 라고 하게 될 때,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즉 그 형상을 입은 존재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고백이고 말입니다.

◈ 이미 구조가 죄를 짓기 이전에 !!

그것이 바로 창세기 1장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인데, 이것은 인간이 죄를 지을 때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죄를 짓기 이전에 주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하는, 바로 그런 명령부터 시작해서 이미 확립이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러한 구조가 이미 말입니다.

그런 선악과를 인간이 따먹음으로 말미암아서 더 복잡하게 되었는데, 즉 일이 더욱 꼬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인간 배후에 있던 악마까지, 뱀까지 거기 하나님의 형상 만들기 작업에 드디어 참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우리는 악마의 종이 되어서, 이제는 악마와 같이 한 패거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예수님에게 대드는 적의 입장에, 즉 하나님의 원수입장에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 왜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인가?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원수 된 자를 위해서 주께서 화목제물로 피를 흘리셨으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 피로 말미암아서 원수가 된 자도 뭐가 된다는 겁니까?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말은 무슨 의미인고 하면, "도대체 니가 어떻기에 주께서 피를 흘려야만 했는가를 늘 생각해 보라" 라는 겁니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래서 우리 자신을 알려고 하면 딴 곳에 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배당 앞에 서서 찬송을 부르면 안 되고, 뭐 앞에 서야만 됩니까? 피 앞에 서야만 하는데, 그것도 자기가 실수해서 정강에서 흐르는 피가 아니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 앞에 설 때, 비로소 우리의 본 모습이 거기에 등장한다는 말입니다.

◈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아니라 만날 상상한 하나님을, 그렇게 하나님을 상상해서 어떻게 합니까? 눈이 덮인 곳에서 사진 찍어서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하면서 그 앞에 서 봐야, 그것은 마치 백설공주에 나오는 계모가 매일같이 거울을 보고서 하는 소리, 즉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예쁘냐?" 라고 하는, 아예 문제와 답을 자기가 다 만드는데, 그래서 거울이 할 말이 없게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더 예쁘냐?" 라고 하는 것은, "내가 제일 예쁘다" 라는 것과 똑같은 소리인데, 그래서 거울도 자기가 깨질까봐 겁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왕비님이 이 성에서는 제일 예쁩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나중에 참다못해서 "이 성에서는 왕비님이 제일 예쁘지만, 이 성밖에서는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라고, 그래서 말을 지혜롭게 해서 거울이 안 깨졌다는 말입니다. (??)

그래서 왕비의 그런 질문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다시 하겠는데, 인간은 질문은 통해서 뭐가 확인이 됩니까? 자기 주체가 확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질문을 받을 사람이 있어야만 되는데, 그런 질문을 받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웃, 혹은 타인, 또는 가족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아닌 사람은 강아지가 될 수도 있는데, 집에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러면 그 강아지에게 물어봐야 되는데, "강아지야 강아지야, 이 집에서 누가 제일로 너를 예쁘게 해주지?"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왈왈"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옳지. 내가 제일 예쁘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 고독이 몸부림칠 때 !!

사람이 늙어서 제일 괴로운 것은 무엇인고 하니, 질문할 사람이 없다는, 즉 고독이 제일로 힘든다는 겁니다. 여기 한 나이를 하시는 장로님 계시는데, 고독이 괴롭지 않습니까? 배우자가 죽는데 자기가 힘든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 다시는 잔소리할 대상이 그만 없다는 겁니다. 질문을 해서 다시 돌아와야 주체가 성립되는데, 그런데 물을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에나 묻는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음녀' 라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그 음녀의 특징이 바로 정해놓은 남자가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이놈을 집적거리다가, 또 다른 저놈을 집적거리고 말입니다. 그러면 음녀가 무엇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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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9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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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