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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렘 16:19-21 (허무한 것)우리교회예레미야

렘 16:19-21 (허무한 것)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203)

본문 : 예레미야 16장19-21절
제목 : 허무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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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10-04-07 18:4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57강-렘16장19-21(허무한것)-jer100407.hwp

이근호

10-04-07 21:00

허무한 것

2010년 4 월 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6:19-21

(렘 16:19, 개정) 『여호와 나의 힘, 나의 보장,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렘 16:20, 개정)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렘 16:21, 개정)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들의 힘으로 행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내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신의 행함으로 이 세상의 형편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말은 또한 사람들이 미리 예상한 바가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미 기대한 대로 될 것 같으면 그 결과 속에는 ‘인간의 기대’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 순수한 하나님의 뜻만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이런 식의 구원은 인간의 생각과 경험으로서는 전혀 예상 못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구원이 된 상황에서 사적인 구원의 욕망이란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전혀 구원 예상못한 자들을 구원하시면서 그들의 구원되었음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바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21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이 발언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므로서 하나님 됨을 온 열방에 알리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30의 경우를 봅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는 것은, 사적인 구원욕구를 충족하려 하심이 아니라 온 우주에 “여기 의인이 생겨났음”을 알려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하신 우리 하나님의 솜씨를 퍼뜨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TV 드라마에 보면, 어떤 부인은 자기 아들이 의사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러워합니다. 심지어 시장에 나가 감자를 사더라도 그냥 사면 될터인데 꼭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입니다. “우리 아들이 의사인데 감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이루신 것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7:1에 보면,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의 자리’에 등극시켰습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여호와로서 일하시던 자리요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시는 자리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단순히 개인 구원에 있어 순서나 경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솜씨를 자랑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온통 죄인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봐라, 여기 엄연히 의인 있잖아!”라고 하시면서 우리 성도들을 온 우주의 자랑거리로 삼고 싶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포도나무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농부에 예수님은 포도나무입니다. 그 포도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게 되는데 그 열매는 순전히 하나님과 예수님 솜씨입니다. 제자들이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을 선택해서 믿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행함에 해당됩니다. 도리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주님의 솜씨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길 때,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없는 나라입니다. 그냥 어쩌다가 있던 나라가 애굽하고 싸워서 애굽군대를 격퇴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없고 그냥 애굽 나라만 있을 뿐입니다.

마치 결혼한 여인이 얼마 안 있어 임산부가 된 것처럼, 애굽 나라 내부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서서히 잉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애굽나라에서 떨어져나와서 생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그 이스라엘이 애굽나라에서 나오겠다고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결코 애굽나라의 힘과 권세에서 탈출 할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힘에 죽고 힘으로 삽니다. 그 힘을 애굽나라가 지니고 있기에 그 힘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럴 생각도 안합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히브리인들이 애굽나라에서 벗어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나오는 고백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막 나와서 홍해바닷가에서 부르는 그 찬송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애굽기 15:2) 즉 인간의 힘으로 자신이 구원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오늘날 신약시대에서는 “내가 의인된 것은 예수님의 구원의 힘입니다”는 고백과 같은 고백입니다.

구약 때는 세상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불가능한 영광을 만방을 떨쳤다면 오늘날 신약 시대에서는 영적인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누가복음 4:6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 이 천하 만국의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얼마나 학수고대하는 복음으로 들리겠습니까.

실은 이 말은 악마가 하는 말입니다. 악마는 세상의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힘으로 세상을 요리합니다. 그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무엇이 목말라하고 무엇을 희망하면서 신에게, 예수님에게 매달리는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여망이란 힘에 쏠립니다. 세상에서 버틸 힘만 준다면 그 자가 부처든 하나님이든 예수든 상관하지 않고 좋으신 분이라고 섬길 마음의 태세가 되어 있는 것들이 인간입니다.

인간에게는 힘만이 현실로 쳐 줍니다. 힘이 안되는 것은 현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이 힘의 구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마치 히브리인들이 애굽나라를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을 보세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그는 평화롭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마찬가지요 거지 나사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는 세상 힘으로도 장악되지 않는 다른 힘이 있었으니 곧 죄인이 의인이 되게 된 그 은혜의 힘이었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여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이 힘에 대해서 악마는 어떻게 힘쓸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힘을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의 아비는 악마입니다. 그들은 뱀의 새끼입니다. 사람이란 속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습니다. 사람은 자신들이 참새나 들풀보다도 못한 존재라는 것을 모릅니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모릅니다. 마치 평평한 무덤 안에 들어있는 썩은 해골같습니다. 점잖은 척하지만 술만 들어가면 개가 됩니다. 인간의 본색은 신마저 농담거리로 만드는데서 극에 도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조롱과 놀림과 대상으로 삼으므로서 그들은 마치 신 위에 인간이 있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을 버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기어이 멸망시키므로서, 정말 하나님의 위대한 거룩과 공의로움을 드러내십니다. 자기 백성마저 버린다면 하물로 개같이 우리 이방인이 저주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공로에 입각하여 성령을 주심으로서 우리 안에 영원히 정죄당하지 않을 조건을 마련해주시니 바로 이러한 기적은 오직 우리 주님의 솜씨입니다. 이런 자만이 그 어떤 환란 가운데서도 “주님은 나의 힘이시오 보장이시오 환란날의 피난처이심”을 고백하는 주님의 작품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사적인 구원욕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자랑하시는 의인으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10-04-08 12:42

057강-렘16장19-21(허무한것)-jer100407

2010-04-08 12:23:11 녹취 : 오용익

057강-렘16장19-21(허무한것)-jer10040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6장 19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7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6:19-21
“여호와 나의 힘, 나의 보장, 환난 날의 피난처시여 열방이 땅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열조의 계승한 바는 허무하고 망탄하고 무익한 것뿐이라 인생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보통 기독교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하지요. 믿는다는 것은 행함의 반대말인데 달리 이야기해서 우리 행함으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우리 행함으로 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거예요. 우리 행함으로 될 수 없는 것을 두자로 줄이면 그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 기적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자 해서 구원받았으면 하나님의 기적, 그 은혜 속에 우리의 여망도 포함이 되어 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수님의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을 생각도 안했는데 주실 때 그야말로 조금도 우리 행함이 섞일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뭘 하고자, 구원받고자 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면 주신 분 안에 우리의 기대, 제안 같은 것, 요구사항 이런 것이 담겨 있을 것인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대로 그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우리 믿는 자를 분명히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어떤 목적에 쓰시고자 부름을 받은 겁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라고 되어 있고 그 다음에 ‘그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걸 사람들은 개인구원으로 개인구원의 여정으로 보통 생각들 하는데 성경에는 개인구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성경의 개념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에 의가 없습니다. 의가 없을뿐더러 거룩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리 아신 자를 불러내실 때는 ‘여기 의인 있잖아. 봐라. 여기 의인 있어.’라고 죄밖에 없는 세상에서 의인이 불쑥 돌출하고 등장했다는 것을 하나님은 자기 솜씨의 자랑 물로 삼고 싶은 겁니다. 그걸 드러내고 싶은 겁니다.

TV드라마에 이런 모습이 나와요. 어떤 엄마가 자기 자식이 의사라고 시장에 물건을 하나 사러가도 그냥 사는 것이 아니에요. 감자를 그냥 사면 될 텐데 그게 아니에요. “이 감자 얼마입니까?” “4천원이요.” “우리 아들이 의사인데 감자를 그렇게 좋아하네요.” 감자하고 의사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그 이야기를 꼭 집어넣어요.

꼭 아들의 영광, 의사가 무슨 영광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꼭 아들의 영광을 개입시킵니다. 미장원에 가도 그 입이 가만있지를 못해요. 아들의 영광을 자랑하고 싶어서 그렇지요. 그러면 그 아들은 그것을 말리지요. “어머니, 어디 가시거든 내 얘기 좀 하지 마세요.” 목사도 무슨 영광인지 가만 보니 우리 어머니가 교회 와서 저를 자랑스러워하는 느낌을 받아요. 다른 권사님들은 별로 안 좋아하겠지만.

어쨌든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님이, 자기 법을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움을 예수님 선에서 홀로 다 이루었다는 그것을 대견스러워하시고 자랑스러워하시고 그분을 만유의 주라고 등극시켜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솜씨를 발휘해서 된 것이 뭐냐?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포도나무 나오지요. ‘하나님은 농부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인데 그 포도나무에서 열매가 맺혔다는 것이고 그 열매가 바로 성도라는 거지요.

그 전에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끼리 수군거리고 속닥거려서 ‘예수 믿도록 하자.’ 이렇게 결의한 바가 없고요 순전히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장하셔서 성도를 자꾸 앞장세워서 우리 성도됨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봐라, 조금 전까지 죄인이었고 조금 전까지 자기밖에 몰랐는데, ‘입 떼 봐라.’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봐라, 저 소리가 나오잖아.” 예수 믿는 다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노리고 예수 믿는 거야 온 교회가 다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것은 다 가짜고 정말로 예수님이 나의 구주십니다, 라고 믿는 것은 인간인 이상 도저히 인간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소리입니다.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사람이 무슨 수로 자기를 부인합니까? 자기긍정하고 나온 그 예수는 사이비예수에요. 그거 믿으면 지옥 갑니다. 그것은 독약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나는 어찌되든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나의 주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 ‘내 인생이 어떻게 꼬이고 내 인생이 어떻게 망가지고 폭파되고 어찌 되든지 그것은 제 안중에 없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지 내 것은 없습니다.’라는 고백과 더불어서 ‘왜?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에.’라는 고백은 정말 악마가 분통을 터뜨릴 만한 일입니다.

‘아, 실패했구나. 저 인간을 꾀어야 하는데 실패했구나.’ 악마가 탄식을 합니다. ‘지옥 갈 인간 하나 또 천국으로 빼앗겼다.’ 사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악마였습니다. 희한하지요. 이걸 보면 사람은 뭐냐? 들러리였습니다. 아무것도 몰라요. 철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예수님에 대해서 극구 반대하는 것은 악마밖에 없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구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주제가 나옵니다.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올해 수능시험 칠 애한테 21절 이야기하면 무슨 말인지 모를 겁니다. 지금 한참 퇴근준비하고 있는 직장인에게 이 21절을 말씀을 하면 그것과 자기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발뺌할 것입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여기서 그들이란 이스라엘을 잡아간 이방나라를 말하거든요. 이것이 구약을 관통하는 주제가 되어 있습니다.

원래 애가 없는데 그 엄마의 배가 볼록하게 불러서 그 뒤에 그 엄마에서 분리되어서 나오잖아요. 마찬가지로 원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없어요. 없는데 애굽나라에서 마치 쌍둥이가 자기들끼리 엄마 뱃속에서 쿵덕거리듯이 그렇게 자기들끼리 쿵덕거리다가 튀어나온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지요. 애굽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처음부터 없던 나라가 나온 거예요. 있던 나라가 애굽에서 싸워서 애굽을 이긴 나라가 아니고 원래 애굽나라에서 툭 떨어져 나오는데 그 이유가 뭐냐? 이스라엘은 자력으로 결코 애굽에서 구출될 수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절대로 이스라엘은 사람 손으로 만들어질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이 나라 되기 싫어서가 아니라 애굽이라는 힘에서 벗어날 위인이 없어서 그래요.

모세건 누구든 간에 애굽이라는 이 악마의 힘에서 못 벗어납니다. ‘인간이십니까?’ ‘예’ 그러면 이 세상 힘에서 못 벗어나요. 만약에 애굽나라에서 어느 나라 하나 튀어나왔거든 그것은 분명히 나중에 이스라엘나라 되겠다는 자기의사가 아니고 그런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이 열방, 만국에 여호와의 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놀라운 일을 벌이신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인간으로서는 가당치도 않은, 가능치 않은 일들을 통해서만 자기 살아 있음의 흔적을 남기십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안합니다. 교회 만들기, 인간이 교회 만들어서 간판 걸면 인간들의 힘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교회 아니에요. 2천억 들여서 교회 건물 지을 수 있어요. 그것은 교회 아니에요.

교회는 2천 억짜리 예배당을 짓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 그 2천 억짜리 예배당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 교회라는 말이지요. 그걸 포기하고 ‘예수님이 나를 구원했습니다.’ 하고 주를 주로 고백하면서 원룸에서 두 세 사람이 모이면 그게 바로 교회에요. 그걸 교회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그 안목이 사람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마귀들이 얼마나 놀리겠습니까? ‘꼴좋다. 목사랍시고 교인 두 명이 뭐냐? 그것도 하나는 네 마누라고. 아이 더 낳지. 교인 수 늘잖아.’ 얼마나 비아냥대고 비웃겠습니까? ‘앞에 지어진 예배당을 봐라. 크게 지어놓으니까 많이 모이잖아.’ 얼마나 놀림을 받겠습니까? 인간이 할 수 있어서 만든 교회 같으면 처음부터 교회가 아니고 그냥 산에 있다가 마을에 내려온 절입니다.

산 속에 있던 절이 마을로 내려와 있는 거예요. 김 명현 목사님 표현에 의하면 그게 산당이에요. 거기는 보란 듯이 행함들이 와글와글 다 모였어요. ‘이렇게 행했더니 거듭났고 이렇게 행했더니 복 받고 이렇게 했더니 선교사 몇 명 보내고 이렇게 했더니 교회가 부흥되고…….’ 모든 것이 행함이 되는 겁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나의 힘, 나의 보장, 환난 날의 피난처시요”라는 고백이 바로 애굽나라에서 이스라엘이 튀어나올 때의 출애굽기 15장 2절의 그 고백과 거의 유사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오 나의 구원이시로다.” 처음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불렀던 이 노래가 시편에 가득 들어 있고 신명기에서도 여호수아가 승리할 때마다 사사기에서도 사사가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열왕기 역대기에서도 선지자들이 개입해서 승리할 때마다 ‘정말 하나님은 사람의 힘으로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니군요.’ 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빼놓고 열방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조롱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행함과 인간의 노력으로 다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까 그들과 대결하러 왔던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 어떻게 해서 자신들의 신을 불렀던가요? 그야말로 산당에서 몸부림치듯이 불렀잖아요. 몸부림을 더 치면 신께서 잠에서 깨어나는 줄 알았잖아요.

그야말로 지랄발광을 했어요. 심지어 칼 가지고 자기 몸을 난도질 합니다. 불쌍히 봐 달라고 지랄발광을 하지요. 지랄발광은 욕이 아니고 하나의 의학용어입니다. 미친 듯이 했습니다. 인간의 육의 한계입니다. 왜 인간은 그러한가? 인간이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힘에 의해서 구출된 자가 아니면 사람취급도 안합니다.

왜 취급도 안하는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결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제가 어떤 글 중에 이렇게 썼어요. ‘대체 우리가 인간이라는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어제 서점에 보니까 공지영의 소설『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책이 있어요. 인간이 뭐라고 인간에 대해 예의를 갖춰야 됩니까? 인간을 인간답게 대접하라는 말이거든요. 인간이 있어야 대접하지요. 인간이 없는데요. 성경이 인간을 짐승이라 했는데요. 성경은 인간을 지렁이보다 더 못하고 짐승보다 더 못하다고 봤습니다. 참새보다 못하고 들풀보다 더 못하고.

그것들은 하나님께 대들지는 않지요. 이 못 돼먹은 인간들은 마귀하고 짝짜꿍이 되어서 하나님도 죽여 버렸으니까 얼마나 못됐어요. 우리 주님은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했습니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어두운 면을 몰라요. 껍데기는 사람인데 안에는 공룡 들어 있어요. 완전히 입니다. 괴물이에요. 그냥 괴물이 아니고 어떤 괴물이냐 하면 신을 조롱하는 것이 취미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취미고 재미고 예수님 짓밟는 것이 최고의 쾌락거리에요.

무대 위에서 영화를 통해서 소설을 통해서 철학을 통해서 과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를 비웃고 예수님의 피 흘림을 비웃고 하나님의 성경책을 펴놓고 낱낱이 이것이 오류이며 이것은 잘못이며 이것은 허망한 것임을 비판하는데서 자기가 신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하는데서 오는 그 쾌감, 그것을 니체는 초인(超人, Ubermensch)이라고 했습니다.

신을 비웃는 사람이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자라는 겁니다. 신? 그들은 이미 신을 안다는 겁니다. 신은 인간을 닮았기 때문에 인간하고 신하고 동일하게 같이 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진짜 하나님이 이 땅에 왔을 때는 하나님이 반대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되신 인간과 소위 인간이라고 우기는 그것도 신을 잘 안다는 그 인간과의 만남 속에서 그들은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여호와 나의 힘, 나의 보장, 환난 날의 피난처시여”라는 이 고백은 오늘날 인간들이 가짜 신들을 섬기면서 고백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누가복음 4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 있는데 그중에서 뽑아서 읽겠습니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자, 교회에서 목사가 방금 제가 읽은 이 본문을 읽었다 합시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가 주리라.’ 한 이것에 대해서 교인들이 아멘 할까요, 안할까요? 교인들은 뭔지도 모르고 아멘, 하고 할렐루야, 할 겁니다. 누가복음 4장 6절이 뭡니까? 마귀가 예수님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권세가 내게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네게 주리라.’

사람들은 지금 힘들어 합니다. 왜 힘든가? 이 세상을 떠나는 그것이 힘든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밥 먹고 살고자 힘들어 합니다. 그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누가 아느냐, 마귀가 알아요. 그들에게는 마귀님이지만 마귀님이 아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귀님에게 기도합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철야기도 합니다. ‘세상의 힘과 모든 권세를 제발 저에게 부어 주시옵소서.’ 마귀는 약속한대로 ‘줄게.’

세상권세와 부귀영화를 받게 되면 그 주는 쪽이 어떤 내용이든 관계없이 그 쪽은 무조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뭔가 받아 챙겼으니까, 내 뜻과 원대로 주셨으니까 그분은 무조건 예수님이고 그것은 무조건 참된 교회가 되는 겁니다. 마귀의 술책이고 마귀의 계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었는데 의인이 되었다는 거예요. 악마밖에 없고 죄밖에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고 의인이 된 것은 무엇과 같으냐하면,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나올 수 없었던 이스라엘이 나왔던 그 능력과 같은 능력으로 죄밖에 없는 우리가 의인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구약에서는 땅 싸움이고 구약에서는 힘 싸움이지만 신약에서는 ‘어떻게 죄인이 의인되느냐’ 하는 이 영적싸움의 본래의 면면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이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 영적싸움이었으면 스데반 집사님은 그냥 돌에 맞아 죽어도 그냥 좋대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렇게 좋대요. 거지 나사로는 거지가 되어도 그렇게 좋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면서도 히죽 히죽 웃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것이 너무 좋아서.

이것은 악마의 힘으로는 있을 수 없는 기이한 현상들입니다. 심지어 사도바울 같은 경우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요. ‘나는 날마다 죽는데 내가 날마다 죽어야 되는 이유는 그래야 내 안에 어떤 분이 계신다는 것과 그 분의 능력이 계속 나온다.’는 거예요.

사람이 몸은 하나인데 사람이 둘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애굽에서 자기백성 이끌어내는 그 정도보다 더 센 능력이에요. 모세가 자기 백성 애굽에서 끄집어내봐야 그 사람들 광야에서 또 원망했습니다. 만나주고 기적 베풀고 지팡이 들어서 아말렉군대 물리쳐 주고 여리고성 무너지고 홍해가 갈라지면 그때야 좋았지요. 어린양 잡아서 피 뿌릴 때 말씀 앞에서 ‘좋습니다!’ 했지요.

무슨 기억력이 그런 기억력이 있는지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고. 십계명 줘봐야 지키는 폼이나 잡다가 다 잊어버리고. 세상의 권세와 힘을 이길 수 없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 인간이거든요. 지난주일 오후에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주인이 없어요. 가진 놈이 임자고 먼저 덮친 놈이 임자에요. 마귀가 덮치면 마귀 것이 되고 주님이 덮치면 주님 것이 되고. 그런데 그 틈바구니에서 ‘나는 나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하니까 가당치도 않지요. 본인이 그렇게 도도하면 죽기는 왜 죽느냐 이 말이지요.

주님께서 신약에서 보여주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짬짬이 보여줬어요. 여리고성 돌 때 신났고 홍해 갈라질 때 신났지만 돌아서면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안개 같은 육이 버텨봐야 몇 분 몇 초 가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 흙으로 만든 허접스러운 인간 속에 세상에, 주님의 영이, 예수님의 마음이 직접 들어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전까지는 마귀가 인간을 잘도 다루었지요. 인간은 완전히 마귀의 밥 아닙니까? 선악과만 살살 간질이면 자기 딴엔 죄인이면서도 의인구실하고 의인행세하려고 십계명 지키고 뭐 지키고 뭐 지킨다고 하지만 주님께 들키면 그 속의 음흉한 면, 그 속의 어두운 면이 다 튀어 나옵니다. 주님이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했어요. 음욕과 탐욕과 더러운 것과 욕심들.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인간을 볼 때에 이렇게 봤겠습니까? ‘회칠한 무덤이다.’ 이 말은 평평하게 평토장한 무덤 안에 해골이 들어 있습니다. 해골이면 ‘우리 해골입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해골이면서도 양복입고 넥타이 매고 미장원에 가서 파마하고 해골이면서도 명품가방 걸치고 해골이면서도 쇼핑하고, 그러다가 해골다움이 언제 나오느냐 하면 퇴근하고 소주를 들이킬 때 드디어 해골 나옵니다. 토하고 토한 데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비틀거리고.

“이 세상이 왜 그렇게 더러운 세상인가?” “네가 더럽다. 네가!”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는데?” “너는 나라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는데? 케네디 대통령 말도 못 들어 봤나, ‘나라가 나에게 뭘 해줄 것인가 하지 말고 네가 나라에게 뭘 해줄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했던.” 본인이 썩었고 본인이 술 먹고 비틀거리니까 온 세상이 다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이지요. 술 깨보세요. 세상 반듯해 보이지.

자기가 술 먹고 싶고 자기가 타락하고 싶고 자기가 죄짓고 싶고. 여기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힘이 아니고 악마가 나의 힘이고 악마가 나의 보살핌이고 악마가 나의 피난처이고, 기껏 힘, 힘, 힘만 주면 그게 부처가 되었던 예수가 되었든 상관치 않고 예수나 부처나 하나님이나 보살이나 누가 되었든 나에게 힘만 준다면 거기에 아낌없이 헌금하고 충성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먼저 쥔 놈이 그 사람을 소유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썩어빠진 이스라엘을 열방들로 하여금 ‘봐라, 내 백성이라도 하나님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니까 이렇게 망한다.’ 하는 것을 이방나라에 떠벌인 거예요. 신기하지요. 신약에서는 ‘이런 죄인도 의인되었다.’고 떠벌이는데 구약에서는 ‘내 백성이라도 다른 신 섬기면 이렇게 망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능력이 뭐냐? 자기 백성 버리기, 자기백성 멸망시키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갖고 있었던 공의로움의 속성입니다. 이걸 믿으라,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자기 백성마저 저렇게 멸망당한다면 하물며 개 같은 우리일까 보냐.’ 이방인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우리는 개지요. 개 같은 우리에게 이스라엘을 버린 그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이 버린 그 언약과 약속과 주님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심어줘서 ‘네가 죄인으로 저주받아야 될 그 존재가 이제는 네 안에 내가 있어 네가 의인되었다.’고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는 그 놀라운 기적이 우리를 통해서 증거 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19절에 “여호와는 나의 힘, 나의 보장, 환난 날의 피난처시여.” 이러한 고백이 나오려면 환난이 있어도 괜찮아요.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도 싱글벙글 하나님나라에 갔습니다. 무엇이 도대체 그로 하여금 죽음조차 환난조차 초월하게 했습니까? 여호와가 환난 중에 피난처이기 때문입니다.

‘밑에서 당한 것 위에 가서 보상받자.’ 주께서 그렇게 기적적인 존재로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계획만 생각했지 하나님의 계획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있을 줄이야. 우리는 내 개인 구원 챙기는 것에만 급급했지만 그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죄인이 의인된 것을 우리 죄인 된 몸을 통해서 세상 만방에 증거 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줄 수 있는 저희의 남은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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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