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강-눅5장1-11(나는 죄인입니다)-luk100404
022강-눅5장1-11(나는 죄인입니다)-luk100404
이름 : 오용익(IP:59.3.201.250)
022강-눅5장1-11(나는 죄인입니다)-luk10040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5장 1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5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5:1-1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우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배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예수님과 베드로가 만나서 주고받는 대화가 이겁니다.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그 다음에 ‘나를 떠나소서.’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을 그냥 평범한 스승정도로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쯤으로 알았는데 막상 만나서 같이 일을 해보니까 도저히 내가 상대할 분이 못 됩니다. 나는 당신 앞에서 비로소 내가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너무나 고귀한 분이기에 저 같은 인간과 상대하지 마시고 저 같은 인간을 버려두셔도 괜찮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인상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어떻습니까? 저희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저 같은 인간은 지옥 보내셔야 합니다. 저 같은 인간은 천국 간다는 것이 가당치도 않습니다.’라는 고백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진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그동안 내가 나 자신의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나 자신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진짜 내 모습이 어떤지를 누가 막았느냐 하면 바로 내 고집이 잘못된 나의 상상력이 진짜 내 진솔한 모습을 은폐시켰고 은닉시켰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그럴싸하게 가리던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스스로 벗길 수가 없고 예수님이 와서 벗겨주시면 비로소 더러운 내 모습 지저분한 내 모습이 다 나오는 거예요.
제가 얼마 전에도 그렇게 설교했지요. 우리 안에 구더기 들어 있다고. 구더기가 한두 마리 들어 있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우리는 그럴싸하게 가리개로 막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것을 확 뜯어버린 거예요. 그렇게 뜯어서 그동안 미처 못 봤던 내 모습을 보게 하신 겁니다. 보니까 아, 이것은 나라도 나를 상종할 수 없는 지저분한 인간이에요.
그 전에 베드로가 고기를 잡았습니다. 어부라는 그 자리가 자기의 생계유지를 위한 자기의 자리라고 여겼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생계유지를 위한 직업이라고 여겼던 그 어부의 자리가 자기를 먹여 살리는 자리가 아니고, 그것은 자기혼자 일방적으로 생각한 것인데 그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만든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를 내가 보존하니까 자기는 항상 우수한 사람이에요. 고기도 잘 잡지요,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돈 벌지요, 세상에 이렇게 착실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평생 동안 가족을 위해서 내 새끼를 위해서 이렇게 성심성의껏 새벽마다 일어나서 일하는데 누가 나를 탓합니까? 누가 나보고 죄인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립니까?
이것은 엄연한 나의 고귀한 직업인데요. 우리 교회를 보면 직업 때문에 교회 못나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 직업이 중요하지 예수가 안중요하고 교회가 안중요한 거예요. 이 직업이 있어야 내가 밥 먹고 살고 내 가족이 살고 병아리 같은 내 새끼가 사니까 이 직업을 포기하라고 말하려거든 차라리 날 죽여라, 할 정도로 강렬하게 내가 나를 칸막이로 버티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직업에까지 주님께서 찾아와서 관여하니까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은 ‘주여, 저 죄인이었군요. 제가 죄인이었습니다. 저는 주님과 상종할 자격도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여러 소리 할 것도 없어요. 그러면 목사한테 직업이 뭡니까? 목사잖아요. 목사가 교인들보고 뭐라고 거짓말 하느냐 하면 목사는 고귀한 성직이라고 거짓말 하는 거예요.
자기는 그 목사직을 함으로써 자기가 얼마나 우수하며 자기가 얼마나 열심인지 자기는 천국에 가도 좋은 자리로 갈만한 대단한 사람이고 교인들도 다 그렇게 존경한다는 겁니다. 제가 서울서 강의를 하니까 그 중에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한국교회 비판하지 마세요. 우리 목사님이 얼마나 훌륭한데요.’
아, 속에서 갑자기 약간의 현기증이 일어났어요. 성경전체 강의 내용은 예수님을 가렸던 그것을 치워버리는 식으로 강의가 되어야 합니다. 이유가 뭐냐? 성경전체는 모든 것이 예수님 한분 중심이에요. 장담합니다. 예수님 알면 구원받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꼭 제가 장담할 필요 없어. ‘너희들이 나를 알게 함으로 영생에 이르게 한다.’ 제 이야기 아닙니다. 주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한분 알면 누가 뭐래도 영생 얻고 천국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창고에 물건 재여 있듯이 뭔가 물건들이 채워져 있으면 그것은 아무리 말씀 전해도 그 창고의 물건 때문에 예수님 보이지 않고 그 물건이 보이죠. 그 물건이 뭐냐?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가로막고 있어요. 다른 말로 하면 교회가 천국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물건을 치워버려야 되는데.
여러분들의 직장이라는 것이 예수님을 가리고 있고 여러분의 예쁜 자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어요. 뭔가 주님 가는 길에서 그런 것을 치워버려야 되는데 그런 것 때문에 턱턱 숨이 막혀요. 그런 것들이 예수님을 가리고 있습니다. 한 분 예수님을 만나야 구원받는데 예수님을 만나는 대신 우리는 나의 직장을 만나고 나의 사업을 만나요. 나의 가족을 만나고.
오늘 본문의 경우에 이것이 옛날이야기이니까 현대판으로 시나리오를 다시 짜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개인택시 운전을 하고 있는데 돈이 탐이 나서 교회도 못 나올 정도로 개인택시 운전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교회 안 나오니까 주님이 아예 베드로를 찾아갔어요. 베드로가 주님을 보통 승객으로 보고 “어디까지 가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승객이 “저 차 오른쪽으로 갑시다.” 했어요. 그 말대로 가 보니까 승객들이 택시를 기다린다고 많이 있더라는 겁니다.
새벽 두시부터 밤이 새도록 손님 하나 없었는데 예수님이 지적한대로 가보니까 손님들이 왜 이제 왔느냐고 하더라는 말이지요. 그럴 때 베드로가 무엇을 알아챘느냐 하면 바로 이 택시운전이라는 이 자리가 그동안 나 자신을 잘난 존재로 만드는데 기여했고 보탰지 언제 예수님 앞에서 ‘내가 진짜 죄인이 맞다.’고 고백케 할 수 있었겠느냐 이 말이지요. 내 든든한 직업인데.
그런데 주님께서 일부러 찾아오셔서 내 승객이 되셔서 내가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그 직장까지 찾아오셔서 거기서 말씀을 전하니 그 순간 내 자신과 예수님과의 거리 장막이 다 뜯겨져 나가면서 ‘주여, 저는 죄인이었습니다. 저를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마세요. 저 같은 인간은 쓰레기로 갖다 버려도 주님의 그 처신이 당연한 처신입니다. 이제는 저를 잊어주세요. 저를 몰라도 됩니다. 귀하신 분 찾아가시고 저 같은 인간은 버려도 상관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한 거예요.
그걸 보면 얼마나 한국교회가 예수님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오늘 부활절이라는 거예요.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것을 제사 드린다고 하지요. 죽은 조상 제사 드리고 있을 때 만약에 그 죽은 조상이 살아서 오게 되면 그 제사상 발로 차버립니다. 산 사람하고는 동행을 해야지 제사는 죽은 자에게나 해당되는 것입니다. 산사람과는 매일같이 동행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부활절 만들어서 제사지내는 그런 짓이 무슨 짓입니까? 그만큼 예수는 이미 죽었고 잊었고 지나간 일이라는 말이거든요. 평소에 얼마나 주님과 동행을 안했으면 꼭 일 년 중에 날을 정해서 지켜야 되겠습니까? 갓 태어난 애들 돌잔치 해주는 것은 이해돼요. 그런데 나이 90된 노인들 생일상 차려주는 것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태어난 지 몇 년 되었는데 아직까지 생일상 받아먹고 있습니까? 크리스마스를 왜 지키는 거예요, 도대체.
주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택시, 어부, 우리 직장, 우리 사업장에 항상 찾아오시고 우리 곁에 계십니다. ‘누구든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내가 거기 함께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는 내가 여기 있는 것보다 더 있음,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보다 더 존재함을, 더 존재하시는 분으로서 받아들이는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실 때 교회에서는 어른이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라는 어른이 전혀 필요 없는 곳, 그게 바로 교회여야 합니다. 장로라는 어른이 필요 없는 곳, 그게 바로 교회여야 돼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왜 찾아왔습니까? 아까 장로님이 기도에서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뭐냐 하면 ‘가자, 떠나자.’입니다. ‘내가 만든 세계는 다른 세계에 있다. 모든 것을 다 접고 나와 함께 그 세계로 그곳으로 가자.’ 그겁니다.
교회까지만 오시면 안 되고요. 교회 와서 저 위쪽으로 떠날 채비를 차려야 돼요. 저 의 세계로. 빌립보서 3장 20절에 나오지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거기서 주께서 기다리고 있다.’ 위를 보고 이곳을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예수님이 좋아지는 겁니다. 만약에 떠나기 싫은데 그 예수님이 자꾸 얼쩡거리면 그 예수님도 우리는 싫어요. 귀찮아 집니다. 예수님이 하나의 종교로 변해요. 종교로 변하는 그것은 하나의 취미생활이기에 별 의미 없어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오신 것은 ‘가자, 떠나자.’ 하고 주님계신 나라에게 베드로를 손목잡고 끌고 가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지금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에 찾아오신 것도 마찬가지에요. ‘애가 수학이 지금 진도가 잘 안 나가고 있는데.’ ‘그만 가자.’ 그겁니다. ‘아버지 장례가 있어서 그 장례는 치러야 되는데.’ ‘아버지 장례 그 죽은 사람 장례는 죽은 자에게 치르라고 하고 너는 나 따라서 가자.’ 이 말이지요.
어떤 부자가 와서 “예수님, 제가 어떻게 하면 착한 사람 됩니까?” “착한 사람 되지 말고 나와 함께 가자”고 하는 거예요. ‘제발 여기서 착한 사람 되지 말고 그 착한 사람 되는 것은 저 법정 같은 도 닦는 사람한테 맡기고 공자 맹자 같은 인간한테 맡기고 너는 안착해도 되니까 그냥 가자. 여기 이 땅에서 살만큼 살았으니까 그냥 가자.’는 겁니다.
제가 서울서 지난 금요일 날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 했어요. 주님 가신 길에는 뭐가 사라졌는가? 법이 사라졌어요. 법이 사라진 길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항상 맴도는 것은 뭐냐? 법이 자꾸 나를 지적하는 그런 세계입니다. ‘너 잘했어, 못했어? 착했어, 나빴어?’ 맨 날 이것을 따지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 하게 되면 뭐가 하나도 없어지느냐 하면 법이 하나도 없어져요.
법이 없고 뭐만 있느냐 하면 주님의 용서하시는 피만 깔려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그런데 길만이 아니고 그 다음에 ‘나는 진리요.’ 법이 없는 것이 진리에요.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상상도 못했습니다. 법을 지켜야 진리인줄 알았습니다. 법이 없는 것이 진리요, 그 다음에 ‘나는 생명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베드로가 혼자 가려고 할 때 ‘너는 혼자 가지 못한다. 내가 와서 내가 너를 데려가면 법이 없는 그 길을 갈 수 있고 진리의 길을 가게 되고 생명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겁니다.
어떤 간통한 여자가 잡혀 왔어요. 동네사람들에게 우세 당하게 생겼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오셔서 그 간통한 여인을 새로운 길로 인도했습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길가에 팻말이 죽 있어요. 한 5미터 가니까 팻말이 나옵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5미터 더 가니까 또 팻말이 나옵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한 20미터 가니까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그 길 가로수처럼 쫙 깔려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입니다. 그 길로 간통한 여인을 데려갔습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의 관심사는 이 땅에서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람, 예수님의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그리고 이 예수님의 사람 골라내는 방법은 남들에게 알려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복음 4장 41절에 보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주님께서 마귀를 쫒아내면서 그것을 은밀하게 해 주기를 원했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는 일을 자꾸 곡해해서 일방적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일방적으로 해석해버리면 멋도 모르고 예수를 따라오는 경우가 있어요. 예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날 따라온다고 해서 내가 있는 곳에 갈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별해서 데리고 가는 경우에만 비로소 나(예수님)와 함께 동행이 된다.’는 겁니다. 동행이 되는데 그 동행의 방법이 뭐냐 하면 ‘주여, 주님 앞에서 비로소 나의 껍데기가 벗겨지고 나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는 그것을 주고받고 주고받는 대화가 될 때 자기가 알아서 주님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데려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거기서 증명되는 겁니다.
주님이 와서 데려가는 사람은 항상 ‘나는 너를 용서하노라.’는 팻말이 있기 때문에 그 팻말 앞에서 ‘나는 죄인 맞습니다.’ 라고 즐겁게 푸근하게 고백하면서 그 진리와 생명의 길을 가는 겁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안 찾아오면 모든 것을 법적으로 자기를 보호하고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항상 자기의 은밀한 것은 감춰버리고 자기 의로운 것과 착한 것과 장기와 멋있는 것과 그동안 애써서 노력한 것과 남 앞에 잘난 것들만 자기 앞에 죽 깔아버려요.
그리되면 그 짐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아예 짐을 달고 살아요. 연세 많은 분들 허리 어깨 안 좋은데 거기에 그 무거운 쇳덩어리를 달고 다니면 안 좋잖아요. 연세 많을수록 그 무거운 쇳덩어리 같은 짐을 다 벗어버리세요. ‘나 죄인 맞습니다.’라는 말을 노인일수록 서슴없이 하세요. 노인은 아직 아니지만 노인으로 접어드는 50대도 마찬가지고. 서서히 어깨 죽지에서 먼지 털듯이 털어놓으세요. 미련 없이 그동안 내가 잘났다고 여긴 것 훌륭했던 것, 멋있던 것, 고생했던 것 다 툭 툭 떨쳐 버리세요.
왜냐하면 이미 주님께서 용서하기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그 자유에 자기 몸을 맡기고 그 자유를 만끽하세요.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나의 법적인 것들이 방해하지 말도록 내가 나를 가로막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동안 얼마나 베드로가 자기가 자기를 숨도 못 쉬게 꽉 틀어막았습니까? ‘나는 완벽해야 돼. 나는 철저하게 오류도 없어야 돼. 나는 빈틈도 없는 인간이어야 돼.’ 꼭 탤런트 이 순재처럼, 남들 보기에 완고하고 고지식하고 실수 줄이려고 하고, 그런 것들이 그동안 숨을 막히게 했습니다. 평생 동안.
좀 바람이 들어오게 해야 돼요. 내 내장에 주님의 용서와 사랑의 바람이 숭숭 들어오도록 솥뚜껑 떼어버리고 이제부터 주님이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즐겨 비참할 수 있도록 여기에 순풍 구, 구멍을 뚫어놓으세요. 아예 자기에게 구멍을 뚫어야 돼요. 서류 폐지처리 할 때는 펀칭 가지고 구멍 뚫잖아요. 우리 자신을 쓰레기로 간주하고 주께서 구멍을 뻥뻥 뚫어서 ‘너는 죄인이야. 이제는 너는 너 자체로서는 쓸모 짝 없어.’라는 구멍을 뚫릴 때 그동안 묵은 우리의 모든 스트레스와 괴로움도 같이 구멍 뚫려 날아가 버립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그 말씀 앞에 우리를 세워서 두 번 다시 나를 위한 차단막을 세워놓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올 때 어떤 관점에서 찾아오는가? 신명기를 잠시 보겠습니다. 신명기 17장에 보면 거기에 제사법이 있는데 구약의 제사법과 오늘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여러분들이 한 번 연결 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흠이나 악질이 있는 우양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찌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다시 한 번 읽어볼게요. “무릇 흠이나 악질이 있는 우양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찌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제물을 드릴 때 악질이나 흠이 있는 것은 드리지 마세요.’ 라는 말이에요. 이게 무슨 말이냐, 이런 말입니다. ‘천국에는 죄인이나 흠 있는 것들은 못 간다.’ 그 말입니다.
이것은 제물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제사의 제물이란 곧 오늘날 우리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만약 죄가 있고 흠이 있다면 우리는 하늘나라 가고 싶기는 하지만 죄송합니다만 못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있고 흠 있는 것은 받지를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제가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자체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흠 있고 가증한 것은 뭐냐? 그 뒤에 보니까 이방신, 다른 신을 섬기는 그런 존재를 두고 이야기하거든요. 자,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데려 오기는 와야 되는데 그 베드로라는 인간이 평생을 살면서 흠 있고 악질이 있고 정말 하늘나라 못갈 지저분한 인간인 것이 분명하거든요.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혼자서는 천국을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 처음 나오는 사람도 다 아는 이야기에요. ‘죄 있는 사람은 천국에 못가기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서 의인들이 가는 천국에 합류하게 한다.’ 이 공식은 유치부 학생도 다 아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알면 뭐합니까? 그 조건이 맞으려면 첫째는 우리가 흠이 있고 악질이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되는데.
처음 교회 나올 때는 인정을 해요. 찬송가에도 있는 것처럼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손들고 오는데 한두 주간 손듭니다. 그 다음부터는 바쁘면 교회 안 옵니다. 교회 좀 다니면 그 다음부터는 손 안 듭니다. 그 다음부터 남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교회 5년 다녔네, 나는 10년 다녔네, 나는 안수집사네, 나는 장로, 나는 목사’ 이거 내놓습니다.
결국 예수가 뭐냐? 예수가 자기에게 힘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면 무게가 더 나갑니다. 중량이 더해지면 점점 더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고 땅으로 푹 가라앉아요. 관절 앓는 분들 비오는 날이나 흐린 날 푹 주저앉듯이. 자기 자랑하면 그 자기자랑이 우리한테 해가 됩니다. 푹 주저앉아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죠.
그러면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어떻게 처리하느냐? 사람이 자기자랑을 하면서 ‘나는 50년 믿었네, 안수집사네, 장로네.’ 하고 있으니까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너무 무거워서 하늘나라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문제 있다.’를 지적해야 돼요. 문제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시는 겁니다.
첫째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온다. 그게 첫 번째 방법입니다. ‘너는 이런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먼저 뭘 했느냐? 말씀을 전했거든요. 거기 많은 사람들은 ‘야, 오늘도 한 수 배우는 구나.’라고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제가 오늘 설교하는데도 여러분은 ‘야, 오늘 하나 배웠구나.’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게 아닙니다.
이 말씀 하나하나 성경 말씀은 우리가 꼬깃꼬깃 감추어놓은, 우리를 무겁게 만들고 우리가 스트레스 받게 만드는 그 문제점, ‘너는 이런 것이 문제점이다.’라고 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자꾸 말씀 들어서 공부 잘하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공부 잘하려고 하지 말고 말씀이 우리에게 뻥뻥 구멍을 내는 거예요.
이것은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구축되고 난 뒤에는 반드시 남을 대할 때 거리를 떼어서 남을 대합니다. 이것을 거리두기라 하는데 거리두기를 하면 상대방이 나에게 쳐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않아요. 강렬하게 반발합니다. 대충 거리를 5미터내지 10미터 떼어놓습니다. 떼어놓게 되면 거기서 뭐가 생기느냐, 대충 상대방에게서 빼먹을 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저 사람에게서 내가 뭘 얻지? 저 사람에게서 내가 무슨 도움을 받지?’라고 나한테 힘 될 만한 입장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힘 얻기 위해서 교회 나왔다가 힘이 안 될 때는 교회를 그만두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한 90퍼센트 넘을걸요. 통계는 내 보지 않았습니다만.
교회 오다 안 나오는 사람이 다 그래요. “왜 안 나오십니까?” “예수님 믿어도 힘 안되더라.” 그 겁니다. 그럼 묻지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나지요.” ‘나는 나’로 계속 있으면 하늘나라를 못 가는데요. 그게 문제입니다. ‘나는 나’라고 우길 때 신명기 17장에 의해서 ‘아, 흠이 많구먼. 천국 못 가겠구먼. 악질이구먼.’ 이렇게 보시는데요.
예수님께서 신명기 17장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는 우리가 악질이고 흠이 있고 썩어빠진 쓰레기에 불과한데 우리는 그런 말씀 전하는 예수님 앞에서 팔짱을 끼면서 ‘5미터 뗍시다. 나한테 쳐들어오지 마세요. 나는 거리두기 합니다. 나한테 너무 오지 마세요. 나는 그러면 도망갑니다.’ 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거예요.
교회와도 주님의 말씀과 적당히 거리를 두는 거예요. 왜 적당히 거리를 두느냐 하면 적당히 거리를 떼야 소위 나만의 것이 안 들키고 나만의 것이 유지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내 것이니 하나님이라도 손대지 말라는 거지요. ‘평생토록 일구어서 이만큼 만들어놓은 내 작품이니까 손대지 마세요. 다만 주님께서 날 사랑하거든 내가 필요한 것 기도할때마다 응답이나 해 주세요. 필요한 거나 채워주세요.’라고 자기 영역을 계속 당도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가 자기에게 별로 도움 안 될 때는 자기가 피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거리를 떼기를 원할 때 거리를 없애버립니다. 없애버린다는 말은 덮친다는 말이에요. 여러분이 저녁에 해질녘을 보면 노을이 저만치 있지요. 어둠이 저만치서 온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저 산에만 있던 어둠이 한 30분만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온통 나를 덮치지요. 이렇게 이불 덮듯이 예수님이 나를 덮쳐버려야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덮어버려서 막 예수님을 떠밀어도 이미 덮쳐진 상태이기 때문에 모든 몸 구석구석 세포 사이사이에 예수님의 사랑이 다 녹아져야 됩니다. 마치 식빵 에 뜨거운 치즈를 얹어놓으면 식빵 구멍 틈새마다 다 파고들 듯이 우리 세포 하나하나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꽉 차 있어야 돼요.
교회 봉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봉사를 시킬 때는 자기가 소멸되게 해서 봉사를 시키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가 더욱더 빛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게 하는 겁니다. 내가 없어지는 방법은 교회 봉사하면 없어져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유난히도 드러내려고 봉사하게 되면 그것을 남들이 안 알아주게 되면 결국 삐져서 봉사를 그만두게 되는 겁니다.
주체가 소멸되기 싫은 거예요. 치즈가 식빵에 녹아 스며드는 것이 싫은 거예요. 예수는 예수고 나는 ‘나’ 이고 싶은 겁니다. 버티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흠이 많고 악질입니까? 이게 자기라는 신을 따로 섬기는 거예요. 이게 우상숭배인겁니다. 저 인간을 천국에는 보내야 되겠고 천국 갈 그 당사자가 본인 주제파악은 안되어 있고. 주제파악이 안되어 있는 거예요. 계속 거리두기 하지요.
주님이 오면 떠밀고 오면 떠밀고. 5미터 까지만 오세요. 나머지는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맨 날 떠미는 것이 일이에요. 떠밀어야 내가 주님과 안 섞이게 되니까. 주님과 안 섞이면 멋있는 내가 아주 윤기 있게 반짝반짝 빛이 나니까. 평생토록 나는 이렇게 살아 왔고 이렇게 살아온 것이 나의 보람이라고 우길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위에서 설교해도 소용없습니다. ‘아, 참 훌륭한 말씀이다. 한 수 배우면 좋겠다.’ 이렇게만 했지 주님과 베드로가 거리가 역시 거리가 떨어져 있어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교육용으로 생각합니다. 그 말씀 들으면 내가 질적으로 우수해지고 성화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질적으로 우수해지면 인간은 자기주체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점점 더 자기가 아까와지고 자기 자신을 버리기가 더 힘들어져요.
주님께서는 흠 있고 악질적인 베드로를 구원하기 위해서 베드로가 자기 자리라고 여기던 그 자리를 예수님의 자리로 바꾸어 버립니다. “베드로야, 고기 얼마나 잡았느냐?” “밤새도록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래, 너 내가 시키는 대로 한 번 해 볼래?” “해 보지요.”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밤새도록 배 오른편에 몇 번 던졌겠습니까? 수천 번 던졌을 겁니다. 그러나 수천 번 던진 그것은 자기가 자기 힘을 모으기 위해서 던진 겁니다. 어부로서 자기 솜씨를 보이기 위해서 던진 거예요. 하지만 그 다음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것은 이미 그 순간 말씀 안에서 베드로라는 주체는 날아가 버렸습니다. 주님이 자기중심을 차지해서 주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주님보고 고기가 몰려 왔습니다. 그거 자기 고기 아닙니다. 주님의 고기였습니다.
그 차이, 바로 그 차이입니다. 모든 성경말씀은 우리가 가야 될 예수님의 세계와 현재 매이고 싶어 하는 이 땅의 세계가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가, 그 차이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경말씀이에요. ‘야, 이런 차이가 있었구나. 내 인생 내 위주로 살아왔었구나.’
식빵인데 그 치즈가 없어요. 식빵만 남아 있어요. 뭔가 내 위에 누가 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내 세포 속속들이 내 자리를 대체하는 다른 힘이 없어요. 아무리 교회 나와도 교회 나오는 나만 자꾸 느껴지는 거예요. 예수님은 한 십리는 떨어져 있고 하나님은 백리는 떨어져 있어요. 거리두기, 자꾸 거리를 떼는 거예요. ‘쳐들어오기만 해봐라.’ 맨 날 그러고 있어요.
주님을 밀어내기에 급급해요. ‘제발 나만 있고 남들은 좀 나가다오.’ 우리의 생각이 그래요. 나 빼고 남들은 다 귀찮고 그래서 나만 남고 타인은 다 쫒아내는 거예요. 이정도로 우리는 흠 있고 마귀 들린 인간들이고 하늘나라 갈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러면 그런 인간을 어떻게 하는가? 이제 자리가 차이가 났습니다. 차이가 나니까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흠 있고 악질적인 인간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바로 그겁니다. 우리 속에 예수님을 밀어내는 악마적인 요소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미 들어 있었던 거예요. 그것이 밑바닥에 들어 있으니까 예수고 하나님이고 떠밀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계속 떠밀기를 한 거예요. 그러면서 남들 보기에는 목사입네 장로입네 주의 일을 합네,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예수와 하나님은 전부 다 가짜고 사기였습니다. 천국, 안 가려는 거예요. 서해안 군함 좌초되어서 가라앉은 군인들의 부모들과 가족들이 다 실신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이 지금 어디 가 있는가는 생각안하고 지금 눈앞에서 남편과 자식들이 사라진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다가가서 예수 믿으라고 하면 귀때기 맞습니다.
왜? 거리두기를 해야 되기에. ‘나중에, 하나님께서 내 자식을 살려주면 그때 교회 나올게요.’ 그런 사람은 교회 나와도 주님과의 사이가 이만큼 떨어져 있는 거예요. 내가 주님의 사람이 아니라 내가 여전히 나의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이런 흠 있고 악질적인 것은 하늘나라에 바쳐지는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동행을 하지요.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합니다. 10절 마지막에 보면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네가 고기 낚는 어부가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라고 합니다. ‘이미 죄지었던 너의 자리까지 예수 내가 점령했다.’는 겁니다. 그 때까지는 내 자리였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바깥에는 그 전의 모습이 나오더라도 이미 그 안에는 예수님이 차지한 베드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고기를 잡을 때도 사람을 낚을 때도 베드로가 고기를 잡는 것도 아니요 베드로가 사람을 낚는 것도 아니라 베드로 속에 있는 예수님이 고기도 낚고 사람도 낚는 겁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어서 그 인생을 죽음이라는 것까지 돌파하고 천국까지 그대로 골인시키는 겁니다.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니 길과 진리와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 있어서 우리 안의 엔진이 되면 그 길 때문에 진리 때문에 생명 때문에 하나의 껍데기로 붙여진 채 길과 진리와 생명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주님께서는 신명기 17장 1절의 말씀, 흠 있고 악질적인 우리를 주님 에 바쳐져서 천국가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는 겁니다. 10여 년 전에 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지구인을 못살게 구는 내용입니다. 어릴 때 그 드라마를 보고 얼마나 무섭고 놀랐는지 밤에 잠을 잘 못 잤어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껍데기를 벗겨보니까 속에 파충류가 들어 있어요. 사람 피부 안에 괴물이 들어 있어요. 베드로가 껍데기는 베드로지만 안을 들추면 예수님 나옵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안에 들어 있어요. 우리는 이걸 반대로 합니다. 껍데기는 예수 껍데기 하고 속은 여전히 괴물 같은 자기가 들어 있어서 주인행세 하고 있어요.
옛날에 엿장수가 동네에 왔어요. ‘병이나 떨어진 냄비 가져오세요.’ 하니까 다섯 살짜리 애가 얼마나 철이 없던지 집에 가니 참기름 병이 있어요. 안에 있던 참기름을 다 부어버리고 그 빈병가지고 엿 바꿔 먹은 거예요. 이게 오늘날 한국교회입니다. 채워야 될 것은 다 치워버렸어요. 진리, 법 없는 것, 생명, 사랑, 용서로 채워야 할 텐데 그것은 치워버리고 교회 왔다는 것을 빌미로 ‘예수님, 힘주세요. 엿 주세요.’ 합니다. ‘에라, 엿이나 먹어라’ 엿 달라고 오는 거예요. 달콤한 엿이나 빨아먹으면서 천 년 만 년 살 겁니까.
신명기 17장을 생각해보세요. 주님은 지금 쓰레기 같은 우리를 천국에 넣어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엔진자체가 바뀌어야 됩니다. 이제는 법으로 따지는 것이 주님의 용서로서 자신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용서와 사랑과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줬다는 것, 진리와 생명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보물이 되어야 되고 우리의 영원한 엿이 되어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 동안 남과 비교하면서 잘난 체 하면서 살아왔었습니다. 정말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천국 갈 수 없는 지옥가야 될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웬 은혜고 웬 사랑인지 간통한 여인보다 더 심한 죄를 지은 우리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리라 내가 너를 용서했다.’는 그 용서가 우리 속에 속속들이 침투 되어서 모든 구석구석에 주님의 용서와 사랑과 자유함이 넘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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