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4월 2일 강의 요일 3:2 자기정립(힘의응축) vs 죄와 말씀구조와 죽음
안산 4월 2일 강의 요일 3:2 자기정립(힘의응축) vs 죄와 말씀구조와 죽음
이름 : 관리자(IP:124.59.86.6)
100402 자기정립 vs 죄와 말씀구조와 죽음
관리자(IP:124.♡.86.6)
10-04-03 15:21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안산/안산100402요일3장2절a.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안산/안산100402요일3장2절b.hwp
관리자(IP:124.♡.87.52)
10-09-10 21:40
안산100402요일3장2절a
안산100402요일3장2절a 자기정립vs죄와 말씀구조와 죽음/이근호 목사님
20104월2일 요한일서3장2절
요한일서 3장2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가 나타내심을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 아는 것은 그에 계심 그대로 볼 것임이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요한일서에서 나라는 것은 그냥 거울 봐가지고 나라는 것은 나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나를 봐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 여기 계시면, 나라는 것은 내가 나를 봐서는 내가 나를 모르죠. 내가 나를 보면 ‘나’가 틀리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항상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가 누구를 봅니까, 내가 나를 보지요. 내가 나를 보고 '나는 이러이러하다‘라고 결정을 내는 겁니다. 내가 이러이러하다고 결정이 되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여기서 뭐냐 하면 기대와 소망이 발생되죠. ’나는 이러이러하다‘라고 하면 이거는 현재를 말하는 것이고, ’나는 이러이러했다‘라고 하면 과거를 얘기한 거겠죠? ’나는 이러이러하고 싶어‘라고 한다면 자기의 미래, 소망을 나타내겠죠. 기대와 소망...그래서 ’나는 이러이러하고 싶다‘하는 것은 내가 나에 대해서 항상 이런 식으로, ’자기정립‘이라고 하는데요, 나는 이런 인간이다, 하는 것을 자꾸 정립을 시키려하는 거예요, 자기정립을.
자기정립을 시도하게 되면 세 가지를 모르게 됩니다. 첫째는, 죄에 대해서 모르게 되요. 왜냐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기 때문에 ‘죄’라는 것을 생각을 않게 됩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이 말씀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몰라요. ‘세상은 세상에서 나왔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세상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말씀구조에서 세상이 나왔습니다. 자기 정립, ‘나는 무엇 무엇이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 여기에 몰입하게 되면, 첫째는 죄에 대해서 모르게 되고, 죄에 대해서 모르게 된다,가 무슨 뜻이냐하면 말씀구조에 의하면 인간은 죄인이게 되어 있죠? 인간은 죄인이죠? 말씀구조에서 인간은 죄인이라면, 말씀 자체가 가만히 있는 겁니까, 움직이는 겁니까. ㅡ어렵기 때문에 주고받고 합시다.ㅡ 말씀은 움직이죠? 말씀에 의한 인간의 죄 같으면, 말씀이 항상 우리를 쏘아대는데 ‘너는 이래서 죄인이야,’ 라는 것을 우리 허락도 안 받고 말씀 쪽에서 쏘아대겠죠.
그런데 우리는 ‘나는 무엇 무엇이다’ 여기에 이걸 고집해버리면,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으로 인하여 죄가 들어오는 것을 버티려고 해요.(어렵죠?)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했다고 해서 더 이상 말씀이 내게 침투하지 못하도록 기피하고 말씀을 안 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 ‘당신 십자가 압니까?’ 하면 ‘나 죄인인 거 알아요,’ 화내듯이 얘기합니다. 자기 죄인인거 아니까, 내 맘대로 살게 내버려 두라는 거예요.
나는 죄인인 걸 안다, 는 그 자체로서 예를 들어 ‘나는 무엇 무엇이다’(여러분 오늘 좋은 거 배웁니다) 항상 나라고 할 때는요,(이거 상당히 중요합니다) ‘나는 ~이다’난 술어가 붙는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주체는 문법적으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기호학적으로)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나는 나다’ 이것도 술어잖아요. 술어라는 말은 풀이한다는 뜻이에요.‘나’는 주어이고 ‘나는 아름다워’ 했을 때 아름다워는 술어가 되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보면 좋아’ 이러면 술어가 되는 겁니다. 나는 어쨌다고? ‘나는 죄인이다’ 이걸 자기정립이라 했죠? 이런 자기정립이 되어버리면 ‘나는 죄인이다’ 라는 말을 했던 그것으로서 더 이상 나는 죄인이다, 라고 하지 마라, 고 버티게 되는 그런 현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신학을 했다는 게, 개혁주의 신학을 했다는 게 자신에게 화가 되요. 아예, 구원을 가로막는 식이 되는 겁니다. 차라리 평신도 같으면 ‘날마다 말씀이 와서 나를 죄인이 지적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텐데 신학을 하게 되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것을 ‘잘 배웠습니다.’ 이러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의 구조지 말씀의 구조가 아닌 거예요. 다시 할게요, 말씀의 구조는 그대로 있다? 살아있다? 살아 있다면 ‘나는 ~ ~이다’ 라고 굳히고 있어도, ‘나는 십자가 안다, 언약 안다,’ 뭐라고 굳혀도 그거와 상관없이 매일같이 말씀은 우리를 이러한 고백과 상관없이 ‘너는 죄인이다’고 움직여 쏘아대는, 벌떼처럼 쏘아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왜 그렇게 쏘아대느냐,‘나는 무엇이다’라는 식으로 버티지 말라는 겁니다. 왜 그러냐면, 이 세상은 말씀구조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구조라는 것은 십게 말해서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우리 여기 있는데 왜 말씀만 있다 하느냐’고 우깁니까? 하는데 우리는 말씀에 의하면 하나의 질점입니다. 하나의 점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아닌 것 같죠. 나중에 화장터에 가서 불에 태워보면 한 줌의 뭐라 합니까. 재죠, 가루죠, 점이잖아요. 질점...점이 될 때 우리는 첨부터 점으로 만들어 놓고 말씀이 우리를 죽여서 우리로 하여금 점되게 합니다.
점은 면적도 없고 크기도 없잖아요. 점이라는 것은 어느 구조 안의 점이에요. 그 구조가 무슨 구조입니까? 말씀구조 아닙니까. 내 말 맞잖아요. 인간은 말씀구조 안에 있다니까요.
인간은 자기정립에 의해 살면, 첫째는 죄에 대해서 모르고, 두 번째는 세상이 말씀구조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한 목사가 있다고 합시다. 목사는 자기 딴에는 말씀을 잘 가르치려고 애를 써요. 그런데 속마음은 딴 데가 있습니다. 어디가 있느냐 하면, 말씀대로 잘 양성된 건전한 교회, 이걸 내심 노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교인들은 그것을 눈치 못채죠. ‘우리 목사님은 말씀밖에 몰라’하겠지만 말씀밖에 모른 게 아니고, 말씀을 가르쳐서 뒤에 얻고자 하는 게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괜찮은 교회, 자기는 목사. 괜찮은 교회를 키우는 목사로서 ‘나는 괜찮은 교회를 키운 목사입니다’ 라는 술어가 달라요.‘나는 괜찮은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삽니다’를 뒤에 달고 있는 거예요.
교인들은 그걸 눈치 챌 수가 없습니다. 말씀 전하니까 ‘우리 교회 목사님 잘하고 있는데 왜 자꾸 비판적으로 이야기 합니까,’ 하는데 제가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은, 어떤 교회가 있다, 어떤 목사가 있다. 그거는 하나의 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점에 불과하다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볼 때에 교회도 아무것도 아니고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관점이 어떤 관점이냐 하면 바로 말씀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게 보인다 말이지요.
만약에 말씀구조로 벗겨버리면 남는 것은 각 개별자만 남아요. 개별자... 각 개별자가 남으면 하나하나가 뭐냐면, 힘의 응축입니다. 개별자 하나하나가 방금 뭐라했습니까? 힘의 응축 이라했죠? 힘이 뭉쳐진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재산 50억 있다, 그러면 50억짜리 자아가 되고 한쪽은 10만 원짜리가 있다, 그러면 10만원짜리 자아가 되는 거예요. ‘나는 50억짜리 재산가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위에 뭐가 있느냐 하면, 말씀구조가 있어야 됩니다. 말씀구조가 있어야 되는데 말씀구조에 있지 아니하면, (관심사가 말씀에 있지 아니하면) 관심사가 타인에 있어요. 그래서 ‘나는 ~ 이다’에다 뭘 집어넣으려 하냐면 남이 갖고 있는 것을 집어넣으려 합니다. 사람이 갖고 있다는 것은 남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갖고 싶어해요.
여러분들이 자식 둘 이상 키울 때, 항상 엄마가 뭘 주면 아이들은 자기 것을 봐야 되는데 뭘 봅니까? 자기 것만 보면 되는데 형은 얼마나 가졌는가 봅니다. 같은 빵을 떼어줘도 형 쪽에 많이 가졌는가 슬며시 봐요. 세뱃돈 줘도 형은 얼마 받았는지 꼭 묻지요. 그래서 세뱃돈 줄때는 형부터 주지 말고 동생부터 먼저 주고 내보내야지 만약에 형 주고 난 뒤에 동생 주면 자기는 적게 받았다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비유 있지요? 10시에 온 사람, 열두시에 온 사람, 세시에 온 사람, 다섯 시에 온 사람... 농부를 불러내는데 품삯을 뭐부터 줍니까?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부터 주지요? 처음 온 사람 주고 보냈으면 아무런 일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품삯을 주니까 아침부터 온 사람들은 얼마나 기대를 했겠습니까. 기대 나왔지요? 기대가 뭐라 했습니까? ‘나는 ~ ~ 이다’ 가 기대잖아요.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 받았으니까 나는 다섯 데나리온 받을 것이다, 라는 기대를 아침 10시에 온 농부가 갖고 있을 거잖아요. 그런데 다섯 데나리온이 아니고 한 데나리온 줬잖아요.
그러면 이 구조는 뭡니까. ‘나는 ~ 이다’는 천국에서 인정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절대로 ‘나는 ~ ~이다’는 인정받지 않아요. 이 땅에서는 개별적으로 그런 구조를 갖고 있더라도. 그런 구조를 가져야 개별자 노릇을 하더라도... 천국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한 데나리온이라는 것은 ‘나는 ~ ~이다’ 여기 비어있는 곳에 주는 것이 아니고 한 데나리온은 하나님의 말씀구조에 의해서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선물이 되는 겁니다.
천국은 선물입니다!! 나는 무엇 무엇이다에 집어넣을 수 없어요. 말씀구조가 우리를 덮쳐버리면 ‘나는 무엇 무엇이다’라는 게 그대로 남아있는 게 아니고 뭉개져버립니다. 뭉개져버리고 ‘예수님은 ~ 이다’로 예수님 주어에 예수님은 술어로 바뀝니다. 나는 여기 들어가요.‘예수님은 나에게 선물을 주신 분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나는 뭐냐 하면 소달구지죠. 내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 위에 실린 짐이 중요한 겁니다. 하나의 이런 식입니다.
인생을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내가 무엇이다가 아니라, 나는 주님께서 부리는 하나의 수레, 그릇, 도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의 주어는 항상 내 몫이 아니고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했다,’ 이렇게 됩니다. 나는 경유(經由)지점이에요. 왜! 하나의 질점이니까! 죽으면 하나의 흙으로 돌아가니까. 흙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이렇게 해야 돼요. ‘나는 흙인데도 불구하고 주의 십자가 피를 흘려서 나를 사람 되게 하셨다,’ 그 이야기가 나와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미래, 예수님의 시간인데 요한일서 3장2절의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말씀구조에서 나왔지요? 그다음에...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다, 이것은 우리가 무거 되고 싶다,와 관계없이 말씀구조에 의해서 우리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되느냐, 그 뒤에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대로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3장2절의 말씀입니다. 같은 성경구절을 봐도 ‘나는 뭐가 되고 싶다’가 되면 성경을 해석할 수가 없어요. 항상 성경을 볼 때는 예수님이 주어가 되신 말씀구조를 가지고 되는 겁니다.
그 목회자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그 목회자는 말씀을 이야기 하면서 항상 뭘 갖고 있냐면, 말씀으로 괜찮은 교회 하나 내가 잘 훈련한, ‘나는 괜찮은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다’ 에 있으면 이 사람은 말씀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소유의 교회가 되기 때문에 말씀을 (말씀만 가르친다 하지만) 그 말씀이 뭐냐 하면, 건성건성 말씀의 깊이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제가 언젠가 수요설교에 말씀드린 것 같은데) 말씀에는 층이 있어요. 피부니까 표면층, 여기에 층들이 있는데 표면층들은 육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표면층에서 나오는 두 가지 해석이 뭐냐 하면, (같은 해석이지만) 역사적 해석과 문법적 해석은 육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제가 개혁주의 논문 할 때 제일 마지막에 한 말이 ‘당신은 육적해석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역사적, 문법적 해석이에요. 이거는 왜냐 하면, 고린도후서5장에 보면 나는(사도바울) 전에는 육으로 예수를 알았다, 하는 것이 나오죠. 전에는 내가 예수님을 육으로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는 육에서 알던 그런 예수님이 아니고 영으로 예수님을 안다 했습니다. 이런 경우의 체험이 같은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공통적인 현상이 되어야 합니다. 공통적인 현상...
영으로 해석을 하려면 자기정립이 와해 되어버려요. 부서져버려야 돼요. 주님이 오늘도 나를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이렇게 되어야지, 나는 예수님과 이런 거래를 하고 있다, 이러면 안돼요. 그래서 육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이...(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세상은 무슨 구조라했다? 말씀구조라 했다. 말씀은 정지됐다? 움직인다? 움직이죠. 말씀이 세상에 대해서 치게 되면 이 세상은 말씀 구조로 돼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은 육으로 되어 있다는 이 표피층의 의미는 날아가 버리고, 그 깊이 점점 더 다른 층이 나오죠. 층이 풀이면서 나올 때마다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낯선 사건들이 나옵니다. 자꾸 낯선 사건들이 나와요.
사실 새로운 사건이 아니고 이미 벌어진 사건인데 이 사건이 (제가 어렵다 했습니다요? 참으세요?) ‘나는 ~이다’는 이것을 내 쪽에서 원인을 갖고 여기 일어난 일을 내 쪽에서 만들어낸 결과로 본다면 이것이 바로 내 중심의 육적해석이거든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역시 성경을 열심히 보니까 땅 값이 오르는구만, 내가 사놓은 땅 값이 오른 것은 성경을 열심히 봤다, 내가 하는 행위가 원인이 되어서 결과가 나왔다고 본 거죠.
이 강의는 다음 주 경주에서 야고보 할 때 하려고 합니다만,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나온 결과가 육적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볼 때에 바로 그런 육적인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서 그걸 뭐라고 하냐 하면, 그걸 현실이라고 합니다. 제가 수십년 전에 설교를 하고 나니까 대구 대덕교회 어떤 장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근호 목사님은 이론은 잘 아는데 현실을 모른다,’ 이러더군요.
이 사람은 표피층에 있는 현실, 내가 육적으로 아는 현실을 현실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이 세상의 현실은 말씀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살아서 우리를 때리게 되면 무슨 층이 벗겨지겠습니까. 육적인 표피층이 떨어져 나가겠지요. 떨어져 나가면 내가 가진 것은 뭐가 되냐 하면 하나님이 원인이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가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남들 보기엔 이론이라고 하지만, 본인한테는 뭐가 되는 겁니까. 그게 더 현실이 되는 거예요. 다시한번 정리 해야 되겠지요? 자꾸 되풀이해서 알아야 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제가 방정식으로 얘기했죠? ‘나는 ~이다’ 이걸 현재라 하고, ‘나는 ~ 이었다’ 이건 과거고, ‘나는 ~가 되고 싶다’ ‘나는 ~을 기대 한다’ 이거는 소망 또는 미래라 했지요? 이걸 자기정립이라 했죠. 이런 자기정립을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육적인 해석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원인이 되어서 어떤 해석을 해버리면 그 현실은 나에게 필요한 것만 뽑아서 하는 겁니다.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세상은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지만, 사람들은 모든 사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관련된 것만 뽑아서 되는 거예요.
그 관련된 것을 뽑을 때 뭐와 관련된다 말합니까. ‘나는 ~가 되고 싶은데 아! 저거구나, 복 주시려고 이런 혜택을 주시네,’ 자기가 되고 싶은 게 있는 마당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거는 자기와 관련 있는 사건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뽑아 버려요.
서해안에 물에 빠져 죽은 병사하고 관련된 분들 계십니까? 이 자리에 없지요? 없으면 뉴스가 지루해지는 거예요. ‘뉴스 그만 해라~ 뉴스 40분에서 30분간 잡아먹는다. 이제 그만 해라,’ 이러죠. 만약에 동생이 거기에 빠져 죽었다. 한 총리(韓昇洙)재판한 거 그 뉴스만 나오길 기다리죠.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항상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 ~을 기대 한다’ ‘나는 ~ ~이 되고 싶다’ ‘나는~한 인간 되고 싶다’ 라는 것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인으로 쥐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용납하지 않지요. 오늘 공부한 요한일서3장2절이 용납하지 않지요. 요한일서3장2절은 ‘나는 ~~ 이 되고 싶다’는 것을 뭉개버리고 예수님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는 예수님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 됩니다. 그런 식으로 현실을, 그런 식으로 세상을 다시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동생이 서해안에 빠져죽었다, 했을 때 다른 유족들은 실신하고 자빠지고 난리 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원인이 되어서 내 동생이 그만큼 살았다고 유일한 해석으로 믿는 사람 같으면, 그 사람의 관심사는 물에 빠져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물에 빠져 죽은 걔가 어디 가 있겠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어디에 가 있겠어요. 만약에 그 동생이 복음을 안다면 어디에 가 있겠습니까. 십자가 피를 믿는다면, 세상에서는 시켜주지 않은 제대를 하나님께서 강제로 이 세상 자체에서 제대를 시켜준 거예요. 실신...왜 합니까. 실신만 하나요, 뒤에 또 보상금 재판할 겁니다. 코스가 빤한 코스 아닙니까. 그러니 평소에, 우리가 물에 빠지고 차에 받히기 전에 ‘나는 ~ 에 기대 한다’는 말씀에 의해서 얻어맞아야 됩니다. 이게 내가 원인이 아니라 누가 원인이다?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지금까지 이만큼 구성되어 왔다, 형성되어 왔다,는 주님이 주신 결과물로 은혜의 결과물로 받아져야 합니다.
갈라디아서6장에 보면, 우리 자체가 영적 열매예요.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성도를 무시하지 마세요. 하나님에 의해서...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10장에 보면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품과 우상인 마귀가 만든 제품과 어떻게 까막눈일 수 있느냐 하는 이야기죠. 내 속에, 하나님이 만들어진 그 속에, 인간이 만들었다고 여기는 것을 담아두지 마라, 왜!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이다. ‘육과 영이 어떻게 함께 하리요!’ 육과 영이 어떻게 함께 하리요, 이 말을 성화론 쪽으로 봐버리면 정말 아니올시다! 정말 아니올시다! 이거는 또 사시 현실을 ‘나는 ~이다’에 준해서 현실을 바로 보자는 거예요.
첨부터 새로 시작하네요. (그냥 넘어 갈까요?) 그래서 요한일서3장2절에 보면, 우리가 어떻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걱정할 사항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주님에 의한 결과물이라면 ‘나머지 미래는 확정되어 있다,’입니다. 어떻게 확정됐다 했습니까? 그분이 나타나시면 예수님처럼 우리가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이다’라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지요? 첫 번째는 죄에 대해서 모르고, 두 번째에는 말씀구조에서 모르고, 세 번째는 죽음을 모릅니다. (나는 ~ 이다, 라는 구조에 있을 때)
죽음을 모른다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기독교란 무엇이냐면,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려내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은 자가 말하는 지시를 받아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죽은 자를 상대하지 않고 누구를 상대하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산 자를 의식하는 거예요.‘ 저 집사님이 어떻게 생각하나’ ‘저 장로님이 날 어떻게 생각하나’ ‘목사님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맨날 이웃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눈은 자꾸 산 자만 보이는데 정작 심판주는 항상 우리한테는 죽은 자로만 계셔요. 죽은 자로만...
그래서 왜 주님께서 죽은 자로 계시느냐 하면, 실상은 우리가 산 자가 아니고, 우리가 살았다고 우기지만 우리가 죽은 자고 진짜 살아있는 자는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죽어도 산 자)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가 죽은 자인데, 우리는, 예수님은 이미 2천년전에 죽어 없어진 분이고 현재 살아 있는 건 우리가 살아있다 하니까, 바뀌게 된 이 두 구역은 서로 의사소통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바뀌게 된 것을, 주께서 바꿔서 이야기 해버린 거예요. ‘그래! 내가 죽은 자 할께 너희 산 자 할래?’ ‘예, 산 자 하렵니다’ ‘그러면 내가 죽은 자 할게’ 너희는, 산 자는 죽은 자를 믿어야 산다는 겁니다. 주체자를 분명히 하라는 겁니다. 살고 죽는 주체가 분명하다. 주체자가 ‘너도 살고 나도 살고’가 아니라 예수님만이 주체자가 된다면, 우리는 우리를 포기해야 됩니다.
우리 스스로 살고자하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 사신 것에 우리는 도구가 되고 수단이 돼야 되요. 어떤 수단? 주님만이 살 수 있는 분입니다, 라고 믿으면 그 증거로 인하여, 그 지시로 인하여 그 사람이 사는 겁니다.
제가 요한일서 이야기 하면서 갑자기 왜 요한복음 이야기 하냐면, 요한일서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사랑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자기 안을 비워 놔요. ‘나는 ~ 이다’고 ‘나는 사랑 받을 만하다’고 비워 놓는데 이 복식 자체가 없어져야 됩니다. 내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사랑은 나를 끌고 가는 사랑이다. 나를 포기하지 않은 사랑이에요.
‘나는 사랑 받았다’고 남에게 자랑할 수밖에 없는, 나를 포기 않는 그런 사랑이기 때문에 이 사랑은 ‘나’는 주어고 술어는 뭡니까, ‘사랑 받은’이 술어가 되니까 이런 구조는 하늘나라에 통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침 10시에 일했습니다’ ‘나는 열두시에 일했습니다.’‘나는 세 시에 일했습니다’ 전혀 그거는 하늘나라와 관계가 없어요. ‘내가 일했습니다,가 아니라 ‘주여, 나는 일한 것도 없는데 왜 주십니까’를 주체를 내 쪽이 아니라 주시는 분으로 예수님으로 옮겨가야 되지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포도원 주인 이야기, 포도원 일꾼 뽑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죠. 전에는 육으로서 예수님을 알았지만 이제부터는 영으로 예수님을 안다, 우리는 보통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영적인 사람 하나가 육적인 사람 10명 안 부럽습니다. 한 쪽은 죽음의 영역에 있고 한 쪽은 생명의 영역에 있는데 어떻게 비교가 됩니까. 층이 다른데요. 이거 하고 십분 쉽시다.
다시 얘기합니다, 말씀구조에는 맨 앞에 무슨 층이 있다? 표피층, 피부...이거는 문법적 해석, 역사적해석이 나오죠. 육적인 사람도 다 이해 되는 국어책! 국어책으로서의 성경입니다. 이게 이런 식으로 한다면, ‘나는 ~이 되련다,’ ‘나는 ~이 되겠다’ 이것이 예수님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뜯겨 나가면서 ‘나는~이다’로 보는 현실과 세상은 허망한 거예요. 앞뒤에 숨어있는, 주님이 주체가 되는 주님이 나를 살려서, 그 앞에서 나는 주님을 싣고 다니는 수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층. 이 층까지 내려가서 해석이 되어져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요한일서에서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라고 해야 되요. 나는 아무리해도 주님을 사랑할 수 없고, 주님이 나를 사랑해서 나로 하여금,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의 표피층으로 나를 밀어 넣은 겁니다. 밀어 넣으니까 불신자들이 뭐라고 오해 하냐면, ‘네가 교회 충성하더니만 복 받았구만’ 이런 식의 육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뭡니까,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주님께서 나를 밑에서부터 떠밀어내서 그런 거야’ 주님께서 떠밀어 낸 거예요.
엄마가 만약에, 이번에 배 깨졌을 때, 엄마하고 애들 함께 탔다면, 애는 선실에 있고 엄마는 갑판에 있다면 자기부터 살겠다는 엄마가 어딨겠습니까? ‘욱이야, 너는 살아야 돼,’ 하면서 아이를 살려 내겠지요. 욱이가 산다면, 나중에 기자회견 할 때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고 한다면 ‘엄마가 밀어 냈어요’ 하는 것처럼 주체가...주님이 지금도 말씀에 따라 약속 때문에, 약속의 생성물이니까... 약속이 원인이고 우리는 결과물이니까, 약속이 빚어낸 우리는 주님의 피부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밀어낸 표피층이 오늘날 우리는, 성도라는 돌출물로 등장하는 겁니다.
십분 쉽시다.
2010-09-09 19:53:51 녹취 : 박온정
관리자(IP:124.♡.87.52)
10-09-10 21:40
안산100402요일3장2절b
안산100402요일3장2절b / 이근호 목사님
요한일서 3장4절에(3장3절은 이까 얘기했지만) 주께서 소망을 일방적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에 주께서 정해놓은 약속을 바라보는 것, 4절에서는 그걸 사랑이라고 하는데, 4절에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말씀이 좀 이상하죠? 여기,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법을 어길 때 죄가 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아는 사실은 그렇지요? 법이 먼저 있고 법을 우리가 위반했을 때 죄가 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구조에 의해서는 발길로 차버리는 게 있습니다. 말씀구조에 의하면 다 구원받을 수 없어요. 반드시 죄를 지어야 되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게 있는데 뭐냐면, 불법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 성경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고, ‘불법 나오거든 아닌 걸로 아세요,’ 하고 통보하는 겁니다. 대한민국 군대가 빡쎄지만 여자들 안 갑니다, 남자들만 가지요. 여자한테 입영통지서 안 나오지요?
이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너 남자야 여자야’ 입영통지서를 통해 그냥 통보하는 거예요.
‘군대 와!’ 이 말은 ‘너 남자야’라는 말이고 아무리 기다려도 통지서가 안 오면 당신은 여자라는 뜻이에요. 불법이라는 것을 끄집어 낼 필요가 있는 거예요. 불법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그 다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뭐냐’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드시 악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말씀은 자진해서 부지런히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불법을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불법이 있기에 세상이 불안전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불법이 횡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만한 분이 아니다, 라는 것도 잘못이고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구조에 의해서는 불법은 나타나야 되고, 죄짓는 사람이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그런,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그거는 반드시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런 게 나와 주어야 우리의 정체가 밝혀지니까. ‘아, 우리는 저쪽편이 아니구나,’라는 것이 자동적으로 밝혀지니까 그런 겁니다. 지키는 문제가 아니고, 필히 이렇게 된다는 거예요. 요한일서에서 항상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되는가, 요한일서의 구조는 빛에서부터 사랑입니다. 빛에서부터 사랑이라고 하는데, 빛에 있어서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면, 외부적인 빛이 있고 내부적인 빛이 있습니다. 제가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봤냐 하면, 미술 역사에 대한 화보가 있는 두꺼운 책을 봤어요. 봤는데, 두 가지 작품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둘 다 예수님에 대한 그림이었는데 예수님그림이 있는데 하얗게 빛이 비치고, 그 옆에는 까맣게 처리한 그림이었어요. 또 한 그림이 있는데 포맷이 비슷합니다. 내부적으로 빛이 올라오고 다른 데는 어두운, 하나는 조명 빛이고 하나는 내부적으로 발생되는 빛이 비치는 걸 봤어요. 눈에 확 뜨였습니다. 요한일서를 보는 것 같았어요.(목사님 너무 문학적이시네요-녹취자)
요한일서 1장2절에 뭐라고 하셨냐 하면, 빛의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빛이라고 하면 왜 어려우냐면, 빛은 사물이 아니고 뚜렷한 대상이 없습니다. 그냥 분위기고 환경을 조성하는 거죠. 그는 빛의 구조 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죄 없다할 사람이 없고 다 죄가 드러난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빛이 비치는 것은 여러분들이 사랑받는 사람인지 안 받는 사람인지 가려내기 위해서, 빛이 와서 가려낸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내부적인 빛과 외부적인 빛이라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것은 빛 되신 주님께서 오면 성도를 이런 식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항상 무엇을 의식할 수 있느냐 하면, ‘누가 나의 정체를 이렇게 밝혀줍니까?’ 라는 것을 늘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항들이 자꾸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불신자는, 불법을 행하는 자는 세상이 둘로 나누어진다는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를 않습니다. 빛있는 사람과 빛없는 사람, 사랑받는 사람과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이 나누어진다는 이 자체에 대해서 완강하게 그것을 거부해요.
왜 그러냐면, 빛을 안 받아서 그래요 빛을. 제가 본 그 그림을 보면 사도바울이 거리에서 빛을 받아 떨어지는 장면도 나와요. (바로크 시대의 유명한 작가인데) 사도바울이 빛을 받았을 때 강렬한 빛 때문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눈이 멀었죠. 외부적인 빛이 왔잖아요. 그것부터 갑자기 뭐가 생깁니까? 외부적인 빛이 내부적인 빛으로 장착되어 자기 내부가 밝혀지는 거예요. 내부에서 빛이 올라오는 거예요.
어쨌든, 외부든 내부든 간에 그 빛은 자신과 이질적인 것이고, 항상 자기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겁니다. 이 빛의 기능에 대해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구약에 보면 (구약의 진행은 항상 시내산입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시간 위주가 아니라, 시간은 시내산의 공간에 종속된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출애굽은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이 뭐냐 하면, 위에 있는 거룩이 아래로 내려온 겁니다. 위에 있는 거룩이 아래로 내려오게 되면 속된 것과 동행하는 거룩이 되요. 속된 것과 동행한다고 해서 거룩이 속俗과 섞이는 건 아닙니다.
뚜렷하게 구분되면서도 속된 것을 지배하는 거지요. 수직적으로 지배하는 것처럼 지배하는 겁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수직적 세속의 공간에 역사적 공간이 종속됩니다. (이런 말이 참 어려워요) 무슨 말이냐 하면, 당신의 인생의 역사가 긴데 왜 깁니까, 하고 물으면 나는 거룩을 위해 살아 왔습니다, 이렇게 거룩이라는 공간을 담기 위하여 종속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종속이 되다 보면, 구약에서 있는 이 거룩이 여기에 들어오기 위해서, 첨에는 공간적으로 들어왔다가 나중에 모세 가문을 통해서(레위지파) 하나님이 만든 지시한 상자를 누가 포위하냐면, 레위지파가 둘러싸서 포위하고 그 곁의 열두 지파가 세 그룹으로 나누어서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래서 지파가 몇 갭니까. (12곱하기1)열 세지파가 되는 거예요.
13지파인데 오병이어처럼 12더하기1이 아니고 열둘을 지배하는 하나. 그런데 레위지파는 땅이 없어요. 지상에 땅이 없어요. 땅 없는 자가 땅을 가진 자에게 땅을 땅답게, 축복의 땅답게 만들어내는 요소가 들어있는 겁니다. 이 구조가 구약의 구조며 모세 언약입니다.
주변부분이 핵심부분에 의해서 어떻게 혜택을 입고 있느냐, 그걸 보여주는, 공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구약이라면 신약이 그대로 우리에게 작용하는 겁니다.
십자가마을에 들어가 보니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는데요, 사도행전에서 성만찬 떡을 뗀다는 것이, 떡을 뗀다는 장소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같은 장소입니까 다른 장소입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질문자체가 이상해요. 질문이 무엇인지... 그래서 답변하기를 ‘모두 같은 장소입니다’ 했어요. 여기서 성만찬 하나, 대구에서 하나 다 같은 장소입니다, 하는 거예요. 왜냐면 장소가 두 가지가 있는데 지리적 장소가 있고 영적 장소가 있어요.
영적 장소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동석할 때만 주님의 나라가 되는 거예요. 여기는 사람들끼리 모인 장소예요. 여기서 성만찬 해봐야 문화입니다 소용없어요. 모였다고 주님이 참석하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들끼리 기분 내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최면 거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의 살이요 이것은 피요. 백날 해 보세요 주님께서 명동성당 가는가... 주님이 거기 왜 갑니까. 주님이 호출할 때, 바로 그 내부적인 빛에 의해서 호출 받는 거예요.
‘너 죄인 맞잖아’ ‘맞습니다’ 주님이 호출할 때 그 순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거예요.
교인 백명 있다고 모두 호출된 게 아닙니다. 그 중에 5명만 호출당하는 사람 있으면 그 다섯명 가운데서 주께서 함께 계시고, 열 명이면 10명과 함께 계시니 백 명 다 함께 계시는 게 아닙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 가운데 누가 호출했으며 누가 동행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 나타날 때가 됐는데...’ 이랬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알아서 동행한 거예요. 그게 구약적 방법입니다.
거룩이 같이 동행해주면 그냥 동행하는 것이 아니고 뭐가 일어난다? 외적 빛과 내부적 빛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변화가 일어나면 그 빛의 주도권이 바뀌면서 자신은 속되다는 것을 느끼죠. 거룩한 것은 따로 있고 자신은 속된 것을 아는 것... 그런 식으로 동행하게 되면 어디서 어디로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구약에서는, 광야에서의 동행이라는 것이, 출애굽해서 약속의 땅으로 동행해 들어가게 되거든요.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 지리적 표현으로는 맞지요? 광야에서 들어갔으니까 여기가 안식의 땅이다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여기에 주님께서 늘 계시냐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이 약속의 땅에 안계시면 또 다시 이들은 여기에서 유리해야 되는 겁니다. 방황해야 되요. 그런데 주님의 거룩이 속됨과 동행이 되려면 여기에 반드시 뭐가 필요하게 되냐면, 하나님의 언약이 필요한데, 그 언약이 요한일서에서 뭐라고 하냐면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빛이 오게 되면 주님의 사랑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빛이 오면 사랑이 되지요? 사랑을 분해하면 우리는 죄인인데 주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했다는 사랑으로 오는 겁니다.
요한일서 4장10절에 보면 이걸 화목제물이라 하고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화목제물이니까 무슨 언약에 속하냐면 모세 언약에 속하지요. 모세 언약의 제사법에 속하지요? 제사법에 화목제물이 들어간다 이 말입니다.
다시 봅시다. 빛이 오게 되면 그냥 오는 게 아니고 반드시 동행하려고 오는데 동행함으로 오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죄인이 되고 용서받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랑과 죄인 사이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이 있지요. 화목제물 세울 때는 죄인과 주님의 사랑으로 되는 겁니다. 조금 더 말씀드리면 노아 언약에 보면 (모세 언약은 노아 언약에서 나왔습니다)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냄새가 주님의 코에 들어가면 주님께서 그 죄를 일체 묻지 않겠다,하는 겁니다.
자, 질문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어째서 정결한 짐승을 태워 죽인 냄새(흠향)가 하나님의 코에 들어가면 왜 죄에 대해서 일체 묻지 않습니까? 무슨 근거에 의해서 그렇습니까?
제 질문 자체가 잘못 됐어요. 무슨 근거냐 하면 바로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란 거예요. 이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제사법이 정결한 짐승 중심으로, 정결한 짐승에서 냄새를 생산해내는, 냄새를 만들어내는 장치가 모세 언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노아 언약에서 두 가지가 있는데, 노아 언약은 더러운 짐승과 정결한 짐승으로 묘사된 게 뭐냐면 심판이었습니다. 심판을 어떻게 통과됐는가, 심판에서 어떻게 구조되었는가? (구원이라는 말 대신 구조) 심판에서 어떻게, 물에서 어떻게 건져냈는가 하는 것은, 더러운 짐승을 어떤 식으로 구원되었는가 이 말이에요. 정결한 짐승이 개입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라 했지요? 더러운 짐승과 이 정결한 짐승 원칙을 제도적으로 계속해서 정착시키고 포착시키기 위해서 뭐가 되느냐 하면 모세 언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장치가 히브리서에 보면 이걸 그림자, 모형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시내산 위에서 이 모형이 내려올 때 거룩이 내려온다는 말은, 더러운 짐승이 있었다고 했는데 모세 언약에서는 산 밑에 있는 것이 몽땅 다 더러운 것이 돼요. 몽땅 다! 더럽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돌판이 깨집니다. 돌판은 누가 깹니까. 모세가 깨지요. ‘너희들은 언약 받을 자격도 없어!’ 하고 깨버린 거예요. ‘너희들은 언약을 혜택 입을 인간도 안돼!’ 하고 깨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보고 언약했다는 것을 로버트슨이나 모든 구약시대를 다 이야기해요.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맺었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을 맺은 적 없습니다.
인간은 언약을 깨는 쪽으로서의 참여죠. 언약을 맺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지켜야 되는 것이 아니고, 있는 언약도 깨는, 깨질 수밖에 없는 족속들이 인간이라는 거지요. 깨진 언약을 다시 원상복귀, 다시 회복하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세 언약의 완성 자가 따로 와야 돼요. 주께서 제사법 이야기 해놓고 그 다음에, 그걸 위해서 내 몸을 따로 준비했으니 그 분이 다윗 언약을 통해서 오신 분이다. 여기서부터 제사법이 뭘로 바뀌어야 되나면, 인격적 모습으로 바뀌어야 돼요. 왜냐면 우리는 제사법 해봐야 우리는 제사법도 깨질 판이니까. (아...이거 어렵다, 설명해야 된다)
제사법이 문장 아닙니까. 문장이 어떻게 사람 몸으로 연결이 되는 거예요? 그건 제물에게서 나왔던 피와 기름을 어디에 발라요? 사람에게 발라서 제물화 시키거든요. 그건 왜그러냐 하면 율법에 대해서, 인간은 ‘율법에 대해서 아다,’ 이렇게 나와요. 두 번째 알면 뭐하냐 실천에 옮겨야지요. 실천에 옮기면 세 번째는 뭐냐면 자기들은 참 하나님과 언약이 맺어졌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안다’가 하나님께는 뭘로 바뀌어야 됩니까. 알기는 개뿔 알아? 너는 몰라!! 몰라가 되어버리면 안다는 것에서 실천에 옮겼다는 그 성경말씀이 뭐가 되죠?
이것도 죄가 되겠죠. 모른 상태에서 실컷 했다고 하니까. 세 번째, 이것은 뭡니까. 악마가 되겠지요. 참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가 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간들이 있어주어야 언약이 깨지게 되는 거예요.
깨진 언약을 복사해서 언약궤 안에 들어간 겁니다. 그때 받은 그 언약궤가 들어간 것이 아니고 사람 손에 깨진 그 언약을, 깨졌다는 것을 계속 굳혀버리는... “깼잖아! 깼잖아! 너희들할 말 없어!” 깼다는 것을, 깨진 사건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그 돌판을 언약궤에 담습니다. 그러면 언약 안에서 영원히 언약을 깬 사람이 되는 거겠지요. 얼마나 이걸 “즐겨 비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즐겁게 비참해지면 좋아요. 문제는 비참해지지 않으려니까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아까 오신 분도 즐겁게 비참해지면 좋은데...
사람이 ‘나는 무엇이냐’ 돼버리면... 비참해지면 자살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즐겁게 비참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비참한 존재가 되는데, 우리는 싱글벙글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요한복음8장에서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자 잡아왔잖아요. 주님께서 글씨를 쭈욱 씁니다. ‘어이,김 씨! 15년 전에 너 도박했잖아!’ 쭈욱 씁니다. 이거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나는 죄인일 수 없어!’ 라고 버티고 있는 그 숨어있던 죄를 주님은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쭈욱~ 글씨를 씁니다. ‘어이, 박 씨, 최 씨!’ 이양반이 뭔가를 쭈욱 쓰는 거 보니까 자신의 일기장을 쓰는 겁니다.
손에 돌을 놓지 않을 수가 없어요. 전율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죄 없는 사람 돌로 치기! 죄 없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문제는 그들이 도망갔다는 게 문제예요.
‘여기 죄 없는 사람 돌로 치기’ 하면 도망가지 말고 우리는 땅에서 ‘죄인 여기 있습니다’ 이래야 되요. 왜냐면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 부르러 왔는데 (제가 아까 첫 시간에 뭐라 하던가요?) 나는 죄인이다,라는 걸 가지고 뭘로 대체한다? 나는 죄를 안다는 것으로 의를 삼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우리는, ‘주여 죄인 여기 있습니다. 딴데 가지 마세요, 제가 죄인입니다’ 하고 나와 줄 때 ‘나도 너를 정죄치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약 구상이 목적이기 떄문에, 언약 구상하려면 뭐가 필요해요? 깨진 언약이 필요하고 “어느 놈이 깼냐,” 하면 “제가 깼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깨진 인간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는 언약을 지키려 하니까 이게 마귀라, 이게 바리새인인 거예요. 이런 입장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이 그렇게 즐거워요. 어떤 성경을 봐도 ‘즐겨 비참’해 질 수 있는만큼 이 땅의 승리자는 없습니다. 마귀요? 다 재미없어서 가버립니다. 자기가 비참해지겠다는데 어떡해요. 비참해지겠다는데...복을 안 받겠다는데 할 말 다 했지요. 비참해지겠다는데 뭘로 시비 겁니까. 복 주세요 복 주세요 하니까 마귀가 들끓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것도, 사실 이보다 더 비참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봐줘서 이만큼 된 거예요. 덤으로 이만큼 사는 겁니다. 이보다 더 내려가도 우리는 할 말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깨트린 자인데... 하나님의 언약을 깨트린 자를 언약 구성체로서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언약을 깨트린 자를 언약의 구성원으로 집어넣었을 때 바로 동행이라는 것입니다. 동행...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냥 동행한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부활한 분으로 동행하잖아요.
동행할 때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 했겠습니까. ‘나 옛날 그 예수다’ 이런 이야기한 게 아니고 ‘나는 널 위해서 죽었다가 이렇게 너 때문에 다시 살아났다,’ 그러면 두 제자들은 ‘즐겨 비참’해도 성화 없는 사람 되는 겁니다. 그게 진정한 동행입니다.
더 이상 우리 자신, 이미 하나님의 언약을 깨트려버린 입장이거든요. 이것은 창세기3장에 나오죠?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이미 차단시켜 놨다는 그 일관성이 그대로 살아 있잖아요. ‘아, 안 되는구나 이미 끝장났구나,’ 그런데 주께서 언약을 계속 집어넣은 것은 창세가 3장21절의 말씀을, 그 취지를 역사로 쫘악 펼쳐버린 겁니다. 수직의 역사를 수평적으로 펼쳐버리면 왜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죽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거룩이라는 것은 구원이 원래 목적이 아니고 주님께서 말씀구조가 너희들은 이미 저주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오셨고, 그 중에서 구원 된다면 그건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줄 자에게 긍휼 주시는 거예요.
그걸 지난 수요일에 두 가지라고 했지요? 하나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고 하나는 소멸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거룩이 오게 되면 제물은 심판에서 축복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개입합니다. 거룩이 개입하게 될 때 우리는 뭐가 되냐면, 우리는 심판 받아 마땅한 자로 여겨서 마중을 나가는 것이 아니고 만나게 되어 있죠. ‘우리는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 이 와중에서 거룩이 주어지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심판 받을 자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축복받을 사람으로 달라지느냐 경로가 과정에 담겨지게 되겠지요.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이 뭘 증거 하겠습니까. ‘나 구원받았다’가 증거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나는 구원됐습니다,’를 증거 하겠지요. 이게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가 항상 붙어있어야 돼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했어요‘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거룩은 지상에서 제물이 되는데 제물을 담당하는 사람을 제사장이라 하죠. 저의 저서 <교회를 넘어서>라는 책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과 긍휼을 몇 가지로 나눴죠. 심판과 긍휼은 제사장에 보여주는 심판과 긍휼, 그다음에 장소와 시간이 보여주는 심판과 긍휼입니다.
안식일에 뭐가 없습니까? 광야에서 안식일에 뭐가 없지요? 만나가 없지요. 그러면 다른 날의 차이가 뭐가 있습니까. 만나가 있지요. 만나가 있어야 사람들이 먹고 사니까. 다른 날에는 만나라도 있으니까 먹고 산다, 역시 먹을 것이 있어야 살아, 라는 날이라면 이날은 먹을 게 없는데도 살았네, 이렇게 되죠. 그러면 안식일의 의미는 뭐냐면 하나님께서 그전에 준 것은 양식으로서의 만나가 아니라 말씀으로서의 만나라는 겁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만나라는 양식을 주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만나라는 양식이 안식일로 주는 떡이 아니기 때문에 만나가 양식측에 속하는 게 아니고 말씀측에 속하는 겁니다. (좀 어렵죠?)
‘먹고 살아야 교회도 나오지, 이러잖아요. 먹고 살 것 같으면 교회 나올 필요 없어요. 하지만 교회 나와서도 봉투에 5만원씩 넣어 일당 주게 되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무엇을 유지하게 되느냐 하면 역시 하나님도 배가 불러야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 유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나온 그것 때문에 짤려버리면 역시 월급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피로 산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다는 아니겠지만......다는 아니죠. 삐져가지고 교회에 안 나옵니다. (많아요, 우리교회에 그런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 복음 아는 교회에 나오면 주께서 취직시켜줄 줄 알았는데 영 소식이 없거든요.
제가 어제저녁에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요, 서울의 ‘길신교회’라고 굽은나무역이 있다는데요.(이런 역 이름 첨 들어봤어요) 4번 출구에 있는 교회인데 거기 부교역자로 있는 박승대 목사님 얘길 들어봤어요. 오직 복음만을 전하는데, 복음만을 전할 때 -총신 비대위에서 데모한 사람인데- 사모님과 함께 만났는데요, 박목사님은 뭘 경험했느냐 하면 바로 힘의 무서움을 경험했답니다. -젊을 때...신학교 때... 데모해서 짤려가지고 10년만에 졸업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무엇을 경험했냐 하면, 힘의 무서움을 경험한 거예요. 힘의 무서움을 경험했기 때문에 힘이 안 무서운 거예요. 면역주사를 맞은 거예요. (장시간 얘기했는데) 그분이 마지막에 이렇게 이야기 하더군요. 복음을 전하는데 놀랍게도 당회장 목사 빼놓고는 나머지 사람들은 은혜를 받는다는 거예요. 자기는 설교시간에 이럴 수가 없다는 거죠.
여러분은 제가 복음 전하는데 여러분은 왜 믿습니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에...복음을 믿다니요, 말이 안 됩니다. 여러분 오해 하신 거 아니에요? 다만 누가 미안하냐면, 당회장 목사만 미안하죠. 몇 번 압력을 하다가 나중에 포기 해버리더랍니다. 힘의 무서움이 다른 게 아니에요. 생존의 무서움이죠. 생존의 무서움을 경험한 것 같으면 다음부터는 생존이 안 무서운 거예요. 면역주사를 맞은 거예요. 그런데 생존의 무서움을 경험해보지 않은 것 같으면 계속 예수를 찾는데 어떤 예수냐 하면, 힘 달라는 예수예요. 계속 힘의 지배를 받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무엇을 경험했냐면 죽음을 경험한 거예요. 사도바울의 눈이 가버리고 그야말로 죽게 된 것은, 초죽음 시킨 것은 내가 약해져야 될 만큼 주님은 센 거예요. 만약에 내가 강해버리면 누가 약해집니까. 주님은 별볼일 없는 사람이에요. 통장에 돈 많으면 뭐하러 교회 갑니까. 골프치기 바쁘고 돈쓰기 바쁜데...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조금 듣다 가버립니다. 여전히 힘의 구조가 힘의 무서움에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난 힘이 필요해요, 목사님 복음이 필요하지 않고 날 살려줄 힘이 필요해요’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반드시 화목제물을 경과해야 됩니다. 우리가 바로 힘을 좋아하는, 힘에 안절부절 못하는 이런 인간을 화목제물로 경과시켜버리면 우리는 힘의 무서움을 느끼는 거예요.
세상이라는 것은 추상이 아니고 세상은 그야말로 실제로 악마의 힘으로 작용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혹독하게 경험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힘에 의해서 비참하게 되어야 해요. 비참하게... ‘역시 힘은 세구나’ 복음, 복음 해도 복음이 힘한테는 촉도 못쓰는구나. 악마가 역시 예수 믿는다는 교회보다 역시 더 세고 믿음보다 더 세다는 것을 혹독하게 느껴져야 됩니다. 그걸 통과할 때 우리는 화목제물과 더불어서 화묵제물이 갔던 그 길을 같이 통과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가룟 유다는 다 떨어져나가요. 예수 믿고 천당 가려고 그렇게 애를 쓰다가 결국은 ‘당신은 나에게 힘이 되지 못했어요’ 라는 여운을 남기고 떠나버리죠.
소설가들이 기독교에 대한 글을 많이 쓰잖아요. 글을 쓸 때 100퍼센트가 뭐냐면 힘주는 기독교에요. 법정스님이 무소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 무소유가 자신에게 힘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불교계에 법정스님보다 더 무소유를 외치고 더 허접속에 살아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알아주지 않은 사람이 수백 명 됩니다. 그런데 왜 법정스님은 알아주느냐, 책이 히트쳤거든요. 그 책이 힘이 됐다는 거죠.
지금 복음 외치는 사람 있어요. 있습니다. 있어도 저처럼(이근호 목사) 유명하지 않으면 돈이 안 들어와요. 유명해도 돈이 안 들어오지만... 그런데 구원 받은 거 보면 유명한 칼뱅, 루터는 다 떨어지고, 유명하다는 사람 테레사수녀는 다 지옥 가 있고 누구신지 정말 생판 모르는 인간, 그야말로 알려지지 않은, 목회 3년 하다가 때려치운 그런 사람 그러다가 고물상하는 사람, 그런 사람 천당가야죠. 그런 사람 천당 가야되는 거예요.
다른 힘이죠 다른 힘! 나를 의롭게 하는 힘! 나를 의롭게 할 것이냐 생존케 할 것이냐, 그 사람입니다. 나를 생존케 해주는 힘이냐, 날마다 죄짓는 나를, 언약을 깨는 맨날 봐도 성경말씀을 깨는, 깨는 이것을 날마다 화목제물에 머물러있게 하사, 화목제물 안에 있게 하사 나를 살려내는 주님의 피의 의로움. 그 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거는 본인만 압니다. 그거는 본인만 알아요.
그래서 그 사모님한테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사모님과 목사님 나이가 열여섯 살 차이가 납니다. 주위에서 땡잡았다고 난리 났습니다. 목사님이 꼬신 게 아니고, 사모님이 좋다고 해서 목사님은 난처해가지고 ‘당신과 결혼하면 욕 얻어먹습니다, 도둑넘이라 합니다’ 틀림없이 목사가 말 몇 마디 해가지고 20대 꼬셨다고 40대가 20대 꼬셨다고 욕합니다, 그러니까 나를난처하게 하지 마세요,‘ ’정말 이건 누가 봐도 욕합니다‘ 하면서 밀어내도 ’복사님 복음이 좋습니다,‘ 하면서 따라다닌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직도 복음이 좋습니까’ 하고 그 사모님께 물었어요. ‘우리 목사님 최곱니다’ ‘사모님, 목사님 복음 전할 때, 힘들 때, 목사님 설교 잘한다고 힘주세요, 힘주게 되면 목사님 힘이 나가지고 더 합니다,’ 목사님 가끔 이랬다네요.‘여보, 나는 진리보다, 복음 전하는 게 참 힘든데 이러다 짤리지 않을라나 모르겠다, 당회장과 몇 번 부딪혔는데 이러다 짤릴까 싶다’ 하니까 옆에서 사모가 하는 말이 ‘내가 먹여 살릴게 복음만 전해라’ 아...! 아직까지는 기계 잘 돌아 가요. 아직까지는 죽이 잘 맞아요.
이런 얘기 하면 목사님들 다 좋아합니다. 어디 그런 사모 없나? 나이는 16살 차이나고(교사거든요 그분이)교사해서 돈 벌어다 주고, 자기는 복음만 외치다가 쫓겨나갈 때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복음 전하다 쫓겨났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워요. 폼도 나고...그런 사람 없나?
미쳤나, 복음 전하다 쫓겨나더니 또 쫓겨나가나, 바가지 긁은 여자 말고. ‘내가 먹여 살릴 게 당신은 복음만 전해라’ 그런 사모 여기도 지금 두 사람 있습니다. 세 사람 있다 참, 희망사항...
화목제물에 합세하는 것, 그게 동행입니다. 동행...화목제물의 경과에 합세하는 것입니다.
그게 동행입니다. 동행... ‘화목제물 주세요’ 이게 아니라 ‘즐겨 비참’하게 만드는 거예요. 주님 가신 그 길을 주께서 제대로 끌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께서 끌고 간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끌고 가는 거예요. 어쩔 수가 없어. 자기는 못한다고, 않고 싶어도 안 돼, 주께서 나를 거푸로 끌고 가는데 저항도 안돼요. 반항하고 싶어도 반항도 안 돼요. 주님께 잡힌바 되어서 끌고가는 방식으로만 끌고 갈 때 그것을 ‘내적 외적 빛’이라고 제가 아까 얘기했죠. 그것이 우리 안에서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했습니다.
5절 봅시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법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3장6절) 이런 말이 어려워서 설명하기 힘든데요, 자꾸 뭔가 원인과 결과를 의도적으로 바꿔버려요. 자꾸만 바꿔버려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