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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3월 26일 에스겔 4장 선지자의 자리 vs 개별자 자리강의에스겔

광주 3월 26일 에스겔 4장 선지자의 자리 vs 개별자 자리

이름 : 관리자(IP:124.59.86.6)

100326 겔4장 선지자의 자리 vs 개별자 자리

관리자(IP:124.♡.86.6)

10-03-27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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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220.♡.41.203)

10-05-03 14:16

광주100326a에스겔4장a

광주 강의(2010. 3. 26) 5-1

에스겔 4장을 보면 에스겔이 이상한 행동을 해요. 1절에 박석(돌)을 가져다가, 그 위에 예루살렘을 그리고, 2절에는 운제(전쟁 때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 높이 세우는 것), 토둔(흙을 쌓아서 높이 만들어서 적의 성과 같은 높이를 만들어서 그곳에서 활을 쏘고 하는 것), 공성퇴(창처럼 앞에 뾰족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성문을 부수는 기구) 이런 것들을 그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런 일을 하라고 시켰어요. 하나님이 광주 사람들에게 이런 일 시킵니까? 안 시키지요. 그런데 에스겔에게는 시켰어요.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선지자의 자리에 가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부분입니다.

예전에도 말씀 드렸는데, 지하로 통하는 맨홀 뚜껑이 있다면 지하세계가 아무리 화려해도 맨홀 뚜껑이 있는 자리로 오지 아니하면 지상으로 올 수 없듯이, 이게 뭐냐 하면 선지자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그냥 일상에 따라 살아가죠. 학생은 학교에 가고,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면서 분주한데, 이런 우리들에게 ‘너는 토성을 쌓아서 어느 성을 공격하라.’ 이런 계시를 안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운 이유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우리의 일상의 자리가 구분됩니다. 이것을 ‘개별자’라고 합니다. 각각 따로 노는 거예요. 교회 주일날 잠깐 모일 때도 개별자로 왔다가 예배 마친 후에 속히 다시 따로 놀고. 제가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를 봤지만 초대교회는 따로 노는 법이 없어요. 한 형제고 자매라고 되어 있지 각자 따로 노는 것은 없어요.

선지자의 자리에 오지 아니하면 바깥에 있는 태양이 안 보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자기 자리가 깜깜해도 좋으니까 자기자리만 차지하면 그만이에요. 초대교회는 성도가 모일 때마다 즐거워했습니다. 모였다가 헤어질 때는 아쉬워했는데, 요즘은 반대로 되어서 교회 잠시 왔다가 재빨리 자기자리로 돌아가 버려요.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자리지 선지자의 자리가 아닌 겁니다.

하나님이 구멍을 뚫어놓고 선지자의 자리에 오지 아니하면 주님과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한다는 것을 구약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우리가 바로 선지자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우리가 선지자입니다.

우리가 선지자가 되려면, 선지자가 받았던 계시를 동일하게 받아서 하나의 심지처럼 우리에게 박혀서 우리가 어디를 가더라도 선지자가 됩니다. 항상 말씀이 같이 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위에 태양이 방긋 웃겠지요.

그러면 에스겔 선지자의 자리와 우리 자리의 차이점이 뭡니까? 선지자 자리에는 대적해야 할 원수가 있고 악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자리를 고집하면 원수도 악도 없어요. 그냥 이웃 사람이지 악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에요. 그냥 이웃집 아저씨지요. 내가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것처럼 그 사람도 평범하게 살 따름이죠. 저 사람은 마귀새끼고 나는 선지자다. 이런 대립이 아니고, 그저 정을 주고받고 다정하게 사는 이웃일 뿐이에요. 그래서 여기서는 영적 전쟁 개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 자리를 고집한다면.

청와대의 자리는 세종시 반대하는 민주당이 적이 될 것이고, 여러 가지 정치적 대립 관계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선지자는 악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와 싸우는가 하면, 힘과 싸우고 있어요. 돈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리는 하나님의 계시로 만들어진 자리라고 볼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만들어진 선지자의 자리는 뱀의 후손이 등장해야 되는데, 우리는 평소에 생활하는 가운데서는 뱀의 후손이 느껴지지 않아요. ‘저 사람이 얼마나 내게 도움이 될까?’ 그런 것만 기대하지 ‘저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야!’ 이런 생각을 안 갖습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야!’ 라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하면, 내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일 경우에만 복음에 관심 없이 살아가는 자들을 보면 화가 나고, 적개심이 생기고, ‘하나님 언제 세상을 심판하시렵니까? 빨리 시행하옵소서.’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내 자리만 사수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 그런 감각 자체가 없어요. 사람들을 만나면 “안녕하십니까? 식사는 하셨습니까?” 이것뿐이지, “예수님을 경외하십니까?” 이런 것을 묻는다는 것은 실례가 되지요.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에 당선되고는 기독교가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불교가 기고만장해요. 드라마에서 절에 가서 기도하거나 조상에게 빌 때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소식만 나오면 ‘종교 편향적이다. 대통령이 장로니까 불교를 탄압하는 것 아닌가?’ 이런 식으로 아주 예민하게 나와요.

그래서 제가 ‘지금 세상은 개판이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누가 만들었으며, 인간이 죽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 가도 선지자가 없어요. 에스겔 같은 사람이 있어야 “아하, 우리가 잘 못 살고 있구나.” 이런 인식이 들 것인데, 교회 가도 돈 이야기, 집에 와도 돈 이야기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형제가 되어버렸어요. 좋은 이웃이 되고 말았어요. 직장에서도 하나님 거론 않기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죽이는 재미로 살기.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했어요. 요즘 사람들이 보기에 신이 죽었다고 주장한 니체는 순진하고 착합니다. 요즘은 신을 죽이고 있어요. 신을 모독하고 죽이면서 ‘인간은 위대하다.’고 해요. 신을 약화시키고 죽이면서 반대로 인간의 위상을 높여요. 이런 분위기 속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선지자는 본인도 괴롭고 다른 사람도 선지자의 존재를 거북해하면서 무시하고. 선지자는 하나님께도 당하고 사람들에게도 당하고. 그러니 누가 선지자 노릇하고 싶겠습니까? 아무도 하고 싫어하지 않지요. 만약 에스겔이 신학교를 세운다면 입학생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왜냐? 좌편으로 누워 390일을 지내고, 우편으로 누워 40일 지내고. 누가 이런 짓을 하고 싶겠습니까? 학교에 가면 박사학위 받기를 원하지.

본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맞도록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4:8).”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하시는지 꼼짝 못하게 묶어요.

북쪽 이스라엘의 범죄를 위해서 390일, 남쪽 유다의 범죄를 위해서 40일, 에스겔은 묶인 채 누워서 지내야 했습니다. 유다의 범죄가 40년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 부터인가 하면, 요시아 왕이 종교개혁하고 그 이후부터 범죄한 날 수를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선지자가 이렇게 누워 있으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마음대로 못 움직이도록 묶어서 이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내용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의 원수가 보였고, 일반인들에게는 다정한 이웃만 보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는 내 자리를 고수하면 안 되고 선지자의 자리에 서 있어야 거기에 방긋 웃는 태양 같은 하나님의 뜻이 보이는 겁니다.

매일 교회당에 가서 살라는 말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과 통하는 말씀이 있는 곳을 반겨야 된단 말이지요. 왜냐하면 선지자의 자리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그 선지자가 받는 하나님의 계시가 수월합니까, 힘듭니까? 맨홀 뚜껑 (위에는 하나님이 방긋 웃고 있지만)밑에 있는 선지자(에스겔)의 자리가 어떻습니까? 힘들지요. 힘들다는 말은 주변 상황이 너무 어둡다는 거예요. 그런데 선지자를 안 만날 것 같으면, 나 혼자 내 자리 같으면 혼자 웃고 있고, 행복하기 짝이 없어요.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바라 본 (내 쪽이 아닌)안쪽에 있는 부자 집,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어 온기가 가득한 집안에서 화목한 가족들이 케익을 먹는 그런 분위기에요.

나의 자리에는 어떤 어려움도 없고, 어두움도 없는 행복과 웃음과 따사로움만 가득하지요. 이런 자리와 선지자의 자리를 비교해 보란 말이지요. 사람들은 뭘 그리워합니까? 성냥 팔이 소녀가 그리워했던 풍요롭고 행복한 가정을 그리워해요. 그러면 이런 행복한 가정이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을 듣겠습니까?

우리가 에스겔을 공부하면서 깨달아야 할 것은, 지금 우리의 따듯한 현재 이 모습은 사실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무서운 악의 힘에 둘러싸인 한시적인,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계시가 아닌 나만의 자리입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착각’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상상력을 발휘하는데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든다.

어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이분은 광양에서 연구원으로 일하시는 여성인데, 전화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기는 30년 동안 평범하게 교회를 다닌 사람이었는데, 옛날에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7년 전부터는 내가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이끄는 삶을 살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담임 목사에게 하면 목사는 잘못된 신앙이라고 꾸중했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자신의 신앙이 잘못된 것인지 책도 읽고 인터넷을 찾아 이곳저곳 헤매다가 우리교회 홈페이지에서 제 설교를 듣고는 ‘아, 내가 미친 것이 아니구나. 내 신앙이 성경적으로 맞구나.’ 해서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제게 전화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오늘 광주에서 성경공부 모임이 있는데 참석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퇴근 시간이 6시 30분이래요. 광양에서 이곳까지 오면 1시간 이상 걸리지요? 그래서 못 오시는 것 같아요(두 번째 시간에 참석했음 - 녹취자 주). 이름까지 당당하게 밝히면서 전화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분께 말씀드렸어요. “이것은 기적입니다.” 라고.

그분이 30년 동안 교회 잘 다니면서 바른 신앙인이라고 여겼던 것은 착각이었던 거지요. 교회가 행복을 주는 곳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보면, 에스겔하고 교회하고 달라요. 교회는 적이 없지만 에스겔에게는 주변에 하나님의 원수가 있어요. “하나님, 빨리 유황불로 세상을 심판하소서. 더러워서 세상 살기 싫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게 만드는 원수들. 내 돈 떼먹고 도망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 마치 정상인 것처럼 인식되는 그런 사회 분위기. 이것이 분통이 터지고 화가 나면 이것은 에스겔입니다. 그런 사람은 에스겔의 안목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런데 다복한 가정을 염두에 두고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하면 ‘저 사람은 내 생활에 얼마나 보탬이 되겠는가?’ 이용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과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잘 사귀어서 내 행복에 이용하고 나도 필요하면 도움을 주고 이렇게 서로 어우러져 살려고 합니다. 이것은 에스겔의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에스겔은 정말 희한한 짓들을 합니다. 그 이상한 짓을 계속 살펴봅시다.

5절에 390일 동안 좌로 누워 자고, 그 후에 다시 우편으로 누워서 40일 동안 자고. 8절에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맞도록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에스겔을 꽁꽁 묶어요. 그러니까 에스겔이 원해서 모로 누워 자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하시기에 에스겔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자야 했습니다.

마치 제게 전화하신 그 연구원 같아요. 모든 신앙을 다 버리게 만드시는데 그것이 신앙이라는 거예요. 지난 30년 동안 믿어왔던 것들을 몽땅 다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비로소 성경이 보이고 --

그러면 그동안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한 것은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훼방하고, 하나님 말씀이 내 종교행위 때문에 가려진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찢어버리니까 뒤에 원판이 남지요. 그동안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주셨고,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도해 오셨다는 것이 비로소 실재로 뚜렷하게 다가올 때, 그분이 하는 말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채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같아요. 평생을 나는 아무 한 것도 없는데 공짜로 지금도 구원 받고 있고, 또 구원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내력은 성경에 다 나와 있지요. ‘네가 한 것이 아니고 내가 했다.’ 내가 너를 대신해서 에스겔을 보내고, 예레미야를 보낸 것은 너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너는 하지 마라. 내가 다 할게.’ 이것입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언제 알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종교생활을 포기할 때.

성도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그 교회 목사는 ‘당신 신앙은 문제가 많다. 어디서 잘못 배운 것이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면 그분은 대답하기를 ‘내가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분의 전화를 받고 놀랐어요. ‘나도 정신 차려야겠구나. 설교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계속 본문을 봅시다. ‘너를 줄로 동이리니’ 그래야 ‘날이 맞도록 몸을 이리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이제 에스겔은 죽어납니다. 에스겔 팔자는 희한한 팔자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에스겔이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에스겔이 당한 이 고통은 자기 행복만 추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무엇 때문에 줄에 꽁꽁 묶이고, 왜 모로 누워서 긴 세월을 자야 하는가?’ 하는 것을 좀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성경을 보게 하십니다. 평안할 때는 성경을 봐도 건성으로 넘어갑니다. 진실로 성경을 보게 될 때는 뭔가 다급한 일이 생길 때입니다.

그 다음 9절을 봅시다.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이것들은 원래 한 그릇에 담을 것이 아니라 따로 담아야 하는 것인데 한 그릇에 담습니다. 그만큼 양식이 귀하다는 뜻입니다.

10절에 “너는 식물을 달아서 하루 20세겔 중씩 때를 따라 먹고” 20세겔은 220g입니다. “물도 힌 육분 일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1.6리터입니다. 겨우 목을 축일 정도의 양이지요.

이것을 누가 먹고 누가 마십니까? 에스겔 선지자가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의 자리는 뭐냐? 앞으로 우리에게 들이닥칠 미래의 삶을 선지자에게 먼저 예고편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을 계시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BC 586년에 유다가 멸망하는데, 7년 전(593년)에 이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7년 후에 있을 일을 에스겔이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에스겔이 자기 집에서.

12절에 “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 인분 불에 굽는다는 것은, 연료가 바닥이 나면 사람 똥에서라도 에너지를 뽑아야 됩니다. 이것은 나중에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살기가 힘들다는 것을 에스겔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자, 여기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왜 이런 일이 있는가? 문제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약속이 없는 땅으로 쫓아내는데, 쫓겨 가면서 그들은 이렇게 힘이 듭니다. 그러면 약속이란 것이 뭘까요? 약속이 없는 땅에 가니까 힘들다는 말은(약속의 땅은 힘들지 않다는 것인데), 약속의 땅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어요. 약속의 땅에 특징이 뭡니까?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힘들지 않다는 것은 그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려면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진짜 모습을 완전히 노출시켜야 될 그런 기회가 필요하겠지요. 그러면 이들이 포로 잡혀 갔다가 다시 오게 되면 비로소 뭘 느낍니까? ‘우리가 그동안 은혜를 입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알지요. 나가면서 죄를 알고, 들어오면서 은혜를 사모하면서 올 때, 과거 애굽에서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러면 빠져 나온 이것이 바로 구약이고, 죄인 가운데로 다시 들어온 것이 신약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모세가 데리고 나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서 자기 잘난 척하다가 쫓겨나잖아요. 그렇다면 앞으로 다시 애굽 같은 세상에서 나올 때는 그런 실패를 두 번 다시 해서는 안 되겠지요. 늘 왔다 갔다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애굽에 있는 인간들은 죄를 알 뿐이지 죄를 스스로 이길 힘이 없어요. 사람이 죄 짓는 이유가, 죄 짓는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거예요. 죄 짓는 것을 알면 죄인이 안 됩니다. 말이 어렵지요? 죄 짓는 것을 본인이 알면 그것은 죄로 간주하지 않고, 죄 짓는 것을 모를 때만 죄라고 간주하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관건은, 은혜를 주느냐 마느냐 그것이 관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초점은 여기에 있어요. 환자가 병원에 올 때 스스로 고칠 수 있다면 병원에 올 필요가 없지요. 환자가 병원에 오면서 예수님을 의사로 인정하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구약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준 것은 율법을 받은 인간들이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인간들은 안 됩니다. 율법을 줬으면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인간은 안 됩니다. 인간은 법을 줘도 이 법이 다 흘러내립니다. 말씀을 줘도 그 말씀이 다 흘러내립니다. 말씀이 꽂혀야 되지, 그렇게 되지 않고 듣기만 하면 신학박사 됩니다. 인간은 안 달라지고 신학적 지식만 쌓일 뿐입니다.

말씀이 인간을 깨뜨려야 되는데 깨뜨리려면 말씀대로 주께서 인간을 다뤄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가? 인간을 들어서 은혜가 없는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는 은혜가 있었는데 옮겨 온 땅에는 은혜는 없고 힘이 움직이는 세상이니까, 힘없는 자들이 힘을 추구하는 곳에 갔으니 얼마나 설움과 핍박을 받겠습니까? 그러니까 먹을 것도 변변찮고 연료가 없어서 사람 똥으로 겨우 불을 피우고 그런 처참한 환경에 처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지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렇게 망가질 때 신약에 오면 과부, 세리, 문둥병자, 소경 이런 사람들이 주를 찾지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약속을 고대한 자들(이스라엘)이 이제는 이렇게 망가지고 난 뒤에 이제 메시아가 오시지요.

그런데 이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이 누구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방해하지요. ‘우리가 법을 못 지켜서 쫓겨났다. 법을 지켜야 구원 받지.’라고 했지요. 이건 순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법을 줘도 못 지킵니다. 에스겔처럼 돌아누우면 구원 받습니까? 390일이 아니고 30분도 못 견딥니다.

그 다음 4장 16절을 봅시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경겁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민답 중에 물을 되어 마시다가 떡과 물이 결핍하여 피차에 민답하여 하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

민답하다는 것은 안타깝고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런 신세가 되었는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이런 소리가 절로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신자든 불신자든 사람을 괴롭게 하는 분이 누군가 하면 하나님입니다. 못되면 다 하나님 탓이고, 잘 되도 하나님 탓입니다. 사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전문가입니다. 내가 내가 원하는 인간을 만들 수 없어요. 내가 내 힘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 포기하세요.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되면 주께서 말씀대로 다루는 나의 진면목이 가려집니다. 주께서 은혜로 인간 잘 만들고 있는데 우리는 괜히 앞에서 ‘하나님,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면서 헛소리 하고 있는 거예요. 찬송 부르고 있는데 뒤에서 굿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죄밖에 안 나오니까 내가 뭘 해서 구원 받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시면 그때부터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가는 인간이 바로 나라는 것을, 내가 바로 주님의 작품이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께서 지금까지는 이만큼 만들었구나. 내일은 또 어떤 나를 만드실지 기대가 된다.’ 이렇게 될 때,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기도 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상태가 되면 절로 기도가 나오겠지요. ‘하나님, 내일은 어떤 나로 만드실 겁니까?’ 하면서.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사람은 원인을 모르니까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소급해서 찾아간다.” 그래서 이것을 비진리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원인을 알아요. 약속대로 주께서 택한 백성에게 말씀이 주어지는데, 양식도 없고 물도 (저울에)달아서 먹고 하는 가운데서 ‘아하, 세상이 우리가 살만한 세상이 아니구나. 어서 천국에 가야지.’ 라는 느낌을 주도록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하는데, 우리는 물 없고 양식 없으면 ‘하나님이여, 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내가 기도를 열심히 안 했다고 이런 벌을 주십니까? 내가 주일 예배 두 번 빼먹었다고 이렇게 까지 벌을 주십니까?’ 이런 식으로 결과만 보고 원인을 찾는(내가 행동을 삐딱하게 하니까 하나님도 치사하게 나에게 이런 식으로 나오는구나) 식으로 자기가 방정식을 일방적으로 만들어요.

이게 얼마나 큰 착각입니까? 평생을 신앙생활 하면서 착각 속에서 살았어요. 주님은 십자가 진 강도도 구원했어요. 그 사람에게 일곱 살 때 뭘 했는지, 얼마나 착한 일 했는지 묻지도 않고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어요. 살인강도라도 주께서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으면 그 취지와 뜻을 좀 헤아릴 줄 알아야 하는데, 자꾸 자기 마음대로 원인을 끄집어낸단 말이지요. 선악적으로 스스로 법을 만들어서 평가를 내립니다. 완전한 착각이지요.

에스겔에게 보여줬다는 말은 ‘이 땅에서 네가 고생하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고생해야 그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 은혜였다는 것을 안단 말이지요. 교회가 깨져봐야 ‘교회 다녀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그제야 안다는 말입니다. 서울대학 나온 목사가 무슨 수용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에스겔이 필요해요. 스데반이 필요하고, 거지 나사로가 필요하고, 진짜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이 필요하지 말씀을 입으로 나불거려서 돈 벌이하는 인간은 필요치 않습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요. 우리의 자리는 없어요. 약속이 만들어 내는 자리. 여기가 우리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들어오려면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늘 포기해야 됩니다. ‘이 자리 만들려고 얼마나 내가 고생했는데 이 자리를 포기해?’ 고생한 것은 알겠는데 그것도 은혜인줄 아시고, 내 자리는 나를 망치게 만듭니다. 주님의 약속이 나를 구원한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만든 자리는 내 자존심만 키우기 때문에 점점 교만해 져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는 안 보이고 나의 원수만 보입니다. 부부가 왜 이혼합니까? ‘아이고, 이 원수야!’ 하지요. 제가 대전에서 그런 강의 했습니다. 이혼문제의 해결책은 하나뿐입니다. 여러분도 이혼하기 전에 이 말씀 먼저 들으세요. 이혼은 사소한 문제입니다. 전혀 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혼하고 싶으면 하시고, 그리고 같이 사세요. 왜?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에 목숨 걸지 마세요. 이혼문제가 큰 경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결혼을 나의 행복을 보장하는 나의 자리로 간주할 경우에만 큰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이혼하게 하십니다. 왜? 그 자리는 너의 구원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선지자가 있었지요. 누구입니까? 호세아. 이 경우는 여자가 나갔으니까. 데려와도 또 나가니까. 그래서 선지자를 잘 봐야 돼요. 그들은 본인이 원해서 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줄로 꽁꽁 묶듯이 ‘딴 데는 계시가 없다. 너에게 유일한 계시가 떨어졌다.’ 그 식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계시는 누구한테 떨어졌어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 떨어졌지요. (이근호 목사한테 떨어졌다고요? 하하하!)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야말로 세상 모든 것은 시시하고 사소한 문제, 목숨 걸 이유가 없는 문제로 전락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소한 문제에서 얼른 벗어나서 말씀이 있는 자리에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와야 해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있었지요. 마르다는 자기 솜씨를 부리는 자기의 자리가 있었어요. 손님 왔다고 잡채하고 부침개 굽고 굉장히 분주했지요. 그런데 마리아는 자기 자리가 없어요. 마리아의 자리는 말씀이 떨어지는 자리, 그곳이 자기 자리에요. 그러니까 마르다가 뿔따구 나서 “예수님, 동생한테 나를 좀 도우라고 해 주세요.”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2).”

그 다음, 선지자에게 무슨 해괴망측한 일을 시키는지 봅시다. 5장 1절입니다. “인자야!” 인자라는 말만 나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또 무슨 희한한 일을 시키실지. “너는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삭도를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에 달아 나누었다가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지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지 일은 가지고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지 일은 바람에 흩으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너는 터럭 중에서 조금을 가져 네 옷자락에 싸고 또 그 가운데서 얼마를 가져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

시나리오가 복잡하게 되어 있지요? 어떤 시나리오인가 하면, 에스겔에게 머리털과 수염을 깎으라고 했어요(에스겔은 제사장이고 제사장은 수염을 안 깎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시기(BC 586년)가 되거든, 그것을 삼등분해서 삼분지 일은 성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지 일은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삼분지 일은 바람에 흩으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이 털이 바람 부는 방향대로 날아가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뒤를 따라 가시는데 그곳에서 불이 나와서 사방을 태운다고 합니다. SF영화를 보는 것 같지요.

제사장 수염을 깎아서 이렇게 하는 것인데, 제사장이 제사장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고, 제사장으로 삼으신 이유가 뭔가? 철저하게 버릴 것 없이 다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선지자가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잠재되어 있던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드러나는 거예요.

선지자의 몸짓이 없으면 하나님의 시나리오를 모르지요. 그런데 때가 되어(예루살렘 성이 멸망하는 때) 선지자가 합세하면 선지자가 그 전에 이야기했던 것도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진리죠. 왜? 선지자가 펄럭이면서 나왔던 그것이 해석이 되니까. 사건과 말씀이 일치를 보는 순간을 위하여 선지자가 때를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인자야!’ 라고 했는데, 인자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할 때 처음부터 다 벌리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일을 감춰 놓았다가 때가 되어 그 말씀을 응하게 하는 식으로 하나씩 펼치십니다. 그러면 펄럭이면서 펼칠 때마다 숨어있던 예비 된 하나님의 사건들이 나오겠지요.

시간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들의 시간. 이 시간은 인간들이 행함으로 채우는 거예요. 예를 들어, 안식일이라면 “안식일에 우리 뭘 할까요?” 안식일이라는 시간이 먼저 있고, 그 다음 그 시간을 채우는 식이지요. 마치 조상 제사 지낼 때 “아빠, 오늘 무슨 날이야?” “오늘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제삿날이다.” 오늘이 제삿날이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전을 굽고 떡을 하고 뭔가 제삿날에 할 일을 하잖아요. 이게 인간들의 시간입니다.

학교에서 첫째 시간은 영어시간이다. 그러면 영어 시간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요. 시작종을 치면 선생님은 영어를 가르치지요. 마침 종이 울리면 영어 시간이 끝나지요.

시간이 먼저 정해져 있고 그 내용을 채우는 것이 인간의 시간이라면, 하나님의 시간은 사건이 먼저 있고 그 사건이 유지되고 그 다음 사건이 나올 때까지의 이것을 시간이라고 합니다. 사건이 먼저이고 그 사건의 성질이 계속 유지되면 그게 바로 시간이 되는 거예요.

천지를 창조하고 쉬면 그때부터 안식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전체 창조에 위배되는 것은 이 안식일에 위반되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완료되면 안식일은 완료되고 끝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지요. 그러면 이후부터는 어떤 것이 죄가 되는가 하면,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 끝나는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심판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예수를 안 믿는 그런 시기는 끝나버리죠. 지옥 가도 믿고, 천국 간 사람도 역시 믿고.

지옥 간 사람은 가슴을 치면서 ‘왜 안 믿었던고’ 하면서 후회하는 시기가 온단 말이지요. 그것이 재림의 사건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까? 생각하지 말고 사건으로 봅시다. 아침에 눈을 떴어요. 눈을 뜬 것도 주께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오늘도 살게 하셨어요. 주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살게 하셨어요. 내가 먼저 살아서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계신 흔적이 뭐냐? 내가 주님 덕분에 오늘을 살면 하루 종일 주님이 이렇게 살아계셔서 오후 5시는 이런 일을 주시고, 7시에는 어떤 손님을 만나게 하시고 --- 이 모든 것이 주께서 보내주신 일로 간주하고 밤에 잠드시면(잠을 잔다는 것은 내 눈꺼풀이 내려앉은 것이죠) 그러면 사건이 끝나는 거예요. 잠은 죽은 상태거든요.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그러다가 아침에 잠에서 깨면 또 새롭게 주께서 다루시는 하루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염려는 오늘로 끝나고, 내일 염려는 주께 맡겨야지요. 주께서 살아 계시니까 내일 또 살게 하시면 또 일거리를 주신단 말이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참새를 키우는 방법이고,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도 오늘 예쁘게 가꾸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참새도 들풀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걱정 없이 잘 사는데, 인간인 너희는 뭐냔 말이지요. 마귀 때문에 만날 자기 시간을 따로 갖고 있어요. 내 일을 하나님이 도와달라는 식으로. 그리고 자기 생활이 따로 있다 보니까 그 시간은 날 위한 시간이고 나 좋으라고, 나의 영광을 위한 시간이 되어버려요.

10분 쉽시다.

(2010. 4. 9. 09:11 녹취 마침)

관리자(IP:220.♡.41.203)

10-05-03 14:16

광주100326b에스겔4장b

광주 강의(2010. 3. 26) 5-2

둘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에스겔 5장에 보면, 에스겔은 제사장인데(제사장은 수염을 못 깎게 되어 있는데) 수염을 깎으라고 해요. 이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위기죠. 제사장이 품고 있는 거룩성이 바깥으로 쏟아지게 되면 이것이 심판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제사장의 수염을 날렸다. 그러면 날아가는 수염이 누구 털입니까? 제사장 털이죠. 제사장 의 머리털과 수염을 삼등분해서 불살랐는데, 그 타이밍을 어디에 맞추는가 하면, 예루살렘 성이 불탈 때입니다. 그 때 삼분의 일은 성읍 안에서 태우고, 또 삼분의 일을 성읍 사방에 칼로 치고, 또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 바깥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나리오는 제사장 실존 안에 응축되어 있죠. 계시라는 것은 특정 인물에게 응축된 그 말씀이 한 꺼풀, 또 한 꺼풀 펼쳐지면 그것이 바깥의 하나님 사건으로 확산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응용문제 냅니다. 우리가 방금 에스겔 5장 말씀을 살폈는데, 이 고난 받는 것이 에스겔이 아니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고난 받는다면 이 고난은 예수님 고난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세상 심판으로 이어지겠지요.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죽으신 후 옆에 있던 백부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저분은 진실로 메시아였다’고 하지요.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보고 메시아라고 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모습, 처참하게 망가지는 그 모습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 라고 했다면, 우리는 그렇게 볼 수 있는 눈이 있느냔 말이지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 진 강도를 생각해 봅시다. 그 강도가 목숨 끊어지기 전에 주님 십자가 달린 그 모습을 보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3).” 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똑같이 그 모습을 보았던 다른 강도는 뭐라고 합니까?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놀리지요.

제가 언젠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심정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가짜일 가능성이 많다”고. 가룟 유다가 3년간 예수님 따라다녔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배반했잖아요. 가룟 유다는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왜? 선생님을 팔고 난 후 마음의 가책 때문에 자살을 했으니까. 이 사람의 내린 결론은 결국 예수님께 속았다는 거지요.

속았으니까 그 복수심이 바깥으로 튀어나와서 예수님을 팔아 넘겼지요. 그렇다면 그만큼 가룟 유다는 뭘 생각했습니까? ‘예수 당신 진짜야, 가짜야?’ 이 부분에 대해서 심사숙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의 한계는 “‘혹시’ 하다가 ‘역시’ 아니었어.” 라는 것은 가룟 유다뿐만 아니고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들이 한계점에 도달할 때, 사랑한 사람과 버려둔 사람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지요. 만약 구원 받았다면 어떻게 구원 받겠습니까? 내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가룟 유다 같은 나를 뭘 보시고 사랑해 주십니까?’ 하면서, 온전하게 구원은 주님의 은혜로 돌리겠지요.

그래서 예수님 안에는 열 두 제자의 모든 사건들이 종이 접기처럼 접혀 있고, 그것을 하나씩 펼칠 때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야 되고, 베드로는 배반해야 되고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이것을 성경 말씀에서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요5:39)”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이 어떤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그것은 ‘말씀이 응하게 하기 위해서’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유의 주, 구약에서는 여호와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5장 초반은 이제 이해 되셨지요? 제사장 하나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면서, 제사장 안에는 말씀이 응축되어 있었고, 제사장이 행동하는 그것과 실제 사건과 항상 일치를 이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못하지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역사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에스겔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되는 이유는 에스겔 본인도 하나님의 시나리오, 그리고 에스겔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도 주님의 시나리오, 전부 주님의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에스겔은 철저하게 주님 앞에 매인바 되는 겁니다. 첫째 시간에 이것이 무슨 자리라고 했습니까? 맨홀 뚜껑에 햇볕이 비취는 자리인데, 이 자리가 에스겔 자리인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나의 자리, 내가 행복한 자리를 따로 만든다고 했지요.

이것을 들뢰즈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천개의 고원’이라고 했습니다. 표현 잘 했지요? ‘고원’이 뭐예요? 볼록볼록 튀어나온 지점. 대전 강의에서 한 이야기를 다시 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는 청과물 시장 협의회, 이곳은 안동 권씨 종친회, 여기는 해남초등학교 교사 모임, 여기는 한일교회 장로회, 이쪽에서는 해병대 26기 모임. 전부 각자의 주체가 돌출되어 있지요. 이게 바로 우리 각자의 자리가 된다는 것이지요.

사람 몸은 하나입니다. 일요일 오전 11시에 교회 가야 되는데, 하필 그 시간에 청과물 시장 협의회가 모인다면 청과물 시장 총무를 맡은 사람은 그곳에 참석해야 되겠지요. 오후 2시에는 안동 권씨 종친회가 있다면 또 그곳에 가야하고. 몸은 하나인데 오라고 하는 데는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왜 쫓아다닙니까? 이 모든 곳이 나의 자리이기 때문에. 이런 힘들이 모여서 응축되면 자아가 되는 겁니다.

힘이 모여서 자아가 되니까 자아를 펼치면 힘이 나오죠. 재력, 학력, 인맥 등이 나와요. 그래서 힘이 없으면 사람구실을 못하는 이유가 ‘나 여기 있다.’고 하면 안 알아줘요. ‘당신 안에 접혀 있는 힘들을 내놔 봐라. 그 힘이 내가 이용할 가치가 있다면 나는 당신과 사귀겠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자리입니다. 이것을 현대 철학에서는 ‘주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 또는 ‘자아’지요. 그런데 나의 자리에서는 뭐가 보입니까? ‘나의 영광’이 보이죠. 그런데 나의 자리를 주께서 에스겔의 자리로 잡아당기는데 처음에는 안 오지요. 안 오니까 에스겔이 펄럭펄럭하면서 주님의 심판 사건의 불똥이 튀게 되면 나의 자리가 불타버리지요. ‘앗 뜨거’ 하면서 이 불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고 찾게 되지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이 자리, 이것이 바로 언약의 자리입니다.

에스겔을 인자라고 불러요. 인자가 만났던 그 하나님의 언약의 자리가 모든 하나님의 약속과 미래가 응축되어 있고, 그 응축한 것이 나의 자리만 고수하는 이 세상에서 불똥이 튀게 되어 있다고 에스겔 5장에서 설명하는 겁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 두어 열방으로 둘러 있게 하였거늘 그가 내 규례를 거스려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 둘러 있는 이방보다 더하니”

이제부터는 상징에 대한 해석이 나오는데, 해석을 들으면 쉽다고 느껴지지만 해석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다같이 13절을 읽어봅시다.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자기 백성을 벌주고는 마음이 상쾌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변태 같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자기 백성을 벌하고는 속이 시원하다고 하시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 마음을 이제부터 우리가 이해해야 됩니다. 이해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개별 구원은 없고 성경에는 집단 구원 밖에 없습니다. 이것부터 이해해야 됩니다.

물론 성령께서 개별자에게 찾아가지만, 와보면 내가 나의 이름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어떤 집단에 속해서 구원 받은 것이 나옵니다. 어부가 투망을 하지요. 그래서 그물 안에 고기가 153마리가 걸렸다고 합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해서 던지니까 많은 고기가 잡혔지요.

문제 냅니다. A라는 고기와 B라는 고기가 서로 경쟁해서 구원 받았습니까? 둘이 경쟁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지요. 경쟁이란 내가 개별자인 것처럼 상대방도 개별자가 될 때 개별자와 개별자의 경쟁이 되는 거예요. 하지만 집단으로 구원이 되면 경쟁이 없지요. 그러면 구원 되는 것이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으면, 고기 한 마리마다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으면 서로 돌아보면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고 ‘어, 당신도 피가 묻어있네. 나도 피가 묻었는데.’

이렇게 되면 너, 나라는 개별자 의식은 필요치 않지요. 우리는 한 몸, 한 지체로서 집단 구원된 것이 틀림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서로 싸운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안 되지요. 만약 제가 돈이 많아서 각 집에 똑같은 냉장고를 줬다고 합시다. 교회에 개별자로 와서 그것을 모르는 거예요.

박 집사: 역시 기도했더니만 효과 봤어.
김 집사: 뭔데?
박 집사: 집에 냉장고가 생겼어.
김 집사: 나는 기도한 적도 없는데 집에 냉장고 생겼는데.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은 원인은 모르고 결과만 알고,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추적(상상)하지요. 원인을 모르고 결과만 안다면 결과에서 역으로 원인을 찾으면 여기서 법이 생깁니다. 그러면 이 방정식을 적용하면 다음에도 이런 것이 나올 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지요. 또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지요. ‘누가 이렇게 해서 이런 복 받았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하면 그런 복 받습니다.’라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 원인만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결과 안에, 껍데기는 결과인데 안에는 원인만 차있는 거예요. 이 원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죠.

이렇게 되면 우리는 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했더니만 복 받았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증인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몰랐던 원인만 가득 있으면 이렇게 됩니다.

B: 당신 어떻게 그렇게 되었어요?
A: 우리 주님이 이렇게 했습니다.
B: 어제 교통사고 났는데 왜 그렇습니까?
A: 우리 주님이 일으켰어요.
B: 그런 심각한 일을?
A: 사소한 문제입니다.

내가 원인을 알았다는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나머지 일(이혼하고, 교통사고 나고 등등)은 다 사소한 일입니다. 왜냐? 원인이 내가 갖고 싶은 결과보다 더 세기 때문에, 내가 평소에 노리고 있던 축복의 결과보다도 그런 축복을 주시는 원인자가 나보다 더 크게 자리 잡기 때문에 나머지는 별것 아닌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개별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개별자로 구원 받더라도 일단 합세해보면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다.’ 에베소서 4장에 나오지요. 우리는 한 몸의 지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우리 사이에는 시기와 질투, 경쟁이 있을 수가 없지요. 이것을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고 하지요.

성령의 열매를 개별자로 맺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집단에 소속된 것을 아는 그 순간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면 육의 열매는 뭡니까? 개별자로 나오지요. ‘나는 이런 원리로 이만큼 성화 되었다.’ 라고 할 때, 이것은 바로 자기가 자기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는 시기와 질투가 자연적으로 나옵니다.

여러분, 부부생활은 어떻습니까? 개별자입니까, 집단입니까? 남자들은 집단이기를 원해요. ‘당신이 우리 집안에 시집 왔으면 아버지 생신에 가야하지 않겠나?’ 그러면 여자들은 ‘당신 아버지만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생신 때 당신 갔나?’ 이것은 결국 개별자와 개별자의 만남이죠. 여기에 자식들 셋 있으면 자식들까지 전부 개별자지요. 각자가 ‘엄마는 나에게 뭘 해줬는데?’ ‘아빠는 나에게 뭘 해 줬는데?’ 전부 개별자가 되는 거예요.

개별자가 되면 이것은 자기 자리지요. 여기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서로의 만남에서 은혜를 주목하게 된다면 은혜를 아는 새로운 가정이 되겠지요. 그런데 개별자가 은혜에 주목하려면 뭐가 깨져야 됩니까? 개별자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뭔가 일이 꼬인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나는 나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나와 만나는 사람과 하나가 될 때, 너와 나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면 개별자가 깨지고 같이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개별자가 아니라 집단 구원이라는 이 개념이 처음부터 이스라엘이란 나라 자체에 나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스라엘을 아들들이라고 합니까, 아들이라고 합니까? 이스라엘은 아들이에요. 이스라엘이 40만 넘게 애굽에서 나오는데 그것을 아들들이라고 하지 않고 아들이라고 하지요.

제가 보편적 단독성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스라엘을 하나의 단독자로 보는 거예요.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을 내가 신경 쓰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 다루겠다.’ 전체를 아들로 다루는데, ‘개별자로 다루지 않고 집단으로 다루는데 반발하는 놈은 나가라.’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를 하나로 다루십니까? 그러면 나의 가치, 내 존엄성은 어디에서 찾습니까?’ 이렇게 반발하고 싶거든 죽으라는 것입니다.

단체를 이해 못하고 ‘그럼, 저는요?’ 라고 나오면 잘리는 거예요. 대표적인 사건이 아간입니다. 아이성을 얕보고 들어갔다가 작살이 나고 난 후 그 원인을 찾아보니까 암세포가 있었죠. 이스라엘의 전쟁은 모든 공로가 하나님께 돌아가야 됩니다. 왜? ‘붙여주시는 전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전봇대에 아바타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으면, 전봇대와 아바타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바타 영화 제작하는데 이 전봇대가 보태준 것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오고가는 사람들이 이 전봇대 쳐다보는 거예요. 왜 봅니까? 전봇대를 보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포스터가 붙어 있기 때문에 본단 말이죠. 이 전봇대가 이스라엘이고 아바타 포스터가 하나님의 언약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전쟁은 하나님의 ‘붙여주심의 전쟁’입니다.

여호수아가 칼을 들고 나가니까 앞에서 칼을 들고 막는 사람이 있었죠. 누구입니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죠. 여호수아에게 “신발 벗어. 무릎 꿇어!” 이것은 여호수아가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천사가 모세 언약에 따라서 약속의 땅을 점령하는 그 내력이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어떤 원칙대로 움직입니까? 모세에게 준 약속을 여호수아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천군천사들이 이루는데, 그러면 여호수아와 백성들의 일은 뭡니까? 전봇대. 우리한테는 모세 언약이 붙어 있다.

제가 개혁신학회에서 논문 발표할 때 제 옆자리에 있던 교수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근호 목사처럼 그런 주장을 한다면 우리가 신학을 하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라고 했어요. 제가 뭐라고 답했습니까? ‘신학을 하는 것은 우리의 감춰진 죄를 드러내는 가치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사람들은 자기가 앞서서 전쟁을 하고 싶어 하지만, 적들이 오는 것도 자기가 부른 것이 아니고 주께서 부른 적들을 주께서 물리치기 위해서 하늘의 태양이 멈추고 우박이 떨어지고 --.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하나의 연극이에요. 연극할 때 조명시설과 음향효과 이런 것이 있지요. 주인공이 넘어지니까 “꽝꽝꽝” 하고 음악이 나오잖아요.

우리는 연극배우에 불과해요.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귀 기울이는 사람 없습니다. 그래도 나중에 천국 가서 필름을 한 번 보세요. 그러면 그럴듯하게 영화 잘 만들어졌어요. 우리가 성경 공부 할 동안에 서울의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와 목사가 돈 때문에 싸움이 붙어서 난리를 쳐요. 우리는 전체를 모르니까 ‘의미도 없는 것을 왜 해? 우리가 한다고 누가 알아주나?’ 이런 마음이 들지만, 주께서 모든 것을 다 기획하시고 뜻대로 완벽한 작품을 만드십니다.

우리는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 못해요.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좁기 때문에 전체를 모르지만 주께서는 전체를 다 아니까 우리한테 그 일을 시키는 겁니다.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해서도 몰라요. 다만 우리의 일 자체가 원인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의 상급은 복음 전하는 그 자체가 나의 상급이다.’ 라고 했어요.

그 논리가 뭐냐 하면, 남들은 뭘 하고 결과로써 자기가 원하는 것을 획득할 때 ‘내가 하나님의 일을 했구나.’ 확인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은 아예 자기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원인으로 보는 겁니다.

실제로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갈 때 그냥 곱게 못 갔지요. 배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어요. 태풍을 만났을 때 주의 사자가 바울이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행27:24).”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게 하신다면 로마로 가는 특별 차량을 준비하든지 할 것 같은데, 로마로 가라고 하시고는 가는 도중에 죽을뻔 하잖아요. 그러면 결국 사도바울은 무슨 존재입니까? 질점(물체의 크기를 무시하고 질량이 모여 있다고 보는 점). 한 점에 불과합니다. 이 점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묻혔어요. 이것이 에스겔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하나의 행동을 할 때마다 펄럭이면서 앞으로 이루어질 사건이 툭툭 튀어나오지요. 에스겔은 그것을 몰라요. 우리도 이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주님은 그것이 필요해서 일으키신 일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집단 구원을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지요. 그들은 개별 구원만 알아요. 개별자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는 줄 알아요. 집단을 위한 개별자라는 생각을 안 하고.

군중과 집단은 다릅니다. 모여도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 군중입니다. 개별자가 모여도 그것은 집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냥 개별자의 모임에 불과하지 집단은 아닙니다. 하나의 집단이 되려면 개별자로 행동하던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사건들이 터져야 ‘아, 우리의 사적인 구원 욕구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흘린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거예요.

뭔가 어디에 복속된다는 거예요. 개별자를 집단으로 만드는데 투입되는 것이 구약에서는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의 특징은 공평합니다. 모세가 팔을 높이 들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 불뱀에 물리고, 그 때 모세가 놋뱀을 들었지요. 이것이 요한복음 3장에서는 놋뱀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개인 구원이 아니고 놋뱀의 의미에 우리는 하나로 뭉쳐져 있는 거예요. 개별 구원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항상 집단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일어나야 돼요. 그게 민수기에 보면 계속 나옵니다. 고라의 자손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했지요. ‘왜 너희 집안만 대장 짓하느냐?’ 라고. 이 때 하나님께서 각 지파 지팡이를 가지고 오라고 했지요. 그런데 아론의 지팡이에만 살구꽃이 피었어요.

이것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개별자가 우수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누가 우리 대신 희생하심으로 우리는 그 희생에 예속되는 방식으로만 구원 된다는 것. 하나님은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 개별적인 솜씨를 발휘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솜씨를 다 막아버리고 놋뱀을 바라보듯 주님의 솜씨만 쳐다보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옛날에 알았더라도 세월이 가서 나이가 들어도 계속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가 이 말씀입니다. ‘한 분이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산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개별자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심이라(고후 5:15).’ 항상 그래요.

이것을 설교시간에 전하게 되면 ‘그런 일이 있는가?’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옆 사람이 기도한 것이 아니고 내가 기도했으니까 기도한 개별자 나에게 복이 오고, 기도 안 한 김 집사한테는 복이 안 가야 공평하다는 거예요. 사람들의 공평은 개별자의 한 행동에 따라 보상이 주어져야 이것이 공평이고, 주님은 인간들의 모든 개별자를 묵살시키는 것이 공평입니다.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놋뱀이 너희들을 건진다는 하나에 예속된 공평이 공평이고, 인간들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을 때 그것을 공평이라고 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언약이 구체적으로 신명기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것을 설명해야 에스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말씀을 공부하면서 왜 엉뚱한 성경을 보는가 생각할 분이 있는데, 엉뚱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은 땅 문제입니다. 땅에서 뭐가 빠지는가 하면 성전이 빠져요. 이것을 알면 에스겔 전체를 아는 것입니다. 땅에서 거룩한 성전이 빠집니다. “오늘 저녁 식사시간에 제일 먼저 나온 음식이 뭐라고 했습니까?” “해삼 내장.” 그러니까 해삼 껍데기는 있는데 내장부터 먼저 빠져나온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성전을 이뤘던 것이 뭐였죠? 성신이었죠. 그 다음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제사장이죠. 에스겔이 제사장이죠.

해삼 껍데기 말고 해삼 내장을 먼저 끄집어내는 겁니다. 뽑아내서 성신이 있는 곳, 진짜 제사장이 있는 곳이 앞으로 성전이 된다면, 이 성전이 들어선다면 앞에 있었던 성전은 필히 없어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 있다고 아직도 여기에 미련을 두는 거예요.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 오셔서 뭘 했습니까?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어요. 스데반 집사가 설교할 때 무슨 말을 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이 땅에서 발붙일 곳이 없게 했다.’는 것이 요점이고, 유대인들은 ‘이 땅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이 땅은 우리 땅이다.’ 이 두 주장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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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9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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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