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6: 5- 9 (저주 받은 세상)
렘 16: 5- 9 (저주 받은 세상)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7)
본문 : 예레미야 16장 5- 9절
제목 : 저주 받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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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0-03-24 20:49
저주받는 세상
2010년 3월 2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6:5-9
(렘 16:5, 개정)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16:6, 개정)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머리털을 미는 자도 없을 것이며』
(렘 16:7, 개정) 『그 죽은 자로 말미암아 슬퍼하는 자와 떡을 떼며 위로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그들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상사를 위하여 위로의 잔을 그들에게 마시게 할 자가 없으리라』
(렘 16:8, 개정) 『너는 잔칫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
(렘 16:9, 개정)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내가 네 목전, 네 시대에 이 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너’와 ‘그들’과 구분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 세상을 둘로 나누기 위함입니다. 하나님편에 속한 사람과 세상 편에 속한 사람을 따로따로 가려냅니다. 따라서 만약에 이런 성경을 아예 보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전혀 구분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과 성경을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 이 세상 풍조는 이미 정상이 아닙니다. 모두 정신병자들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그들의 죽음은 울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일찍부터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죽을 자가 죽은 것 뿐입니다. 당연히 저주받을 자가 저주받을 뿐입니다.
마태복음 11:17에 보면,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제대로 읽을 줄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불어도 왜 피리를 부는지, 예수님이 슬피 울어도 왜 울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반드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뒷 배경을 깔고 봐야 합니다.
그래야 눈에 뜨이지 않는 두 개의 이질적인 갈라짐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의 존재 의미는, 죄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즉 선악과가 죄에 의해서 훼손당하므로서 말미암아 비로소 죄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죄란 바로 피조세계가 창조주를 공격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나무는 이러한 공격을 피해 피신한 셈이 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정상이 아닌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저돌적인 공격을 보편화하고 있는 분위기 때문입니다. 신을 씹고, 신을 공격하는 것이 참으로 인간다움의 표상처럼 간주되는 세상입니다. 서양 중세 때는 아무리 무식한 농부라도,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졌고 인간의 삶의 목적이란 하나님의 영광에 있음을 건성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돈한 바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에서는 신에 대해서 언급만 해도 몰매를 당하는 분위기입니다. 신을 짓밟고, 신을 모독하고 신을 때리는 것으로서 인간의 자긍성을 극도로 상승시키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런 세상 분위기에 조금이라고 하나님에 의한 경외심을 표한다면 왕따 당하기 십상입니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대중가요에 이런 가사를 나옵니다. “외로운 사슴처럼 기대어 살자” 즉 인생이란 상호 의지하며 사는 것이 최고라는 겁니다. 식사할 때 마주보는 상대가 있고, 잠자리를 같이하고 드라마를 같이 보며 웃고 울고, 스포츠 중계를 같이 보며 같이 흥분하고 신나게 외쳐보는 그런 기대며 살 사람을 원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무슨 하나님의 갈라짐이 환영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볼 때는, 선악과를 공격해서 훼손시킨 죄의 세상으로 보십니다. 이것은 최고의 적개심을 가지고 세상을 대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3:46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크게 출세하고 성공했다고 자부해도 하나님 시선으로 보면, 예수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주가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바로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관계를 모르게 되면 왜 하나님께서 이런 저주의 시선을 세상을 날리는 지를 모르게 됩니다. 어떤 도박꾼이 큰 돈을 잃고 난 뒤에 자신의 손가락을 자릅니다. 다시는 도박하지 않겠다는 각오로서 말입니다.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안 잘린 손으로 도박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5:29-30에 보면,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손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 손으로 큰 돈을 벌었으면 그 손에 뽀뽀라도 할 것입니다. 따라서 죄라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궁리해도 모르게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나무를 획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십니까? 신명기 8장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곧 광야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곧 ‘언약의 떡’입니다. 이 떡을 하늘에서 내리신 것은 마음을 낮추기 위함입니다. 신명기 8:11-14에 보면, 네가 배불리 먹고, 양이 늘어나고 좋은 집고 살면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하나님께서 걱정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나를 내려주신다는 겁니다.
곧 만나의 의미는 이곳이 광야에 해당됨을 인식시키는 작업과 병행됩니다. 나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때, 그리고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때, 우리는 우리 것이라고 우기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잊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만나만 의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공된다는 것은 곧 만나가 제공되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이 저주받을 광야라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애굽에서 살던 행세를 하면 안됩니다. 그 때는 여호와의 언약이 없을 때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필요치 않고 힘대로 능력껏 살던 데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8:17에서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오늘 본문 5절에서,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언약이 개입되었습니다. 사랑과 인자와 평강의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을 잊어버리면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이방나라처럼 저주받게 되어있다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병자들만 가득찬 이 세상이 참 좋은 세상이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만나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현 세상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세상이며 동시에 광야같은 기능을 하는 좋은 세상인지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10-03-25 18:11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55강-렘16장5-9(저주받은세상)-jer100324.hwp
우리교회
10-03-25 18:11
055강-렘16장5-9(저주받은 세상)-jer100324
2010-03-25 17:14:25 녹취 : 오용익
055강-렘16장5-9(저주받은 세상)-jer10032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6장 5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6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6:5-9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상가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긍휼을 제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대머리 되게 하는 자도 없을 것이며 슬플 때에 떡을 떼며 그 죽은 자를 인하여 그들을 위로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그들의 아비나 어미의 상사를 위하여 위로의 잔을 그들에게 마시 울 자가 없으리라. 너는 잔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내가 네 목전 네 시대에 이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
본문 8절에 보면 “너는 잔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 보면 ‘너’라는 사람과 ‘그들’이라는 사람이 나와요. 분명히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에 살고 있고 같은 유대나라 사람인데 ‘너’하고 ‘그들’하고 하나님 쪽에서 구분해 주신다는 겁니다. ‘너는 그들에게 참여될 사람이 아니고 너는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해야 될 사람이 아니기에 너는 빠져나와라.’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너’라는 것은 예레미야죠. 그리고 ‘그들’이라 하는 것은 멸망당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사건이라는 것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하면 ‘너’에 해당되는 사람과 ‘그들’에 해당되는 사람을 두 쪽 내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덮고 안 보게 되면 사람은 다 누구나 같은 사람이 되지만 성경을 보게 되면 예수님 편에 속한 사람과 마귀 편에 속한 사람들이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양과 염소를 가려내는 작업에 쓰이게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1장 16절에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주로 오셨기 때문에 양과 염소를 갈라내는 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내는 작업을 하면서 지옥 갈 사람들의 특징을 이야기하는데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춤추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할 줄 모른다는 것은 그들이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이 유다가 망하는 마지막 때인데 그때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런 말을 했을 때에 과연 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5절과 6절을 읽어봤습니다만 따라오는 느낌이 뭐냐 하면 그들이 죽어도 그들의 목숨 값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사람이 아무리 나쁜 사람도 죽고 나면 동정심도 가고 애처롭기도 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상가 집에 가지도 말고 그들을 위해서 통곡하지도 말라.’고 하는 것은 울 가치도 없는 목숨을 그동안 그들이 유지하려고 밥 먹고 살겠다고 애지중지 버텨온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울 가치도 없는 겁니다. 이런 소리를 예레미야가 해 대니 그들이 얼마나 대들었겠습니까?
오늘날의 세상이 성경의 안목으로 보면 정말 이상하게 돌아가요. 요새는 성경 보는 사람들도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점점 더 없어져 갑니다. 이상해요. 다 정신병자 같아요. 정상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로 이상하냐 하면 누가 죽었다고 해도 눈물이 안 나올 정도로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인 종류의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법정스님 죽어도 울 가치도 없는 인간이 죽은 것이고 김수환 추기경이 죽은 것도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할 정도로 그 무덤에 침 뱉고 싶을 정도밖에 안돼요. 정상이 아니에요. 중세 때를 보여주는 책을 읽어보면 중세가 엉망이라 해도 그때는 기본이 있었어요. 그 기본이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누구나 다 어렸을 때부터 세례를 받는 시대였지만 그때는 신학자나 시골에서 농사짓는 할머니나 관계없이 마음속에 이런 것이 있어요. ‘우리는 누가 만들었지?’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러면 농사를 짓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것은 기본이었습니다. 정말 이것은 기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 만약에 그런 말을 안했다가는 그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이 사회가 어느 정도로 비정상이냐 하면 ‘내가 어디서 만들어졌지?’라는 것을 생각만 해도 사람들이 싫어할 정도로, ‘너 기독교 신자네.’ 이럴 정도로 하나님 이야기만 끄집어내면 언론에서 왁 달려듭니다. 드라마에서 교회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언론에서 그 드라마를 물어뜯고 난리가 납니다. 드라마나 연속극에서 ‘아이고, 절에 가서 빌어야지.’ 그러면 조용합니다. ‘마리아한테 기도해야지.’ 그러면 조용해요. 그런데 ‘교회 가서 기도해야지.’ 그러면 와락 달려듭니다. 아주 예민해 졌어요.
우리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누가 만들었으며 세상은 어디로 가는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묻거나 따지지 않기로 했고 만약에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말하면 그 조직사회에서 추방되는 그런 희한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점점 더 펴져서 이제는 교회까지 들어왔습니다. 교회는 축구하고 노는 데지 행여 예수를 믿느냐, 그걸 물으면 그 조직사회에서 추방당합니다.
어려울 때 봐주고 정수기 하나 더 팔아주는 데가 교회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눈꼴셔 하고 난리 납니다. 아주 무서운 동네에요. 이렇게 정상적이 아닌 세상을 만들 때에 그때 하나님의 계시는 둘로 쪼개는데 아주 효과가 있습니다.
항상 성경을 설교할 때마다 제가 여러분에게 누누이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지난 시간에도 했는데, 항상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우리 예배당에 쳐져 있는 옥색 커튼처럼 배경을 깔고 보셔야 됩니다. 성경 어느 본문을 보시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다 뒷배경을 깔고 그 다음에 본문을 보셔야 그 다음에 성경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취지가 몸에 담겨요.
세상을 둘로 쪼갠다고 할 때 마찬가지입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덴동산에 나무가 두 개 있었습니다.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왜 있느냐? 선악과나무는 인간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선악과나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미처 몰랐던 마귀가 와서 유혹했던 그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선악과나무가 없으면 죄가 안 드러나요. 죄가 뭐냐,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에게 공격하는 겁니다. 그게 죄에요. 그게 오늘날 이 세대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위험스럽게 느끼지 않습니까? 저는 굉장히 위험하게 느껴요. 세상이 어느 정도로 위험하냐 하면 하나님 이야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미사일 폭격하듯이 하나님에 대한 공격을 주저하지 않고 퍼부어대는 메시지가 날아와요.
그런 인터넷 세계, 그런 방송매체, 하나님 질식시키기, 하나님 목조르기, 하나님 사형시키기, 하나님이라는 모든 단어를 지근지근 밟아버리기, 그럴 때 그 사람은 자유인 같고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요 품위 있고 가장 인간의 존엄성을 사랑하는 사람 같이 보여요, 죄라는 것이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을 미리 아시고 공격할 만한 나무를 미리 심어놓았는데 그 나무가 선악과나무입니다. 마귀가 그것을 건드릴 줄 알았어요. 그리고 건드렸습니다.
그러면 생명나무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공격을 피해서 도망치는 것이 생명나무에요. 생명나무의 특징은 사람들에게 안 맞아죽기 위해서 사람들을 피해서 계속 도망치는 거예요. 피신하는 거예요. 생명은 인간한테 없어요. 인간한테 피해서 도망친 그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 영생이고 생명이에요.
인간세계에 있는 것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지어낸 것입니다. 유사품에 주의해야 합니다. 생명이 사람 손에 닿을까봐 사람에게서 도망친 그곳에 생명나무가 있다면 잠언서에 말씀하는 것처럼 그 동안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해도 괜찮은 것 건지는 거예요. 신랑신부 결혼할 때 반지 주지 말고 생명을 주게 되면 그것보다 더한 혼수가 없습니다. 최고의 혼수가 생명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생명이 인간세상을 피해서 갔기 때문에 벌써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벌써 예수님 세계와 인간세계, 선악과 세계와 생명세계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는 반드시 선악과 요소가 뭐며 생명의 요소가 뭔지를 말씀전하는 그 현장에 뚜렷하게 같이 동반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니까 그 뒤에 ‘아, 천국 아름답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그게 아닙니다.
천국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임금님이 혼인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혼인잔치에 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싫어해서 어떤 사람은 장사한다고 가버리고 어떤 사람은 밭에 볼일 보러 가버리고 오지 않았’을 때에 7절에 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악과를 이미 따먹은 상태에서 생명나무가 들어가 버리면 사람들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해요. 이것은 바로 죄라는 것은 생명나무가 오든지 누가 오든지 간에 하나님 쪽에서 보내는 것은 무조건 받아서 공격하게 되어 있고 자기 것 위해주면 그렇게 좋아들 해요. ‘수고했습니다, 욕 봤습니다, 애 썼습니다, 선하게 행동하더니 복 받았네요.’ 라고 내 행위에 대해서 긍정해 주면 다 좋아하고 주님께서 무조건 그냥 주신 것에 대해서는 발길로 다 차버리고, 그렇게 해서 둘로 쪼개지는 겁니다.
지금 부터는 좀 어려워요. 유대나라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계시를 내려주면 여기서 두 갈래의 길이 발생됩니다. 원래 계시가 오지 아니하면 동일한 공간 내에서는 길이라는 것이 없어요. 이 말을 제가 하면서도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길’이라는 뜻이 뭐예요? 완료된 완벽한 공간 안에 있으면 길이라는 것이 따로 필요 없습니다.
길이라는 것은 이 자리에서 빠져 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이 자리는 임시적으로 있는 것이고 갈 길을 서로 다르게 가야 된다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계시는 현재 유대나라 이 땅에서 바벨론으로 잡혀갈 때 그 잡혀가는 그 길에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이쪽에는 생명이 없고 영생이 없고 선악과밖에 없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에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제가 이 본문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오른 손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오른 눈동자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 본문을 보면서 도대체 이 죄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신체를 거론 했거든요. 잘라버리라, 잘라버리라, 했는데 전기톱 가지고 다 자른다 한 들 잘라낸 거기에 죄가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죠.
어떤 사람이 도박을 했는데 돈을 잃었어요. 그러니까 화가 나서 자기 손가락을 잘랐습니다. 그 손가락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손가락에 붕대감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그 다음에 또 화투장을 쥔다는 말이죠. 이 문제가 안 풀리면 우리는 오늘 본문 풀 수가 없어요. 예레미야 따라서 길을 가야 되는데 우리는 그냥 이 자리에 머무르고 말거라는 말이지요.
죄가 어디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사람이 도박하는 손가락을 잘라도 그 사람이 자기 딴에 죄라고 생각하는 그 죄가 죄송합니다만 죄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도박을 해서 돈을 땄으면 자기 손가락을 자르기는커녕 뽀뽀할 거예요. ‘에구 예쁜 내 손가락, 네가 없으면 내가 어찌 돈 버나.’ 할 겁니다. 죄냐 아니냐의 판단에서 선악과사고방식 가지고서는 죄도 모르게 되고 의도 모르게 되고 아무것도 모르게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3장 36절에 저주에 대해서 나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죄가 어디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그 적개심이 생기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 죄와 한편입니다.
예수님의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보지 않게 되면 우리는 항상 세상 사람과 타협적으로 나가요. 오늘 학생들 잠언서 마지막 대목을 정리하는데 이런 대목이 있어요. 그 대목이 참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사람은 물에 비추인 자기 모습을 보듯이 다른 사람을 보면서 자기 얼굴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지만 멀리 있는 하나님은 하등 중요하지 않고 결국 중요한 것은 가까이에 있는 일가친척, 내 새끼, 내 남편, 내 아내, 같은 교인들 여기에 정이가요.
사람은 정으로 살거든요. 정으로 사니까 적개심? 어림도 없습니다. 그저 같이 모여서 사는 그 자체가 좋아요. 어떤 가수가 부른 노랫말에 이런 것이 있어요. ‘사슴처럼 기대어 살자.’는 노랫말입니다. 외로울 때는 사슴이 서로 기대는 모양입니다. 얼마나 고상합니까? 사슴처럼 외로울 때 서로 기대어 살자는 것,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는 겁니다. 사슴처럼 서로 기대면서 서로 위로해 가면서 서로 다독 거려 가면서.
그렇게 서로 외로울 때 서글플 때 하나님 찾습니까? 따뜻한 36.5도의 체온을 가지고 있고, 이부자리를 같이 할 수 있고 마주보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연속극 보고, 박지성이 축구할 때 김연아 피겨 할 때 같이 박수치고, 같이 응원할 수 있는 사슴처럼 기대면서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을 원하는 겁니다. 거기서 무슨 염소하고 양이 갈라집니까? 거기에 무슨 좋은 고기 나쁜 고기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가룟유다 하고 사슴처럼 기대어 살았습니까?
깜짝 놀라서 ‘웬 귀신?’ 주님은 알았어요. 가룟유다가 마귀 들렸다는 것을. 섬뜩했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등 돌리고 가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너도 갈래?” 하니까 “영생의 말씀이 계시니 어디로 가겠습니까?” 할 때에 “그렇다. 내가 친히 너희들을 선택했다. 구원하기 위해서. 그러나 다는 아니다.” 이미 아셨습니다. 이미 요한복음 6장에서 가룟유다가 마귀 들린 것을 아셨어요. 마귀가 안에 있는 사람인데 얼마나 섬뜩하겠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죄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그 해답은 신명기 8장에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6절에 보면 만나의 의미가 나와 있어요.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명기 8장 12절부터 죽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요새말로 번역하면 사놓은 땅값 오르고 주식 값 오르고 수입 팍팍 늘어나고 자식들 다 잘되고 하는 일 마다 만사형통할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두렵건대 여호와가 누구지, 하나님이 누구시지?’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만나가 뭐냐 하면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떡이에요. 언약의 떡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을 주신 것은 “마음을 낮추”게 하는 겁니다.
17절부터 나오는데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하고 마지막에 ‘이 언약을 기억하지 못하면 다른 이방민족과 함께 너도 멸망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예레미야 16장 5절 뒷부분에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긍휼을 제함이니라.”
줬던 하나님의 평강과 구원을 도로 빼앗아 간다는 겁니다. 도로 빼앗아 가는데 어디로 빼앗아 가는가?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곳으로 빼앗아 간다는 겁니다. 도로 빼앗아서 마음을 낮추기 위함입니다. 마음을 낮춘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고아였고 과부였고 종 되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정상적이 아닌 세상 돈밖에 모르는 이 더러운 세상에 성도를 남겨두는 것을 우리가 고맙게 여겨야 됩니다. 돈밖에 모르고 힘밖에 모르는 이 더러운 지옥 같은 세상, 이런 어려운 환경, 그런 백그라운드 속에서 비로소 알곡과 가라지가 갈라집니다.
집에 돈 천 만원 들어왔다 칩시다. ‘주여, 제가 이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주신 새 언약, 주님 주신 피 때문에 기뻐합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거예요. 물론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만. 돈 생기는 경우는 다 입이 쫙 벌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이 돈이 다시 사라지지 않게 해달라고 또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는데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귀에 안 들어오고 돈 천 만원 들어온 이것이 소멸되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돈밖에 모르는 이 비정상적인 세상이 얼마나 정상적인 세상입니까? 아주 정상적인 세상이에요. 어느 정도냐 하면 누가 죽어도 울지도 말아야 할 정도, 울 가치도 없을 정도입니다. 어차피 죽은 인간들 밖에 없으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는지 ‘너 같은 인간은 죽어도 너한테는 부조 안한다.’ 할 정도로 적개심을 갖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아들이 없으면 무조건 저주받아요. 판사 되었다, 검사 되었다, 누구 집 아들이 변호사 되었다, 그런 것 좋아하지 마세요. 저주가 임했습니다. 이것은 성경 봐야 나옵니다.
‘김 집사 아들 사법시험 수석합격!’ 성경 안 보게 되면 우리 교회에도 이런 플래카드 붙입니다. 하지만 성경 펼쳐 보면 그것은 저주받을 일도 될 수 있어요. 아들 믿는 자는 영생이 주어지고 아들이 없는 자는 고시를 패스해서 판사가 되어도 거기에는 저주가 임합니다. 바로 이 언약은 우리가 이 세상에 힘들게 살 때 어렵게 살 때 진짜 양식은 만나, 이 말씀이 양식이지 돈이 우리의 양식이 아닌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 생명나무로 갈 사람과 선악과, 지옥으로 갈 사람을 두 쪽으로 쫙 갈라지게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계시가 오게 되면 선악과 편과 생명나무 편이 쫙 갈라진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울 가치도 없는 세상, 울어도 소용없는 이 사람들이 뭐가 두렵고 뭐가 부럽고 뭐가 겁나는지 그들의 안목과 그들의 시선을 너무 따갑게 느꼈던 저희들을 용서해주시고 이제는 주께서 주신 그 십자가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을 새롭게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