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사 9" 6-7 (한 아기)
Re..사 9: 6-7 (한 아기)
이름 : 이근호(IP:)
본문 : 이사야 9:6-7
일시 : 2003년 12월 24일
한 아기
2003년 12월 24일 본문 말씀: 이사야 9:6-7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우리는 늘 죽음과 직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어제도 이 세상은 숱한 일들이 발생됩니다. 온갖 종류의 일들을 우리가 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일들 속에서는 우리는 죽음의 얼굴을 대하게 됩니다. 죽음의 흔적들에 의해 늘 상처받고 삽니다. 아무리 일시적으로 기쁜 일이 생기고, 즐거운 일이 줄줄이 이어져 생긴다 할지라도 늘 곧장 지나가 버린 과거사가 되고 맙니다.
물론 즐거운 일이 많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죽음이 주는 허무의 무게는 그깐 즐거운 일을 합쳐놓은 것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궁극적으로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사실상 우리는 아무 것도 해결해 놓은 것이 없는 셈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하나님도 아십니다.
세상의 모든 영광이 풀과 그 풀에 가엽게 매달려 있는 현혹적인 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합니다. 물론 자기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이만쯤이면 거리에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들이 활개치지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라면 이만쯤에 우리에게 무슨 선물을 제공하시겠습니까?
바로 영생의 선물을 주십니다. 그 영생의 선물이 바로 '한 아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한 '한 아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주신 '한 아기'입니다.
저도 한 아기였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모두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 아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겠지요.
그 때는 주위의 가족들이나 우리 본인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던 시절입니다. 세상은 모두 나를 위하여 존재해야만 하는 것처럼 해석하던 시기였습니다.
가족들은 새로 등장한 '한 아기'에게 많은 기대를 퍼붓습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공주로 자라줄 것을 신에게 기도했을 것이고, 이 세상 누구보다도 천재적인 두뇌로서 인류에 봉사하고 가문의 영광을 빛낼 자손이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를 모았던 그 '한 아이'는 지금은 다들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거대한 자본시장에 잠식되어 이름의 모를 잡초처럼 거대 도시에서 겨우 한 창문으로만 자기 얼굴을 내밀고 햇빛을 쪼는 신세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어느날 내가 죽은들 온 국가가 진정으로 애통해하고 울어줄까요? 그야말로 잡초의 잠시 피었다고 바람에 불려 날리는 꽃씨같은 인생입니다. 죽음의 세력이 그만큼 가공할만큼 강력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으로서의 '한 아기'말고 따로 '한 아기'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하나님이 들어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되어 있습니다. 아기가 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시조가 되어 새로운 계열의 족보를 하나님은 만드실려고 하십니다.
죽음과 죽음의 연쇄고리를 이루는 아담의 계통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생의 씨가 주어져 영생을 얻어 음부의 권세, 죽음의 세력도 당해내지 못하는 새 계열의 백성을 배태하려고 하십니다. 자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우리 인간이 해야 합니까? 로마서 4:4-8에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즉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행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질책하신 결과가 아니라 도리어 아브라함의 그 어떤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 결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열심'으로 나와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열심의 실적에 해당되는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율법적으로 거의 흠이 없을 정도라고 자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가 빌립보서 3:7-8에 보면, 그 모든 것을 더럽다고 내버릴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굴복당한 자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신념이 돈독하고 대쪽같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열심과 마주치면 당할 장사가 없습니다.
그 전에 그토록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부각시켰던 것들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한 아기'를 신봉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깨어짐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열심'은 숱한 자들을 순교케 한 과정가 여정을 밟은 것입니다.
그 예로서 저는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아기 예수를 찾아내기 위해서 베들레헴에 들렀던 헤롯의 군대들은 누가 아기 예수인 지를 골라낼 생각도 하지않고 아예 베들레헴에 태어났던 두 살이 이하의 아기를 모조리 죽이고 말았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단지 아기 예수님과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가정에서 통곡소리가 더높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분통 터지말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조차 자기 백성에게 복음이 전달되는 코오스라면 결코 그냥 피해 갈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이와마찬가지로 또 누군가에게 복음이 전달될 필요가 있다면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들이 억울하게 희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한 아기'를 통한 '영생주시기'에 이런 식으로 일하시는 겁니까? 이사야 7:14에 보면, '그 한 아기'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즉 처녀로 인해 태어날 임마누엘이라는 아기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 아기가 바로 '남은 자'만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하실 장차 영원한 왕이 되실 분이라는 겁니다. 왜 하필이면 '임마누엘'일까요?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즉 멀리만 계시던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사시는 이 땅에 오셔서 '함께 하는 인물'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다음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이 세상은 자신의 정체를 더 이상 감출 길이 없어집니다. 어떤 이들은 '한 아기'와 죽음을 이기는 문제와 상관없다고 여기고 그 분을 무시하고 핍박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한 아기'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과 필연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믿고, 그 '한 아기'의 행하심을 모든 것을 거는 자들이 생겨납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구원받기로 작정된 그 '남은 자'입니다.
즉 '임마누엘'이란 '한 아기'의 이름인데, 이름이란 그 분이 땅에서 하는 기능이 집약되어있는 표현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21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름이 '예수'란 곧 '자기 백성'에 대해서만 구원하실 자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기 백성'이란 곧 '임마누엘'의 기능의 여파로 주어진 것입니다. 세상을 두 부류를 분류하시는 기능을 실시했기에 비로소 등장되는 '자기 백성'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자기 소원이나 기분이나 감각에 의해서 하나님 백성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자기 백성' 곧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백성에게는 장차 하늘의 예루살렘 성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친 백성이 됩니다. 이것을 '여호와 삼마'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에스겔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성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갈라짐이나 분류될 필요가 없이 순수한 자기 백성들과 더불어 영원한 영생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아직도 임마누엘의 기능이 계속 실시되어야 합니다. '한 아기'를 기피하고 본인이 '한 아기'였던 그 시절의 꿈과 이상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하늘의 '한 아기' 되시는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거는 사람도 여전히 생겨나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한 아기'의 끝은 영생입니다.
'한 아기'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간주할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는 것은 순존히 우리의 노력이나 종교적 감성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성취해낸 하나님의 작품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독하게 살기 어려운 이 때에 아직도 시시한 에피소드에 마음 쏟을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신 '한 아기'에게 감탄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 ▨ 사 9: 6-7 (한 아기) - 이근호 ┼
본문 : 이사야 9장 6-7절
제목 : 한 아기
일시 : 2003.12.24
듣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