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4장22-30절 제목 : 무시 당하는 예수님
눅 4:22-30 (무시당하는 예수님)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7)
본문 : 누가복음 4장22-30절
제목 : 무시 당하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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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0-03-21 13:28
무시당하시는 예수님
2010년 3월 21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4:22-30
(눅 4:22, 개정)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 4:23, 개정)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눅 4:24, 개정)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개정)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정)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정)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눅 4:28, 개정)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눅 4:29, 개정)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눅 4:30, 개정)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성도에게는 고향은 따로 있습니다. 빌립보서 3:20-21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그것을 듣는 사람들과의 괴리는 딴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떠납시다. 남의 땅에서!”라는 의도로 복음을 전하는데 듣는 사람들은 “이 땅 말고 떠날 데가 어디있다는거냐? 그냥 살자”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쉽게 말해서 ‘몽땅 포기하자!’고 나오는데 듣는 사람들은 “애써 모은 것을 왜 버리는데?”라는 투로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땅의 정경처럼 하늘나라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낡은 아파트와 호화 아파트를 똑같이 보고 있으면서 어느 곳에 살겠느냐고 묻는 것은 참 어리석은 질문일 것입니다. 누구나 호화 아파트를 선호합니다.
하지만 호화 아파트를 보이지 않는 곳이 숨겨놓고서는 말하기를, “이 낡은 아파트 버리면 호화 아파트에 넣어줄게”라고 나오면 백발백중 사기꾼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면 상대편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호화 아파트 보여줘 그러면 버리지 말래도 이 낡은 아파트를 버릴게”라고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세상적인 안목이 예수님의 말씀에 곁들여서 나오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보고 요셉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하나는 “의사야 너의 병이나 고치거라”가 나옵니다. 또 하나는,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가 나옵니다. 또 하나는 “모든 과부나 모든 문둥병자에게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장벽들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이 땅을 버리고 하늘의 고향을 말하는 사람은 이 땅을 떠나기 싫은 자들로부터 ‘미친 자’ 취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소위 예수님을 미친 사람을 몰아세우는 자기네들은 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침착한 자들이라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도 자신이 정상인 중에서 정상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미 죽은 예수가 살았다는 사실을 믿는 종교적 미친 자들을 잡아내는 수사관으로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본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믿고부터 그는 자진해서 ‘미친 자’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전까지 예수님을 육으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벗어나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 즉 영적 안목이 없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이미 정상이 아닌 사람들 뿐인 세상에서 도대체 예수님을 누구를 구원하려 오신 겁니다. 민수기 24: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즉 모압이라는 이방나라을 통과하려다가 저지를 받을 때에 발람이라는 이방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대목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단순히 기존의 나라 틈바구니에서 그냥 살기 위해 새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라, 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아니하면 저주받는 기준점으로 등장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는 나라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모든 세상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집니다.
하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는 처음부터 가짜 메시야였거든”라는 사실에 입각해서 그 증거수집에 나섭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그들이 쓰고 있습니다. 근본이 별게 없다는 겁니다. 믿을 가치도 없는 존재가 예수라는 겁니다. 더나아가서 자기 고향말고 다른 동네에서 반짝 히트를 쳤지만 그들은 “남의 병 고친다는 의사가 제 병은 못 고치나? 네나 잘하세요”라는 상투적 격언을 동원해서 비난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흔들기는 곧 유대나라가 이미 이방나라와 다를 바 없는 저주의 대상으로 굳어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이스라엘은 오로지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새로이 선택하기 나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엘리야 시대를 거론하십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3년 반이나 지독한 가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땅이 저주받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이는 그 땅만을 의지하는 자들은 누구나 땅과 더불어 저주받아도 마땅함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앞에 나타나게 합니다. 아합왕은 엘리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조성해놓으신 심판 분위기 속에서 진정 여호와의 속성이신 은혜와 긍휼이 돌아갈 그런 자들을 만나 무상으로 제공되는 은혜와 자비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등장하는 참 이스라엘 모습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성도의 고향이 이 땅말고 따로 있다는 사실을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을 어디까지나 이 땅에 국한하려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받은 고난만 되풀이해서 생길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고향 사람들인 아나돗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러움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12:6에 보면,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힘으로서는, 진정한 고향을 발견할 재주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가뭄은 모든 인간이 저주받아도 합당한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엘리야나 엘리사의 경우를 예를 들면,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의 고침을 주신 적이 없다고 분명히 해두십니다.
즉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달라고 요구할 처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세상 살이에 고생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받을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건져내시는 사람만 구원이 될 뿐입니다. 과부나 문둥병자라는 이유로 구원되지는 않고 단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갔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이 되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의 피흘리심도 이런 자들만을 위한 죄씻음의 근거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묻어있는 자는 직접 하나님이 관리하는 대상이기에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피를 모독까지 해가면서 그들을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구세주이십니다. 왜 우리가 이 땅의 것에 더 이상 미련두지 말아야 할 이유를 가득 싣고 다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0-03-23 22:31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20강-눅4장22-30(무시당하는예수님)-luk100321.hwp
우리교회
10-03-23 22:32
020강-눅4장22-30(무시당하는 예수님)-luk100321
2010-03-23 21:30:11 녹취 : 오용익
020강-눅4장22-30(무시당하는 예수님)-luk10032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4장 22절에서 30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4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4:22-30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 중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쫒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을 유일하게 인정하는 데가 교회라는 겁니다. 절에서는 그렇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청와대나 세상단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 메시아라 하는 데에는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일반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교회만큼은 출발이 뭐냐 하면 예수님은 구원자다,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구원자라는 것은 ‘데리고 가려고 왔다.’는 겁니다. 여기 이 땅의 세계에서 살던 사람들 중에서 몇을 자기가 살던 세계로 끌고 가고자 데리러 왔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가지 못하기 때문에 일부러 어려운 걸음을 하셔서 하늘에 계시는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골라서 데려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고향문제가 생기는데 도대체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될 고향이 어디냐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가 ‘예수님의 고향이 어디냐?’ 하는 겁니다. 메시아의 고향이 어디냐? 하늘나라냐, 아니면 이 땅이냐? 만약에 메시아의 고향이 땅 같으면 우리가 알아서 거기에 가면 돼요. 만약에 메시아야 고향이 하늘에 있다면 죄송합니다만 우리는 이 땅에서 손 털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메시아는 좋으나 우리가 이 땅을 떠나는 것은 싫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교회가 뭐냐? 메시아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데가 교회입니다. 그러면 중간에 한 것을 생략하고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과 연결시켜 볼게요. 메시아를 인정하는 교회는 메시아가 하늘에서 왔기에 땅에 있는 것에 대해서 손을 털고 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메시아와 하늘나라 가는 것은 좋은데 지금까지 살면서 자식들과 더불어 땅에 힘들게 일구어낸 모든 것을 손 턴다는 이것이 우리에게는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거든요.
쉬운 예를 들면 아파트가 두 채가 있는데 하나는 낡은 아파트고 하나는 호화아파트입니다. 낡은 아파트를 말고 호화아파트에 들어가서 사시렵니까, 하고 제안할 때 백이면 백 다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호화아파트 보여주고 낡은 아파트도 보여주고 둘 중에 어느 아파트에 가서 살렵니까, 하면 전부 다 호화아파트에 가서 살겠다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저, 지금 낡은 아파트에 살고 계시는데 호화아파트에 가서 살 의향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그러면 이 낡은 아파트를 버리세요.”라고 하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호화아파트부터 먼저 보여주세요.”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보고 믿겠습니다. 호화 아파트를 먼저 보여주면 보고 나서 그 때 낡은 아파트를 버리지 말래도 버리겠습니다.” 하는 거죠. 그러면 또 하는 말이 “낡은 아파트부터 먼저 버리세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미쳤습니까?”하고 나와요.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호화아파트에서 사시는 분을 먼저 보내드리겠습니다.” “예, 보내주세요.” 그 분이 바로 메시아고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오셔서 하는 말이 “고향으로 갑시다.” 그러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 호화아파트 먼저 보여주세요. 보여주면 제가 버리지 말래도 버리고 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호화아파트를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모습을 보여줘요. 버림 받는 이유가 뭐냐? 오늘 본문에 보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자기들 쪽에서 연구해서 믿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연구해보니까 ‘아, 저건 목수의 아들, 요셉의 아들이다.’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성장과정, 베들레헴에서 또 갈릴리에서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다 안다는 겁니다. “가가 우리 동네 아다. 비산동 141번지에 살았다. 가가 와 갑자기 지가 메시아래. 와, 웃기지 그자?”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우리 동네서 사업할라 하는데 사업이 안 되니까 가가 딴 동네 가서 히트 쳤단다. 가버나움에서 되게 히트했다는데 이번에 우리 동네 온단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런 인간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난주에 최근에 나온 영화 <셔터아일랜드>라는 영화를 보고 제가 얼마나 흐뭇했는지요.
정신병자들을 가둬놓는 섬인데 아무도 갈수도 없고 빠져 나올 수도 없는 폐쇄적인 곳, 셔터를 내려놓은 셔터아일랜드, 섬입니다. 육지에서는 그 섬이 정신병자들만 모아놓았다고 소문이 나 있는데 거기에 어떤 살인사건이 나서 수사관이 가보니까 반대에요. 의사들이 정신병자에요. 의사들이 정신병자고 환자들은 멀쩡한데 그 섬에 가면 무조건 멀쩡한 사람들은 정신병자 되어야 되고 그 중에서 유일하게 정신병자 아닌 사람은 의사들밖에 없어야 되고, 그걸 요구하는 이 섬에 멀쩡한 수사관이 간 거예요.
영화가 진행되는데 섬에 간 멀쩡한 수사관에게 미친 의사들이 무엇을 세뇌하느냐 하면 ‘너는 이렇게 미친놈이다. 우리가 치료해 주마. 치료 안 받으려면 너는 죽어야 된다. 살고 싶거든 너는 미친놈이 되어라.’ 이렇게 되어서 커피에 담배에 정신병 걸리는 약을 먹여놓으니 수사관도 나중에 헷갈려버리지요. 그리고 그 영화의 끝은 해답이 없어요. ‘여러분, 과연 누가 정상이고 누가 정신병자입니까?’라고 묻는 것이 영화의 끝이에요.
여러분, 종교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이 세상이 전부 다 정상적인 사람들인데 몇 몇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예수가 메시아라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가 죽은 것은 까불다가 죽은 거예요. 성전을 뒤집어 놓고 이게 성전이 아니고 내가 성전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라고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를 한 두 번 한 것이 아니고 계속 했거든요.
정상적인 사람들이 그 미친 개 같은 예수님을 참다 참다 못 참고 분란이 일어나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죽였다 이 말이죠. 그렇게 끝났어요. 허무하게 끝났는데 예수의 제자들이 자기들 딴에는 평생을 두고 예수가 메시아라고 믿었는데 예수가 그냥 허무하게 죽으니까 그 남은여생의 보상을 어디서 얻습니까? 예수의 시체를 어찌해서 처리해놓고는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한 거예요.
제가 지은 『피』라는 책에 이런 것이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매우 합리적인 사람들입니다. 뭐든지 숲은 보되 나무를 못 보는 그런 자들이 아니고 뭐든지 남의 의견을 들어가면서 침착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어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처단하려고 하니까 바리새인중의 제일 고수가 하는 말이 ‘놔둬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저절로 망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뜻에 대해서 우리가 도전하는 셈이 되어버리니까 그냥 하나님의 뜻에 맡겨라.’ 하는 정도까지 세상의 지평을 넓게 보는 똑똑한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왜 그리 똑똑하냐 하면 그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선배들의 업적과 진리추구를 이성적으로 따져서 종합적으로 연구해서 오류를 최소화시키면서 계룡산에서 혼자 계시 받은 것들은 다 떼어버리고 누가 봐도 납득되고 공감갈수 있는 것만 추려내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의 결정은 오류와 하자가 없다고 한 거예요. 그들 중에서 제일 뛰어난 수사관, 이름이 사울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 수사관이 등장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이단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미친놈들을 다 잡겠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그 수사관이 다메섹에 내려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이 정상적인 수사관이 완전히 예수한테 미쳐버렸어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나는 미쳤다.’고 해요. ‘나는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다고 여기는 멀쩡한 너희가 실상은 다 죽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에 따르면 산 자가 산 자가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야 인간이지 현재 살았다고 여기는 인간들은 인간도 아니고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거예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지옥 간다.’는 겁니다. 요새 같으면 사울이라는 사람은 서울대학 나온 사람이에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내가 전에 율법으로 흠이 없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똥오줌이었다. 배설물이다. 내가 예수를 아는 이것으로 인하여 그전에 고상하게 여겼던 것, 나를 고상하게 해준 모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나는 다 똥오줌으로 여기고 버린다. 나에게 고난을 주라.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은 나에게 영광이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바리새인들이 ‘미친놈이 또 하나 늘었네.’ 한 겁니다. 사도바울을 잡기 위해서 특별수사대가 꾸려졌어요. 야고보 죽였지요, 베드로 옥에 갇혔지요, 사도바울을 잡아서 족치려고 현상수배까지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지금 우리는 공중권세 잡은 악마에게 속아 넘어갔으며 그전까지는 내가 죄인중의 괴수인지도 모르고 그저 멋도 모르고 예수를 이단시 했는데 내가 진짜 정신병자고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보시기에 정상이라는 증거는 하나밖에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친 것이 아니고 진짜로 하나님이 사흘 만에 유일하게 예수님을 부활시켜 놓았다.’
그러면 십자가에 죽었던 분이 실제로 사흘 만에 이 땅에서 부활하셨고 그 분 말씀대로 다시 재림한다면 게임은 끝난 것 아니냐 이 말이지요. 이것은 학력이나 도덕이나 얼마나 착하냐 악하냐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아주 단순하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간단한 문제로 모든 것이 모아진다는 겁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예수 믿으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겁니다. 오늘날 사도바울을 이단으로 몰아세우는 샌더스라는 신학자가 등장해서 사도바울은 너무 까불고 오버하고 사도바울의 것은 계시도 아니라는 분위기가 신학교마다 다 퍼졌어요. 그 신학자에게 배운 것이 목사들 속에 다 들어 있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하는 말이 ‘누구든지 사도바울의 편지를 함부로 풀다가는 저주받는다.’고 했어요. 사도바울 본인도 이야기했어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가 있을찌어다.’ 결국은 막가자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고린도전서 2장에서 ‘나는 너희 중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한다.’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것이 내가 전한 전부라는 겁니다. 십자가지신 주님은 우리가 평생 지은 죄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사도요한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왔기 때문에 제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한 그 모든 공로와 업적을 모독하거나 이단이라고 하지 말고 제발 수용 좀 해 달라.’는 겁니다. 내 죄를 다 가져가신 분이라고 인정을 해 달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말씀 가운데 빌립보서 3장 20절부터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의 시민권, 우리의 주민등록이 이 땅에서 말소되고 저 위에 있다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우리의 주민등록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이름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정도로 이미 생명에 휘말리고 생명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예수 믿는 우리의 몸은 없어져도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그 부활체와 동일한 형체로 영원히 천국에서 산다는 겁니다. 생명나무열매로 산다는 겁니다.
꿈일까요? 하나의 바램입니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라고 지어낸 인간들의 사적인 하나의 희구요 갈망입니까? 갈망의 극단이고 신화이며 전설입니까?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사건을 보라. 거짓말을 못한다.’ 누구 하나 이 세상에서 빠져나와야 제대로 바깥에서 제대로 이 세상의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 집어놓고 다시 사흘 만에 빼내어서 빼낸 그 안목 빼낸 그 시선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데 그 안목을 가지고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 알 수 있는 눈이 열려서 그 사람만이 영적인 사람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영적이 사람이 못되고 육적인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고향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난 뒤에 오늘 본문을 보면 어려운 대목들이 풀리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 개의 어려운 대목들이 우리의 논리를 턱턱 가로막아요. 첫째는 왜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느냐 하는 문제요. ‘예수? 저거 요셉의 아들 아닌가?’ 22절에 ‘쟤 떴네, 떴어. 진짜 개천에서 용 되었네. 우리가 걔 오줌 누고 똥 누면서 크는 것 다 봤는데 걔가 용 되었네.’ 그런 이야기가 왜 예수님이야기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지 그것이 하나의 장벽으로 남아 있습니다.
두 번째는 23절에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이 나오는데 왜 여기에 속담이야기를 집어넣어서 뭔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 턱 걸리도록, 이게 무슨 뜻이냐 말이지요. ‘예수야, 남 고칠 생각하지 말고 네 병이나 고치고 네 주제나 알아라. 하이고, 자기병도 못 고치는 주제에 남 병을 고치겠다고? 에이고!’라는 말을 왜 여기에 집어넣었느냐 그 말이지요.
제 말도 어렵지요. 제 취지는 이겁니다. “여러분 저 메시아거든요. 저를 믿으세요. 천국 갑시다.” “예!” 아주 매끈하고 부드럽게 빠지잖아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될 것을 가지고 성경에 ‘저거 요셉의 아들이잖아.’라는 그 말을 왜 집어넣었느냐 하는 것과 두 번째는 ‘어이 의사! 자기 병도 못 고치면서 남의 병을 고친다고?’라는 말을 왜 집어넣었느냐?
세 번째 어려운 대목이 ‘엘리아 시절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엘리야 시대 때 가뭄 들었다는 이야기를 기상청도 아니고 일기예보도 아니고 여기에 왜 집어넣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하면 얼마나 수월해요. 그렇게 수월한 것을 가지고 왜 세 가지나 집어넣어서 턱턱 걸리게 만들고 여기에 구성상 하나 더 보탠다면 이렇습니다.
4종 세트가 되는데 ‘엘리사 당시에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되 오직 문둥병자 한 사람만 구원받았고 엘리야 가뭄 때 많은 사람들에게 흉년이 들었지만 오직 사렙다 과부만 혜택을 입었다.’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그 말입니다. 이 네 가지를 풀어봅시다. 우리가 오늘 보고 있는 성경본문은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서 문제를 던져놓고 그 문제를 푸는 식으로 신약성경에서 답변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해답만 나와 있으니까 문제를 알고 연결을 시켜야 전후좌우를 다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부터 먼저 봅시다. 민수기 24장 9절부터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배경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모압이라는 지역을 지나가는데 그 모압의 추장이 발락입니다. 발락이라 하니까 독일의 유명한 축구선수가 생각납니다.
이스라엘이 모압 땅에 들어오니까 모압의 족장 발락이 하는 말이 “어이, 우리 땅에 왜 들어오느냐?”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하는 말이 “그냥 곱게 지나만 갈게. 과수원의 과일도 안 건드리고 우물물도 그냥 놔두고 곱게 지나가리다. 너희들과 상대하기도 싫으니까 지나가도록 허락만 해다오.” 발락이 “누가 그걸 믿겠나. 그렇게는 못하겠다. 돌아가라.”
그런데 이스라엘로서는 돌아갈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가운데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어서 가라고 하는 데만 가야 돼요. 적어도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다. 운전사 마음대로에요. 승객들 말대로 하는 게 아니고 운전사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도하는 대로 가다 보니까 모압 지경으로 가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인도하는 대로 가면 그대로 가게 하면 되는데 또 하나님께서 그 길을 막으시는 거예요. 오늘 반주자 교통사고 났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냥 오게 하면 되는데 그런 식으로 말리시는 이유가 뭔지 본인이 아마 열심히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교회에서 반주하려고 하는데 왜 말리시는지. 하나님께서 예수 잘 믿고 천당 가려고 하는데 왜 막아서느냐 그 말이지요. 그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했는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갔어요. 인도하는 대로 갔는데 이상하게 물이 없고 인도하는 대로 가는데 이상하게 양식이 없네요.
예수 믿으라는 말인지 믿지 말라는 말인지 교회 그만 다니라는 말인지, 왜 그렇게 합니까? 도와줘도 교회 갈까 말까 하는데 우리보고 가라고 해놓고 못 가게 해버리면 어쩌란 말입니까? 이야기가 안 되잖아요. 여러분이 예수 믿을 때 이런 경험들을 한두 번 겪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복음이 중요하다.’고 하는 거예요.
네가 편한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피어나는 예수님의 그 공로, 은혜를 뽑아낼 대로 뽑아내겠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글을 썼는데 이런 글을 썼대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믿고 기도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가고 훌륭한 사람 될 수 있습니다.’ 그 글을 딱 대하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도대체 이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있는지 힘 모으는데 관심이 있는지.
힘을 모아야 하나님께 영광됩니까? 저는 성경에서 그것을 찾아 볼 수가 없었어요. 딱 깨놓고 이야기할게요. 예수님이 십자가지려고 안했으면 그리고 십자가를 안 졌으면 그렇게 미움 받을 분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베드로야, 미안하다. 내가 십자가 안 질게. 내가 고난 안받을 게.’ 이러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환영받고 다른 사람들과도 다 소통되는 보통 사람 되는 겁니다. 미움 받을 필요 없고 십자가에 죽을 필요도 없어요. 주님께서 기어이 십자가 지겠다고 나섰으니까 모든 사람들로부터 밉상 받는 겁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 베드로와 가룟유다까지 분통터져서 예수님 배신하고 팔아먹고 하잖아요. 복수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 예수야, 너는 나한테 한번 당해봐야 돼. 3년 동안 이 가룟유다를 속였어. 나는 네가 뭐라도 되는지 알았지.’
제가 한 5년 전엔가 울산 동은교회에서 집회 첫 강의 내용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모든 신학과 성경의 출발점은 착한 천사부터 시작하지 말고 가룟유다부터 출발하라는 겁니다. 가룟유다가 나고 내가 가룟유다라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예수를 완전히 오해하게 돼요. 다른 예수를 생각하게 된다고요. 가룟유다를 생각해야 돼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생각했던 그 심정으로 우리는 출발점을 삼아야 됩니다. 대충 팔아먹을 수 있을 때 팔아먹고 교회 안다녀야 됩니다.
그런데 이런 가룟유다를 주께서 성령을 주셔서 ‘진짜 너 같은 인간도 나니까 건지지 너 같은 인간은 어디가도 용서받지 못해. 나니까 하나님이니까 용서하는 거야. 내가 흘린 피는 나를 팔아먹는 너 같은 인간을 살리기 위한 피야.’라는 것이 다가와야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가룟유다를 이해하게 돼요. ‘형님,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데 당신은 사랑받지 못했고 나는 사랑받은 것뿐입니다. 단지 그 차이뿐이군요.’ 단지 사랑받은 것뿐이에요.
역시 봉사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죄인이 말도 안 되는 천국에 그냥 가기 위해서는 그 방법 자체도 말도 안 되는 방법이 동원되어야 되는 겁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너를 구원했다.’는 이 말도 안 되는 방법이 동원되어야 되는 거예요. 창세전부터 택정했다는 거예요 . ‘너는 나를 몰라. 그런데 나는 너를 알거든.
우리가 세상 살아갈 때 잘 될 때는 스피드 막 냅니다. 그런데 덜커덕 하고 걸리고 뭔가 장애가 생기면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하나님 잘 믿으려고 하는데 왜 교회 못나오게 하십니까?’ ‘네가 잘 믿으려고 하는 그런 것은 다 네 재주에 불과하다. 턱에 걸려도 너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그것을 언제쯤 깨닫겠느냐, 이 바보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은혜를 언제 깨닫겠느냐 이 말이죠. 잘 나갈 때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못 나갈 때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언제 깨닫겠느냐 이 말이지요. 그 때는 교회 못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터져 버려야 돼요.
이스라엘이 모압을 지나가려 할 때 모압 왕 발락이 막아섰어요. 막아서 보니까 너무 힘이 세거든요. 그래서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저주해라. 그렇게만 하면 다 줄게.” 해서 저주 전문가를 불러서 저주케 했어요. 그런데 이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나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렵니다.” 하는데 그게 9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이 이방선지자지만 하나님의 역사인데 이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면 이렇게 봅니다.
9절에 보면 ‘이것은 암사자 같고 수사자 같은데 일으킬 자가 없다.’하면서 점괘를 내놓는 거예요.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찌로다.’ 이러한 속성이 이스라엘에게 있었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뒷부분을 잘라내지 마세요. ‘우리를 축복하면 복 받습니다.’ 이것만 말하면 안돼요. ‘나를 건드리면 저주받아.’라는 것도 곁들여서 같이 연결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누구든지 성도를 힘들게 하면 저주받는다.’고 했어요. 마태복음 25장에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소자, 작은 어린애, 예수 믿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라고 한 겁니다.
지금 호화아파트 눈에 안보입니다. 다만 우리는 낡은 아파트를 쥐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호화아파트가 안보이기 때문에 낡은 아파트가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택한 자들이 와서 호화아파트가 있다고 이야기할 때 낡은 아파트에 살던 사람이 그 사람을 떠밀어 버립니다. ‘이 사기꾼, 거짓말쟁이, 미친놈아!’ 라고 떠밉니다. 그들을 떠미는 것은 곧 예수님 자신을 떠미는 것이라는 이야기에요.
이스라엘은 이 땅을 축복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로 구분하기 위해서 온 겁니다. 이제 첫 번째 장애물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그의 지난 과거를 다 안다는 겁니다.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니 뻔하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그런 발언을 하도록 환경을 만든 이유는 현재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현재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마치 진짜 모압 땅을 통과하는 이스라엘역할을 해서 구원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를 가려내기 위해서 그런 배경을 깔아놓은 거예요. ‘그래, 욕해라. 내 고향이 베들레헴? 갈릴리? 다 아니야. 내 고향은 하늘나라야. 하지만 너희들의 눈에는 갈릴리 출신에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밖에는 모르겠지.’ 하면서 그들의 눈에 상식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맞는 이야기를 밑에 레일로 쫙 깔리게 만들어요.
그 다음에 예수님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저 갈릴리 출신의 예수는 그냥 목수의 아들이야.’라고 하는 자는 그냥 저주로 남겨두는 작업을 실시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니까 저쪽에서 뭐라고 반발하느냐 하면 ‘어이구, 네가 의사라고? 네 배경도 모르고 네 꼬라지나 알아라. 네가 미친 인간인데 어떻게 남을 구원해?’라는 내용의 속담 ‘의원아 너를 고쳐라.’라는 것이 나온 겁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의사들은 자기병은 못 고치고 남의 병 고친다고 하는데 의사면 자기병부터 고쳐야 한다.’는 속담들이 널리 퍼져 있었어요. 그 속담을 예수님이 일부러 가져옵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날 보기에 너희가운데 퍼져 있는 속담처럼 나도 그렇게 보이지?’리고 일부러 가져와요. 일부러 가져오면서 ‘그래, 너희들 보기에 내가 가버나움에서 기적을 베푸니까 약이 오르지. 약이 올라서 하는 말이 예수야, 네 병이나 고쳐라, 이런 말이 하고 싶어서 속이 막 울렁울렁 거리지?’ 하면서 세 번째 장애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너희들이 기억하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12장 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네 형제와 아비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마을 할찌라도 너는 믿지 말찌니라.” 예레미야의 고향이 아나돗인데 그쪽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굉장히 구박을 했어요. 고향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안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축복할 자를 축복하시고 버릴 자를 버리시는 메시야 기능, 심판주의 기능을 완벽하게 거부하고 미워했어요.
거부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이, 예수 양반! 너나 정신 차리고 너나 잘하세요.’ 셔터아일랜드, 정신병환자들이 의사가 되어서 멀쩡한 사람들을 다 정신병자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주의 설교는 해답이 없어요. 믿거나 말거나, Believe or not, 이거라니까요. 해답이 없을 때 문제를 어떻게 풀면 되느냐 하면 간단해요. 성경을 덮어버리면 그만이에요. 성경 덮고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를 펴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들추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성경을 들추면 여기서 십자가 나오고 부활이 나오고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해괴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덮어 버리면 이 성경이라는 귀신을 누를 수가 있잖아요. ‘나오지 마. 이번 주일날에나 보자.’ 하고 꽉 누를 수가 있다니까요.
왜 성경에서 아이큐가 높고 정상적이고 예수님을 많이 알던 바로 그 인식, 교수님들이 아는 예수 말고 제자들이 아는 예수 말고, 대부분이 알고 있던 예수 인식을 성경에 담아 두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너희들도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그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을 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좋은 소리 한다고 해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예수는 우리가 상상해 낸 예수에요. 예수를 알려면 뭘 통과해야 돼요. 십자가를 통과해야 돼요.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은 우리가 끄집어 낼 수 있는 모든 의구심, ‘과연 그럴까? 내가 미치는 것이 아니야? 지금 내가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니야? 내가 다단계판매 같은 류에 속아서 정수기나 한 대 팔아주고 마는 것이 아니야?’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의심, 그 의심의 길을 컨베이어 시스템처럼 통과해야 돼요. 통과해서 정말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인지, 예수를 판단하는 나를 믿는지 아니면 예수님으로부터 판단받기를 원하는지, 내가 예수 믿어주는지 아니면 주님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붙드는 경우인지를 스스로 매일같이 점검해 봐야 합니다. 믿음을 확인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 번째 장애를 통과하면서 느끼는 점이 있는데 제일 어려운 대목이니 끝까지 참으시기 바랍니다. 엘리야 때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엘리야가 말씀을 전할 때는 이 땅 자체가 고향이 아니라는 겁니다. 가뭄 드는 것을 누가 좋아합니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을 주면서 병행해서 가뭄이 들게 한다는 것은 이 땅 현재 있는 이 세상이 하나님 말 듣지 인간들 말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버리면 우리도 이 땅을 버리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땅을 버렸는데 왜 우리는 자꾸 이 땅에 집착하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데. 그냥 이 땅에서 고생하면서 살다가 죽으면 천국에 가서 살면 되잖아요. 그 전에 우리 죄를 없애야 되는, 우리 죄가 사라져야 되는 큰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담당해야 될 문제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엘리야 당시에 가뭄이 든 겁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가뭄이 드니까 아합왕이 엘리야를 보고 하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엘리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앞에 뭐가 붙어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오랜만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다는 겁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명하는데 그 엘리야를 두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다는 겁니다.
우리 복음 전하는 사람들, 참 여러 사람들 괴롭게 합니다. 어떤 글에 보면 ‘너희들은 손 무성 목사의 아픔을 모른다.’ 이런 글도 있어요. 제가 속으로 그랬어요. ‘너희들은 주님의 아픔을 모른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 같으면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러나 십자가를 보자는 말이지요. 십자가 없는 사람은 꼭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보고 ‘십자가야 나를 괴롭게 하는 구나.’ 맨 날 이런 소리해요.
그 사람 쪽에서는 십자가를 치우고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십자가를 걷어내고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인간 대 인간으로 하면 돈 이야기밖에 더 나옵니까? 돈 앞에 모든 인간은 사기꾼만 되는데, 사기꾼 되자는 말입니까? 사기꾼 안 되려면 십자가 박아 놔 버려야 돼요. ‘나 죄인의 괴수거든요. 당신도 죄인의 괴수라고 이야기 해 줘.’ 이래야 그 다음에 이야기가 돼요.
‘나는 십자가 앞에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가는데 저쪽에서는 ‘나는 성화되었거든. 나는 착하거든.’ 이렇게 나오면 이야기가 안 된다니까요. 아합왕이 엘리야보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라고 하니까 엘리야가 ‘당신이 바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합니다.’라고 하면서 ‘모든 땅에 가뭄이 듭니다.’ 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는 이스라엘 모든 땅에 가뭄이 든다고 하는데 본문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엘리야가 그 중에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많은 과부가 있어서 그들이 다 가뭄 중에 어려웠지만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입지 않도록 했다.’ 왜 이렇게 합니까?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 못하는 것 같은데요.
‘가뭄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사렙다 과부에게 복을 주었어요.’ 말을 이렇게 곱게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듣기 좋게 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아무도 보내심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깔고 그 뒤에 ‘한사람에게 복이 임했다.’고 하느냐 말이지요. 왜 앞에 부정적인 것을 먼저 깔고 그 뒤에 ‘복이 임했다.’는 이야기를 하느냐 하는 겁니다. 사람들 교회 안 오게.
교회가 긍정적으로 나와 보세요. 교인들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을 할 때 왜 부정적인 말을 먼저 하느냐 그 말이죠. ‘한국교회 모두 다 이단이다. 그런데 택한 사람만 구원받는다.’ 그냥 택한 사람만 구원받는다고 하면 될 것을 가지고 ‘한국교회가 다 이단이다.’라는 말을 왜 집어넣느냐, 이 말이지요.
그것은 바로 과부에게 온 이것이 축복받을 자에게는 복이 오고 저주받을 자를 저주하는 이 소관이 온전히 주님의 소관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헬리콥터 타면 손들고 여기, 여기 하면 구원해 주는 방식이 아니고 전부 다 그냥 저주 아래 있고 그 다음에 건질 사람은 ‘너, 너, 너, 너, 와.’ 이런 식으로 건진다는 겁니다.
또 나오지요. 엘리사 이야기. 27절을 그대로 읽어 보겠습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여러 글에서 이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남기니까 이걸 가지고 흠을 잡아요. ‘이 근호 목사는 한국교회 다 이단이라면서, 그러면 너만 빼놓고 다 이단인가?’ 이렇게 꼬투리를 잡아요. 제가 그런 소리 나올 줄 알고 그렇게 써요.
‘다’라고 하지 말고 ‘일부’라는 용어를 써야지 ‘다’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랬어요. ‘당신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쓰신 용어와 문법을 모른다.’ 했어요. 예수님은 우리하고 타협하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모두 다 죄인이고 모두 다 피고입니다. 건져 주고 말고는 오직 예수님 소관이에요. 그것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모두’라는 말을 집어넣어야 해요. ‘모두 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지 못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강퍅케 하신 것은 오직 긍휼로만 구원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강퍅케 하셨어요. 우리도 예외 없어요. 강퍅했고 강퍅할 수밖에 없는 태생 이었습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웬 사랑인지 은혜 주실 에게만 은혜를 주신다는 그 여호와의 속성에 의해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피의 가치를 조금도 손상되게 하지 않고 그 피의 공로와 효과를 자기 택한 백성에게 다 집어넣어서 두 번 다시 그 누구로부터도 정죄함을 당하지 않고 주님께서 의롭다 한 사람이 죄인으로 다시 거꾸로 되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선택했다.’는 겁니다. 주님이 개입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피가 개입했는데. ‘내 피가 묻어 있는데 도대체 그 묻어 있는 피를 효과 없다고 할 자는 이 세상에 악마 외에는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우리를 피로 용서받게 해서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머물러 둠으로 말미암아 옛날 모압 땅을 통과하는 이스라엘처럼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하나의 기준점으로 남겨 두는 거예요. 우리는 그 안에서 맨 날 같은 소리해요. ‘저는 죄인이었는데 지금도 죄 지은 것 밖에 없는데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소리 밖에 못한다는 말이지요.
남들 돈 좋아하는데 우리도 다 돈 좋아해요. 지금도 거래처에서 전화 오면 예배고 뭐고 전화 받고 나가기 바빠요. 우리는 돈에 환장한 사람들입니다, 죽을 때까지. 노인이 추한 것은 딴 게 것이 아니에요. 노인이 추한 것은 몸이 추해서가 아니라 역시 죽어가면서도 돈 생각한다는 것이 추한 모습이에요.
그 법정이라는 스님, 세상에, 아, 세상에, 죽을 때까지 자기 권리 주장하는 것 보세요. ‘내가 죽거든 내가 지은 책을 재판하지 말라.’ 죽으면 그냥 곱게 죽지, ‘웅이 아빠는 죽었고’ 하는 식으로 곱게 죽지 죽고 나서도 어디까지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세해서 자기영향력을 발휘하려 합니까. 그게 얼마나 큰 소유입니까. ‘무소유’라는 이름의 진짜 댓 방 큰 소유. 그게 또 우리 모습입니다.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한 그 모습을 보면서 ‘저게 바로 빠져나가는 구멍이었구나. 저거였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제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은 안목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빠져 나온 분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심판주고 무덤에서도 호출할 그런 분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무슨 뜻 때문에 믿겠습니까? 주께서 먼저 다가왔기에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보물을 저희들이 귀하게 여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