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섭 목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요?
정용섭 목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요?
이름 : 관리자(IP:124.59.86.6)
작년에 칼바르트신학의 모순점에 대해 비판하니 칼바르트에서 정용섭으로 옮기는 사람을 본적이 있는데
도대체 정용섭 목사의 사상이 무엇이며 그 목적은 또 무엇인지요?
그의 신학의 바탕인 판넨베르크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시길 바라며
또 정용섭 목사는 어떤 영향력을 펼치고 있고 배출되는 자들의 성향은 어떠한 것인지?
또 그들이 말하는 십자가 신학?과 피신학?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네요.
참고로 그의 글도 많이 퍼져있길래 그중에 한편을 한번 올려봅니다. 문제점을 지적해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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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복음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정용섭 목사)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롬 1:16a)
도대체 바울은 ‘복음’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엇으로 생각하기에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진술할까?
그의 진술은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울 자신도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에게 예수 사건은 미련하거나 꺼림직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한 인간의 삶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주장이 가당키나 하나?
인류 구원이 얼마나 진지하게 무거운 과업인데
단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해결된다고 하니
사람들이 그런 가르침을 부끄러워했다는 건 이해가 간다.
모세의 이름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전승되기 시작한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에 합당한 것을 요구하는 원리였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들은 최선을 다 기울였다.
그들은 먹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이웃관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한 것은 모두 해보았다.
가나안 족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성전 종교를 화려하게 발전시켰다.
그런 모든 노력들이 민중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할 뿐이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하고 말씀하였겠는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서 성취하려는 모든 종교적 업적을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것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정작 내가 짚어보려는 핵심은
모든 율법의 행위와 목표를 근본적으로 해체한 십자가의 복음을
오늘의 교회가 오히려 해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와 그의 사건과 그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필요한 게 없다는 이 복음을
오늘의 교회가 총체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교회는 지금 청중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한다.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유대교처럼
오늘의 교회가 ‘사명’이라는 명분으로 청중들을 닦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의무가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세부적인지 내가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에 기대서 얼마나 자주 모여야 하는지,
헌금 종류는 왜 그리 많은지,
그 이외에도 교회가 요구하는 수준에 맞추어 신앙생활을 하려면
자기의 프라이버시나 사회 공적인 업무를 대폭 축소해야만 한다.
부흥하는 교회의 목회자일수록
청중들을 이런 방향으로 몰아가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런 분들의 설교를 듣고 있는 신자들은 늘 좌불안석이다.
자기들이 무언가 잘못한 게 많은 것처럼 자책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복음적인 목회’란 무엇일까?
교회 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청중들을
교회의 일에서 좀 풀어주는 게 복음적 목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건 청중들만을 위한 게 아니라
목회자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서 단지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 받는다는 사실에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걸어두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다시 그런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복음을 다시 율법(주일성수나 십일조등)로 옭아메자는 말인가?
물론 그런 분들의 마음을 모를 것은 없다.
그들은 구원받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화되기 위해서
매 순간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성화의 삶은 분명히
종교적인 의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칭의와 대칭되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의 당연한 삶의 귀결일 뿐이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진술의 의미를
우리의 일상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자.
복음과 대칭되는 율법이 인간의 자기 성취라고 한다면
교육, 돈벌이, 출세, 명예 같은 것에 삶의 근거를 두는 건
모두 율법적인 삶이다.
개인적인 성공이든 교회적인 성공이든 마찬가지다.
이에 반해서 그런 인간의 성취를 내버려두고
자신의 ‘존재’에 천착하는 삶이 곧 복음적인 삶이다.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는 존재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모든 삶의 근거를 놓는 삶은
자기를 성취하는 삶보다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를 성취하는 데서만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적인 삶은 율법적인 삶보다 훨씬 힘든 길이다.
그러나 비록 외면적으로 화려한 것은 없지만
진리와 존재에 천착하는 사람은 내면적인 자유를 누릴 것이며
그 어디에서 의존하지 않는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상과 마찬가지로
복음은 모든 종교적인 짐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앙의 세계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 스스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사셨다.
물론 예수님이 종교적인 의식 자체를 일부러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청중들을 그것으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의 교회는 다시 청중을 율법으로 몰아가는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가?
그들은 아마 복음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봉사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건 자기모순이다.
복음을 위해서 율법적으로 산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신약성서가 그런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까지 오늘 논의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다.
바울의 유럽 선교를 모범으로 삼아 우리도 세계 선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을 것이다.
율법시대와 은혜시대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여러 각도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복음을 초기 기독교가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했는가 하는 점도
오늘 우리는 늘 비판적으로 성찰해야만 한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진술은
단지 전도한다는 차원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율법적 삶으로부터
은총의 삶으로 전환하겠다는 의미이다.
오늘의 교회와 신자들이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도
실제로는 복음을 철저하게 부끄러워하는 행태를 보이고
율법을 준수하는 종교생활로 그 업적을 내세우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바울의 복음 (정용섭 목사의 글)
이근호(IP:117.♡.136.28)
10-03-20 11:20
정용섭 목사의 문제점은 '복음에 대한 역사적 확인'에 몰두한다는데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십자가 사건의 묵시적 내용이 옛언약(구약 시절)을 둘러싸고 벌어진 그 역사적 현실 속에서 인간들이 내뱉아놓는 역사를 읽는 안목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불실한 안목인가를 죄라는 차원에서 고발하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용섭 목사는 그 안목을 또다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교회상을 이 시대에서 보고 싶어하는 겁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교회를 직접 봐야 안심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는 곧 자신의 죄를 '한 남자의 죽음'이라는 죽음 사건 앞에서 진솔하는 접해보지 못해서 나온 현상입니다. 복음마저 역사화된다면 복음도 곧장 본인이 그토록 비난하는 그 율법화 작업으로 인해 '율법화된 복음'으로 굳혀집니다. 그 이유는 인간 주체 내부에는 법적인 형식으로 다잡는 기능들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자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그 내부에서 법적으로 형식으로 무장된 신학체계가 자리잡고서는 생생한 십자가 복음을 대체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용섭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주체가 늘 붕괴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잡히는 바람직한 교회상'이 증거됩니다. 이게 별 시비거라가 아닌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성도는 영적 전쟁을 벌리고 있다는 실정입니다. 사람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악한 공중 권세잡은 악마와의 전쟁 중입니다. 주님이 주체가 벌리는 작업에 악마는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섞어넣어서 다른 복음을 제조해놓고서는 맞불 놓고 있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내부에 늘 쏫아나는 '나를 위한 만의 율법성'을 저주해야 합니다.
성재필(IP:222.♡.135.201)
10-03-20 12:20
정용섭 목사의 논리가 참 매력적으로 다가 옵니다. 이정도만 되도 저는 이러한 교회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복음적인 교회가 아예 세상에는 없고 세상밖의 복음이 주체가 되어 주님께서 자기교회를 세상밖으로 몰고 가고 있음을 봅니다.
강구만(IP:121.♡.1.35)
10-03-20 15:25
주님께 확인 당하며 사는 성도라면 성경이든,교회든,역사든,세상이든 자신이 확인해가며 살 이유가 없는데...
김영완(IP:218.♡.19.85)
10-03-25 00:36
불신자가 신학을 박사까지 마쳤을 때의 벌어질 참상은 당혹스럽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의 죽음에 대해 단 댓글에 모든것이 들어있습니다.
...
이 시대의 스승이 떠나시니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합니다.
그래도 남은 자들은 용기를 갖고
살아나가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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