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0. 2. 26) 2강 녹취록자유게시판에스겔

광주 강의(2010. 2. 26) 2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24)

광주 강의(2010. 2. 26) 4-2

에스겔 3장 18-19절에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게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이 굉장히 복잡해서 그림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세분이 등장하는데, 첫째 하나님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깔때기로, 깔때기 안에 말씀 덩어리를 부어주지요. 말씀 덩어리를 달리 표현하면 ‘거룩’입니다. 이 거룩은 어떻게 유지된다고 했지요? 피로 유지된다고 했어요. 그러면 이 말씀 덩어리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지시한 모든 것이 들어 있지요.

지금까지 한 내용은 이해되지요? 하나님이 하나님께 지시한 모든 것이 바깥으로 나타날 때는 피로 나타납니다. 이 피는 우리가 패역한 족속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주께서 피를 흘렸고, 이 피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는 죄인이며 주님의 자비와 긍휼로만 구원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누구한테 전한다는 것입니까? 이 이야기를 악인에게 전하지요. 그런데 에스겔 자체가 이미 악인입니다. 왜냐? 자기 스스로 구원 못 받으니까. 자기도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 구원 받기 때문에 자신도 죄인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악인에게 전할 때는 일단 자기의 것을 전하면 안 되지요. ‘나는 구원 되었으니까 나를 본받으라.’ 이러면 안 된단 말입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 받았어.’ 라고 하면 안 돼요. ‘나 죄인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죄인을 위해서 어떻게 하셨다.’가 복음이지 ‘나 죄인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대로 한다.’ 이것은 부흥사들이나 하는 짓이지 복음 전도자가 하는 소리는 아니지요. 그러면 악인에게 에스겔 본인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전할 때 ‘본인은 죄인이며, 하나님 은혜로 씻음 받았다’는 이 전체를 다 전해야지요.

그런데 만약 에스겔이 전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에스겔이 두 개로 분리 되죠. ‘나는 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이렇게 분리가 되면 악인이 어떻고와 관계 없이 에스겔과 하나님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에스겔 자체가 하나님 은혜에서 탈락한 악인과 동일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하나님 쪽에 속하는지 아니면 악인에게 속했는지 하는 것은 에스겔의 하기에 따라서 결정 되겠지요. “전해라.”고 했는데 “나는 안 전할래요.”라고 한다면, 악인이 저주 받을 그 피 값을 에스겔에게 찾겠다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런 지시를 내리는 이유가 뭡니까? 에스겔로 하여금 결코 너의 전한다는 선한 행위가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너희에 임했다는 것(강조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네가 말 안 듣는 악인에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네 믿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형식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내가 말을 해도 참 어렵네요. 이것은 쉽게 할 수가 없어요.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인자로써 죽음을 당하는 그 이유가 뭔가 하면, 하나님을 전하라고 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전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신의 자랑을 전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 버려요. 그러면 예수님 자체가 누구한테 버림 받습니까?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지요.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전 강의에서 여러 번 했는데 다시 해 봅시다. 물세례 받을 때에 죄인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지요. 그러면 물속에 들어가고, 물속에 들어가면 물속에 죄가 가득하겠지요. 물이 더럽고 탁하겠지요. 탁한 물에 예수님이 뛰어들려고 하니까 세례요한이 말리지요. “예수님, 당신은 죄 씻는 세례를 받을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은 “아니다. 내가 뛰어들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더러운 물에 뛰어든다는 것은, ‘죄인인 너는 거기 있으라. 내가 너에게 찾아갈게. 네가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네가 있는 더러운 물속에 내가 들어가서 너의 죄와 같이 한 덩어리가 되겠다.’ 이것이 바로 물세례가 되지요.

물세례 다음에는 불세례 차례입니다. 심판, 십자가. “내가 받을 불세례가 남아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불세례가 있고, 불세례 끝나면 성령세례가 있는데, 예수님의 세 코스를 다 밟아요.

물속에 들어가서 물세례를 받는데,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죄인들의 더러운 죄에 합류해서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으로 사시는 분. 이것이 물세례입니다. 그 다음에 불세례는 뭔가? 그 죄 값을 그대로 아버지 앞에 내세움으로 말미암아 저주받지 않아도 될 분이 아버지께 저주 받는 불세례. 그렇게 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자기만 부활하면 안 되잖아요. 자기가 대신해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성령 받을 자에게만 성령을 주어서 물세례, 불세례의 효과를 그들의 구원의 효과로 이전시키는 성령세례. 이 세 가지가 덮쳐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받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을 보겠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만약 저에게 성령이 왔다면 “고맙습니다.” 하고 도망칠 것이 아니라, 내가 에스겔이 되어서 성령 받은 내가 받은 성령을 나누어 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먼저 받으신 거예요. 여기서 먼저 받았다는 것은 독점하라는 것이 아니고 분배해 줘야 될 책임자로써 먼저 받아서 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만 주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물세례, 불세례가 따라오기 때문에 이 코스를 밟으면 우리는 패역한 족속인데 우리가 받을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았기에 우리는 죄 없는 의인이 되어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성령세례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물세례, 불세례를 합치면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됩니다.

자, 에스겔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부를 때 어떻게 부릅니까? ‘인자야!’ 라고 하지요.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요? “인자야, 너는 이 악인에게 복음을 전하라. 만약에 악인이 듣지 않으면 그 책임을 인자 너에게 묻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전할 때 들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없단 말이지요. 없으니까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예수님이 져야 됩니다. 이게 바로 물세례, 불세례, 성령세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뭘 하라고 하신 것은 어떤 인간도 그 말을 이해 못합니다. 왜 이해 못하는가? 날아가는 화살을 내가 잡기 때문에 이해 못합니다. 사람이 어떤 말씀을 들으면 그것을 내가 잡으니까, 예를 들어서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제물입니다.”라고 했어요.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것을 잡고, ‘아, 날 구원하려고 제물이 되었구나.’ 이렇게 오해를 하게 돼요.

내가 제물 된 것은, 제물이 나에게 잡힌 제물이 아니고 제물이 움직이고 제물에 내가 딸려가는 거예요. 주의 말씀은 하나님이 예수님께 했고, 예수님이 작은 말씀이 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면 내가 그 말씀에 붙잡힌바 되어 나는 예수님처럼 제물이 되어서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행복한 운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마구 패역한 모습이 튀어나오지요.

기도할 때마다 ‘주여, 저는 제물 되기 싫습니다.’ 이런 마음이 막 튀어나와요. ‘하나님, 제 아이가 공부 잘하게 하옵소서.’ 이것을 번역하면 ‘주여, 제물 되기 싫습니다.’가 되고, ‘하나님, 사업 잘되게 하옵소서.’ 이 말도 ‘나는 제물 되기 싫습니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날마다 쓰레기로, 항상 우리는 이 쓰레기를 벗어나 명품이 되려고 하는 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때, 우리는 항상 말씀을 대하게 되고 늘 기도해서 말씀과 기도로 우리가 얼마나 쓰레기인가를 아는 것 가운데서 구원 받은 즐거움이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없으면 우리는 감사를 모르고 늘 불평합니다. 젊은이들은, ‘왜 나는 재벌 부모를 못 만났는가? 나는 왜 미인으로 태어나지 못했는가? 왜 내 머리는 천재가 아닌가?’ 등등. 그런데 우리가 태어날 때는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기저귀 한 장도 가지고 나온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내가 옷을 입고 있다면 벌써 혜택을 입은 것이고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에스겔은 하나의 말씀이고 율법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는 거예요. 에스겔을 공부하면서 아예 마음가짐을 그렇게 가지세요.

에스겔 말씀은 우리에게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말씀을 못 지키는 악한 자인가를 실감하게 합니다. 20절에 보면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악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어떤 사람이 분명히 처음에 믿었는데 나중에는 안 믿는 거예요. 그러면 처음 믿었던 시대에 준 자비와 은혜는 도로 회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자체가 은혜를 주되 이것이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은혜롭다는 것을 증거하는 재료로 사용할 뿐이에요.

구약은 한시적이고 임시적으로 사람을 다루면서도, 하나님이 이렇게 자비롭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사람을 사용하는 반면에, 신약은 사람을 사용하는데 영원히 자비롭고, 영원히 용서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를 포착했으니까 신약 성도는 자신이 한없이 죄인인 것을 알고, 구약 성도는 좀 지치면 잘난 척하고 까부는 그런 특징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레위기를 잠깐 보겠습니다. 레위기 5장 1절입니다.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증인 노릇을 하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면, 이렇게 되면 ‘내가 이것을 전하면 나에게 유익할까, 불리할까?’ 이것을 생각하겠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자기 죄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이어지면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자비가 만나서 자비가 나오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나올 자비가 없어집니다. 그러니 죄만 드러나지요.

증인이 증거하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받을 죄를 증거 안한 당사자가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벌 받음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증거하라고 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증거하지 않은 우리의 죄까지 예수님이 담당한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은 망해도 싸지요. 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보다 이방인을 더 무서워하니까 망했지요.

그렇다면 그들만 망한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도 망해야 마땅한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증언 못할 줄 아시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죄를 드러내면서 그걸 통해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대신해서 우리 안에서 증인 노릇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빈틈이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기 전까지는 ‘주님의 용서’를 알 수가 없지요.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주께서 튀어나오게 하신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간단하지 않아요. 결국 죄라는 것이 뭐냐 하면, 행위로 지은 것도 죄가 되지만 추가적으로 증언 안한 것도 죄가 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것도 죄지만 하나님을 알고도 하나님이 시키신 것을 안 해도 죄가 되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도 아시고 또 그것을 다 증언했고 그러니까 죄 지은 것이 없어요. 죄가 없는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벌을 받았다는 말은 누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까? 증인 노릇도 하지 못하고 죄만 짓는 이런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벌을 받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원대로 안 되고 의를 드러낼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의를 증언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는 겁니다. 그래서 김연아가 금메달 따서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보면서, ‘세상에서 상 받는 것으로도 저렇게 기뻐하는데 우리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도 왜 눈물을 안 흘리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드라마를 보든, 뉴스를 보든, 동계올림픽 경기를 보든 항상 겹쳐서 복음을 보게 됩니다. 김연아가 경기 끝나고 왜 울었습니까? 그동안 죽도록 연습했는데 스스로 만족스러운 경기를 했기에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4:7-8)”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세계 신기록을 세우는 순간 다 사라졌잖아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성도여, 여러분들이 받은 직분은 천사들도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동계 올림픽에다 성경을 입히세요. 그러면 동계 올림픽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해석이 돼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복음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을 보면서 복음을 이해하는 거예요.

자, 지금까지는 쉬웠습니다. 이제 어려운 대목을 해 봅시다. 레위기 5장 1절에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아니면 이 말씀 못 지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라. 지키라.’고 해놓고는 결국은 우리에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께 말씀하신 것이고, 이 말씀은 하나님만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레위기 4장 13절에 보면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수송아지를 드려라.’ 여기서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 어겼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죄와 의는 같이 붙어있기 때문에 죄가 아니면 의고, 의가 아니면 죄입니다. 의도 아니고 죄도 아닌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말씀을 자기는 잘 지켰다고 봅니다. 그러면 의가 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저 인간이 깨닫지 못하는구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찬치도 않은 거죠. “저는 이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이제 복을 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주님은 “네가 아직도 깨닫지 못했구나.”라고 하시지요.

결국 모든 말씀을 인간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까 죄를 가지고 의라고 오해를 하는 거예요. 특히 성화론자들. ‘방종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러면 제가 묻지요. ‘도대체 방종 안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 가지로도 그 예를 좀 들어 달라’고. 그들이 대답을 안 해요.

어떤 사람이 지하철에서 전도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지하철에서 전도해 봤습니까?’ ‘예, 해봤지요.’ ‘얼마나 했습니까?’ ‘한 달했습니다.’ ‘그러면 왜 지금은 안 합니까?’ ‘힘들어서요.’ ‘왜 힘듭니까? 전도할 때는 성령으로 했는데 이제 성령도 힘이 든 모양이지요?’ 이 사람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마치는 갈라디아서 말씀과 같은 거예요.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깨닫지 못하니까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해서 굉장히 자부심을 갖고 의롭다고 여깁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 상태, 이 상태에 대해서 주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레위기 4장 22절을 봅시다. “만일 족장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수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 잡을지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서 처음에는 자기가 죄를 깨닫지 못한 거예요. 깨닫지 못할 때는 자신이 잘난 줄 알았는데(1번) 깨닫고 나니까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았고(2번), 그 후에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3번). 이것이 구약이고, 신약은 1번, 2번, 3번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3번부터 먼저 합니다. 이게 바로 땡 잡은 거예요. 3번부터 먼저 하니까 아무리 우리가 깨닫지 못해도 십자가(3번)는 살아 있어요. 십자가부터 해서 역으로 오지요.

구약으로 하면 내가 알아서 깨닫는 것이 되지요. 깨닫지 못하다가 깨닫는 방법은 율법을 통해서 됩니다. 그러면 율법 들어가면 깨닫습니까? 바리새인은 깨달았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1번에서 2번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길은 있는데 우리가 갈 능력이 없으니까 신약에서는 3번에서 2번으로, 2번에서 1번으로 가는데, 3번(십자가)에서 2번(죄를 깨닫는 것)으로 갈 때 3번으로 힘으로 갑니다.

십자가 지신 분이 피 흘린 채로 나타나면, ‘저분이 왜 피를 흘렸지? 나는 전도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는데 왜 예수님은 피를 흘렸지? 저 피가 바로 내가 말씀을 한 구절도 못 지켰기 때문에 흘리는 피구나.’ 내가 만약 잘한 것이 있다면, “00야, 너는 이것은 잘 했고, 이것을 잘못했다.” 이렇게 하실 텐데, 어떤 것을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아예 피 채로 ---

구약 말씀을 다시 정리해봅시다. 속죄제의 피를 흘린다는 말은 어떤 경우입니까? 부지중에 지은 죄를 깨닫지 못하다가 깨달았을 때 속죄제를 드리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다는 말은 뭘 이야기합니까?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항상 깨닫지 못하는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김연아가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몸에 성호(천주교 신자들이 몸에 그리는 것)를 그렸어요. 그리고 금메달을 땄어요. 그러면 천주님의 은혜입니까? 김연아한테 금메달을 주지 말고 십자가 피를 줘야 돼요. 공중 회전을 돌다가 넘어져 15년 공든 탑이 무너지고, 엄마는 응원하기 위해 왔다가 심장마비로 죽어서, “주여, 나에게는 메달도 없고 엄마도 없는데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질문(원망)을 할 때, 그 자체가 바로 주께서 피 흘릴 수밖에 없는 죄악 된 심령인줄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죄인인 것을) 깨달을 자가 없고, 스스로 그 죄에서 벗어나 의인될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주께서 피를 흘렸다는 것은 도저히 1번에서 2번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부지중에 죄만 짓는 거예요. 그러니까 3번부터 들어오니까 비로소 우리가 죄를 깨닫는데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피로 죄를 깨닫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분은 누구인가? 모든 말씀을 다 이룬 분이다.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피를 흘렸다면, 다시 깔때기를 생각해 봅시다. 모든 말씀이 완성되었다는 것이 깔때기를 타고 갈 때는 피로 떨어지니까 그 피를 볼 때마다 ‘다 이루었다.’가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피가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다 이루었다.’가 밑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인생을 다 살지 않아서 앞으로 일을 다 모르죠. 인생을 살면 살수록 우리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잘났고, 훌륭하고, 이것은 축복이고, 이것은 구원될 수 있는 것이고 --’ 자꾸 자기 행함에 의존하는 이런 깨닫지 못함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여기 ‘나’라는 열차가 가는데, 내 앞에 누가 있으면 기분이 나빠요. 길을 가는데 자기보다 못 생긴 사람이 자기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으면 집에 가서 그 옷 찢어버립니다. 그러나 장동건이 입고 있으면 그 옷을 계속 입어요.

내 노선 앞에 누가 얼쩡거리면 싫어요. 그런데 그 노선이 충돌을 하지요. 그래서 피가 발생되는데, 우리는 가는 길을 멈추지 않습니다. 계속 깨닫지도 못하면서 깨달은 척하고 나아갑니다. 여기에 주께서 피를 가지고 들어오시면 이 피가 우리보다 우세해서 우리로 피범벅이 되게 하죠. 그러면 우리는 깨닫는 사람이 되고(2번), 3번에서 2번으로 가고, 2번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1번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나는 깨닫지 못하는 자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돌아서면 또 우리는 내 자랑을 하는데 이것은 타고난 것입니다. 이것은 공부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자의 발표에 보면, 아이들은 출생하자 말자 엄마를 속인다고 합니다. 앞으로 더 연구하면 엄마 뱃속에서 엄마를 속인다고 나올 겁니다. 얘들이 그렇게 영악해요.

사람이 자기 자랑 없으면 못 삽니다. 자살을 하는 것도 깨닫지 못한데서 옵니다. 그런데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살 맛 나는 재미로 사는데 주께서 피로 오면 살 맛 안 나게 만들어요. 살 맛 안 나면 안 살면 되잖아요. 그래서 바울의 소원은 ‘죽게 하옵소서.’ 주님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에서, 세상 사람들은 살 맛 나서 살지만 우리는 이것을 저지당한다는 것. 말씀으로. 기도로.

기도하면 할수록 묵살 당하고 그런 사태가 오는 즐거움이 있단 말이지요. 이것이 이미 레위기에 나와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레위기에 나와 있고, 그것이 에스겔을 거쳐서 신약의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에스겔로 가봅시다. 3장 20절 끝부분에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하여튼 하나님은 손해 보는 일은 안 하세요. ‘에스겔아, 만약에 네가 전하지 아니하면 너도 구원 받지 못하고 너에게 그동안 은혜를 줘서 일을 시켰던 그 은혜마저 회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한테 하신 이야기고, 장차 오실 예수님과 아버지사이의 계약입니다.

아가서를 잠시 보겠습니다. 아가서의 주제가 뭐지요? 사랑이죠. 그러면 이 사랑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까?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지요. 정낙원 목사님이 요즘 신나게 강의를 하고 계십니다.

이 구약을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할 때 사랑받을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는 누구뿐입니까?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에 보면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자기아들 예수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걸 미리 앞당겨서 아가서에 담은 겁니다.

아가서를 보면 사랑으로 범벅이 되어 있지요. 하지만 그 사랑을 이해한 사람은 있다, 없다? 단 한 명도 없어요. 이 아가서를 알레고리로 잘 푼 자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래서 아가서를 볼 때 주의할 것은, 절대로 인간의 한 맺힌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풀어주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합니다.

구약성경의 문맥을 따라서 해석하되 그것을 신약 시대의 사랑과 결부시켜 볼 때 이것은 인간에게 주신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주신 사랑이죠. 그러면 성도의 사랑은 뭐냐? 성도는 사랑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너는 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못 될 정도로 너는 사랑을 배반했고 배척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작업과 병행해서 주시는 사랑.’ 그럴 때 우리의 구원은 예수를 사랑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심지어 주를 사랑하는 것도 주님의 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에스겔 3장 23절에 ‘그발 강’이 나오는데, 그발 강은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아니고 페리시야만 쪽 지금으로 하면 이란 근처인데, 그곳에 가서 7일 동안 있으면서 이런 예언을 한 겁니다. “내가 일어나 들로 나아가니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 머물렀는데 내가 전에 그발강 가에서 보던 영광과 같은지라.”

이 영광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처소에서 나오는 영광입니다. 12절에 보면,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거기 여호와의 처소가 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에서 거룩이 발생된다고 했지요. 거룩이 발생되어서 그것을 깔때기에 담으면, 인자되는 에스겔한테 주면서 그 모습이 장차 오실 예수님을 먼저 대행케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26절에 보면 “내가 네 혀로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너로 벙어리 되어 그들의 책망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에스겔에게 말하게 하는 것과 벙어리 되게 하는 것조차도 누가 조정합니까? 하나님이 조정하지요. 이 말은 예수님이 장차 어떤 말씀을 하시는 것도 본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이야기하는 대로 말하고, 말 못하게 하면 안 하는 거예요.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을 때 예수님을 대답을 안 했어요.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우리도 말하고 싶을 때 말하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은 전부 성령의 일이고, 나쁜 뜻은 하나도 없고, 예수 믿는 아나운서가 방송할 때도 하는 말이 전부 성령의 일인가?’ 이런 물음이 생기지요. 적용시킬 때 그렇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예수님을 거쳐야 됩니다.

에스겔이 두 가지 경우가 있어요. 첫째, 벙어리가 되는 것. 이것이 인자되는 에스겔에게 일어났지요. 이걸 우리에게 그냥 적용시켜버리면 틀리게 됩니다. 반드시 예수님에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께 적용시키면 그 다음 사도들인데, 이분들이 말씀 전할 때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까? 아니죠. 바울이 손수건으로 사람들을 치료했는데, 그 손수건을 늘 사용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스데반이 설교할 때마다 늘 성령이 임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성령이 임한다는 말은 이들을 사용하는 거예요.

어떻게 사용하는가? 에스겔을 사용하듯이 사용한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편지가 다 성경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 에스겔처럼 사용하게 되면 베드로, 요한, 바울은 바로 자기가 에스겔이란 말이 아니고 주님께서 에스겔이고 자기 자신이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쓰여질 경우에만 주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본인이 고백하는 거예요. 말이 좀 어렵죠?

‘나는 입 다물 때도 성령의 역사고, 말할 때도 성령의 역사다.’ 이것이 아니고, 어느 것이 입 다물 때냐? ‘성령이 하는 결정은 내가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 ‘내가 설교한다고 성령 받은 설교가 아닙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내가 지금 하는 설교는 성령의 은혜를 받아 하는 설교입니다.’ 이렇게 우기면 안 돼요. 설교는 내가 하고 쓰시는 것은 주님이 쓰시고, 이것이 바로 아까 에스겔이 한 그러한 고백입니다.

어떤 사람이 설교도 하지 않고 그냥 성경을 읽기만 했는데도 구원 받은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 설교하지 않고 성경 읽기만 하면 됩니까? 그것도 아니란 말이지요. 우리가 에스겔처럼 되지 못한 죄인이기 때문에 ‘쓰시느냐, 안 쓰시느냐?’ 하는 것은 주께서 하실 일이란 말이지요. 사도바울의 편지가 다 성경입니까? 아니잖아요. ‘왜 고린도전후서는 성경이고 세 번째 편지는 성경 아닙니까?’ 이렇게 우길 수 없단 말이지요. 이 모든 것을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편지가운데 성령으로 쓴 것도 있다고 하지요. 바울이 쓴 글이 전부 성경이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기록된 성경이 있어요. 그래서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이걸 만약 모르게 되면 무엇으로 시비를 거는가 하면, ‘성경 형성사’ 때문에 시비를 걸어요. ‘성경 66권이 주의 계시라는 것을 누가 정했는가?’ 이것으로 시비를 걸어요. 이것은 누가 정한 것이 아니고 성경을 보면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이런 주장을 하면 시비 거는 사람이 또 물어요. ‘성령으로 감동 된 것 중에 이것이 성경이다, 아니다를 누군가가 결정한 것이 아니냐?’ 라고. ‘결정을 했으니까 도마복음은 성경에 안 들어가고 66권만 성경에 들어갔잖아.’ 라고 해요. 그러면 우리는 말하기를 ‘도마복음이 성경이 안 된 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한 것이지 사람이 잘라낸 것이 아니다.’ 라고 하고. 그럼 또 저쪽에서는 ‘그러면 성령으로 자른 것과 인간이 자른 것을 어떻게 구분하는데?’ 우리 대답은 ‘들어와서 성경이 된 것도, 안 들어와서 성경이 안 된 것도 성령의 역사다.’ 라고 하고. 그러면 저쪽에서 하는 말이 ‘그것은 순환논리다.’ 라고 해요.

사실 시비를 거는 사람이 순환논리에 빠져 있어요. 아무리 성령이 했다고 해도 내가 납득이 될 경우에만 성령의 역사라고 인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너는 왜 납득이 안 되는가?’ 라고 물으면 ‘납득이 안 되니까 납득이 안 되지.’ 라고 해요. 이것이 순환논리입니다. 그래서 육으로 난 것은 성령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해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모든 것이 반드시 십자가 예수님을 거쳐야 하는데 이 십자가를 빼먹고, 모방해서 천국 가려는 이 시도, 이 시도를 주께서는 계속 반대하시는 겁니다.

다시 에스겔을 봅시다. 3장 26절에 “내가 네 혀로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너로 벙어리 되어 그들의 책망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그러니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에스겔이 말하기를 ‘여러분, 나는 벙어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잠시만 말을 합니다.’ 라고 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저런 미친놈을 봤나.’ 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저 사람이 원래 벙어리가 아닌데 벙어리 되었다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다.’ 이것을 믿는 사람도 있단 말이지요.

마치 놋뱀을 들면서 ‘놋뱀을 쳐다보면 삽니다.’ 라는 것과 같은 거예요. 성경 말씀 전체를 들을 귀 있는 자만 듣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에스겔을 이런 식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을지어다.’

4장 1절 이하에 “너 인자야 박석을 가져다가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그 성읍을 에워싸되 운제를 세우고 토둔을 쌓고 진을 치되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또 전철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고 철성을 삼고 성을 향하여 에워싸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이게 뭐냐 하면, 에스겔이 지금 소꿉놀이를 합니다. 돌을 하나 가져다가 흙을 쌓아요. 그리고 이것을 무너뜨려요.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회장 목사가 설교 안하고 강단을 치워버리고 그곳에 레고 장난감을 들고 와서 자기 교회당 모양 그대로 만들어놓고 발로 부수면서 ‘이것이 주의 말씀이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이것이 뭐냐 하면,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인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라고 하죠. 하나님께서 지은 성전을 누가 부순다? 하나님이 부숨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부서지는 것에 대해서 별 감정이 없을 텐데, 내 손으로 지었다고 여기는 사람 같으면 하나님이 성전을 부순다면 이것은 곧 지은 사람을 박살내는 것이지요.

예배당을 부순다고 할 때 ‘부숴라. 우리는 복음이 있다.’ 이러면 아무 문제없는데, ‘안 돼요. 내가 적금 넣어서 그 돈으로 지은 예배당이에요.’ 이렇게 나온다면 그것은 부술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부숴야 인간 된다는 겁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이러나저러나 성전은 부서져야 되지요. 그야말로 살 맛 안 나게 만들어야지요. 이 성전이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이거든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지은 성전이 뭡니까? 내 몸이지요. 내 몸이 부서짐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언약이 튀어나오고 거룩이 튀어나오지요. 그래서 우리는 제물인 소가 되고, 양이 되고, 염소가 되고.

우리는 점점 더 죽어가면서 거룩이 나오고,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예요. 모형으로. 그러면 우리의 모형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우리의 죄를 따라 사시다가 죽음의 길로 가셨잖아요. 그래서 예수님 하신 말씀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십자가가 뭐냐? 요새 말로 번역하면 무덤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등짐에 모형으로 무덤을 만들고 따라오라.’ 그러니까 십자가 목걸이 하지 말고, 유골함에 자기 이름을 서서 그것을 등에 지고 다니면 됩니다. 이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등에 있는 것이 나의 운명을 지배하도록, 나의 죽음이 나를 지배할 때 이 모습은 내가 하나의 모형이 되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하나는 모형이 되는 거죠.

이미 죽었지만 사는 것은 주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어제 죽어도 되는 내가 왜 오늘도 살아 있는가? 주님의 모형 되라고.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에스겔은 모형 만드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4절에 보면 “너는 또 좌편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되 네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 구십일이니라.”

그러니까 390일 동안 좌편으로 누워서 살라는 것이지요. 이건 미칠 노릇입니다. 사람이 자다보면 반대편으로 돌아누울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좌편으로 누워서 390일 동안 있으래요. 정말 선지자 노릇 하기 힘듭니다. 그러고 390일이 지나면 반대편으로 누워 40일을 있으라고 해요.

좌편은 북쪽 이스라엘, 우편은 남쪽 유다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430일을 지내라는 겁니다. 에스겔이 이런 고생을 했다는 말은, 이 말씀이 깔때기로 어디에 담긴다? 그대로 주님께 담기니까 주님이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이 성경 전체가 다 포함되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성경의 일부를 예수님과 연결시키는데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성경 전체가 예수님 한마디 한마디에 다 들어 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지킬 때 성경 전체가 다 담겨서 오는 겁니다. 한 말씀을 어겨도 몽땅 어긴 것이 돼요. 그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일부의 법을 어긴 것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다 오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죄를 지어도 성경 전체가 동원 되서 우리 죄를 씻어내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에스겔이 이렇게 힘들게 고생했는데, 주님이 고생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욕심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고, 돌아서면 주님 생각은 잊어버리고 하나님 말씀도 버리고 욕심에 따라 살아가지만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말씀의 깔때기를 꽂아서 항상 죄 용서와 피의 은총을 알려주시니 그 은혜와 사랑의 깊이에 더욱 나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 3. 19. 11:17 녹취 마침)

첨부파일 : 04-2.hwp (64.0K), Down:14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93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8,842 묻고답하기 비공개적인 예수님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3-21
8,841 우리교회 [주보] 비공개적인 예수님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3-21
8,840 우리교회 삼하 12:24-25 (솔로몬의 출생) 사무엘하 최고관리자 10-03-21
8,839 설교 누가복음 4장22-30절 제목 : 무시 당하는 예수님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3-21
8,838 우리교회 눅 4:22-30 (무시당하는 예수님)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3-21
8,837 묻고답하기 정용섭 목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요? 로마서 최고관리자 10-03-20
열람 ➜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0. 2. 26) 2강 녹취록 에스겔 최고관리자 10-03-19
8,835 자유게시판 054강-렘16장1-4(땅의 가족)-jer100317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10-03-19
8,834 자유게시판 생방송11 [방송] 최고관리자 10-03-17
8,833 우리교회 [일반] 생방송 3월 21일 [방송] 최고관리자 10-03-17
8,832 우리교회 렘 16: 1- 4 (땅의 가족)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10-03-17
8,831 묻고답하기 굶주리는 세상, 단순한 기쁨? - 최고관리자 10-03-17
8,830 자유게시판 [10 대구강의 4] - [피 20] - 섬김을 당하는 신체 [피] 최고관리자 10-03-17
8,829 자유게시판 [10 대구강의 3] - [피 19] - 은닉된 선택 [피] 최고관리자 10-03-17
8,828 자유게시판 019-눅4장16-21(성령과 이사야의 예언)-luk100314-(이 근호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3-16
8,827 자유게시판 20100309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4-여호와의 전쟁과 승리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10-03-16
8,826 자유게시판 20100309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4-여호와의 전쟁과 승리 레위기 최고관리자 10-03-16
8,825 묻고답하기 ‘피의 복음’의 신학이 나아갈 길에 관하여 레위기 최고관리자 10-03-15
8,824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0. 2. 26) 1강 녹취록 에스겔 최고관리자 10-03-15
8,823 자유게시판 이 책 한권을.... [신학] 최고관리자 10-03-15
8,822 강의 대구 3월 15일 강의 피 21강 법적인간 vs 설레임(십자가의 율법기능) [피] 최고관리자 10-03-15
8,821 자유게시판 100219(2) 서울강의 녹취 빌립보서 13강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10-03-14
8,820 자유게시판 100219(1) 서울강의 녹취 : 빌립보서 12강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10-03-14
8,819 자유게시판 법정 스님의 책이 품귀현상이라네요 !!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0-03-14
8,818 묻고답하기 무시당하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0-03-14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