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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00309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4-여호와의 전쟁과 승리자유게시판요한계시록

20100309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4-여호와의 전쟁과 승리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100309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4-여호와의 전쟁과 승리

(강의:이근호 목사)

창세기 32장에서 천사가 군대죠. 천사가 군대라면 이스라엘은 군대 되잖아요. 이스라엘은 전쟁해야 되니까. 그러면 그 원판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찾아볼 수 없지요. 이스라엘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뭘 해야 되는지 전혀 자체 내에서 계획을 잡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없다? 전혀 없는 거예요. 성도가 ‘하나님 이렇게 살고 싶다’고 하나님께 요구할 자격이 전혀 없는 거예요. 성도의 갈 길, 모든 인생이라 하는 것은 이미 위에서 결정 난 겁니다. 그 결정 난 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생명책에 네 이름이 기록됐다.

그러면 앞으로 내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면 사는 보람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사는 보람은 간단하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죠. 은혜 되기 위해서는 평생을 살면서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죄를 아는 즐거움. ‘내가 죄인이구나. 나는 살 가치도 없는 인간이구나.’라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즐거움. 사람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알 때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한 순간에.

그렇다면 바로 이렇게 아름다울 때 형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 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다. 요한일서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지요. 야고보 이야기는 4월 달에 해야 되는데 미리하면, 야고보서에서 행함이라 하는 것은 ‘형식 만들기’입니다. 형식 만들기에 우리가 동원된 거예요.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우리의 행함이 주께서 하나의 법 체제, 하나님의 은혜 체제를 우리를 통해서 윤곽이 잡히도록 바깥에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목적이 자기 구원하는데 있으면 이런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목적이 내가 쓰임 받는다면 뭘 해도 그것은 바로 행함이 되는 거예요. 그 예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아들 바치죠. 기생 라합이 거짓말하죠. 이 아이디어가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아브라함 본인 아이디어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면 이런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이 윤곽이 없으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 형식이 바깥에 안 드러나겠지요. 안 드러나게 되면 하나님의 진리 형식에서 비껴나 있는 그런 사람에 해당돼요.

그래서 지난 주일날 오후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깔때기 이야기했는데, 말씀이 하나 있다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모든 말씀이 한 말씀 안에 다 담겨있는 겁니다. 그래서 한 말씀은 어기면 모든 말씀을 다 어긴 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관심사도 아니고, 이것은 이스라엘 관심사도 아니고, 마하나임의 관심사도 아니고 이것은 위에 계신 분의 은혜와 자비를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로서만 활용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은혜와 자비를 주시는데, 수제비 예를 잘 들었는데 그게 적당해서 그래요. 아직도 생각나는데 그것만큼 더 적당한 게 없어요. 수제비 덩어리 해놓고 냄비의 펄펄 끊는 물에 떼어 넣잖아요. 여기서 한 부분이 돌출되죠. 이 돌출을 제가 서론부분에 이걸 주체라 했어요. 점점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떨어지고 떨어져서 똑 떨어질 때 비록 떨어졌다할지라도 나는 어디에서 떨어졌는가를 알고 떨어지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떨어지고 난 뒤에는 원래 본질을 몰라라 하면 어떻게 돼요? 여기서 이웃 사랑이 안 나오죠. 왜? 자기가 자기 사랑밖에 절대적이니까. 그래서 똑똑 떨어져도 우리는 한 몸, 한 지체라는 걸 안다면 떨어져도 같이 떨어진 사람을 형제 사랑할 수 있겠죠. 형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고 이렇게 설명된다 말이죠.

처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사명 때문에 돌출된 주체란 말이죠. 주체가 있고 나라는 게 있고 사명 받는 게 아니고 목사로 살겠다 이게 아니고 이미 삐져나온 의도가 나를 증거함이 아니라 전체 증거하기 위해서 삐져나온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도로 가고 싶다고 안 합니까? 내 소원은 쓰레기처럼 사용되다가 도로 가고 싶다. 스데반 집사도 나왔다가 도로 가고 싶다.

신약에서 사람들이 질문하는 게 뭐냐 하면, 사도 바울 명령하고 권면하고 있는데, 왜 이 목사는 구원론만 천착하고, 집착하고 왜 윤리 이런 것은 그냥 넘어가느냐? 그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론 자체도 잘못이에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와야 되잖아요. 예수님이 무슨 구원론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사명감밖에 없어요. 예수님은 아버지 뜻을 이루는 것뿐이에요. 거기에 무슨 구원론이 있어요. 항상 성경을 예수님이 어떻게 했다고 비교해야 될 텐데 이걸 빼놓고 심지어 예수님만 이용하려고 하니까 ‘이제 구원론으로 구원은 받았고. 다음엔 착한 일 해서 보태서 영광 돌리자.’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개인의 주체가. 그래서 논문에 주체라는 것을 핵심적으로 집어넣어 들어간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예요. 하나님과 같은 분이나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은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한 것처럼 우리도 창세전에 예정된 자로서 이 땅에서 살게 되면 우리는 도로 가면 돼요. 고무줄 달려서 손만 놓으면, 강도가 와서 죽여 버리면 도로 원상복귀 됩니다. 그 강도는 천사였어요. 그냥 돌아가는 겁니다.

이런 게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안 보이니까 이것이 눈에 보게 보면, 전체가 서론부분에 나와 있어요. 힘의 축적이죠. 자기 주변에 힘 있는 자들은 끌어 모아서 그것으로 살고자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힘만 보여요. 말씀은 눈에 안 보이게 돼있어요. 보이는 힘과 안 보이는 말씀이냐? 사람은 떡이라는 힘이냐, 아니면 말씀의 능력이냐? 평생 우리는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싸우고 있죠. 힘이냐, 말씀이냐?

이 설교해서 괜찮은 교인 몇 명 들어와서 이 교회가 유지되는데 힘 되느냐, 아니면 이 설교 자체가 말씀에 합당하냐? 그 싸움이 설교자의 싸움이에요.

그러면 천사가 전쟁을 하게 되면, 여호수아 봅시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뭐냐 하면, 여호와 전쟁이 뭐냐 그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 5장 13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칼은 어디에 쓰는 물건입니까? 전쟁할 때. 전쟁은 누가 합니까? ①여호수아, ②백성, ③천사. 천사가 하는 거예요. 마하나임 했잖아요.

아까 이야기 안 했지만 야곱의 머리 위에 사다리 왔다갔다 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천사들. 야곱 구원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 전쟁에 야곱과 그 후손들 증인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한 거예요. 그래서 그 전쟁이 ‘붙여주시는’ 전쟁이에요. 전쟁의 핵심은 붙여주는 전쟁입니다.

제가 여러분한테 말도 안 되는 질문할게요. 전봇대에 영화포스터를 붙였습니다. [아바타]를 붙였다. 그렇다면 이 전봇대 역할은 뭡니까? 전봇대와 영화의 관련성은? 없지요. 전봇대는 전기를 이동하기 위해서 세운 건데 그냥 극장 관계자가 아바타 포스터를 붙인 거죠. 그럼 사람들은 전봇대를 보는 게 아니고 아바타 보는 거예요.

로마서에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느냐 하면, 은혜에서는 행함이 안 나오게 돼있어요. 은혜에서는 믿음이 나오게 돼있습니다. 전봇대가 행함이라면 아바타는 은혜에서 나왔기 때문에 믿음이에요. 그래서 믿음 떨어지면 행함만 부각하게 돼있고, 믿음이 들어오면 자기 행함이 죽어요.

행함이 죽어 버리면 윤리, 도덕은 없어요. 성도한테 윤리, 도덕이란 없습니다. 뭐만 하면 됩니까? ‘나는 아바타를 믿는다.’ 이것만 하면 돼요. 이게 만약 십자가라면 ‘나는 십자가를 믿는다.’ 이러면 되는 거예요. 주께서 십자가란 포스터를 알리기 위해서 그냥 평생 나를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그런데 언제가 십자가 포스터가 바람에 날아가 버리면 남는 게 뭡니까? 자기 행함밖에 남는 게 없어요. 행함밖에 남는 게 없으니까 천당은 가고 싶어서 사도 바울의 윤리와 도덕 찾고 있는 거예요. ‘하라’하는 걸 왜 하지 마라 하느냐? 그래서 저는 설교시간에 그랬잖아요. ‘제발 죄를 지으세요.’ 욕심 좀 내라고. 욕심이 잉태하니 죄를 낳으니까 욕심 좀 내라고.

만약에 성도 같으면 뭐만 보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 아바타만 믿습니다.’ 이렇게 되겠고, 성도가 아니라면 어떻게 합니까? ‘나 이 목사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지옥 가도 내 책임 없어.’ 이렇게 나오죠. 처음부터 그 사람은 아무것도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할 때 정말 만약에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은 들통 나겠지요. ‘난 이 목사 시키는 대로 나쁜 짓해도 구원받는다. 이 목사 시키는 대로 나쁜 짓했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것 봐. 당신 주체밖에 안 나오잖아.’

그 주체밖에 없는 인간들을 교회다가 돈 주고 끌어 모아서 ‘여러분, 바르게 사시오. 말씀대로 사시고 십계명 지키시오.’ 이렇게 나오니까 아바타란 포스터도 없으면서 목사 시키는 대로 흉내 내기만 하면 마치 신자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으니까 그럼 차라리 욕심내시고 죄를 지라 이 말이죠. 본색을 드러내란 말이죠. 애벌레 자아를. 실컷 착한 일 하다가 사건 하나 일어나면 자존심 다 튀어나오고. 믿는 게 어디 있어요. 그동안 자기를 위해 살았지.

여호와 전쟁의 개념이 슬슬 윤곽이 잡히지요. 결국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 이스라엘을 참여시키는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죠.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그냥 전봇대에 불과한데 단지 포스터 하나 붙였다는 이유 때문에 전봇대도 구원받는 거예요. 포스터가 뭐냐? 이게 바로 언약입니다. 전쟁은 언약대로 이뤄지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이 전봇대란 이스라엘 속에 어떻게 임재 되느냐? 바로 언약 상자니까 언약궤가 가는 곳에 적들이 굴복당합니다.

이게 땅에 정착되고 난 뒤에 사무엘상에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 언약궤가 뭐로 발전하느냐 하면, 서서히 어떤 인물이 돼요. 이 대목이 아주 어려워요. 논리적으로. 언약궤와 함께 있던 분이 어떻게 해서 전에는 언약궤가 움직였잖아요. 언약궤가 바퀴 없지요. 그럼 언약궤를 사람이 들어서 움직인다고. 언약궤를 들 수 있는 그 당사자의 일평생이 이제는 언약상자라 할 수 있는 그러한 새로운 언약 개념으로 전환됩니다. 그게 바로 모세 언약에서 인격 언약인 다윗 언약으로의 전환입니다. 그 가운데 여러 사건 터지지요. 언약궤가 도리어 빼앗기고 맙니다.

침멀리에도 나오지만 재미나는 것은 언약궤를 빼앗겼잖아요. 언약궤를 빼앗은 자가 언약궤 위에 지배하는 위치에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블레셋 군대가 언약궤를 분명히 잡아놨는데 언약궤 가는 곳마다 재수가 옴 붙었어. 재수가 없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장차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자가 가족이 예수 믿고, 남편이 예수 믿고, 아내가 예수 믿고, 아버지가 예수 믿고, 자식이 예수 믿고, 주변이 온 처가 쪽이 목사 가정이고 해서 교회 다니면 구원되는 줄 아는 사람들, 창세전에 이름이 기록되지도 않은 인간이 주변의 기독교 분위기에 휩쓸려서 모태에서 세례 받아서 그렇게 한 사람, 결국 뭘 감당 못해요? 언약궤를 감당 못해서 핍박하는 식이 되죠.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유대인이죠. 누구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창세전에 기록되지도 않으면서 자기 아비가 마귀면서도. 제가 서울 가서 화났던 것이 용어 하나만 집으라면, ‘너희 아비는 마귀이다.’ 은혜라 했어요. 생각 못했는데 나왔어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맞잖아요. 바리새인.

그래야 구약의 말라기와 세례요한 이후에 계시가 없는 걸 악마들이 짐승들이 역사적 해석법으로 다리를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너희 아비는 마귀다. 계시 없이 인간 쪽에서 만든 계시. 그걸 그들은 헤롯 성전 유지해서 헤롯 성전 중심의 역사적인 정당성을 부과 그게 모든 시중에 나온 구약신학입니다. 계시는 떨어졌지, 남은 자에 대해서 잇기는 해야 되겠지 그래서 남은 자 잇는 것이 유대인들을 정당화시키는 거예요. 대표적인 사람이 샌더스에요.

논문과 관계없잖아요. 성경하고 관계있잖아요. 성경하고 관계있어야지 주님이 함께 있는 자는. 논문하고 관계없어도 괜찮아요. 성경과 관계있으면.

마귀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쥘 때 이게 안 쥐어진다는 거예요. 안 쥐어지는 정도가 아니고 그쪽은 가해자가 돼야 되고, 진짜 하나님의 언약궤 되시는 분은 피해자가 돼야 되는 거예요. 피해자가 되고 죽게 되면 모세 언약에 의해서 언약궤답게 유지했던 게 뭐냐? 아침, 저녁 어린양의 피를 발랐잖아요. 어린양의 제사 드렸잖아요. 세상 죄를 진 어린양이 마귀들의 도움으로써, 가룟 유다의 도움으로써 협조 하에 실패하는 양상으로 성공을 해버렸어요. 말씀이.

그래서 목회 성공은 목회 실패를 통해서 성공하는 법입니다. [기독교 허상]이란 책에 나와 있어요. ‘목회자여, 실패의 길로 가거라.’ 그게 목회자 구원의 길입니다. 매일같이 실패에요. 매일같이 설교에 실패하고, 심방에 실패하고, 기도에 실패하고. 그런데 그게 모아 놓으면 유일하게 목회 성공이에요. 주님 가신 그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전쟁이라 하는 것은 언약대로 이뤄집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여호수아에 나오지요. 언약대로 이뤄진다는 것은 언약대로니까 축복과 그럼 축복만 완성하면 전쟁이 아니죠. 반드시 저주받아야 하는 게 드러나야 전쟁 중인 걸 알고 있겠지요. 그럼 어떻게 하면 저주를 받을 수 있습니까? 쉽게 하면 목사가 교인들에게 어떻게 설교하면 교인들이 저주를 받겠습니까? 이 말 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교인들이 어떻게 하면 저주받겠습니까? 복음 전하면 되잖아요. 새 언약 전하면 되잖아요.

새 언약을 전하면 누가 생명책에 이름 써 있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복음 전하면 애벌레처럼 우글거리잖아요. 거짓말 아니죠.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언약과 축복이 나타난다 말이죠. 결국 목사가 설교한다는 말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말 섞으면 안 되고, 들을 귀 있는 사람만 들을 수 있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말만 골라서 해요. 그러니 그 결과는 목회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죠. 목회 실패가 이런 식으로 정당화되는 겁니다. 농땡이 부린 건 생각 안 하고 공부하는 건 생각 안 하고 이런 식으로 정당화하면 곤란합니다만.

전쟁입니다. 이게 단순히 목사 밥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고 전쟁에 관한 문제에요. 전쟁에서는 복음을 전한다. 복음을 전할 때 조건이 있어요. 아무리 좋은 소리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괭가리기 때문에 ‘너 혼나봐라’라든지 ‘너 무식한 것 폭로하겠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죠. 다만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분명히 이 가운데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 있다는 의식해서 교인들 열 명이면 열 명 중에서 분명히 구원받을 사람 있을 것이다. 다 그렇다면 고맙고, 하지만 다 아니라도 상관없고. 우리는 수제비에서 나온 사명자니까 하나의 쓰레기니까 쓰레기로 사용되면 되니까.

그러면 결국 전쟁은 저주받을 자와 축복받을 자가 나와야 되잖아요. 성경은 누구 입장입니까? 축복받은 이스라엘 입장으로 했기 때문에 성경이야기가 세상 역사책에는 안 나타나는 거예요. 예수님 이야기가 세상 역사책 어디에 나옵니까? 안 나와요. 뒤에 나온다는 그것도 조작할 수 있다고 따지면 끝나는 거예요.

왜 안 나옵니까? 역사가 누구 위주에요? 예수 없어도 행복하고 하나님 몰라도 즐겁기 짝이 없는 그 사람들 입장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쓰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가 승리한 게 아니고 ‘조그만 나라가 까불대다 한 번 이긴 것 가지고’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래서 고고학적이나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존재, 예수님 존재 별 볼 일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유럽에서는 왜 기독교냐? 그들은 복음이 아니고 힘의 제국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쟈크 엘룰이 쓴 [뒤틀려진 기독교]는 뭐냐 하면, 힘 빼는 게 복음인데 복음으로 힘을 모으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해서 제국을 이루어서 그 짐승의 힘이 진짜 복음만 외치는 자를 역사 속에서 추방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사나 모든 역사에서는 주로 힘 있는 자죠. 캘빈이나 루터가 힘이 없다면 아무 의미 없죠. 지금도 예수 믿는 사람 있더라도 큰 교회 당회장 안 되면 국민일보에 안 나옵니다. 아무 힘이 없어요.

그래서 힘을 모으려고 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힘을 빼려고, 목사가 힘을 빼면 뭐만 남아요? 목사 안에 복음만 남지요. 힘이 있으면 더 힘을 축적을 시도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힘을 뺐으니까 심령이 가난하니까 더 힘을 모으려고 축적하지 않겠지요. 그러면 설교가 힘을 겨냥한 설교가 안 나오고 복음 그대로만 나오겠죠.

만약에 힘을 의도한다면 헌금 많이 낸 사람 은혜 받으라면 기분 좋아요. 그 다음에 분명히 몫 돈 낼 테니까. 그리고 식구가 많은 그런 집안 은혜 받으면 그 다음에 처제하고 동서들 몰고 올 거니까 도움 된다니까. 자꾸 설교하면서 힘을 의식해버리면 그 설교에 대해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의 반응으로 설교를 잘했느니, 못했느니 측정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힘이 결국 살고자 하는 힘으로 옮기겠죠. 스데반 집사와 정반대 길, 노선이 되는 겁니다.

힘을 빼버리면 교인들이 보이는 게 아니고 뭐가 크게 보이느냐 하면, 힘을 뺐으니까 복음이 보이잖아요. 복음이 십자가죠. 그러면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면 교인들이 보이는 게 아니고 저 뒷자리에 십자가에 피 흘리고 있는 예수님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가 설교하면서 무슨 고백하겠습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이 같은 죄인이 어찌 감히 천사도 흠모하는 주님의 십자가 피를 제가 교회라는 이름의 모임을 주선해서 십자가 복음을 아직도 생명이 있어서 목숨이 붙어서 전할 수 있으니 감격스럽지요. 내일을 살지, 안 살지 모르잖아요. 다음 주 살지, 안 살지 모르잖아요. 얼마나 감격스러워요.

‘주여 또 내 설교가 주님의 말씀을 훼방했군요. 하지만 저의 죄를 묻지 마시고 이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주의 십자가 은혜가 아무것도 모르는 성도에게 은혜가 임하여 그냥 능력으로 임하게 하옵소서. 마치 아무것도 모으는 나에게 주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은혜를 주셨듯이 이들도 나와 같이 은혜를 주셔서 무지에서 벗어나 들을 귀를 열게 하시고 눈을 뜨게 하옵소서.’ 그런 마음으로 설교를 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의 전쟁입니다.

그 다음에 어디를 보느냐 하면, 신명기 27장에 보면, 이런 건 교재에 안 나온 이야기를 제가 보충하고 있는 겁니다. 신명기 27장에 보면, 여러분 잘 알다시피 에발산과 그리심 산이죠. 거기 뭐라고 돼있냐 하면, 네가 요단강 건너가게 되면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을 만나게 되죠. 그러고 난 뒤에 11절에 보면, 요단강 건넌 후에 열두 지파를 여섯 지파씩 나누어서 한쪽은 축복하고 한쪽은 저주를 선포하라 했지요.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이 도대체 구원받았다는 의미는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언약을 선포하고 그걸 증거하는 그런 사명만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적 전쟁을 감당하는 겁니다.

민수기 2장 2절을 누가 읽어주세요.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그 기와 그 종족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치라” 그 다음 3절에 “동방 해 돋는 편에 질 칠 자는 그 군대대로 유다의 진 기에 속한 자라” 그렇게 돼있죠.

지금 이스라엘 자체가 군대지요. 이 군대는 하나의 연극이라. 그림자죠. 그 원형은 어디 있습니까? 하늘나라에 있죠. 하늘나라는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옵니다. 열두 성곽이 나오고 열두 사도 나오고 각각 있죠. 여기에 민수기 2장에 보면, 동쪽, 북쪽, 서쪽, 남쪽인데 이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언약궤가 들어있고, 민수기 10장에 보면 언약궤가 진격하면 우르르, 언약궤가 멈추면 적들이 잘못됐다고 굴복해 들어옵니다. 희한한 언약궤에요.

언약궤를 열두 지파가 빙 둘러싸는 겁니다. 유다지파, 잇사갈 지파, 스불론 지파, 르우벤 지파. 시므온 지파, 갓 지파. 북쪽에는 단 지파, 아셀 지파, 납달리 지파,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 베냐민 지파. 민수기 2장에 보면 둘러 서있다 이 말이에요.

전쟁을 하는데 칼 들고 총 들고 하면 되지 왜 이렇게 지파별로 분류를 해서 전쟁을 하는 이유가 뭐냐? 이걸 모르면 여호와의 전쟁이 어떻게 되는가를 몰라요. 만약에 이걸 모르고 여호와 전쟁을 모르게 되면 오늘날 교회에서 복음을 왜 전해야 되는지 모르게 돼요. 왜냐하면 지금은 새 언약으로 전쟁하기 때문에.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 책에 보면 여기에 대해서 완전히 백지입니다. 누가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야곱의 아내가 몇 명이죠? 두 명이죠. 레아가 있고 라헬이 있는데 사실은 레아는 덤입니다. 마트에서 기획 상품 할 때 덤으로 껴주는. 진짜는 라헬을 얻기 위해서 덤으로 얻는 것이 레아입니다. 레아의 자식이 훨씬 많아요. 제일 먼저 르우벤 지파, 하늘이 기도 들었다 시므온 지파, 연합했다 레위 지파, 하나님 찬양하라 유다 지파. 이걸 보고 화가 나서 라헬이 자기 여종 빌하로 내 억울함을 풀었다 해서 단 지파. 그 다음에 내가 언니하고 경쟁해서 이겼다 납달리. 그걸 보고 레아가 웃기고 있네. 경쟁해서 이겼다고? 실바란 자기 종에게 자식을 낳았어요. 하나님이 복 되게 했다. 기분 좋다 해서 아셀 지파. 그 다음에 휴전 상태, 사실은 라헬에게 낳을 수 있었는데 합환채가 부러워서 달라 해서 주고 난 뒤에 레아에게 나온 자식이 값을 치뤘다 잇사갈. 이제는 내 남편이 나와 함께 거하리라 스불론.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라헬에게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해서 요셉, 그 다음에 하나님의 아들 오른손의 베냐민.

전쟁이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결국은 전쟁이 야곱의 가족에서 일어났죠. 이 전쟁은 육과 영의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태가 왜 중요하냐 하면, 변환기로 합니까? 직류를 교류가 바꾸는 걸 뭡니까? 트랜스. 육으로 왔던 인간이 도대체 어떤 작업을 거쳐서 영적 인간이 되느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육으로 난 인간이 트랜스를 거쳐서 영의 인간으로 변환시킬 때 여기서 그냥 곱게 변환시키는 법이 없고 반드시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전쟁은 육과 영의 전쟁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 레아나 라헬이나 빌하나 실바나 야곱이나 모조리 다 육이라는 겁니다. 다 육이니까 육에서 어떻게 영으로 바뀌느냐? 육 자체 내에서 모순과 갈등이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김영한 씨 이야기하는 개혁주의신학은 역사적 해석과 문법적 해석이 개혁주의의 모토라는 겁니다. 저는 그걸 밑바탕을 철학적 해석으로 봤지요. 철학적 해석을 해야 되는 이유가 뭐냐? 철학적 해석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바로 사울이 예수님이 만나고 바울이 됐지요. 사울이 하나님 믿는 사람 아닙니까. 자기 딴에. 여호와 믿었던 그 사울이 역사적-문법적으로 완벽했죠.

그런데 역사적-문법적 속에 나는 어떤 존재냐 하는 자기 철학적 문제가 감춰져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날 때 역사적-문법적으로 따졌습니까? ‘사울아. 네가 문법적으로 지금 맞나? 네가 역사적으로 선배들의 학문을 제대로 습득했나?’ 이것 물었습니까?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했다.’

그러면 역사적-문법적 해석이 예수님을 도리어 핍박하는 신학이 되지요. 이게 개혁주의신학 아닙니까. 개혁주의신학이 복음을 반대하죠. 그러니까 저희 아비는 마귀죠. 이걸 제가 집어넣어서 화 낼만 하죠. 늘 옵니까? 언제 만나겠다고.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잖아요. 역사적-문법적 해석은 사울이 가졌던 철학적 해석을 가진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철학적 해석이 핍박 관계죠.

그런데 육에서 어떻게 영으로 바뀌는가 보세요. 예수님이 하늘에 계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됐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유일하게 육에서 영이 되는 것은 우리가 접근하는 찾아가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찾아올 때 어떤 모습으로? 우리보다 더 지질이 못난 구성, 진짜 우리가 무시할 만한 우리가 괄시할 만한 육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래서 복음 전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무시할 만하고, 복음 전하는 목사는 노회나 시찰회에서 비웃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울 볼 때 마태복음 말이 이해되죠. 너희를 보내는 것은 네가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보냈고, 너의 말을 듣는 것은 너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너를 보내신 나의 말을 듣는 것이다.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은 결코 너희를 미워하는 게 아니다. 세상에 보이지 않는 악마가 너희를 빌미로 해서 나를 미워함이라. 이후로 요한복음 뒷부분, 마태복음 다 이해가 되는 거예요.

너희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은 곧 나에게 대접하는 것이다. ‘주여, 주여. 제가 언제 주님께서 목말라 할 때 물을 줬으면 언제 돌아보았습니까?’ 이 소자한테 해준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지옥 간 사람이, ‘언제 주님을 학대하고 괄시했습니까?’ 이 사람한테 괄시한 것이 곧 나한테 괄시했기 때문에 지옥 간다. 모든 마태복음 25장 말씀이 이해된다고. 이렇게 되려면 역사적-문법적 해석으로 되지 않아요. 안 나온다고.

포도원 비유에서 아침 열 시에 온 사람이 누굴 괄시합니까? 마지막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을 괄시한 거예요.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이 착한 일 했습니까? 아니에요. 하나의 사명자에요. ‘나는 미안합니다만 거저 천당 가게 됐습니다. 이게 웬 떡이고?’ 그 말했다고. 받은 게 있기 때문에 열심히 행하는 사람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미움 받는 사람, 그것이 바로 복음을 안 사람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철학적 해석과 충돌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거든요. 문법적-역사적 해석에서 안 나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0장에 보면 모든 철학을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꿇어앉히고. 빌립보서 같은 경우에는 그리스도 앞에서 모든 것이 배설물 돼요.

그러면 철학공부하지 말까요? 옆에 있는 교수가 뭐라 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신학공부, 구약 뭐 때문에 하느냐 하지요. 제가 뭐라 했습니까? 가치 없다 했잖아요. 죄를 다 밝혀내는 가치,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어요. 공부를 해줘야 사울이 남의 이야기에요. 내 속에 지금 내 안에 있는 애벌레 자아에요. 우린 이런 식으로 해서 교인들 끌어 모으는 힘을 축적하는 시도로서 방법으로 사용한다고요.

예수님과 만남에서 역사적-문법적이 바로 철학적 만남에서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져야 돼요.

그렇다면 야곱 내에서 누가 핍박 받습니까? ①레아, ②실바, ③라헬, ④빌하. 몇 번입니까? 라헬이잖아요. 마지막 아이 낳으면서 죽잖아요. 그래서 라헬의 자식들이 베들레헴에서 죽잖아요. 야곱의 진짜 본처는 죽은 자에요. 일종의 구멍을 내는 거예요.

쉽게 합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소위 육적인 본성을 드러내신다. 그렇게 해서 육적인 본성에 의해서 누가 학대 받는가를 보여주신다. 그것이 야곱에서는 라헬이었다. 그리고 열두 아들들 가운데 누가 죽지요? 요셉이잖아요. 죽은 자가 소위 살았다고 여기는 자를 살려내잖아요. 요셉을 통해서 야곱 언약을 다 이루시는 겁니다.

그러면 과거, 현재, 미래를 이루는 우리 역사 속에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죽은 자의 이름으로 우리 역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나의 역사와 내 역사 속에 들어오신 십자가 죽기까지 죽으신 주님과의 만남이 우리의 설교현장이나 예배현장이나 항상 주의 죽으심을 증거해야 돼요.

‘장로님, 집사님 훌륭하십니까? 복 많이 받았습니까? 그래서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에게 죽었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발각하고 반발하죠. ‘나 같이 착해서 복 받았는데 날 왜 죽여? 난 더 살아야 돼.’ 진짜 성도 같으면 반대죠. 괜히 살았어, 괜히 살았어. 뿅. 십자가 증거죠.

야곱 언약에서 이러한 구조가 계속 가면서 라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요셉과 베냐민 이들이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이게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요셉이 애굽에 팔려갈 때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요셉이 국무총리 할 때 이미 힘을 얻었지요. 이 힘이 또 부셔져야 되겠지요. 부tu지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새로운 지파가 레위 지파입니다. 하지만 레위 지파는 뒤에 나오는 유다 지파를 위한 그림자로서 먼저 앞서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이미 야곱은 익히 알고 있어서 두 개의 축을 이룹니다. 하나는 유다와 요셉과, 요셉과 유다의 새로운 축으로서 이것이 성립되게 돼있습니다. 그게 모세의 마지막에 나오는 열두 지파의 축복과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축복을 비교해보면 점차 분위기가 요셉 둘로 규합되면서 레위 지파는 양쪽을 보여주는 들어왔다가 빠지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에스겔 마지막 48장에 보면, 성읍은 열두 개의 문으로 돼있는데, 북쪽과 남쪽은 정실 소생으로 돼있어요.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열두 지파가 굉장히 복잡한데 아까 대략적인 이야기했고, 여기서 뭘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레아 노선이냐 아니면 라헬 노선이야? 라헬 노선에 비중을 두고 있고. 그 다음에 정실부인이냐, 종 출신이냐를 나누어서 이 네 가지로 구성요소로 해서 열두 지파를 조정해 나가면서 하나님 전쟁의 성격들을 이끌고 나가는 겁니다.

구약의 핵은 언약이죠. 언약을 중심으로 전쟁이 일어났지요. 정리해봅시다.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반드시 두 가지 결과를 낳아야지요. 축복이고 한쪽은 저주해야 되죠. 축복될 자와 저주될 자가 서로 싸웠다는 경로가 있어요. 싸웠기 때문에 축복과 저주가 나온다 이 말이죠. 저주와 축복은 앞당겨보면 둘 다 우리 안에 들어있어요. 이스라엘 속에 들어있고. 전쟁을 통해서 축복이 되는데 이 축복이라 하는 것은 항상 앞에 소급해보면 어떤 모습이냐 하면, 희생자와 피해자의 모습으로 섞여서 나온다 이 말이에요.

누가 피해자고 누가 희생자 당하느냐 하는 것은 항상 정실이 아닌 종 쪽에서 피해를 주고, 진짜 아들들은 핍박받는 형식이 된다 이 말이죠. 이게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이 한쪽은 사라는 본처고 하갈은 종이죠. 종의 출신은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

결국 육에서 영이 된다는 말은 사도 바울 같으면 뭐가 됩니까? 종이 되었다가 아들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에 나오죠. 너희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아들의 영을 받았다. 종이라 하는 것은 율법에 싸여 있고, 십자가 이후에 아들은 아들의 영을 받아야 돼요. 다같이 율법에 속했는데 아들의 영, 양자의 영을 받아야 아들이 되는 겁니다. 결국 구약 전체는 하늘에 있는 진짜 본모습을 보여주는 밑에 있는 하나의 연극세트에 해당된다 이 말이죠.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늘에서는 아들이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냐?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대하는 피조물 아들은 아들이 아니고 그냥 인간이고 그 아들의 형상을 닮을 때만 비로소 인간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저주의 종이 되었고, 어느 누구도 저주의 종에서 법을 지켜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생명나무는 종한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되는 아들 되려면 아들의 영을 받아야지 종의 영을 받으면 안 돼요. 종의 영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저주 아래 있고 그 사람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선악과 양심의 지침을 받기 때문에 선과 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선과 악이 없이 하려면,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자비를 베풀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그런 하나님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싸움은 뭐냐? 은혜 베풀 하나님과 그리고 밑에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한쪽은 여자의 후손이고 한쪽은 뱀의 후손의 싸움이 벌어지는데 은혜 줄 자에게 은혜주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으로 분리되어서 지상의 언약궤 위에 임하는 거예요. 임할 때 동행하는 것은 이미 언약이 깨어진 언약을 깨뜨린 죄인과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자비 줄 자에게 자비를 주고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는데 문제는 악마가 만만치 않거든요.

악마의 하수인들이 인간이 아닙니까. 인간이 자기 행함으로 축복을 받으려고 하더란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행함으로 나선 자에게 공짜로 구원한다는 걸 주기 위해서 여기서 행함이냐, 은혜냐 아니면 인간의 힘이냐의 싸움을 벌어지게 하는 겁니다. 이런 싸움은 이스라엘 내부의 싸움과 병행해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제가 침멀리 보면서 한 가지 침멀리가 잘 지적한 게 있어서 그것을 소개하고 마치고자 합니다. 여기에 78페이지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사사기 5장 23절에 보면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메로스를 저주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 그들이 와서 야웨를 돕지 않았다.” 이 대목입니다.

여러분이 잘 이해되었는지 물어볼게요. 여러분 어떤 때 저주받습니까? 왜 저주받습니까? 전봇대 위에 아바타 포스터가 안 붙어있으면 저주받는 거예요. 왜? 전봇대 자체가 시커먼 저주니까. 중립지대에서 축복, 저주하는 게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저주받을 자인데 여기에 아바타 포스터가 붙어버리면 복 받잖아요. 그런데 메로스 사람은 여호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저주받았다.

이 침멀리가 그 대목은 잘 지적했는데 왜 그런지 본인이 설명을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뒤에 보면 에스겔에 보면 어렴풋이 이야기해놨어요. ‘승리는 어디까지나 야웨의 선물이다.’ 은혜가 선물되기 위해서 침멀리는 이사야 이야기를 거론하는데 이사야에 보면,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그들은 뭘 의지했습니까? 애굽을 의지했고, 말을 의지했고, 무기를 의지했죠. 이것은 거저 준다는 은혜의 선물을 전쟁을 통해서 모독하죠.

그래서 이렇게 봅시다. 이야기 계속 해봐야. 지금 전쟁 중인데 전쟁을 훼방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우리 자신들이 주님 전쟁을 훼방하고 있죠. 어떻게 훼방합니까? ‘하나님. 뭔가 해야 일이 더 잘 풀립니다.’라는 식으로 자꾸 나의 행함을 거기다 삽입시키려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한테 지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손을 자꾸 펼치죠. 펼친다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내 식대로 해서 일이 안 되게 꼬이게 하는 거예요. 목회가 안 되도록 하는 거예요.

목회가 안 될 때 우리는 내가 목회를 소유할 생각 할 게 아니라 주께서 아예 처음부터 나를 목회하신다. 주께서 나를 가지고 주님이 목회하신다는 것을 그 순간만큼은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지금도 주께서는 목회를 멈추지 않았는데 우리는 목회에 내가 게으르기 때문에 내가 목회 안 하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한 내가 저주받은 사고방식을 아직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지금 부활하셨는데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다고 여겼습니다. 주께서 열심히 일하는데 주님은 놀고 우리만 열심히 일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훼방 죄를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주님의 일을 방해하지 않고 도리어 붙이시는 전쟁으로써 복음만을 그대로 은혜만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항상 낮아지고 비우시는 힘을 쏟아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00309b 부산강의.hwp (57.0K), Down: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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